Amazing Grace


 군의 겨울은 추웠다. 나다니엘은 챙이 짧은 군모를 눌러쓰고 머플러를 여몄다. 희끄무레한 안개 속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날은 흐렸고 아침 빛 대신 구름이 푸르게 젖은 채로 하늘을 가렸다. 비행을 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쇠로 만든 무거운 기체들이 활주로 위에 거병처럼 서있었다. 나다니엘은 가죽 장갑 안에서 추위에 서서히 얼어오는 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일벌처럼 일해야 할 때였다.

 거수경례를 한 군인들이 차례로 거병 위에 올라탔다. 기체는 육중했고 흰 안개에 젖은 활주로를 무섭게 내달리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마지막 비행을 하기에는 최악의 날씨였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비행이 스무살의 꿈처럼 생겨먹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기체 위에 올라타는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였고 그들은 다섯 살 때부터 애국심보다 먼저 자유와 권리와 책임을 배웠다. 탑건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열두살의 여름에 비행기를 타고 써머캠프에 다녀왔고, 개중의 몇몇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들, 모험심이 충만했던 소년들과 견장에 눈독들인 소녀들은 열아홉살이 되어 커데트 에어리어에 지원했다. 엄격한 체격심사와 성적과 훈련을 갖춘 뒤에 드디어 거병 위에 올라타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생도들은 그들이 탄 기체가 자유와 가장 동떨어져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들이 훈련용으로 탔던 전투기에서는 늘 모래냄새가 났다. 이라크의 자유와, 자유의 나라 미국을 위하여. 많은 군인들이 부상과 내상을 겪으며 고국으로 돌아왔고 사막의 모래가 마치 진흙처럼 그들의 몸에 거칠게 달라붙어있었다. 상처 입은 전투기들은 몇몇의 상처 입은 군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기체에서 떨어지는 모래에서는 한 번도 군인인적 없었던 민간인의 피 냄새와 고철의 냄새, 화약의 냄새와 탁한 바람 냄새가 났다. 한 번도 자유와 가까웠던 적 없는 냄새들이었다.
 나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몇몇의 생도들이 학교에서 떨어져 나가는 과정을 알았다. 그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의 뒤에 숨어있는 수만가지의 자유의 뜻에 대해 배우고는 곧 커데트 에어리어를 떠났다. 천여명의 커데트 에어리어 졸업생 중에 마지막 비행을 맞는 파일럿의 숫자는 적었다. 그들은 엄격한 조건아래 선별되어 엄격한 훈련을 받았고 살아돌아오는 대신 전투기와 함께 죽는 명예를 익혔다. 기체의 무게와 무게만큼 값비싼 명예는 고작 스물두세살의 청년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장에 대한 환상과, 자유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스물두세살의 호기로움으로 두려움을 대신해 자리를 메웠다. 남은 사람들만이 활주로 주변을 서성거리다 비행기에서 내려 군병원으로 들어가는 수십명의 부상자들과 마주쳤다. 붕대는 모래빛으로 빛이 바래있었고 그들의 군복은 사막의 색을 닮아있었다.
 흐린 하늘 속에서 관제탑의 붉은 등이 서서히 깜박거렸다. 마지막 비행은 미루어지지도 취소되지도 않았다. 전장은 날씨와 날짜를 고르지 않았다. 그들의 기체에서는 모래냄새가 났고 전투기의 바퀴가 굉음을 내며 시멘트 위로 새 홈을 패어놓으면서 천천히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서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직감을 대신해 계기판만을 가늠하는 이성뿐이었다. 미숙한 파일럿들은 하늘 위에서 그들의 기체에 장착된 자유의 의미까지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비행은 아주 복잡하고 고된 작업이었고 그들의 모든 이성을 숫자와 계기판들에 쏟아 붓도록 하는 것은 계획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군의 겨울은 추웠다. 나다니엘은 활주로를 달리면서 그의 전투기 창에 약간의 서리가 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코드네임 허니비 이륙합니다.”

 너희는 일벌처럼 살아야해. 아무 생각도 하지마. 

 시야는 흐렸고 빛은 비치지 않았다. 상공 만피트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찬가지 였다. 계기판 안에서 그들은 빨간 점으로 서로를 확인했지만 그 뿐이었다. 통신기는 오래도록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가 짧은 노이즈만 내뱉었다. 공기에서 습한 냄새가 났다. 안개 낀 하늘의 냄새와 햇빛이 비치지 않은 구름에서 나는 비린 물의 냄새. 미숙하고 어린 파일럿들의 어깨가 긴장과 추위로 굳었다. 

 “가렛 생도 비행고도를 낮추기 바란다.”

 통신기는 더 고요해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열대의 육중한 전투기들이 우유 속에 잠긴 과자처럼 구름 속에 젖어 고요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레이더망에 잡히는 빨간 점에 지나지 않았으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나다니엘은 통신기에서 흘러나오는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구름 때문에 고도를 더 낮출 수 없습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삼천피트 위로 상승합니다. 허가해주십시오.”
 “오천피트 이하로 하강 명령한다.”
 “죽습니다.”
 “죽어도 좋다.”
 “고도 높이겠습니다. 코드네임 허니비 전원 삼천피트 상승합니다.”
 “나다니엘 작전교육관 생도.”

 약간의 노이즈가 관제탑에서 흘러나왔다. 나다니엘 작전교육관 생도. 남자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명령 불이행합니다. 허니비 전원 상승비행합니다.”

  나다니엘 생도!




 “오랜만이네 나단.”
 “졸업했어요.”
 “이제 군인이야?”
 “아마도요.”

 그녀는 하늘색 포장지 안에 색색의 컵케이크를 넣고 종이팩을 닫았다. 남색 교복을 입고 나단에게는 지나치게 작은 의자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흰색 테이블 위에 팩을 올려두며 맞은편에 앉았다. 가게 안은 단 아이싱의 냄새와 아이스크림의 냄새, 와플의 냄새로 가득했다. 평일 오후면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우르르 몰려들어와 코튼캔디를 연상케 하는 하늘색과 레몬색, 흰색으로 가득찬 가게 안에 앉아 컵케이크를 먹었다. 의자에 앉으면 아이들의 다리는 바닥에 닿지 않은 채로 달랑거렸다. 빨간 타탄체크무늬의 치마와 분홍색 머리 방울, 하늘색 캡과 보라색 운동화. 레이스가 달린 양말과 끄트머리 올이 다 풀린 청바지. 나다니엘은 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온 어머니들이 자동차의 키를 짤랑거리며 투정부리는 아이의 손을 흔들다가, ‘가져갈거에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쁘게 아이를 자동차에 태우고 뒷좌석에 컵케이크 상자를 놓은채로 월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중산층의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커스터드 크림과 피쉬 칩스. 감자튀김과 스테이크. 베이컨과 콩통조림과 으깬 감자 같은 것들. 하이스쿨의 여름방학이면 나다니엘은 어머니와 면식이 있는 그녀의 가게일을 돕고 약간의 푼돈을 받았다. 

 “아직도 신경쓰이니 나단?”

 여자의 이마에는 주름이 패여 있었다. 나다니엘은 그 가게에 들러 발을 동동거리며 먹는 아이 중의 하나였을 때보다 여자는 훨씬 늙어있었다. 나다니엘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녀의 가게에 들러 남자아이답게 민트쿠키몬스터 컵케이크를 먹었다. 그 다음에는 니트로 짜인 겨울 모자를 귀까지 덮어쓰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여섯 개의 컵케이크를 사갔고, 그 다음에는 여름방학동안 레모네이드를 만들고 계산을 돕다가, 마침내는 겨우 한 달에 한번 마을로 돌아와 그녀의 가게에서 집으로 가져갈 컵케이크를 샀다. 나다니엘이 자라는 동안 여자는 프랑스인 남편과 이혼을 했고 근근한 위자료를 받으며 나다니엘보다 일곱 살은 어린 두 아이를 키웠다. 여자는 나다니엘의 재색 눈을 좋아했다. 대개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은 나다니엘에게서 한 눈에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여자는 한참이나 나다니엘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아이를 쓰다듬듯 나다니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다니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짧은 갈색머리 사이로 여자의 주름진 손가락 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커데트 에어리어에 가고싶었는지 생각해봐 나단”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열아홉살이었어요. 적어도 군이 뭘 하는 곳인지 정확히 알진 못했고요. 난 그냥 하이디의 가게나 엄마가 월마트에 다녀오는 길이 안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보이스카웃 같은건 줄 알았어요 하이디. 난 지금은 한 번에 만명을 죽일 수 있는 전투기를 몰아요.”
 “나단. 적어도 나는 네가 그 학교를 중간에 나오지 않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 넌 열심히 노력했고, 우리 마을의 자랑이야. 알리사의 아들이라고 하면 누구나 칭찬할걸. 겨우 스무살에 낳은 아들이 이렇게 잘 자라준걸 알리사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아니 나단?”
 “이번에 졸업한 파일럿 중에는 벌써 전쟁에 나가고 싶어서 좀이 쑤셔하는 애들도 있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의무 복무 기간이 남았지만 내가 군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너희는 일벌처럼 살아야해. 아무 생각도 하지마. 무슨 생각이든 머릿속에 전쟁에 대한 환상 대신 들어차는 순간 너희는 전투기를 바다에 박아버리고 싶을걸! 멍청한 일벌처럼 살아 제군들! 너희는 신문을 읽고 뉴스를 봐야해! 네 폭격기가 어느 마을의 컵케이크 가게를 부숴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죽고 싶어 질걸!

 “나단. 나랑 알리사는 네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알아. 적어도 넌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슴 따듯한 사람 중에 하나야.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고마워요 하이디”

 나다니엘은 조금 더 웃었다. 따듯한 공기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뺨이 밤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얼어붙었다. 하이디는 가게의 불을 끄고 쇼윈도를 정리했다. 그녀는 겨울에는 레모네이드를 팔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보다는 나다니엘이 만드는 레모네이드가 손님에게 더 인기 있었던 탓이었다. 나다니엘은 손에 여덟 개의 컵케이크가 든 하늘색 종이팩을 들고 거리를 나섰다. 위스콘신의 겨울은 추웠고, 밀워키 시내는 우유가 엎질러진 것처럼 눈으로 하얗게 들어찼다. 시내에서 떨어진 작은 마을 사람들은 그런 농담을 좋아했다.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낙농업대신 우유가공공장이나 치즈공장, 또는 그런 사무실로 일을 다녔다.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에 아들이 다니고, 아들이 다니던 학교에 손자가 다녔다. 두 블럭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들이었다. 그 마을에서 떠나는 몇 안되는 사람 들 중에는 나다니엘도 있었다. 나다니엘이 커데트 에어리어에 입학하게 된 날에는 모두가 모여서 크리스마스 같은 만찬을 먹었고 알리사는 들떠있었다. 
 나다니엘은 그 풍경들을 좋아했다. 결국에는 모두에게 다시 나누어 주어야 할 만큼 식탁 위로 쌓인 치즈선물이나 하이디가 가져오는 컵케이크, 알란부인의 플럼 푸딩, 타피오카와 칠면조. 사람들은 소만큼이나 순진했고 눈이 오는 계절에는 더더욱 그랬다. 발목까지 털로 덮인 부츠를 신고 눈 사이를 헤치며 걷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작고 찢어지는 목소리와 코튼캔디 색으로 가득한 컵케이크 가게의 모습, 도로를 메운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의 알록달록한 불빛이나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다가 마주쳐 인사하는 모습 같은 것들. 하늘 위에서 보면 그 마을의 풍경은 작은 레고처럼 보였다. 


 나다니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마을에 데리고 오고 싶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나다니엘은 이전에 한 번도 그녀와 사적으로 말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그의 상관이었고, 미공군의 우수한 파일럿이었다. 짙은 금발을 뒤에서 하나로 올려 묶고 비행모를 쓴 여자는 위스콘신의 차가운 겨울만큼 새파란 눈으로 기체를 확인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여자는 곧고 단련된 손으로 반듯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가렛이라고 부를 때면 나다니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펴면서 대답했다. 나다니엘은 그녀가 신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밀워키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여자는 충분히 어떤 상황에서도 이륙하는 전투기를 다룰 때처럼 정확하고 충직하게 해낼 것 같았다. 나다니엘은 여자가 부스스한 금발을 정돈하고 아이를 깨워 차에 태워 학교 가는 모습들을 상상했다. 오후면 아이를 차에 태워 데려오다가 하이디의 가게에서 컵케이크를 세 개쯤 사서 월마트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일주일에 한번쯤은 그 집으로 자신이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거실과 벽난로 위에는 가족사진이 놓여있고 티비 위에는 군에서 받아온 훈장들이 걸려있는 대개 그런 군인들의 집이었다. 아이는 아버지를 매일 보지 못하는 대신에 친구들에게 메달이나 뱃지를 자랑하고 이따금은 나다니엘이 비행기에 올라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다니엘은 그녀를 보면서 알리사가 꾸린 것처럼 아주 약간은 덜 풍족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떠올렸다. 그녀와 영화를 보고 쇼윈도를 구경하는 대신에 나다니엘은 종종 그런 상상들을 했다. 겨우 나눠본 말이라고는 고작 ‘네 중사님’ 같은 대답뿐인 여자를 보면서. 여자는 나다니엘을, 아니 그들을 보고 ‘헤이 허니비들’하고 말했다. 그들의 코드네임이었다.



 “나단, 병원가니?”

 나다니엘은 교복을 입고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밀워키에서의 잠깐의 휴가는 곧 끝이 났다. 이제 커데트 에어리어로 돌아가면 그는 이라크나, 알래스카, 하와이, 미군이 있는 어딘가로 허니비들과 헤어져 뿔뿔이 흩어질 차례였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거 가져가렴.”

 하이디는 하늘색 종이 팩을 건넸다. 안에는 색색들이 컵케이크가 들어있었다. 캐롤이 좋아하겠네요. 하이디는 말 없이 웃었고 나다니엘은 교복을 추스르고 밀워키를 나섰다. 알리사가 공항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몇몇 창문들 뒤에서 인기척이 보였다. 작은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마을을 떠난 젊은이 중에 하나였다. 비록 그의 집이 커데트 에어리어나 군에서 제공하는 아파트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나다니엘의 방과 앨범들이 알리사의 집에 고스란히 있더라도 그들은 일년의 대부분을 마을이 아닌 곳에서 보내는 젊은이를 신기하고 대견하게 여겼다. 잘 있어요 하이디. 

 “여자들은 작별할 때 선물이 필요한 법이니까.”


 병원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한 일은 그녀의 보기 좋은 금발을 짦은 단발로 잘라버리는 일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그것은 여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관리하기 귀찮은 부속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캐롤의 침대 옆에 컵케이크를 내려놓고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나다니엘이 그녀에게 경례하는 것을 싫어했다. 군에서도 그랬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을 싫어했다. 그녀를 동경했던 여러명의 여생도들이 병원을 찾았다가 괴팍하기 짝이 없는 홀대에 지쳐 두어번의 방문을 끝으로 다시는 그녀에게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테이블 앞에 조용히 앉아 그녀가 서투른 솜씨로 왼손으로 컵케이크를 먹는 것을 지켜봤다. 목과 무릎 위의 냅킨에 민트색, 분홍색 크림이 묻을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나다니엘의 눈치를 살피고 나다니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포크를 집어들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와, 군사령부와, 병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아래에 있던 훈련생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만큼이나 자존심이 센 여자였고 파일럿이 왜 오른 팔을 잃어야했는지에 대해 누구에게도 설명하고 싶지 않아했다.
 나다니엘은 그녀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의 눈치를 살필 때마다 침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보기 싫게 져버린 사람들 특유의 음습한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자존심과 자부심이 한번에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 만이 가질 수 있는 절망과 고작 몇 해 전에 불과한 과거에 대한 집착 같은 것. 나다니엘은 가끔 그가 가져가는 케이크나 과자 같은 것들을 먹다가 냅킨 위에 잔뜩 음식을 흘리고 나다니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캐롤과 영화를 보고 쇼윈도를 구경하는 상상을 했다. 캐롤이 나다니엘의 눈치를 살필 때마다 나다니엘은 새삼스럽게 그녀가 여자였음을, 스물세살의 남자 앞에서 흉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여자였음을 깨달았다. 수치심으로 부끄러워하는 캐롤을 보면서 나다니엘은 그녀가 어지럽게 흩어놓은 것을 모른척 했다. 

  너희는 일벌처럼 살아야해. 아무 생각도 하지마. 무슨 생각이든 머릿속에 전쟁에 대한 환상 대신 들어차는 순간 너희는 전투기를 바다에 박아버리고 싶을걸! 멍청한 일벌처럼 살아 제군들! 자유 같은 건 개나 주라고 해! 난 내 두 팔의 자유를 잃어버렸어 멍청이들아! 전투기로 이라크를 박살내기도 전에 팔이 박살났다고! 

 나다니엘은 캐롤이 소리치던 모습을 떠올렸다. 허니비들은 그녀의 독기어린 파란 눈을 보다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사년 동안의 훈련동안 그들이 몰고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다른 것임을 모르는 일벌들은 없었다. 그들의 절반은 의무 복무에 묶여, 그들의 절반은 이제 와 새로 해야 하는 일을 찾지 못해서 그들이 자란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철과 쇠와 자유로 된 둥지였다. 

 “캐롤. 저 이제 안와요. 작별인사 하려고 왔어요.”

 캐롤은 말없이 나다니엘을 바라봤다. 그들이 처음으로 그녀의 부상소식을 듣고 병원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사관생도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그들에게 했던 유일한 말은 아직 빨갛게 물이 든 붕대를 붙잡고 소리쳤던 것뿐이었다. 혼자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전쟁터에서 팔을 잃고 악에 받쳐 소리지르는 옛 상관의 말이라면 더욱 그랬다.

 “잘가 허니비”

 캐롤은 한참이나 더 나다니엘을 바라봤다. 초점이 풀리고 진통제에 익숙해진 눈을 바라보면서 나다니엘은 조용히 웃었다. 

 “잘 있어요. 캐롤"

  대개의 첫사랑은 시시하게 끝나는 법이었다. 비좁고 열악한 병실에서 후유증으로 고국에 돌아온 군인들이 뉴스나 드라마 따위를 틀어놓고 포커를 치거나 탁구를 했다. 몇몇의 간호사들이 나다니엘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그들은 나다니엘의 견장을 보고 그가 이제 드디어 졸업생이 되었음을 축하했다. 다리를 절고 팔을 다친 군인들은 이제 막 군인이 되는 미숙한 파일럿 앞에서 카드와 리모컨을 내려놓고 침묵을 지켰다. 이상한 엄숙 속에서 나다니엘은 구석에 놓아둔 캐리어와 외투를 들고 군병원을 나섰다. 
 
 사람이 죽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애송이!

 등 뒤에서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가 소리쳤다. 나다니엘은 택시를 잡아탔다. 대개의 첫사랑은 시시하게 끝나는 법이었다. 



 징예 위원회장은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서 주변을 돌아보던 나다니엘은 그제서야 테이블 위에 서류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다니엘 가렛 작전교육관 생도의 연방 특무부 특수 배치를 추천하고 징계 위원회를 소집 해제함. 책상에 걸터 앉아 복잡한 서류를 위에서 아래까지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남자는 나다니엘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가렛 네 단점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거야. 군은 생각이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 대신 특무부에서는 쓸만할 것 같더군.”
 
 나다니엘은 천천히 웃음기가 번지도록 웃었다. 색이 엷은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좌천 같은데요?”
 “특무부는 군보다 위야. 굳이 따지자면 승진에 가까울 것 같은데.”

 나다니엘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들고 조목조목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서류를 나다니엘의 손에 쥐어주며 웃었다. 갈색 머리가 제법 벗겨지기는 했으나 챙이 짧은 군모 아래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특무부에서는 명령 불이행하겠다고 대놓고 말하지 말게. 적어도 징계위원회보단 무서운게 열릴테니까.

 “농담하시는거죠?”
 “아니”

 잘가게 가렛. 특무부가 자네에게 맞았으면 좋겠네. 옆집 아저씨 같은 얼굴로 웃어넘긴 대령은 군모를 고쳐 쓰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날씨는 좋았다. 창 밖에서 비친 빛이 천천히 회의실에 스며들었다. 나다니엘은 책상에 걸터앉아 서류를 두 번 접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명령을 이행했다면 여기 남아있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령의 사무실에서 나다니엘은 대답했다. 군은 아직 미숙한 파일럿이 관제탑 사령부보다 얼마나 더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믿나?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은 인정하네. 작전교육관으로서 얼마나 잘해주었는지도 알고 있지만 확률적으로는 군이 선택한 쪽이 동료들이 죽을 확률이 높은 작전이었다는 것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불렀네. 
 

 군인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을 기껍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라고 배웠지만, 미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자유를 위한 일이거나 시민을 위한 일이 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군인이었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기꺼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총과 칼과 무기를 들고 맞섰지만 되도록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기를 바랐다. 커데트 에어리어의 호기로운 스물두어살들은 그들이 치러내는 것들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거기에 의미가 있기를 바랬다. 민간인의 비린 피냄새와 전투기에 묻어있는 모래냄새 같은 것들 속에서 적어도 정당화 시킬 수 없는 것들에 무언가를 지키기라도 하는 명분이 있기를 바랬다. 
 예를 들면 알리사가 마트에서 돌아가는 길이 안전하기를 바란다거나, 하이디의 컵케이크 가게와 가게에서 컵케이크를 먹는 아이들이 안전하기를 바란다거나, 잭이 가꾸어놓은 정원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무탈하다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아무도 바라지 않는 독단적인 자유보다는 마루에게서 시민들을 지키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납득할 수 있었다. 작전명 DOXA. 억견이라고 불러도 괜찮았다.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다니엘은 알았다. 살인이나 전쟁, 폭격 같은 것들. 필요한 것은 결국 명분이었다. 나라를 지킨다거나, 타국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부자연스럽고 고집센 명분만 아니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명분이 정직할수록 좋았다. 비록 억견이더라도 그 정도의 명분이면 싸울만한 이유가 되었다. 


mission01

'OperationDOXA' 카테고리의 다른 글

Never before  (0) 2012.02.19
The bed of sea  (0) 2012.02.03
Back  (0) 2012.01.27
Dinner table  (0) 2012.01.23
Origin  (0) 2012.01.23
by merone

The Nights of NewYork 01


01.
 루윈 이바노브 1970.10.10. 뉴욕 출생.
 신장 5.8피트. 마른 체격. 진한 밤색머리, 밤색 눈. 눈에 잘 띄지 않음. 평범한 인상. 양복 착용.

 콘실리에리. 뉴욕 외곽에 출몰. 
 조직의 경향이 루윈 이바노브의 출현과 함께 변화하였음. 지능적으로 변화. 경영면에서 두드러짐.
 조직이 점차 기업 적인 성향을 나타냄. 고학력 또는 고지능의 경제 관련 인물로 추정.
 검은 승용차. 적어도 중간 간부 이상의 인물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 간부의 정부라는 후문.  

 할렘 w136번가와 w148번가 사이에 픽업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임. 


02.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날은 비가 왔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비가 한차례 오고 나면 날이 퍽이나 추워질 것 같아 한동안 내려 마실 커피와 상하지 않는 음식을 마트에서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 그를 안아 올리면서 옷에 피가 묻었던 것이 선명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보리색이나 흰색 터틀넥 셔츠에 늘 입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차에 타고 있었지만 그를 차 안에 앉힌 뒤에는 운동화가 빗물에 젖어 질퍽질퍽 거렸고 그 후로 몇 일간은 발이 물렁해져 워커를 신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 비오는 거리에서 그를 픽업한 것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였다. 


03.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는 강하지 않았지만 부슬부슬 하루 종일 내린 비는 정비되지 않은 뒷골목들을 온통 진탕으로 만들어 놓았고 십년이 넘은 자동차는 도로를 달릴 때 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 듯 덜컹거렸다. 그 도로를 지나간 것은 순전히 그날 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일터에서 집까지 가는 데에는 늘 꽉 밀린 대로보다는 렌트 값이 싼 아파트 사이를 지나는 쪽이 빨랐는데 비가 오면 도시 외곽의 흙길은 모두 엉망이 되었다. 어설프게 아스팔트로 포장한 뒷골목을 달리던 낡은 차가 잠시 멈추어 섰다. 남자는 핸들에 몸을 기대고 오른쪽 차창 밖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내 좌석 밑에서 물에 축축하게 젖은 검은 우산을 꺼내어 들었다. 너무 낡아서 이제는 사는 사람이 없는, 거의 폐허에 가까운 건물 벽에 그는 기대어 앉아있었다. 기대어 있다기 보다는 거의 쓰러져 있었으나. 

 “이봐요. 괜찮아요?”

 여기저기 얻어맞은 듯 울긋불긋 푸르고 붉게 멍이 든 얼굴. 입술 옆은 터져서 피가 났고 왼쪽 눈은 뜨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로 부어올라있었다. 할렘에 가까운 지역인데다가 주변에 불장난이라도 할 만한 공터가 많은 지역이라 근방의 갱들이 자주 보이는 부근이었다. 그는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듯했을 갈색 수트와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갱에게 돈을 목적으로 시비라도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자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본다. 분명하게 백인에 속하는 피부색과 전체적으로 살집이 없는 몸. 키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거나 그 이상. 남자는 어깨와 뺨 사이에 검은 장우산을 끼우고 양 팔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안아들었다. 

 “이 앞에 바로 차가 있어요. 거기 까지만 걸어봐요.”
 “으...”

 그는 그제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얼굴만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걸을 때 마다 신음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부나 가슴에도 멍이 들어있거나 잘못하면 좀 더 심각한 내상이 있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낡은 검은 세단의 조수석 문을 열고 시트 위에 그를 앉혔다. 그는 거의 눕다시피 하는 모양새로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고, 남자는 검은 장우산을 접어 조수석 아래에 밀어 넣은 뒤에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의 젖은 코트와 얼굴의 빗물을 닦아 내고 차 안에 요란하게 울리고 있던 다니엘 포터 노래를 껐다. 차 안에는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낡은 쇳덩이가 비를 맞으며 내는 소리가 차 안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는 고열에 들뜬 느리게 뜬 숨을 몰아 쉬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파트로 향하는 동안, 오른쪽 귓가에서 낯선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파트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아주는 아니지만 조금 낡았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 차 기름값을 대면서도 그럭저럭 지낼 만큼의 렌트 값만을 받았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신에 몇 블록만 더 가면 종합병원이 있었고 방은 그 월세 치고는 약간 넓은 축에 속했다. 수압이 만족스럽지 못하긴 했지만 욕실도 따듯한 물 만큼은 잘 나왔음으로 남자는 직업을 얻은 뒤로는 줄곧 그 아파트에 살고있었다. 남자는 현관에 축축한 장우산을 던지고 그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이리 저리 몸을 가누지 못하고 좁은 아파트 입구에서 벽에 부딪힐 때 마다 그의 코트에 묻어있던 흙이 벽에 묻었고, 베이지색 코트 끝자락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이봐요, 왜 이렇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젖은 옷부터 벗어야 돼요. 당신 지금도 끔찍하게 열이 나고 있다고요.”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곤혹스러웠다. 남자는 젖은 몸으로 휘청거리는 그를 붙잡아 좁은 욕실로 밀어넣고 다 젖어서 못쓰게 된 가죽 구두를 벗겨 욕실 밖으로 던졌다. 물에 젖은 옷들은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남자는 그의 옷을 벗기는데 굉장히 노력했다. 코트는 손쉬웠으나 투버튼 양복 재킷과 아예 몸에 늘어붙은 것처럼 젖어버린 셔츠는 쉽지 않았다. 여자의 브래지어를 벗길 때나 신중할 법한 손이 아주 고심하면서 하나하나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그는 자꾸만 욕실의 차가운 타일벽에 부딪혔다. 갈비 뼈 아래에서 주먹 하나 크기만큼 내려온 옆구리와, 복무. 허벅지 바깥쪽에 보라색에 가까운 멍이 들어있었고 쓰러지면서 접질린 것인지 아니면 발목의 뼈를 밟혔는지 발목이 부어올라 있었다. 총체적으로 잘도 두들겨 놨네. 남자는 뜨거운 물을 양껏 틀어서 물에 흠뻑 옷을 적셔가며 그를 지탱했다. 일단은 차갑게 식은 몸을 덥히는게 중요했다. 보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몸은 마른 축에 속했다. 하얗게 질린 탓에 흰 몸이 더 희어보였다. 남자는 제대로 개어놓지 않은 빨래더미 가운데서 서둘러 큼지막한 바스 타올을 꺼내어 그의 몸의 물기를 닦았다. 그는 고열로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고,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옷을 벗겨져 샤워를 마치고 난 직후임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남자가 이끄는 대로 침실로 끌려갔다. 
 남자는 자신의 셔츠를 꺼내어 그에게 입히고 침대에 뉘였다. 베개를 목 뒤에 받치고, 목까지 푸근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칼 때문에 베개가 약간 젖었다. 머리는 손으로 털면 금방 마른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집에 드라이어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남자는 젖지 않은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문질렀다. 썩 괜찮을 만큼 물기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베개 위에 마른수건을 깔아주었다. 텅텅빈 주방의 찬장에서 겨우 오래된 감기약을 찾아낸 남자는, 그의 턱이 벌어지도록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그의 양 뺨을 힘주어 눌렀다. 입을 벌리라고 말해봐야 말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는 일단은 감기약을 억지로 그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그는 강제로 들어온 약물에 본능적으로 조금 컥컥거렸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수저로 물을 한 스푼 떠먹인 뒤에야 남자는 등을 곧게 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침대 밑의 공간에 넣어둔 구급상자를 꺼내어 남자는 알콜의 냄새를 맡는다. 그의 몸을 꽁꽁 뒤덮은 이불의 발치를 살짝 들어올려 부어오른 발목에 크림을 바르고 아프게 주무른 다음 붕대를 두바퀴 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발목을 치료한 다음에는 허벅다리와 상체였다. 멍이 든 부분마다 약을 발라주고 다시 이불을 덮었다. 잠결에도 아픈지 잔뜩 찡그린 얼굴에도 그렇게 해 주었다. 터진 입가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뒤에, 입 안쪽에는 면봉으로 약을 묻혀 터진 곳을 닦아내듯 조심스럽게 문질러 주었다. 길에서 다친 사람을 주은 것 치고는 상당히 호사스러운 친절이었다. 

 그가 의식을 차렸을 때는 작은 방 안으로 고소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남자의 집은 현관에서 두걸음만 걸으면 욕실이 있고, 그 앞으로 두 팔을 펼친 것 만한 주방과 아주 좁은 거실이, 그리고 거기에 작은 침실이 하나 딸려있는 구조였다. 그가 침대를 짚고 상체를 약간 세워 침대 헤드에 기댔을 때에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차 안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기억했지만 정확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낯선 남자의 등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걸으려고 했으나 그의 발목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이불을 약간 들추었을 때에서야 자신이 하의를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는 치킨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미국인의 감기 보양식이었다. 영혼을 위한 치킨수프처럼. 담백하고 따듯한 냄새가 났다. 냄새가 따듯하다는 것은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따듯한 냄새였다. 방 안의 창들은 모두 바깥보다 따듯한 방안의 온도 때문에 부옇게 흐려져 있었고, 제때 세탁은 했는지 의심스러운 회색 커튼이 축 쳐져 걸려있었다. 남자는 덩치 있는 어깨를 약간 들썩거리며 이따금 발로 바닥을 탁탁 쳤다.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에 맞추듯이. 그는 침대 맡에 놓인 나무 의자를 바라보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구닥다리 진부한 묘사에 그칠지도 모르겠으나, 남자는 색이 깊은 블론드에 보기 힘든 녹색 눈을 하고 있었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회색으로 변하는 짙은 색의 눈동자만큼은 그가 미국인이라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길가다가 열에 여섯은 마주칠 것 같은 건장한 체격이었고, 남자는 젖은 옷을 갈아입었는지 편안한 민무늬의 흰셔츠에 회색 저지를 입고 있었다. 팔과 손에는 자잘한 상처가 생겼다가 아문 자국들이 보였다. 손끝은 뭉툭했으나 게을러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남자에게서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치킨 수프와 물 한컵, 스푼을 올린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촌스러운 꽃무늬의 트레이. 남자는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가기라도 했던 것일까 생각되었을 만큼 트레이는 촌스러웠다. 갭에 가서 같은 사이즈의 같은 흰 티셔츠를 다섯장씩 살 것 같은 인상이었으나, 집안일에는 더더욱 무심해 보였다. 가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이상한 거 안넣었어요.” 

 수프와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는 그에게 남자는 웃음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웃으면 아이같은 얼굴이 되었다. 건장한 체격의 스물 후반대의 남자가 아이처럼 웃는 광경이 생소해서 그는 약간 미간을 지푸렸다. 여기까지 호의를 보이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남자가 자신을 부축했을 때 일단 자신은 주거지를 댈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든 상태가 아니었고, 옷이 젖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상처가 난 상태였던 점 같은 것들 때문에 남자는 그를 이 집으로 데려왔을 지도 몰랐다. 그 뒤는 아주 이상하지만 아주 간단했다. 성인 남자가 성인인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샤워 시켜 병을 간호하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의 관계였다는 것만이 이 이상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는 당장에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수저를 수프에 넣고 휘저은 뒤에 입 안에 머금었다. 썩 맛있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남자는 처음에 그를 지나칠 수도 있었고, 거기에 두고갈 수도, 근처의 응급실에 맡길 수도 있었다. 남자가 그를 해치려고 한다면 해칠 수 있는 여지는 이미 충분히 있었다. 그는 일단 당장에 취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가져온 치킨 수프를 반 정도 먹었다. 그가 수프를 마시는 동안 남자는 그의 열을 쟀다. 열은 위험한 수준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왜 도와줬어요.”

 그의 말투는 의문문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는 인사보다는 이유가 우선했다.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웃었다.

 “그 지역은 좀 위험하거든요. 출퇴근 길이라 잘 알죠. 게다가 당신 엄청나게 맞지 않았어요? 비에 젖어서 완전히 의식도 없었고요. 그런 사람을 모른 척 하고 지나가기엔 양심에 찔려서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다시 눕히고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덮었다. 그는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여기저기가 아픈 것 처럼 인상을 지푸렸고 남자는 촌스러운 트레이를 주방에 놓고 놀아와 의자에 앉았다.
 “다음부턴 그쪽에 그런 옷 입고 다니지 않는게 좋을걸요. 내 돈 훔쳐가라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안그랬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남자는 다시 한 번 그의 혀 아래에 온도계를 넣고 체온을 쟀다. 그가 체온계를 물고 있기 위해 입을 다문동안 남자는 뭐라고 떠들었다.

 “일단 응급처치는 했어요. 학부에서 간단한 의료학 비슷한 건 수료했거든요, 완전히 돌팔이는 아니니까 걱정마요. 그래도 일단 내상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까 검사는 받아 봐요. 쇄골은 부러진 것 같고 갈비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으니까.”
 “병원은 안돼요.”

 남자가 체온계를 혀 밑에서 빼내며 온도를 확인하는 동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 

 “돈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

 불법체류자에요? 아니면 수배중? 남자는 그를 향해서 짓궂게 말하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이제껏 몰랐으나 남자의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었다.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자 주근깨가 있는 뺨이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었다. 저런 표정으로 웃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 시킬 수 도 있겠다고 그는 안이하게도 잠깐 생각했다.

 “집에 돌봐줄 사람은 있어요? 쇄골은 캐스트도 안돼요.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어야 붙는 뼈에요.”

 그는 다시금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스탠드를 껐다. 방은 완전히 어두워 졌다. 남자의 아파트는 복도 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향해 나있었다. 오전동안 채광이 좋은 집은 아닌 것 같았으나 오후에 해가 지는 동안은 해가 들었고, 스탠드를 끄자 껌벅이는 가로등 불빛이 집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남자는 비가 왔으니 추울거라며 라디에이터를 켜면서 자신의 친절함에 대해 한 번 더 생색을 냈다. 착하긴 하지만 좀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세탁한지 오래된 것 같은 회색 커튼을 완전히 닫자 이제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발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렸다. 아마도 빛이 보이지 않아 벽을 짚으며 방을 걷고있어 발걸음 소리가 방의 모퉁이에서 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돼요. 잘자요.”


04.
 그는 천천히 길들여져 나갔다. 사나운 들고양이가 집고양이가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손을 뻗으면 안겨왔다. 뺨을 쓰다듬으면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린 고양이처럼 얌전히 숨을 죽였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은 그럴 때에 쓰는 말이다. 그때 알았다. 사랑스러워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는 농담조차도 당시의 나에게는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점차 나에게 길들여져 갔고, 나는 그의 이성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바라지 않았다. 들고양이 특유의 거만함은 충분히 사랑스러운 것이나 집고양이가 다시 들고양이가 되는 것을 바라는 주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사하면서 고양이를 버리고 가는 놈이면 모를까. 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감긴 눈커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말라갔다. 침대 위의 작은 공간만이 그의 세상이었다. 사랑해요. 귓가에 속삭이면 그는 아주 약하게 몸을 떨었다.


05.
 그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남자의 이름조차 모른 다는 것과,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너무 익숙하게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고 그 외에 별다른 호칭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이름이란 것은 관계의 기본이기 마련이었다. 그는 남자의 지나친 편안함이 신경 쓰였다. 관심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신경이 쓰인다고 말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남자는 아침식사로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치킨수프를 가져왔다. 남자는 그를 일으키고 그가 아침을 드는 동안 토스트 두 조각을 먹은 뒤에 검은색 터틀넥셔츠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위에 점퍼를 걸쳤다. 저렇게 입고 출근하는 직장이 있던가. 컴퓨터나 공학과 관련된 직업군의 사람일지도 몰랐다.

 “점심엔 다른 걸로 줄게요.” 

 남자는 옷을 갈아입고 어제처럼 침대 곁에 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약간 웃었다.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약간 이른 출근시간이기는 했지만 오전에 출근해서 점심시간에는 돌아올 수 있는 직업중에 그가 아는 것은 없었다.

 “두시나 세시정도면 와요. 좀 배고플 수도 있겠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아요. 티비 리모컨은 왼쪽 협탁에 있고, 책은 첫 번째 서랍 안에 있어요. 당신이 책을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더군다나 당신 취향이 아닐 수도 있고. 좀 자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갈거에요.”

 남자는 할 수 있는 한의 설명을 늘어놓은 뒤에 그의 무릎 위에 놓여있던 트레이를 정리했다. 협탁 위에서 차키를 집어 점퍼의 주머니에 넣고 손에 약간의 왁스를 짜 머리를 정돈했다. 분명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보기 힘든 녹색 눈동자에, 선한 눈매. 약간 색이 옅은 입술이 웃을 때면 얼굴 가득 크게 번졌다. 남자는 나가기 전에 그의 동태를 확인하듯 침대 발치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름이?”

 그가 물었다. 의외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웃던 표정 그대로 굳은 듯 했다. 당연한 절차였으나 남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고, 그가 속으로 셋을 세고 난 뒤에 대답했다.

 “에단. 에단 호크는 아니지만. 당신 좋을 대로 불러요.”

 에단 호크? 그는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입모양만으로 되물었다. 남자, 아니 에단은 다시 웃었다. 에단은 점퍼의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두 손을 집어넣고 차키를 짤그락 거렸다. 에단은 그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여전히 에단은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다녀올테니 쉬어요”

 에단이 방에서 나가고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잠기고,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 안에서도 열 수 있기는 했으나 그는 지금 침대 위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베개를 베고 편안히 누워 눈을 감았다. 남자의 방은 아침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 따듯한 느낌보다는 말 그대로 밝아져온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들을 들으며 그는 잠을 청했다. 


06.
 “플로베르 경사님. 어제 부탁하신 프로필 찾아놨어요. 경감님 책상 위에 있던데요?”
 “그래? 몰랐네. 저번에 경위님한테 보고 드렸던 것 같은데. 알았어 고마워요.”

 이든 플로베르 경사는 책상 위에서 서류철을 보면서 펜의 뒤축을 이로 물었다. 그것이 습관인 듯 그의 펜꽂이에 꼽힌 펜들은 모두 뒤축이 너덜너덜했다.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책상 위를 정리하고 제복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콧 경위님 자리에 계셔?”
 “그럴걸요. 미팅 갔다가 아홉시에는 온다고 하셨어요.”
 “오셨겠군.”

 뉴욕 경찰의 제복은 남색이었다. 약간 촌스러웠지만 정갈한 맛은 있었고, 배불뚝이 아저씨만 아니라면 다들 얼추 위엄은 갖춘 모양새가 되었다. 이든은 쓰고있던 캡을 잠시 벗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돈한 뒤에 다시 캡을 썼다. 녹색 눈매가 잠시 번뜩이는가 싶더니 여자의 어깨를 두 번 손으로 두드리며 고맙다고 말했다. 스콧 경위님. 

 “뭔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든은 그의 책상 위에 들고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수사 하고 있던 그 조직 말인데요.”


※든윈 패러랠. 콘실리에리 루윈과 복흑얀 이드니가 나옵니다. 허술함 주의.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Bloomsbury 05  (0) 2011.10.04
Bloomsbury 03  (0) 2011.09.13
Bloomsbury 01  (0) 2011.09.13
by merone

소리가 나는 쪽으로



"또 찡그린다."

  시야 안에 손바닥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그 끝이 가볍게 눈 사이를 누르고, 문질렀다. 루윈은 약간 눈가를 찌푸리고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그 중지 손가락이 이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평소처럼 웃었다. 루윈, 그거 알아요? 신문 볼 때 맨날 얼굴 찡그리고 있는 거. 들고 있던 신문을 무릎 위에 걸치듯이 올려놓았다. 그런 건 언제 보고 있었어요. 아까부터. 플로베르는 거기서 말을 끊으려는 듯, 짧은 막을 두고는 다시 말했다.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을 떼어내었다 싶더니, 이번엔 입을 맞추었다. 아주 잠시간 동안 입이 맞닿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 같았다. 떼어내는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루윈은 정말 멍청하게도, 새삼스럽게 남자의 입술도 여자의 것만큼 부드럽다는 생각을 한다. 플로베르는 이따금, 아니 생각보다 잦은 빈도로 그러한, 가벼운 스킨십을 하곤 했는데 그건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든 플로베르는 루윈 이바노브와는 달리, 솔직한 성격이었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시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렇게 웃는 것은 아무래도 버릇인 것 같았다. 자주 웃는군.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신문을 접는다. 수요일의 석간은 그 요일의 위치만큼 애매하고 무미건조했다. 석간에는 이따금 조간에 뜬 기사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혹은 더욱 과장시켜서 서술하거나, 그 외에 다른 새로운 정보를 들고 오기도 하였지만 원래 저녁의 읽는 신문이란 그 두께의 차이만큼, 아침에 읽는 신문만큼 극적이진 않은 법이었다. 아침에 오는 신문이 정보를 꽉꽉 채워서 오는 만큼 두껍고 무거웠던 것이 비해, 회사에서 돌아와서 읽는 신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리고 얄팍했다.
  다 읽었어요? 어디 가요? 창 밖으로 멀리에서 구급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지역에선 썩 들리지 않는 소리인데. 루윈은 몸을 일으키다가 무언가가 팔을 잡은 느낌이 들어서 그 쪽을 바라보고 말한다. 신문 버리러 가는거에요. 나중에 버리면 안 돼요? 이따금 그럴 때에는 루윈은 그가 장성한 남자를 대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지금 크고 있는 다섯 살짜리 아이를 대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곤 했다. 루윈 이바노브는 가능한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이따금 신기하게 보였다. 알고 보니 나이도 스물일곱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바노브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앉았다. 원한다면 자신의 팔을 잡아당겨, 놓게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쩐지 바보같이 느껴졌다. 예를 들어, 그런 것이다. 아무도 아이가 무섭다고 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혼자서 자야 한다고 강요하는 어른은 잘 없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루윈 이바노브는 아이에게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꼭 아이 같네요."
"누가요?"

  루윈은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플로베르는 약간 눈을 꿈뻑이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킨다. 다만 아이와 다른 것은, 아이는 쉽게 질려 버리는 것에 반해 아마 그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비슷한 정도로 질릴지도 모르지만. 루윈은 왼손을 뻗어서 그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가볍게 잡아당기다가 옆으로 쓸어보았다. 가려져 있던 얼굴의 인상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텔레비전의 소리가 귓가에 들어왔지만 너무 작아서 아나운서의 말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플로베르가 소리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루윈은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왼쪽 손을 소파의 등 받침에 짚으면서 그의 입에 입술을 겹쳤다. 손등에 힘이 들어가면서, 무게가 그 쪽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딸은 모든 것에 쉽게 질렸다. 생일 날 받은 선물도 일주일 즈음 지나면 그녀의 방에 있는 장난감 통에 던져졌다. 오히려 아이는 언젠가 그녀의 어머니가 사 준 롤러 스케이트 같은 것을 더욱 즐겼다. 많은 장난감의 운명이 그러하였겠지만 아이의 장난감은 평소보다도 빨리 그의 첫 주인을 바꿔야만 했다. 아내는 아이가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을 그러모아선, 이따금 어린이 집에 기부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루윈은 아이한테 이런 키스를 해줬나 봐요?"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아깐 아이 같다고 하더니. 플로베르는 웃었다.
  루윈은 그에게 전에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남자를 상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은 정말로 순수한 의문이었을 것이다. 루윈은 이따금 그가 이 남자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곤 했다. 글쎄, 사실상 좋아한다는 감정은 정의를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애매하기에 그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 그러는 걸 수도 있었다. 평범하게 살아온 남자 둘이 아무런 복선도 없이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라는 것은 너무 잘 짜여진 싸구려 소설 같다.

"플로베르."

  루윈은 여전히 그를 성으로 불렀다. 

"나랑 하고 싶어요?"
"네?"
"남자한테, 그런 욕구를 느끼냐고요."

  그는 남자한테, 라는 말을 하고 난 후에 조금 간격을 두고 뒤의 목적어를 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조합된, 그러한 행위를 가리키는 가장 상스럽지 않고, 점잖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과 섹스하고 싶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못했던 걸 수도 있다. 그는 생각보다는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또한 일반적으로 품위가 없다고 일컬어지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플로베르는 그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더니 웃었다. 언제나와 같은 웃음이었는데 루윈에겐 그것이 조금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플로베르는 대답 대신 그의 허리를 끌어 안으면서 이번에는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루윈의 몸이 그에게 가까워졌다. 다른 사람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 루윈 이바노브라는 사람 자체가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 얼굴의 근육은 지금까지 살아온 이십구 년 동안 그대로 굳어져 버렸을 것이다. "싫어요?" 플로베르의 목소리는 루윈의 것 보단 조금 덜 건조했다. 그것은 공기가 아니어서 단지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겠지만 그 순간에는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윈은 무릎을 세운 채로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올려서 그 이마를 쓸어 올려본다. 싫냐고?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고픈 욕구가 일었다. 아마 떼어낼 때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으리라. 뉴스의 마지막 문장을 맺고 아나운서의 저녁 인사와 함께 저녁 뉴스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싫으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서서 말하였듯이 루윈 이바노브는 생각보다는 보수적이었고 고집이 있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만큼 생각보다는 솔직했다. 그는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좋아하는 척 할 정도로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싫냐고? 루윈은 속으로 그 문장을 다시 되새겨봤다. 

"싫어하는 것 같아요?"

  루윈은 그 이마에 입을 맞추는 대신에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위로 쓸어 올려, 눈을 가렸다. 루윈 이바노브는 지금까지 평범하게 여자를 좋아했고, 한 때 자신의 아내였던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으며 아이까지 낳았다. 지금 그 아이는 다섯 살로, 아마 미국 대륙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운만 좋다면 아내는 아이에게 루윈에게 전화하는 것을 잊지 않고 시킬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플로베르의 눈을 가린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 자신의 표정은 굉장히 보기 싫은 표정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싫냐고? 글쎄. 하지만 좋으냐고 물으면 그것 역시 애매한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루윈 이바노브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인간 관계를 굉장히 담백한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인 부분은 쓸데없이 복잡하게 헝클어 놓았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싫다면 그런 욕구 역시 없었겠지. 그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이마에 하는 키스 같이 짧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다음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무언가의 가전제품이었던 것 같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아 그의 귀에는 제대로 닿지 않는다. 플로베르는 조금 입을 열었다. 루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말 없이 그 안으로 파고드는 것 밖에 없었다.

'PROJECT-D' 카테고리의 다른 글

i need you  (0) 2012.02.26
Nightmare  (0) 2012.02.26
Happy Birthday  (0) 2011.10.14
Sleeping Pill  (0) 2011.10.14
滿潮  (1) 2011.09.26
by merone

Happy Birthday



01.
 "내일 약속있어요?" 
 "아니요."

 조용히 대답하는 그를 두고 이든은 나른하게 웃는다. 그래요, 그럼 저녁 시간 좀 비워줄래요? 무슨 일이냐는 듯 그는 시선을 두고 있던 책에서 눈을 뗐다. 두사람이 누워도 적당히 편안한 거리감이 느껴질 만큼 넓고 푹신한 침대 옆 협탁에는 두어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루윈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자기계발서, 아주 가볍지만 손쉽게 팔리는 소설책, 유명인의 에세이집. 책이라고 할 만한 것에서 논문과 과학잡지와 전공서적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것을 읽지 않는 이든에게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아주 묵직하고 딱딱한 고전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것이 아니면 읽지 않을 것 않은 남자가 싸구려 자기계발서를 읽는 광경은 사실 조금 귀여웠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그저 풀어서 다시 엮은 것 밖에는 한 것 없는 몇 권의 책들과, 티비를 틀면 늘 얼굴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쓴 자기위선적인 에세이 같은 것. (혹은 절대로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오프라 윈프리의 자서전 같은 것이나.) 이든은 그의 손에 들린 책의 표지를 훑고 조용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는 듯 되묻는 루윈의 얼굴을 엎드린 채 올려다보았다. 아마 혼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책을 읽으며 서재에 틀어박혀있던 것 같은 그는, 이든이 집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책을 손에 들고 거실의 소파나, 침대 위로 올라온다. 이든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무도 노크하지 않는 서재 안에 들어가 책을 읽는 남자의 등을 생각하다가 앉아있는 루윈의 배 위에 얼굴을 부볐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책을 집고 있던 모서리 끝에서 벗어나 이든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힌다. 숨을 쉴 때 마다 따듯한 숨이 다시 자신의 얼굴로 끼쳐 돌아왔다.

 "별 일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일은 시간 비워둬요."

 남는 시간 나한테 투자 좀 해요 루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일종의 긍정과 같아서 이든은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웃음이 느리게 얼굴 위로 번졌다. 아직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기는 하지만 괜찮았다.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의 약간의 표정 변화, 약간의 손짓 같은 것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신호처럼 눈에 박혀들어 왔다. 미소 짓는 대신 아주 잠시 침묵하는 긍정이나,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찾아내는 손길, 키스대신에 가볍게 머리칼 위에 손을 얹는 동작과 같은 것들. 아무도 찾아낼 수 없었던 것같지만, 이든에게는 아주 손쉬웠다. 이제껏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쪽이 납득되지 않을 만큼. 그는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운 만큼 솔직했고, 솔직한 만큼 충분히 상냥했다. 이든은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덮친 몇가지의 큰 사건들을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고, 덕분에 그의 미미한 표정과 손길의 변화를 감지해내는데 초조해하지 않았다. 침대는 푹신했고 오랫동안 크고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잠들었던 남자의 냄새가 났다. 우아하리만치 약한 바디 워시의 냄새, 쉐이빙크림의 냄새나, 그를 가만히 끌어안으면 머리칼에서 나곤 했던 샴푸의 냄새, 아주 희미하리만치 약한 담배 냄새. 그의 목덜미나 머리칼 끝에서 나던 향이 고스란히 시트와 베개 위에 하얗게 묻어있는 것같았다. 루윈이 책을 덮는 소리에 이든은 약간 얼굴을 떼어내고 그를 올려다본다. 

 "다 읽었어요?"
 "네."

 그는 단조로운 동작으로 덮은 책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잠옷과 시트가 서로 스쳐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든은 이불을 그의 목덜미까지 올려 덮고, 이불 안에서 스멀스멀 팔을 뻗어 약간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약간 마른 몸 아래로 딱딱하게 도드라져 나오는 갈비뼈가 닿았다. 

 "집에서 기다려요. 일찍 올게요."

 대답 대신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 쪽으로 약간 몸을 돌려 누운 남자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뺨에 닿는 셔츠가 기분 좋을만치 차가웠다.



02.

 "이든, 냉장고에 넣어놓은 케이크 챙겼어요?"
 "아! 네. 고마워요. 안젤리카!"

  안젤리카가 등 뒤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내일은 두 배로 일하게 이든! 고든이 등 뒤에서 소리쳤다. 월급도 얼마 안주잖아요! 뒤돌아서 소리치는 이든의 등 뒤로 고든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내 탓이 아니라고 둘러댔다. 연구비라거나 스폰서 같은 말들이 연구실에 울려퍼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타카의 대학가에서 조금 벗어나면 살기 좋은 적당한 주택가들이 있었는데 골목을 한 두 개만 돌아도 작은 마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법한 그럴싸한 가게들이 대개 줄을 지어 있었다. 케이크만큼은 동네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케이크 가게의 주인 부부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은 아이다 때문이었다. 그녀는 초콜릿만큼이나 단 것을 좋아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두조각의 케이크를 사들고 아파트로 습격해와 테이블 의자 위에 두 다리를 모두 올려놓은 이상한 자세로 앉아 케이크를 수저로 퍼먹었다. 사실 부부의 케이크는 동네가 아니라 뉴욕 주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맛있었다. 아이다는 도통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울상이었지만 이든은 그녀의 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든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가게에서 주문해놓았던 케이크를 찾아다가 연구실의 냉장고 안에 넣어놓았는데, 그만 중간에 안젤리카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누구거에요?' 평소에는 아주 훌륭한 동료인 안젤리카가 흔하지 않은 빈도로 보이는 관심에 이든은 약간 주춤거렸다. 안젤리카가 저렇게 흥미로워 하는 것은 정말로 흔치 않았다. 케이크 박스에 박힌 가게의 은색 로고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애인거에요.' '생일이에요?' '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자기 생일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마도요.' '세상에, 그 사람 이든 생일은 알아요?' '아마도 모를거에요.' 안젤리카는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이든을 바라봤다. 안젤리카의 등 뒤로 파란 눈 한 쌍, 호박색 눈 한 쌍, 갈색 눈 한 쌍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젠장. '오늘은 우리끼리 이든 플로베르의 무덤을 축하하러 가자고.' 고든은 아주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엔 우리 케이크도 좀 사와요!"
 "등 뒤에서 내 얘기나 하지 말아요.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우린 오늘 술 한 잔씩 할거라고!"

 자네 얘기 하면서! 고든이 뒷통수에 대고 여전히 소리치고 있었다. 뛰어가면 케이크 다 망가져요. 그 와중에도 안젤리카는 꽤 사려 깊었다. 좋은 하루 보내요. 이든. 당신 애인도요! 


03.
 "음..."

 상냥한 표정을 한 금발머리의 점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장미, 산백합, 안개꽃, 프리지아, 샤프란, 불도화, 라일락 ‥. 꽃 선물을 떠올리면 대개는 장미부터 떠올렸겠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든도 고민 없이 붉은 색이나 옅은 핑크색의 장미를 골랐겠지만, 어쩐지 오늘 선물하려는 사람은 장미보다는 흰 꽃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어떤 꽃을 안겨주어도 당혹스러워하거나, 놀라는 것은 매한가지겠지만 장미는 그에게는 지나치게 요란했다. 꽃이 나란히 놓인 투명한 냉장고 앞에서 발을 구르며 한참이나 꽃을 노려보는 이든을 바라보던 점원은 이든이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난 뒤에야 겨우 말을 붙였다. 

 "어느 분에게 선물하실 건데요?"
 "애인이요."

 그는 곧 곤란한 표정을 거두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장미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쉽지 않네요.

 "붉은게 어울리지 않으시면, 흰색 장미는 어떠세요? 백장미나 샤프란도 예뻐요."
 
 윈도우 안의 꽃을 들여다보다가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이든을 보고 그녀는 약간 웃었다. 어쩐지 꽤나 곤란해하는 것 같은 폼이 아직도 어느 꽃이 가장 어울릴지 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흰색 장미에, 연노랑색 꽃에, 아주 연한 핑크색 장미도 섞어드릴게요. 요란하지는 않을 거에요. 크기는 얼마나? 이든은 두 손을 두뼘의 거리만큼 벌렸다. 이정도. 점원은 초록색 앞치마에 슥슥 손을 문질러 닦고 연보라색 포장지 위에 꽃을 뉘였다. 흰색 장미송이 사이로 연노랑색 장미와, 아직 채 다 피지 않은 분홍색 장미 봉오리, 연두색의 꽃들과 약간의 이파리들, 안개꽃, 라일락. 갈색 양복 위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색의 조합들이었지만 그는 오늘 옅은 회색의 양복을 입고 나갔으니 충분히 어울릴 것이다. 이든은 꽃을 받을 사람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아니라 회색 양복을 입은 스물아홉의, 아니 이제 서른이 되는 은행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점원을 향해 웃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여기서 밤샐 뻔 했네요."
 
 

04.
 루윈, 손이 비질 않아서 그런데 문 좀 열어줄래요?
 꽃다발을 들고 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벨을 누르고 이든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긴 끈이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서류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한 손에는 큼직한 케이크 상자를, 한 손에는 지름이 두 뼘은 넘을 법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으니 손이 빌 턱이 없었다. 현관문이 반 뼘만큼 열렸다가, 이내 이든의 몸이 지나가고도 남을만큼 열렸다. 

 "받아요."

 넥타이를 푼 편안한 셔츠 차림으로 푹신한 슬리퍼를 끌고 나온 루윈의 품에 꽃다발을 안기고 이든은 웃었다. 겨우 비게 된 손으로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무슨 꽃이에요?"
 "당신 거에요. 예쁘다고 해줘요."

 꽤 고민해서 골랐다고요. 반은 점원이 골라줬지만. 탁자 위에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고, 소파 옆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반정도는 예상했던 그대로의 표정이어서 이든은 웃었다. 케이크 상자의 손잡이 아래에서 케이크가 녹지는 않았는지 실눈을 뜨며 확인하고 외투를 벗은 뒤에 이든은 등을 곧게 펴고 루윈을 바라봤다. 

 "생일 축하해요. 루윈."

 약간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으로 그는 놀라움을 대신 하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받아보았을 것 같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미간을 찌푸리는 루윈 이바노브. 이든은 가만히 다가가 여전히 바람 내음이 나는 몸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품에 안은 꽃다발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이 없는 입술 위에 아직은 약간 차가운 입술로 키스하고, 아직 흐트러지지 않고 곱게 뒤로 넘겨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자기 생일도 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약간의 타박을 담아 말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 위로 가볍게 닿는 이마의 감촉에 이든은 잘 다려진 그의 셔츠 위로 등을 쓸었다. 

 “생일 축하해요.”

 이든은 그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소파 위에 앉혔다. 

 “케이크 사왔어요. 단 건 싫어해요?”

 싫어해도 먹어야 돼요. 생일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고든만큼 심술궂은 얼굴로 웃었다. 

 

05.
 "너무 달아요?"
 
 한 조각은 예의상 비워준 것 같지만 많이 달았던 모양이다.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단 것을 먹을 때의 표정, 예를 들면 약간 입가가 굳어있다거나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된다거나 하는 것들이 여실히 드러나서 크림이 묻은 포크를 내려놓고 허리를 폭 끌어안았다. 그래도 맛있었죠? 목 안쪽을 울려 웃었다. 그래요. 아직도 혀가 얼얼한 목소리로 그래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 귀여워서 이든은 또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느긋하게 웃었다. 
 
 "사랑해요."

 이든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이것도 너무 달아요?"

 그래요. 그의 대답에 약간 웃고, 어깨 죽지 위에 입을 맞췄다. 


06.
 "어떻게 알았어요?"
 "얼핏 쓰여있던 것 같아서요. 싫었어요?"
 "..."
 "서른살 축하해요."

 "루윈?"
 
 젖은 살에서 축축한 땀냄새가 났다. 자신의 어깨 위에 그의 젖은 머리칼이 약간 엉겨 붙었다. 그가 말없이 숨을 내쉴 때 마다 젖은 숨이 끈적한 몸에 와 닿았다가 느리게 사라졌다. 약간 땀에 젖은 살결이 스칠 때 마다 몸은 마찰이 일듯 조금씩 뻑뻑하게 닿았고 이든은 여전히 약간의 땀으로 젖은, 마른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베개도 약간 젖어있었다. 이든은 조금의 시간의 틈을 두고 루윈의 젖은 머리칼을 내리 쓸어 넘겼다. 이든은 그 침대에 누워 루윈을 끌어안고 이 집에서 지난 몇 년간 일어난 일을 상상했다. 이 집에 발을 들인 뒤로 생긴 고질적인 습관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는지도 몰랐다. 세 식구가 살기에는 약간 널찍한, 좋은 집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주택은 그가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어보였다. 이든은 그가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크리스마스를 생각했을 때처럼, 그가 혼자 사는 이 집을 떠올릴 때 마다 목 안쪽이 시큰거렸다. 처음 담배를 피던 날 같았다. 
 이든은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조금 올려 그의 등뼈를 헤아리고, 그의 뒷목을 문질렀다.

 "루윈."

 말이 없어 잠든 줄 알았던 그가 약간 고개를 든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든은 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듯이 쓸어내리고 뺨에 입을 맞췄다. 그가 먼저 다가오는 것은 고작 입술을 맞대는 정도의 키스나, 키스할 때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손 같은 것이 전부였음에도 그는 이든의 다른 스킨십을 피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조차 숨소리만큼 조용한 걸음걸이로 방과 방 사이를 단조롭게 걸어다니는 그를 등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거나,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목덜미에 입을 맞추거나, 소파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의 허벅다리를 베고 눈을 감고 있을 때에도 그랬다. 그는 먼저 다가오는 것은 충분히 어울릴 만큼 서툴렀지만, 몸을 맞대면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손이나, 뺨이나, 입술을 내어주었다. 아이에게 하듯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었을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 집으로 짐을 좀 옮기려고 해요.”

 그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도 어리광을 받아주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든은 엄지와 검지로 목뼈의 양 옆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느리게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피곤한 듯 감고있던 눈커풀이 약간 떨렸다. 어두운 침실의 스탠드 빛 아래에서 주홍색으로 물든 속눈썹이 눈커풀을 따라 떨렸다.

 “그렇게 해요.”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언젠가 묻게 될지도 몰랐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고 이든은 그의 등에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당겨 그의 몸 위로 덮었다. 몸이 아직 식지 않아 작은 바람에도 추웠을 것이다. 그는 약간 말랐고, 이든은 그래서 그가 좀 더 걱정됐다. 이유를 물었다면 이든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겠지만, 이든은 그와 함께 있고 싶었고, 그리고 그가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싫었다. 이든은 그와 함께 있고 싶었고, 그리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싫었다. 인심 좋은 고양이처럼, 다가가 등줄기를 느리게 쓰다듬으면 온화하게 풀린 표정으로 눈을 감는 루윈 이바노브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07.
 “안젤리카가 누구 생일이냐고 물어보길래 애인이라고 그랬어요.”

 그는 대답하기 전에 약간 뜸을 들였다. 이든은 그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약간 목청을 울려서 웃었다. 꽃가게 점원이 어느 분한테 드릴거냐고 하길래, 그 사람한테도 애인한테 줄거라고 했죠. 

 “걱정 마요. 보이프렌드라고는 안했으니까.”
 
 이든은 개구진 표정으로 웃었다. 그정도의 사리분별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이든은 적당한 대답을 찾다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는 루윈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 이를 드러내고 웃을 때 마다 주근깨가 도드라졌다. 스물일곱, 아니 스물여덟살이나 된 적절한 직장을 가진 남자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어린애같은 표정이었다. 어리다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어려보이기 보다는 웃는 모습이 어린애같다고 표현하는 쪽이 어울릴 것이다. 확실하게. 이든은 천진한 표정으로 웃었다. 웃을 때는 웃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루윈은 이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보이프렌드라는 말에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찾는 동안 멈추었던 숨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금방 씻고 난 머리칼 끝에서 약간의 물기가 떨어져 이든은 그의 목덜미에 걸려있던 수건을 빼앗아 그의 머리칼 위에 느리게 수건을 문질렀다. 갈색 머리가 물에 폭 젖은 탓에 검은 색에 가까워 보였다. 조금 더 침대 위에서 늑장을 부려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끈적거리는 것은 싫어했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했는지 몸에서는 기분 좋은 열기가 올라왔다. 

 “아니면 보이프렌드가 더 좋아요?”
 “플로베르.”

 단호하게 이름을 불려 이든은 조금 웃었다. 

 “그만 자요.”

 
08.
 이든은 분명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에 그의 주방에 어설프게 놓여있는 꽃다발을 보았다. 그는 하이스쿨 졸업식에도, 대학 졸업식에서도 꽃다발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처럼, 머그컵에 물을 담아 꽃다발을 담그는 정도의 일도 하지 않았지만, 이든은 그것이 그가 정말로 꽃다발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꽃다발은 그가 유일하게 스스로 만질 줄 아는 커피머신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있었고 아주 조심스럽게 놓여있었다. 
 이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그는 못된 고든의 말대로 어제보다 두배의 일을 절반의 시간을 더 투자해서 끝마쳤다. 이든이 현미경과 통계자료에 몰입하는 동안 고든과 동료들은 숙취로 비실거렸다. 이든이 가방과 코트를 벗어 소파 옆에 내려놓았을 때 테이블 위에는 하얀 꽃 몇송이가 화병에 담겨 놓여있었다. 물을 뜨러 간 주방의 식탁 위에도 꽃이, 그리고 손을 씻으러 들어간 욕실에도 꽃이 놓여있었다. 한번도 꽃다발을 받은 적 없는 남자 대신에 주의 깊은 가정부가 손을 썼음이 틀림 없었다.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욕실의 흰 꽃들을 바라보다가 이든은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루윈, 저녁 먹었어요?"


*10월 10일 루윈 생일 기념글.

'PROJECT-D' 카테고리의 다른 글

Nightmare  (0) 2012.02.26
소리가 나는 쪽으로  (0) 2011.10.17
Sleeping Pill  (0) 2011.10.14
滿潮  (1) 2011.09.26
Trigger  (0) 2011.09.21
by merone

Sleeping Pill


 이든은 작은 기척에도 쉽게 깨어났다. 그가 처음부터 얕은 잠을 자는 부류의 신경증적인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정하면서도 수다스러운 목소리들, 조용한 타자기의 소리, 음식을 준비할 때 칼이 도마 위를 두드리며 나는 소리 같은 것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천둥이 치는 소리,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 사람의 기척이나 발자국 소리, 침대의 출렁임 같은 것들에는 금세 깨어났다. 이든 플로베르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으나 그의 인생에서 몇가지의 중요한 전환점과 상처를 남긴 것들이 그에게 남긴 또 하나의 습관이었다. 다만 이든 플로베르의 구김살 없는 성격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의 몇가지의 중요한 변화와 응어리들을 눈치 채지 못했으며, 이든 플로베르와 같은 침대 위에서 생활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그런 습관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침대가 얕게 출렁이는 기척에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잠겨있었다. 짙은 남색의 커튼으로 창을 모두 닫아놓았지만 방안은 늘 약간의 빛으로 차있었다. 밤이면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이 커튼을 투과해 집 안까지 비칠 때면 달리 협탁 위의 스탠드를 켜놓지 않아도 침대 위에 누워있는 루윈 이바노브의 등과 허리를 눈으로 분간할 정도는 됐다. 가로등이 꺼지고 난 뒤에 방안은 칠흑처럼 어둠에 잠겼지만 그 시간에는 이든과 루윈 모두 대개는 잠에 들어있었으나 때때로 루윈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명에 곤혹스러워 했다. 이든은 그가 처음부터 얕은 잠을 자는 부류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윈. 그는 아이가 몸을 구부리듯이 몸을 둥글게 말았다가 펴며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방 안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잠겨있었다. 짙은 커튼  아래로 슬며시 비치는 약간의 빛을 보건대 그즈음의 시간대일거라고 생각했다. 밤새 뒤척이고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루윈. 이든은 한쪽 팔을 세워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켰다. 흐릿한 시야 안에서 루윈의 등이 약간 움직였다. 이든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더듬는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려지는 짙은 갈색 머리칼 아래로 이어지는 마른 목에서 불거지며 튀어나온 뼈에서부터 얇은 셔츠 아래로 이어지는 등뼈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더듬어나간다. 느리게. 마른 뼈를 둥글게 지문으로 문지르며 헐렁한 셔츠를 걸친 어깨 위를 턱으로 눌렀다. 루윈. 어깨 위를 누르는 턱을 떼어냈을 때 루윈 이바노브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눈은 잠보다는 다른 것에 취해 약간 흐리게 흔들렸다. 이든은 가만히 손을 올려 그의 이마 위를 덮고 있던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내렸다. 

 “이쪽 보고 누워요.” 

 목소리는 반쯤 잠에 취해있었다. 밤새 공기가 나간적 없는 후두에서는 칼칼하게 잠긴 목소리가 났다. 이든은 아주 조용하게 소리죽여 말하려고 했지만 잠결에 제대로 통제되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생각보다도 분명하게 들렸고 방안에 가라앉아있던 공기 사이의 곳곳으로 파고든 것처럼 울렸다. 이든은 머리칼을 쓸던 손을 떼어내고 그가 몸을 틀기 수월하도록 루윈의 몸 위에 내려덮듯 걸쳐져있던 이불을 들었다. 몸을 뒤척이는 동안 침대가 약간 출렁였다. 그가 느리게 몸을 돌려 누웠을 때에서야 이든은 다시 이불을 그의 목 끝까지 덮었다. 그의 목과 베개 사이의 틈으로 팔을 집어넣어 왼쪽 어깨와 등을 감싼 뒤에, 이불 밖으로 비어져 나온 오른 팔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느리게. 할로윈이 지나면 얼마간은 무서워하던 아이에게 줄곧 얀이 해주던 방식이었다. 그가 숨을 쉴 때 마다 가슴께에 더운 숨이 가늘게 와 닿았다가 흩어졌다. 그가 얼굴을 묻고 있는 부근이 따듯했고 느리게 흩어지는 따듯한 숨이 가슴을 덮었을 때는 따듯한 초콜릿을 마신 것처럼 얇은 피부의 안쪽까지가 묵직하게 덥혀왔다. 

 “또 그래요?”

 루윈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이든은 힘주어 등을 안았다. 잠든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또는 잠에서 깬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든의 손은 잠결에 오른 체온 탓에 루윈의 숨보다 따듯했다. 이든은 이불로 그의 등을 감싸고 그 위에서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느리게 문질렀다. 이든 플로베르는 다시 잠이 들 때 까지 루윈의 등을 느리게 문질렀다. 루윈은 이든이 그의 몸을 감싸듯 안고 있는 탓에 몸을 웅크리거나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이든의 팔 안에서 편안한 자세를 찾듯 간간히 조금 뒤척였다. 그는 익숙하게 편안한 자세를 찾았고 이든은 그가 자세를 고쳐 눕고 나면 잠결에도 습관처럼 한번씩 등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든 플로베르는 커튼 사이로 차가운 빛이 드는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팔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이마를 내려다 보았다. 일곱시에서 일곱시 반. 여섯시의 빛은 노랗기 보다는 푸르스름했으므로 아마 시간이 그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든은 밤새 그의 등을 도닥거리던 손을 들어 루윈의 흐트러진 이마를 쓸었다. 이든은 은행으로 향하는 루윈 이바노브, 혹은 루윈 그가 그 자신에 가깝다고 믿고 있는 루윈을 떠올렸다. 그는 젊었지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든은 루윈을 처음 보았을 때에도 그의 단정한 옷차림이나 수트를 고르는 취향, 앞머리를 남기지 않고 뒤로 넘긴 솜씨로 보아 그가 사회 초년생이 아님은 쉽게 짐작했다. 그의 행동거지와 옷차림들은 나쁘지 않은, 오히려 꽤 좋은 취향임을 감안하더라도 젊은 사람이 쉽게 몸이 익히고 익숙해할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나이 들어보이지는 않았으나 모든 것들이 너무 익숙하고 정돈되어있었다. 이든은 둥글고 흰 이마 위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고, 흩곤, 다시 쓸어 넘겼다.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칼들 아래에서 그는 그제서야 겨우 제 나이처럼 보였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나면 제 나이보다 어려보일 법한 인상이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들이 일곱시를 넘어선 빛에 색을 되찾아 보였다, 이든은 팔을 뻗어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루윈이 미간을 지푸렸다. 그는 아마 밤새 자신의 팔 안에서 제가 깨지 않도록 약간씩만 뒤척이면서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든은 루윈의 이명이 밤새 그를 그리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거라고 미리 짐작했다. 여러번의 경험에서 얻어낸 결과였다.

 “루윈”

 이든은 그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부른 뒤에 느리게 눈을 뜨는 루윈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에 전화할거에요? 이든은 자신이 일어나고 난 뒤에 비워진 자리에 이불을 끌어 채워 덮으며 물었다.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바람이 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마도요. 루윈의 대답에 이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올게요. 이든이 집요하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다시 흩어놓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루윈의 이마는 열이 나는 사람처럼 약간 뜨거웠다. 

 이든은 그리 공식적이거나 갑갑하지 않은 흰색의 셔츠에 베이지색의 치노 바지를 갖춰 입고 머리칼에 남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빗어 털며 아직 흐린 빛이 도는 주방으로 향했다. 방금 커피를 내린 커피머신에서 약간의 따듯한 열이 올라왔다. 그는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앞에 두고는 밤새 잠자리에 들었던 흐트러진 차림새 그대로 쓰러질 듯이 식탁의자에 걸터앉아있었다. 루윈. 이든은 생각보다도 훨씬 많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낮은 목소리, 또는 n을 발음할 때 약간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마지막 목소리, 혹은 끝이 좀 더 커지거나 작아지는. 아마도 그러한 이든의 억양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이름을 부르면서 달리 건넬 몇가지의 말을 축약하고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 그는 이든이 부르는 몇 가지의 억양이 다른 자신의 이름에서 생략되고 축약된 말들을 짐작했을 것이다. 커피 마시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든은 그에게서 컵을 빼앗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컵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의 손목을 잠시 쥐었다 놓았다. 이든은 흐트러진 자세로 식탁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지나쳐 간단한 서너개의 동작으로 토마토를 반으로 자르고, 식빵을 토스트하고, 베이컨을 구웠다. 아침식사로 하기에 조촐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식사였다. 아침을 먹는 것 보다는 커피를 한잔 들이키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루윈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고 다시금 그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점심은 안먹더라도 아침은 먹어둬요.”

 루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든은 조금 웃고 자리에 앉아 천천히 아침식사를 마쳤다. 루윈이 아주 느리게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이든은 루윈이 방금 전 까지 쥐고 있었던 머그컵을 들어 알맞게 식은 커피를 반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고른 버버리 코트를 걸치고 강의에 필요한 자료가 든 각진 서류가방을 어깨에 걸친 뒤에 이든은 아직 짙은 커피향이 남아있는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요. 다른 일 하지 말고 쉬어요.”
 “다녀와요.”

 오후가 조금 못되어 시작하는 강의와, 확인해야할 이메일 여러 개. 머릿속으로 평소와 유사한 일정을 그리면서 이든 플로베르는 낡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연구실에는 퇴근하기 전에 잠깐 들렀다가 돌아오면 될 것이다. 하루쯤 비워도 괜찮았다. 



 집 안은 오후를 훨씬 넘긴 시각이었는데도 어두웠다. 아침나절 이후로 집 안의 불을 켠 흑적은 없는 것 같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루윈이 읽다가 만듯한 신문이 펼쳐져 있었고 거실과 주방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이든은 소리를 죽이고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침실 문이 반 뼘만큼 열려있었다. 저녁이 못 된 늦은 오후이기는 했지만 아직 일반적으로 커튼을 칠 시각은 아니었음에도 밖으로 난 침실의 커다란 창문들은 완전히 커튼으로 가려져있었다. 이든은 반뼘 만큼 열려있던 문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몸이 통과할 만큼만 문을 열었다. 방안의 공기는 탁했고 빛이 들지 않는 방은 거실이나 주방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이든은 침대 발치에 서서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죽은 듯이 잠든 루윈을 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훑고는 협탁 위에 놓인 약병을 바라봤다. 자신이 집에서 나간 뒤에 그는 절반도 먹지 않은 아침식사를 치우고, 은행에 전화를 한 뒤에, 병원에서 처방한 수면제를 삼키고 잠든 듯 했다. 병원에서 처방한 수면제는 효과만큼은 꽤 그럴싸했다. 루윈은 수면제를 먹은 뒤에는 거의 반나절은 죽은 듯이 잠들었지만 대신 잠에서 깬 뒤에 잠에서 깨어난 것 보다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굴었다. 갈색 홍채 안쪽에서 검은 동공이 팽창되어있었고 정신을 차리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든은 그가 깨지 않도록 발걸음 소리를 줄여 걸었고 혹시나 그 사이에 걸려올 전화가 있을까 전화선을 뽑았다. 개수대 안쪽에는 아침 식사를 한 접시와, 여분으로 나온 몇가지의 설거지 거리들, 그가 커피를 마신 머그잔 같은 것들이 규칙성 없이 놓여있었다. 점심도 거르고 잤을 것이다. 이든은 서류 가방 안에서 차키와 지갑을 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하얀 팩에 담긴 차이니즈 푸드라도 사와 저녁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든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밖은 완전히 어둑하게 저녁빛에 덮여있었다. 거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이든이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접혀있던 저녁 석간이 테이블 위에서 조금 움직인 듯 보였다. 이든은 석간을 한쪽으로 치우고 사들고 온 차이니즈 푸드 팩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에, 입고있던 버버리 코트를 벗어 반으로 개어 소파에 걸쳐놓았다.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던 욕실 안에서 그가 걸어나왔다. 그는 늘 수면제를 마신 날이면 그렇듯이 아직 혼수상태에서 덜 깬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 일어났어요?”

 이든은 루윈의 손에서 떨어질 것처럼 쥐어진 수건을 받아들고 그의 얼굴을 천천히 문질러 닦았다. 희게 질린 얼굴위에 맺혀있던 물기가 가만히 수건 위로 젖어들었다. 방금. 요. 루윈은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이든은 그의 얼굴에서 물기가 가시는 것을 보고는 뺨에 입을 맞추며 수건걸이에 수건을 걸어놓고 돌아왔다. 잘 잤어요? 루윈은 여전히 제대로 눈빛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약간 고개를 저었다. 젓는지, 끄덕이는지 애매해서 이든은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아마 그의 대답도 움직임과 비슷할거라고 생각했다. 

 “앉아요. 저녁 사왔어요.”

 루윈은 이든이 영어 대신 라틴어로 말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이든의 말을 알아듣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약간의 침묵이 따른 뒤에야 느리게 말했다.

 “생각 없어요”

 그는 알파벳을 하나하나 입 안에서 굴리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든은 그의 뭉툭하게 구슬러지는 발음을 싫어하지 않았다. 루윈은 늘 아주 명확한 발음으로 말하곤 했는데 약에 취한 그는 가끔 이든보다 어린 아이처럼, 이든의 손에 무엇을 맡기지 않으면 안될 사람처럼 보였다. 루윈이 보여주는 약간의 서투른 틈새를 이든은 다른 여느 때 보다도 잘 비집고 들어가 자리 잡았고 이든은 그런 날이면 다른 날 보다는 어른스럽게 굴었다. 그래도 먹어요. 이든은 아직 혼미하게 정신이 멀어져있는 루윈을 가만히 부축했다. 허리를 감싸 안고 느린 걸음으로 소파까지 다다라 상체를 기울여 그를 안전하게 앉혔을 때 루윈의 입술이 스치듯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다시 잠들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이든은 하얀 종이 팩을 열고 물컵과, 물과, 스푼을 가지고 소파로 돌아왔다. 이든의 옷깃에서는 바깥 공기에서 묻어온 옅은 바람 냄새가 났고 약간의 차가운 공기가 묻어있었다. 이든은 자신의 팩이 식도록 내버려 둔 채로 수저에 진득한 차이니즈 푸드를 떠 루윈의 입에 떠넣었다. 그가 수저를 잡고 난 뒤에야 유리잔에 물을 따르고 테이블에 소리가 나도록 잔을 올려두었다.
 루윈이 팩을 삼분의 일 정도 비우고 나서야 이든은 자신의 팩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소파 위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저녁 먹고 석간 읽어줄까요? 됐어요. 루윈은 눈을 감고있었다. 이든은 천천히 두 개의 다 비우지 못한 팩을 치우고, 바람이 들도록 테라스로 향한 거실의 문을 반뼘 만큼 연 뒤에 루윈의 팔 사이로 제 팔을 끼워넣어 그를 안아 일으켰다. 침대 가서 자요. 재워줄테니까. 

'PROJECT-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리가 나는 쪽으로  (0) 2011.10.17
Happy Birthday  (0) 2011.10.14
滿潮  (1) 2011.09.26
Trigger  (0) 2011.09.21
Mint Cookie in Suit  (0) 2011.09.05
by merone

Bloomsbury 05


 푸르스름한 빛깔에 젖어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슬퍼졌다. 아침이 다가오면 그는 다시 집으로 간다. 여기가 아니라. 집으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 올릴 때 마다 그의 희고 마른 등이 굽었다. 비스듬히 창을 등지고 선 몸의 반이 푸르스름하게 젖는다. 등을 둥글게 말 때면 간밤에 수 없이 손가락 끝으로 헤아렸던 그의 척추가, 물고기의 뼈처럼 도드라져 나오는 둥근 뼈 들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온다. 루윈.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금방 울음을 터트리려는 아이처럼 눈가가 쓰려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자신과 그의 옷가지들 가운데서 자신의 것만을 추려 차례로 갖추어 나갔다. 하얗게 빛을 받던 몸이 그가 어제 입고 있었던 갈색 수트로 덮여 나간다. 조용히 몸 위에 덮여있던 시트를 걷었다. 셔츠에 손을 꿰어 넣고 앞을 여미고 있던 그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는다. 루윈. 손이 멈췄다. 아주 잠시 동안. 루윈. 보채는 아이처럼 수차례 이름을 부르는 동안 그는 가장 아래 단추부터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는 다시 손을 들어 천천히 다음 단추를 여몄다. 목 안쪽에거 뜨끈하게 올라오려던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눈시울이 따가웠다. 그의 뒷모습은 늘 서러웠다. 그는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갔다. 햇살처럼 웃는 밀리 이바노브가 기다리는 집으로. 그의 셔츠는 늘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갈 만큼 공간이 남았다. 단정하게 잘린 갈색 머리 아래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목덜미 위에 입을 맞췄다. 셔츠가 느슨하게 감추는 목덜미 뒤에. 그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단추를 채워나갔다. 그의 손을 여러번, 수 차례 아래로 끌어내렸지만 그는 다시 단추를 여몄다.

 "아침 먹고 가요"
 "루윈"

 그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셔츠의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두른다. 가슴에 맞닿아있는 등의 온도가 식은 것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어진다. 그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맨다. 학창 시절의 그가 늘 단정하게 떨어지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맨 넥타이의 매듭은 한눈에 보기에도 익숙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많은 남자들의 목에 매여 있는 것뿐이었을 테지만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창백한 손이 매듭 사이에서 검지를 구부려 천을 잡아당기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상상했다. 햇살은 아직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방 안에 비스듬히 번진 빛들 속에서 먼지들이 별처럼 느리게 빛났다. 그의 머리칼 끝에서 빛나는 것들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머리칼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위에는 목덜미에, 그리고 뒷목에. 입술을 맞춘 자리를 그가 하얀 손끝으로 더듬는다. 어디에 입 맞추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이. 그 광경이 슬퍼서 또 잠시 웃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입술 자욱이 밀리가 발견 할만한 곳에 있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있다 가요. 부인은 모르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조용히 약간만 고개를 틀어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밤새 바닥 위에서 구겨진 옷들은 주름이 져 있었다. 이든은 그가 부인에게 변명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과연 변명할 만한 일이 있을까. 그녀는 그의 옷 위에 흩어진 구겨진 자국들에 대해 몇 번이나 보아오면서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밤새 그가 서재의 의자나, 소파에 앉아 등걸에 몸을 기대고 책을 펼쳐 읽으며 자신과 내내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오래 앉아있는 사람의 등은 저렇게 구겨지지 않는다. 당신은 집으로 가네요. 집에 가면 부인도, 딸도 있겠죠. 목소리는 꽉 잠겨있었다. 밤새 춥지도 않았는데, 그의 옅은 체온을 내내 끌어안고 있었는데도 목소리는 금방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처럼 꽉 잠겨있었다. 목이 아팠다. 
 집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 마다 눈시울이 따가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눈커풀을 닫았다. 눈물이 고인채로 눈을 감으면 눈 안쪽의 검은 막이 뜨끈하게 아파온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었나. 그의 목덜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책에서 묻어나오는 활자들의 냄새, 오래된 고서적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곰팡이 냄새, 손끝에 묻었을 잉크 냄새 같은 것, 그의 아내가 늘 깨끗하게 빨아서 정갈하게 다려 놓은 셔츠에서 나는 가루 세제의 냄새 같은 것, 그의 사무실에서 늘 흘러나오던 차가운 공기의 냄새, 그의 아내의 향수 냄새. 이든은 울고 싶었다. 처음에는 우연히 울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이따금 울고 싶었으나, 이제는 줄곧 그를 보면 울고 싶어져 왔다. 그가 제게 등을 돌릴 때 마다,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한 침대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때 마다, 등을 돌린 채 푸르스름한 빛에 젖어있을 때 마다, 그의 목덜미에서 아내의 향수 냄새가, 셔츠에서 나는 가루 세제의 내음이 날 때 마다. 
 당신 목덜미에서, 내 냄새가 났으면 좋겠어요. 
 이를 세워 목덜미를 깨물었다. 약간의 붉은 자욱들은 그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질 것이었다. 이든이 속삭이는 말은, 말보다 공기처럼 천천히 흩어졌다. 여전히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빛줄기 가운데서 먼지들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늘 돌아가야 했다. 제게서, 그가 원래 속해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루윈 이바노브. 집으로 돌아가는. 돌아가는. 자신은 늘 그가 잠깐 머무르는 곳에 불과했다. 잠시. 클럽의 응접실에서, 부인 몰래 입 맞추고는 했던 그의 서재에서, 심지어는 자신의 집에서 조차. 그는 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자신과 머물고 난 뒤에도 그에게는 가야할 곳이 있었다.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갖추어져 있는, 그가 늘 쓰는 펜이 잉크 곁에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의 수트들이 나란히 어깨를 맞추어 걸려있는 옷장이 있는 집으로. 그의 집에는 그를 닮은 딸이 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그보다는 밀리를 닮은 듯 했지만 또래와 비교해서 조금 더 흰 얼굴, 총명하게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나 양갈래로 땋아내린 얇은 갈색 머리칼 같은 것은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든은 어린 루윈을 알고 있었다. 지금과 비슷한 성격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열아홉, 열여덟의 그를.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약간 뻗친 앞머리를 손으로 열심히 빗어 내리며 그의 어린 시절의 얼굴을 닮은 아이가 달려 나와 그를 끌어안을 것이었다. 
 그는 베스트를 갖추어 입고 손에 재킷을 들었다. 이든은 가만히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재킷을 집어든 그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움직이지 않는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품안에 있던 온기가 느리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손끝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따듯하게 덥혀진 가슴께를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재킷에 팔을 밀어 넣었다. 앞을 여미고 재킷을 두어번 손으로 쓸어 내리자 툭,툭 소리가 났다. 루윈이 겨우 이든을 돌아보았을 때, 이든은 침대의 모서리에 앉아있었다. 애처로운 얼굴로 그의 흰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금 전에 말했던 것 같은 목소리로 더는 보채지 않았다.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 같았다. 그가 의자 위에 놓여있던 페도라를 집어 들어 갈색 머리칼 위에 눌러 썼을 때 이든은 천천히 침대 모서리에서 일어났다. 벗은 발이 시려왔다. 이든은 셔츠를 입고, 대충 바지를 꿰어 입은 채로 그의 뒤를 쫓았다. 문 앞까지 배웅할게요. 울음을 참은 탓일까 머리가 아파왔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가 떼면서 침실을 지나 집 안을 걷는다. 집에는 거주하고 있는 메이드도, 일꾼도 없었다.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어머니의 말에 이든은 한사코 사양했다. 집은 늘 비어있었고 이든은 그 적막 가운데서 바다를 건너온 책들을 선별하고, 골라 번역했고, 이따금 몇 가지의 칼럼과 기사들을 써냈다. 외로웠다. 아주 자주. 또는 그러한 빈도로. 일주일에 두어번 일하는 여자가 들어와 밀린 집안일과 청소를 해내고 약간의 스프와 요리를 했다. 그러고 나면 그는 하루종일 언제 다시 루윈 이바노브가 올지 모르는 집 안에 앉아 홀로 시간을 보냈다. 거실은 조금 더 빛이 들어 밝았다. 이든은 루윈의 등 뒤로 길게 지는 그의 그림자의 끄트머리를 밟으며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집을 가로질렀다. 문을 열었을 때 아침의 공기, 아직 이슬이 가시지 않은 공기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공기는 일요일 아침이면 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공기는 밤 새 고요 속에서 스스로 정화된 것처럼 맑았고, 두어번의 기침을 할 정도로 쌀쌀했으며 온 몸이 젖을 내릴 것처럼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이든은 그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문고리를 잡고 잠시 멈칫거렸다. 집 안에서 밖으로, 아주 약간 단이 있는 계단으로 발을 디디는 루윈의 뒷모습을 보며 이든은 그의 옷자락을 잡을까 잠시 고민했으나 우는 것이 소용 없다는 것을 안 아이처럼 이든은 조용히 그가 모르는 행동을 그만 두었다. 
 "플로베르"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든은 문가에 기대어 서서 그의 갈색 눈동자를,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페도라를 벗어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는 광경을 가린다. 여름이면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날 정돈되지 않은 정원에서 누가 훔쳐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덩굴들은 높게 자라 담을 덮었고, 담 밖에서는 정돈되지 않은 넝쿨에 가려 집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든은 그 정돈되지 않은, 멋대로 자라는 정원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편안했다. 그의 정원은 영국식 정원에 보다 근접해 있었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산책로 만큼이나 편안했다. 가을이면 담의 안팎으로 심어진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작은 정원을 메웠다. 그의 입술에서는 간밤에 입맞춘 자신의 입술의 맛이 났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곧장 밀리의 인사로 덮일 입술 위에서 만져지는 자신의 흔적을 더듬으며 이든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 그가 잊은 손수건를 쥐어주었다. 그는 정말로 돌아섰다. 천천히 돌아보지 않고 걷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의 등은 늘 올곧게 서있었고 그래서 이든은 그의 등이 굽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곧게 선 등은 돌아가는 등이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정원을 채 다 걸어 정원 끝의 쇠로 된 빗장을 열고 귀를 가득 메우는 쇳소리와 함께 거리로 사라졌다. 이든은 문간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가 입 맞춘 흔적들이 고스란히 온기가 되어 입술 위에 남아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그 키스를 기다린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마셨다. 폐의 안쪽까지 차갑게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핑 돌아나갔다.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지 오래였는데도 이든은 여전히 그 푸르스름한 공기가 가득 찬 아침이 슬펐다. 

 이든은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돌아간 하루를 이든은 느리게 보냈다. 바다를 건너 어렵게 도착한 독일 서적들을 손으로 몇 번씩 쓸어 넘기고, 고르고, 첫문단과 두 번째 문단을 번역하기를 하루 종일 계속했다. 재떨이 가득 담배 꽁초가 쌓였고, 손에는 만년필의 잉크가 묻었다. 이든은 흐르는 따듯한 물에 손에 묻은 푸른 잉크를 문질러 닦아 내며 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오래도록 전화가 울리는 동안 그는 소파 위에 앉아 그것을 지켜봤다. 루윈 이바노브. 그의 전화는 손끝부터 떨려왔다. 마치 그가 전화한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든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등을 곧게 세운 채 예절 교본 속에 나오는 그림 같은 자세로 문을 나서는 루윈의 뒷모습을 생각했다. 그의 머리칼에 어울리는 갈색 수트, 약간의 스트라이프와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페도라. 이든은 그 전화가 울리는 것을 멈출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전화가 울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로 재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유흥가는 저급한 소리로 가득했다. 이든은 그 소란스러운 길거리에 서서 루윈 이바노브를 생각했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보이는 것과는 정 반대인 남자. 등불은 약간의 누런 빛을 띄고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깔깔거리며 우아하지 못하게 웃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정뱅이들이 여자들과 음탕한 농담을 나눴다. 멋 모르는 젊은 남자애들은 그 거리에 몸담는 것이 자신의 미래에 어떤 의미가 되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로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건물들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조용했다. 거리에서 들리는 모든 소음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의 아내도 거리의 여자들처럼 음탕하고 거칠게 웃지 않았다. 밀리. 밀리 이바노브. 그녀의 성이 이바노브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이든은 헛구역질 했다. 그녀의 엷은 색 머리칼이 조금 더 짙었다면, 적어도 상류층의 여자답지 않은 호탕함이 우아하면서도 보기 좋은, 기분 좋은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어깨가 조금 덜 무거웠을 지도 모른다. 사려 깊으면서도 활발하고, 아이를 사랑하면서 남편을 보살피는, 남편의 오랜 친구에게 까지도 조건 없이 상냥한 그녀의 성격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든은 조금 더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신사분, 들렀다 가시지 그래요? 여자의 목소리는 약간의 유혹과 약간의 조롱으로 움틀 거렸다. 얇고 고우면서 날카로운 음색은 말을 할 때 마다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게 일그러졌다. 이든은 깔끔한 영국식 억양으로 말하는 남자를 떠올렸다. 겨우 그의 전화에서 도망친 주제에 다시 그의 생각을 하며 누런 불빛이 빛나는 거리를 걸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저급한 홍등가의 끝자락에 다가섰을 때, 이든은 가난하고 허름한 사람들이 모인 펍 안으로 기어들듯 들어갔다. 뭐야 저새끼는. 희미한 웅성거림 가운데서 이든은 느리게 웃었다. 느리게 웃음이 얼굴 위로 번져 나갔다. 이든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싸구려 맥주에 싸구려 닭요리를 시키고 앉아 술집 주인과,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몇몇의 배불뚝이 사내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었다. 부녀자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우스운 낭만 문학의 이야기들, 발을 절룩거리며 저급한 거리를 빌빌거리고 돌아다니는 개의 이야기, 어느 광산의 파업 이야기며 지식인에 대한 우스운 조롱들. 이든은 가만히 앉아 싸구려 맥주를 들이키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와 있을 때에는 한 번도 그렇게 웃지 못했던, 그런 웃음소리로. 그날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싸구려 술집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공원과, 거리와, 도서관 사이를 느리게 산책하고 아주 늦은 밤에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전화가 울렸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루윈은 다시 전화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살롱은 몇몇의 사람들도 붐볐다. 붐빈다고 표현하기에는 사람의 수가 적절치 않은 감도 있었으나 그들은 마치 오랜만에 본 사람들처럼 만나서는 곧장 간단한 안부와 함께 이야기를 꺼냈다. 이든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학파의 이야기, 어느 논문의 이야기, 새로 대두된 의학적 사실들, 외교적 위치가 정치에 주는 영향들. 배불뚝이 사내들이 펍에서 떠들어대던 소리와 흡사한 주제들이었다. 다만 그 내용이 달랐을 뿐이다. 이든은 살롱 안을 천천히 둘러 보다가 흰 얼굴의, 갈색 머리칼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를 발견하는 것은 늘 손쉬웠다. 그는 이든이 그를 살롱에서 처음 만났던 날처럼 벽에 기대어 빛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 위로 쏟아지는 빛 속에서 먼지들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두어명의 사람에 둘러싸여 새로 편집하고 있는 책의 이야기를 꺼내었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이 마주쳤다. 세 번, 네 번. 이든은 그와 눈이 마주친 횟수를 세다가 다섯 번, 그가 몸을 돌려 살롱을 벗어나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손가락이 벽지를 훑었다. 볕이 좋았다. 열린 창문마다 볕이 들어 살롱과 복도 안은 모두 희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든은 몇 일간 보지 못했던,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줄 곧 눈 앞에서 아른 거리던 남자의 등을 보며,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이든은 습관적으로 아주 기민하게 문을 잠갔다. 그의 등은 희게 빛을 받아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지난 몇 일간 떠올릴 때 마다 슬펐던 등이 가만히 미동하지 않고 방 가운데에 멈추어 서 있었다. 
 
  "딸이 보고 싶어 해"
 
 이든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없어도 괜찮았어요?"
 
 목이 매여 말이 흐리게 번졌다. 말꼬리가 느리게, 숨이 모자란 사람처럼 흐리게 번졌다. 이든은 그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려다가 돌아서는 그를 보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맨 넥타이의 매듭을 이든은 늘 잘 구분했다. 간결하게, 그다운 단정함으로 정갈하게 매인 매듭에 시선이 머무르던 찰나 따듯한 입술로 입술이 덮였다. 이든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손바닥으로 그의 갈색 수트 위를 보듬었다. 이든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키스를 기다린 사람처럼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온전히 감각을 맡겼다. 볕이 따스했는데도 여전히 조금 슬펐다.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The Nights of NewYork 01  (0) 2011.10.17
Bloomsbury 03  (0) 2011.09.13
Bloomsbury 01  (0) 2011.09.13
by merone

滿潮


 이든 플로베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창에 꿰뚫려 너덜너덜해진 세스의 팔이 자신의 발치에서 덜렁거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힘없이 늘어진 시신에 어깨와 등이 굽었고 경추에서 허리로 내려오는 척추들이 견디기 어려운 무게에 잠시 휘청였다. 이든. 관을 들 때는 어깨로 드는 거야. 흘러내리지 않도록. 매고 다른 손으로 관을 잡아. 저스틴은 전에도 조부의 관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얀은 멀찍이서 검은 양복을 입고 생애 처음으로 관을 들고있는 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얀과 눈이 마주쳤을 떄 얀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미국 십대들이 대개 그렇듯이 소년의 티를 완연히 벗고 청년의 몸을 한 남자애들은 대게 손이나 발부터 자라났다. 어른이 되기에는 어깨가 조금 모자랐고 아직 덜 자란 티를 내듯 목 뒷덜미에 빛에 비쳐야만 보일 법한 솜털이 남아있었다.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 조금 모자란, 청년의 티가 드러나는 이든과 저스틴의 어깨 위에 묵직한 관이 올라왔을 때 이든은 숨을 멈췄다. 짐의 무게가, 사체와 관의 무게가 아직 덜 자라난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흔들었다. 이든과 저스틴은 한발자국씩 앞으로 내딛을 때 마다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이든은 세스를 안고 걸어가며 짐의 장례식을 생각했다. 이든의 아이보리색 터틀넥은 오래전에 모래 빛으로 지저분해져 있었고 이미 황폐하게 변해버린 땅의 모래냄새 위로 세스의 몸과 닿은 곳 마다, 세스를 안아 일으킬 때 닿았던 곳 마다 피로 얼룩져 있었다. 관처럼 어깨에 들쳐 매었으면 조금 더 수월했을 지도 모른다. 성인 남자의 무게는 생각보다 버거운 것이어서 이든은 짐과 짐을 넣었던 관을 생각했다. 세스. 그가 죽는 순간 눈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행세계에서 돌아가면 세스도 관 안에 무겁게 내리 잠길 것이었다. 이든은 물에 가라앉는 구멍 난 보트처럼 땅 아래로 꺼져가던 짐의 관을 떠올리고, 꽃을 떨어트리며 내려다보았던 구덩이 안에 세스가 가라앉아 있는 것을 상상했다. 본래 속해있던 세계로 돌아오면서 이든은 지금까지의 죽음들과 세스의 죽음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했다. 이든은 이제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친구들도 짐도 아이다도 그냥 죽었을 뿐이었지만 세스는 그가 죽였다. 또는 죽는 것을 관조했다. 

 "먼저 가요"

 호텔에 도착했을 때 이든은 그들의 등 뒤에 말했다. 세스를 눕혀야했다. 아니 그는 죽어있었음으로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쓰는 형용사는 산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든은 세스를 어딘가에 '놓아야'했다. 크루거가 돌아보았을 때 이든은 약간 웃었다. 가요. 입술만이 움직였다.  
 그는 동료들과 뒤떨어져 복도를 걸었다 호텔의 길게 늘어선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 위에서 이든 플로베르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장례식장에도 이런 카펫이 깔려있었던가. 이든은 아득하게 흔들어 놓은 기억 속을 더듬다가 오히려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에 어울릴 법한 부드러운 카펫 위를 걸어 가까스로 나타난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세스의 무릎 뒤를 받쳐 안았던 팔을 느리게 움직였다. 팔을 움직일 때 마다 몸의 무게중심이 기울어 세스의 팔이 덜렁거렸다. 제발.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이든은 빌었다. 제발. 굽혀있던 팔을 천천히 펴고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이든은 하얀 시트로 뒤덮인 침대 위에 세스를 내려놓았다. 세스의 몸에 묻어있던 핏자국의 일부가 시트에 묻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미 세스의 사체 위에 굳어 떨어지지 않았다. 세스. 세스의 이름을 곱씹을 때 마다 이든은 언어가 아니라 다른 것을 곱씹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할 사람이 없는 것은 사물에 대고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컵. 책. 노트. 그런 것들과 같이 아마 세스의 이름은 불려도 대답없이 오랫동안 이든의 주변을 맴돌다가 비석으로, 묘비에 새겨진 한 종류의 알파벳의 나열로 끝날 것만 같았다. 이든은 너덜거리는 세스의 팔을 바라보았다가 차갑게 굳은 손을 조금 끌어올려 반대편의 멀쩡한 어깨와 길이를 맞추어 놓았다. 퍼즐처럼 그의 팔은 아귀에 맞아 들어갔다. 이든은 그를 놓아두고 자리를 떳다. 모두가 향한 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든은 잠시나마 예측하고 있었다. 헤일리의 목소리와 헤드의 목소리가 오가다가 그들은 잠시 방을 벗어났다. 떠나갔던 절반과 남아있던 절반이 합해 전부가 되었는데 한 사람이 부족했다. 그리고 곧 한 사람이 더 부족하게 되겠지만. 이든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세스의 어깨춤을 한번 더 바라보고 곧 등을 돌렸다. 괜찮았다. 슬픔과 자책은 천천히 밀려드는 것이었다. 아직은 밀물의 때가 아니었다. 

 피가 덕지덕지 엉긴 셔츠에 손을 문질러 닦고 이든은 방문을 열었다. 헤일리의 눈이 셔츠에 와 닿았다가 사라졌다. 이든은 벽에 기대듯 한쪽 어깨가 벽에 스치도록 방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벽에 기대어 서서 의견을 묻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든은 방 안을 살폈다. 헤드는 없었다. 이든은 멀리서 들리던 소음과 머릿속에서 울리던 소음을 다시 한 번 그렸다. 시선의 끝에는 익숙한 남자가 무리의 뒤쪽에 빠져나와 서있었다. 이든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주변을 흘려보냈다. 최소한의 주의와, 최소한의 정신만이 그 방 안에 남아있었다. 필요 없는 것들, 과한 것들, 저만의 문제인 것들, 이제 밀어 닥칠 것들. 많은 것들이 최소한의 주의만을 거기에 둔 채 머릿속과 가슴 속으로 말려 들어왔다. 나머지의 것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것들은 여기서는 필요 없었다. 이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후회하고 견뎌내야하는 것들은 늘 개인의 문제였다. 이제는 오롯이 그만의 문제였다. 불평할 사람도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든 플로베르는 망설이기는 했으나 그렇게 비열하지는 못했다. 이든은 루윈에게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어냈다. 그는 평소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같은 표정으로, 같은 자세로 무리에서 두발자욱 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이든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든은 헤일리의 눈길이 다시 한 번 제 얼굴에 닿았을 때 헤일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고 이든은 손으로 벽을 더듬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는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발목까지 잠겼던 물들이 거센 물살로 이든의 발목을 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든은 세스가 관 속으로, 구덩이 속으로 가라앉는 생각을 했다. 계속. 뇌 안에서 재생되는 예지처럼. 

 "제거"

 이든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괜찮았다. 감정과 이성은 별개의 문제들이었다. 그는 최소한의 이성과, 최소한의 주의만을 남겨두고 사고했지만 대신 나머지의 것들은 이미 양피지 자루처럼 말아 한켠에 치워놓았다. 아직은 밀물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들이 닥치기 전까지, 아니 들이 닥친 후에도 이든 플로베르는 가장 이성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을 테지만 지금도 그는 이성적이었다. 세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누군가가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든은 자신의 책임을 도그마에게 덮어씌울 만큼 비열하지는 않았다. 다른 어딘가에 감정을 내버리는 것 보다는 혼자 삭이는 것에 성격에 맞았다. 이든은 고든이 했던 말들을 기억했다. 이든, 자네 세상에 외계인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세상이 아니지 우주에. 별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오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헤일리를 보면서 이든은 조금 더 웃었다. 지구에 다다를 수 있는 문명을 가진 것들이 지구에 올 때, 그게 과연 순수한 호기심일 확률은 없네. 무에 가깝지. 이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가늠했다. 그와 지금껏 같이 움직였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능력은 무력감에 가까웠고 말은 언제나 행동보다 가볍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그들의 능력은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무서웠고, 이든은 다시한번 키스를 떠올리며 그의 불필요한 강함을, 적어도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과하게 느껴졌던 그의 유능함을 가진 도그마들을 생각했다.

 "우린 끝장을 보게 될 거에요 헤일리. 역사책을 하나만 뒤집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죠."

 이든 플로베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언젠가 끝을 보게 될 터였다. 지금 당장의 공존은 결국 나중의 제거로 이어지게 될거라고 이든 플로베르는 확신했다. 그의 확신은 들어맞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도 이든은 자신의 생각을 오만하리만큼 확고하게 믿었다. 그는 고든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 문명을 가진 것들이 순수한 목적으로 이 먼 거리를 날아왔겠나? 이든은 천체물리학에, 우주물리에 관심을 가진 고든을 기억했다. 그는 손자를 잃었고 그리고 이든에게 벌레구멍의 이야기를 했다. 이든이 아이다를 떠올리고 있던 그 춥고 오붓했던 겨울의 크리스마스 서재에서. 역사책을 하나만 뒤집어 봐도 알 수 있는 일들이었다. 고든의 이야기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고든은 의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든의 곁에서 잠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 책상 위에 쌓여있던 몇 가지의 우주에 관한 책들 가운데에서 역사책을 펼쳐들었다. 이든은 책을 내려다보고 고든을 돌아보았다. 교수님 연구는요? 고든은 웃었다. 나 대신 네가 하잖나.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시 제거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든은 효율적인 쪽을 택했다. 강한 것들은 언제든 드러나기 마련이었고 도그마들의 힘을 알고 있는 이상 이든은 그들이 언제까지 죽은 듯 지내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아주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었고 이든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벽에 기대어 서서 그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헤아렸다. 그들 내의 단 한사람만이라도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순간 조직은 분열되고 반발은 일어날 것이다. 또는 도그마들의 힘은 인간을 위협하기 충분했고 힘있는 것들은 언제고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능력은 언제든 인간 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 충분했다. 그것들이 지금 당장 드러나는가 혹은 공존 뒤에 수개월, 수년 또는 수십년의 세월을 거쳐 더 발전되고 조직화된 형태로 드러나는가의 차이였다. 인간으로 이루어진 반란군 조차 세월이 지날수록 무서워지고 똑똑해지는 법이었다. 지금 당장 그들의 수장을 죽이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그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적절히 이용하고도 남았다. 고든이 펼쳐든 역사책의 페이지만을 돌아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든에게 그들은 한 종류의 외계의 생명이었고 그들에게는 인간들 사이에서 고요하게 침묵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생존을 위해서. 이든은 그들의 말 가운데 가장 못미덥고 위험한 단어를 꺼내들었다. 카드놀이를 할 때 뽑아져 나오는 조커에 다름없었다. 단지 생존을 위해서. 이든은 심리학자였고 생물이 가장 무서울 때는 그들이 생존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임을 그는 알았다. 생존은 모든 욕구의 기본이었다. 모든 공격성과 이성의 가장 아래에 있었다. 이든은 그들이 미덥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이든은 자신에게 시선이 머물러있던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루윈의 눈을 갈색이었고 이든은 그를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지났을까. 이든은 헤일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걸어 나왔다. 주저앉고 싶었다.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는 끈적거리는 손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이든은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기척에 얼굴을 찡그렸다. 웃어보이려고 하다가 상처의 아픔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던 탓이었다. 루윈은 이든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이든은 힘이 들었다. 최소한의 주의와 최소한의 이성,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있던 것들을 이든은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감정들은 나중에 밀어닥칠 것이었다. 조금씩. 아주 고통스럽게. 여러 번에 나뉘어. 이든은 입에 물고 있던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재떨이 위에 담뱃재를 털었다. 그는 소파 위에 몸을 묻으며 앉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루윈은 의자를 끌어당겨 제게로 다가왔다. 남자의 그런 몸짓에 이든은 힘겹게 입술을 올려 웃다가 뺨 안쪽의 상처가 아파 조금 덜 웃었다. 조금 다쳤어요. 루윈은 왜 그렇게 다쳤냐고 물어보았지만 이든의 대답은 속 시원한 것은 못됐다. 더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이든은 루윈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론이 자신을 때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얽혀있을 것이었다. 단순히 세스가 죽어서였을지도, 아닐지도 몰랐지만 그건 이든이 알고 있는 바는 아니었다. 얼굴을 긁히기라도 했나봐요. 루윈의 말에 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얼굴의 여기저기에 닿았다 사라지는 온기에 집중했다. 그의 손 끝에서 소독약의 냄새와, 거즈들에서 나는 병원의 냄새, 알코올의 냄새 같은 것들이 감돌았다. 구급상자를 뒤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든은 혼미하게 죽음과 알콜과 소독약의 냄새에 취한 채로, 상처로 부르튼 입술로 그에게 키스하려다가 관두었다. 자신의 입술에서는 비린 맛이 감돌았을 것이다. 이든은 그에게 키스하는 대신 약간 지푸려져 있는 듯한 걱정과 무관심 사이에서 애매하게 멈추어 있는 듯한 루윈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든은 이 호텔 안에 있는 사람 중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의 아내조차 그의 무표정하고 무관심한 듯한 얼굴 위로 서리는 잠깐의 미혹들을 근심들을 몰랐을는지도 몰랐다. 

 "그쪽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에요?"

 루윈은 물었으나 이번에도 이든 플로베르는 모르는 척 대답했다. 늘 후회는 개인의 것이었다. 개인의 것이 아닐 필요가 없었다. 뭐가요. 이든이 그의 갈색 눈동자와 눈썹들을 살피는 사이 루윈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젖은 수건을 가져와 이든의 얼굴을 닦았다. 그 나이의 남자치고는 세심한 치료였다. 이든은 그에게 곧 다섯 살이 된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넘어지고 깨져 늘 어딘가 다치기 십상이었다. 이든은 자신이 모르는 남자의 과거를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잘 짜여진 약간의 마른 물기로 얼굴이 천천히 닦여 나갔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울대가 울렸다. 헤일리의 질문에 대한 선택이요.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든은 그 순간 냉정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든은 자신의 실수를 누구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그것에 대한 선택으로 그가 좀 더 나을 거라고 확신한 어떤 생각과 이유들에 근거해 있었다. 루윈은 이든의 상처와 그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자신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아도 호텔 안의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세스는 죽어서 침대 위에 놓여있었고 그가 그렇게 되도록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얼굴 위를 젖은 수건으로 닦으며 제 걱정을 하고있는 이 남자 조차도. 
 루윈은 얼굴을 닦아내어주고 난 뒤에 웃옷을 걸쳤다. 이든은 소파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가요. 이든은 그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 집에 다녀올게요. 이든은 그의 대답이 조금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집에요. 집에 가요.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루윈에게 이든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래요. 마치 이전에 그에게 했던 대답과 같았다. 빨리 결혼하면 그럴 수도 있죠. 루윈의 말이 떠올랐다. 이든은 그때도 그에게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이든은 루윈이 나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리가 휘청거렸다. 세스를 다시 볼 자신은 없었다. 세스에게 가려고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몇 가지의 필요한 것들이 거기 있기를 바래서였을 뿐이었다. 이든은 피가 묻은 터틀넥 셔츠 대신 갈아입을 것이 필요했다. 약간의 술과, 담배와, 세스의 피가 묻지 않은 셔츠. 이전에 루윈을 만났을 때처럼 그 것들은 옷장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두어병의 위스키와, 두 갑의 담배. 이든은 그 자리에서 셔츠를 벗어 옷장 안에 던져 넣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직도 몸에서는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마 터진 입안에서 나던 피냄새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든은 테이블 위에 술병을 올려놓고 러그 위로 내려와 앉았다. 




 "플로베르"

 루윈은 그를 이제 플로베르라고 불렀다. 이든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든은 그의 호칭에서 그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제게 내어줬음을 알았다. 이든은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그에 한해서는 오래 알고 있었던 사람을 보는 것처럼 직감적으로 굴었다. 그것은 이든이 지금까지 쌓아온 객관적으로도 많은 수에 속하는 여러 사람이 이든 플로베르에게 남긴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이든은 직감적으로, 그리고 그보다는 정확히 경험에 근거해 루윈의 말들을 걸러들었다. 그는 이든을 이제 플로베르라고 불렀고 호텔의 러그 위에 앉아 이든은 이제는 확실하게 죽음과 소독약과 알콜에 취한 채로 루윈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왔어요?"

 루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지푸려져 있었다.

 "언제부터 마셨어요"
 "당신이 가고 난 다음부터요"

 루윈은 그저 말없이 눈을 잠깐 감았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동안 그는 어디에선가 그쪽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듣고왔을지도 몰랐다. 이든은 그가 말하지 않는 동안 비어있는 글라스에 술을 따랐다. 그에게 권하지도, 술을 마시는 것을 멈추지도 않았다. 재떨이에는 이미 한 갑 이상이 되어 보이는 담배들로 가득했다. 왜 그랬어요. 루윈의 말에 이든은 대답없이 웃었다. 술이 들어갈 때마다 입안의 상처가 쓰려왔지만 이든에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곁에 와 앉은 루윈이 상처를 치료해줄 때처럼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이든은 러그 위에서 올라와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을 조금 끌어당겼다. 상체를 내밀어 손을 다 뻗지 않아도 약간의 거리면 손이 닿을 수 있는 그 거리를 가로질러 키스했다. 루윈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든을 떼어내지도 않았다. 약간의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을 뿐이었다. 이든은 소파에 앉아 남아있는 술병을 천천히 비워나갔다. 한모금 들이킬 때 마다 입 안이 쓰려와 줄곧 미간을 지푸린 채로 마셨지만 이든은 미리 비워놓은 한 병의 위스키 옆에 두병을 더 비우고 한갑의 담배를 더 피웠다. 루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든은 그런 그를 보며 간간히 조금씩 웃었다. 이든이 그에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그는 루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몸 위에는 누군가가 꺼내어 덮어주었을 담요가 덮여있었다. 루윈. 이든은 그를 부르듯 입 안에서 남자의 이름을 되뇌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의 달빛이 방 안에 스며들듯 침대와, 소파와, 옷장을 비췄다. 이든은 침대 위에 시트 아래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모양을 발견했다. 그는 비척거리고 일어서 침대 위에서 조용히 잠들어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본 뒤에 욕실로 달려 들어가 어제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그가 어제 먹은 것이라고는 위를 녹여버릴 것 같은 세병의 술과, 두 갑의 담배 연기, 한 잔의 물 정도 밖에는 없었다. 이든 플로베르는 위액이 나올 때 까지 액체들을 게워냈다. 찬물로 입을 헹구고 얼굴을 닦은 뒤 거울을 올려다 보았을 때 이든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의, 약간의 피곤함만이 가시지 않은 얼굴의 남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나가 루윈이 잠든 침대 곁에 무릎 꿇고 앉았다. 두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끼고는, 그 위에 턱을 올려놓고 흐린 빛에 물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부는 백인들 중에서도 창백한 축에 속했다. 루윈. 이든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그가 뒤척였다. 손을 들어 앞머리를 살살 훑으면서 이든은 잔숨결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바라봤다. 부모가 자는 사이에 큰 사고라도 쳐놓은 아이처럼 루윈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는 어느 새랄 것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완연히 다 자란 어른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이다가 죽었을 때도 이든의 어깨는 어른의 어깨가 되어있었다. 플로베르. 루윈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시트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낙엽 소리처럼 들렸고, 루윈이 몸을 일으키며 침대가 출렁였다. 루윈은 말이 없었다. 이든은 한참 동안 자신의 다 자란 어깨 안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달빛이 사그라드는 동안 새벽빛이 들었다. 흰 시트가 푸르스름해 졌고 그 때도 이든은 울고 있었다. 등 뒤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호텔의 창밖을 내다보면 물이 밀려드는 바닷가가 보였을 지도 몰랐다. 루윈의 숨소리는 울음소리 사이에서도 가늘게 귀에 들어왔다. 이든은 소리 없이도 한참을 울었다. 감정들은 물 밀듯 밀려오는 것이었다. 느리게. 오래도록. 여러 번에 걸쳐서. 알고 있음에도 예기치 못한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만조였다.

'PROJECT-D' 카테고리의 다른 글

Happy Birthday  (0) 2011.10.14
Sleeping Pill  (0) 2011.10.14
Trigger  (0) 2011.09.21
Mint Cookie in Suit  (0) 2011.09.05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0) 2011.08.21
by merone

Trigger


 이든 플로베르는 갈색 머리칼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평소와 다르게 흰 이마를 가리고 있는 머리칼들을 손가락으로 느리게 왼쪽으로 쓸었다. 이든의 손가락은 그렇게 힘있게 머리칼을 넘기지 않았고 부드럽게 손가락 위를 스쳐지나간 머리칼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둥근 이마를 가렸다. 루윈 이바노브의 약간 창백하리 흰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는 이제 슬슬 다시 호텔 벽난로에 장작을 태워야할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벽난로의 안쪽은 까맣게 그을렸지만 봄과 여름동안 잘 닦인 채 정리되어있었다. 다시 벽난로에 장작을 태울 계절이 다가오면 가끔 이는 발걸음과 옷자락에서 이는 바람에 재가 날리고 턱턱거리며 나무껍질이 튀는 소리가 방 안을 메울 것이었다. 사실 벌써 구두 안에 갇힌 발은 조금 차가워져 있었다.

 “다녀올게요”

 이든이 말했을 때 루윈은 무릎 위에 놓여있던 신문을 반으로 덮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이마를 덮고 있던 갈색 머리칼들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이든은 다시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이 눈을 찌르지 않도록 머리칼을 넘겼다. 루윈은 신문을 한 번 더 접고 소파에 기대어있던 상체를 약간 움직여 테이블 위에 신문을 내려놓았다. 루윈은 호텔에 있었지만 마치 다른 옷은 입지 않는 사람처럼 하얀 셔츠에 정돈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넥타이를 매고 있지 않았다. 단추가 정확히 두 개 풀어진 셔츠 사이로 얼굴의 그늘이 드리워져 약간 그늘이 잠긴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는 입술을 잠시 열었다가 닫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옅은 색의 그림자가 드리운 목덜미에서 목울대가 움직였다.

 “거긴 괜찮아요?”

 루윈의 말투는 건조했다. 그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적어도 한번쯤은 확인해야겠다는 말투로 이든에게 그렇게 물었다.

 “별 문제 없을거에요”

 이든은 그의 최소한의 배려에 웃었다. 별 문제 없을 거에요. 그래야하고요. 덧붙이려던 말을 삼키면서 이든은 신문을 내려놓은 루윈의 얼굴을 바라봤다.

 “잘 다녀와요.”

 루윈의 말투에서 이든은 긴장감이나, 불안감, 걱정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게요. 이든은 이번에는 손바닥을 펴 가지런히 내려와 이마를 덮은 루윈의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희고 둥근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입술은 긴장으로 말라있었고, 이마에 입 맞추고 난 자리에는 아무런 소리도 남지 않았다. 이든은 루윈이 자신의 상태를 모르기를 바랐다. 이제 이든에게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했던 기계를 가지러 헤이든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이든은 약간 손을 떨었다. 긴장하면 흔히 나오는 버릇이었지만 지금 당장 루윈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적어도 이든 플로베르가 그의 지푸려진 미간에 키스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알았겠지만, 이든이 긴장하면 손을 떤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앞으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든은 그와 함께 있던 방에서 자리를 뜨기 전에 담배를 한 개비 태웠다. 이든은 약간 손을 떨었다. 루윈은 담배연기에 미간을 조금 지푸렸다. 이든은 담배연기가 가시지 않은 입술로 루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든이 그를 보며 약간 웃는 동안 누그러진 무표정으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이든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허리를 세웠다. 다녀올게요. 말로 내뱉는 대신 이든은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그리고 손이 떨리지 않도록 손을 우그러트려 주먹을 쥔 채 걸어나갔다.

 폐허가 된 도시로 걸어가는 동안 이든의 발밑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먼지가 이는 땅은 좋은 땅이 아니었다. 미들스쿨의 운동장이라도 되는 것이었으면 모를까 사람이 살기에는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이든은 얀과 함께 정원을 가꾸면서 얀에게서 좋은 땅과, 좋은 잔디와, 좋은 비에 대해서 익혔다. 얀은 정원사는 아니었지만 그 일대의 어떤 미국인 아버지보다도 잔디를 잘 깎았고 누구보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멋지게 만들 줄 알았으며 지붕 위를 예쁘게 장식할 줄 아는 남자였다. 이든은 발끝에서 부옇게 이는 흙먼지를 바라보다가 잠시 멈추어 섰다. 눈을 거치지 않고 뇌 안쪽으로 침투해온 영상을 그는 암호를 해독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읽어나갔다. 일행의 눈앞에는 거의 다 스러져가는 탑이 있었다. 이든의 눈에 그것은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피사의 사탑과 흡사했지만 조금 더 흉측했다. 갈릴레이가 깃털과 무게추를 떨어트리는 실험을 하기에 피사의 사탑보다 적합하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탑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천장은 뚫려있었고 더 둘러보지 않아도 그것은 충분히 폐허로 보였다. 불이 있었던 자리 같네. 세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마도 그것이 도그마들의 에너지원이었을거라고 추측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생각나 이든은 고개를 위로 한 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바비큐 파티 하기 좋은 곳인 것 같은데”

 이든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보폭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몇 걸음 움직이다가 뒤를 돌았다. 크루거의 말에 이든은 약간 웃었다.

“맥주 생각나죠?”

“그래”

 “챙겨올 걸 그랬어요.”

 지금쯤 미지근해졌겠지만. 마치 그리스의 유적 앞에 서서 거대한 과거를 바라보며 오늘 밤에는 펍에 가서 술 한 잔 걸쳐야겠어하고 말하는 관광객들 같았다. 크루거가 발로 타일을 두드렸다. 텅 빈 탑 안에 그의 발소리가 울리는 동안 이든은 뚫려있는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비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내려올 것 같았다. 크루거는 무언가 발견한 사람처럼 허리를 굽혔다.

 “조”

 이든은 이번에는 그를 제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와 크루거 사이의 호칭은 이제 제멋대로 들쭉거렸다. 크루거가 그를 선샤인이라고 부르는 만큼 그들의 호칭은 제멋대로였으나 이쯤되면 이든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크루거를 대하고 있을 때면 이든은 그들 사이의 몇 년 간의 연륜의 차이에 대해서 실감하기는 했으나 그는 그것을 감안할 정도로 충분히 시덥잖은 농담을 건넸고 가벼운 농담들은 무게 있는 말을 전하기에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편안했다.

 “놈들이 올거에요”

 이든은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조 크루거는 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위를 올려다보았다. 놈들이 올거에요. 이든의 목소리를 들은 일행들은 멈추어 섰다. 이든은 그들 모두가 자신처럼 위를 올려다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이든의 예지는 그들 모두에게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도그마는 날아왔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둘이었지만 이든은 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는지 그때에서야 알았다. 날아오는 모습이 뇌 안에서 낡은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투는 너무 쉽고 용이하게 끝났다. 이든은 탑의 중간에 붙잡힌 도그마를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쳐 중앙에서부터 벗어나 걸어나왔다. 조 크루거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이든의 곁에 서있었다. 벽은 차가웠고 이든은 벽에 천천히 등을 기대며 약간의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심리학자였고, 과학을 신으로 떠받드는 사람이지만 마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 처럼 그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벽의 한기에 약간 몸을 떨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아나? 크루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이든은 오래된 앨범 사이에 끼워진 사진을 보는 사람처럼 도그마와 세스를 멀리 내다보았다. 이든은 그의 말을 듣다가 간간히 웃었다. 노망이 들었다 진짜. 크루거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이든은 키스의 군화 아래에서 뭉개어지는 도그마의 손가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리고 아마 조 크루거도 같은 것을 보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럴 필요 없잖아요. 이든은 자신이 키스에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생갱하게 들리고있다고 생각했다. 키스의 강함은 불편했고 이든의 생각에 그는 필요 이상으로 강했다. 그리고 언제나 모자란 것을 채우는 것은 쉬워도 넘친 것을 주워담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이든은 그의 강함이 임계치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그의 특성을 가늠해보고자 했으나 그것은 이든의 영역이 아니었고, 이든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든은 벽에 기대어 크루거의 질문에 답했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나? 한참 독서에 취미를 들인 열여섯의 소녀가 물어볼 법한 질문에 이든은 한쪽 미간을 지푸렸다가 다시 세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웃었다. 아직 상자에서 안나온 것 같은데. 이든은 크루거의 말에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렸다. 어딘가에 있기는 하겠지만 제 눈앞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든이 처음 상자를 열었던 것은 대학에 들어왔던 해의 봄에 펍에서 울고 있던 아이다를 보았을 때였다. 사실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거기에 무언가가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든은 곧 다시 거기에 희망을 남겨둔 채로 상자 뚜껑을 덮었다. 그녀는 그가 상자를 발견한 뒤 얼마 가지 못해 사라졌다. 이든은 그 상자가 자신의 것이 아닐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는 상자를 다시 발견하지 못한 채로 여러 사람들의 사이를 전전했고 외로움과 외로움의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든 플로베르는 심리학적으로 외향적인 지표에 치우쳐져있었고, 불안정한 사람인가 안정적인 사람인가 가늠하면 대개 안정적인 사람에 속했다. 그의 십대와 이십대의 절반을 깎아먹은 주변인의 죽음은 그에게 큰 트라우마를 심어주기에는 충분했지만 사람의 특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또한 이든은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밝았지만 낙천적이지는 못했고, 희망이 없다고는 얘기하지 않았으나 희망이 모든 사람 앞에 하나씩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주어질거라는 안이한 생각은 하지 않는 축에 가까웠다. 상자는 있고, 안에 뭔가 들어있는지는 확인했는데, 상자가 내 것인 것과는 다른 문제지. 이든 플로베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희망이 남아있으리라고 믿었다. 크루거는 급작스레 수통에 물이 없다고 말했다. 유서에 나랑 같이 묻어달라고 써놔요. 당신 나 좋아하잖아요. 전우애를 뒤집어쓴 게이 같은 농담에 조 크루거는 의연하게 대답하면서 웃었다. 그는 적어도 이든에게 헛소리를 지껄이게 할 만큼 편했고 이든은 그의 시덥지 않은 위트를 들으며 웃었다.
 
돌연 세스의 질문은 달라졌다. 이든은 차가운 벽에서 등을 떨쳐냈다. 벽은 이든의 체온으로 약간 덥혀있었고 돌연 떨어진 등 위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크루거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든은 세스와 도그마에 시선을 고정했다. 머릿속에서 수 많은 영상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때로 그것들은 오래된 코닥필름처럼 노랗고 파란 색감 위에 흐린 필터를 입힌 것처럼 흘러가거나 이따금 노이즈로 흐려졌으나 이든은 긴 영화를 짧게 압축해서 보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관전했다. 그가 모든 것을 흘려보고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고 몇 번을 되풀이해도 그것은 기괴한 경험이었다. 상영시간이 족히 한시간이나 되는 영화가 단시간에, 고작 몇 초, 아니면 몇 분 안에 머릿속에 박혀드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눈과 귀를 거치지 않고 뇌 안에서 그대로 재생되었다. 이든은 네 마리의 도그마가 탑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헤이든과 론이, 안젤로와 키스가, 세스와 가르지울로가 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이든은 천천히 걸어나가 그들 모두에게 간단히 상황을 요약한 뒤 크루거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당신 물 없으면 형편없잖아요. 다시 돌아온건 시덥잖은 농담이었다. 너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이든은 자신이 개소리를 해대기 전에 농담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크루거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설사 그게 그들의 언제나와 같은 패턴이라고는 하더라도 이든은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크루거라는 사실에 감사했다.내가 물에 젖으면 더 볼만 해 질텐데. 조 크루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든은 온갖 신경을 쏟고있던 총을 그 자리에서 당장 부숴질 만큼 강하게 던져버렸을지도 몰랐다. 이든은 작은 물방울들이 수로를 내리치는 소리를 들으며 기억을 곱씹었다. 세스는 허공에 들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든은 잠시 바닥에 누워있는 세스가 일어나기를 기대했다가 눈을 감았다. 크루거는 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제이, 이쪽은 맡길게요. 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람의 표정과 죽은 사람의 표정을 분간할 수 있었다. 짐의 시신을 보지 않았다면 이든은 그 때 자리에서 튀어나가 세스를 향해 달려다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가르지울로의 뒷모습이 망막 뒤에 맺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든은 달렸다. 숨이 모자라 가슴이 들썩거렸다. 

 이든 플로베르의 손끝에는 방아쇠가 걸려있었다. 이든은 정말로 그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되었으나 그는 술을 마신 사람처럼 손을 떨었고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이든은 어깨에 창이 박힌 채로 허공에 끌려올라가고 있는 세스를 보며 도그마를 조준했다. 한 번도 총을 거머쥔 적 없는 남자의 사격실력이 얼마나 좋을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든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손목에 걸려있는 자신의 낡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도그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손이 떨렸다. 한 번도 총을 거머쥔 적 없었던 이든은 몇 번의 연습이 무색하게 손을 떨었다. 단순히 자세를 잡는 것만으로는 그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드러내주지 못했다. 숨을 토해내기 위해 가느다랗게 열린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숨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세스의 목소리나, 가르지울로의 목소리,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들이 등 뒤에서 또는 눈앞에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이든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시발 개새끼들이 총을 가지고 왔어. 이든, 이든 개새끼야. 숨으라고. 짐의 목소리가 발걸음보다 한걸음 앞에서 이든의 등허리를 덮쳤다. 이든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도그마를 겨누고있었다.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마저도 짐의 목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다. 얼마만큼의 망설임이 허락되었는지 헤아려볼 시간은 없었지만 이든은 망설였다. 생에 최초의 살인을 눈앞에 둔 사람의 망설임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본능적으로 자신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귓가에 울려퍼지던 축제의 기억이 되살아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든 개새끼야. 누군가가 이든의 바지 끝단과, 종아리와, 벨트를 쥐고 그를 바닥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떨렸기 때문에 손이 같이 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든은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에 눈을 감으려고 했으나 그는 상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이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스. 방아쇠를 당긴 순간 어깨가 약간 뒤로 밀려났다. 총소리가 폭음처럼 들려 이든 플로베르는 잠시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겨우 땅을 제대로 디뎠을 때 자신이 한박자 느렸다는 것을 알았다. 도그마의 어깨에는 총알이 박혀있었지만 세스가 천천히 땅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세스. 이든의 입술 사이에서 한숨처럼 이름이 흘러나왔다가 그는 총을 버려두고 달렸다. 손끝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세스으으으으. 목소리에 방아쇠를 당긴 것 같았다. 이든의 목소리는 탄피처럼 흩어졌다. 폐허가 된 공간을 울릴 만큼 그의 목소리는 충분히 갈라져있었다. 이제 이든 플로베르에게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사람처럼 서있었다. 아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심정이 그러한 것일 것이라고 그 와중에 그는 생각했다. 호텔에서 벗어나기 전의 긴장감으로 개소리를 해댄 이든 플로베르는 다시 한 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뒤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의식은 그 자리에 붙들려있음에도 감각이 멀어진다고 생각했다. 마치 귀에서 들려와야할 발소리가 그의 뇌 안에서, 뒷통수의 안쪽에서 그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처럼 소리들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욕조에나 있을 법한 거대한 구멍이 뇌 가운데서 감각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흙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손이 뺨을 내려칠 때 마다 머리가 심하게 흔들렸고 이든은 자신의 얼굴을 내려치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울컥 기침을 뱉었다. 익숙한 손이 몸 위를 누르고 있던 사람을 거두어 갔다. 목구멍 안으로 피냄새가 번졌다. 먼 발치에 자신이 떨어트린 총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남자의 발을 보다가 이든은 더는 뜨고 있기 힘든 눈을 감았다.

 잘다녀와요. 긴장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가 떠올라 이든은 팔로 뜨거워진 눈을 가렸다. 그는 죽음에 대체로 잘 적응했다. 그의 십대와 이십대를 거치는 동안 그의 주변에서 죽어간 몇몇의 인물들과, 그램블린 총기난사사건이 그에게 남긴 충격은 그를 그렇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물의 죽음에서 현실성을 느끼지 못하는 동안 이든은 거기에 쉽게 순응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금세 죽음에 적응했고 금세 울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입술 사이에서 울음에 가까운 앓는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처들이 아파와 가슴이 들썩거릴 때 마다 팔의 무게로 일그러진 시야 가운데서 크루거의 발이 보였다. 크루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거기에, 이든의 곁에 그의 발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든은 아직 상자가 있다고 여겼고, 상자 속에 아직 희망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인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것인가 하는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PROJECT-D' 카테고리의 다른 글

Sleeping Pill  (0) 2011.10.14
滿潮  (1) 2011.09.26
Mint Cookie in Suit  (0) 2011.09.05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0) 2011.08.21
Thirteen, Four, Two, Two.  (0) 2011.08.05
by merone

Bloomsbury 03


 알아. 기억해. 기억하고 있어. 이든 플로베르는 눈을 감았다. 입술사이로 흘러나오는 가쁜 숨소리에 이든은 귀기울였다. 루윈의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창 밖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반쯤 그림자에 잠겨있던 얼굴이 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그는 영국인보다도 창백했다. 그의 성처럼 아마 그는 순수한 영국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루윈의 내리감은 눈커플 아래로 길게 늘어진 갈색 속눈썹이 호흡할 때마다 가늘게 떨렸다. 방안을 떠돌던 먼지들이 빛에 비추어 반짝거리며 빛났고 그의 속눈썹 위로 가만히 먼지들이 반짝거리며 내려앉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루윈은 불편한 자세로 매달려있었다. 그는 발끝으로 발돋움해 바닥을 겨우 밀어내다가 이따금 이든의 구두코를 밟았다. 혀는 뜨거웠고 초록색 크리스마스 푸딩처럼 부드러웠다. 이든은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라틴어의 R과 L을 발음할 때 마다 연구개를 쓸어내리고 떨어지던 혀를 생각했다. 이든은 묵직한 청춘의 무게처럼 자신에게 매달린 루윈을 끌어안은 채로 소파에 뉘였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가 볼성사납게 화끈거렸고 이든은 여전히 목마른 사람처럼 그의 입술에서 입을 떼지 못했다. 다급하게 벌벌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풀어내렸다. 단추를 하나 풀 때마다 성질이 나빠질 것 같았다. 소파의 팔걸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로 고개를 젖히고 헐떡거리고 있는 루윈은 그의 머릿속에 십여년 째 잠들어있었던 그림 같았다. 그는 이든이 잊지 않고 입을 맞추는 동안 자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입술이 열릴 때 마다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이든은 그가 방금 피우고있었던 담배를 알아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급하게 끌러낸 베스트와 셔츠 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 위에 자국을 찍어내면서 그를 감싸던 옷가지를 헤쳐냈다. 말 그대로 헤쳐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선배. 속살거리는 소리에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루윈. 루윈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머리위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루윈”

 난 당신을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어요. 십년 전부터. 목 끝으로 차오르는 말은 입 밖에 내뱉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루윈. 애걸하는 목소리로 부르자 짙은 눈이 마주친다. 불편한 자세 탓에 고개를 가누기 힘든 것처럼 꼿꼿이 목을 들고 있었다. 루윈.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허락했다는 것을 이든은 알았다. 루윈. 하얗고 마른 배 위에서 더 밑으로 입을 맞추며 내려가는 동안 이든은 계속 루윈,하고 이름을 불렀다. 입을 맞출 때 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잘게 끊겼다. 살결에 부딪힌 이름들이 부스스 떨어져 내려 가루가 되어 빛을 받는 것 같았다. 이든의 한쪽 무릎은 소파 아래에 닿아있었다. 그는 루윈의 손목과 허리를 붙잡은 채로 경배하는 사람처럼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채 다 벗겨지지 못한 옷가지들이 이든의 얼굴과 팔을 스쳤다. 루윈은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내주었고, 이든은 그것도 금세 알아차렸다. 몸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는 이든을 밀쳐내지 않았다. 꿇고있던 무릎을 세워 일어서 둘이 몸을 뉘이기 벅찬 소파에 그의 몸 위로 올라타자 루윈이 손을 뻗었다. 셔츠 위로 등을 끌어안는 손길에 숨을 들이켰다가 그의 머리 위로 내뱉었다. 여전히 루윈의 머리맡은 창가에서 비쳐든 빛으로 반짝거렸다. 허벅지로 그의 다리사이를 문지르다가 귓가에 입을 맞췄다. 아프면 얘기해요. 듣고있어요. 이든은 거기까지 얘기하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웃었다. 멈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뒷 이야기는 칼칼한 갈증과 함께 삼켰다. 목 안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말라왔다. 햇빛에 달궈진 등이 따가웠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 아파서였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여유가 없었다. 이든이 자신의 것을 밀어 넣을 때 마다 루윈은 인상을 지푸렸고, 곧 얼굴은 놀라울 만큼 고통스럽게 변했다. 그의 미간이 지푸려질 때 마다 이든은 거기에 키스했다. 등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셔츠 아래의 등을 긁었다. 그는 여전히 참을 성 있는 고상한 루윈 이바노브인 것처럼 단지 목 안에서 울리는 소리만을 냈다. 이든이 입을 맞추자 그는 가까스로 입술을 열었다. 혀를 얽는 동안도 그는 끔찍하게 아픈 사람처럼 겨우 입술을 연채로 목 뒤에서 소리를 냈고 이든은 겨우 대화대신 그를 달랠 수 있는 것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루윈의 입 안을 느리게 헤집었다. 이든이 그의 안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때 마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루윈의 숨이 흘러나왔다. 등을 끌어안은 손이 절박해져있어서 이든은 그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댄채 어깨에 입을 맞췄다. 가까스로 셔츠에 가려 보이지 않을 곳에 자국이 남았다.

 이든 플로베르는 소파 위에 가쁜 숨을 내쉬며 늘어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바닥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옷가지들과 진득한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이든은 루윈의 어깨 위에 남은 자국을 몹시 신중하게 바라보다가 앞단추만 풀어진 채로 아직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던 셔츠를 여며주었다. 창백하리라고 생각할만치 하얀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져있었다. 땀으로 젖은 갈색 머리칼은 손가락이 빗는 그대로 가지런히 넘어갔다. 루윈. 이름을 부르자 루윈이 뺨 위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춰주었다. 아주 조금 젖어있는 살갗에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방 안은 반짝 거렸다. 벽지는 아주 예쁜 크림색이었고 루윈의 살갗보다는 좀 더 진했다. 잘 수놓은 패브릭으로 만든 긴 소파 위에 몸을 늘이고 앉아있는 루윈을 바라보며 십년 전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손을 떨던 자신을 떠올렸다.
 루윈 이바노브. 선생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고, 모든 아이들이 대답할 때에도 루윈의 시선은 대답으로 들릴 만큼 충분하게 느껴졌다. 이든은 루윈이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때도 여전히 꽉 막힌 정장의 생김새를 한 교복 안에 갇혀있었다. 루윈 이바노브가 교정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이든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기숙사 창가에 기대어 서있었다. 하얀 김으로 흐려진 창문을 손으로 닦고 나자 손이 시려왔다. 명확히 들리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이든은 몸을 피했다. 그가 돌아보는 모습을 창 모서리에서 훔쳐보며 이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십대가 통째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든은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었고 공부를 잘했지만 루윈 이바노브와 마주칠 때 마다, 그와 관련 있는 것을 접할 때 마다 조금씩 엉망이 되어갔다.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 없었지만 가슴이 뛰었고 입술이 말랐다. 루윈 이바노브는 이따금 거기에 이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표정으로 무언가가 신경쓰이기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스쿨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고, 가장 냉담하고 사교성 없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든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이 그의 눈에는 정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든에게는 그랬다. 그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튀어나와있었고,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색을 입었다. 아주 흔한 갈색 머리와 흔한 갈색 눈동자에 색이 입혀졌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색들이 가지런히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든은 창백한 그의 뺨을 바라보다가 펜을 집어 들고 있는 그의 손과, 펜촉과, 노트에 관심을 기울였다.

 “루윈”

 나 기억해요? 그에게 물었을 때처럼 루윈을 바라보았을때 루윈은 조용히 눈을 감고있었다. 지친 몸을 그대로 쉬게 두려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고 고요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감정이 물밀듯 밀어닥쳤다. 오랫동안 물이 말라있던 해변에 겨우 썰물이 들이닥친 것만 같았다. 목이 칼칼했고 가슴께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이든은 그의 곁에 앉아 가만히 손끝에 입을 맞췄다. 십년 전에도 똑같이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던 손 끝 위에. 하얀 손톱이 돋아난 손끝 위에. 그의 손끝이 이든의 입술에 묻어있던 타액으로 약간 번들거렸다. 손끝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The Nights of NewYork 01  (0) 2011.10.17
Bloomsbury 05  (0) 2011.10.04
Bloomsbury 01  (0) 2011.09.13
by merone

Bloomsbury 01


 하얀 컨트리 풍의 가구. 하얀 목재들과 하얀 목재 위에 갈색 나무판을 하나 덧댄 듯한 테이블. 격자에 짜 맞춘 듯 벽을 나누고 있는 흰 목재 틀 안은 큼지막한 꽃이 수놓인 패브릭으로 마감되어있었다. 재떨이 하나와 꽃병 하나. 테이블 위는 간소했고 사람들은 제각기 소파 위에 앉아 웅성거렸다. 파이프와 담배가 뒤섞여 자욱한 연기를 만들 때 마다 창백한 빛이 집 안을 비췄다. 밖이 비쳐보이는 흰 커튼이 이따금씩 바람에 날렸고, 그 때 마다 흰 가구가 빛을 반사시켜 온통 집 안이 부옇게 변했다. 눈 앞의 있는 사람의 얼굴 조차도 흰 빛줄기와 부연 담배연기로 아주 멀리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가벼우면서 무거웠고 무거운 듯 가벼웠다. 이든은 옅은 분홍빛의 패브릭으로 마감된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는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한 번 씩 들어본 적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서로 교류가 있었을 법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영국에서 두군데로 일축되는 컬리지를 나왔으며, 그 후로도 대개는 동창회를 통해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들은 언성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교양 없는 일인지 알고있다는 것처럼 여유롭게 굴었다.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처럼, 또는 멀리서 물길이 흘러나가는 소리처럼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가끔씩 이든 플로베르를 그 장소에 데리고 온 남자가 벽에 기대어 미동하지 않는 이든에게 눈길을 주었으나 그는 약간 입술을 올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든 플로베르는 들어온 직후부터 줄곧 한 곳에 눈이 못박혀 있었다. 갈색의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남자는 아주 약간 늦게 들어와 창가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자리를 잡은 뒤로 이든과 마찬가지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클럽의 토론 주제가 제창되는 사이 눈을 내리깔고 흘려듣는 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빨다가 이내 사람들이 다가오자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창을 등지고 있는 탓에 그가 있는 곳만 그늘이 져있었고 그의 창백한 뺨은 빛만큼이나 창백해 보였다. 하얀 가구들에 반사된 빛이 얼굴에 닿았을 때에야 간혹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일렁거렸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고, 두어명의 사람들이 번갈아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사람이 적든 많든 간의 사람들의 중심에 서있었고 움직이지 않은 채 고요히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서서 그들의 말을 듣다가 짧은 말을 내뱉었고 그럴 때 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롤 손가락 끝으로 옮겼다. 루윈 이바노브. 이든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있었다. 써보라고 하면 토시 하나 틀리지 않은 채로 말끔하게 누런 종이 위에 그의 이름을 적을 수도 있었다. 그는 한때 스쿨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였고, 가장 냉담하고 가장 사교성이 없는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이든 플로베르의 십대를 통째로 날려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루윈 이바노브. 루윈의 페도라가 머리 위에서 약간 흘러내렸을 때 이든은 순식간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을 뻔 했다. 루윈과 이든은 서로 다른 벽에 등을 맞붙이고 있었지만 이든은 그가 흘러내린 페도라를 손으로 벗어 창틀 위에 올려둘 때 까지도 그의 흰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바노브가 펜을 잡으면 이든의 눈에는 그의 내리깐 눈과 흰 손등만이 보였다. 그는 이따금 펜을 들어 펜을 잉크에 적셨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필체로 노트 위에 과제를 적어나갔다. 그의 손으로 쓰여지는 수식은 수식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워서 이든은 그의 수학 노트를 한권 훔칠 수 있었다면 무슨 댓가를 치르고라도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다만 루윈 이바노브는 자신의 자리를 비우는 법 없었고 아주 세심했기 때문에 이든이 노트를 훔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관심있나"

 남자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그는 여전히 이 응접실 안에 어울리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이든에게 말을 걸었고, 두텁지 않으나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힌 손으로 이든의 어깨를 가볍게 짓눌렀다. 이든은 그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어깨가 들썩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도 매우 적절한 단어였다. 

  "루윈 이바노브. 괜찮은 친구지"

 이든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을 들으며 루윈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두었고 이든과 눈이 마주졌다. 빛에 일렁거리던 눈이 다시 잠시 그늘에 가려 깊어졌다. 그의 잘 빗어 넘긴 머리칼 아래로 이마와, 콧잔등과 입술 위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출판업계에 있는 친구인데 소개시켜주지. 따라와, 어쩌면 자네같은 인재를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 1920년대 영국 브룸즈베리 클럽 배경의 패러렐. 종종 업데이트.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The Nights of NewYork 01  (0) 2011.10.17
Bloomsbury 05  (0) 2011.10.04
Bloomsbury 03  (0) 2011.09.13
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