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드는 날 3




 "이제 도착하셔요?"

 인혜는 늘 그렇듯 생기있는 얼굴로 웃었다. 준희와 만나지 못한 지난 이주동안 그녀는 여름 햇살에 조금 그을려 더욱 건강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시원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운 챙이 큰 밀집 모자 아래로 그녀는 햇살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준희를 맞는다. 여름 휴가철을 계기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조금씩 업무를 분산시키려고 하는 듯 했다. 맡고있던 자료들과 기업체들의 서류를 그에게 내려보내고 적당한 선에서 그에게 처리를 맡긴다. 어느 정도 그 업무가 손에 익고 나서야 책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그는, 인혜의 초대에 뒤늦게 응했다. 박의원의 여름별장은 소박하고 푸릇했던 저택의 정원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름 별장 특유의, 한 껏 들뜨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별장 외관에서부터 물씬 풍겨나왔다. 박의원의 고전적인 취향에는 맞지 않았으나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인혜와 그녀의 친구들의 우아한 허풍에는 잘 어울리는 듯 싶기도 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인혜는 조심스레, 그리고 조금 대담하게 준희의 팔에 제 팔을 팔짱껴 잡았다. 준희는 당황스러움에 꼿꼿하게 세운 등을 조금 더 굳혔으나 인혜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짐짓 모른척 하였다. 손에 낀 하늘거리는 레이스 장갑아래로 그의 옅은 회색 빛 정장이 비쳐보였다. 얇은 여름 용의 옷감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찌는 듯한 무더 아래에서 양장은 숨이 막힐 것 같다. 준희씨. 준희씨? 인혜의 목소리에 준희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멀어졌던 시선을 되찾는다. 지나치게 무더운 날씨에 주위를 둘러보는 것 조차도 버겁다. 

 "많이 더우셔요?"

 인혜는 그렇게 물었다. 챙 넓은 모자 밑으로 그늘 진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준희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녀가 하는 말은 언제나 먼곳에서 들려오는 것 처럼 느껴진다. 인혜는 그보다 두뼘만치 작았고, 그녀가 말할때 준희는 그녀의 말이 등 뒤에서, 또는 자신의 어깨 쯤에 와서 닿는다고 생각했다. 인혜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더워하는 준희의 이마를 조심스레 문지르곤 곧 작게 웃어보였다. 빨갛게 루즈를 칠한 입술이 양옆으로 길게 선을 그리면서 변했다. 인혜는 그를 데리고 우람한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정원 한 구석의 테이블로 가려다가 돌연 발걸음을 돌린다. 실내는 덥지 않으실거에요. 테이블 아래 한갓지게 앉아서 패션지나 동인지 따위를 뒤적이던 인혜의 친구들이 색색의 리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챙 넓은 밀집모자를 손 끝으로 우아하게 밀어올리며 준희와 인혜 쪽을 바라보았다. 무엇인지 호들갑스레 말은 하지 않아도 소곤소곤 거리는 목소리들이 작게나마 들려오는 듯 했다. 여자들 특유의 소소한 잡담거리의 화두가 되고있다는 사실은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눈치챌수 있었다. 깔깔 거리며 웃는 친구들을 흘깃 쏘아본 인혜가 이내 한아름 웃으면서 준희를 별장 안 쪽으로 안내한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부터 바닥의 석재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좀 서늘해 진 듯 싶었다. 별장의 외관은 뙤약볕 아래서 눈이 아프도록 빛을 반사하는 흰색이었으나 내부는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아 색달랐다. 짙은 체리색 가구들과 한 눈에 보아도 좋은 나무를 쓴 것이 눈에 보이는 문양이 아름다운 목재 장식품들. 모던하지 못한 보수적인 우아함이 집안 곳곳에 살아있었다. 박의원의 저택에서 본 숨죽인 무거운 우아함이 별장에도 살아있는 듯 보였다. 인혜가 들어서는 것을 본 고용인이 소리없이 다가와 준희의 짐을 건네 받았다. 사층의 가장 안쪽 방으로 옮겨놓겠습니다. 고용인은 조용히 제 할말을 하고 계단을 올라 사라졌고 인혜는 잠시 짐을 옮기는 고용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삼층은 저와 제 여학교 친구들이 쓰고 있고요. 사층에 올라가시면 계단 오른쪽 복도로 가시면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에요. 이층에는 서재가 있고, 언제든지 들르셔도 되어요. 가장 안쪽에 유리 덧문이 달린 책들은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시는 책이니 그 책들만 손대지 않으시면 되고요"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기차편을 잡느라 차려입고 온 양장을 갈아입고 짐을 푼 뒤에, 서재에 들러본 뒤 해가 지면 밖을 나서는 것도 괜찮을 법했다. 인혜는 그 무더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지치지 않는 듯 하늘색 리본이 나풀거리는 챙 넓은 밀집 모자를 조금 올려 썼다. 서늘한 기운에 조금 기운을 되찾고 나서야 오밀조밀한 하얀 발이 드러나는 하얀 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원피스와 잘 어울리는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인혜는 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라도 하듯 조금 쉬라며 슬며시 인사하고 다시 별장을 나섰다. 



 "여어. 미래의 사위왔나?"

 박의원의 둘째아들. 그러니까 인혜의 손위 형제인 박인혁은 계단에서 내려오며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진지하지 못하고 요리조리 뺀질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어느 유전자의 내력인지 모를 만큼 그는 집안의 탕아 같은 존재였으나 짙고 뚜렷한 잘생긴 눈썹 하나만은 박의원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호탕한 목소리가 목청을 울리며 나와 텅빈 현관을 메꿨다. 곁에 서있던 재경이 슬쩍 손을 들어 말없이 인사를 건네서 준희는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했다. 

 "방금 도착했나?"
 "예. 방금 오후 기차로 왔습니다"
 "더워 죽을 것 같은데 수고했네. 안은 좀 시원할거야. 그래뵈도 우리집 영감이 더운걸 딱 싫어하거든. 얼굴이 벌개진걸 보니 더위라도 집어먹은 모양인데 적당히 방에서 쉬다 내려오게"

 인혜 그 기집애가 워낙 빨빨 거리고 다니길 좋아해서. 인혁은 그렇게 덧붙이고 다시금 웃었다. 

 "기운찬 기집애 맞춰주려면 너도 힘들테지. 쉬다 내려오게 이따 보지"

 소매를 팔꿈치 까지 걷어올린 재경이 픽하고 바람 새듯 웃으며 저녁에 보자하며 말을 덧붙였다. 준희는 뙤약볕 아래로 나가는 둘을 보며 가볍게 인사 한 뒤에, 기차 여행 도중에 등에 구김살이 간 웃옷을 벗으며 계단을 올랐다. 바닥의 석재때문에 집안은 좀 서늘했고 어디선가 모르게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얇은 소재의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소매를 반쯤 걷어부친 준희는 육중한 서재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책의 냄새와 책에 피는 가무잡잡한 곰팡이의 냄새,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새것 같은 목재 책장들의 냄새가 어우러져서 기분 좋은 냄새가 뒤섞여있었다. 책이 바래지 않도록 창에는 커튼이 닫혀있었고 저마다 조금씩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닫힌 커튼이 파도처럼 나부꼈다. 서재는, 서재라고 부르는 것 보다도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성 싶었다. 잘 마른 덕에 좋은 빛깔을 내는 목재 책장들이 아득할 만큼 죽 늘어서있고 그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작은 복도들은 미로처럼 보였다. 잘 구분되어 정리된 서가에서 그는 가장 앞에 있는 철학서부터 찬찬히 책을 훑었다. 방대한 영미문학을 지나, 소장본이 거의 꼽혀있지 않은 한국 문학을 지나 약간의 시집 사이에서 준희는 서정주의 시집을 꺼내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그 서가, 준희가 발걸음을 멈춘 그 서가 끝에 서가용 사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윗쪽 칸의 시집 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다. 누군가 책을 가져간 듯 하다. 준희는 팔을 뻗어 그 언저리를 손으로 훑어 보다가 이내 안쪽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박의원의 정원에서, 자신의 약혼식이 치뤄지던 그 정원에서 준희는 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선은 알고있었다는 듯 표정에 인색한 얼굴을 부드럽게 지푸리며 조금 웃었고 담배를 입에 물었었다. 베이지색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늘이고 자고 있는 것은 선선이다. 고요하고 조금 무관심한 남자. 그는 짙은 갈색의 바지를 차려입고, 흰 와이셔츠를 안에 받혀 입었다. 서늘한 실내임에도 조금은 더운듯 소매를 걷었다. 읽다 잠든 책이 가슴 위에 얹혀서, 그가 숨을 쉴때마다 함께 오르내리고 있었다. 토마스 만. 베니스에서의 죽음. 빛을 등지고 고요한 표정으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만이 서재의 가라앉은 침묵을 깨고, 그 사이로 아주 미약하게,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초조한 듯 담배를 태우던 손이 힘을 뺀 듯 소파 아래로 늘어져있었고, 옅은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의식이 있을때의 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빈틈 없고 고요한. 저택의 모퉁이에서 마주쳤을 때 조차도 껄끄러워 하지 않으며 다음 개피를 입에 물던. 

 책없이 소파 한 구석에 앉은 준희는 가만히 선을 들여다 보았다. 파일럿. 처음 만났을때 선은 파일럿이라고했다. 아니 어디에선가 선을 분명 두어번 마주쳤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비행기에 앉는 모습을 상상한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조금 불손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토마스 만을 읽는 선을 상상했다. 책장을 넘길 때 조차 소리 없이 움직일 것 만 같은 손이 비행기를 움직인다. 그날 보았던, 그러한 감색의 제복을 빈틈 없이 갖추어 입고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채로 거대하고 무거운 기계를 움직인다. 하얗고 생기 없는 얼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 보다는 서재에 앉아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로 하늘을 배회하는 그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웅장한 엔진의 소음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앞을 볼 것 같은 … 아니, 의외로 그의 직업은 그에게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준희는 비행장에서 귀를 가득 메우던 요란한 엔진의 소음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한다.

 "아…"

 툭. 하고 선의 가슴에 올려져 있던 책이 아래로 떨어졌다. 몸을 일으키다가 떨어진 책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바라보는 선을 보며 준희는 팔을 뻗어 책을 집었다. 표지를 덮어 선에게 다시 건네자 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준희가 건네는 두꺼운 책을 받아들었다. 

 "언제부터…"

 선은 목이 잠겼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손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목청을 가다듬은 선을 준희는 가만히 바라본다.

 "계셨습니까"

 조금 되었습니다. 답하는 준희의 말에 선은 당황한듯 보였다. 아직은 잠이 덜 깬듯 간간히 초점이 흔들리는 시선이 준희에게 가 닿았다가 그의 등뒤로 보이는 서가에 머물렀다가 다시 준희에게로 돌아왔다. 아…. 작은 감탄사 비슷한 것을 내뱉는 선의 의도를 짐작할수가 없다. 선은 건네 받은 책을 탁자 위에 대강 올려놓고 아직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울여 있던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그러니까 조금 되었‥"
 "오늘 도착하셨습니까"

 준희는 그제서야 선의 말을 이해하고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오후 기차로 도착했습니다. 준희의 말에 선은 준희를 찬찬히 훑는다. 예복에 감싸여 있던 준희가 조금 답답하고 꽉 매여 보였다면 오늘의 그는 조금 풀려있는 듯 하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느슨하게 풀려있는 것인지, 아니면 휴양지의 공기가 그리고 무거운 집안의 압박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진 거리가 그를 마음 편히 만들어 놓았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선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찾다가 이내 관두었다. 남의 서재에서 혼탁한 연기를 피울만큼 예의 없는 것은 아닌 탓이었다. 인혜의 약혼자라고 생각하면 간단할일이었다. 선은 일단 이 남자가 왜 여기있는지 떠올렸고. 그 후에야 인혜를 떠올렸으며, 그리고 인혜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잘어울리는 한쌍이기는 하였으나 그것 뿐이었다. 


 "슬슬 해가 질 때도 되었습니다. 나가보지 않아도 됩니까 준희군은"
 "짐을 풀고 오는 길입니다. 저녁때 뵙자 하셨으니 시간이 조금 빕니다"

 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습니까. 선은 탁자에 올려두었던 책을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도 불지 않는지 일렁이던 커튼들이 잠잠하다. 

 "그럼 저녁때 뵙겠습니다. 서가에 있는 책은 가져가서 봐도 됩니다. 의원께서는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선은 울창한 서가를 벗어나 모습을 감춘다. 

 여기있었냐. 익숙한 재경의 목소리가 멀직이서 들렸다. 서재로 들어오던 재경이 선을 향해서 그렇게 말한 듯 했다. 선의 대답은 없었다. 조용히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철걱하며 울렸다. 선은 아주 부드럽게 일어나 걸었는데도, 마치 저를 피하는 것 처럼 자리를 뜨는 듯 느껴져 준희는 조금 당황한다. 지나치게 민감하게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깨어나 당혹스러운 눈동자로 눈앞에 앉아있는 준희를 바라보던 선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서 말이지…"

 재경의 말에, 인혁도 인혜와 그녀의 친구들도 모두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사관생도 적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재경의 진중함은 흔히 곁에서 보아왔으나 재경이 저만큼 신나게 떠드는것은 준희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선은 소리내지 않다가도 재경의 말 중간중간에 끼어 그가 잘못 말한 부분을 짚어주고는 하였다. 이상했다. 스멀스멀 확신하지 못할만큼만 불안하다. 박의원의 저택에서도, 그 이전의 연회에서도 선은 말을 할때는 사람의 눈을 무서우리만치 곧게 쳐다보고 말했다. 준희에게도 그는 그러했다. 말을 할때도 들을 때도 선은 오해할만큼 곧게 사람을 쳐다본다. 오히려 미동도 하지 않는 열기 없는 냉정한 눈에 움츠러들 정도였는데 선은 준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식탁의 끝에 앉은 그에게까지 애초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시선을 돌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선이,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반듯하게 얼굴을 보여줄 것 같은 사람의 시선이 벗어나는 것이 못내 불안하다. 신경이 쓰였다. 

 "그때 선도 같이 있지 않았나?"
 "아아. 그랬지"
 "선이 그 때, 평소엔 침착하면서 말야. "

 재경의 말에 인혜의 친구들은 흥미로운듯 귀를 기울인다. 이야기는 어느새 사관생도 시절 인혁과 재경을 지독하게 괴롭혔다던 선배의 이야기에서 선의 이야기로 넘어가있었다. 파일럿 선발 시험을 위해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다던 이야기라던가, 중력 훈련이 있던 날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않았다는 이야기라던가. 무언가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을 것 만 같은 남자의 이야기 치고는 꽤나 생소하다. 말하는 재경은 더할나위 없이 즐거워 보여서 선은 약간 인상을 지푸린 채였음에도 재경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미 동기들 사이에서는 한참이나 의외성을 띈 이야기로 몇번이나 회자된 이야기인듯 하다. 인혁은 이제는 너무 들어서 지겹다는 듯 간간히 선의 지푸린 얼굴을 보고 웃었고 어디가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사관생도들의 이야기에 볼을 붉게 들인 아가씨들만 눈을 빛냈다.  

 "첫 비행을  끝내고 왔는데 …"

 시선을 돌리지 않는 선을 찬찬히 관찰한다. 관찰. 그러한 단어가 가장 적합한 듯 싶었다. 선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식사가 끝날때 까지도 선은 한번도 시선을 돌린 적이없었다. 식사가 치워진 후에 나온 단 와인을 몇모금 입에 머금던 선은 쉬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재경은 여전히 아가씨들의 시선을 잡은채로, 이제는 선의 이야기에서 연회에 있었던 자잘한 사건에 이르는 이야기를 풀고 있었고, 인혜는 준희의 곁에 앉은 채 인혁과 마주보고 문학지에 대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준희씨. 인혜가 부르는 목소리에 준희는 선이 사라진 계단에서 눈을 뗐다. …작가 말이어요. 인혜는 그렇게 말하며 까만 눈을 깜박 거렸다. 짧게 잘라 안으로 구부러지도록 정돈 된 머리에 소매가 부푼 남색 원피스. 인혜의 시선을 따라 인혁의 시선도 움직였다. 인혁은 뭘 그리 넋을 놓고 있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준희는 몇 번이나 서재에서 선을 마주쳤다. 선은 때로 파이프를 물며 재경과 영미문학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꽤나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것 처럼 보였다. 재경이 말하는 헤밍웨이와 선의 헤세 사이에서 둘은 연기가 사그라들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서가 사이에서 준희는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종이를 입에 물고 사다리를 올라 책을 찾는 선을 보기도 했으나 선은 재경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서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찾던 책을 가져가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로, 처음 서재에서 선을 발견했던 말 처럼 선은 소파에 앉아 무방비하게 낮잠을 자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피하는걸까. 선에게 준희를 피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선은 그와 마주치지 않는다. 간단한 목례가 전부였다. 첫날 서재에서 마주친 이후로 식탁에서조차 선은 입을 다물었다. 






 " … 파기라고 하기엔 납득이 안가잖나"
 "선이 단호했잖은가"
 " 약혼을 파…하기에 이변호사의 성정이…"

 "선이 … 에 간다고 했다고 하네"


 짧은 탄식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얕게 깨인 잠결에 재경과 인혁의 목소리가 들린 듯 했다. 맙소사. 인혁의 목소리였다. 재경이 … 무언가 말하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점차 더 작아져 들리지 않았다. 준희는 얕게 깨어 몽롱한 가운데 잠시 몸을 뒤척였다. 재경의 목소리가 멈춘다. 거짓말. 몇번이나 인혁이 말한 듯 하다. 재경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 들리지 않았는데 인혁의 목소리는 뚜렸했다. 오히려 점차 커졌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목소리였으나 이내 인혁도 입을 다물었다. 곧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서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멀어지는 발걸음소리를 듣다가 다시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던 듯 하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며 가슴위에 얹혀져 있던 책이 툭 하고 떨어졌다. 잠결에. 선의 이름이 오간듯 했다. 무릎을 덮고있던 담요가 떨어졌다. 재경이 나가며 제 위에 이런것을 덮어 놓았던가. 제가 끌어 덮은 적 없는 것에 당황한다. 인혜가 왔다 갔으리라는 짐작도 해보았지만 인혜는 서재에 출입하지 않았다. 인혜가 읽는 것은 고작해야 제 오라버니가 가져다주는 소소한 문학에서 여성을 상대로 출간되는 소소한 아녀자들의 낭만 소설이 전부였다.  몸을 굽혀 떨어진 책을 집어 들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습니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선이. 지난 몇일 간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남자가 팔 안 가득히 안았던 책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아직 잠이 덜 깬듯한 준희를 내려다 보았다. 선은 준희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본다. 냉정한, 움직임 없는 눈동자.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선의 눈이 준희가 집어 든 책을 향했다. 선은 잠시 책과 준희를 번갈아 본다.

 "혹시 …"

 예?.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꺼낸 말에 선이 답한다.

 "선씨가 덮어두셨습니까?"

 선은 두어번 눈을 깜박이다가 준희가 손 끝으로 만지작 거리는 담요를 본다. 아아. 예. 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저를 피하시는게 아니었습니까?"

 쌓아둔 책을 집어 훑던 선의 눈이 준희에게 가 멈췄다. 선은 한참이나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의중이 무엇인가 짐작이라도 하려는 것 처럼. 선은 잘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눈살을 지푸렸다. 준희는 꼴각 침을 삼켰다. 선의 표정 없는 눈동자는 지나치게 냉담해서 준희는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는 대신 선의 목에 느슨하게 매여있는 타이에 초점을 맞춘채로 쉽게 나오지 않는 선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은 손끝으로 책의 두터운 표지를 천천히 쓸었다. 고개가 조금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박의원댁 정원에서 본 것 같은 웃음이었다.

 "눈치챘습니까"

 당혹스럽다. 그가 실제로 저를 피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제가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준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 점이 우스워서 선은 조금 웃었다. 픽하고 바람 새듯 입술 새로 숨이 샜다. 선이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재경 정도 뿐이었다. 인혜도, 그녀의 친구들도 하물며 인혁도 선이 준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이 그와 마주치는 일도 없을 뿐더러 식탁에서든 어디에서든 그저 말없이 주변에 녹아드는 선이 누군가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작해야 시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경만이 어렴풋이 선의 시선이 일부러 준희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때로 재경은 조금 묘한 눈으로 준희를 바라보았고 선은 그것이 제가 시선을 주지 않아서임을 알면서도 재경이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모른척 했다. 준희가, 그가 알아챘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선은 서재에서 책을 빌려갔고, 그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 표정이 풍부하지 않은 남자가 선의 시선을 민감하게 눈치 챘을거라고는 생각도 하지못했다. 

 선은 입을 다물었다. 피하는게 아니냐는 질문보다 더 대답하기가 힘든 질문이었다. 선은 셔츠에 손을 걸어 목주변을 느슨하게 헤쳤다.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그럼 왜"

 준희는 그렇게 묻다가 목이 막히는 것 처럼 목울대를 울렸다. 그는 뒷말을 잇지 않았으나 왜 피했느냐고 묻는 말이라는 것을 선이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선은 가만히 그를 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어쩐지 웃음이 샜다. 사실대로 말하면 곧게 자란 착하고 풋풋한 남자가 어떤 표정을 할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선은 꽤 곤혹스러워져서, 그것이 우스웠다. 말해볼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선은 곧 그것도 우스워진다. 
 
 "준희군"
 "예"

 그는 정말로 빤히 선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받아낸다. 곧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 정직함이 믿음직스러운 한편 조금 애처로워서 선의 눈매가 부드럽게 조금 휘었다. 

 "박의원댁 저택 모퉁이에서 김형과 내가 하던 이야기를 군이 엿들은 것을 압니다, 나는"

 그래서 저를 피했나 싶은 생각이 스친다. 찰나 동안 머릿속에서 갖가지 계산이 오고갔다. 아니. 그때 그렇게 마주친 후에도 선은 저를 지나치게 평범하게 대했다. 

 "짐작하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준희는 선이 담담한, 그리고 조금 미소지은 얼굴로 말하는 것에 가만히 귀기울인다. 나는. 선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목을 축이는 듯 싶었다. 껄끄러운 것을 말하듯 선의 미소지은 표정에 잠시 걱정과 비슷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남색가입니다 군. 선은 그렇게 말하곤 가만히 준희의 눈을 들여다본다. 당혹스럽지 않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으나 선의 입으로 직접 들을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선은 그렇게 말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듯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뺐다. 담배를 찾았던 듯 싶다. 선은 놀란 그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에도 준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제가…좋지 않게 말을 하거나 한 일이 있습니까?"

 그. 남색가에 대해서. 준희는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선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선은 오히려 조금 더 웃는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본 선의 표정중에 가장 편안했다. 선은 마지 형이 동생을 보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조금씩 표정을 달리해가며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말을 더듬거리고, 눈을 깜박이고, 선의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기를 반복하며 불안정하게 말을 잇는 준희를 바라보았다. 풋내가 났다. 그의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먼저 떠오른 것도 선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고르는 준희를 바라보며 선은 느긋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왜 저를 피하셨습니까?"
 "말해야합니까?"

 "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있다. 선을 신경쓰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이바닥 인사들의 특성상, 설령 오해인들 누군가 자신을 기피한다고 생각하면 오기로라도 같이 본체만체 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선씨. 잠시 넋을 놓고 제 얼굴을 바라보는 바람에 준희는 선을 불렀다. 흐릿하게 준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선은 그의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자신의 손에 닿아 표지가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읽었던 저 책을 저 남자는 왜 하필 들고있는 것일까. 

 "좋아서 그랬습니다" 

 선은 웃었다. 당황스러워하며 표정을 굳히는 준희보다도 스멀스멀 웃음이 나오는 제가 더 우스웠다.
 

 
*낭만 패러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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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아무런 접점 없는 선이 그렇게 말할 때 준희는 의아함에 눈을 끔벅였을 뿐이었다. 바람 따라 봄 꽃 휘날리는 정원 모퉁이에서 선은 아무렇게나 시선을 방치한 채로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간간히 포도주를 삼키고 있었다. 그가 앉은 테이블에는 재경과 박의원댁 장남이 앉아 시시콜콜한 농담이라도 주고 받는 듯 했다. 선은 아무렇게나 바람 따라 날리는 봄 꽃을 좇던 시선을 들어 건장한 청년 둘을 바라보며 넌지시 웃다가는 다시 포도주를 삼키고 –마신다기 보다는 삼키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분명히 온갖 기계 장치와 고도계에 익숙해져 있을 비행사의 길고 흰 손으로 툭툭 담뱃재를 털어가며 담배를 피웠다. 

“준희씨”

등에 대고 말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두뼘 만치 키가 작은 그녀가 제게 말을 걸어올때면 그녀의 목소리는 저의 귀가 아니라 등에 와 꼽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가끔 그녀가 불쑥 말을 걸면 등이 따가운 사람처럼 깜빡 놀라는 것이다. 등에 와 꼽히는 낭랑한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면 그녀가 작고 통통한 손 끝으로 제 옷에 와 앉은 옅은 빛깔의 꽃잎들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있었다. 손만 보아도 고운 얼굴이 떠오르는, 그런 아담하고 예쁜 손이 촘촘히 짜여진 하얀 레이스 장갑 안에서 꼼질거렸다. 감사합니다. 숫기 없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준희를 보면서 인혜는 소담하게 웃었다. 신여성이라면 신여성다운 잘 교육받은 양갓집 규수 같은 조용하고 당찬 미소가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조용하되 꽤 순종적이지는 않은 듯한 치켜 올라간 눈매에 얇지만 발간 입술이 앙다물려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꽤나 당찬데도 어딘가 밉살맞지 않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구김살 없이 자라온 여자의 매력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어울리지 않게 키에 딸 부잣집 셋째딸의 고운 얼굴이라는 것이 이름만 들어도 뭇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자였던 것도 분명하다. 인혜. 생각해보면 이름도 꽤나 지적으로 보일 법 하다.

“뭘 그렇게 보고계셔요”

인혜는 가만 준희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의외라는 듯 웃었다. 대찬 장난기가 입술에 슬며시 비춘다.

“둘째 오라버니, 선 오라버니에 재경 오라버니도 모여계시네요”
“아는 사이입니까?”
“예에. 오라버니의 사관학교 동기이셔서 방학이면 세분이 별장에 함께 놀러 오시기도 했었지요”

박의원의 둘째 아들이 사관학교 출신이던가. 엇비슷한 나이 때의 얼굴들로 보이기도 했다. 제복을 입은 선의 얼굴이 질린 사람만큼이나 하얀 듯 하여 제가 좀 앳되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초면에 또래이기도 하겠거니 싶었으나 그러고보면 선은 생각보다도 무거운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 인혜를 보며 손을 흔들던 둘째 아들의 곁에서 그와 이야기를 하던 선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친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도 잔을 들고있더니 마침 잔을 쥔 채로 준희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짙은 감색 제복이 아닌 밤색 정장은 또 어딘가 색다르다. 마르고 뼈대가 얇은 몸을 그대로 보여주는 밤색 정장 안으로 그는 같은 색의 베스트를 입고 깃 없는 셔츠를 세우고는 짙은 자주색 타이를 맸다. 반드르르 빛나는 재경의 은색 정장에 비하면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영락없이 꽤나 멋을 부려 갖추어 입은 차림이었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색감에는 걷는 것 하나도 필요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조만간. 그렇게 말하던 그는 ‘조만간’ 이런 자리가 생길 것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마치 소문으로 들은 것럼 예의를 차렸으나, 그의 절친한 동기의 입으로 직접 막내 누이의 약혼식을 전해 듣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선은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며 골똘히 뭔가를 곱씹는 표정의 준희를 바라보더니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기에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는 줄 알았으나 선은 울림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건배.
그렇게 말한 듯 하다. 선은 얼떨떨하게 멈춘 준희를 향해서 손에 쥔 와인 잔을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가 내려보였다. 꽤나 거리가 있어 큰소리로 목청을 내어 말하는 것도 우스울 테니 그렇게라도 말하려는 듯 했다. 강줄기가 뻗은 것처럼 파르스름한 혈관이 맥놀던 눈커풀이 슬며시 감겼다 뜨이면서 웃었다. 






“내가…!”
“질척거리는 것은 싫다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분이 되셨습니까”
“선아”
“알아 들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미동으로는 모자라셨던 모양입니다 김형”
“내가 뭐라 했는지 듣지 않았나”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선아”

“선아.”. 목소리에 열이 있었다. 한번도 그런 종류의 열을 앓은 적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엿듣는 이의 귓가가 달아오를 만큼 목소리에는 열이 있었다. 준희는 저택의 모퉁이를 돌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런 성을 한 사람도 저런 이름을 한 사람도 그가 알기에는 한 사람 뿐이었다. 
무어라고 손쓸 새도 없이 오도가도 못한 채로 벽돌 건물의 모퉁이에 바싹 붙어있는 준희의 어깨를 치고 남자가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김형. 그렇게 불린 듯 하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충혈된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 양손을 주머니에 불뚝 찔러 넣은 그는 준희가 서있던 모퉁이를 돌아 식이 치뤄진 정원 쪽으로 걸어나갔다. 선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박의원댁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고작 저택의 담을 하나 지난 것 만으로 주위는 조용했다. 멀리 보이는 외벽 앞으로 구색을 갖춘 것 처럼 듬성듬성 뿌리 내린 나무들은 채 스무해가 지나지 못한 듯 젊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선은 말이 없었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답답한듯 손가락을 걸어 타이를 끌어내렸다. 뭐라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을 들킨 사람 같지 않은 태연함이었다. 아니 어쩌면 선에게는 당황해야할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방금 이 자리를 걸어나간 사람과 자신의 어깨가 부딪혔다는 것을 선은 알까. 찰나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로 뵐 줄 몰랐습니다”

고작 꺼내는 말이 그것이어서 준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누구라도 보여주기 곤란할 법한 현장을 엿본 셈 치게 된 사람치고는 좀 뻔뻔한 말이었다. 

“그랬습니까”

선은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르며 답한다. 건조한 말투. 조금 웃거나, 미소를 짓거나, 눈을 가늘게 떠 보이거나. 의외로 표정에 작은 변화가 있는 편이었음에도 목소리는 담담하고 건조했다. 기분 좋게 등을 덥히는 햇살이 눈부셔서 선은 조금 눈을 가늘게 떴다. 준희가 말을 꺼내기 전에 뜸을 들이던 것도, 방금 나간 사람을 그가 보았을 것이라는 것도 선에게는 별반 큰 의미를 갖지 못한 듯 했다. 선은 일전 연회에서 제복을 입은 채로 보았을 때 보다도 조금 부드러웠고 어쩐지 그것은 제복을 입은 선과, 그렇지 않은 선의 차이인 듯 했다. 
뜻밖에 시작된, 뜻밖에 만난 사람과 시작된 잇기 어려운 대화에 괜히 손이 차가워져서 준희는 예복 주머니에 곱게 개어 꼽힌 손수건을 뽑아 손바닥을 문질렀다. 괜스레 비싼 천에만 얼룩을 묻힌 것 같았다. 선은 그런 준희의 움직임을 조용히 눈으로 좇다가 좀 늦었다는 듯 목례를 한다.

“축하드립니다”

눈이 마주 쳤을 때도 말없이 인사했음에도 선은 분명하게 축하한다는 한마디를 짚고 넘어갔다. 

“감사합니다”

박의원의 둘째 아들, 말하자면 처형이 되는 사람의 동기 또는 친우에게 준희는 분명 자신의 약혼에 대해 그렇게 대답했던 듯 하다. ‘원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말실수를 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또 감사하다고 대답한 것이 어쩐지 인사치레 치고는 조금 뻔뻔한 것 같아 준희는 낯을 붉혔다. 고집만큼이나 지나치게 올곧은 점이 고스란히 표정이 인색한 얼굴에 드러난다.   
선의 눈이 움직임을 좇았다. 눈앞의 풋풋한 남자는 말보다는 표정이, 표정보다는 작은 움직임이 좀 더 정직한 듯 했다. 말로는 고작 한마디 뱉을 것을 마치 미동도 없을 것 같게만 보이는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눈동자가 움직이거나 크고 흰 손이 손수건을 만지거나 몸에 밴 정갈한 움직임들 사이로 비치는 작은 흐트러짐 같은 것들이 그의 불편한 초조함을 나타낸 듯 했다. 여전히 그는 풋풋하고 어리숙하다. 그런 점이 제 할말은 입밖에 내고 보는 대찬 인혜와는 어쩐지 비교가 되어서 선은 슬그머니 그를 걱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오라버니를 닮지 않아 사람 보는 눈만은 꽤 정확한 인혜가 노골노골해진 것을 보면 그녀도 저 어리숙한 풋풋함에 반했음이 틀림없다. 심사가 뒤틀린 선의 눈에조차 그렇게 비추었다면 그는 정말로 그런 사람인 것일 테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의외였다. 초조한, 아니 그보다는 불편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불편함 같은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히려 담담한 선이 그에게 미안할 정도였던 것이 그는 대뜸 앉겠다고 했다. 딱히 선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처지여서 선은 쉽게 고개를 넙죽 끄덕였다. 곧 제 새신랑 될 사람 곁에 붙어있을 법한 당찬 계집애 인혜는 어디가고 왜 준희가 혼자 거기에 있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치장 좋아하는 스무살 처자가 드레스라도 갈아입으러 갔겠거니 싶었다. 
분명 소란스러운 것에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성품은 순하지만 그래도 꼭 다물린 입술을 보면 제 고집은 얼마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난잡한 소문과 집안 얘기가 굴러다니는 이쪽 사회에서 용케도 그 정도 대화에 불편해 할만큼은 곧다. 선이 조용한 만큼 그도 조용했고, 말은 없었으나 말이 많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느낌이나 약간 지체되는 침묵 특유의 편안함 같은 것이 있었다. 말을 하기에 앞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또는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거나, 실제로 말을 할 필요가 없거나 하는 경우가 대개 그러했다. 선은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 외에는 건넬 말이 없었고, 굳이 적당한 얘깃거리가 되지 못할 말을 꺼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담배를 피지 않는 다는 것을 넌지시 알아차리고 있음에도 선은 다시 다음 개피를 입에 물었다. 머리를 울리는 싸한 연기를 깊이 마셨다가 내쉬면서 선은 슬적 바람에 흩어지는 봄 꽃을 본다. 박의원의 정원에는 유난히 봄꽃이 많았다. 봄꽃이 많은 정원에는 가을이면 유독 잎이 일찍 져서 스산한데 그럼에도 박의원의 정원에는 유독 벚이 많았다. 늦게 핀 목련만이 흩는 벚들 사이에서 꼿꼿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여름 한철 반짝 피어나는 장미 덩굴도 좀체 보기 힘든 고집스런 정원이었다. 

“…”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문 준희를 보며 선은 쓰게 웃었다. 풋풋함을 넘어서 되려 이쯤되면 신선하기까지하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단어는 그 전에 그를 보았을 때부터 있었던 엇비슷한 것 들이었다. 풋풋하다거나 곧다거나 어리숙 하다거나, 신선하다거나 하는.

“우습네요”
“네?”

저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라도 꺼내려고 했나 싶어 말쑥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준희를 보며 선은 가만 눈을 맞추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준희군이 아니고 제가”.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그 바닥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쓰지 않을 법하지만 꽤나 상투적인, 그러니까 의외로 흔하면서도 곧잘 쓰이지는 않는 그러한 단어들인 것인데, 그것만으로 단정짓기에 선은 유독 저 조용하고 단정한 듯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두어번 만난 사람치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눈치채어 버린 듯 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알기쉬운 사람이라고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곧고, 선의 문제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선은 매사에 무관심 했다. 애초에 그가 더욱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했더라도 선은 그것조차 쉽게 알아차리는 성미가 아니었다.  

“뭐가 우스우십니까”
“별 것 아닙니다”

이를 테면. 
이를 테면…. 그렇게 시작한 문장으로 무언가를 정리하려고 했으나 선은 실패했다. 갑갑하다.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준희의 얼굴에 몸을 뒤로 뺀 그는 새 담배를 물고 설핏 고개를 들었다. 건물 외벽 모퉁이에서부터 재경이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걸어오고있었다. 





“선.”

“영은씨가 찾는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짧은 시간 동안 본 선의 표정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고 불쾌했다. 쌍커풀 없는 눈이 매섭다. 선은 재경을 보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으나 곧, 말없이 다시 입술을 닫았다. 말을 해도 소용 없는 것 처럼. 선은 일어나며 잠깐 곁에 앉아있던 준희를 돌아봤다. 어깨를 두드리는 재경을 뒤로 하고 선은 자리를 벗어났다. 

이영은?”
“아나?”  

갑작스레 준희가 꺼낸 화두에 재경은 의외라는 낯빛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대학 시절에 잠깐, 같은 승마구락부에 있었습니다. 나이도 같았고”
“그러고보니 선이랑 하나 차이면, 둘 다 나이가 같군”

“선씨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준희를 보면서 재경은 쓰게 웃었다. 사실이다. 제 속은 기가 막히게 잘 감추던 선이 오늘 따라 준희의 앞에서는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자리를 떴다. 마무리 지으려던 일이 순탄치 못한 것에 꽤 골이 나 있었을 것이다. 정작 일은 갈무리 되었던 것이 영은만이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타일러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은에게 선은 이미 학을 떼었던 듯 하다.

“영은양 파혼한 것은 아나”
“압니다. 소문으로만”
“상대가 선이었던 것은”
“…그랬습니까?”

“소문 좁은 이 바닥에서 그것도 몰라서 어쩌나. 송, 네 처형 남 사람이 아끼는 친우니까 그 정도는 알고있으라고. 파혼도 선 쪽에서 했지만”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집안 배경의 문제 이전에 파혼 당한 여자의 몸값은 꽤나 박하다. 그것을 모를 선도 아니고,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영은의 부모도 아니었다. 집 밖으로 도는 가장들이 무수한 판에 그 정도의 사건은 대개 집안의 선에서 갈무리 되는 편이었다. 하나 뿐인 귀한 딸을 시집 보내면서도 사위의 외도 정도는 적당히 눈감아 줄 수 있다는 흔치 않은 대인배의 소굴이었다. 영은이라면 승마구락부에서 잠깐 보고 만 것이 다지만. 곁에 있는 준희를 당혹스럽게 할만큼 활기찼던 탓에, 그리고 애지중지 곱게 자라오기는 하였으나 성품이 썩 좋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라온 탓에 그녀와 교류를 가질 일도, 가질 기회도 없었다. 방탕하다고 하기엔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고, 순진하다고 하기엔 너무 철이 없는 그런 아가씨였다. 

“집안 약속이었습니까?”
“아아. 그랬던 듯 한데 선이 완고하게 거절했던듯 해. 그럴만도했지. 선이라면 절대 참고 넘길 만한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네. 오히려 멀리했으면 멀리했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다고 했거든”

“표정에 인색한 주제에 가끔 지나치게 솔직하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게 단점이지.” 재경은 마지막 말을 그렇게 덧붙였다. 선이 등을 돌려 걸어간 방향을 눈으로 훑으며 말하는 작은 목소리였던 탓에 혼잣말인듯 싶었으나 충분히 곁에 있는 준희가 알아듣고도 남을 목소리였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포기를 모르더군. 오히려 그것에 선이 학을 떼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말야”

준희는 말없이 재경의 곁에 앉아있었다. 저를 돌아보던 고요한 눈동자가 선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담배를 찾아 무는 그 반복적이고 초조한 동작이 절로 그려지는 듯 하다. 그런 선에. 이영은. 말도 안되는 조합에 준희는 조금 놀란다.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였다. 좋게 보면 순진하교 애교라도 많았을 텐데 예쁘장한 얼굴에 꽤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서 제가 가지고 싶은 것에만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알아두는 편이 나을거다. 네 처남 될 사람도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니까. 처음부터 선이 마음을 줄만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재경은 곁에 앉은 준희를 돌아보곤 가무잡잡한 손으로 준희의 머리를 흩었다. 형이 제 동생에게나 해줄 법한 그런 손길이어서 준희는 익숙치 않은 듯 조금 등을 움츠렸다. 재경은 희고 단정한, 약간 고집스러운 듯 평온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오히려 그 애는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데”

“아마 지금도 좀 예뻐할거다.” 재경은 말해놓고도 뭐가 우스운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숨을 흘리며 웃곤,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가는, 참지 못한 듯 다시 숨을 흘리며 웃었다. 기껏 입은 예복 구기지 말고 슬 일어나라. 그렇게 말한 재경은 담배를 입에 물며 일어나 걸었다. 선이 모습을 감춘 그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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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鮮”

선. 그렇게 불린 남자가 뒤를 돌았다. 양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감색 제복을 입은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꽤 큰 키를 한 그는 다홍색 치마폭이 단아한 여인의 곁에서 와인잔을 집어들고 슬며시 웃었다. 단정하다 못해 빈틈없이 기름을 발라 넘겨 올린 머리칼은 그 시대 신사들이 으레 그렇듯 밝은 샹들리에 아래서 반드르르하게 빛났다. 하얀 피부 위로 불거져 보이는 파르라한 혈관들이 그를 어깨에 매달린 반짝이는 견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오랜만이다. 그렇게 말하는 김金을 향해서 걸어오며 선은 돌아보던 표정처럼 작게 웃음지었다. 

“선鮮. 이쪽은 송宋.”
“송준희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이 등을 탁, 치자 준희는 얼덜결에 입을 열었다. 송준희입니다 반갑습니다. 늘 하는 것처럼. 사람이 많은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러한 자리가 거북했을 뿐이다. 정재 계 인사에 대한 안목도 관심도 없는 그에게 웃는 얼굴 뒤로 으르렁거리는 사람들의 모임은 거북했다. 샴페인 하나 하나에 값을 매겨 트집을 잡고 얼핏 그저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대화 뒤에 무슨 뜻이 숨어있나 헤아리면서까지 사람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약은 방법들에 그가 서툰 탓도 있었다. 

선이라고 불린 그는 그렇게 말하는 준희를 향해서 가볍게 목을 숙였다. 반갑습니다 선宣입니다. 그는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선은 고요했다. 선은 장 내의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나 그는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고 직감했다. 선은 고요하다. 아마 그도 자신처럼 이러한 모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거북해하기보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축에 가까웠으나. 

“송, 이쪽은 선. 사관학교 시절 동기인 선. 나는 중간에 뛰쳐나왔지마는. 이번에 승진했다더니 이런데도 얼굴을 들이밀 줄 알게됐는가, 선?”
“우스운 농담 말아 김재경. 언제부터 이런데서 실실 웃는 인간이 됐나?”
“나야 사람 만나는 일이면 어디든 안빠졌잖나. 내 성미엔 이게 딱 맞아.”

수지도 맞고. 덧붙인 말에 선은 목청을 울리면서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쪽은 요즘 한창 유명한 그 스캔들의 주인공일세. 왜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던 박의원댁 셋째 따님의 약혼자말이야.”
“아, 그?”
“그래 그”

선은 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소문의 가운데 선 송가의 외동아들을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괜히 초면에 저를 향한 낯부끄러운 소문을 들은 것 같아 그는 가만 시선을 돌렸으나 선은 그 고요한 얼굴로 흥미라도 동한 것처럼 작고 까만 눈동자를 움직여 물그러미 준희의 옆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소문이 하도 무성하셔서 어떤 분인가 했습니다”
“원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낮고 정중한 말투지만 단호하다. 어딘가 조금 무표정한 그의 말투 치곤 의외였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이 말을 끝맺으며 꾹 닫힌 채 미동하지 않는다. 

“의외입니다”

듣던 소문으론 조용한 분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선은 손에 끼고 있던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흰 장갑 한쪽을 빼곤, 그의 얼굴처럼 파르라한 혈관이 언뜻 비치는 희멀건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선은 습관처럼 손목을 까닥여 초조하게 타들어가는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며 두 개피를 금새 해치웠다. 선은 담배를 태우며 와인을 쓴 커피라도 되는 양 목으로 흘러넘겼다. 

미약한 코롱의 향이 났다. 훅 끼쳐오는 담배연기에 뒤섞여서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부드러워 보이는, 단정한 얼굴이 전부인 선의 옆모습은 묘하게도 수려해보였다. 건조한 눈동자와 웃는 듯 마는 듯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 그의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그 강줄기처럼 불거진 파르스름한 혈관을 내비치는 상아색 피부 때문인지도 몰랐다. 떨어지는 재를 좇던 그의 느린 눈동자가 다시금 준희를 바라본다. 만난 적도 무언가 공유할만한 교차점도 없었다. 선만이 간간히 재경과, 사관학교 시절의 화제로 끊어질 듯 말 듯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김상원 중령님은 ‥”
“그때 그 사고 이후로는 윤정호도” 

선의 휘어진 눈매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목이 타는 듯 무알콜 샴페인이 든 잔을 기울이는 준희를 향했다. 여전히 선의 곁에 서서 한 쪽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재경은, 깨나 과거에 젖어있음이 틀림없다. 

“송군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말 낮추게 선.”

선은 무언가를 재듯 잠시 가늘어졌던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무성한 소문 너머로 들린 그의 나이는 자신과 엇비슷 했으나 그렇게까지 자세한 내막을 소문에 어두운 선이 알리가 없었다. 젊긴 하지만, 앳된 얼굴은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을 포함하여 그래도 깨나 다부진 몸을 한 남자였다. 다만 이런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어수룩함이 그의 풋풋한 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 준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준희군은”
“금융 회사에서 일하고있습니다. 마뜩찮은 일입니다만‥.”

선, 아니 선씨는. 그렇게 묻자 선은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눈이 가늘어졌고 입술이 좀 더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곤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흰 장갑을 도로 손에 끼웠다. 

“선은”

재경이 웃었다. 

“파일럿이네. 안그러신가 공군양반?”

김재경. 선이 그를 다그치듯 이름을 부르자 재경은 슬며시 웃곤 어깨를 으쓱였다.

“파일럿입니다. 김재경과 함께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그 후론 군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회사에선 주로 무슨 일을?”
“보통은 그저 업무처리 정도입니다마는, 아무래도 금융 쪽과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거나 관련 정보를 수집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고”


눈이 마주쳤다.

선은 들었던 와인잔을 들었다 놓으며 준희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관인가. 사람과 이야기 할 때는 사람의 눈을 곧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일까. 준희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와인잔을 가볍게 쓰는 선의 손끝을 본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말끄러미 바라보는 선의 표정없는 눈동자를 보며 준희는 쉽게 알아챘다. 그는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달아오른 재경과의 대화에서 준희가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단순한 대화였을 것이다. 

아. 선이 짧은 목청을 울렸다. 빠르게 다가오는 손길에 준희는 몸을 뒤로 뺄 겨를도 없이 목을 움츠렸다. 

“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 군.”

아직도 얼떨떨하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준희를 두고, 재경은 지금껏 짧은 교제 동안 준희가 본적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만큼 힘차게 웃는 재경을 주변의 시선이 훑었으나 곧 멀어져갔다.

“선선, 아직도 그 버릇은 못고쳤나?”
“입다물게”
“아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웃었잖나. 제발 어디 가서 그러지 말게. 요즘 중년배들은 취향이 이상하단말이야”
“농담하자는거면 접어둬”
“사실이라니까”

요즘 한창 물오른 젊은 파일럿을 노리는 놈들이 꽤 돼. 실실 쪼개며 와인 한잔을 격의 없이 입에 탁, 털어넣은 재경을 보다가 선은 한숨 쉬듯 시선을 내리 깔았다. 미동에 사족을 못쓰던 양반들이 다같이 요즘은 피부가 희여멀건 젊은이들로 취향을 바꾸신 모양이었다. 재경의 말이 아니었어도 박의원의 애첩이나 다름없는 곱게 생긴 청년 이야기는 건너건너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내리깔았던 선의 시선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있는 준희에게 가 닿는다. 시덥잖고 더러운 이야기를 이해할만한 도련님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의외다. 대충 이야기의 흐름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좁혀진 미간을 보자 웃음이 나온다. 어리숙한 풋풋함이다. 반쯤은 진담인 농담을 받아 치는 대신 티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역력한 불쾌한 표정.  

“사실이면 더 좋고. 어디 미인이 한둘 널렸는가. 내 차례는 오지 않을 테니 안심이다 재경”
“하여튼 네놈의 그 묘한 낙천성은 이럴때만 고개를 드는군”

재경의 대답을 흘려들으며 선은 웃었다. 보기드문 풋풋함으로, 선을 걱정이라도 하듯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순한 눈동자가 저를 훑고있었다. 결국 목청을 울리며 나지막히 웃음을 흘렸다. 

“걱정됩니까?”
“예?”

“제가 걱정됩니까?” 
“아니 그것이”

다정하네요 군은. 아. 숨소리와 비슷한 감탄사 같은 것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초면에, 저렇게나 당당하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무표정한 저에게 저런 말을 서슴없이 꺼낼 수 있는 선은 대체 짧은 시간 동안 저의 어디를 보고있었던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김재경. 가봐야 할 것 같다”
“뭐? 휴가 나온거 아니었어?”
“아니다. 야간비행이 있어서 저녁까진 들어가봐야해”
“너 온다고 성하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녀석 조금 있으면 올거다”
“그럴 여유가 안돼. 정말로 이동 중에 잠깐 들린거다. 다음에 보자”

아쉬운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선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재경은 벨보이를 불러 급한 전보라도 치듯 말을 적어내려갔다. 필히 선을 보러 온다던 그 사람에게 보내는 전보일 것이라고 준희는 으레 짐작한다. 그 테이블에서 비우는 두번째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선은 한쪽 팔에 걸려있던 외투를 군복 위로 덧입었다. 어깨를 감싸는 케이프 식의 망토에는 반들거리는 견장과 공군의 문양이 진하지 않은 색으로 박혀있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군”


조만간. 
접점이 없는 선을 다시 볼만한 일이 준희에게는 없었다. 그런데도 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만간 이라고 말했다. 아니 크게 말하면 이 회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작은 접점이 있었다. 엇비슷한 상류계층의 자제들이었고, 또는 그들 자신이었으며 그리고 대개는 이런 파티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고 초대되어 오는 사람들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비슷한 지위의 비슷한 집안의 사람이지만, 대부분 금융계에 종사하거나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던 그의 집안은 선과의 접점이 없었다. 상류층 자제들이 나온다는 문인계 고교를 졸업했고 다들 그러듯 적당히 좋은 대학을 나왔던 그에게 사관학교 생도 출신의 동기는 없었다. 애초에 주변인 대부분이 군과는 관련 없는 업종의 자제들이었다.

선은 건네 받은 모자를 쓰며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선이 돌아보았을 때 선과 같이 있던, 다홍빛 치마폭의 여성이 잠시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선은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악수를 하며 말없이 웃었다. 그 다음엔 준희보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양장을 한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가와 선의 등을 두드리거나 어깨를 치며 인사를 했다. 선은 가볍게 모자를 들썩이며 인사를 해보이며 찬 바람이 소스랍게 불어오는 문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나갔다. 절제된 동작들. 필요이상으로 다리를 굽히거나 팔을 흔들지 않는다. 그의 어깨를 덮은 케이프가 조금씩 걸음마다 흔들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을 보려는 듯 잠시 왼팔을 들었다 내렸을 뿐이었다. 


*낭만 패러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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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