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드는 날 3
"이제 도착하셔요?"
인혜는 늘 그렇듯 생기있는 얼굴로 웃었다. 준희와 만나지 못한 지난 이주동안 그녀는 여름 햇살에 조금 그을려 더욱 건강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시원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운 챙이 큰 밀집 모자 아래로 그녀는 햇살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준희를 맞는다. 여름 휴가철을 계기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조금씩 업무를 분산시키려고 하는 듯 했다. 맡고있던 자료들과 기업체들의 서류를 그에게 내려보내고 적당한 선에서 그에게 처리를 맡긴다. 어느 정도 그 업무가 손에 익고 나서야 책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그는, 인혜의 초대에 뒤늦게 응했다. 박의원의 여름별장은 소박하고 푸릇했던 저택의 정원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름 별장 특유의, 한 껏 들뜨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별장 외관에서부터 물씬 풍겨나왔다. 박의원의 고전적인 취향에는 맞지 않았으나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인혜와 그녀의 친구들의 우아한 허풍에는 잘 어울리는 듯 싶기도 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인혜는 조심스레, 그리고 조금 대담하게 준희의 팔에 제 팔을 팔짱껴 잡았다. 준희는 당황스러움에 꼿꼿하게 세운 등을 조금 더 굳혔으나 인혜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짐짓 모른척 하였다. 손에 낀 하늘거리는 레이스 장갑아래로 그의 옅은 회색 빛 정장이 비쳐보였다. 얇은 여름 용의 옷감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찌는 듯한 무더 아래에서 양장은 숨이 막힐 것 같다. 준희씨. 준희씨? 인혜의 목소리에 준희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멀어졌던 시선을 되찾는다. 지나치게 무더운 날씨에 주위를 둘러보는 것 조차도 버겁다.
"많이 더우셔요?"
인혜는 그렇게 물었다. 챙 넓은 모자 밑으로 그늘 진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준희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녀가 하는 말은 언제나 먼곳에서 들려오는 것 처럼 느껴진다. 인혜는 그보다 두뼘만치 작았고, 그녀가 말할때 준희는 그녀의 말이 등 뒤에서, 또는 자신의 어깨 쯤에 와서 닿는다고 생각했다. 인혜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더워하는 준희의 이마를 조심스레 문지르곤 곧 작게 웃어보였다. 빨갛게 루즈를 칠한 입술이 양옆으로 길게 선을 그리면서 변했다. 인혜는 그를 데리고 우람한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정원 한 구석의 테이블로 가려다가 돌연 발걸음을 돌린다. 실내는 덥지 않으실거에요. 테이블 아래 한갓지게 앉아서 패션지나 동인지 따위를 뒤적이던 인혜의 친구들이 색색의 리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챙 넓은 밀집모자를 손 끝으로 우아하게 밀어올리며 준희와 인혜 쪽을 바라보았다. 무엇인지 호들갑스레 말은 하지 않아도 소곤소곤 거리는 목소리들이 작게나마 들려오는 듯 했다. 여자들 특유의 소소한 잡담거리의 화두가 되고있다는 사실은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눈치챌수 있었다. 깔깔 거리며 웃는 친구들을 흘깃 쏘아본 인혜가 이내 한아름 웃으면서 준희를 별장 안 쪽으로 안내한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부터 바닥의 석재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좀 서늘해 진 듯 싶었다. 별장의 외관은 뙤약볕 아래서 눈이 아프도록 빛을 반사하는 흰색이었으나 내부는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아 색달랐다. 짙은 체리색 가구들과 한 눈에 보아도 좋은 나무를 쓴 것이 눈에 보이는 문양이 아름다운 목재 장식품들. 모던하지 못한 보수적인 우아함이 집안 곳곳에 살아있었다. 박의원의 저택에서 본 숨죽인 무거운 우아함이 별장에도 살아있는 듯 보였다. 인혜가 들어서는 것을 본 고용인이 소리없이 다가와 준희의 짐을 건네 받았다. 사층의 가장 안쪽 방으로 옮겨놓겠습니다. 고용인은 조용히 제 할말을 하고 계단을 올라 사라졌고 인혜는 잠시 짐을 옮기는 고용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삼층은 저와 제 여학교 친구들이 쓰고 있고요. 사층에 올라가시면 계단 오른쪽 복도로 가시면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에요. 이층에는 서재가 있고, 언제든지 들르셔도 되어요. 가장 안쪽에 유리 덧문이 달린 책들은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시는 책이니 그 책들만 손대지 않으시면 되고요"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기차편을 잡느라 차려입고 온 양장을 갈아입고 짐을 푼 뒤에, 서재에 들러본 뒤 해가 지면 밖을 나서는 것도 괜찮을 법했다. 인혜는 그 무더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지치지 않는 듯 하늘색 리본이 나풀거리는 챙 넓은 밀집 모자를 조금 올려 썼다. 서늘한 기운에 조금 기운을 되찾고 나서야 오밀조밀한 하얀 발이 드러나는 하얀 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원피스와 잘 어울리는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인혜는 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라도 하듯 조금 쉬라며 슬며시 인사하고 다시 별장을 나섰다.
"여어. 미래의 사위왔나?"
박의원의 둘째아들. 그러니까 인혜의 손위 형제인 박인혁은 계단에서 내려오며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진지하지 못하고 요리조리 뺀질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어느 유전자의 내력인지 모를 만큼 그는 집안의 탕아 같은 존재였으나 짙고 뚜렷한 잘생긴 눈썹 하나만은 박의원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호탕한 목소리가 목청을 울리며 나와 텅빈 현관을 메꿨다. 곁에 서있던 재경이 슬쩍 손을 들어 말없이 인사를 건네서 준희는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했다.
"방금 도착했나?"
"예. 방금 오후 기차로 왔습니다"
"더워 죽을 것 같은데 수고했네. 안은 좀 시원할거야. 그래뵈도 우리집 영감이 더운걸 딱 싫어하거든. 얼굴이 벌개진걸 보니 더위라도 집어먹은 모양인데 적당히 방에서 쉬다 내려오게"
인혜 그 기집애가 워낙 빨빨 거리고 다니길 좋아해서. 인혁은 그렇게 덧붙이고 다시금 웃었다.
"기운찬 기집애 맞춰주려면 너도 힘들테지. 쉬다 내려오게 이따 보지"
소매를 팔꿈치 까지 걷어올린 재경이 픽하고 바람 새듯 웃으며 저녁에 보자하며 말을 덧붙였다. 준희는 뙤약볕 아래로 나가는 둘을 보며 가볍게 인사 한 뒤에, 기차 여행 도중에 등에 구김살이 간 웃옷을 벗으며 계단을 올랐다. 바닥의 석재때문에 집안은 좀 서늘했고 어디선가 모르게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얇은 소재의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소매를 반쯤 걷어부친 준희는 육중한 서재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책의 냄새와 책에 피는 가무잡잡한 곰팡이의 냄새,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새것 같은 목재 책장들의 냄새가 어우러져서 기분 좋은 냄새가 뒤섞여있었다. 책이 바래지 않도록 창에는 커튼이 닫혀있었고 저마다 조금씩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닫힌 커튼이 파도처럼 나부꼈다. 서재는, 서재라고 부르는 것 보다도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성 싶었다. 잘 마른 덕에 좋은 빛깔을 내는 목재 책장들이 아득할 만큼 죽 늘어서있고 그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작은 복도들은 미로처럼 보였다. 잘 구분되어 정리된 서가에서 그는 가장 앞에 있는 철학서부터 찬찬히 책을 훑었다. 방대한 영미문학을 지나, 소장본이 거의 꼽혀있지 않은 한국 문학을 지나 약간의 시집 사이에서 준희는 서정주의 시집을 꺼내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그 서가, 준희가 발걸음을 멈춘 그 서가 끝에 서가용 사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윗쪽 칸의 시집 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다. 누군가 책을 가져간 듯 하다. 준희는 팔을 뻗어 그 언저리를 손으로 훑어 보다가 이내 안쪽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박의원의 정원에서, 자신의 약혼식이 치뤄지던 그 정원에서 준희는 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선은 알고있었다는 듯 표정에 인색한 얼굴을 부드럽게 지푸리며 조금 웃었고 담배를 입에 물었었다. 베이지색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늘이고 자고 있는 것은 선선이다. 고요하고 조금 무관심한 남자. 그는 짙은 갈색의 바지를 차려입고, 흰 와이셔츠를 안에 받혀 입었다. 서늘한 실내임에도 조금은 더운듯 소매를 걷었다. 읽다 잠든 책이 가슴 위에 얹혀서, 그가 숨을 쉴때마다 함께 오르내리고 있었다. 토마스 만. 베니스에서의 죽음. 빛을 등지고 고요한 표정으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만이 서재의 가라앉은 침묵을 깨고, 그 사이로 아주 미약하게,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초조한 듯 담배를 태우던 손이 힘을 뺀 듯 소파 아래로 늘어져있었고, 옅은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의식이 있을때의 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빈틈 없고 고요한. 저택의 모퉁이에서 마주쳤을 때 조차도 껄끄러워 하지 않으며 다음 개피를 입에 물던.
책없이 소파 한 구석에 앉은 준희는 가만히 선을 들여다 보았다. 파일럿. 처음 만났을때 선은 파일럿이라고했다. 아니 어디에선가 선을 분명 두어번 마주쳤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비행기에 앉는 모습을 상상한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조금 불손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토마스 만을 읽는 선을 상상했다. 책장을 넘길 때 조차 소리 없이 움직일 것 만 같은 손이 비행기를 움직인다. 그날 보았던, 그러한 감색의 제복을 빈틈 없이 갖추어 입고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채로 거대하고 무거운 기계를 움직인다. 하얗고 생기 없는 얼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 보다는 서재에 앉아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로 하늘을 배회하는 그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웅장한 엔진의 소음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앞을 볼 것 같은 … 아니, 의외로 그의 직업은 그에게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준희는 비행장에서 귀를 가득 메우던 요란한 엔진의 소음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한다.
"아…"
툭. 하고 선의 가슴에 올려져 있던 책이 아래로 떨어졌다. 몸을 일으키다가 떨어진 책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바라보는 선을 보며 준희는 팔을 뻗어 책을 집었다. 표지를 덮어 선에게 다시 건네자 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준희가 건네는 두꺼운 책을 받아들었다.
"언제부터…"
선은 목이 잠겼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손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목청을 가다듬은 선을 준희는 가만히 바라본다.
"계셨습니까"
조금 되었습니다. 답하는 준희의 말에 선은 당황한듯 보였다. 아직은 잠이 덜 깬듯 간간히 초점이 흔들리는 시선이 준희에게 가 닿았다가 그의 등뒤로 보이는 서가에 머물렀다가 다시 준희에게로 돌아왔다. 아…. 작은 감탄사 비슷한 것을 내뱉는 선의 의도를 짐작할수가 없다. 선은 건네 받은 책을 탁자 위에 대강 올려놓고 아직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울여 있던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그러니까 조금 되었‥"
"오늘 도착하셨습니까"
준희는 그제서야 선의 말을 이해하고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오후 기차로 도착했습니다. 준희의 말에 선은 준희를 찬찬히 훑는다. 예복에 감싸여 있던 준희가 조금 답답하고 꽉 매여 보였다면 오늘의 그는 조금 풀려있는 듯 하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느슨하게 풀려있는 것인지, 아니면 휴양지의 공기가 그리고 무거운 집안의 압박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진 거리가 그를 마음 편히 만들어 놓았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선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찾다가 이내 관두었다. 남의 서재에서 혼탁한 연기를 피울만큼 예의 없는 것은 아닌 탓이었다. 인혜의 약혼자라고 생각하면 간단할일이었다. 선은 일단 이 남자가 왜 여기있는지 떠올렸고. 그 후에야 인혜를 떠올렸으며, 그리고 인혜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잘어울리는 한쌍이기는 하였으나 그것 뿐이었다.
"슬슬 해가 질 때도 되었습니다. 나가보지 않아도 됩니까 준희군은"
"짐을 풀고 오는 길입니다. 저녁때 뵙자 하셨으니 시간이 조금 빕니다"
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습니까. 선은 탁자에 올려두었던 책을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도 불지 않는지 일렁이던 커튼들이 잠잠하다.
"그럼 저녁때 뵙겠습니다. 서가에 있는 책은 가져가서 봐도 됩니다. 의원께서는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선은 울창한 서가를 벗어나 모습을 감춘다.
여기있었냐. 익숙한 재경의 목소리가 멀직이서 들렸다. 서재로 들어오던 재경이 선을 향해서 그렇게 말한 듯 했다. 선의 대답은 없었다. 조용히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철걱하며 울렸다. 선은 아주 부드럽게 일어나 걸었는데도, 마치 저를 피하는 것 처럼 자리를 뜨는 듯 느껴져 준희는 조금 당황한다. 지나치게 민감하게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깨어나 당혹스러운 눈동자로 눈앞에 앉아있는 준희를 바라보던 선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서 말이지…"
재경의 말에, 인혁도 인혜와 그녀의 친구들도 모두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사관생도 적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재경의 진중함은 흔히 곁에서 보아왔으나 재경이 저만큼 신나게 떠드는것은 준희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선은 소리내지 않다가도 재경의 말 중간중간에 끼어 그가 잘못 말한 부분을 짚어주고는 하였다. 이상했다. 스멀스멀 확신하지 못할만큼만 불안하다. 박의원의 저택에서도, 그 이전의 연회에서도 선은 말을 할때는 사람의 눈을 무서우리만치 곧게 쳐다보고 말했다. 준희에게도 그는 그러했다. 말을 할때도 들을 때도 선은 오해할만큼 곧게 사람을 쳐다본다. 오히려 미동도 하지 않는 열기 없는 냉정한 눈에 움츠러들 정도였는데 선은 준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식탁의 끝에 앉은 그에게까지 애초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시선을 돌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선이,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반듯하게 얼굴을 보여줄 것 같은 사람의 시선이 벗어나는 것이 못내 불안하다. 신경이 쓰였다.
"그때 선도 같이 있지 않았나?"
"아아. 그랬지"
"선이 그 때, 평소엔 침착하면서 말야. "
재경의 말에 인혜의 친구들은 흥미로운듯 귀를 기울인다. 이야기는 어느새 사관생도 시절 인혁과 재경을 지독하게 괴롭혔다던 선배의 이야기에서 선의 이야기로 넘어가있었다. 파일럿 선발 시험을 위해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다던 이야기라던가, 중력 훈련이 있던 날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않았다는 이야기라던가. 무언가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을 것 만 같은 남자의 이야기 치고는 꽤나 생소하다. 말하는 재경은 더할나위 없이 즐거워 보여서 선은 약간 인상을 지푸린 채였음에도 재경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미 동기들 사이에서는 한참이나 의외성을 띈 이야기로 몇번이나 회자된 이야기인듯 하다. 인혁은 이제는 너무 들어서 지겹다는 듯 간간히 선의 지푸린 얼굴을 보고 웃었고 어디가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사관생도들의 이야기에 볼을 붉게 들인 아가씨들만 눈을 빛냈다.
"첫 비행을 끝내고 왔는데 …"
시선을 돌리지 않는 선을 찬찬히 관찰한다. 관찰. 그러한 단어가 가장 적합한 듯 싶었다. 선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식사가 끝날때 까지도 선은 한번도 시선을 돌린 적이없었다. 식사가 치워진 후에 나온 단 와인을 몇모금 입에 머금던 선은 쉬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재경은 여전히 아가씨들의 시선을 잡은채로, 이제는 선의 이야기에서 연회에 있었던 자잘한 사건에 이르는 이야기를 풀고 있었고, 인혜는 준희의 곁에 앉은 채 인혁과 마주보고 문학지에 대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준희씨. 인혜가 부르는 목소리에 준희는 선이 사라진 계단에서 눈을 뗐다. …작가 말이어요. 인혜는 그렇게 말하며 까만 눈을 깜박 거렸다. 짧게 잘라 안으로 구부러지도록 정돈 된 머리에 소매가 부푼 남색 원피스. 인혜의 시선을 따라 인혁의 시선도 움직였다. 인혁은 뭘 그리 넋을 놓고 있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준희는 몇 번이나 서재에서 선을 마주쳤다. 선은 때로 파이프를 물며 재경과 영미문학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꽤나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것 처럼 보였다. 재경이 말하는 헤밍웨이와 선의 헤세 사이에서 둘은 연기가 사그라들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서가 사이에서 준희는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종이를 입에 물고 사다리를 올라 책을 찾는 선을 보기도 했으나 선은 재경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서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찾던 책을 가져가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로, 처음 서재에서 선을 발견했던 말 처럼 선은 소파에 앉아 무방비하게 낮잠을 자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피하는걸까. 선에게 준희를 피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선은 그와 마주치지 않는다. 간단한 목례가 전부였다. 첫날 서재에서 마주친 이후로 식탁에서조차 선은 입을 다물었다.
" … 파기라고 하기엔 납득이 안가잖나"
"선이 단호했잖은가"
" 약혼을 파…하기에 이변호사의 성정이…"
"선이 … 에 간다고 했다고 하네"
짧은 탄식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얕게 깨인 잠결에 재경과 인혁의 목소리가 들린 듯 했다. 맙소사. 인혁의 목소리였다. 재경이 … 무언가 말하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점차 더 작아져 들리지 않았다. 준희는 얕게 깨어 몽롱한 가운데 잠시 몸을 뒤척였다. 재경의 목소리가 멈춘다. 거짓말. 몇번이나 인혁이 말한 듯 하다. 재경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 들리지 않았는데 인혁의 목소리는 뚜렸했다. 오히려 점차 커졌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목소리였으나 이내 인혁도 입을 다물었다. 곧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서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멀어지는 발걸음소리를 듣다가 다시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던 듯 하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며 가슴위에 얹혀져 있던 책이 툭 하고 떨어졌다. 잠결에. 선의 이름이 오간듯 했다. 무릎을 덮고있던 담요가 떨어졌다. 재경이 나가며 제 위에 이런것을 덮어 놓았던가. 제가 끌어 덮은 적 없는 것에 당황한다. 인혜가 왔다 갔으리라는 짐작도 해보았지만 인혜는 서재에 출입하지 않았다. 인혜가 읽는 것은 고작해야 제 오라버니가 가져다주는 소소한 문학에서 여성을 상대로 출간되는 소소한 아녀자들의 낭만 소설이 전부였다. 몸을 굽혀 떨어진 책을 집어 들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습니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선이. 지난 몇일 간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남자가 팔 안 가득히 안았던 책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아직 잠이 덜 깬듯한 준희를 내려다 보았다. 선은 준희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본다. 냉정한, 움직임 없는 눈동자.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선의 눈이 준희가 집어 든 책을 향했다. 선은 잠시 책과 준희를 번갈아 본다.
"혹시 …"
예?.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꺼낸 말에 선이 답한다.
"선씨가 덮어두셨습니까?"
선은 두어번 눈을 깜박이다가 준희가 손 끝으로 만지작 거리는 담요를 본다. 아아. 예. 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저를 피하시는게 아니었습니까?"
쌓아둔 책을 집어 훑던 선의 눈이 준희에게 가 멈췄다. 선은 한참이나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의중이 무엇인가 짐작이라도 하려는 것 처럼. 선은 잘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눈살을 지푸렸다. 준희는 꼴각 침을 삼켰다. 선의 표정 없는 눈동자는 지나치게 냉담해서 준희는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는 대신 선의 목에 느슨하게 매여있는 타이에 초점을 맞춘채로 쉽게 나오지 않는 선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은 손끝으로 책의 두터운 표지를 천천히 쓸었다. 고개가 조금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박의원댁 정원에서 본 것 같은 웃음이었다.
"눈치챘습니까"
당혹스럽다. 그가 실제로 저를 피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제가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준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 점이 우스워서 선은 조금 웃었다. 픽하고 바람 새듯 입술 새로 숨이 샜다. 선이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재경 정도 뿐이었다. 인혜도, 그녀의 친구들도 하물며 인혁도 선이 준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이 그와 마주치는 일도 없을 뿐더러 식탁에서든 어디에서든 그저 말없이 주변에 녹아드는 선이 누군가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작해야 시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경만이 어렴풋이 선의 시선이 일부러 준희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때로 재경은 조금 묘한 눈으로 준희를 바라보았고 선은 그것이 제가 시선을 주지 않아서임을 알면서도 재경이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모른척 했다. 준희가, 그가 알아챘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선은 서재에서 책을 빌려갔고, 그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 표정이 풍부하지 않은 남자가 선의 시선을 민감하게 눈치 챘을거라고는 생각도 하지못했다.
선은 입을 다물었다. 피하는게 아니냐는 질문보다 더 대답하기가 힘든 질문이었다. 선은 셔츠에 손을 걸어 목주변을 느슨하게 헤쳤다.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그럼 왜"
준희는 그렇게 묻다가 목이 막히는 것 처럼 목울대를 울렸다. 그는 뒷말을 잇지 않았으나 왜 피했느냐고 묻는 말이라는 것을 선이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선은 가만히 그를 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어쩐지 웃음이 샜다. 사실대로 말하면 곧게 자란 착하고 풋풋한 남자가 어떤 표정을 할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선은 꽤 곤혹스러워져서, 그것이 우스웠다. 말해볼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선은 곧 그것도 우스워진다.
"준희군"
"예"
그는 정말로 빤히 선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받아낸다. 곧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 정직함이 믿음직스러운 한편 조금 애처로워서 선의 눈매가 부드럽게 조금 휘었다.
"박의원댁 저택 모퉁이에서 김형과 내가 하던 이야기를 군이 엿들은 것을 압니다, 나는"
그래서 저를 피했나 싶은 생각이 스친다. 찰나 동안 머릿속에서 갖가지 계산이 오고갔다. 아니. 그때 그렇게 마주친 후에도 선은 저를 지나치게 평범하게 대했다.
"짐작하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준희는 선이 담담한, 그리고 조금 미소지은 얼굴로 말하는 것에 가만히 귀기울인다. 나는. 선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목을 축이는 듯 싶었다. 껄끄러운 것을 말하듯 선의 미소지은 표정에 잠시 걱정과 비슷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남색가입니다 군. 선은 그렇게 말하곤 가만히 준희의 눈을 들여다본다. 당혹스럽지 않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으나 선의 입으로 직접 들을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선은 그렇게 말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듯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뺐다. 담배를 찾았던 듯 싶다. 선은 놀란 그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에도 준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제가…좋지 않게 말을 하거나 한 일이 있습니까?"
그. 남색가에 대해서. 준희는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선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선은 오히려 조금 더 웃는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본 선의 표정중에 가장 편안했다. 선은 마지 형이 동생을 보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조금씩 표정을 달리해가며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말을 더듬거리고, 눈을 깜박이고, 선의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기를 반복하며 불안정하게 말을 잇는 준희를 바라보았다. 풋내가 났다. 그의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먼저 떠오른 것도 선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고르는 준희를 바라보며 선은 느긋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왜 저를 피하셨습니까?"
"말해야합니까?"
"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있다. 선을 신경쓰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이바닥 인사들의 특성상, 설령 오해인들 누군가 자신을 기피한다고 생각하면 오기로라도 같이 본체만체 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선씨. 잠시 넋을 놓고 제 얼굴을 바라보는 바람에 준희는 선을 불렀다. 흐릿하게 준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선은 그의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자신의 손에 닿아 표지가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읽었던 저 책을 저 남자는 왜 하필 들고있는 것일까.
"좋아서 그랬습니다"
선은 웃었다. 당황스러워하며 표정을 굳히는 준희보다도 스멀스멀 웃음이 나오는 제가 더 우스웠다.
*낭만 패러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