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th



 “손 쥐어봐요.” 

 욕실에선 목소리가 울렸다. 이든은 그의 흰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눈을 감고 그의 오른손 손목 쥐었다. 때로 그는 이든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생소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든의 전공이, 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이 무엇인지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든은 채 완전히 쥐어지지 않은 그의 가늘고 흰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손등 위에 손을 겹치고 그의 주먹을 안으로 말아 쥐도록 천천히 손을 접었다. 이든의 품에 들어오기에 약간 넘치는 등허리는 그의 얼굴만큼 희었고, 이든은 따듯한 수증기 안에서 작은 물방울이 맺힌 목덜미 위에 잘게 소리가 일도록 입을 맞췄다. 펴봐요. 루윈.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쳤다. 완전히 손바닥과 손가락이 수평이 되도록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안 이든은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그의 손가락들을 바라봤다. 제 때 치료 받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손의 감각은 아주 더디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 감각 중의 일부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든은 그의 오른손이 할 수 있었던 수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넥타이를 매는 동안 그의 오른손은 얇은 넥타이를 받잡고 있었고, 머그컵을 쥘 때면 오른손으로 자신의 컵을 들었다. 침대에 앉아 책장을 넘기거나, 이든의 머리칼을 쓸어주던 손도, 소독약을 집어드는 집게를 집던 것도 그의 오른손이었다. 이든은 뜨거운 물 속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손끝을 바라보다 그의 오른손을 내려놓고 왼손을 두 손 안에 쥐었다. 검지와 중지에 이제 막 물집이 잡혔다가 굳어지기 시작해 아직 말랑말랑하게 굳은 불투명한 굳은살을 따듯한 물속에서 손끝으로 살살 비벼 문지르고 그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묻은 검은 잉크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문질러 닦아 냈다.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컵을 쥐거나, 신문을 집을 수 있었지만 글씨를 쓰거나 얇은 종이를 넘기는데는 부정확했다. 이든은 그의 필기체를 기억했다. 그의 글씨는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와, 그의 목소리를 닮아있었고 이든은 그의 글씨를 마치 그를 좋아하듯 좋아했다. 그는 말을 할 때 군더더기 없는 정확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그리 크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처럼 그의 글씨는 꾸밈은 없었지만 보기 좋게 위아래로 흘려 쓰여 있었고 단정하고 알아보기 손쉽지만 잘 쓴 글씨라는 것도 한 눈에 들어왔다. 그들 사이에는 오가는 말이 적었고, 오가는 말이 적었던 만큼 말 이외의 것으로 이야기를 나눠야하는 경우도 드물었으나 이따금 그는 그의 단정한 필기체로 무언가를 적어놓고는 했다. 차키 아래에 끼워진 메모나, 중요한 일을 적은 종이 같은 것들. 

 “아프진 않아요?”
 “오히려 아프지는 않아요.”

 이든은 그가 빈 공책에 글씨를 빼곡히 옮겨 적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아는체 하거나 그것을 그의 앞에서 눈여겨 본적은 없지만 루윈 이바노브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생소한 광경이었다. 마치 그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서명을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가 잘 갖춘 양복을 입고 오른손으로 서명을 하는 모습은 곧잘 영화에 나오는 장면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어서, 그는 아주 전형적인 그런 인물들의 표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오른손으로 담배를 피고, 오른손으로 단추를 잠그는. 그러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을 보았을 때 그가 대다수의 사람 중 하나인가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사인 같은 것이었다. 루윈 이바노브는 오른손으로 일을 하고, 서명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 중의 하나였고, 대다수의 기득권층 중의 한 사람이었다. 루윈 이바노브의 오른손이 더 이상 이전만큼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이든에게 있어서 그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쓸 수 없는 것 외에는 더 큰 문제점은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하루에도 몇 장씩 느리게 공책을 채워나갔다. 처음 글을 익히는 아이가 쓸 법한 숙달되지 못한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며 이든은 속을 앓았다. 
 그는 은행에서 돌아와 이든을 기다리던 때처럼 식탁에 앉아 이든을 기다렸다. 신문이나 책을 읽는 대신 공책에 글을 옮겨쓰는 것이 바뀌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왼손 약지에는 이든의 손에 끼워진 것과 같은 반지가 끼워져있었고 그는 제법 그것이 거슬릴 법도 한데 천천히 글씨를 써 나갔다. 이든은 조용히 식탁 맞은편에 앉아 그가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다. 루윈은 이든이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고 나면 조용히 이든의 얼굴을 바라보고나서 책을 덮었다. 이든은 루윈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그가 다시 글씨를 적어넣는 것을 보는 것을 못견뎌했다. 
 이든 플로베르는 루윈이 이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싫어했고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루윈은 혼자서 무언가를 할 때마다 그가 여전히 할 수 있는 것과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대면해야했고 이든은 그 생소하고 새삼스러운 상황 속에서 루윈이 혼자 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하물며 이든의 앞에서 글씨를 처음부터 다시 써 나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습관처럼 미간을 찌푸리는 동작만이 서른이 넘은 남자가 그 과정을 몹시 벅차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든은 몸이 약간 더울 만큼 따듯한 물을 더 받으면서 루윈의 몸을 끌어안았다. 물이 어깨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이든은 그의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안에 잡고 눈을 감았다. 그는 매일 오후, 또는 저녁까지도 작은 현미경으로 미세한 나뭇가지나 뿌리들처럼 생긴 신경계의 다발들을 관찰했다. 이든은 그의 머리에서부터 이어져 자신의 눈앞에 있는 흰 목덜미를 지나 어깨와 팔을 거쳐 손까지 이어질 그의 수만개의 신경들을 생각했다. 그의 손목에서 손바닥을 지나 손가락까지 가는 그 겨우 몇 인치 되지 않는 아주 얇고 미세한 길가운데서 무엇들이 길을 잃었는지 생각했다. 


*오른손을 다친 루윈. 4~5년후 배경. 패러랠. 카테고리 변경될 수도.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Nights of NewYork 01  (0) 2011.10.17
Bloomsbury 05  (0) 2011.10.04
Bloomsbury 03  (0) 2011.09.13
Bloomsbury 01  (0) 2011.09.13
by merone

The Nights of NewYork 01


01.
 루윈 이바노브 1970.10.10. 뉴욕 출생.
 신장 5.8피트. 마른 체격. 진한 밤색머리, 밤색 눈. 눈에 잘 띄지 않음. 평범한 인상. 양복 착용.

 콘실리에리. 뉴욕 외곽에 출몰. 
 조직의 경향이 루윈 이바노브의 출현과 함께 변화하였음. 지능적으로 변화. 경영면에서 두드러짐.
 조직이 점차 기업 적인 성향을 나타냄. 고학력 또는 고지능의 경제 관련 인물로 추정.
 검은 승용차. 적어도 중간 간부 이상의 인물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 간부의 정부라는 후문.  

 할렘 w136번가와 w148번가 사이에 픽업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임. 


02.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날은 비가 왔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비가 한차례 오고 나면 날이 퍽이나 추워질 것 같아 한동안 내려 마실 커피와 상하지 않는 음식을 마트에서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 그를 안아 올리면서 옷에 피가 묻었던 것이 선명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보리색이나 흰색 터틀넥 셔츠에 늘 입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차에 타고 있었지만 그를 차 안에 앉힌 뒤에는 운동화가 빗물에 젖어 질퍽질퍽 거렸고 그 후로 몇 일간은 발이 물렁해져 워커를 신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 비오는 거리에서 그를 픽업한 것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였다. 


03.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는 강하지 않았지만 부슬부슬 하루 종일 내린 비는 정비되지 않은 뒷골목들을 온통 진탕으로 만들어 놓았고 십년이 넘은 자동차는 도로를 달릴 때 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 듯 덜컹거렸다. 그 도로를 지나간 것은 순전히 그날 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일터에서 집까지 가는 데에는 늘 꽉 밀린 대로보다는 렌트 값이 싼 아파트 사이를 지나는 쪽이 빨랐는데 비가 오면 도시 외곽의 흙길은 모두 엉망이 되었다. 어설프게 아스팔트로 포장한 뒷골목을 달리던 낡은 차가 잠시 멈추어 섰다. 남자는 핸들에 몸을 기대고 오른쪽 차창 밖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내 좌석 밑에서 물에 축축하게 젖은 검은 우산을 꺼내어 들었다. 너무 낡아서 이제는 사는 사람이 없는, 거의 폐허에 가까운 건물 벽에 그는 기대어 앉아있었다. 기대어 있다기 보다는 거의 쓰러져 있었으나. 

 “이봐요. 괜찮아요?”

 여기저기 얻어맞은 듯 울긋불긋 푸르고 붉게 멍이 든 얼굴. 입술 옆은 터져서 피가 났고 왼쪽 눈은 뜨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로 부어올라있었다. 할렘에 가까운 지역인데다가 주변에 불장난이라도 할 만한 공터가 많은 지역이라 근방의 갱들이 자주 보이는 부근이었다. 그는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듯했을 갈색 수트와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갱에게 돈을 목적으로 시비라도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자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본다. 분명하게 백인에 속하는 피부색과 전체적으로 살집이 없는 몸. 키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거나 그 이상. 남자는 어깨와 뺨 사이에 검은 장우산을 끼우고 양 팔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안아들었다. 

 “이 앞에 바로 차가 있어요. 거기 까지만 걸어봐요.”
 “으...”

 그는 그제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얼굴만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걸을 때 마다 신음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부나 가슴에도 멍이 들어있거나 잘못하면 좀 더 심각한 내상이 있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낡은 검은 세단의 조수석 문을 열고 시트 위에 그를 앉혔다. 그는 거의 눕다시피 하는 모양새로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고, 남자는 검은 장우산을 접어 조수석 아래에 밀어 넣은 뒤에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의 젖은 코트와 얼굴의 빗물을 닦아 내고 차 안에 요란하게 울리고 있던 다니엘 포터 노래를 껐다. 차 안에는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낡은 쇳덩이가 비를 맞으며 내는 소리가 차 안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는 고열에 들뜬 느리게 뜬 숨을 몰아 쉬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파트로 향하는 동안, 오른쪽 귓가에서 낯선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파트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아주는 아니지만 조금 낡았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 차 기름값을 대면서도 그럭저럭 지낼 만큼의 렌트 값만을 받았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신에 몇 블록만 더 가면 종합병원이 있었고 방은 그 월세 치고는 약간 넓은 축에 속했다. 수압이 만족스럽지 못하긴 했지만 욕실도 따듯한 물 만큼은 잘 나왔음으로 남자는 직업을 얻은 뒤로는 줄곧 그 아파트에 살고있었다. 남자는 현관에 축축한 장우산을 던지고 그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이리 저리 몸을 가누지 못하고 좁은 아파트 입구에서 벽에 부딪힐 때 마다 그의 코트에 묻어있던 흙이 벽에 묻었고, 베이지색 코트 끝자락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이봐요, 왜 이렇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젖은 옷부터 벗어야 돼요. 당신 지금도 끔찍하게 열이 나고 있다고요.”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곤혹스러웠다. 남자는 젖은 몸으로 휘청거리는 그를 붙잡아 좁은 욕실로 밀어넣고 다 젖어서 못쓰게 된 가죽 구두를 벗겨 욕실 밖으로 던졌다. 물에 젖은 옷들은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남자는 그의 옷을 벗기는데 굉장히 노력했다. 코트는 손쉬웠으나 투버튼 양복 재킷과 아예 몸에 늘어붙은 것처럼 젖어버린 셔츠는 쉽지 않았다. 여자의 브래지어를 벗길 때나 신중할 법한 손이 아주 고심하면서 하나하나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그는 자꾸만 욕실의 차가운 타일벽에 부딪혔다. 갈비 뼈 아래에서 주먹 하나 크기만큼 내려온 옆구리와, 복무. 허벅지 바깥쪽에 보라색에 가까운 멍이 들어있었고 쓰러지면서 접질린 것인지 아니면 발목의 뼈를 밟혔는지 발목이 부어올라 있었다. 총체적으로 잘도 두들겨 놨네. 남자는 뜨거운 물을 양껏 틀어서 물에 흠뻑 옷을 적셔가며 그를 지탱했다. 일단은 차갑게 식은 몸을 덥히는게 중요했다. 보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몸은 마른 축에 속했다. 하얗게 질린 탓에 흰 몸이 더 희어보였다. 남자는 제대로 개어놓지 않은 빨래더미 가운데서 서둘러 큼지막한 바스 타올을 꺼내어 그의 몸의 물기를 닦았다. 그는 고열로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고,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옷을 벗겨져 샤워를 마치고 난 직후임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남자가 이끄는 대로 침실로 끌려갔다. 
 남자는 자신의 셔츠를 꺼내어 그에게 입히고 침대에 뉘였다. 베개를 목 뒤에 받치고, 목까지 푸근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칼 때문에 베개가 약간 젖었다. 머리는 손으로 털면 금방 마른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집에 드라이어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남자는 젖지 않은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문질렀다. 썩 괜찮을 만큼 물기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베개 위에 마른수건을 깔아주었다. 텅텅빈 주방의 찬장에서 겨우 오래된 감기약을 찾아낸 남자는, 그의 턱이 벌어지도록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그의 양 뺨을 힘주어 눌렀다. 입을 벌리라고 말해봐야 말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는 일단은 감기약을 억지로 그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그는 강제로 들어온 약물에 본능적으로 조금 컥컥거렸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수저로 물을 한 스푼 떠먹인 뒤에야 남자는 등을 곧게 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침대 밑의 공간에 넣어둔 구급상자를 꺼내어 남자는 알콜의 냄새를 맡는다. 그의 몸을 꽁꽁 뒤덮은 이불의 발치를 살짝 들어올려 부어오른 발목에 크림을 바르고 아프게 주무른 다음 붕대를 두바퀴 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발목을 치료한 다음에는 허벅다리와 상체였다. 멍이 든 부분마다 약을 발라주고 다시 이불을 덮었다. 잠결에도 아픈지 잔뜩 찡그린 얼굴에도 그렇게 해 주었다. 터진 입가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뒤에, 입 안쪽에는 면봉으로 약을 묻혀 터진 곳을 닦아내듯 조심스럽게 문질러 주었다. 길에서 다친 사람을 주은 것 치고는 상당히 호사스러운 친절이었다. 

 그가 의식을 차렸을 때는 작은 방 안으로 고소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남자의 집은 현관에서 두걸음만 걸으면 욕실이 있고, 그 앞으로 두 팔을 펼친 것 만한 주방과 아주 좁은 거실이, 그리고 거기에 작은 침실이 하나 딸려있는 구조였다. 그가 침대를 짚고 상체를 약간 세워 침대 헤드에 기댔을 때에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차 안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기억했지만 정확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낯선 남자의 등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걸으려고 했으나 그의 발목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이불을 약간 들추었을 때에서야 자신이 하의를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는 치킨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미국인의 감기 보양식이었다. 영혼을 위한 치킨수프처럼. 담백하고 따듯한 냄새가 났다. 냄새가 따듯하다는 것은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따듯한 냄새였다. 방 안의 창들은 모두 바깥보다 따듯한 방안의 온도 때문에 부옇게 흐려져 있었고, 제때 세탁은 했는지 의심스러운 회색 커튼이 축 쳐져 걸려있었다. 남자는 덩치 있는 어깨를 약간 들썩거리며 이따금 발로 바닥을 탁탁 쳤다.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에 맞추듯이. 그는 침대 맡에 놓인 나무 의자를 바라보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구닥다리 진부한 묘사에 그칠지도 모르겠으나, 남자는 색이 깊은 블론드에 보기 힘든 녹색 눈을 하고 있었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회색으로 변하는 짙은 색의 눈동자만큼은 그가 미국인이라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길가다가 열에 여섯은 마주칠 것 같은 건장한 체격이었고, 남자는 젖은 옷을 갈아입었는지 편안한 민무늬의 흰셔츠에 회색 저지를 입고 있었다. 팔과 손에는 자잘한 상처가 생겼다가 아문 자국들이 보였다. 손끝은 뭉툭했으나 게을러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남자에게서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치킨 수프와 물 한컵, 스푼을 올린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촌스러운 꽃무늬의 트레이. 남자는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가기라도 했던 것일까 생각되었을 만큼 트레이는 촌스러웠다. 갭에 가서 같은 사이즈의 같은 흰 티셔츠를 다섯장씩 살 것 같은 인상이었으나, 집안일에는 더더욱 무심해 보였다. 가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이상한 거 안넣었어요.” 

 수프와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는 그에게 남자는 웃음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웃으면 아이같은 얼굴이 되었다. 건장한 체격의 스물 후반대의 남자가 아이처럼 웃는 광경이 생소해서 그는 약간 미간을 지푸렸다. 여기까지 호의를 보이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남자가 자신을 부축했을 때 일단 자신은 주거지를 댈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든 상태가 아니었고, 옷이 젖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상처가 난 상태였던 점 같은 것들 때문에 남자는 그를 이 집으로 데려왔을 지도 몰랐다. 그 뒤는 아주 이상하지만 아주 간단했다. 성인 남자가 성인인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샤워 시켜 병을 간호하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의 관계였다는 것만이 이 이상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는 당장에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수저를 수프에 넣고 휘저은 뒤에 입 안에 머금었다. 썩 맛있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남자는 처음에 그를 지나칠 수도 있었고, 거기에 두고갈 수도, 근처의 응급실에 맡길 수도 있었다. 남자가 그를 해치려고 한다면 해칠 수 있는 여지는 이미 충분히 있었다. 그는 일단 당장에 취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가져온 치킨 수프를 반 정도 먹었다. 그가 수프를 마시는 동안 남자는 그의 열을 쟀다. 열은 위험한 수준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왜 도와줬어요.”

 그의 말투는 의문문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는 인사보다는 이유가 우선했다.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웃었다.

 “그 지역은 좀 위험하거든요. 출퇴근 길이라 잘 알죠. 게다가 당신 엄청나게 맞지 않았어요? 비에 젖어서 완전히 의식도 없었고요. 그런 사람을 모른 척 하고 지나가기엔 양심에 찔려서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다시 눕히고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덮었다. 그는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여기저기가 아픈 것 처럼 인상을 지푸렸고 남자는 촌스러운 트레이를 주방에 놓고 놀아와 의자에 앉았다.
 “다음부턴 그쪽에 그런 옷 입고 다니지 않는게 좋을걸요. 내 돈 훔쳐가라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안그랬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남자는 다시 한 번 그의 혀 아래에 온도계를 넣고 체온을 쟀다. 그가 체온계를 물고 있기 위해 입을 다문동안 남자는 뭐라고 떠들었다.

 “일단 응급처치는 했어요. 학부에서 간단한 의료학 비슷한 건 수료했거든요, 완전히 돌팔이는 아니니까 걱정마요. 그래도 일단 내상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까 검사는 받아 봐요. 쇄골은 부러진 것 같고 갈비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으니까.”
 “병원은 안돼요.”

 남자가 체온계를 혀 밑에서 빼내며 온도를 확인하는 동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 

 “돈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

 불법체류자에요? 아니면 수배중? 남자는 그를 향해서 짓궂게 말하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이제껏 몰랐으나 남자의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었다.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자 주근깨가 있는 뺨이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었다. 저런 표정으로 웃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 시킬 수 도 있겠다고 그는 안이하게도 잠깐 생각했다.

 “집에 돌봐줄 사람은 있어요? 쇄골은 캐스트도 안돼요.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어야 붙는 뼈에요.”

 그는 다시금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스탠드를 껐다. 방은 완전히 어두워 졌다. 남자의 아파트는 복도 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향해 나있었다. 오전동안 채광이 좋은 집은 아닌 것 같았으나 오후에 해가 지는 동안은 해가 들었고, 스탠드를 끄자 껌벅이는 가로등 불빛이 집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남자는 비가 왔으니 추울거라며 라디에이터를 켜면서 자신의 친절함에 대해 한 번 더 생색을 냈다. 착하긴 하지만 좀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세탁한지 오래된 것 같은 회색 커튼을 완전히 닫자 이제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발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렸다. 아마도 빛이 보이지 않아 벽을 짚으며 방을 걷고있어 발걸음 소리가 방의 모퉁이에서 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돼요. 잘자요.”


04.
 그는 천천히 길들여져 나갔다. 사나운 들고양이가 집고양이가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손을 뻗으면 안겨왔다. 뺨을 쓰다듬으면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린 고양이처럼 얌전히 숨을 죽였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은 그럴 때에 쓰는 말이다. 그때 알았다. 사랑스러워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는 농담조차도 당시의 나에게는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점차 나에게 길들여져 갔고, 나는 그의 이성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바라지 않았다. 들고양이 특유의 거만함은 충분히 사랑스러운 것이나 집고양이가 다시 들고양이가 되는 것을 바라는 주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사하면서 고양이를 버리고 가는 놈이면 모를까. 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감긴 눈커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말라갔다. 침대 위의 작은 공간만이 그의 세상이었다. 사랑해요. 귓가에 속삭이면 그는 아주 약하게 몸을 떨었다.


05.
 그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남자의 이름조차 모른 다는 것과,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너무 익숙하게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고 그 외에 별다른 호칭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이름이란 것은 관계의 기본이기 마련이었다. 그는 남자의 지나친 편안함이 신경 쓰였다. 관심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신경이 쓰인다고 말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남자는 아침식사로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치킨수프를 가져왔다. 남자는 그를 일으키고 그가 아침을 드는 동안 토스트 두 조각을 먹은 뒤에 검은색 터틀넥셔츠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위에 점퍼를 걸쳤다. 저렇게 입고 출근하는 직장이 있던가. 컴퓨터나 공학과 관련된 직업군의 사람일지도 몰랐다.

 “점심엔 다른 걸로 줄게요.” 

 남자는 옷을 갈아입고 어제처럼 침대 곁에 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약간 웃었다.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약간 이른 출근시간이기는 했지만 오전에 출근해서 점심시간에는 돌아올 수 있는 직업중에 그가 아는 것은 없었다.

 “두시나 세시정도면 와요. 좀 배고플 수도 있겠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아요. 티비 리모컨은 왼쪽 협탁에 있고, 책은 첫 번째 서랍 안에 있어요. 당신이 책을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더군다나 당신 취향이 아닐 수도 있고. 좀 자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갈거에요.”

 남자는 할 수 있는 한의 설명을 늘어놓은 뒤에 그의 무릎 위에 놓여있던 트레이를 정리했다. 협탁 위에서 차키를 집어 점퍼의 주머니에 넣고 손에 약간의 왁스를 짜 머리를 정돈했다. 분명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보기 힘든 녹색 눈동자에, 선한 눈매. 약간 색이 옅은 입술이 웃을 때면 얼굴 가득 크게 번졌다. 남자는 나가기 전에 그의 동태를 확인하듯 침대 발치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름이?”

 그가 물었다. 의외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웃던 표정 그대로 굳은 듯 했다. 당연한 절차였으나 남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고, 그가 속으로 셋을 세고 난 뒤에 대답했다.

 “에단. 에단 호크는 아니지만. 당신 좋을 대로 불러요.”

 에단 호크? 그는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입모양만으로 되물었다. 남자, 아니 에단은 다시 웃었다. 에단은 점퍼의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두 손을 집어넣고 차키를 짤그락 거렸다. 에단은 그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여전히 에단은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다녀올테니 쉬어요”

 에단이 방에서 나가고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잠기고,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 안에서도 열 수 있기는 했으나 그는 지금 침대 위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베개를 베고 편안히 누워 눈을 감았다. 남자의 방은 아침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 따듯한 느낌보다는 말 그대로 밝아져온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들을 들으며 그는 잠을 청했다. 


06.
 “플로베르 경사님. 어제 부탁하신 프로필 찾아놨어요. 경감님 책상 위에 있던데요?”
 “그래? 몰랐네. 저번에 경위님한테 보고 드렸던 것 같은데. 알았어 고마워요.”

 이든 플로베르 경사는 책상 위에서 서류철을 보면서 펜의 뒤축을 이로 물었다. 그것이 습관인 듯 그의 펜꽂이에 꼽힌 펜들은 모두 뒤축이 너덜너덜했다.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책상 위를 정리하고 제복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콧 경위님 자리에 계셔?”
 “그럴걸요. 미팅 갔다가 아홉시에는 온다고 하셨어요.”
 “오셨겠군.”

 뉴욕 경찰의 제복은 남색이었다. 약간 촌스러웠지만 정갈한 맛은 있었고, 배불뚝이 아저씨만 아니라면 다들 얼추 위엄은 갖춘 모양새가 되었다. 이든은 쓰고있던 캡을 잠시 벗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돈한 뒤에 다시 캡을 썼다. 녹색 눈매가 잠시 번뜩이는가 싶더니 여자의 어깨를 두 번 손으로 두드리며 고맙다고 말했다. 스콧 경위님. 

 “뭔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든은 그의 책상 위에 들고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수사 하고 있던 그 조직 말인데요.”


※든윈 패러랠. 콘실리에리 루윈과 복흑얀 이드니가 나옵니다. 허술함 주의.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Bloomsbury 05  (0) 2011.10.04
Bloomsbury 03  (0) 2011.09.13
Bloomsbury 01  (0) 2011.09.13
by merone

Bloomsbury 05


 푸르스름한 빛깔에 젖어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슬퍼졌다. 아침이 다가오면 그는 다시 집으로 간다. 여기가 아니라. 집으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 올릴 때 마다 그의 희고 마른 등이 굽었다. 비스듬히 창을 등지고 선 몸의 반이 푸르스름하게 젖는다. 등을 둥글게 말 때면 간밤에 수 없이 손가락 끝으로 헤아렸던 그의 척추가, 물고기의 뼈처럼 도드라져 나오는 둥근 뼈 들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온다. 루윈.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금방 울음을 터트리려는 아이처럼 눈가가 쓰려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자신과 그의 옷가지들 가운데서 자신의 것만을 추려 차례로 갖추어 나갔다. 하얗게 빛을 받던 몸이 그가 어제 입고 있었던 갈색 수트로 덮여 나간다. 조용히 몸 위에 덮여있던 시트를 걷었다. 셔츠에 손을 꿰어 넣고 앞을 여미고 있던 그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는다. 루윈. 손이 멈췄다. 아주 잠시 동안. 루윈. 보채는 아이처럼 수차례 이름을 부르는 동안 그는 가장 아래 단추부터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는 다시 손을 들어 천천히 다음 단추를 여몄다. 목 안쪽에거 뜨끈하게 올라오려던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눈시울이 따가웠다. 그의 뒷모습은 늘 서러웠다. 그는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갔다. 햇살처럼 웃는 밀리 이바노브가 기다리는 집으로. 그의 셔츠는 늘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갈 만큼 공간이 남았다. 단정하게 잘린 갈색 머리 아래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목덜미 위에 입을 맞췄다. 셔츠가 느슨하게 감추는 목덜미 뒤에. 그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단추를 채워나갔다. 그의 손을 여러번, 수 차례 아래로 끌어내렸지만 그는 다시 단추를 여몄다.

 "아침 먹고 가요"
 "루윈"

 그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셔츠의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두른다. 가슴에 맞닿아있는 등의 온도가 식은 것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어진다. 그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맨다. 학창 시절의 그가 늘 단정하게 떨어지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맨 넥타이의 매듭은 한눈에 보기에도 익숙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많은 남자들의 목에 매여 있는 것뿐이었을 테지만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창백한 손이 매듭 사이에서 검지를 구부려 천을 잡아당기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상상했다. 햇살은 아직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방 안에 비스듬히 번진 빛들 속에서 먼지들이 별처럼 느리게 빛났다. 그의 머리칼 끝에서 빛나는 것들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머리칼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위에는 목덜미에, 그리고 뒷목에. 입술을 맞춘 자리를 그가 하얀 손끝으로 더듬는다. 어디에 입 맞추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이. 그 광경이 슬퍼서 또 잠시 웃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입술 자욱이 밀리가 발견 할만한 곳에 있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있다 가요. 부인은 모르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조용히 약간만 고개를 틀어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밤새 바닥 위에서 구겨진 옷들은 주름이 져 있었다. 이든은 그가 부인에게 변명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과연 변명할 만한 일이 있을까. 그녀는 그의 옷 위에 흩어진 구겨진 자국들에 대해 몇 번이나 보아오면서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밤새 그가 서재의 의자나, 소파에 앉아 등걸에 몸을 기대고 책을 펼쳐 읽으며 자신과 내내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오래 앉아있는 사람의 등은 저렇게 구겨지지 않는다. 당신은 집으로 가네요. 집에 가면 부인도, 딸도 있겠죠. 목소리는 꽉 잠겨있었다. 밤새 춥지도 않았는데, 그의 옅은 체온을 내내 끌어안고 있었는데도 목소리는 금방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처럼 꽉 잠겨있었다. 목이 아팠다. 
 집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 마다 눈시울이 따가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눈커풀을 닫았다. 눈물이 고인채로 눈을 감으면 눈 안쪽의 검은 막이 뜨끈하게 아파온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었나. 그의 목덜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책에서 묻어나오는 활자들의 냄새, 오래된 고서적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곰팡이 냄새, 손끝에 묻었을 잉크 냄새 같은 것, 그의 아내가 늘 깨끗하게 빨아서 정갈하게 다려 놓은 셔츠에서 나는 가루 세제의 냄새 같은 것, 그의 사무실에서 늘 흘러나오던 차가운 공기의 냄새, 그의 아내의 향수 냄새. 이든은 울고 싶었다. 처음에는 우연히 울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이따금 울고 싶었으나, 이제는 줄곧 그를 보면 울고 싶어져 왔다. 그가 제게 등을 돌릴 때 마다,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한 침대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때 마다, 등을 돌린 채 푸르스름한 빛에 젖어있을 때 마다, 그의 목덜미에서 아내의 향수 냄새가, 셔츠에서 나는 가루 세제의 내음이 날 때 마다. 
 당신 목덜미에서, 내 냄새가 났으면 좋겠어요. 
 이를 세워 목덜미를 깨물었다. 약간의 붉은 자욱들은 그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질 것이었다. 이든이 속삭이는 말은, 말보다 공기처럼 천천히 흩어졌다. 여전히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빛줄기 가운데서 먼지들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늘 돌아가야 했다. 제게서, 그가 원래 속해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루윈 이바노브. 집으로 돌아가는. 돌아가는. 자신은 늘 그가 잠깐 머무르는 곳에 불과했다. 잠시. 클럽의 응접실에서, 부인 몰래 입 맞추고는 했던 그의 서재에서, 심지어는 자신의 집에서 조차. 그는 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자신과 머물고 난 뒤에도 그에게는 가야할 곳이 있었다.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갖추어져 있는, 그가 늘 쓰는 펜이 잉크 곁에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의 수트들이 나란히 어깨를 맞추어 걸려있는 옷장이 있는 집으로. 그의 집에는 그를 닮은 딸이 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그보다는 밀리를 닮은 듯 했지만 또래와 비교해서 조금 더 흰 얼굴, 총명하게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나 양갈래로 땋아내린 얇은 갈색 머리칼 같은 것은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든은 어린 루윈을 알고 있었다. 지금과 비슷한 성격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열아홉, 열여덟의 그를.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약간 뻗친 앞머리를 손으로 열심히 빗어 내리며 그의 어린 시절의 얼굴을 닮은 아이가 달려 나와 그를 끌어안을 것이었다. 
 그는 베스트를 갖추어 입고 손에 재킷을 들었다. 이든은 가만히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재킷을 집어든 그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움직이지 않는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품안에 있던 온기가 느리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손끝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따듯하게 덥혀진 가슴께를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재킷에 팔을 밀어 넣었다. 앞을 여미고 재킷을 두어번 손으로 쓸어 내리자 툭,툭 소리가 났다. 루윈이 겨우 이든을 돌아보았을 때, 이든은 침대의 모서리에 앉아있었다. 애처로운 얼굴로 그의 흰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금 전에 말했던 것 같은 목소리로 더는 보채지 않았다.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 같았다. 그가 의자 위에 놓여있던 페도라를 집어 들어 갈색 머리칼 위에 눌러 썼을 때 이든은 천천히 침대 모서리에서 일어났다. 벗은 발이 시려왔다. 이든은 셔츠를 입고, 대충 바지를 꿰어 입은 채로 그의 뒤를 쫓았다. 문 앞까지 배웅할게요. 울음을 참은 탓일까 머리가 아파왔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가 떼면서 침실을 지나 집 안을 걷는다. 집에는 거주하고 있는 메이드도, 일꾼도 없었다.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어머니의 말에 이든은 한사코 사양했다. 집은 늘 비어있었고 이든은 그 적막 가운데서 바다를 건너온 책들을 선별하고, 골라 번역했고, 이따금 몇 가지의 칼럼과 기사들을 써냈다. 외로웠다. 아주 자주. 또는 그러한 빈도로. 일주일에 두어번 일하는 여자가 들어와 밀린 집안일과 청소를 해내고 약간의 스프와 요리를 했다. 그러고 나면 그는 하루종일 언제 다시 루윈 이바노브가 올지 모르는 집 안에 앉아 홀로 시간을 보냈다. 거실은 조금 더 빛이 들어 밝았다. 이든은 루윈의 등 뒤로 길게 지는 그의 그림자의 끄트머리를 밟으며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집을 가로질렀다. 문을 열었을 때 아침의 공기, 아직 이슬이 가시지 않은 공기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공기는 일요일 아침이면 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공기는 밤 새 고요 속에서 스스로 정화된 것처럼 맑았고, 두어번의 기침을 할 정도로 쌀쌀했으며 온 몸이 젖을 내릴 것처럼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이든은 그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문고리를 잡고 잠시 멈칫거렸다. 집 안에서 밖으로, 아주 약간 단이 있는 계단으로 발을 디디는 루윈의 뒷모습을 보며 이든은 그의 옷자락을 잡을까 잠시 고민했으나 우는 것이 소용 없다는 것을 안 아이처럼 이든은 조용히 그가 모르는 행동을 그만 두었다. 
 "플로베르"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든은 문가에 기대어 서서 그의 갈색 눈동자를,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페도라를 벗어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는 광경을 가린다. 여름이면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날 정돈되지 않은 정원에서 누가 훔쳐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덩굴들은 높게 자라 담을 덮었고, 담 밖에서는 정돈되지 않은 넝쿨에 가려 집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든은 그 정돈되지 않은, 멋대로 자라는 정원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편안했다. 그의 정원은 영국식 정원에 보다 근접해 있었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산책로 만큼이나 편안했다. 가을이면 담의 안팎으로 심어진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작은 정원을 메웠다. 그의 입술에서는 간밤에 입맞춘 자신의 입술의 맛이 났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곧장 밀리의 인사로 덮일 입술 위에서 만져지는 자신의 흔적을 더듬으며 이든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 그가 잊은 손수건를 쥐어주었다. 그는 정말로 돌아섰다. 천천히 돌아보지 않고 걷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의 등은 늘 올곧게 서있었고 그래서 이든은 그의 등이 굽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곧게 선 등은 돌아가는 등이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정원을 채 다 걸어 정원 끝의 쇠로 된 빗장을 열고 귀를 가득 메우는 쇳소리와 함께 거리로 사라졌다. 이든은 문간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가 입 맞춘 흔적들이 고스란히 온기가 되어 입술 위에 남아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그 키스를 기다린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마셨다. 폐의 안쪽까지 차갑게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핑 돌아나갔다.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지 오래였는데도 이든은 여전히 그 푸르스름한 공기가 가득 찬 아침이 슬펐다. 

 이든은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돌아간 하루를 이든은 느리게 보냈다. 바다를 건너 어렵게 도착한 독일 서적들을 손으로 몇 번씩 쓸어 넘기고, 고르고, 첫문단과 두 번째 문단을 번역하기를 하루 종일 계속했다. 재떨이 가득 담배 꽁초가 쌓였고, 손에는 만년필의 잉크가 묻었다. 이든은 흐르는 따듯한 물에 손에 묻은 푸른 잉크를 문질러 닦아 내며 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오래도록 전화가 울리는 동안 그는 소파 위에 앉아 그것을 지켜봤다. 루윈 이바노브. 그의 전화는 손끝부터 떨려왔다. 마치 그가 전화한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든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등을 곧게 세운 채 예절 교본 속에 나오는 그림 같은 자세로 문을 나서는 루윈의 뒷모습을 생각했다. 그의 머리칼에 어울리는 갈색 수트, 약간의 스트라이프와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페도라. 이든은 그 전화가 울리는 것을 멈출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전화가 울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로 재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유흥가는 저급한 소리로 가득했다. 이든은 그 소란스러운 길거리에 서서 루윈 이바노브를 생각했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보이는 것과는 정 반대인 남자. 등불은 약간의 누런 빛을 띄고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깔깔거리며 우아하지 못하게 웃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정뱅이들이 여자들과 음탕한 농담을 나눴다. 멋 모르는 젊은 남자애들은 그 거리에 몸담는 것이 자신의 미래에 어떤 의미가 되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로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건물들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조용했다. 거리에서 들리는 모든 소음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의 아내도 거리의 여자들처럼 음탕하고 거칠게 웃지 않았다. 밀리. 밀리 이바노브. 그녀의 성이 이바노브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이든은 헛구역질 했다. 그녀의 엷은 색 머리칼이 조금 더 짙었다면, 적어도 상류층의 여자답지 않은 호탕함이 우아하면서도 보기 좋은, 기분 좋은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어깨가 조금 덜 무거웠을 지도 모른다. 사려 깊으면서도 활발하고, 아이를 사랑하면서 남편을 보살피는, 남편의 오랜 친구에게 까지도 조건 없이 상냥한 그녀의 성격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든은 조금 더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신사분, 들렀다 가시지 그래요? 여자의 목소리는 약간의 유혹과 약간의 조롱으로 움틀 거렸다. 얇고 고우면서 날카로운 음색은 말을 할 때 마다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게 일그러졌다. 이든은 깔끔한 영국식 억양으로 말하는 남자를 떠올렸다. 겨우 그의 전화에서 도망친 주제에 다시 그의 생각을 하며 누런 불빛이 빛나는 거리를 걸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저급한 홍등가의 끝자락에 다가섰을 때, 이든은 가난하고 허름한 사람들이 모인 펍 안으로 기어들듯 들어갔다. 뭐야 저새끼는. 희미한 웅성거림 가운데서 이든은 느리게 웃었다. 느리게 웃음이 얼굴 위로 번져 나갔다. 이든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싸구려 맥주에 싸구려 닭요리를 시키고 앉아 술집 주인과,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몇몇의 배불뚝이 사내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었다. 부녀자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우스운 낭만 문학의 이야기들, 발을 절룩거리며 저급한 거리를 빌빌거리고 돌아다니는 개의 이야기, 어느 광산의 파업 이야기며 지식인에 대한 우스운 조롱들. 이든은 가만히 앉아 싸구려 맥주를 들이키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와 있을 때에는 한 번도 그렇게 웃지 못했던, 그런 웃음소리로. 그날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싸구려 술집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공원과, 거리와, 도서관 사이를 느리게 산책하고 아주 늦은 밤에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전화가 울렸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루윈은 다시 전화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살롱은 몇몇의 사람들도 붐볐다. 붐빈다고 표현하기에는 사람의 수가 적절치 않은 감도 있었으나 그들은 마치 오랜만에 본 사람들처럼 만나서는 곧장 간단한 안부와 함께 이야기를 꺼냈다. 이든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학파의 이야기, 어느 논문의 이야기, 새로 대두된 의학적 사실들, 외교적 위치가 정치에 주는 영향들. 배불뚝이 사내들이 펍에서 떠들어대던 소리와 흡사한 주제들이었다. 다만 그 내용이 달랐을 뿐이다. 이든은 살롱 안을 천천히 둘러 보다가 흰 얼굴의, 갈색 머리칼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를 발견하는 것은 늘 손쉬웠다. 그는 이든이 그를 살롱에서 처음 만났던 날처럼 벽에 기대어 빛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 위로 쏟아지는 빛 속에서 먼지들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두어명의 사람에 둘러싸여 새로 편집하고 있는 책의 이야기를 꺼내었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이 마주쳤다. 세 번, 네 번. 이든은 그와 눈이 마주친 횟수를 세다가 다섯 번, 그가 몸을 돌려 살롱을 벗어나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손가락이 벽지를 훑었다. 볕이 좋았다. 열린 창문마다 볕이 들어 살롱과 복도 안은 모두 희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든은 몇 일간 보지 못했던,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줄 곧 눈 앞에서 아른 거리던 남자의 등을 보며,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이든은 습관적으로 아주 기민하게 문을 잠갔다. 그의 등은 희게 빛을 받아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지난 몇 일간 떠올릴 때 마다 슬펐던 등이 가만히 미동하지 않고 방 가운데에 멈추어 서 있었다. 
 
  "딸이 보고 싶어 해"
 
 이든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없어도 괜찮았어요?"
 
 목이 매여 말이 흐리게 번졌다. 말꼬리가 느리게, 숨이 모자란 사람처럼 흐리게 번졌다. 이든은 그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려다가 돌아서는 그를 보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맨 넥타이의 매듭을 이든은 늘 잘 구분했다. 간결하게, 그다운 단정함으로 정갈하게 매인 매듭에 시선이 머무르던 찰나 따듯한 입술로 입술이 덮였다. 이든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손바닥으로 그의 갈색 수트 위를 보듬었다. 이든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키스를 기다린 사람처럼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온전히 감각을 맡겼다. 볕이 따스했는데도 여전히 조금 슬펐다.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The Nights of NewYork 01  (0) 2011.10.17
Bloomsbury 03  (0) 2011.09.13
Bloomsbury 01  (0) 2011.09.13
by merone

Bloomsbury 03


 알아. 기억해. 기억하고 있어. 이든 플로베르는 눈을 감았다. 입술사이로 흘러나오는 가쁜 숨소리에 이든은 귀기울였다. 루윈의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창 밖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반쯤 그림자에 잠겨있던 얼굴이 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그는 영국인보다도 창백했다. 그의 성처럼 아마 그는 순수한 영국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루윈의 내리감은 눈커플 아래로 길게 늘어진 갈색 속눈썹이 호흡할 때마다 가늘게 떨렸다. 방안을 떠돌던 먼지들이 빛에 비추어 반짝거리며 빛났고 그의 속눈썹 위로 가만히 먼지들이 반짝거리며 내려앉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루윈은 불편한 자세로 매달려있었다. 그는 발끝으로 발돋움해 바닥을 겨우 밀어내다가 이따금 이든의 구두코를 밟았다. 혀는 뜨거웠고 초록색 크리스마스 푸딩처럼 부드러웠다. 이든은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라틴어의 R과 L을 발음할 때 마다 연구개를 쓸어내리고 떨어지던 혀를 생각했다. 이든은 묵직한 청춘의 무게처럼 자신에게 매달린 루윈을 끌어안은 채로 소파에 뉘였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가 볼성사납게 화끈거렸고 이든은 여전히 목마른 사람처럼 그의 입술에서 입을 떼지 못했다. 다급하게 벌벌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풀어내렸다. 단추를 하나 풀 때마다 성질이 나빠질 것 같았다. 소파의 팔걸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로 고개를 젖히고 헐떡거리고 있는 루윈은 그의 머릿속에 십여년 째 잠들어있었던 그림 같았다. 그는 이든이 잊지 않고 입을 맞추는 동안 자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입술이 열릴 때 마다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이든은 그가 방금 피우고있었던 담배를 알아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급하게 끌러낸 베스트와 셔츠 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 위에 자국을 찍어내면서 그를 감싸던 옷가지를 헤쳐냈다. 말 그대로 헤쳐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선배. 속살거리는 소리에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루윈. 루윈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머리위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루윈”

 난 당신을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어요. 십년 전부터. 목 끝으로 차오르는 말은 입 밖에 내뱉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루윈. 애걸하는 목소리로 부르자 짙은 눈이 마주친다. 불편한 자세 탓에 고개를 가누기 힘든 것처럼 꼿꼿이 목을 들고 있었다. 루윈.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허락했다는 것을 이든은 알았다. 루윈. 하얗고 마른 배 위에서 더 밑으로 입을 맞추며 내려가는 동안 이든은 계속 루윈,하고 이름을 불렀다. 입을 맞출 때 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잘게 끊겼다. 살결에 부딪힌 이름들이 부스스 떨어져 내려 가루가 되어 빛을 받는 것 같았다. 이든의 한쪽 무릎은 소파 아래에 닿아있었다. 그는 루윈의 손목과 허리를 붙잡은 채로 경배하는 사람처럼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채 다 벗겨지지 못한 옷가지들이 이든의 얼굴과 팔을 스쳤다. 루윈은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내주었고, 이든은 그것도 금세 알아차렸다. 몸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는 이든을 밀쳐내지 않았다. 꿇고있던 무릎을 세워 일어서 둘이 몸을 뉘이기 벅찬 소파에 그의 몸 위로 올라타자 루윈이 손을 뻗었다. 셔츠 위로 등을 끌어안는 손길에 숨을 들이켰다가 그의 머리 위로 내뱉었다. 여전히 루윈의 머리맡은 창가에서 비쳐든 빛으로 반짝거렸다. 허벅지로 그의 다리사이를 문지르다가 귓가에 입을 맞췄다. 아프면 얘기해요. 듣고있어요. 이든은 거기까지 얘기하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웃었다. 멈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뒷 이야기는 칼칼한 갈증과 함께 삼켰다. 목 안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말라왔다. 햇빛에 달궈진 등이 따가웠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 아파서였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여유가 없었다. 이든이 자신의 것을 밀어 넣을 때 마다 루윈은 인상을 지푸렸고, 곧 얼굴은 놀라울 만큼 고통스럽게 변했다. 그의 미간이 지푸려질 때 마다 이든은 거기에 키스했다. 등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셔츠 아래의 등을 긁었다. 그는 여전히 참을 성 있는 고상한 루윈 이바노브인 것처럼 단지 목 안에서 울리는 소리만을 냈다. 이든이 입을 맞추자 그는 가까스로 입술을 열었다. 혀를 얽는 동안도 그는 끔찍하게 아픈 사람처럼 겨우 입술을 연채로 목 뒤에서 소리를 냈고 이든은 겨우 대화대신 그를 달랠 수 있는 것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루윈의 입 안을 느리게 헤집었다. 이든이 그의 안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때 마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루윈의 숨이 흘러나왔다. 등을 끌어안은 손이 절박해져있어서 이든은 그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댄채 어깨에 입을 맞췄다. 가까스로 셔츠에 가려 보이지 않을 곳에 자국이 남았다.

 이든 플로베르는 소파 위에 가쁜 숨을 내쉬며 늘어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바닥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옷가지들과 진득한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이든은 루윈의 어깨 위에 남은 자국을 몹시 신중하게 바라보다가 앞단추만 풀어진 채로 아직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던 셔츠를 여며주었다. 창백하리라고 생각할만치 하얀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져있었다. 땀으로 젖은 갈색 머리칼은 손가락이 빗는 그대로 가지런히 넘어갔다. 루윈. 이름을 부르자 루윈이 뺨 위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춰주었다. 아주 조금 젖어있는 살갗에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방 안은 반짝 거렸다. 벽지는 아주 예쁜 크림색이었고 루윈의 살갗보다는 좀 더 진했다. 잘 수놓은 패브릭으로 만든 긴 소파 위에 몸을 늘이고 앉아있는 루윈을 바라보며 십년 전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손을 떨던 자신을 떠올렸다.
 루윈 이바노브. 선생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고, 모든 아이들이 대답할 때에도 루윈의 시선은 대답으로 들릴 만큼 충분하게 느껴졌다. 이든은 루윈이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때도 여전히 꽉 막힌 정장의 생김새를 한 교복 안에 갇혀있었다. 루윈 이바노브가 교정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이든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기숙사 창가에 기대어 서있었다. 하얀 김으로 흐려진 창문을 손으로 닦고 나자 손이 시려왔다. 명확히 들리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이든은 몸을 피했다. 그가 돌아보는 모습을 창 모서리에서 훔쳐보며 이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십대가 통째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든은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었고 공부를 잘했지만 루윈 이바노브와 마주칠 때 마다, 그와 관련 있는 것을 접할 때 마다 조금씩 엉망이 되어갔다.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 없었지만 가슴이 뛰었고 입술이 말랐다. 루윈 이바노브는 이따금 거기에 이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표정으로 무언가가 신경쓰이기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스쿨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고, 가장 냉담하고 사교성 없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든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이 그의 눈에는 정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든에게는 그랬다. 그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튀어나와있었고,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색을 입었다. 아주 흔한 갈색 머리와 흔한 갈색 눈동자에 색이 입혀졌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색들이 가지런히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든은 창백한 그의 뺨을 바라보다가 펜을 집어 들고 있는 그의 손과, 펜촉과, 노트에 관심을 기울였다.

 “루윈”

 나 기억해요? 그에게 물었을 때처럼 루윈을 바라보았을때 루윈은 조용히 눈을 감고있었다. 지친 몸을 그대로 쉬게 두려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고 고요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감정이 물밀듯 밀어닥쳤다. 오랫동안 물이 말라있던 해변에 겨우 썰물이 들이닥친 것만 같았다. 목이 칼칼했고 가슴께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이든은 그의 곁에 앉아 가만히 손끝에 입을 맞췄다. 십년 전에도 똑같이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던 손 끝 위에. 하얀 손톱이 돋아난 손끝 위에. 그의 손끝이 이든의 입술에 묻어있던 타액으로 약간 번들거렸다. 손끝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The Nights of NewYork 01  (0) 2011.10.17
Bloomsbury 05  (0) 2011.10.04
Bloomsbury 01  (0) 2011.09.13
by merone

Bloomsbury 01


 하얀 컨트리 풍의 가구. 하얀 목재들과 하얀 목재 위에 갈색 나무판을 하나 덧댄 듯한 테이블. 격자에 짜 맞춘 듯 벽을 나누고 있는 흰 목재 틀 안은 큼지막한 꽃이 수놓인 패브릭으로 마감되어있었다. 재떨이 하나와 꽃병 하나. 테이블 위는 간소했고 사람들은 제각기 소파 위에 앉아 웅성거렸다. 파이프와 담배가 뒤섞여 자욱한 연기를 만들 때 마다 창백한 빛이 집 안을 비췄다. 밖이 비쳐보이는 흰 커튼이 이따금씩 바람에 날렸고, 그 때 마다 흰 가구가 빛을 반사시켜 온통 집 안이 부옇게 변했다. 눈 앞의 있는 사람의 얼굴 조차도 흰 빛줄기와 부연 담배연기로 아주 멀리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가벼우면서 무거웠고 무거운 듯 가벼웠다. 이든은 옅은 분홍빛의 패브릭으로 마감된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는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한 번 씩 들어본 적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서로 교류가 있었을 법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영국에서 두군데로 일축되는 컬리지를 나왔으며, 그 후로도 대개는 동창회를 통해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들은 언성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교양 없는 일인지 알고있다는 것처럼 여유롭게 굴었다.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처럼, 또는 멀리서 물길이 흘러나가는 소리처럼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가끔씩 이든 플로베르를 그 장소에 데리고 온 남자가 벽에 기대어 미동하지 않는 이든에게 눈길을 주었으나 그는 약간 입술을 올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든 플로베르는 들어온 직후부터 줄곧 한 곳에 눈이 못박혀 있었다. 갈색의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남자는 아주 약간 늦게 들어와 창가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자리를 잡은 뒤로 이든과 마찬가지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클럽의 토론 주제가 제창되는 사이 눈을 내리깔고 흘려듣는 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빨다가 이내 사람들이 다가오자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창을 등지고 있는 탓에 그가 있는 곳만 그늘이 져있었고 그의 창백한 뺨은 빛만큼이나 창백해 보였다. 하얀 가구들에 반사된 빛이 얼굴에 닿았을 때에야 간혹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일렁거렸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고, 두어명의 사람들이 번갈아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사람이 적든 많든 간의 사람들의 중심에 서있었고 움직이지 않은 채 고요히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서서 그들의 말을 듣다가 짧은 말을 내뱉었고 그럴 때 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롤 손가락 끝으로 옮겼다. 루윈 이바노브. 이든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있었다. 써보라고 하면 토시 하나 틀리지 않은 채로 말끔하게 누런 종이 위에 그의 이름을 적을 수도 있었다. 그는 한때 스쿨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였고, 가장 냉담하고 가장 사교성이 없는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이든 플로베르의 십대를 통째로 날려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루윈 이바노브. 루윈의 페도라가 머리 위에서 약간 흘러내렸을 때 이든은 순식간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을 뻔 했다. 루윈과 이든은 서로 다른 벽에 등을 맞붙이고 있었지만 이든은 그가 흘러내린 페도라를 손으로 벗어 창틀 위에 올려둘 때 까지도 그의 흰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바노브가 펜을 잡으면 이든의 눈에는 그의 내리깐 눈과 흰 손등만이 보였다. 그는 이따금 펜을 들어 펜을 잉크에 적셨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필체로 노트 위에 과제를 적어나갔다. 그의 손으로 쓰여지는 수식은 수식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워서 이든은 그의 수학 노트를 한권 훔칠 수 있었다면 무슨 댓가를 치르고라도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다만 루윈 이바노브는 자신의 자리를 비우는 법 없었고 아주 세심했기 때문에 이든이 노트를 훔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관심있나"

 남자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그는 여전히 이 응접실 안에 어울리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이든에게 말을 걸었고, 두텁지 않으나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힌 손으로 이든의 어깨를 가볍게 짓눌렀다. 이든은 그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어깨가 들썩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도 매우 적절한 단어였다. 

  "루윈 이바노브. 괜찮은 친구지"

 이든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을 들으며 루윈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두었고 이든과 눈이 마주졌다. 빛에 일렁거리던 눈이 다시 잠시 그늘에 가려 깊어졌다. 그의 잘 빗어 넘긴 머리칼 아래로 이마와, 콧잔등과 입술 위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출판업계에 있는 친구인데 소개시켜주지. 따라와, 어쩌면 자네같은 인재를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 1920년대 영국 브룸즈베리 클럽 배경의 패러렐. 종종 업데이트. 

'PROJECT-D > parall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Bath  (0) 2012.01.28
The Nights of NewYork 01  (0) 2011.10.17
Bloomsbury 05  (0) 2011.10.04
Bloomsbury 03  (0) 2011.09.13
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