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de nuit
하이디
크림치즈를 사던 하이디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희멀건 전등 아래에서 팩에 싸인 육류와 유제품이 늘어서 있었다. 마트 안에는 아이들이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 느긋한 주부들과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들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카트를 끌고 다녔다. 그녀는 레몬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레모네이드를 만들기에는 추운 계절이었다. 그녀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감자와 계란과 당근을 샀다. 스낵 코너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골라 담고 카운터 앞에서 캔디 바 두 개를 더 올려놓았다. 아이들이 더 이상 그것들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하이디는 그렇게 했다. 아이들이 더 이상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그들의 어머니였다.
잭
알리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글로리아
알리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알리사는 그녀의 상담사의 방법과 효과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찌됐든 일주일에 한번 씩 밀워키 시내에 있는 상담소를 찾았다. 그 애는 상담실에 다녀온 뒤에는 내 집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심각한 얼굴로 한참동안 골몰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잭은 그 애를 완전히 감싸주기엔 역부족한 애였다. 잭은 빠지지 않고 회사에 다니고 돈을 벌어서 지금의 집을 샀지만 그것 뿐이었다. 잭이 아무리 그 애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표현할 줄 모르는 멀대같은 남자를 완전히 사랑해 줄 수 없었다. 그 애는 자꾸만 외로워했고 자꾸만 힘들어 했다. 그 애의 아이는 그 애 때문에 거의 혼자 자라다시피 했다. 나단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 집보다 우리 집에 더 오래 머물렀다. 마이크는 아버지보다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단은 내 무릎 위에 앉아 동화책을 읽었고 마이크와 함께 정원을 손질했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뭇잎의 개수를 헤아리는 일곱 살의 남자애를 보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일곱 살은 아무리 뛰어놀아도 부족한 나이인데. 마이크는 혀를 차고 나다니엘을 옆구리에 들고 정원을 나섰다. 알리사는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말없이 정원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그릇에 수프를 한 국자 더 떠 주었다.
알리사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밀워키 시내에 있는 상담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이야기 한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의사는 30대 중반의 남자로, 겉보기만으로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섰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혼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결혼반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세션이 시작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추측은 상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당부했다.) 옷차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 정갈하게만 입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중간에서 그 아래쯤의 낮은 목소리였다. 잭에 비하면 낮은 목소리였다.
상담사와의 첫 번째 치료는 대강 이런 느낌이었다.
‘우선 이 치료를 시작하면 어떻게 될거라고 생각하세요?’ ‘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뭔데요?’ ‘잠에 쉽게 잠이 들 수 없고, 심장이 뛰어요. 하루 종일 기운이 없어요. 귀에서 가끔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치료가 끝나면 그런 것들이 모두 해결 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그래요.’ ‘하지만 상담은 그렇게 마법처럼 당신의 증세를 호전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상담사들은 마법사가 아니에요. 당신의 문제를 알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겠지만 당신도 함께 노력해야하는 일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뭔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을 거에요. 모든 건 같이 정하고 당신이 노력해야 할겁니다.’
상담사와의 첫 번째 상담은 나를 훨씬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상담사와의 다섯 번째 치료는 대강 이랬다.
‘그럼 이제 당신이 이전에 말했던 이상한 소리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보도록 하죠. 당신이 처음 와서 말했던 이상한 소리에 대해서 기억하나요?’ ‘네 기억해요’ ‘그 소리가 혹시 당신의 수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나요?’ ‘음...아뇨...아니 그런 것 같아요.’ ‘얼마나 지속되죠?’ ‘잘 모르겠어요. 아마...십분에서 삼십분 정도요.’ ‘어떤 소리인지 설명해 볼 수 있겠어요?’ ‘웅웅거리는 소리에요.’ ‘어떤 소리와 비슷한지 천천히 생각해서 설명해 보겠습니까?’ ‘....음......비행기....비행기 소리 같기도 해요.’ ‘비행기 소리를 언제 들었나요?’ ‘아..아들의 졸업식에서요.’ ‘아들이 비행기와 관련된 일을 하나요?’ ‘네. 파일럿이에요 아니, 공군이에요’ ‘그러면 잠시 아드님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든지 좋아요 생각나는 것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그 애는 말을 잘 들었어요. 아니 내가 혼낼 일이 별로 없었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걸 잘 하는 애였어요.’ ‘그 때 당신은 어땠나요?’ ‘나는 잭과의 관계에 지쳐있었어요. 그 애가 어릴 때..서너살 때 부터요. 잭은 너무 따분한 사람이에요.’
마이크
“글로리아. 시청에서 편지가 왔어.”
“어머 그게 뭔데요.” 글로리아는 돋보기 안경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눈이 안좋아진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뜨개질을 하고 쿠키를 구웠다.
“정원 앞에 길을 낸다고 나무를 잘라야할 것 같다는데.” 손에 들린 편지를 글로리아가 낚아 챘다. 이십년도 전에 나무를 심자고 한 것은 나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잭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알리사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글로리아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 앉아서 울었다. 글로리아는 알리사를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위스콘신의 칼리지에 보내줄만한 돈을 글로리아는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다. 그녀의 바람은 그 시대 여자들이 딸에게 바라는 작은 기대 같은 것이었다. 글로리아는 몇 일 동안 일어나자마자 우울해 하고 하루 종일 울었다. 하루 종일 울어도 화가 가시지 않을 정도로 글로리아와 내가 모두 젊고 기운 찼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단은 잭을 닮았지만 눈은 알리사를 닮아 있었다. 손자가 태어나고도 오랫동안 잭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못하는 글로리아에게 나는 나무를 심자고 말했다. 글로리아는 듣는 둥 마는 둥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뒤가 넓은 지프차를 끌고 시내의 화원에 들러 이름도 모르는 튼튼하고 어린 묘목을 하나 골랐다. 물이 없어도 오래 버티고 땅에 양분이 적어도 튼튼하게 자라는 나무였다. 나무는 화훼용으로는 크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주인은 예의상의 적은 돈만을 받고 덤으로 영양제를 얹어 주었다. 그리고 손자는 나무 같은 아이처럼 자랐다. 나는 그 애가 그렇게 자라는 것을 볼 때 마다 그 애가 알리사와 잭 둘 모두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손자는 적은 것들에 만족하는 애였다. 글로리아가 굽는 쿠키를 집어먹고 글로리아가 뜬 스웨터를 군 말 없이 입고 나타날 줄 알았다. 그 나이 또래의 뼈대만 자란 남자애들과 다른 손자의 성격에 이따금 소름 돋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그 애가 가끔 어디가 잘못된게 아닐까 걱정했다. 원래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애라면 알리사와 글로리아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만한 장난을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쳤어야 했다.
“사유지 나무를 자르겠다니 말도 안돼요.” 글로리아는 이제 늙고 병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년 전에 협심증 판정을 받고 약을 먹고 있었다. 글로리아는 돋보기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면서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의 대부분의 할머니가 그렇듯이 글로리아는 얼마 가지 않아 우리의 손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지나치게 착했지만 그런 것들은 글로리아에게 안타까움을 심어주는 모양이었다. 알리사는 이따금 나와 놀고 있는 나다니엘을 식탁에 앉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내 딸인 그 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알리사가 잭과 사귀기 훨씬 이전부터였을 것이다.
“반년 전에 미리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할거면 이미 삼개월 전까지는 했었어야 했다고 하는군. 그 비슷한 편지 둔 것 없나?”
“난 몰라요. 그런 편지 받은 적 없어요.”
“잘 생각해봐.” 글로리아는 나를 노려보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글로리아는 언제까지고 그 나무가 거기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나무는 베지 않는 이상은 없어지지 않았고 나와 글로리아 모두 그 나무를 베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무는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자랐고 나무의 수명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잘 자랄 예정이었다. 어제까지는. 글로리아는 쌀쌀한 날씨만 아니라면 뜨개질감을 들고 저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했다. 이제는 글로리아가 무엇을 떠도 입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글로리아는 공연히 앉아 만든 장갑이나 털스웨터 따위를 어린이 회관이나 복지센터에 기부했다. 글로리아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늘 나무가 있었고 여름에는 나무가 그늘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편지를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글로리아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단이 커데트 에어리어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노인이 되면 사람이 예민하고 밤잠이 없어지는 법이었다. 꿈에 치여 깨어날 때마다 마이크는 ‘무슨 일이야’ 라고 물었다. 나단은 꿈 속에서 입학식 때 입었던 멋진 제복을 입고 비행기 앞에 서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그런 제복을 입게 된 남자애는 그 애 하나 뿐이었다. 그 애는 마이크만큼 체격이 좋은 애로 자랐다. 꿈속에서 나는 그 애의 잘 빗어 넘긴 머리를 보면서 말했다. ‘별에게 너무 잘 보이지 마라 아가’* 나단은 챙이 좁은 모자를 눌러쓰고 입술을 힘겹게 끌어당기면서 웃었다.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웃는 것에 소질이 없었다. ‘별이 너를 데려가게 두지 마라 아가’ 마이크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이크는 미간을 좁히면서 도로 누웠다. ‘잔걱정이 너무 많은거 아닌가?’ ‘자. 아직 아침이 멀었어.’ 마이크는 덧붙였다. 그는 내게 갱년기나 그 비슷한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알리사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했지만 알리사는 그냥 또래 여자애들보다 조금 무기력한 애였다. 그래도 알리사는 친구가 많았고 착했고 잘 놀았다. 잭 같은 남자와 결혼한 게 그 애의 흠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마이크는 알리사가 예민한 것이 나를 닮아서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마이크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나는 마이크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알리사는 예민한 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리사
상담사와의 여섯 번째 치료는 대강 이랬다.
‘아드님과의 관계가 어땠나요?’ ‘사실..우린 모자 사이라고 하긴 좀 이상했어요. 그애는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모든걸 잘했고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앨 돌아주셨죠.’ ‘남편은요?’ ‘그 사람은 애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돈만 벌어오면 되는 줄 알죠.’ ‘정말 그런가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 아이는 남편과 놀아본적이 많이 없어요. 걔는 놀아달라거나 뭘 해달라고 하질 않았으니까요.’ ‘아드님이 그런 것에 대해서 불편하진 않았나요?’ ‘그 애는 그런 적이 없어요. 사실 그래서 애 같지가 않았죠.’ ‘지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내가 잘못된 엄마 같다고 느껴요. 그래도 난 그 애가 나한테 뭘 해달라고 했으면 해줬을 거에요.’ ‘자 좋아요. 그럼 지금 저를 당신 아들이라고 생각해보고 저한테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세요.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 나단. 나한테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나한테 차라리 뭘 해달라고 요구를 했으면 나도 그렇게 무관심한 엄마가 되진 않았을 텐데! 내가 이렇게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자 그럼 이제 당신이 말한 것에 대해서 제가 아들이고 대답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다시 말해보시겠어요?’ ‘나단 네가 나한테 차라리 뭘 해달라고 떼를 쓰고 화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알리사는 너무 지쳐보였어요. 나는 사랑받고 싶었고 알리사를 지켜주고 싶었어요. 나는 알리사가 도와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알리사를 방해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어요. 난 괜찮아요. 이렇게 하면 사랑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사랑받고 싶었니?’ 상담사는 뜸을 들였다. ‘원래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동기죠.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사랑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 당신과 아들 모두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 것 뿐 입니다.’ ‘아 나단. 그래도 난 그 애를 그렇게 사랑해 주질 않았는데.’
여섯 번째 치료가 끝난 뒤로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한참동안 울었다. 나는 그 애가 언제나 내 아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애는 내 손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를 멈춰 세울 수도 없었고 붙잡을 수도 없었다.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아이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애가 날 때부터 모든 것에 풍족해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 글로리아.
글로리아
마이크는 내게 알리사가 더 이상 상담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걔한테 거기 다녀보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하지만 갈수록 우울해하잖아.” 보기 드물게 마이크는 자신이 없었고 마이크는 알리사가 우울해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긋지긋해했다. 알리사는 원래 그런 애였다. 마이크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한 것 뿐이지.
“뭐가 됐든 걔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있어요. 당신이 나설 필요 없어요.”
“왜 어떻길래.”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있나봐요, 자신에 대해서.”
“나쁘지 만은 않은 일이군.”
“걔 나이를 생각했을 때 걘 좀 더 전에 이미 했었어야 돼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가서 당신 할 일이나 하세요.”
“잭은 뭐라던가?”
“뻔하죠. 별 생각 없다고 하겠지.” 나는 신경질을 내면서 볼 안에 있는 감자를 힘주어 으깼다. 잭은 그런 남자였다. 마이크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잭도 변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알리사가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어오고 외도를 하지 않긴 했지만 여전히 따분한 사람이었다. 알리사의 우울한 성격을 받아주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때 애 같은 건 지워버리라고 했는데. 볼을 식탁위에 던지듯이 거칠게 내려놓고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울고 싶었다. 망할 년. 마치 나다니엘의 일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나는 견딜 수 없어졌다. ‘꿈 말이에요 마이크’ 꿈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마이크는 나를 향해 미간을 지푸려 보이고 말 없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가족들은 모두 떠올리고 싶지 않아했다. 나도 그랬다. 잭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남자가 그 애 아빠라면 별 생각 없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됐다.
하이디
가게에는 여전히 꼬마 손님들이 많았다. 꼬마손님의 엄마들은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는 것 보다 집으로 가져가기를 바랬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바쁘고 애들에게 시켜야할 것들이 많았다. 학기가 시작한지도 꽤 된 시점이었으니 아이들도 해야 할 숙제가 많을 것이다. 알리사는 사람들이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는 가게 구석에 앉아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사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아는 몇 사람들과 그녀의 이웃들이 가끔 알리사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빼면 알리사는 거기 앉아있기엔 좀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 나다니엘이 앉아있었다면 훨씬 인기가 좋았을 것이다. 나다니엘이 여름마다 일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는 내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찾아와 나다니엘 대신 레모네이드를 만들어주었다. 단 것은 역시 젊은 사람이 잘 만드는 모양이었다. 애들이 만드는 레모네이드는 내가 만드는 것 보다 배로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알리사” 가게가 한산해지자 나는 레모네이드를 알리사와 내 앞에 내려놓고 테이블에 앉았다. 이제 저녁시간이 다 되었으니 손님이 없을 시간이 맞았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가게를 좀 일찍 닫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알리사를 쳐다보자 알리사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상담을 그만 두지 그래?” 알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아냐. 그냥 맞는 말을 해서 가끔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것뿐이지.”
“잭은?”
“별 생각 없대지.” 나는 한숨을 내쉰다. 객관적으로 잭이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알리사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글로리아와 마이크가 그를 달가워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원래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때 그때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나다니엘이 누구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인지 가끔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그랬다. 알리사를 닮은 잿빛 눈이 아니었다면 알리사의 아이라는 것조차 가끔 잊어 버렷을 것이다.
“아 하이디.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걔 엄만데.”
“엄마라고 다 완벽한건 아니잖아.”
“그래도 어떻게 내 애가 그렇게 사랑해달라고 외치는데 모르는 척 했느냔 말야.”
“모르는 척이 아니라 몰랐던 거잖아.” 알리사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일어서서 가게 문을 잠그고 클로즈 팻말을 걸었다.
“그래도 나다니엘은 너를 좋아했잖아.” 나는 알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리사는 다시 쉴 새 없이 울기 시작했다. 열일곱살 때 제임스에게 차여서 울던 알리사를 본 이후로 이렇게 서럽게 우는 알리사는 처음 이었다.
“그래도 나단은 널 사랑했잖니 알리사. 그 애가 합격 통지서를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는걸. 그만 좀 울어. 울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해.”
“그거야 걔가 워낙 가고 싶어 했던 거잖아.”
“이 바보 같은 여자야. 걘 널 지켜주고 싶었던 거라고. 얼마나 어린 애 같은 애니. 열아홉 살 먹은 남자애가 뭘 지키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들었어야지.”
“오 하이디.”
알리사는 오랫동안 울었다. 가게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을 때까지.
알리사
상담사와의 여덟 번째 치료는 대강 이랬다.
‘다시 아드님의 이야기를 해보죠. 지난번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동안 바뀐 것이 있나요?’ ‘아들이 왜 공군이 되었는지 알았어요. 아. 그 애는 나를 사랑했던 거에요 선생님. 날 지켜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요. 그래서 자꾸 비행기 소리가 들렸나요? 내가 그 애를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명이나 환청은 딱히 이렇다할 원인을 집어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환청의 경우에는 원인과 관련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죠. 사람의 몸은 대부분 정신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마음도 함께 약해지고 마음이 아프면 몸이 같이 반응하게 되죠. 비행기 소리가 아직도 들리나요?’ ‘아뇨. 지난주부터는 밤에 푹 잤어요.’ ‘아드님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아닌가요? 우리 애가 내 곁에서. 아. 맴돌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이.’ ‘무의식중에는 사랑을 깨닫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의식이란게 굉장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대다수의 상담사들이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그러셨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상담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다음 주에는 아들에 대한 내용을 일기로 써 오세요. 그리고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목표를 정해 옵시다. 목표는 거창할 필요도 없고 복잡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이 지금 바꾸고 싶은 것을 써오면 다음에는 나와 같이 어떤 목표가 좋을지 구체적으로 정해 봅시다.’
잭
알리사는 나다니엘의 실종 소식을 들은 뒤에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알리사
아 나다니엘. 네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면.
나다니엘
나다니엘에게는 깨우쳐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의 신념과 사랑이 지나치게 크고 방대하고 아름답다는 것과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나다니엘은 헤일리의 취임사를 듣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익숙하지 못했으나 결국 익숙해진 양복과 방탄조끼 대신 의례용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군대로 복귀했다. 그에게는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는 몇몇의 마루를 죽이는 것이 그가 그들을 싫어하고 있다는 뜻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 들을 죽이는 것이 자신이 지켜야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난 프로젝트의 시간동안 익혔다. 나다니엘은 인정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했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하나하나의 삶의 뭉텅이였다. 그는 날 때부터 그 모든 것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상냥한 기질과 조용하고 서툴고 미약한 감정들로 그 모든 것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는 스물세살의 욕심이 그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해 인정해야했다. 수 많은 재능들이 피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멈추어 바라볼 수 있어야 했다. 지키고자 한 것들을 포기하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가 달리다가 멈추어 섰을 때 무엇에 부딪혔는지 알아야 만이 다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같았다. 앞으로도 그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은 수 많은 위험에 노출 될 터였다. 단순히 마루 때문이 아니라 수 많은 것들에게서 그랬다. 그는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단한 메시아가 아니라 사관학교를 졸업한 스물세살의 청년이었다.
글로리아
‘별이 너를 데려가게 두지 마라 아가’
나다니엘
나다니엘은 대개의 경우에 꿈을 꾸지 않았다. 그의 하루는 꿈을 꾸기에는 지나치게 힘들고 고된 탓이었다. 그날 나다니엘의 꿈에는 글로리아가 나왔다. ‘별이 너를 데려가게 두지 마라 아가.’ 글로리아의 말에 나다니엘은 웃었다. 나다니엘은 챙이 짧은 군모를 눌러 쓰고 머플러를 여몄다. 희끄무레한 저녁 안개 속에서 관제탑의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
*‘별에게 너무 잘 보이지 마라 아가’ : 생떽 쥐뻬리 <야간 비행> 중 '별들한테 잘 보이려고?' 에서 차용.
*Vol de nuit : <야간 비행>
mission05
'OperationDOXA'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death of tree (0) | 2012.02.19 |
---|---|
Never before (0) | 2012.02.19 |
The bed of sea (0) | 2012.02.03 |
Back (0) | 2012.01.27 |
Dinner table (0) | 2012.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