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de nuit


하이디
 

 크림치즈를 사던 하이디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희멀건 전등 아래에서 팩에 싸인 육류와 유제품이 늘어서 있었다. 마트 안에는 아이들이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 느긋한 주부들과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들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카트를 끌고 다녔다. 그녀는 레몬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레모네이드를 만들기에는 추운 계절이었다. 그녀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감자와 계란과 당근을 샀다. 스낵 코너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골라 담고 카운터 앞에서 캔디 바 두 개를 더 올려놓았다. 아이들이 더 이상 그것들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하이디는 그렇게 했다. 아이들이 더 이상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그들의 어머니였다.



 알리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글로리아

 알리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알리사는 그녀의 상담사의 방법과 효과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찌됐든 일주일에 한번 씩 밀워키 시내에 있는 상담소를 찾았다. 그 애는 상담실에 다녀온 뒤에는 내 집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심각한 얼굴로 한참동안 골몰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잭은 그 애를 완전히 감싸주기엔 역부족한 애였다. 잭은 빠지지 않고 회사에 다니고 돈을 벌어서 지금의 집을 샀지만 그것 뿐이었다. 잭이 아무리 그 애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표현할 줄 모르는 멀대같은 남자를 완전히 사랑해 줄 수 없었다. 그 애는 자꾸만 외로워했고 자꾸만 힘들어 했다. 그 애의 아이는 그 애 때문에 거의 혼자 자라다시피 했다. 나단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 집보다 우리 집에 더 오래 머물렀다. 마이크는 아버지보다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단은 내 무릎 위에 앉아 동화책을 읽었고 마이크와 함께 정원을 손질했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뭇잎의 개수를 헤아리는 일곱 살의 남자애를 보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일곱 살은 아무리 뛰어놀아도 부족한 나이인데. 마이크는 혀를 차고 나다니엘을 옆구리에 들고 정원을 나섰다. 알리사는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말없이 정원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그릇에 수프를 한 국자 더 떠 주었다.  

알리사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밀워키 시내에 있는 상담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이야기 한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의사는 30대 중반의 남자로, 겉보기만으로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섰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혼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결혼반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세션이 시작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추측은 상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당부했다.) 옷차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 정갈하게만 입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중간에서 그 아래쯤의 낮은 목소리였다. 잭에 비하면 낮은 목소리였다.

 상담사와의 첫 번째 치료는 대강 이런 느낌이었다.
 
 ‘우선 이 치료를 시작하면 어떻게 될거라고 생각하세요?’ ‘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뭔데요?’ ‘잠에 쉽게 잠이 들 수 없고, 심장이 뛰어요. 하루 종일 기운이 없어요. 귀에서 가끔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치료가 끝나면 그런 것들이 모두 해결 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그래요.’ ‘하지만 상담은 그렇게 마법처럼 당신의 증세를 호전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상담사들은 마법사가 아니에요. 당신의 문제를 알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겠지만 당신도 함께 노력해야하는 일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뭔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을 거에요. 모든 건 같이 정하고 당신이 노력해야 할겁니다.’ 

 상담사와의 첫 번째 상담은 나를 훨씬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상담사와의 다섯 번째 치료는 대강 이랬다. 

  ‘그럼 이제 당신이 이전에 말했던 이상한 소리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보도록 하죠. 당신이 처음 와서 말했던 이상한 소리에 대해서 기억하나요?’ ‘네 기억해요’ ‘그 소리가 혹시 당신의 수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나요?’ ‘음...아뇨...아니 그런 것 같아요.’ ‘얼마나 지속되죠?’ ‘잘 모르겠어요. 아마...십분에서 삼십분 정도요.’ ‘어떤 소리인지 설명해 볼 수 있겠어요?’ ‘웅웅거리는 소리에요.’ ‘어떤 소리와 비슷한지 천천히 생각해서 설명해 보겠습니까?’ ‘....음......비행기....비행기 소리 같기도 해요.’ ‘비행기 소리를 언제 들었나요?’ ‘아..아들의 졸업식에서요.’ ‘아들이 비행기와 관련된 일을 하나요?’ ‘네. 파일럿이에요 아니, 공군이에요’ ‘그러면 잠시 아드님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든지 좋아요 생각나는 것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그 애는 말을 잘 들었어요. 아니 내가 혼낼 일이 별로 없었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걸 잘 하는 애였어요.’ ‘그 때 당신은 어땠나요?’ ‘나는 잭과의 관계에 지쳐있었어요. 그 애가 어릴 때..서너살 때 부터요. 잭은 너무 따분한 사람이에요.’ 


마이크

 “글로리아. 시청에서 편지가 왔어.”
 “어머 그게 뭔데요.” 글로리아는 돋보기 안경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눈이 안좋아진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뜨개질을 하고 쿠키를 구웠다. 
 “정원 앞에 길을 낸다고 나무를 잘라야할 것 같다는데.” 손에 들린 편지를 글로리아가 낚아 챘다. 이십년도 전에 나무를 심자고 한 것은 나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잭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알리사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글로리아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 앉아서 울었다. 글로리아는 알리사를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위스콘신의 칼리지에 보내줄만한 돈을 글로리아는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다. 그녀의 바람은 그 시대 여자들이 딸에게 바라는 작은 기대 같은 것이었다. 글로리아는 몇 일 동안 일어나자마자 우울해 하고 하루 종일 울었다. 하루 종일 울어도 화가 가시지 않을 정도로 글로리아와 내가 모두 젊고 기운 찼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단은 잭을 닮았지만 눈은 알리사를 닮아 있었다. 손자가 태어나고도 오랫동안 잭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못하는 글로리아에게 나는 나무를 심자고 말했다. 글로리아는 듣는 둥 마는 둥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뒤가 넓은 지프차를 끌고 시내의 화원에 들러 이름도 모르는 튼튼하고 어린 묘목을 하나 골랐다. 물이 없어도 오래 버티고 땅에 양분이 적어도 튼튼하게 자라는 나무였다. 나무는 화훼용으로는 크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주인은 예의상의 적은 돈만을 받고 덤으로 영양제를 얹어 주었다. 그리고 손자는 나무 같은 아이처럼 자랐다. 나는 그 애가 그렇게 자라는 것을 볼 때 마다 그 애가 알리사와 잭 둘 모두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손자는 적은 것들에 만족하는 애였다. 글로리아가 굽는 쿠키를 집어먹고 글로리아가 뜬 스웨터를 군 말 없이 입고 나타날 줄 알았다. 그 나이 또래의 뼈대만 자란 남자애들과 다른 손자의 성격에 이따금 소름 돋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그 애가 가끔 어디가 잘못된게 아닐까 걱정했다. 원래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애라면 알리사와 글로리아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만한 장난을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쳤어야 했다. 
 “사유지 나무를 자르겠다니 말도 안돼요.” 글로리아는 이제 늙고 병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년 전에 협심증 판정을 받고 약을 먹고 있었다. 글로리아는 돋보기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면서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의 대부분의 할머니가 그렇듯이 글로리아는 얼마 가지 않아 우리의 손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지나치게 착했지만 그런 것들은 글로리아에게 안타까움을 심어주는 모양이었다. 알리사는 이따금 나와 놀고 있는 나다니엘을 식탁에 앉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내 딸인 그 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알리사가 잭과 사귀기 훨씬 이전부터였을 것이다.
 “반년 전에 미리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할거면 이미 삼개월 전까지는 했었어야 했다고 하는군. 그 비슷한 편지 둔 것 없나?”
 “난 몰라요. 그런 편지 받은 적 없어요.” 
 “잘 생각해봐.” 글로리아는 나를 노려보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글로리아는 언제까지고 그 나무가 거기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나무는 베지 않는 이상은 없어지지 않았고 나와 글로리아 모두 그 나무를 베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무는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자랐고 나무의 수명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잘 자랄 예정이었다. 어제까지는. 글로리아는 쌀쌀한 날씨만 아니라면 뜨개질감을 들고 저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했다. 이제는 글로리아가 무엇을 떠도 입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글로리아는 공연히 앉아 만든 장갑이나 털스웨터 따위를 어린이 회관이나 복지센터에 기부했다. 글로리아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늘 나무가 있었고 여름에는 나무가 그늘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편지를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글로리아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단이 커데트 에어리어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노인이 되면 사람이 예민하고 밤잠이 없어지는 법이었다. 꿈에 치여 깨어날 때마다 마이크는 ‘무슨 일이야’ 라고 물었다. 나단은 꿈 속에서 입학식 때 입었던 멋진 제복을 입고 비행기 앞에 서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그런 제복을 입게 된 남자애는 그 애 하나 뿐이었다. 그 애는 마이크만큼 체격이 좋은 애로 자랐다. 꿈속에서 나는 그 애의 잘 빗어 넘긴 머리를 보면서 말했다. ‘별에게 너무 잘 보이지 마라 아가’* 나단은 챙이 좁은 모자를 눌러쓰고 입술을 힘겹게 끌어당기면서 웃었다.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웃는 것에 소질이 없었다. ‘별이 너를 데려가게 두지 마라 아가’ 마이크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이크는 미간을 좁히면서 도로 누웠다. ‘잔걱정이 너무 많은거 아닌가?’ ‘자. 아직 아침이 멀었어.’ 마이크는 덧붙였다. 그는 내게 갱년기나 그 비슷한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알리사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했지만 알리사는 그냥 또래 여자애들보다 조금 무기력한 애였다. 그래도 알리사는 친구가 많았고 착했고 잘 놀았다. 잭 같은 남자와 결혼한 게 그 애의 흠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마이크는 알리사가 예민한 것이 나를 닮아서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마이크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나는 마이크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알리사는 예민한 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리사

 상담사와의 여섯 번째 치료는 대강 이랬다. 
 
 ‘아드님과의 관계가 어땠나요?’ ‘사실..우린 모자 사이라고 하긴 좀 이상했어요. 그애는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모든걸 잘했고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앨 돌아주셨죠.’ ‘남편은요?’ ‘그 사람은 애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돈만 벌어오면 되는 줄 알죠.’ ‘정말 그런가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 아이는 남편과 놀아본적이 많이 없어요. 걔는 놀아달라거나 뭘 해달라고 하질 않았으니까요.’ ‘아드님이 그런 것에 대해서 불편하진 않았나요?’ ‘그 애는 그런 적이 없어요. 사실 그래서 애 같지가 않았죠.’ ‘지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내가 잘못된 엄마 같다고 느껴요. 그래도 난 그 애가 나한테 뭘 해달라고 했으면 해줬을 거에요.’ ‘자 좋아요. 그럼 지금 저를 당신 아들이라고 생각해보고 저한테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세요.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 나단. 나한테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나한테 차라리 뭘 해달라고 요구를 했으면 나도 그렇게 무관심한 엄마가 되진 않았을 텐데! 내가 이렇게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자 그럼 이제 당신이 말한 것에 대해서 제가 아들이고 대답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다시 말해보시겠어요?’ ‘나단 네가 나한테 차라리 뭘 해달라고 떼를 쓰고 화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알리사는 너무 지쳐보였어요. 나는 사랑받고 싶었고 알리사를 지켜주고 싶었어요. 나는 알리사가 도와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알리사를 방해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어요. 난 괜찮아요. 이렇게 하면 사랑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사랑받고 싶었니?’ 상담사는 뜸을 들였다. ‘원래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동기죠.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사랑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 당신과 아들 모두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 것 뿐 입니다.’ ‘아 나단. 그래도 난 그 애를 그렇게 사랑해 주질 않았는데.’ 

 여섯 번째 치료가 끝난 뒤로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한참동안 울었다. 나는 그 애가 언제나 내 아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애는 내 손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를 멈춰 세울 수도 없었고 붙잡을 수도 없었다.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아이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애가 날 때부터 모든 것에 풍족해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 글로리아. 
 

글로리아

 마이크는 내게 알리사가 더 이상 상담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걔한테 거기 다녀보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하지만 갈수록 우울해하잖아.” 보기 드물게 마이크는 자신이 없었고 마이크는 알리사가 우울해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긋지긋해했다. 알리사는 원래 그런 애였다. 마이크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한 것 뿐이지.
 “뭐가 됐든 걔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있어요. 당신이 나설 필요 없어요.”
 “왜 어떻길래.”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있나봐요, 자신에 대해서.”
 “나쁘지 만은 않은 일이군.”
 “걔 나이를 생각했을 때 걘 좀 더 전에 이미 했었어야 돼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가서 당신 할 일이나 하세요.”
 “잭은 뭐라던가?”
 “뻔하죠. 별 생각 없다고 하겠지.” 나는 신경질을 내면서 볼 안에 있는 감자를 힘주어 으깼다. 잭은 그런 남자였다. 마이크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잭도 변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알리사가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어오고 외도를 하지 않긴 했지만 여전히 따분한 사람이었다. 알리사의 우울한 성격을 받아주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때 애 같은 건 지워버리라고 했는데. 볼을 식탁위에 던지듯이 거칠게 내려놓고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울고 싶었다. 망할 년. 마치 나다니엘의 일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나는 견딜 수 없어졌다. ‘꿈 말이에요 마이크’ 꿈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마이크는 나를 향해 미간을 지푸려 보이고 말 없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가족들은 모두 떠올리고 싶지 않아했다. 나도 그랬다. 잭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남자가 그 애 아빠라면 별 생각 없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됐다. 


하이디 

 가게에는 여전히 꼬마 손님들이 많았다. 꼬마손님의 엄마들은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는 것 보다 집으로 가져가기를 바랬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바쁘고 애들에게 시켜야할 것들이 많았다. 학기가 시작한지도 꽤 된 시점이었으니 아이들도 해야 할 숙제가 많을 것이다. 알리사는 사람들이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는 가게 구석에 앉아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사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아는 몇 사람들과 그녀의 이웃들이 가끔 알리사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빼면 알리사는 거기 앉아있기엔 좀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 나다니엘이 앉아있었다면 훨씬 인기가 좋았을 것이다. 나다니엘이 여름마다 일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는 내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찾아와 나다니엘 대신 레모네이드를 만들어주었다. 단 것은 역시 젊은 사람이 잘 만드는 모양이었다. 애들이 만드는 레모네이드는 내가 만드는 것 보다 배로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알리사” 가게가 한산해지자 나는 레모네이드를 알리사와 내 앞에 내려놓고 테이블에 앉았다. 이제 저녁시간이 다 되었으니 손님이 없을 시간이 맞았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가게를 좀 일찍 닫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알리사를 쳐다보자 알리사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상담을 그만 두지 그래?” 알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아냐. 그냥 맞는 말을 해서 가끔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것뿐이지.”
 “잭은?”
 “별 생각 없대지.” 나는 한숨을 내쉰다. 객관적으로 잭이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알리사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글로리아와 마이크가 그를 달가워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원래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때 그때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나다니엘이 누구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인지 가끔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그랬다. 알리사를 닮은 잿빛 눈이 아니었다면 알리사의 아이라는 것조차 가끔 잊어 버렷을 것이다.
 “아 하이디.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걔 엄만데.”
 “엄마라고 다 완벽한건 아니잖아.”
 “그래도 어떻게 내 애가 그렇게 사랑해달라고 외치는데 모르는 척 했느냔 말야.”
 “모르는 척이 아니라 몰랐던 거잖아.” 알리사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일어서서 가게 문을 잠그고 클로즈 팻말을 걸었다.
 “그래도 나다니엘은 너를 좋아했잖아.” 나는 알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리사는 다시 쉴 새 없이 울기 시작했다. 열일곱살 때 제임스에게 차여서 울던 알리사를 본 이후로 이렇게 서럽게 우는 알리사는 처음 이었다. 
 “그래도 나단은 널 사랑했잖니 알리사. 그 애가 합격 통지서를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는걸. 그만 좀 울어. 울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해.” 
 “그거야 걔가 워낙 가고 싶어 했던 거잖아.”
 “이 바보 같은 여자야. 걘 널 지켜주고 싶었던 거라고. 얼마나 어린 애 같은 애니. 열아홉 살 먹은 남자애가 뭘 지키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들었어야지.” 
 “오 하이디.” 
 알리사는 오랫동안 울었다. 가게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을 때까지.


알리사

 상담사와의 여덟 번째 치료는 대강 이랬다.

 ‘다시 아드님의 이야기를 해보죠. 지난번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동안 바뀐 것이 있나요?’ ‘아들이 왜 공군이 되었는지 알았어요. 아. 그 애는 나를 사랑했던 거에요 선생님. 날 지켜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요. 그래서 자꾸 비행기 소리가 들렸나요? 내가 그 애를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명이나 환청은 딱히 이렇다할 원인을 집어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환청의 경우에는 원인과 관련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죠. 사람의 몸은 대부분 정신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마음도 함께 약해지고 마음이 아프면 몸이 같이 반응하게 되죠. 비행기 소리가 아직도 들리나요?’ ‘아뇨. 지난주부터는 밤에 푹 잤어요.’ ‘아드님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아닌가요? 우리 애가 내 곁에서. 아. 맴돌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이.’ ‘무의식중에는 사랑을 깨닫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의식이란게 굉장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대다수의 상담사들이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그러셨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상담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다음 주에는 아들에 대한 내용을 일기로 써 오세요. 그리고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목표를 정해 옵시다. 목표는 거창할 필요도 없고 복잡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이 지금 바꾸고 싶은 것을 써오면 다음에는 나와 같이 어떤 목표가 좋을지 구체적으로 정해 봅시다.’



 알리사는 나다니엘의 실종 소식을 들은 뒤에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알리사

 아 나다니엘. 네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면. 


나다니엘

 나다니엘에게는 깨우쳐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의 신념과 사랑이 지나치게 크고 방대하고 아름답다는 것과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나다니엘은 헤일리의 취임사를 듣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익숙하지 못했으나 결국 익숙해진 양복과 방탄조끼 대신 의례용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군대로 복귀했다. 그에게는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는 몇몇의 마루를 죽이는 것이 그가 그들을 싫어하고 있다는 뜻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 들을 죽이는 것이 자신이 지켜야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난 프로젝트의 시간동안 익혔다. 나다니엘은 인정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했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하나하나의 삶의 뭉텅이였다. 그는 날 때부터 그 모든 것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상냥한 기질과 조용하고 서툴고 미약한 감정들로 그 모든 것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는 스물세살의 욕심이 그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해 인정해야했다. 수 많은 재능들이 피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멈추어 바라볼 수 있어야 했다. 지키고자 한 것들을 포기하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가 달리다가 멈추어 섰을 때 무엇에 부딪혔는지 알아야 만이 다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같았다. 앞으로도 그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은 수 많은 위험에 노출 될 터였다. 단순히 마루 때문이 아니라 수 많은 것들에게서 그랬다. 그는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단한 메시아가 아니라 사관학교를 졸업한 스물세살의 청년이었다. 


글로리아

 ‘별이 너를 데려가게 두지 마라 아가’


나다니엘 

 나다니엘은 대개의 경우에 꿈을 꾸지 않았다. 그의 하루는 꿈을 꾸기에는 지나치게 힘들고 고된 탓이었다. 그날 나다니엘의 꿈에는 글로리아가 나왔다. ‘별이 너를 데려가게 두지 마라 아가.’ 글로리아의 말에 나다니엘은 웃었다. 나다니엘은 챙이 짧은 군모를 눌러 쓰고 머플러를 여몄다. 희끄무레한 저녁 안개 속에서 관제탑의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
*‘별에게 너무 잘 보이지 마라 아가’ : 생떽 쥐뻬리 <야간 비행> 중 '별들한테 잘 보이려고?' 에서 차용. 
*Vol de nuit : <야간 비행>

mission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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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가 완전히 땅으로 돌아가는데는 그들이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1.
어린 묘목이 가렛 노부부의 앞마당에 심어졌을 때 나무는 아직 다섯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여전히 아이의 한 손안에 고스란히 들어오는 얇은 나무 밑동은 그것이 서너해살이 풀인 것처럼 여리고 부드러웠다. 바람이 부는 대로 나무는 가지와 함께 흔들렸다. 나다니엘은 그 나무와 함께 컸다. 병들지 않고 해가 지날 때마다 차례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다시 잎이 지는 것은 노부부가 나무를 돌보는 증거였다. 나다니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무와 같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햇볕을 쬐고 고요할 만큼 조용히 숨을 쉬고 하늘을 바라봤다.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것은 나무의 본능이었다. 해가 지날 때마다 나무기둥은 단단해졌다. 여리고 부드러운 새 가지처럼 보드라운 황갈빛의 기둥은 점점 짙은 고동색이 되었다. 그들은 함께 나이를 먹었고 뼈와 기둥 안에 나이테를 새겼다. 한해동안 햇볕을 쬐고 물을 마시고 숨을 쉰 증거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무는 단단한 땅에 뿌리를 내렸다. 가지를 뻗는 것 보다 먼저 나무가 하는 일이었다. 나다니엘은 단단하게 건강하게 자랐고 거친 위스콘신의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다니엘의 손은 잘 뻗은 가지처럼 천천히 커졌지만 스무해가 지났을 때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도 나무의 둥치를 완전히 감싸지 못했다. 나무의 뿌리는 그의 높이만큼 아래로 깊게 뻗어나갔고 겨울의 돌풍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는 이웃 개의 영역이었고 청솔모의 놀이터였다. 나다니엘의 책가방을 걸어놓는 걸이이기도 했다가 노부인의 뜨개질 동무가 되기도 했다. 노부인은 나다니엘을 보듯 나무를 바라보았고 나무를 바라보듯 나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고 나다니엘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1.
나다니엘은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모든 것들은 말로 설명하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나다니엘은 그런 것을 표현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법에 대해 한 번도 배운 적 없었다. 모든 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본능으로부터 부여받은 것들이었다. 나다니엘이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뼈가 단단하게 굳고 크기를 불려나가고 근육아 뼈를 감싸고 피부 아래를 단단하게 메워나간 것처럼. 그는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운 적 없었다. 그것은 아이가 자라고 나무가 가지를 뻗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알아 온 것과 같이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떠나는 것에 대해서 몰랐다. 아무도 그런 것에 대해 알려주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가 그런것을 말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들의 다리는 나무의 뿌리처럼 단단하게 땅에 박혀있었고 땅은 많은 것들을 지탱했다. 집의 주축과 수많은 도로와 교량과 빌딩의 둥치와 학교와 숲과 산과 들.

1.
나무는 많은 것들을 지탱했다.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삶을 지탱했다.

1.
거울 속의 남자는 배에 붉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상처는 간지러웠고 나다니엘은 붕대 위에서 흉터를 더듬었다. 그는 마루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루의 눈은 바다처럼 파랬고 물처럼 검었다. 나다니엘은 한 번도 죽을 고비를 넘겨본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이 자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크고 단단한 어깨와 등을 만들었고 그를 가르친 수 많은 책들과 교본들과 운동들은 그것을 좀 더 수월하고 편안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 것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메운 많은 것들이 각자의 갈래로 갈라질 때에도 천천히 앞을 보고 걸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하라고 머릿속에 새겨져있는 말과 같았다. 그의 동료들은 대장이 되고 싶었고, 군인이 되고 싶었고, 집에서 떠나고 싶었고, 비행기를 타고 싶었고, 전쟁에 나가고 싶었다. 그들은 갈라진 갈림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갈림길에서 늘 선택에 부딪혀 비행기를 타거나 땅에 머물러야했고 전쟁에 나가거나 미국에 머물러야했다. 대장이 되거나 졸개로 남아있어야 했고 집을 떠났기 때문에 군에 있어야했다. 나다니엘은 그 수많은 동료들 가운데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타고난 본능에 따라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나무와 같았다. 수많은 것들이 터를 잡았다가 떠났다. 더 좋은 나무를 찾아든 들짐승이 더 좋은 초목을 찾아 떠났다가 좋은 수액을 위해 남겨둔 유충은 좋은 침대를 위해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가운데서 나다니엘은 나무처럼 서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다. 땅이 많은 것들을 지탱하는 동안 거친 비바람에 땅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초목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토양을 붙잡고 서있는 나무가 되기로 그는 태어나기 전에 결정했다.

1.
거울 속의 남자의 배에는 붉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나다니엘은 그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했다. 

1.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상처는 간지러웠다. 나다니엘은 오랫동안 거울을 바라봤다. 하루에 한번은 그랬다. 거울 앞에 서서 그는 붉은 흉터의 상징성에 대해 생각했다. 도미닉의 치료는 상처를 아물게 했지만 상처의 흉터가 사라지게하지는 못했다. 그의 허리에는 칼날의 길이만큼의 붉은 흉터 세 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배 위에는 마루가 남긴 서명이 남았다. VALiUM. 나다니엘은 오랫동안 진통제의 이름을 생각했다. 진정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그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난 후에 그것이 어쩌면 마루의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같은 이름을 가진 마루는 아주 적었다. 발륨. 나다니엘은 그가 자신에게 남긴 것의 의미와 자신이 그것을 가지게 된 의미를 생각했다. 마루의 눈은 푸른 색이었고 나다니엘은 파란 눈을 바라보면서 바다 밑으로 꺼져가는 감각에 빠졌다. 다시 죽게 된다면, 다시 죽음의 문턱을 밟으면 그는 다시 한 번 마루의 파란 눈을 떠올리게 될 것이었다. 마루가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죽어가는 생물이 느끼는 감각이었다. 마루는 그의 존재를 자신의 위에 남겼고 나다니엘은 그가 남긴 존재의 자욱을 바라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들은 완전히 상반된 것들이었다. 나다니엘은 그가 남긴 서명 위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가 남긴 서명은 나다니엘에게 그의 삶과, 자신의 선택과,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1.
막스. 만약에 안젤라와 내가 위험해진다면,

안젤라를 구해. 

1.
품 안에서 어깨를 들썩이는 막스의 갈색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나다니엘은 다른 생각을 했다. 

1.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운전석에 앉아있는 수백명의 가장들. 피로하고 지친 얼굴과 지갑 안에 끼워놓은 가족사진과 그를 반겨줄 작은 딸과 아들과 개. 모형처럼 세모와 네모로 이루어진 파랗고 붉고 초록색을 띈 격자무늬의 지붕과 천사모양의 도어벨과 현관문 안쪽의 얇은 레이스로 된 반투명한 흰색 커튼. 현관 앞의 붉은 깔개와 아이방으로 올라가는 하얗고 좁은 계단. 개가 배를 깔고 누워있는 카펫과 가운데자리가 푹 꺼진 헝겊 소파와 텔레비전. 텔레비전 위의 가족사진, 결혼식의 사진,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의 사진, 아이의 첫영성체 사진, 개를 데려온 날의 사진과 노부모의 생일 사진, 아이의 학교 축제와, 할로윈, 죽은 아버지와, 아직 살아있는 어머니가 뜬 무릎 가리개. 아직 치우지 못한 일월의 크리스마스 트리, 붉고 반짝이는 산타와 천사모양의 오나먼트, 노란별과, 전구들, 벽장식용의 벽난로, 남편이 풀칠한 벽지. 창고안의 오래되고 낡은 아기 유모차, 아기의 신발, 개가 물어뜯은 아내의 구두와, 아이들의 운동화. 자전거와 보호모, 무릎 보호대와 보관용 철쇠. 범퍼가 찌그러진 남색 구모델의 자가용과, 여자의 핸드백, 학부모 참관일. 식탁위의 치즈와 냉장고 안의 피넛버터와 구운지 삼일 된 쿠키와 슈, 타피오카. 

1.
사람이 사는 데는 수많은 쓸모없는 것들이 필요했다. 많은 것들이 집 안에 쌓였다가 버려졌다가 다시 자리를 메웠다. 수 만가지의 물건들. 수십개의 연필과 노트들과 영수증들. 후라이 팬과 블랜딩 기계 칼과 도마와 그릇과 접시와 오븐, 마이크로 오븐, 냉장고, 거품기와 뒤집개. 오리와 칫솔과 버블과 치약, 스펀지, 타일, 샤워커튼과 욕조. 카페트와 소파와 티비와 침대와 커튼과 벽난로와 사진들로. 수만가지의 것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지붕들이 불어날 때마다 그는 경외심을 느꼈다. 삶이 하나에서 둘이 될 때, 둘에서 넷이 되었다가 넷이 여덟이 되어 하나의 도시 안에 수만개의 삶으로 이루어질 때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독한 감기약을 먹고 잠이 들이 이전의 감각처럼 온 몸의 감각들이 혈관을 타고 머리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1.
품 안에서 어깨를 들썩이는 막스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나다니엘은 다른 생각을 했다. 수만가지의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집과 수만가지의 집이 모인 도시와 수만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융단을 위해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나다니엘 가렛. 어쩌면 죽을 준비를 쉽게 끝마쳐 버린 나다니엘 가렛. 그가 선택한 것들이 녹아든 상처를 얻고 나서 비로소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을 완전히 이해한 나다니엘 가렛. 그는 자신이 선택한 것들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모든 것들은 말로 설명하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다니엘은 그런 것을 표현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법에 대해 한 번도 그 누구에게서도 배운 적 없었다. 그것들은 그의 뼈와 혈관을 통해 그의 머리에 도달했다. 그의 피가 돌도록 심장이 피를 펌프질해서 머리로 올려 보냈다. 나다니엘은 자신의 각오에 대해서 막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쉽게 울었다. 안젤라를 구해. 나다니엘이 생각하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막스는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같았다. 이제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말 대신에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그에게 무언가가 남아있기를 바랬다.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남아있지 않더라도. 

1.
나는 괜찮아.

1. 
나무는 베는 대로 넘어졌고 벼락을 맞는 대로 불탔다. 나다니엘의 나무는 여전히 가렛 노부부의 정원에 있었다. 가장 높은 가지는 나다니엘보다 훨씬 높이에 있었고 훨씬 더 볕이 잘 드는 곳에 있었다. 나무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둥치는 점점 두터워졌다. 뿌리의 시발점이 땅 위로 굵은 뱀의 몸통처럼 드러났다. 나무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나다니엘이 둥치를 두드리면 이파리가 떨어지고 가렛 노부부가 그 나무를 베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나무는 언제든 둥치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나무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무엇도 거스르지 않았다. 그것은 필요하면 그 자리에 심어졌고 필요하면 그늘이 되었다가 필요하면 잘리거나 베이거나 사라지거나 죽을 수 있었다. 나다니엘은 머릿속에서 나무의 단단하고 딱딱한 껍질을 총으로 단련된 단단한 손바닥으로 쓸었다. 나다니엘은 그가 타고난 것을 거스르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는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 막 깨닫게 된 것 뿐이었다. 

1.
죽은 나무는 그 모든 것들의 집이 되었다. 나무는 그가 살아온 수백년의 세월처럼 죽은 뒤의 백년여동안도 살아온 세월처럼 서있었다. 그는 딱정벌레와 너구리의 집이 되었고 밑동은 곰의 굴이, 나무옹이는 딱따구리의 집이 되었다. 밑동이 이끼로 뒤덮이기도 전에 날아온 포자씨앗이 남은 영양분을 빨아들여 버섯이 되고 고사리가 자랐다. 이끼가 밑동을 푸르스름하게 뒤덮은 뒤에는 이파리가 하나도 돋지 않는 가지 위에 새들이 앉고 수많은 곤충들이 이내 자신의 대를 이어줄 유충들을 죽은 속살 안에 숨겨놓고 떠나갔다. 수백년 동안 깊은 대지와 땅을 뚫고 자란 나무의 뿌리와 잔가지들이 그가 죽은 뒤에도 흙을 단단하게 뒤엎고 그물처럼 잡았고 흙은 나무의 뿌리 사이에 단단히 잡혀 폭우가 내린 뒤에도 수많은 씨앗을 품은 채 떠내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숲의 수많은 동물들의 움직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곤충들의 먹이로 밑동이 갉혀 쓰러진 나무는 곧 뱀과 오소리와 지네의 터가 되어갔다. 나무 속은 점차 비었고 밑동을 푸르스름하게 덮은 이끼는 곧 나무 전체를 덮었다. 그는 쓰러진 뒤에는 점차 땅을 위한 좋은 영양분이 되었다. 수많은 동물들이 그의 빈 속 안에 터를 잡았다가 떠나갔다. 푸르스름한 이끼가 그를 숲과 같은 색으로 만들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제서야 겨우 생물의 흔적을 남기듯 천천히 썩어 들어갔다. 나무가 썩는 냄새는 비에 젖은 나무의 속살의 내음처럼, 물에 젖은 연필 내피의 냄새처럼 연하고 풍부했다. 쥐며느리와 곰팡이 딱정벌레와 노래기. 나무의 시체 위로 무덤처럼 소복히 쌓이는 낙엽이 습윤한 물기를 머금고 낙엽 사이사이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유충이 움틀거리면 나무도 흙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땅으로 돌아가는데는 그들이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1.
죽어서 모든 것들의 집이 되는 삶이라면 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1.
밑으로 꺼질수록 검어지는 바다를 상상하면서 그는 바다 한가운데 가라앉은 나무의 기둥처럼 가라앉은 거대한 비행기와 비행기 안에서 천천히 하얀 뼈가 되어가는 자신을 생각했다. 마루의 눈은 바다처럼 파랬고 물처럼 검었다. 물고기의 작은 입질에 하나하나 살점이 뜯겨나가 하얀 뼈가 남게 될 때면 비행기는 푸르스름한 이끼와 해조류로 뒤덮여 작은 정원이 될 것이다. 이따금 이는 물의 일렁임에 하얗게 남은 뼈가 천천히 물결치듯 움직이고, 그의 가죽으로 된 비행모와 옷가지들은 천천히 닳아 없어지게 될 터였다. 

1.
나다니엘의 유해는 오랫동안 바닷 속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었다. 비행기는 아주 작고 이끼와 풀로 뒤덮여 누군가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나다니엘은 군번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겨우 하얀 페인트로 도색된 비행기의 번호를 해조류를 살살 긁어내 확인 한 뒤에야 그 비행기가 나다니엘 가렛의 것이고 언젠가 없어졌다가 발견되었으며 비행기는 그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닳아 없어진 가죽 비행모를 쓰고 있는 하얀 유골이 그 임을 추측할 것이었다. 그의 유해는 영영 가라앉은 채로 다시는 발견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어쩌면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지도 몰랐다. 비행기는 먼지가 되었다가 불씨가 되었다가 매캐한 공기가 되었다. 기름이 타들어가는 냄새. 가죽과 뼈와 비행기가 모두 남지 않았을 때 아무것도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없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이름은 파란 눈을 가진 마루의 뒷주머니에서 쩔그렁거리고 있거나, 그 마루도 언젠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구름 위를 넘어서면 하늘과 바다의 구분선은 없어졌다. 하늘을 푸르렀고 바다도 그랬다. 지평선과 수평선을 구분할 수 있는 지표들이 모두 없어졌을 때 그들을 바다가 아니라 하늘에서 죽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복잡한 계기판이었다. 

1.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운전석에 앉아있는 수백명의 가장들. 피로하고 지친 얼굴과 지갑 안에 끼워놓은 가족사진과 그를 반겨줄 작은 딸과 아들과 개. 모형처럼 세모와 네모로 이루어진 파랗고 붉고 초록색을 띈 격자무늬의 지붕과 천사모양의 도어벨과 현관문 안쪽의 얇은 레이스로 된 반투명한 흰색 커튼. 현관 앞의 붉은 깔개와 아이방으로 올라가는 하얗고 좁은 계단. 개가 배를 깔고 누워있는 카펫과 가운데자리가 푹 꺼진 헝겊 소파와 텔레비전. 텔레비전 위의 가족사진, 결혼식의 사진,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의 사진, 아이의 첫영성체 사진, 개를 데려온 날의 사진과 노부모의 생일 사진, 아이의 학교 축제와, 할로윈, 죽은 아버지와, 아직 살아있는 어머니가 뜬 무릎 가리개. 아직 치우지 못한 일월의 크리스마스 트리, 붉고 반짝이는 산타와 천사모양의 오나먼트, 노란별과, 전구들, 벽장식용의 벽난로, 남편이 풀칠한 벽지. 창고안의 오래되고 낡은 아기 유모차, 아기의 신발, 개가 물어뜯은 아내의 구두와, 아이들의 운동화. 자전거와 보호모, 무릎 보호대와 보관용 철쇠. 범퍼가 찌그러진 남색 구모델의 자가용과, 여자의 핸드백, 학부모 참관일. 식탁위의 치즈와 냉장고 안의 피넛버터와 구운지 삼일 된 쿠키와 슈, 타피오카. 

1.
죽어서 모든 것들의 삶이 되는 죽음이라면 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1.
살아온 삶만큼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많은 삶을 지탱할 수 있다면 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제목은 <나무의 죽음>. 
mission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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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

Never before


 나다니엘은 가을의 끝무렵에 태어났다. 스무살의 알리사는 품 안에 안긴 작은 아이를 보고 웃었고 잭은 겨우 스무살이 된 아내에게 미안해했다. 그의 조부와 조모는 딸이 겨우 스무살에 낳은 아이를 걱정스레 바라보았으나, 가을의 끄트머리에 그들의 정원에 어린 묘목을 심었다. 늙은 노부부가 투덜거리면서도 아이와 아이의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정 표현이었다. 나다니엘은 그의 조부모의 정원 귀퉁이에 뿌리를 내린 묘목과 함께 나무처럼 컸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흠뻑 몸을 적시는 햇살과, 물과, 흙만 있으면 튼튼하게 자라는 어린 묘목처럼 고개를 들기만 하면 거기에 있는 애정과, 사랑과 관심을 먹고 서두르지 않고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자라났다. 이따금 돌아보면 나무는 한뼘씩 자라났고 나다니엘도 그랬다. 부족한 것은 없었다. 나다니엘은 약간의 햇살과, 물과 흙만 있으면 저 혼자 스스로 자라주는 아이였다.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말 수가 적었지만 부모가 걱정하지 않을 만큼 밝았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금 더 얌전했지만 교사가 그를 주의깊게 보지 않아도 될 만큼은 충분히 어른스러웠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그가 세상에 온화하듯 그에게 온화했다. 그는 말썽을 부리지 않았고, 누구도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조부모의 연하고 물렁해진 살 위에 앉아 책을 읽었고, 잠든 조모의 안경을 벗겨 탁상 위에 놓아주고는 함께 잠들었다. 아이는 나무가 자라듯 자라 또래보다 반 뼘씩 컸지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약한 계집애를 놀리는 것 보다는 조부와 뒤뜰에 나가 강한 위스콘신의 바람에 연을 날리는 쪽을 좋아했다. 더 이상 그의 늙은 조부모가 그를 무릎 위에 앉힐 수 없을 만큼 자랐을 때에는 카펫 위에 엎드려 그림을 그렸고, 뒤뜰에 나가 아버지를 졸라 공놀이를 했다. 숨이 가쁜 운동을 하면서도 나다니엘은 싸우지 않았다.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서로 뒤엉켜 농구공을 저만치 두고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다니엘은 아이들의 등을 도닥이고 팔을 잡아 코치와 함께 그들을 떼어놓는 쪽이 그의 성미에 맞았다. 그는 스스로 자라주는 아이였다.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알맞은 양의 애정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때로 예상을 벗어나고 부모의 마음대로 자라주지 않는다고들 흔히 말했지만 그의 부모는 지나가던 노부인이 그런 말을 할 때면 그저 웃으며 나다니엘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늘 온화하고 착한 아이들 중에 하나였다.

 커튼을 걷고 몸을 일으켰을 때 복부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통증에 나다니엘은 커튼을 그의 단단하고 큰 손으로 잡은 채로 한참동안 눈을 감고 빛을 맞았다. 가을의 초입 답게 햇살은 따듯하고 강렬했다. 나다니엘은 오래된 일들을 떠올렸다. 아직은 흐릿한 머리를 흔들고 늦은 가을에 태어난 자신과 함께 자란 나무와, 이제는 작별 인사를 준비하기 시작해야하는 조부모와 알리사가 있는 부엌을 생각했다. 가을 볕은 따가웠고 아주 드물게 그런 햇살은 나다니엘에게 그가 오래전에 겪었던 생각 중의 일부를 떠올리게 했다. 나다니엘에게는 아주 드물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가을은 종종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따듯한 볕 아래에서 눈을 감은 채로 배와 허리를 덮은 상처 때문에 아침 조깅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침대 맡에 몸을 기댔을 때 문득 나다니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침에 알람 없이 눈을 떴고 이불에서 뒤척거리는 법을 몰랐다. 그는 늘 정해진 시간에 무엇을 했다. 학교에 갔다가 아이들과 놀고는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숙제를 했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훈련을 하고 강의를 들은 후에 미래를 이야기 하며 잠이 들었다. 그가 그대로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군인이 되었었더라면 변한 것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비행기를 몰고 정해진 시간에 잠이 들었을 것이었다.

 나다니엘은 한번도 그런 것들에 의문을 품어본 적 없었다. 이따금 특무부의 훈련이 끝나고 난 뒤에, 막스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티비를 켜는 것과 샤워를 하는 것, 집에 전화를 하고, 잠이 드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 나다니엘을 약간 서운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에 깊은 생각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심심하다거나 지루하다는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나다니엘은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혼자 집에 돌아와 텅 빈 집안에서 멍하니 작은 뉴스소리만 들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을 때에도 그것에 외롭다는 말을 써야한다는 것을 몰랐다. 나다니엘이 알고 있는 외로움은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나온 퍽퍽한 문학에서 읽은 것과, 언제쯤 돌아오니 나단? 이라고 말하는 알리사의 목소리에서 추측해낼 수 있는 것들이 전부였다. 나다니엘은 처음부터 혼자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익숙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집어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그런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남자는 쉽게 기분이 좋아졌다가는 쉽게 우울해했다. 쉽게 기뻐했다가 쉽게 초조해했고, 쉽게 불안해했다. 한참을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면 잠시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다시 목에 힘을 주고 일어나 나다니엘의 어깨를 두드리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다채로운 감정들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다니엘을 쉽게 흥미롭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다니엘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들을 앉아 말없이 관찰하고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거나, 그가 재잘거리는 사이에 식탁에 차려진 밥을 먹었다. 혼자 사는 집에서 나다니엘이 겨우 할 줄 아는 것은 마이크로 오븐에 인스턴트 식품의 한 귀퉁이를 찢어 넣고 돌리는 것 뿐이었고, 마이크로 오븐에서 갓 꺼낸 음식에서는 차가운 김이 흘러나왔다. 음식들은 약간 눅눅했고, 나다니엘의 입에는 그것들이 아주 짰다. 
 막스는 마치 알리사가 그러듯 정성들여 요리를 했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꼭 그래야하는 것처럼 나다니엘의 이름을 부르면서 활짝 웃었고 나다니엘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헤메이기 전에 흔쾌히 그와 함께 걸었다. 나다니엘은 한 번도 그런 것에 의문을 품어 본 적 없었다. 침대 곁은 늘 비어있었고, 나다니엘은 그런 것에 칭얼거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쉽게 기분이 좋아졌다가, 쉽게 우울해했다. 쉽게 초조해하고 쉽게 가슴아파했다. 상처를 보며 울음을 터트렸을 때조차 그랬다. 나다니엘의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붕대를 풀렀을 때 보이는 흉터는 그리 흔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잘 단련된 복부 한 가운데 쓰여 있는 알파벳은 결국 쉽게 마음 아파하는 남자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를 악물고 울지 않는 표시라도 내려는 듯 했지만 나다니엘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말 수가 적은 나단이 아주 잘 하는 일 중의 하나는 누군가를,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었다. 손등과 풀어진 위에 번지는 물자욱을 보면서 나다니엘은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막스를 안았다. 왜이래. 이거 풀어. 놔. 나 안울어. 품 안에서 몸을 뒤트는 몸짓에 나다니엘은 약간 웃었다. 

 “나 환자야.”

 마른 몸을 비트는 대신 조용히 불리는 이름에 나단은 좀 더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웃었다. 나단. 나단. 가끔 나다니엘은 막스가 몇 살인지 잊어버리곤 했다. 아니 나다니엘은 쉽게 막스의 나이를 잊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곁에 있었고 그의 나이보다는, 그가 움직이고 말하는 것들이 좀 더 나다니엘에게는 중요했다. 금세 기뻐했다가 우울해하고, 초조해하고 걱정하다가 금세 또 씩씩하게 제 팔목을 잡아 끄는 것들이 더 중요했다. 나다니엘은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우는 것을 달래기 위해 안고 있었던 마른 몸을 좀 더 당겨 안았다. 이따금 제게 그 많은 음식과 요리를 먹이면서도 마른 것이 호기심처럼 자리매김 하고는 했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쉽게 모든 감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람이니까, 쉽게 떨고, 쉽게 무서워했을지도 몰랐다. 나다니엘은 결국 아주 드물게, 아주 드물게 내는 목소리로 목청을 울려 나지막하게 웃었다.

 “울지마.”

 색이 엷은 제 곁에 있으면 좀 더 짙은 색으로 보이고는 하는 갈색 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두 어깨를 잡아 안겨있던 몸을 떼어냈다. 빨갛게 번진 갈색 눈동자를 보다가 그마저도 조용히 웃어보였다. 아주 익숙한 생활이 이따금 아주 조금씩 이상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같은 자리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이, 눅눅한 김이 오르는 피자를 들고 조용한 외곽의 아파트 가운데 앉아 듣는 티비 소리가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나다니엘은 품 안에서 우는 남자의 빨갛게 번진 눈을 보고 나서야 겨우 익숙한 것들이 익숙하지 않게 변해가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익숙한 것이, 익숙하지 못하게 될 때는 다른 것이 익숙한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새롭게 익숙해지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침대 맡이 어쩐지 지나치게 고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남자의 탓이었다. 커튼을 걷었을 때 몸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다가 문득, 상처가 난 몸으로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우두커니 앉아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도 막스의 탓이었다.
 악물었다가 놓은 것처럼 발갛게 변한 입술을 바라보다가 나다니엘은 조금 더 웃었다. 힘없이 늘어진 두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알리사가 어린 나다니엘의 이마에 남겼듯, 가벼운 입맞춤을 입술 위에 남겼다.

 “이제 울지마.”

 막스는 쉽게 놀라고, 쉽게 울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은 지켜보기에는 심심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다니엘은 그가 우는 것이 싫었다. 곁을 비집고 들어와 익숙하게 자리 잡았을 때 나다니엘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몰랐지만 막스는 천천히 기다렸다. 늘 하는 만큼 점심을 먹고 저녁식사를 초대했다. 나다니엘은 스스로 자라는 아이였다. 정해진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들에, 정해진 만큼의 사랑과 무미건조한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에는 또 다시 자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다니엘은 정해진 양 만큼의 것들, 흘러넘치지 않는 것들에 익숙했다.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에 조차도 그랬다. 그는 상냥하고 온화했지만 그런 것들을 배우는 데는 아직 미숙했다. 

 “괜찮아 이제.”

 나다니엘은 막스를 안심시키듯 충혈된 눈가를 굳은 살이 배긴 엄지로 쓸고 웃었다. 좋아해. 나다니엘은 아주 쑥스럽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웃었다. 미숙한 감정을 미숙하게 표현해야했지만 그래도 쉽게 놀라고, 쉽게 초조해하고, 쉽게 걱정하는, 마음이 여린 남자가 울음을 그치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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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d of sea

 
  훈련과 실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위협과 긴장감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은 익숙하게 벼려진 동작들이었다. 나다니엘은 팔뚝까지 걷고 있던 셔츠의 소매를 내려 버튼을 잠그고 방탄조끼를 입었다. 두 대의 총과 나이프 하나. 복도 어귀까지 달려나왔을 때 그는 세스와 마주쳤고, 플라스틱 통 안에 담긴 포도당 캔디를 건넸다. 
  그들에게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고 홀에 들어서자마자 나다니엘은 후퇴하는 마루들 사이에서 보았던 익숙한 남자를 발견했다. 벽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나다니엘은 적어도 처음 보고 있었다. 아니 건물이 허물어지는 광경이라면 9.11테러가 그의 기억에 남아있었지만 철판들이 우그러져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의 사이에는 벽들이 내려 섰다. 세스와 루이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나다니엘은 남은 마루를 바라봤다. 독대를 위한 벽 처럼 그들은 모두 서로가 벽 안에 갇혀있었다. 마루의 머리칼은 짙은 갈색이었고 마루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그는 인간과 달라 보이지 않았고 나다니엘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것 처럼.



  그리고 나다니엘은 마루의 파란색 눈과 마주쳤을 때 바다를 떠올렸다.
  나다니엘 가렛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마루에게 그는 살의나 증오같은 것을 가지기엔 조금 유순한 축에 속했다. 군에서의 살상훈련과 임무의 수행 도중에도 나다니엘이 온화함과 거리가 먼 것들을 익숙하게 견디게 한 것은 그의 타고난 기질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한다고 태어날 때부터 배운 것들을 위해 완전히 정당하거나 옳지 않은 일도 어느 정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나다니엘은 마루의 파란색 눈과 마주쳤을 때 바다를 떠올렸다. 그에게는 마루의 눈을 보고 살의나 증오 같은 것을 느낄만한 그 어떤 평범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적어도 그 마루와 나다니엘이 한번쯤 전장에서 마주쳤더라면 나다니엘은 좀 더 기민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에 대한 입장을 견고하게 쌓았을지도 몰랐다. 유순하고 상냥한 그의 기질들을 덮을 수 있게 하는 것들은 그가 인정할 수 있는 상부에서 하달된 그러한 공적인 것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마루에 대한, 또는 전투에 대한 그런 것들이었다. 나다니엘은 아주 날렵하게 마루에게 총을 겨눈 뒤에, 마루의 바다색 눈과 마주쳤고 그리고 바다를 떠올렸다.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기억 중의 하나였다. 나다니엘의 삶에서 그가 사람의 얼굴 만큼 자주 마주친 광경 중의 하나는 바다였다. 스무살의 나다니엘 가렛은 비행기 위에 올라 발치에 융단처럼 깔린 바다 위를 날았고, 열여덟의 여름에는 그의 동기들과 해변에서 훈련을 했으며, 열다섯에는 해변의 농구 코트와 비치발리볼 코트에서 온 몸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그의 기억은 지독한 감기로 해변으로 놀러가지 못했던 열 살의 방을 지나, 일곱 살의 해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나다니엘은 일곱 살의 발치를 적시던 파도를 떠올렸다. 마루와 그의 발이 일직선이 되도록 멈추어 섰을 때 나다니엘은 모래사장을 짙은 색으로 적시고 뒤로 달아나면서 발목을 휘감던 파도를 기억했다. 파도는 그가 짐작하는 것 보다 빨랐고 나다니엘은 두 팔을 펼쳐 중심을 잡았다. 파도는 나다니엘이 짐작하는 것 보다 빨랐고, 그가 알아차리는 것조차 기다리지 않았다. 마루의 눈은 신중하게 나다니엘을 바라봤다.
  나다니엘은 두 팔을 펼쳤듯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쳤다. 총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그렇듯 자신의 걸음을 셀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자신의 몇 걸음을 걷는지도 나다니엘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 빠르고 약한 물살이 발목을 맴돌면서 그를 멈추어 서게 했다가 다시 끌어당겨 걷게 했다. 나다니엘의 발목에서 물살이 빠져나갔을 때 마루는 나다니엘의 팔목을 잡았다. 물살은 뒤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가 하얀 거품을 일며 다시 덮쳤다. 발목을 낚아채는 파도에 잡혀 몸이 무너지는 순간 마루의 어깨가 몸을 받쳤다. 나다니엘은 졸음처럼 몸을 덮치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떠올릴 것이 없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의 목숨을 위협당한 기억도, 주변의 누군가가 목숨을 잃은 기억도 없었다. 나다니엘은 자신의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을 몇 가지의 기억에 의존해 깨달았다. 그가 심하게 고열을 앓았던 독한 감기에 걸렸을 때의 지독한 수면제가 들어있던 약이나, 사관학교에서 온 몸을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지옥 같은 훈련을 하고 난 뒤의 몸과 비슷했다. 미약한 신경들만이 남아 그의 뇌를 움직였다. 나다니엘은 아주 느리게 눈을 깜박였고 등 뒤에서 마루의 손이 방탄조끼의 매듭을 뜯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운 금속이 가슴 위를 긁었다. 나다니엘은 마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에 휩쓸려 부표가 떠오른 해변의 끝까지 쓸려갔을 때 겨우 목만이 물만으로 나와있는 것처럼 나다니엘은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자신이 물에 휩쓸린 적도, 물에 휩쓸려 죽을 뻔 했던 경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숨을 헐떡였다. 입 안으로 자꾸 물이 밀려 들어왔다. 그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고 옆구리가 뜨거웠다. 제대로 악다물리지 못한 어금니 사이에서 힘겹게 외마디를 뱉었다. 나다니엘은 피곤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칼날은 좀 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졸음이 밀려와 마루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겨우 몸을 지탱하는 동안 마루는 자장가를 부르듯 쉬, 쉬, 하고 나단을 달랬다. 희미하게 밀려오는 졸음 속에서 몸에 박혀있던 차가운 칼날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나다니엘은 아주 독한 감기약을 먹은 사람처럼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루는 공들여 허리를 숙였다. 나다니엘의 눈커풀이 느리게 완전히 감길 때 마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몸은 금방 잠에서 깬 사람 처럼, 금방 다시 잠에 들기라도 할 것 처럼 무겁고 지쳐있었는데에도 고동소리만이 조금씩 빨라지면서 그의 의식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으려고 애썼다. 나다니엘이 가쁘게 숨을 내쉴 때 마다 그랬다. 고동이 빨라질수록 손끝이 저려왔다. 마루의 눈은 이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루의 그림자 때문에 마루의 얼굴은 그의 파란 눈동자보다도 갈색 머리칼 끝만이 하얀 빛처럼 보였다. 나다니엘은 지친 가운데에서 눈이 부셨고 마루는 나다니엘의 셔츠 단추를 톡톡 칼로 끊어내고 피에 젖은 셔츠를 손으로 열어 젖혔다. 그는 일부러 자신이 잠들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나다니엘이 졸음 속에서 겨우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그것 뿐이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이 잠들지 않도록 만들었다. 마루의 눈동자는 마루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마루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빛처럼 마루의 파란 눈동자는 마루의 눈동자가 있는 곳에 박혀있었다. 나다니엘은 검은 색으로 보이는 그 눈을 따라 느리게 눈동자를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바다를 찾았다. 목 깊은 곳에서 갈증이 일었다. 몸 안에 있는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다니엘은 이제 단순히 전보다 검어진, 그림자로 검게 물들어 보이는 마루의 손을 보면서 자신의 몸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단은 시야 위로 천천히 들어올려져 곧 마루의 손 안으로 사라진 군번줄을 바라봤다. 
  나단이 그 뜻을 셈하기도 전에 마루는 웃었다. 

  “안녕 나다니엘”

  일어나 네이트. My mate. 나다니엘은 누군가가 그를 네이트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나다니엘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것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심하게 갈증이 일었다. 마루는 무릎을 꿇고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미 온몸의 통각이 마비된 것 같았는데도 나다니엘은 서늘함을 느꼈다. 칼날이 복부 위를 긁어 나갈 때 나다니엘은 바다 위에 떠오른 부표처럼 두 팔에 힘을 떨치고 흐리게 번지는 눈으로 마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귀까지 물이 찬 것 같았다. 이제 정말 가라앉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때 마루는 굽혔던 무릎을 펴며 일어났다. 심장이 뛰었다. 마루의 손에 들린 칼날 끝에서 떨어지는 피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마루의 얼굴이 녹아내렸다. 
  나다니엘은 그것이 세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루는 좀 더 나다니엘의 곁에 서있었고, 앳된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다니엘은 눈커풀을 감은 채로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내는 감각 속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귓가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얼굴 위를 덮쳤다. 통각과 피함이 천천히 밀물처럼 빠져나가는 가운데에서 나단은 얕은 물 속에 잠겨있었다. 다시는 뜨이지 않을 것 처럼 감긴 눈커풀 아래에서도 의식은 가느다란 실처럼 아주 오랫동안 나다니엘을 붙잡았다. 나다니엘은 느리게 팔을 들어 상처가 새겨진 자국 위에 손을 올렸다. 

  나다니엘은 평범한 남자들 중의 하나였다. 갈색 머리나 색소가 옅은 눈 같은 것들은 그를 분별하게 해주는 수많은 특징들 중에 하나나 두가지에 불과했다. 그는 키가 컸지만 그만한 키의 남자들은 미국 도처에 깔려있었고, 중학교시절의 농구팀에서는 그다지 큰 축에도 속하지 못했다. 나다니엘은 그 뒤로도 성장했고 고등학교 때는 교내 농구팀과 미식축구팀에게서 제의를 받았지만 이내 그것들에 흥미를 잃었다. 그는 또래 보다는 약간 영민했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무언가를 주장하는 데는 그렇게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영리함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흥미로 약간 반짝이는 눈이나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에서 영리함보다는 온화함으로 비추어졌다. 그는 평범한 남자들 중의 하나였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다니엘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주 적었다. 

  나다니엘은 이제 처음으로 자신이 죽을 뻔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발밑에 융단처럼 깔린 새카만 밤하늘에서 조차 한 번도 나다니엘은 그런 것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든 폭풍의 눈 앞에 있을 수도 있었다. 나다니엘은 물 속에 잠겨 하늘을 생각했다. 나다니엘의 팔은 뻗어있었고 그는 균형을 잡는 것이 나는 것만큼이나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다니엘은 실처럼 희미하게 이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 물에 비쳐드는 불빛처럼 굴절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빛에 의존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에 잠겨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융단 같은 도시를 떠올렸다. 도시의 집과 건물들과 학교와 공원, 초목과 점같은 인파들은 잘 짜여진 페르시안 태피스트리처럼 보였다. 나다니엘은 복부에 새겨진 상처를 따라 손가락으로 천천히 상처를 더듬었다. 상처는 공들여 짜여진 태피스트리의 무늬 같았다. 나다니엘은 천천히 잠들었다. 

  이제 겨우 그는 몸에 표식이 남았음을 알았다. 겨우 하나의 상처였다. 그가 선택한 것들이 녹아든 하나 였다.

with Valium

mission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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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

Back

 
나다니엘은 시간에 맞춘 일과에 익숙했다. 그보다는 스스로 게을러지지 못하는 사람 쪽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시간에 출근했다. 출근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건 작은 접전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훈련장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총기를 손질하고 과녁을 한참이나 노려보는 연습을 한 뒤에 체력을 단련하는 정도가 다였다. 나다니엘은 제법 스스로 정해둔 시간 내에서 움직였고 사격장에서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주변에 사람이 많거나 적어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종종 사람이 없는 시간에는 세스 테일러와 마주쳤다. 마치 사람이 드문 시간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세스는 드물게 총성이 잦아드는 시간에 사격장에 들어왔다. 나다니엘은 이따금 그와 마주쳤다. 익숙하게 단련된 어깨가 뻣뻣하게 당겨올 때 쯤 너덜너덜해진 과녁을 보다가 시선을 돌리면 세스 테일러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총을 손질하고 어깨를 펴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나다니엘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만큼 많은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종류의 사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에 붙임성 좋은, 사교성에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특무부에 들어온 뒤로 꽤 오랫동안 데면데면한 사람의 하나로 훈련장만 배회했던 것을 보면 그보다는 더 쉽게 나단이 사람관계에 익숙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거쳐 온 인간관계들은 대부분 주어지면 해내야하는 팀워크에 가까웠고, 사관학교는 그의 그런 기질들을 좀 더 군대에 알맞은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나다니엘은 속을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사람과도 팀을 이루고 작전을 명령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드문드문 마주치더라도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붙여야하는지 몰랐다. 나다니엘이 세스를 관찰한 것 보다는 더 적은 빈도로 세스는 이따금 가볍게 고정된 과녁으로 몸을 풀고 움직이는 것들을 향해 총을 쏘는 나다니엘을 바라봤지만, 나다니엘이 그런 시선을 눈치 챌 정도가 되면 이내 다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단이 세스에게 말을 건 것은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그가 말 수가 없는 자신의 성격을 돌이켜보아서도, 데면데면한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내키지 않는 자세로 총을 들고 있는 세스의 옆 모습이 불안해 보였을 뿐이었다. 
  “다른 훈련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나다니엘의 목소리에 세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나다니엘의 목소리는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낮았고,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으레 그렇듯 날카롭지 않고 모나지 않았다. 불쑥 말을 걸어도 누구도 놀라지 않고 천천히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느리게 훑어볼 수 있는 목소리였다. 세스 테일러는 말 없이 총을 바라보다가 다시 과녁에 시선을 두었다. 팔은 좀 더 들어올리는 편이 좋아요. 일직선으로. 나다니엘은 하릴없이 말을 덧붙였다. 새삼스럽게 나다니엘이 말을 건 이유는 딱히 다른 이유가 있기 보다도 그가 동료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다니엘은 적어도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누군가를 도울 의향이 있었다. 그의 눈에 세스 테일러는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으나 도움을 원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다니엘은 평소처럼 익숙한 하루를 보내고 버스로 두세정거장은 되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나설 때도, 집으로 돌아갈 때도 그랬다. 나다니엘은 오랜 시간 걷는 것에 익숙했고 타인의 생각보다도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따금 아침 산책을 나선 노부부와 강아지나 유모차에 앉은 어린아이들도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시선이 머무르게하는데는 충분히 풍족한 자극이었다. 나단은 그 날 드물게 사격장에서 세스 테일러를 만났고 어딘가 들뜬 것 같은 표정, 뺨이 미세하리만치 붉다거나하는 것들에서 늘 내켜하지 않는 세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림짐작을 하긴 했지만 그게 큰 문제가 될거라는 생각은 적어도 하지 못했다. 나다니엘은 제법 훈련을 마친 뒤였고, 사격장에서 돌아나오며 유리 창 너머로 세스의 등을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쉽게 그와 다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다니엘의 아파트는 바로 근방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교통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세스는 정류장 벤치에 앉은 채로 숨을 몰아 쉬고 있었고, 나다니엘은 그가 버스에서 내린 채로 그곳에 앉아있었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테일러?”

  나다니엘의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든 세스를 바라보며 나다니엘은 붉게 열이오른 얼굴과 뭐라고 대답을 하려다가도 꽉막힌 채로, 숨이 기도를 통과하는 것조차 힘든 것 처럼 색색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그를 바라봤다. 사격장에서도 어쩐지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는데. 나다니엘은 목이 아플 것 처럼 올려다보는 세스 테일러를 보다가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전 보다는 조금 세스의 고개가 덜 젖혀졌다. 나단은 크고 투박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테일러.

  “많이 아파요?”

  나다니엘은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 처럼 오랫동안 무릎을 조금 굽힌 채로 세스의 앞에 서있다가 자세를 낮춰 등을 보였다. 무거울 텐데. 꽉 잠긴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된통 앓고 있는 태가 났다. 사십키로가 넘는 등집을 지고 가는 행군도 일년에 두어번은 있었다. 쉽가리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아픈 마당에 그게 그렇게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고 그 거리를 걸어갈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면 더욱 그랬다.
  나다니엘은 제법 키가 큰 남자를 등에 업고 무게를 견디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 눈에 꽤 이상한 광경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짐을 지듯이 어깨에 매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었다. 
  나다니엘은 특무부 발령이 결정 된 뒤에 근방에 비교적 빨리 플랫을 잡았다. 아파트는 미음자 형 구조로 밖을 둘러 복도가 나있었고, 베란다 창을 열면 네모모양으로 가둬진 잔디밭에 세발자전거나 통학용 자전거 같은 것들이 세워져 있었다. 아파트는 좀 낡았지만 그런대로 쓸만 했고, 채광이 좋았다. 나다니엘이 고작해야 그 아파트에 오후 내내 머무르는 날은 주말뿐이었기 때문에 아침 채광이 좋은 것과, 부엌이 크지 않아 공간이 넓다는 것.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아서 허전하지 않다는 것들은 나단이 아파트를 고른데 꽤 좋은 이유들이 되었다. 세스 테일러는 얼마 후에 그 아파트로 이사왔다. 나다니엘이 뜰 쪽의 커튼을 열면 바라볼 수 있는, 건너편 아래층에.
  나단은 세스의 이삿짐을 옮겨주며 가봤던 문 앞을 익숙하게 찾았다. 열 때문에 어딘가 혼미한 듯한 세스에게 물어 문을 열고 침대에 업고 있던 몸을 눕혔다. 세스의 열과 옮기는 동안 흐른 땀으로 셔츠가 젖어서 등에 한기가 들었다. 나단은 라디에이터를 틀어 온도를 높였다.

  “약은..?”
  “식탁 위에.”

  나단은 물 컵과 약을 함께 건네고 그가 잠들기까지 기다렸다. 그가 잠든 뒤에도 집에서 나가지 못한건 그냥 자신이 나간 뒤에 안에서 문을 잠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다니엘은 세스와 같은 공간에서 그가 자는 걸 지켜볼 만큼 서로가 친근하지 않은 사이란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집을 나선 뒤에 문이 열려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나다니엘은 세스의 텔레비전을 함부로 켤 수도 없었고,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하루를 재미없게 같은 식으로 보내는 만큼 여유가 되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나단은 두어 시간 뒤에 세스가 일어날 때까지도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따금 밖에서 자전거 벨이나 차가 지나가는 작은 소음이 들렸고, 세스가 뒤척이는 동안 이불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시간은 길고 무료했고 나다니엘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세스의 주방은 자신의 것 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식기가 많았다. 해가 거의 다 져서 누런 빛이 사라지고 희미한 청보라색으로 어둑해졌을 때야 깨어난 세스를 보고 나다니엘은 코트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잠그고 자요 테일러.”
  “고마웠어.”

  나다니엘은 입 근육과 눈을 움직여서 느리게 표정이 번지도록 웃었다. 달칵, 하고 등 뒤에서 문고리가 걸어잠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나단이 침대 옆 커튼을 걷었을 때, 익숙한 창문에서 익숙한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나단은 그 창문이 세스의 집 창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느리고 과장되지 않게 손을 흔드는 사람을 보곤 아침이 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천천히 웃었다.



  그 뒤로 세스는 곧 잘 잠들었다. 나단은 비교적 일찍 잠들었고 침대 맡의 스탠드도 켜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밤 새 창문 너머에서 세스가 어떻게 밤을 보내는지 알진 못했고, 세스는 밤이면 잊지 않고 커튼을 쳤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세스는 그래도 곧 잘 토막잠을 잤다. 둘은 모두 말이 없었고 나단은 말이 없어도 편한 세스와 같이 있는 것도 편했다. 나단은 이따금 사격장이 아닌 휴게실 같은 곳에서 세스와 마주쳤다. 둘은 서로 말이 없었고, 굳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세스는 나단이 곁에 있으면 종종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나단은 군복 대신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재킷이나 코트를 잠든 세스에게 양보했다. 나단은 가쁜 숨이 천천히 돌아올 때 까지 느긋하게 수분을 채우며 몸을 쉬었고 세스는 모자란 잠을 채웠다. 나단은 세스를 이제 세스라고 불렀다. 테일러보다는 좀 더 편안한 어감이었다. 


with S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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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 table


 손에 입은 화상으로 막스는 꽤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손이 아니라 한손으로 자신의 붕대를 갈거나 고쳐 매는 것은 제법 어려운 일이어서 나다니엘은 이따금 그가 보일 때 마다 붕대가 제대로 묶여있는지 확인하고 매듭을 고쳐매어 주거나 상처를 소독해 주긴 했지만 상처를 가만히 두기 어려운 부위인 만큼 회복은 더뎠다. 사격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총을 제대로 잡기 위해 손바닥의 근육에 힘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편이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더 세게 쥐어.”

 뭐라고? 막스가 뒤를 돌아보면서 헤드셋을 벗었을 때 나다니엘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좀 더 세게 쥐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상처가 여태 다 아물지 않은 손으로 그래봐야 헛일이었다. 스스로 있는 힘껏 쥐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몸이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제어할 수 있는 범위가 적었다. 심지어는 군인들조차도 접질린 발목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뛰지 못하는 법이었다. 뒤에서 캐롤이 보고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뭐라고 했어? 나다니엘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을 보다가 총을 들고 있는 막스의 팔을 그대로 직각으로 들어올렸다. 붕대가 감긴 채로 총을 들고 있는 손을 바라보다가 방아쇠에 걸려있는 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손가락위에 손을 겹쳐 손 전체로 감아 꽉 쥐었다. 

 “야. 야..! 아프잖아!”

  나다니엘은 키만큼 손이 컸고, 보이는 만큼 악력이 셌다. 나단이 손을 떼자 마자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린 채로 거의 총을 놓치다 시피 한 막스를 보다가 나단은 얕게 숨을 내뱉었다.

 “어깨 나가.”

 막스는 순간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는 점을 지적받아서 조금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것같았다. 총을 제대로 쥐지 않은 채로 그런 훈련만 더 했다가는 반동도 제대로 견디지 못해서 어깨부터 상했다. 나다니엘은 손 끝에 아슬아슬 하게 걸린 총을 잡아 사격대 위에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뭐? 왜?”

 나다니엘은 쥐었다 폈다를 수차례나 반복하는 바람에 매듭부터, 붕대가 감긴 모양까지 죄다 흐트러진 손과 막스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나다니엘은 말이 적었다. 말 보다는 몸짓으로 눈이나 손짓으로 이야기하는 쪽이 편했기 때문에 눈을 바라보자마자 금세 알아챈 표정을 하는 막스도 편했다. 나다니엘은 헝클어진 매듭을 풀고 여전히 검붉게 아물지 않은 상처를 바라봤다. 손바닥의 주름과 결대로 상처가 아물지 못한 자욱들이 눈에 띄었다. 훈련을 적어도 몇 일만 쉬었더라도 상처는 좀 더 금방 아물었을 텐데. 과녁은 중심에서 빗겨나간 자리에만 서너차례 총알에 꿰뚫린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좀 더 쉬어.”

 나단은 피가 통할 정도로만 상처를 빠듯하게 동여매면서 말했다. 막스는 대답 대신에 나단이 감은 붕대가 감긴 손을 두어번 쥐었다가 폈다. 드물게 대답이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단은 작게 웃었다. 밥 먹자. 익숙한 말이었다.



 점심은 훈련소 내의 식당이나 근처에 나가 먹었다. 막스는 나단에게 밥을 먹이는데 뭔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나단에게 밥을 먹이는데 책임감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사람과 어울리는데 익숙하지 않은 탓에 처음 특무부에 들어와서는 데면데면하고 어색한 얼굴로 혼자 훈련실과 식당을 배회했지만 막스는 점심시간이 되면 익숙하게 나단을 찾았다. 비슷하게 훈련한 날은 그대로 같이 가는 일도 더러 있었다. 처음에는 훈련소 내의 식당에서, 그 뒤는 주변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다가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막스는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맛있는 곳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단은 원래부터 주는 대로 잘 먹는 사람이었고 막스는 나단을 먹이면서 뿌듯해했다. 이따금 막스가 엄마만큼 뿌듯한 표정을 지을 때 마다 나단은 먹던 수저를 멈추고 말해줄까 생각했지만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평소에는 동갑내기만큼이나 팔랑거리고 돌아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밥을 먹일 때만은 유독 형처럼 굴었다.
  나다니엘과 마트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집을 나온 뒤에는 대부분 식단에 익숙했기 때문에 요리와 친해질 계기가 한번도 없었던 나다니엘은 특무부 근처에 플랫으로 이사를 간 뒤에는 그나마 마이크로오븐을 다루는 법 정도는 몇 번의 실패 끝에 깨닫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주방 용품이 없었다. 유일하게 해먹을 줄 아는 토스트와 후라이조차도 불 조절을 실패해서 출근길에 샌드위치를 사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실 나중에는 거의 가스오븐을 쓰는 것을 포기했다. 드물게 저녁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면 피자나 정크푸드, 차이니즈 팩이나 샌드위치, 거기에 흔히 살 법한 칩포테이토 과자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주로 외부 음식들은 나단의 입에 짰고 몸에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카트 안에 과자와 인스턴트 미트볼, 카레 같은 것들을 담았다가 마트 한가운데서 막스에게 걸려 혼난 이유는 나단이 할 줄 아는 요리가 정말로 하나도, 하나 조차 제대로 없어서였다.
니가 먹겠다고 산거야? 막스가 질린 표정으로 말하면서 싱글벙글 웃던 얼굴을 일그러트렸을 때 나단은 혼나는 개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달리 아니라고 할만한 요령도 없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단을 보다가 막스는 보기 드물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은거 다 제자리에 놓고 와. 나단이 별 대책 없이 담았던 냉동식품들을 차례로 나란히 옆에서 옆 냉장고로 건너가며 제자리에 돌려놓고 왔을 때에서야 막스는 여전히 안좋은 표정으로 나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냥 우리 집 가서 먹자. 

 나다니엘은 셔츠의 소매를 걷고 세제로 식기를 거품 내어 닦고 물로 헹구어 차례로 곱게 포개어 놓고 물기를 수건에 닦았다. 나다니엘은 주는 대로 잘 먹었고 막스는 결국에는 그럼 자기가 좋아하는 걸로 식단을 차려줬지만, 나단은 그것도 잘 먹었다. 입 안에 얼얼해질만큼 짠 정크푸드에 비해서 나단에게는 이쪽이 훨씬 배가 부르고 속이 편했다. 대개 군에서 주는 식사들은 간이 안맞았고 입이 심심할만큼 싱거웠다. 막스가 저녁을 준비해주면 나단은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뒤에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 돌려놓았다. 최소한 나단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서 진하게 탄 커피를 홀짝거리는 막스를 바라보다가 물이라도 꺼낼까 냉장고를 열었을 때 나단은 짐짓 익숙한 케이크 상자를 보고 몸을 굳혔다. 고작 한 박스에 여섯 개 들이 컵케이크였지만 지금까지 남아있을 만큼 많은 양은 아니었다. 적어도 하루에 하나, 아니면 두 개. 나다니엘이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뒤를 돌아봤을 때 막스는 약간 당황한 눈빛으로 눈을 피했다.

 “컵케이크 안 좋아해?”
 “음, 아니야 나단. 아, 아껴먹으려고 그런거야. 아껴먹으려고. 너무 예뻐서 아껴먹느라고 그런거야.”

 나다니엘은 재색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잽싸게 커피컵을 입으로 가져가는 막스를 바라봤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같았다. 노트 구석에 만화를 그리다가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지적당한 학생처럼.


with 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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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01.
 나다니엘은 힘차게 달렸다. 강인하게 단련된 그의 몸이 있는 힘껏 달아올랐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폐가 찌르듯이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계속 달렸다. 활주로는 아주 길고 그에게는 달려야할 길이 더 많이 남아있었다. 비행장은 늘 아주 평탄하고 아름다운 평원과 맞붙어있었다. 밤이 되면 비행장에는 별빛이 나렸다. 관제탑의 붉은 등이 깜박일 때마다 철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때로 잔디 짙은 평지에서 귀뚜라미나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밤새도록 빈 공터를 울렸다. 나단은 비어있는 조종석을 상상했다. 머릿속에서 나다니엘은 어두운 밤하늘을 날았다. 비행기에는 두 대의 미사일과 열여섯 대의 폭격포 대신 수 많은 우편물이 실려 있었다. 나단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그 순간처럼 있는 힘껏 달렸다. 그는 종종 그가 이렇게 달리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떠오르지 않을까 상상했다. 두 팔을 옆으로 펼치면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야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탓에 찢어질 것처럼 가쁘게 움직이는 폐가 부풀어올라 가슴을 내밀었다. 가쁘게 할딱이는 숨이 따갑게 목을 죄어왔다. 


02. 
 나다니엘은 그가 얼마나 본능적인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관하여, 또는 그를 다룬 그 어떤 이론 이를 테면 프로이트나 제임스, 로저스 같은 학자들의 이름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그는 태생적으로 그가 타고난 것을 인정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온 힘을 다 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은 몰랐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본능적인 것들로, 그가 누군가를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때로 몇몇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운명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법이었다. 누군가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신의 말을 전해야하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타인을 사랑해야했다. 그것은 그들이 타고날 때부터 마치 몸에 새겨진 점처럼 단순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그들의 태생에 관해 두각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은 피아노를 치거나, 배우지 않아도 색을 섞을 줄 알았고, 천사들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고, 누구보다 먼저 발벗고 나서 남을 도울 줄 알았다. 때로 몇몇 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운명을 부여받았을 때, 나다니엘은 그 중에 속해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를 지키는 법을 알았다. 그것은 때로 이층에 자신의 놀이방이 있는 좁고 작은 세 식구의 집이었다가, 하이디의 컵케이크 가게였다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거나, 때로는 한쪽 팔을 잃은 여자였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의 본능 속에 있었다. 그는 누가 명령하거나 부탁하기도 전에 자신이 무언가를 지켜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03.
 놈들은 지하 통로를 지나서 올거야. 
모서리에 도착하면 뜸을 들이고 기다려. 둘은 총을 준비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다니엘과 루이스를 돌아보았다. 레이에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능력이 있었다. 모서리에 도착하면 그 뒤를 바라봐.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남자는 그 상황에 아주 익숙한 것처럼 천천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희미한 인상을 가진 얼굴이 조금 웃었다. 

위치로.

남자는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워보였고 사실이 그랬다. 나다니엘은 이따금 곁에서 전화를 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교수님은요?. 아니오. 연구는 끝났어요. 강의가. 곧 들어갈게요. 먼저자요. 남자는 남과 잘 어울렸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그가 예지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앞으로의 일을 그림처럼 설명하는 그를 보며 처음으로 알았다.


04. 
 “희망이라는 단어를 아나?”

 나다니엘의 교관은 언뜻 평범한 스무살 후반의, 또는 서른 초반의 남자였다. 나다니엘은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 없었음으로 그가 몇 살인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짙은 블론드는 길거리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흔했고 당장 티비만 틀어도 수십명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색이었다. 오로지 남자가 타고난 깊고 짙은 녹색의 숲만이 나다니엘에게 그가 한 번도 본적 없는 다른 곳을 그리게 만들었다. 나다니엘은 태어나 한 번도 빽빽한 침엽수립을 본 적 없었다. 그가 가까웠던 것들은 잘 닦여진 도로들과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활주로와 활주로를 둘러싼 드넓은 평원이었다. 남자의 이름이 이든Eden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다니엘은 에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가 희망에 대해 품는 의문에 대해 생각했다. 나다니엘은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타고난 사람 중에 하나였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보는 영상들과, 능력과, 노력으로 무언가를 개척해야하는 수 많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남자의 눈은 침엽수림의 깊이만큼 빛났고 나다니엘은 거기에서 순록의 무리처럼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긴 겨울을 발견했다. 남자의 블론드와, 뺨 위에 불거지는 주근깨와 일견 낙천적으로 보이는 성격들은 그를 캘리포니아나 플로리다와 같은 남쪽 지방 출신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만들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는 기묘한 무기력함이 있었다. 
 나다니엘은 남자의 질문을 곱씹었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있었다. 나다니엘은 자신보다도 훨씬 총을 쏠 줄 모르는 교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했다. 한 손으로 사격하는 일반인은 흔치 않았지만 남자는 두 손으로 총을 받쳐 들고도 심하게 손을 떨었다. 자주 지독하게 긴장했던 것처럼. 나다니엘은 그가 지키는 사람protector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의 내면에서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어떤 것을 생각했다. 총을 쏠 줄 모르는 훈련 교관. 나다니엘은 그가 어떤 것으로 어떤 것을 지켜냈는지 가늠했다. 나다니엘의 눈이 남자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을 때 그는 약간 웃었다. 그를 조금 더 어려보이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아나? 나다니엘은 별빛이 내려앉은 활주로를 떠올렸다. 멀리에서 관제탑의 붉은 등이 천천히 깜박였다. 따듯한 낮이 지나고 급격하게 기온이 가라앉은 밤이 되면 땅 위에는 차가운 밤안개가 내려앉았다. 밤안개란 가로등불 아래에서도 잘 보이지 않아서 축축하게 내려앉은 습하고 차가운 물방울과 습기의 냄새를 얼굴로 맞닥뜨리지 않으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종류의 것 중에 하나였다. 활주로를 일렬로 둘러싼 밝은 조명 위에서 밤안개는 무대 위의 연기처럼 묽은 구름처럼 허공에 떠있었다. 나다니엘은 그 활주로를 오랫동안 달려 하늘로 떠오르는 순간을, 그리고 마침내는 구름 한점 없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야간비행을 하던 날을 떠올렸다. 
 파일럿들은 언제나 희망에 의지해 있어야했다. 그것은 그들이 오로지 계기판을 가늠하면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구름 위의 일이란 것은, 나다니엘이 태생적으로 신에게서 어떤 것을 부여받은 것처럼, 그리고 그의 교관이 그러지 못한 것처럼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일이었다. 파일럿들은 희망에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멀리서 깜박이는 빛 하나에 의지해 어두운 하늘 위를 비행하는 법은 희망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들에게 희망은 어두운 사막에서 낙타를 이끌고 이동하는 여행자들의 북극성만큼이나 명확했다. 그것은 멀리에서 깜박이는 그 순간에도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나다니엘은 느리게 미소지었다. 남자는 총을 내려놓고 자신의 두 손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나다니엘을 돌아봤다. 

 “알아요.”

 남자는 오랫동안 나다니엘을 바라봤다. 나다니엘은 희미하게 표정을 지운 채로 문득 서있는 그를 오래도록 앉아 올려다보았다. 나다니엘은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질문을 할 만큼 서로를 잘 알지 못했지만 나다니엘은 확신했다. 그는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가 본능적이고 태생적인 사람이었다면, 남자는 경험과 지식들에 의해 천천히 완성된 탑 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쳐다보았고 이내 남자는 사격장에서 등을 돌려 걸어나갔다. 어쩌면 남자도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05. 
 나다니엘은 한 손으로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두 손으로 받쳐 드는 총을 쏠 때는 더 정확하게 맞추는 법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정장차림이었다. 제복에 익숙한 나다니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타이로 옭아 맨 목 뿐이었다. 나다니엘은 두 손에 총을 뽑아 들었다. 그는 졸업생 또래 중에서도 좋은 사격수에 속했다. 사격뿐만 아니라 체격과 체력, 판단력과 시력 그런 것들에 있어 상위권에 속했다. 그는 그런 것을 위해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총을 쏘는 데도 망설이지 않았다. 폭죽처럼 들리는 총성 속에서 나다니엘은 고막이 얼얼해지도록 두 팔을 곧게 펴고 상대를 겨냥했다. 그는 명사수 중의 하나였다. 


06. 
 나다니엘은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마루를 죽이는 사람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이라크전보다, 미국이 지금까지 치러온 그 어떤 종류의 전쟁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 되겠지만,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충분히 지켜져 오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화였다. 그는 적어도 민간인을 해치고 싶지는 않았고, 그보다는 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곧 사람은 죽이지 않지만 마루를 죽이는 사람 중에서도 좋은 훈련을 받고 좋은 무기를 갖춘 사람이 될 것이었다. 나다니엘은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이제는 사형이 금지 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민의 대부분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그들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적 권리 앞에서 누구보다도 강하게 반발하고 요구하는 시민의 나라였고 그들은 이제 범죄자의 인권조차도 지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절름발이 소년병에게 총을 겨누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인도적인 처사였다. 그들은 그들의 인권이 얼마다 상대적인 잣대 위에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나다니엘 가렛이 그가 하는 일에 대해 고려해야 했듯이. 나다니엘은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단 한발의 총알로 정확하게 얼굴을 조준할 수 있는 명사수 중의 하나였다. 그가 총을 겨눌 때에 그는 명분 이외에 어떤 합당한 면죄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다니엘은 자신의 명분 속에 숨어있는 합리화에 대해서 적어도 숨기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타고난 본능과 그의 선하고 상냥한 기질이 타협하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07.
 레이 페어렉은 총상을 입은 채 모서리 뒤에 물러나 있었다. 그들은 도망치는 마루를 쫓아서 지하 통로를 달렸다. 나다니엘은 그의 표정과 태도를 기억했다. 레이 페어렉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마루의 다리를 훑었다. 나다니엘은 그를 뒤로하고 후퇴하는 마루들을 향해 달렸다. 긴박감들 사이에서 어설픈 고요함이 찾아와있었다. 나다니엘은 특무부에 온 뒤의 일년 남짓의 기간을 제외하면 군부에서 실전에 투입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캐롤과 그를 에워싼 전직 군인들의 말처럼 그는 벌통의 일벌이거나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08.
 나다니엘은 손을 뻗었다. 왜? 니가 감아주게? 시덥잖은 농담을 하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단은 어울리지 않는 리본을 풀러냈다. 넌 안 다쳐서 다행이다. 나다니엘은 장난기가 묻어나는 막스의 목소리 뒤에서 어렴풋이 배어나오는 진심을 천천히 좋은 흙처럼 흡수했다. 좋은 땅은 스며드는 물을 받아내고 흘려보내고 다시 떠나보내는 땅이었다. 불만이라도 있는 양 조잘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다니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붕대 감게 가만히 좀 있지. 단단히 동여매어진 상처와 붕대를 바라보고 나단은 그의 등을 툭, 쳐 밀었다. 

“응급 처치니까.”

나 환자라니까. 나다니엘은 단단하게 동여맨 붕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막스를 바라보면서 흐릿하게 천천히 웃었다. 폐에 공기가 차올랐다. 

"더 안 다쳐서 다행이다."

나다니엘은 막스의 팔뚝을 잡았다. 두 사람의 말이 비슷하게 들려 둘은 어깨를 떨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붕대 사이로 배어나오는 피를 보다가 나다니엘은 잡고있던 팔을 놓았다. 의무실로 가자.


01. 
 활주로는 일직선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그렇지 않은 활주로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지금껏 나다니엘 가렛이 살아온 길과 흡사했고 나다니엘은, 그 길의 끝에 서서 이제껏 자신이 달려온 길의 길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달리기 시작한 출발선은 아주 멀리에 있었다. 그가 두고 온 것들은 그를 스치고 지나가 그의 일부분이 되었고, 그는 타고난 그의 성격과 기질처럼 모든 것을 상냥하고 자연스럽게 마치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 그의 삶은 평탄하고 순조로웠고 거기에는 어떤 장벽과 걸림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그를 더 달리게 했다. 그는 더 빠르게, 더 곧게, 더 날아갈듯 숨이 벅차도록 길고 곧은 길을 달렸다. 활주로는 길었다. 나다니엘은 거의 벗겨진 군모를 오른손으로 벗어 들었다. 짦은 갈색머리가 땀에 젖어 바람을 맞을 때 마다 머리끝이 차갑게 식어왔다. 얼마나 더 달려야하는지 선택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나단. 행운을 비네. 나다니엘은 달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빌 때 쯤 중령이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00.                         
 그는 본능에 따랐다. 그의 발치에는 작은 레고 블록들이 깔려있었다. 작은 블록 하나하나 마다 가장과 아내와 아이들과 개와 고양이들의 인생이 있었고 블록들이 점점 작아질수록 그것들은 좀 더 많아졌다. 그는 모든 작은 레고와 레고 집들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많은 집들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지킬 수 있는 가는 그가 정해야하는 몫이었다. 그는 일직선으로 달려 이제 막 이륙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떻게 날 것인가는 그의 몫이었다. 


miss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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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

Amazing Grace


 군의 겨울은 추웠다. 나다니엘은 챙이 짧은 군모를 눌러쓰고 머플러를 여몄다. 희끄무레한 안개 속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날은 흐렸고 아침 빛 대신 구름이 푸르게 젖은 채로 하늘을 가렸다. 비행을 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쇠로 만든 무거운 기체들이 활주로 위에 거병처럼 서있었다. 나다니엘은 가죽 장갑 안에서 추위에 서서히 얼어오는 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일벌처럼 일해야 할 때였다.

 거수경례를 한 군인들이 차례로 거병 위에 올라탔다. 기체는 육중했고 흰 안개에 젖은 활주로를 무섭게 내달리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마지막 비행을 하기에는 최악의 날씨였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비행이 스무살의 꿈처럼 생겨먹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기체 위에 올라타는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였고 그들은 다섯 살 때부터 애국심보다 먼저 자유와 권리와 책임을 배웠다. 탑건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열두살의 여름에 비행기를 타고 써머캠프에 다녀왔고, 개중의 몇몇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들, 모험심이 충만했던 소년들과 견장에 눈독들인 소녀들은 열아홉살이 되어 커데트 에어리어에 지원했다. 엄격한 체격심사와 성적과 훈련을 갖춘 뒤에 드디어 거병 위에 올라타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생도들은 그들이 탄 기체가 자유와 가장 동떨어져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들이 훈련용으로 탔던 전투기에서는 늘 모래냄새가 났다. 이라크의 자유와, 자유의 나라 미국을 위하여. 많은 군인들이 부상과 내상을 겪으며 고국으로 돌아왔고 사막의 모래가 마치 진흙처럼 그들의 몸에 거칠게 달라붙어있었다. 상처 입은 전투기들은 몇몇의 상처 입은 군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기체에서 떨어지는 모래에서는 한 번도 군인인적 없었던 민간인의 피 냄새와 고철의 냄새, 화약의 냄새와 탁한 바람 냄새가 났다. 한 번도 자유와 가까웠던 적 없는 냄새들이었다.
 나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몇몇의 생도들이 학교에서 떨어져 나가는 과정을 알았다. 그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의 뒤에 숨어있는 수만가지의 자유의 뜻에 대해 배우고는 곧 커데트 에어리어를 떠났다. 천여명의 커데트 에어리어 졸업생 중에 마지막 비행을 맞는 파일럿의 숫자는 적었다. 그들은 엄격한 조건아래 선별되어 엄격한 훈련을 받았고 살아돌아오는 대신 전투기와 함께 죽는 명예를 익혔다. 기체의 무게와 무게만큼 값비싼 명예는 고작 스물두세살의 청년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장에 대한 환상과, 자유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스물두세살의 호기로움으로 두려움을 대신해 자리를 메웠다. 남은 사람들만이 활주로 주변을 서성거리다 비행기에서 내려 군병원으로 들어가는 수십명의 부상자들과 마주쳤다. 붕대는 모래빛으로 빛이 바래있었고 그들의 군복은 사막의 색을 닮아있었다.
 흐린 하늘 속에서 관제탑의 붉은 등이 서서히 깜박거렸다. 마지막 비행은 미루어지지도 취소되지도 않았다. 전장은 날씨와 날짜를 고르지 않았다. 그들의 기체에서는 모래냄새가 났고 전투기의 바퀴가 굉음을 내며 시멘트 위로 새 홈을 패어놓으면서 천천히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서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직감을 대신해 계기판만을 가늠하는 이성뿐이었다. 미숙한 파일럿들은 하늘 위에서 그들의 기체에 장착된 자유의 의미까지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비행은 아주 복잡하고 고된 작업이었고 그들의 모든 이성을 숫자와 계기판들에 쏟아 붓도록 하는 것은 계획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군의 겨울은 추웠다. 나다니엘은 활주로를 달리면서 그의 전투기 창에 약간의 서리가 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코드네임 허니비 이륙합니다.”

 너희는 일벌처럼 살아야해. 아무 생각도 하지마. 

 시야는 흐렸고 빛은 비치지 않았다. 상공 만피트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찬가지 였다. 계기판 안에서 그들은 빨간 점으로 서로를 확인했지만 그 뿐이었다. 통신기는 오래도록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가 짧은 노이즈만 내뱉었다. 공기에서 습한 냄새가 났다. 안개 낀 하늘의 냄새와 햇빛이 비치지 않은 구름에서 나는 비린 물의 냄새. 미숙하고 어린 파일럿들의 어깨가 긴장과 추위로 굳었다. 

 “가렛 생도 비행고도를 낮추기 바란다.”

 통신기는 더 고요해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열대의 육중한 전투기들이 우유 속에 잠긴 과자처럼 구름 속에 젖어 고요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레이더망에 잡히는 빨간 점에 지나지 않았으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나다니엘은 통신기에서 흘러나오는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구름 때문에 고도를 더 낮출 수 없습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삼천피트 위로 상승합니다. 허가해주십시오.”
 “오천피트 이하로 하강 명령한다.”
 “죽습니다.”
 “죽어도 좋다.”
 “고도 높이겠습니다. 코드네임 허니비 전원 삼천피트 상승합니다.”
 “나다니엘 작전교육관 생도.”

 약간의 노이즈가 관제탑에서 흘러나왔다. 나다니엘 작전교육관 생도. 남자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명령 불이행합니다. 허니비 전원 상승비행합니다.”

  나다니엘 생도!




 “오랜만이네 나단.”
 “졸업했어요.”
 “이제 군인이야?”
 “아마도요.”

 그녀는 하늘색 포장지 안에 색색의 컵케이크를 넣고 종이팩을 닫았다. 남색 교복을 입고 나단에게는 지나치게 작은 의자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흰색 테이블 위에 팩을 올려두며 맞은편에 앉았다. 가게 안은 단 아이싱의 냄새와 아이스크림의 냄새, 와플의 냄새로 가득했다. 평일 오후면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우르르 몰려들어와 코튼캔디를 연상케 하는 하늘색과 레몬색, 흰색으로 가득찬 가게 안에 앉아 컵케이크를 먹었다. 의자에 앉으면 아이들의 다리는 바닥에 닿지 않은 채로 달랑거렸다. 빨간 타탄체크무늬의 치마와 분홍색 머리 방울, 하늘색 캡과 보라색 운동화. 레이스가 달린 양말과 끄트머리 올이 다 풀린 청바지. 나다니엘은 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온 어머니들이 자동차의 키를 짤랑거리며 투정부리는 아이의 손을 흔들다가, ‘가져갈거에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쁘게 아이를 자동차에 태우고 뒷좌석에 컵케이크 상자를 놓은채로 월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중산층의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커스터드 크림과 피쉬 칩스. 감자튀김과 스테이크. 베이컨과 콩통조림과 으깬 감자 같은 것들. 하이스쿨의 여름방학이면 나다니엘은 어머니와 면식이 있는 그녀의 가게일을 돕고 약간의 푼돈을 받았다. 

 “아직도 신경쓰이니 나단?”

 여자의 이마에는 주름이 패여 있었다. 나다니엘은 그 가게에 들러 발을 동동거리며 먹는 아이 중의 하나였을 때보다 여자는 훨씬 늙어있었다. 나다니엘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녀의 가게에 들러 남자아이답게 민트쿠키몬스터 컵케이크를 먹었다. 그 다음에는 니트로 짜인 겨울 모자를 귀까지 덮어쓰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여섯 개의 컵케이크를 사갔고, 그 다음에는 여름방학동안 레모네이드를 만들고 계산을 돕다가, 마침내는 겨우 한 달에 한번 마을로 돌아와 그녀의 가게에서 집으로 가져갈 컵케이크를 샀다. 나다니엘이 자라는 동안 여자는 프랑스인 남편과 이혼을 했고 근근한 위자료를 받으며 나다니엘보다 일곱 살은 어린 두 아이를 키웠다. 여자는 나다니엘의 재색 눈을 좋아했다. 대개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은 나다니엘에게서 한 눈에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여자는 한참이나 나다니엘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아이를 쓰다듬듯 나다니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다니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짧은 갈색머리 사이로 여자의 주름진 손가락 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커데트 에어리어에 가고싶었는지 생각해봐 나단”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열아홉살이었어요. 적어도 군이 뭘 하는 곳인지 정확히 알진 못했고요. 난 그냥 하이디의 가게나 엄마가 월마트에 다녀오는 길이 안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보이스카웃 같은건 줄 알았어요 하이디. 난 지금은 한 번에 만명을 죽일 수 있는 전투기를 몰아요.”
 “나단. 적어도 나는 네가 그 학교를 중간에 나오지 않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 넌 열심히 노력했고, 우리 마을의 자랑이야. 알리사의 아들이라고 하면 누구나 칭찬할걸. 겨우 스무살에 낳은 아들이 이렇게 잘 자라준걸 알리사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아니 나단?”
 “이번에 졸업한 파일럿 중에는 벌써 전쟁에 나가고 싶어서 좀이 쑤셔하는 애들도 있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의무 복무 기간이 남았지만 내가 군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너희는 일벌처럼 살아야해. 아무 생각도 하지마. 무슨 생각이든 머릿속에 전쟁에 대한 환상 대신 들어차는 순간 너희는 전투기를 바다에 박아버리고 싶을걸! 멍청한 일벌처럼 살아 제군들! 너희는 신문을 읽고 뉴스를 봐야해! 네 폭격기가 어느 마을의 컵케이크 가게를 부숴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죽고 싶어 질걸!

 “나단. 나랑 알리사는 네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알아. 적어도 넌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슴 따듯한 사람 중에 하나야.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고마워요 하이디”

 나다니엘은 조금 더 웃었다. 따듯한 공기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뺨이 밤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얼어붙었다. 하이디는 가게의 불을 끄고 쇼윈도를 정리했다. 그녀는 겨울에는 레모네이드를 팔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보다는 나다니엘이 만드는 레모네이드가 손님에게 더 인기 있었던 탓이었다. 나다니엘은 손에 여덟 개의 컵케이크가 든 하늘색 종이팩을 들고 거리를 나섰다. 위스콘신의 겨울은 추웠고, 밀워키 시내는 우유가 엎질러진 것처럼 눈으로 하얗게 들어찼다. 시내에서 떨어진 작은 마을 사람들은 그런 농담을 좋아했다.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낙농업대신 우유가공공장이나 치즈공장, 또는 그런 사무실로 일을 다녔다.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에 아들이 다니고, 아들이 다니던 학교에 손자가 다녔다. 두 블럭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들이었다. 그 마을에서 떠나는 몇 안되는 사람 들 중에는 나다니엘도 있었다. 나다니엘이 커데트 에어리어에 입학하게 된 날에는 모두가 모여서 크리스마스 같은 만찬을 먹었고 알리사는 들떠있었다. 
 나다니엘은 그 풍경들을 좋아했다. 결국에는 모두에게 다시 나누어 주어야 할 만큼 식탁 위로 쌓인 치즈선물이나 하이디가 가져오는 컵케이크, 알란부인의 플럼 푸딩, 타피오카와 칠면조. 사람들은 소만큼이나 순진했고 눈이 오는 계절에는 더더욱 그랬다. 발목까지 털로 덮인 부츠를 신고 눈 사이를 헤치며 걷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작고 찢어지는 목소리와 코튼캔디 색으로 가득한 컵케이크 가게의 모습, 도로를 메운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의 알록달록한 불빛이나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다가 마주쳐 인사하는 모습 같은 것들. 하늘 위에서 보면 그 마을의 풍경은 작은 레고처럼 보였다. 


 나다니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마을에 데리고 오고 싶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나다니엘은 이전에 한 번도 그녀와 사적으로 말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그의 상관이었고, 미공군의 우수한 파일럿이었다. 짙은 금발을 뒤에서 하나로 올려 묶고 비행모를 쓴 여자는 위스콘신의 차가운 겨울만큼 새파란 눈으로 기체를 확인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여자는 곧고 단련된 손으로 반듯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가렛이라고 부를 때면 나다니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펴면서 대답했다. 나다니엘은 그녀가 신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밀워키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여자는 충분히 어떤 상황에서도 이륙하는 전투기를 다룰 때처럼 정확하고 충직하게 해낼 것 같았다. 나다니엘은 여자가 부스스한 금발을 정돈하고 아이를 깨워 차에 태워 학교 가는 모습들을 상상했다. 오후면 아이를 차에 태워 데려오다가 하이디의 가게에서 컵케이크를 세 개쯤 사서 월마트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일주일에 한번쯤은 그 집으로 자신이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거실과 벽난로 위에는 가족사진이 놓여있고 티비 위에는 군에서 받아온 훈장들이 걸려있는 대개 그런 군인들의 집이었다. 아이는 아버지를 매일 보지 못하는 대신에 친구들에게 메달이나 뱃지를 자랑하고 이따금은 나다니엘이 비행기에 올라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다니엘은 그녀를 보면서 알리사가 꾸린 것처럼 아주 약간은 덜 풍족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떠올렸다. 그녀와 영화를 보고 쇼윈도를 구경하는 대신에 나다니엘은 종종 그런 상상들을 했다. 겨우 나눠본 말이라고는 고작 ‘네 중사님’ 같은 대답뿐인 여자를 보면서. 여자는 나다니엘을, 아니 그들을 보고 ‘헤이 허니비들’하고 말했다. 그들의 코드네임이었다.



 “나단, 병원가니?”

 나다니엘은 교복을 입고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밀워키에서의 잠깐의 휴가는 곧 끝이 났다. 이제 커데트 에어리어로 돌아가면 그는 이라크나, 알래스카, 하와이, 미군이 있는 어딘가로 허니비들과 헤어져 뿔뿔이 흩어질 차례였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거 가져가렴.”

 하이디는 하늘색 종이 팩을 건넸다. 안에는 색색들이 컵케이크가 들어있었다. 캐롤이 좋아하겠네요. 하이디는 말 없이 웃었고 나다니엘은 교복을 추스르고 밀워키를 나섰다. 알리사가 공항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몇몇 창문들 뒤에서 인기척이 보였다. 작은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마을을 떠난 젊은이 중에 하나였다. 비록 그의 집이 커데트 에어리어나 군에서 제공하는 아파트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나다니엘의 방과 앨범들이 알리사의 집에 고스란히 있더라도 그들은 일년의 대부분을 마을이 아닌 곳에서 보내는 젊은이를 신기하고 대견하게 여겼다. 잘 있어요 하이디. 

 “여자들은 작별할 때 선물이 필요한 법이니까.”


 병원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한 일은 그녀의 보기 좋은 금발을 짦은 단발로 잘라버리는 일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그것은 여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관리하기 귀찮은 부속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캐롤의 침대 옆에 컵케이크를 내려놓고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나다니엘이 그녀에게 경례하는 것을 싫어했다. 군에서도 그랬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을 싫어했다. 그녀를 동경했던 여러명의 여생도들이 병원을 찾았다가 괴팍하기 짝이 없는 홀대에 지쳐 두어번의 방문을 끝으로 다시는 그녀에게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테이블 앞에 조용히 앉아 그녀가 서투른 솜씨로 왼손으로 컵케이크를 먹는 것을 지켜봤다. 목과 무릎 위의 냅킨에 민트색, 분홍색 크림이 묻을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나다니엘의 눈치를 살피고 나다니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포크를 집어들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와, 군사령부와, 병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아래에 있던 훈련생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만큼이나 자존심이 센 여자였고 파일럿이 왜 오른 팔을 잃어야했는지에 대해 누구에게도 설명하고 싶지 않아했다.
 나다니엘은 그녀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의 눈치를 살필 때마다 침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보기 싫게 져버린 사람들 특유의 음습한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자존심과 자부심이 한번에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 만이 가질 수 있는 절망과 고작 몇 해 전에 불과한 과거에 대한 집착 같은 것. 나다니엘은 가끔 그가 가져가는 케이크나 과자 같은 것들을 먹다가 냅킨 위에 잔뜩 음식을 흘리고 나다니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캐롤과 영화를 보고 쇼윈도를 구경하는 상상을 했다. 캐롤이 나다니엘의 눈치를 살필 때마다 나다니엘은 새삼스럽게 그녀가 여자였음을, 스물세살의 남자 앞에서 흉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여자였음을 깨달았다. 수치심으로 부끄러워하는 캐롤을 보면서 나다니엘은 그녀가 어지럽게 흩어놓은 것을 모른척 했다. 

  너희는 일벌처럼 살아야해. 아무 생각도 하지마. 무슨 생각이든 머릿속에 전쟁에 대한 환상 대신 들어차는 순간 너희는 전투기를 바다에 박아버리고 싶을걸! 멍청한 일벌처럼 살아 제군들! 자유 같은 건 개나 주라고 해! 난 내 두 팔의 자유를 잃어버렸어 멍청이들아! 전투기로 이라크를 박살내기도 전에 팔이 박살났다고! 

 나다니엘은 캐롤이 소리치던 모습을 떠올렸다. 허니비들은 그녀의 독기어린 파란 눈을 보다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사년 동안의 훈련동안 그들이 몰고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다른 것임을 모르는 일벌들은 없었다. 그들의 절반은 의무 복무에 묶여, 그들의 절반은 이제 와 새로 해야 하는 일을 찾지 못해서 그들이 자란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철과 쇠와 자유로 된 둥지였다. 

 “캐롤. 저 이제 안와요. 작별인사 하려고 왔어요.”

 캐롤은 말없이 나다니엘을 바라봤다. 그들이 처음으로 그녀의 부상소식을 듣고 병원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사관생도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그들에게 했던 유일한 말은 아직 빨갛게 물이 든 붕대를 붙잡고 소리쳤던 것뿐이었다. 혼자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전쟁터에서 팔을 잃고 악에 받쳐 소리지르는 옛 상관의 말이라면 더욱 그랬다.

 “잘가 허니비”

 캐롤은 한참이나 더 나다니엘을 바라봤다. 초점이 풀리고 진통제에 익숙해진 눈을 바라보면서 나다니엘은 조용히 웃었다. 

 “잘 있어요. 캐롤"

  대개의 첫사랑은 시시하게 끝나는 법이었다. 비좁고 열악한 병실에서 후유증으로 고국에 돌아온 군인들이 뉴스나 드라마 따위를 틀어놓고 포커를 치거나 탁구를 했다. 몇몇의 간호사들이 나다니엘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그들은 나다니엘의 견장을 보고 그가 이제 드디어 졸업생이 되었음을 축하했다. 다리를 절고 팔을 다친 군인들은 이제 막 군인이 되는 미숙한 파일럿 앞에서 카드와 리모컨을 내려놓고 침묵을 지켰다. 이상한 엄숙 속에서 나다니엘은 구석에 놓아둔 캐리어와 외투를 들고 군병원을 나섰다. 
 
 사람이 죽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애송이!

 등 뒤에서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가 소리쳤다. 나다니엘은 택시를 잡아탔다. 대개의 첫사랑은 시시하게 끝나는 법이었다. 



 징예 위원회장은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서 주변을 돌아보던 나다니엘은 그제서야 테이블 위에 서류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다니엘 가렛 작전교육관 생도의 연방 특무부 특수 배치를 추천하고 징계 위원회를 소집 해제함. 책상에 걸터 앉아 복잡한 서류를 위에서 아래까지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남자는 나다니엘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가렛 네 단점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거야. 군은 생각이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 대신 특무부에서는 쓸만할 것 같더군.”
 
 나다니엘은 천천히 웃음기가 번지도록 웃었다. 색이 엷은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좌천 같은데요?”
 “특무부는 군보다 위야. 굳이 따지자면 승진에 가까울 것 같은데.”

 나다니엘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들고 조목조목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서류를 나다니엘의 손에 쥐어주며 웃었다. 갈색 머리가 제법 벗겨지기는 했으나 챙이 짧은 군모 아래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특무부에서는 명령 불이행하겠다고 대놓고 말하지 말게. 적어도 징계위원회보단 무서운게 열릴테니까.

 “농담하시는거죠?”
 “아니”

 잘가게 가렛. 특무부가 자네에게 맞았으면 좋겠네. 옆집 아저씨 같은 얼굴로 웃어넘긴 대령은 군모를 고쳐 쓰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날씨는 좋았다. 창 밖에서 비친 빛이 천천히 회의실에 스며들었다. 나다니엘은 책상에 걸터앉아 서류를 두 번 접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명령을 이행했다면 여기 남아있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령의 사무실에서 나다니엘은 대답했다. 군은 아직 미숙한 파일럿이 관제탑 사령부보다 얼마나 더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믿나?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은 인정하네. 작전교육관으로서 얼마나 잘해주었는지도 알고 있지만 확률적으로는 군이 선택한 쪽이 동료들이 죽을 확률이 높은 작전이었다는 것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불렀네. 
 

 군인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을 기껍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라고 배웠지만, 미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자유를 위한 일이거나 시민을 위한 일이 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군인이었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기꺼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총과 칼과 무기를 들고 맞섰지만 되도록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기를 바랐다. 커데트 에어리어의 호기로운 스물두어살들은 그들이 치러내는 것들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거기에 의미가 있기를 바랬다. 민간인의 비린 피냄새와 전투기에 묻어있는 모래냄새 같은 것들 속에서 적어도 정당화 시킬 수 없는 것들에 무언가를 지키기라도 하는 명분이 있기를 바랬다. 
 예를 들면 알리사가 마트에서 돌아가는 길이 안전하기를 바란다거나, 하이디의 컵케이크 가게와 가게에서 컵케이크를 먹는 아이들이 안전하기를 바란다거나, 잭이 가꾸어놓은 정원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무탈하다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아무도 바라지 않는 독단적인 자유보다는 마루에게서 시민들을 지키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납득할 수 있었다. 작전명 DOXA. 억견이라고 불러도 괜찮았다.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다니엘은 알았다. 살인이나 전쟁, 폭격 같은 것들. 필요한 것은 결국 명분이었다. 나라를 지킨다거나, 타국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부자연스럽고 고집센 명분만 아니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명분이 정직할수록 좋았다. 비록 억견이더라도 그 정도의 명분이면 싸울만한 이유가 되었다. 


miss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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