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urant



 “랭커스터에는 처음이시라구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마부는 마차에서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의 짐은 큰 트렁크 두 개와 모자가 든 상자 두 개가 전부였다. 런던에서 랭커스터까지의 긴 여정을 마친 말들은 이제 잘 마른 여물을 먹고 충분히 쉬게 될 것이었다. 마부는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랭커스터의 크로잔 저택에서 이틀을 머물러 가기로 되어있었다. 흰 에이프런에 손을 문질러 닦은 메이드가 나와 빗물과 구정물로 더러워진 마부를 뒷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저택은 그가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컸다. 으리으리한 저택을 광활한 평지가 둘러싸고 있었고 평기가 끝나는 곳에 사냥터로 보이는 숲이 맞닿아 있었다. 튠이 그 길을 거꾸로 거슬러 저택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 저택의 숲이 과연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튠에게 저택을 소개한 테오도라 크로잔이 크로잔 저택의 사실상 안주인이었다. 크로잔 후작 내외가 수년 전 빗길의 마차사고로 타계한 사실은 런던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튠이 랭커스터에 머물 곳을 찾을 때, 집에 장성한 어른이 없다는 이유로 크로잔 저택은 제외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조언을 들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미망인이 된 테오도라 크로잔이 본가로 돌아가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한 뒤에는 크로잔 저택에 머물기로 쉽게 결정을 내렸다. 넓은 저택 안에는 열일곱의 소년과 미망인, 그리고 오랫동안 그 집에서 일한 최소한의 고용인뿐이었다. 안색을 살펴야할 주인도, 큰 소란도, 어줍잖고 시시한 시골 귀족의 파티도 없을 것이었다. 지내기에는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소르디에 백작?”


 튠은 테오도라의 목소리에 멈췄던 걸음을 뗐다. 테오도라가 안내한 객실은 집주인 내외가 썼던 침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저택의 앞뜰을 향해 난 창문에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보기 좋게 내리쬐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불어드는 바람에 흰 린넨 커튼이 안으로 휘날렸다.


 “달리 필요하신 건?”


 없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테오?”


 소매를 말아올린 흰 셔츠에, 갈색 승마바지, 손에는 승마모를 든 청년이 문간에 서서 튠을 바라보았으나 곧 시선을 거뒀다. 여기에 있다길래. 그는 처음부터 튠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테오도라를 향해 말했다. 청년이 승마모와 커프스를 손에 쥐자 집사가 자연스럽게 청년의 손에서 그것들을 받아갔다. 청년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색빛 눈은 청년의 얼굴이 움직일 때마다 청색으로도 보였으나 머리칼은 영락없는 옅은 회색이었다.


 “로, 이쪽은 소르디에 백작. 백작 이쪽은 로랑.” 


 

 오늘부터 머문다던 그 사람이네. 로랑의 목소리에서는 아직 가쁨 숨소리가 들렸다. 튠은 그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막 말을 달려 돌아온 듯 옅은 색 머리칼 사이로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들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고작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으나 성년이 되자마자 부모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청년이었다. 로랑은 키가 컸고 골격이 다부졌다. 로랑은 물 흐르는 동작으로 채찍과 재킷을 벗어 고용인에게 건네고 있었다. 한 번도 타인의 아래에 서본 적 없는 익숙한 몸짓들이 고작 열일곱의 청년을 위압적으로 만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로랑의 손 끝에 잠시 머물렀다.


 “반갑습니다 백작.”


 가냘픈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로랑의 말투에서도 그것이 묻어났다. 튠은 일전 런던에서 크로잔 후작 내외를 멀찍이서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타계한 후작 내외의 얼굴을 정확히 반씩 섞어놓는다면 저런 얼굴이 나올 것이다. 어머니 쪽을 완전히 닮은 테오도라와는 생판 달랐다. 아름답다는 표현에 가까우리만큼 우아한 얼굴을 보완하기라도 하듯 뚜렷한 이목구비의 선은 크로잔 핏줄임이 틀림없었다. 로랑은 짐짓 여유롭게 웃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거나 손님을 맞는 긴 말을 늘어놓는 대신, 보일 듯 말듯 아주 적은 각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잠깐 눈을 깜박인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

흰색 승마복인지 테니스복인지를 입은 청년 로랑이랑 마주친 어른 튠을 쓰고싶었는데 뭘 더 이어쓰려고 했는지 까먹어서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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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

Dear TUNE

 

 비오는 밤이었다. 길가의 가로등이 빗물에 번져 부옇게 등을 밝히고 있었다. 로랑 크로잔의 마차는 무도회가 열린 백작의 저택에서 나와 로랑의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부는 거세게 내려치는 빗줄기가 짧은 챙 아래로 흘러내릴 때마다 축축하게 젖은 옷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로랑은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마차의 벨벳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두꺼운 코트로 어깨를 감싼 채 창문에 기대어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계절은 이제 막 봄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밤공기는 차가웠고, 한차례 내리고 있는 봄비가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로랑은 흐려진 창문가를 장갑을 벗은 손으로 스윽 닦아내어 창밖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말아 쥐고 마차 지붕을 두 번 두드렸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새까만 그림자에 로랑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마차 문을 열고 한 쪽 발을 내딛었다. 마차 밖으로 비어져나간 어깨가 내리는 비에 차츰 젖어들었다. 로랑은 비를 쫄딱 얻어맞고도 말쑥한 표정으로 서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빛이 어두워 쉽게 분간할 수 없었으나 아이의 머리는 제법 어두운 축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고, 아이의 눈은 엷은듯했다. 로랑은 두꺼운 코트자락을 들어 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내다가 아이가 자신의 손을 잡자 마차 안으로 끌어들였다. 코트를 벗어 완전히 푹 젖은 옷 위에 덮어씌우고는 단단하게 동여매듯 아이를 옆에 앉혔다. 로랑의 손의 채 반절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손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고작 스물하나의 주인이 자신의 키의 반절 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 로랑의 집사 모라벡의 눈은 크게 뜨였다가 도로 평정을 되찾았다. 모라벡은 약간 젖어 흘러내린 로랑의 머리칼을 바라보고 햇볕에 잘 마른 수건을 말없이 주인의 머리 위에 덮어 씌운 뒤, 메이드에게 일러 아이를 푹 담가 씻기도록 욕조에 물을 받도록 했다. 로랑은 머리칼과, 어깨, 손이 조금 젖었을 뿐이었지만 코트를 벗긴 아이의 몸은 완전히 빗물에 젖어있었고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막내로 자란데다가 아이라고는 키워본 일이 없을 로랑은 몰랐겠지만 저대로 있다가는 보통 감기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폐렴이나 그보다 심한 독감에 걸리면 아이들은 제대로 된 치료도 받기 전에 금방 죽어나가는 시절이었다.


“아이는 어디서 데려오셨습니까?”

“비가 오는데 길에 혼자 서 있길래.”


 로랑이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어내고 커프스와, 커프스 단추들을 하나하나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동안, 메이드가 달려와 아이의 젖은 옷가지를 모두 벗기고 로랑의 코트와 함께 빨래 바구니에 넣어 다른 이에게 들려 보냈다. 하얗게 젖은 몸을 수건으로 물기가 없도록 닦아내고 목욕물이 준비되는 동안 아이는 남색 담요에 꽁꽁 싸매어져 벽난롯가 앞의 소파에 앉혀있었다. 로랑이 겨울이면 허벅다리 위에 책을 올려두고 오랜 시간을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는 소파는 아이에겐 지나치게 커서 마치 커다란 왕좌에 앉은 어린 왕자처럼 보였다.


“눈이 파란색이군.”


 모라벡이 로랑을 바라봤을 때 로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불을 쬐고 있는 아이를 보며 웃었다. 머리칼은 잘 말려 광택을 돌게 한 마호가니같은 색이었고, 눈동자는 새파랬다. 아이는 잠시 손 안에 들려진 따듯한 초콜릿 컵을 바라보다가 로랑에게로 작은 고개를 돌렸다. 로랑은 동그란 눈을 보다가 웃었고, 메이드는 곧 아이의 손에 들린 컵을 빼앗아 테이블에 올려두고 아이를 욕실로 데려갔다. 로랑이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었을 때 즈음에 첨벙하고 아이가 물에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름은?”

“튠.”

“집은?”

“...”


 따듯한 물로 말끔하게 씻긴 아이는 고달팠는지 그날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잠에 빠졌다. 아이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로랑의 질문에 답했다. 튠. 로랑은 대답하지 않는 튠을 바라봤다. 아이의 이름은 제법 아이와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집이 어딘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갗이 뽀얗게 익었으니 어디서 부모가 잡심부름을 시키던 아니는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부모를 찾을 때까지 데리고 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침 로랑의 저택에는 많은 수의 메이드와 풋맨이 있었고, 빈번히 외출하는 주인 대신 하나쯤 더 돌볼 것이 있어도 심심하진 않을 것이었다. 로랑에겐 그 많은 수의 사람을 부릴만한 충분한 돈과 재능이 있었다.


“나이는?”

“열둘.”


 로랑은 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었다. 금세 손을 뻗어서 자신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모습에 로랑은 잠시 기가 찬 듯이 웃었다. 웃으면 퍽 예쁜 얼굴일 것 같았다.


 아버지가 되기엔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로랑은 의외로 튠에게 관심을 가졌다. 로랑은 남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지만 필요하지 않은 일은 대부분 흘려듣기 일수였고 하물며 보란듯이 하루 종일 꾸민 영애들에게도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로랑을 보며 모라벡은 나지막히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집에 머물고 있는 튠은 그런대로 잘 적응한 모양이었다. 메이드들은 상냥했고 하루 종일 집을 비우는 주인보다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훨씬 흥미가 동하는 듯했다. 로랑은 이따금 오찬이 없는 오후에는 테이블 위에 앉아 말없이 스콘을 자르는 튠을 바라보거나, 튠이 낱말 퍼즐을 움직이는 것을 도와주었다. 튠은 로랑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머리가 좋았다. 로랑이 튠의 작은 손을 잡고 잘못된 퍼즐을 함께 옮기던 놀이도 곧 머지않아 로랑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튠은 로랑의 저택에 금방 익숙해진 것처럼 익숙하게 로랑과 가까워졌다. 책을 읽는 로랑 곁에 앉아 있다가 로랑의 가슴에 뺨을 기대고 잠이 들면, 로랑은 책을 덮고 튠의 어깨를 감싸 함께 낮잠을 즐겼다. 모라벡이 얇은 담요를 펼쳐 두 사람 위에 덮어주었다. 만찬 약속의 횟수는 이전과 비슷했으나, 오찬 약속은 현저하게 줄었다. 로랑은 밖에 나가는 대신 따스해지는 바람이 들도록 살롱의 문을 열어놓고 튠과 함께 앉아 책을 읽거나 아이를 곁에 앉혀두고 경매를 위해 모아놓은 오래된 보석들이나, 목걸이들, 풍경화나 조각상들을 보여주며 설명해주곤 했다. 튠이 예술품을 가리키는 로랑의 손가락을 잡거나 따분한 기색을 보이면 로랑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 말에 태웠다. 귀족이 삶이란 대부분 직업을 가질 이유도 없이 아주 느긋하고 여유로웠고 풍족했다. 로랑은 이따금 품 안에서 꼼지락 거리는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찾을 때까지, 아니면 아이가 무엇 하나라도 기억해낼 때까지 느긋하게 낱말놀이를 즐기기로 했다.






 “로!”


 튠이 로랑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모라벡이 눈썹 사이를 좁혔지만 로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로랑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다가, 자신의 침대 위로 달려드는 튠을 보고 웃었다. 풀썩. 소리가 나도록 침대 위로 달겨드는 튠의 위로 이불을 덮어씌우곤 이불 채로 튠을 꽉 끌어 안았다. 이불 틈 사이로 흐트러진 마호가니색 짙은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이마 위를 어지럽히는 머리칼들을 손끝으로 살살 떼어내어 주곤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재밌게 놀았어?”


 로랑은 대답대신 입술에 입을 맞추는 튠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입술을 떼어낼 때 마다 쪽하고 소리가 났다. 작고 마른 입술 위에 로랑은 손가락으로 약을 발라주며 튠의 머리끝까지 덮어씌웠던 이불을 걷어주곤 곁에 앉혔다. 로랑의 가슴 언저리에 닿은 작은 손이 로랑이 숨을 내쉴 때 마다 작게 오르내렸다. 느즈막히 열린 만찬 뒤에 살롱에서 한바탕 모임이 있을 것 같았으나 로랑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집에 돌아왔다.


“같이 잘래.”

“얼마든지.”


 같이 자자고 떼를 쓰는 것도 충분히 기대했던 일이지만, 아침마다 자신보다 일찍 깨어 일어나라고 졸라대는 튠 때문에 일찍 피곤해지는 것도 사실이어서 로랑은 튠을 안고 푹신한 베게 위에 머리를 얹었다. 일찍 자야지. 잘 거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잖아. 심심하니까. 메이드들이 놀아주잖아? 재미없어. 튠. 로랑은 대답 대신 눈만 깜박이는 튠을 보고 손을 뻗어 모라벡에게 등을 가지고 나가도록 했다. 단단하게 둘러싼 커튼 안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아 손을 뻗어 확인하지 않으면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로랑은 따듯한 몸을 가만히 안고 등을 도닥거렸다. 얕은 숨소리가 났다.



 튠의 부모는 결국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뒤늦게라도 찾게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아주 오랫동안, 이제는 찾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튠의 신변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들린 것이 없었다. 모라벡이 아이를 어떻게 할거냐고 묻기 전까지 로랑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를 찾지 못하는 한, 아이가 거기에 있는 동안은 계속 아이가 거기 있는게 당연한 것처럼 모라벡을 보고는 간단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평소처럼.

 로랑은 집으로 배달되어 온 서신 몇 개의 밀봉을 나이프로 뜯어 열어보고는, 얇은 끈을 꼬아 책 서너권을 묶어놓은 묶음을 끌러놓고 있었다. 튠은 좀 더 자연스러운 자세로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는 책에는 흥미가 떨어진 표정으로 로랑이 나이프로 묶음을 잘라내는 것을 지켜봤다. 로랑은 도착한 책들의 앞장을 주의 깊게 펼쳐보곤, 앞부터 뒤까지 파라락 페이지를 넘겼다. 몇가지의 역사서와, 고미술서, 철학서들을 살펴보다가 로랑은 그것들을 양장하도록 모라벡에게 들려보냈다.


“튜터를 붙여줄까?”


 로랑은 어쩐지 심심해보이는 튠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필요 없어.”

“필요할거야.”

“로가 가르쳐주잖아.”

“나보다는 튜터가 나을텐데.”

“필요 없어.”

“거버니스가 가지고 싶어?”

“...아니.”


 꼭 좋아하는 여자애라도 있느냐고 놀리는 듯한 말투에 튠은 입을 다물었다. 로. 불평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로랑은 대답 대신 이리오라는 듯이 팔을 열었다. 지금은 로랑과 함께 있는 걸로 충분하겠지만, 만약 앞으로도 튠이 로랑과 지내게 된다면 기본적인 교육은 필요해질 거였다. 로랑은 튠만 싫어하지 않는다면 튠이 나이가 차면 무도회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고, 충분히 스스로 그의 후견인이 될 생각도 있었다. 손에 들려준 크레용을 뚝,뚝 분지르는 튠의 손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젖은 물수건으로 그의 손가락 마디 사이를 닦았다.






 “로!”


 로랑은 튠을 돌아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혀 웃었다. 열두살의 모습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새파란 눈이나 마호가니색 머리칼은 그대로였다. 재단사가 튠의 몸에 꼭 맞게 맞추어 재봉한 실크 셔츠와 타이, 꼭 갖추어 입은 조끼나 외투 밖으로 손가락 반마디 만큼만 비어져나온 셔츠의 소매까지 어디에 내놓아도 충분히 이목을 끌만한 신사처럼 보였다. 튠은 얌전한 호박으로 된 커프스 단추를 골랐으나 결국 커프스 단추만은 눈 색에 맞추어 파란색으로 하라는 로랑의 성화를 이겨내지 못했다. 눈 색을 닮은 걸로. 개 중에서도 밝은 색 사파이어를 주문하는 로랑은 자신의 커프스 만큼이나 까다롭게 보석을 골랐고 모서리가 잘려나간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세공을 원했다.

 열두살 때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입술을 부딪히는 인사에 로랑은 눈을 감고 웃었다가 천천히 튠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로랑의 목덜미에는 튠의 머리칼이 닿아있었다. 튠은 천천히 자라나는게 아니라, 어린 시절을 그만두고 청년이 되기로 한 것처럼 로랑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몰라보게 커버린 것같이 보였다. 로랑은 튠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손으로 뺨을 쓸었다.


“근사해.”

“정말로?”

“그래.”






 열일곱은 충분히 매력적인 나이다. 로랑이 그랬고 아마 튠도 그렇겠지. 로랑은 벽에 기대어 서서 오랫동안 반절이상 비워지지 않는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로랑의 주변에 크로잔의 귀족들과 몇몇의 친구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져갔고, 곧 시올이 다가와 곁에 섰다. 그는 로랑의 시선이 멀리에 여러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있는 튠을 향해있는 것을 알게 되자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언제부터 부성애가 넘쳤어?”

“아버지가 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너 지금 하는 꼴이 그거 아니고 뭔가.”

“글쎄”


 튠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열일곱은 충분히 매력적인 나이였다. 튠의 짙은 색 머리칼이며, 커프스 단추와 같은 새파란 색의 눈동자, 천진한 표정으로 웃는 얼굴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예쁘다고 표현하기엔 그보다는 좀 더 무언가가 있었고, 멋있다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착한 표정으로 웃고는 했다. 게다가 튠이 이따금 맞춰오는 입맞춤 같은 것들이 그를 나이보다 훨씬 미성숙한 풋풋함으로 위장시키고는 했다. 단순히 곁에서 오년동안이나 지켜보아 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기새 날려 보낸 어미새 같군.”

“닥치게 시올.”


 로랑은 미간을 좁혔다. 잔에 남은 샴페인을 단숨에 삼키고는 찌르르 목이 울리는 감각에 눈썹을 찡그렸다가 뜰 때쯤 튠이 로랑을 돌아보고는 입술을 말아올리며 웃었다. 아. 얼굴만 보아서는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 같았으나 튠은 곧장 고개를 돌려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래도 아니라고 할건가 로랑?”


 로랑은 대답 대신 샴페인 잔을 창틀에 놓아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테라스는 바람이 들었고 연회장 보다는 훨씬 더 숨을 쉴 만 했다. 로랑은 난간에 팔을 걸쳐두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로랑은 춤을 춘 상대도 없었고, 길게 이야기를 나눈 상대도 없었다. 단지 튠이 처음 나서는 자리에서 오래도록 시올과 함께 서 튠을 바라보다가 도망치듯 테라스로 나선 것뿐이었다. 흐트러질 일 없던 머리칼이 바람에 살살 흩어졌다.


“로.”


 로랑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빛을 등지고 선 튠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사람들은?”

“무슨 사람들.”


 고작 나이를 몇 더 먹었을 뿐인데, 뒤를 잘라먹은 짧은 말투가 묘하게 시건방져 보인다. 네 주변에 있던. 로랑은 나지막히 말하면서 튠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테라스로 함게 몰려오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이 절반이었다. 로랑의 말에도 튠은 모른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왔어?”


 로랑은 한쪽 팔을 난간에 걸친 채로 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는 바람에 흩어지는 튠의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비스듬히 내려온 앞머리칼들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었다. 대답이 없는 튠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튠의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행커칩을 끼워 넣은 왼쪽 가슴께의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가 손을 떼어냈다. 재밌어? 로랑이 재차 묻는 말에 튠은 대답 대신 가볍게 입술을 부딪혔다. 로랑은 튠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내다가 튠의 어깨 너머에 시선을 두면서 나지막히 숨을 내쉬었다.


“튠. 밖에서는 이러면 안 돼.”

“왜?”


 서글서글한 눈매가 영문을 모르는 것처럼 처지는 것을 보고 로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렸을 때는 애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튠은 열일곱이었고, 로랑은 스물여섯쯤 되었으며 로랑은 누군가의 후견인이 되기에 지나치게 젊은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의 나이에 일고여덟쯤 된 아이의 후견인이었다면 모를까, 벌써 열일곱이나 된 아이와 청년의 중간쯤에 선 튠의 후견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었다. 열두살짜리 꼬마애의 키스를 받아주는 스무살도 아버지 놀이를 하기엔 우스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열일곱짜리 사내애의 키스를 받는 스물여섯도 이상하기로 따지면 비슷하거나 그보다 위였다.


“밖이니까.”

“왜 안 돼?”


 로? 튠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로랑의 이름을 불렀다. 로? 왜? 몇 번이나. 로랑은 튠의 눈을 바라보다가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는 저도 모르게 밀려오는 당혹스러움에 대해 먼저 생각했다. 로랑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이 튠은 자라있었으나, 튠은 자랐기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것들이나 익숙했더라도 익숙하지 않게 되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부모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벽이나, 내외 같은 것들이 그에게는 제대로 성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로랑과 튠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한 것처럼 느껴졌고, 그랬기 때문에 로랑은 더욱 그 경계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는지 쉽게 생각해내지 못했다.


“저택에서는,”


 우리끼리만 있을 때에는, 그렇게 말하고 로랑은 잠시 말을 멈췄다.


“괜찮지만. 밖에서는 안 돼. 열일곱 된 남자에게 남자가 키스를 받는 건 이상한 일이야.”


 튠은 튜터가 필요 없다고 했지만 로랑은 결국 튠에게 예절이나 역사, 문학등을 가르칠 튜터를 붙였기 때문에 로랑은 튠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데 그리 익숙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로랑은 좋은 지식인은 될 수 있지만 좋은 선생은 되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로랑은 어설픈 단어들을 골라 최대한 튠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려다가는 문득 자신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누가 보아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아니었고, 로랑도 튠을 자식처럼 예뻐하긴 했지만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터울이 나는 형제 사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튠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서있어서 엷은 색의 파란 눈동자의 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로랑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랑은 튠이 왜라고 묻는 만큼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로랑은 그제서야 튠이 남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랐다는 것을 깨달았고, 튠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나서야 그것이 왜 이상해 보이는 광경인지 스스로 납득했다. 안된다고 내뱉기 전까지는 로랑 자신도 튠의 스킨십에 대해 특별한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튠이 로랑을 대하는 행동들은 자연스러웠고 로랑은 튠이 엉겨오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이제 와 그런 것들이 전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이유가 튠이 자라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은 어쩐지 조금 어설픈 이유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로랑은 타인에게 둘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상식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튠의 가슴께를 토닥이는 것으로 나머지 이유를 생각지도 않은 채로 묻어두기로 했다.




“로랑!”


 로랑은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에 책상 위에서 고개를 들어 문간을 걸어 들어오는 튠을 바라봤다. 튠은 이제 집안을 가볍게 뛰어다니지 않았고, 아마 그러고 싶어도 그의 거의 다 자란 몸이나 무게들이 그를 가볍게 뛰어다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튠은 오랫동안 로랑을 로라고 불렀다. 튠이 집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내내 그랬던 일인데 요즘의 튠은 이따금 로랑을 이름으로 불렀다. 로랑. 튠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름은 듣기 어색했고 로랑은 그가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 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 열 걸음은 되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로랑은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잉크에 적셔 두고 테이블을 짚은 튠의 손을 바라보다가 눈으로만 대답했다.


“단테가 한달 쯤 자기네 별장에서 지내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래도 돼?”


 튠은 금세 친구를 만들었다. 로랑의 눈앞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는 일들이었다. 단테는 크로잔계 귀족이었고 딱히 성품에 모난 데가 없어 로랑도 가끔 단테를 바라보며 저 정도 친구면 괜찮지 않느냐고 시올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지방 귀족 출신으로 출신을 따지는 데에는 넌더리가 난 시올이었지만 시올은 유독 튠에게만 엄하게 굴었다. 엄하게 구는 건지 단순히 튠이 마음에 들지 않는건지는 잘 구분이 가지 않았으나 어쨌든 시올은 단테를 보며 웃는 로랑을 보고 튠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겠느냐고 두어마디 건넸다. 튠의 부모는 여전히 찾지 못했고, 귀족 사회란 아무리 융통성있게 굴어도 결국 혈연과 지연으로 얽히는 사회였다. 누구의 양자나 누구의 양녀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만 다른 사생아이거나, 동생의 아들을 형이 데려와 키우는 식이었기 때문에 튠의 경우는 유별났다. 로랑은 자신의 친척중에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라고 얼버무려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튠을 처음 데려왔을 당시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튠의 하얗고 깨끗한 피부나 날 때부터 천상 귀족이었을 것 같은 여유로운 표정, 잘 배운 예절이나 같은 또래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외모 같은 것들이 소문을 조용히 흐르도록 얼추 잠재운 정도였다.

 로랑은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금세 친구가 되긴 했지만, 한달씩이나 단테의 별장에서 지낼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진 줄은 몰랐다. 아기새 날려 보낸 어미새 같군. 시올의 말이 떠올라 로랑은 튠을 바라보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너무 자신과 둘이 지낸 시간이 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로랑은 시올의 말을 떠올리고는, 왜 그러면 안되느냐고 눈을 깜박이며 묻던 튠을 떠올렸다. 튠과 로랑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단테의 이름이 천천히 경계선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로랑은 나지막히 신음했다. 로랑에게도 물러서야 할 때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지금만 해도 고작 한달을 친구의 별장에서 지내겠다는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지 않았던가. 로랑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튠의 짐은 튠이 온 뒤로 튠의 메이드를 자처했던 이제는 조금 나이가 든 메이드들이 쌌다. 튠이 좋아하는 향수들과 상자에 담은 커프스 단추들. 튠의 짐을 결국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모라벡이었지만 이따금 로랑은 짐을 싸는 튠의 방 문틀에 기대어 서서 튠의 짐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고 있기도 했다. 한달이나 지내는 터라 가져갈 옷도 장신구들도 많았다. 귀족의 별장이고 크로잔의 귀족이니, 별장에 내려가면 책이나 읽는 대신 승마나 사냥 같은 것들이 놀잇감의 주를 이루겠지만 로랑은 메이드를 시켜 꾸역꾸역 두어권의 책을 짐에 집어넣도록 했다. 그저 그가 짐을 풀었을 때 로랑의 저택에서 가져간 무엇들이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로랑은 튠에게 잘 다녀오라며 새로 주문한 두 쌍의 커프스 단추와 승마용 옷을 한 벌 사주었고 그것들은 다시 고스란히 튠의 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 튠에게서는 한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 도착한 당일 날 쓴 것으로 보이는 도착했다는 짤막한 서신하나가 전부였다. 로랑은 은쟁반 위에 올려져 모라벡의 손에서 전해지는 서신들 사이에서 늘 튠의 편지를 찾았지만 튠에게서는 한 통의 소식도 없었다. 밀랍으로 밀봉된 서신들은 전부 오찬이나 만찬, 무도회 같은 것들이었고 로랑은 튠이 없는 동안 시간이 겹치지 않는다면 받은 서신 중 대부분의 것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로랑은 바빴으나 즐거움은 살롱에 앉아있는 잠시 동안 뿐이었다. 젊은 애들은 바쁠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모라벡은 로랑을 두어번쯤 달랬으나 어쩐지 서운한 기색을 지울 수 없어 로랑은 집에서 와인을 마시는 대신 밤이면 무도회를 나섰다. 로랑의 열아홉, 스무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시 왕성해진 로랑의 등장을 기꺼이 반겼다. 시올이 거기에 덧붙여 이제야 어미새 노릇을 접고 포기할 줄 알게 되었느냐고 말했지만 로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올을 흘겨보고는 대답을 피했다. 로랑은 여전히 튠의 서신을 기다렸으나 모라벡은 로랑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눈을 마주치면 바로 고개를 저었다.






 로랑이 튠과 마주친 것은 무도회에서였다. 여느날처럼 무도회는 소란스러웠고 무도회의 주인공들은 대개 스물 안팎의, 또는 로랑 또래의 사람들이었다. 로랑은 그날도 시올과 크로잔의 귀부인들 그리고 몇몇의 인파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하며 샴페인으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는데 아직 돌아오겠다고 한 날까지는 이틀 남짓이 남았던 오랜 저택의 식구가 무도회장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랑의 침묵에 시올이 로랑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곧 튠에게로 시선을 두었으나 로랑은 그 짧은 침묵이 잠깐 목이 말랐던 것뿐인 것처럼 샴페인으로 목을 적시고 말을 이었다.

 튠은 그 사이 좀 더 자란 것처럼 보였다. 바르게 마주치지 않았던 눈높이가 이제는 정면을 향하면 바로 눈이 마주칠 것처럼 보였고 색이 짙은 페도라에 손목에서 반짝임이 이는 커프스 단추는 이전에는 로랑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고작 한달 남짓의 시간동안 눈에 띄게 변해버린 튠의 모습에 로랑은 아연해졌다. 막연히 생각해왔던 경계선들이 천천히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한 느낌이 들었다. 튠의 곁에는 연한 노란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있었는데 얼굴로 보아서는 사교계에 데뷔한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나이의 아가씨인 것처럼 보였다. 튠과 또래이거나 그보다 한두살이나 아래일까. 목에 두른 얇지만 반짝이는 목걸이나 질좋은 실크로 뽑은 옅은 색 드레스의 옷감 같은 것들이 제법 좋은 집안의 아가씨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여주었고 로랑은 튠보다 두어걸음 뒤에서 들어오는 단테를 보고는 별장에서 만난 사이는 아닌지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그 나이 또래들이 흔히 거치는 연애사업 때문에 바빳다면 한달 동안 소식이 없었던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정신차리게 로랑. 시올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로랑은 들고 있던 잔을 놓칠 뻔 했다. 로랑은 잔을 놓치는 대신 빈 잔을 들어 지나가는 풋맨의 쟁반 위에 올려두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로랑.”


 시올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멀리서 웃고 있는 튠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이마를 짚었다. 멀리서 로랑과 눈을 마주쳐 입 대신 눈으로 묻는 시올을 보고 로랑은 턱으로 응접실을 가리켰다. 로랑은 문이 없는 무도회장의 회랑을 지나 근처에 있던 풋맨의 도움을 받아 응접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열린 테라스를 넘어 무도회장에서 연주되고 있는 현악 4중주의 왈츠가 들려왔다. 로랑은 눈을 감고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실크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스트 룸으로 향할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벽시계의 초침소리를 천천히 셌다.



“로.”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로랑은 천천히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렸다. 초침 소리를 한 삼백쯤 세다가 놓친 뒤였다.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그 동안 조금 더 낮아지기라도 한 듯 어른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로랑은 팔로 소파를 누르며 상체를 일으켜 튠을 바라보고는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안녕 튠.”


 돌아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너무 구차한 질문인 것 같아 로랑은 말을 묻는 대신 웃는 얼굴로 대신했다. 튠은 천천히 다가와 로랑의 곁에 앉았고, 로랑의 얼굴은 튠을 향하지 않은 채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랑은 답지 않게 오랫동안 말을 아꼈다. 많이 멋있어 졌네. 로랑이 겨우 툭 내뱉은 소리에 튠이 소리내어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로랑은 그제서야 튠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튠의 옆얼굴을 쓸었다. 예뻐졌네. 로랑의 말에 튠이 다시 한 번 웃었다. 로랑은 복잡한 표정으로 튠을 바라보다가 튠의 소매에 눈을 두었다.


“로.”


 로랑은 왜 그렇게 부르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눈만 튠의 눈에 고정시켰다. 로랑의 표정은 피곤하고 복잡해보였다. 아마도 시올이 봤다면 튠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았느냐고 단단히 으르렁댈 만한 얼굴이었다. 튠의 공백은 너무 길었다. 어쩌면 희미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순간부터 지레 무언가가 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 한 쪽은 로랑이었는지도 몰랐다.


“잘 지냈어?”

“그래. 여전했어.”


“내가 없어도?”


 로랑은 어떻게 대답해야하는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다가 희미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을 메웠다. 튠이 한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것은 로랑이었다. 옆에 있던 아가씨 예뻐 보이던 걸. 정말 그렇게 생각해? 로랑은 웃었다. 그래.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좋은 집안 사람처럼 보였지. 네 나이에 나쁘지 않은 경험이네. 로랑이 드문드문 어렵게 말을 골라 잇는 동안 로랑은 튠의 얼굴 대신 튠의 목덜미께를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의 단추들은 단단하게 잠겨있었고 잘 다림질된 실크 커프스는 한쪽 끝이 둥근 금색 핀으로 고정되어있었다. 로랑은 튠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리고 로랑이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튠의 목덜지 언저리를 훑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도 몰랐다.


“로.”

“왜”


 튠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로랑은 불안하게 미간을 좁혔다.


“역시 마음이 없는 연애는 나쁜거야. 그렇지?”


 로는 나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로랑은 잠시 튠의 셔츠에서 고개를 들어 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튠은 해사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튠로랑 패러랠. 12살 튠이를 주워온 로랑 은 역키잡. 하이라이트 부분만 빠져습니다. 곧 업데이트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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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불쾌감이 감도는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있으면서도 로랑은 별 일 아닌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높은 모자를 쓰고 커프스 핀에 박힌 다이아몬드의 캐럿이나 견제하고 있을 늙은 노신사들이 테이블이 앉아 목소리를 한껏 억누른 채로 지지 않겠다는 듯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장면은, 황실에서 주최한 귀족회의의 내용과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보기에 꽤 즐거운 광경이었다. 서로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노아힘과 크로잔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볼만했다.


  노아힘과 크로잔을 한 자리에 모아놓을 정도면 황실과 소르디에도 꽤나 신경을 써서 마련한 자리일테지만 제국의 시작부터 권력을 잡아온 귀족들을 고작 이런 자리에 모아놓는다고 무르게 넘어갈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 예상했을 것이었다. 그 테이블에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 있는 귀족들 중 이것이 황비와 소르디에가 황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겠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이후를 걱정했다. 이를테면 그렇게 된다는 것조차도 상상해본 적 없는 변방 몰락 귀족이 된다거나, 또는 아예 그런 생각을 할 머리가 목 위에 남아있지 않을 경우의 수 같은 것들이었다.


  로랑은 정치나 외교, 역사 같은 것들을 들춰보는 시간에 차라리 검을 들고 기사들이 훈련하고 있는 연병장을 쏘다니는 쪽을 택하기는 했겠고, 대개 크로잔의 아들이 그런 성향을 띄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어쨌든 그것들은 대게 귀족들에게 필요한 소양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루에 두 시간씩 곁에 앉아 책의 행을 짚어주는 튜터가 있었다. 튜터가 열두살 된 로랑 크로잔에게 가르친 역사 중의 일부에는 어린 황제에게 황권을 쥐어주고 나면 흔히 일어나는 문제점들이 꽤나 자세히 얽혀 있었고 로랑은 열변을 토하는 소르디에의 귀족을 바라보며 늙고 깐깐했던 튜터를 떠올렸다. 카미와일의 손에 강력한 황권을 쥐어준다고 해도 카미와일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아 제법 똑똑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반드시 소르디에 밖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로랑은 오후가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해지는 대화를 바라보다가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회의실의 나무문이 열리자 얼마 안 있어 자리를 일어났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들이 언성을 높이다 말고 헛기침을 하는 모습은 보기에 나쁘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이런 자리는 로랑에게 그리 흥미를 끄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얼굴만 맞대도 으르렁거리던 표정들은 어디에 감췄는지 한껏 유행하는 보석과 장신구로 몸을 꾸민 귀족들을 보며 로랑은 연회장 한쪽 벽면에 몸을 기댄 채로 느긋하게 웃었다. 남자들의 치졸한 경쟁의식이라는 것은 저런 곳에서 흔히 드러난다. 눈썰미가 없는 이라면 발견하기 어려울 테지만, 커프스를 고정시키는 커프스 핀에 박힌 보석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가, 천박해보이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잘 세공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라거나 커프스단추가 정돈 된 모양부터, 들고 있는 지팡이가 얼마나 고가의 나무로 만들어졌는가와 같은 눈에는 띄지 않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될 수 있는 한은 한껏 기교를 부린 차림은 그렇지 않은 차림새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로랑은 저 멀리서 샴페인 잔을 든 채 호두나무를 깎아 만든 케인을 들고 적들의 사이에 섞여있는 숙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버슬을 넣어 한껏 부풀린 치마에 나이가 어린 소녀보다도, 나이가 많은 숙녀들이 곳곳에 잔뜩 리본을 단 모양새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좋은 밤이군요."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은 듯 로랑이 기억할 만큼 가까운 인물의 것은 아니어서 로랑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대신 들고 있던 잔을 눈높이만큼만 올렸다가 내려보였다. 


  "좋은 밤이군요." 


  로랑의 목소리는 간결하고 약간 웃음에 차있었다. 방금 전 까지 언성을 높이던 노신사들이 그 사이 표정을 바꾸고 사이사이로, 버슬로 부풀린 드레스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다른 가문의 뒷이야기를 하거나 또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장면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했고 황실의 연회에서 건네는 최고급 샴페인은 로랑의 입에 아주 잘 맞았다. 로랑은 남자가 그 귀여우리만치 우습고 격정적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었던가 행색과 얼굴을 보고 천천히 가늠했다. 그 테이블의 어디쯤에서 본 얼굴이더라. 로랑은 남자의 짙은 갈색 머리칼에 시선을 두고 머릿속에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자신과 좌우로 앉아있던 크로잔의 귀족들, 그 반대편에 앉은 노아힘과 사이에 앉아있던 소르디에를 훑어보다가 다시 남자의 눈에 시선을 두었다. 


  사교적인 그의 성격만큼 로랑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데도 능숙했다. 마호가니 빛 머리에 새파란 눈동자.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양 옆으로 갈리자 그는 쉽게 로랑에게까지 걸어 들어왔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악에 감싸여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오전과 오후의 회의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근근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내들은 물론 부인들 까지도 가지고 있는 보석 중에 가장 고급의 보석과, 가장 고급스러운 부채,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두르고 머리를 양껏 올려 화려하게 장식하고 자신의 가문을 감싸 돌며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로랑은 크로잔과 크로잔의 방계 귀부인들, 아니면 다른 가문과 결혼은 했으나 여전히 크로잔에 긍지를 가진 귀부인들과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들은 그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최소한의 거부감을 표시하듯 접고있던 부채를 펼쳐들어 뺨을 스치듯 부쳐대거나 입술을 가렸다. 


  로랑은 소르디에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를 떠올리고 천천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살롱에서 소르디에 귀족의 곁에 서 수도에 올라 온지 얼마 안 되었다고 인사를 건네던 소르디에 백작을 떠올렸다. 로랑은 샴페인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가볍게 웃었다. 


  “살롱에서 본 얼굴 같군요.”


  살롱에서 안면식이 있었다고 한들 이름을 나누지도 않을 만큼 잠시동안 조용히 머물다간 손님이었고, 연회장의 분위기가 아무리 활기에 차 유연해 보인다고는 해도 크로잔의 귀족과 귀부인에게 둘러싸인 크로잔의 사남의 앞에 소르디에 백작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었다. 풍성하게 부풀린 수많은 드레스 사이를 걸어 들어와 로랑에게 인사를 건넨 것만으로도 웃고 있는 표정과는 달리 대단한 수완이었다.


  “튠 소르디에입니다. 말씀대로 살롱에서 뵌 적이 있죠.”


  튠은 선하게 웃으며 로랑의 악수에 가볍게 손을 잡아 응답했다. 답답하게 보일 만큼 격식을 차린 옷차림은 커프스단추나 핀, 커프스나 소매 끝, 셔츠의 칼라나 베스트의 단추 개수까지 흠 잡을데 없이 정교했다. 파티에 어울리기에는 화려한 붉은색 커프스로 멋을 낸 로랑에 비해 점잖은 신사다운 맛이 있었으나 어쨌든 그와 두세번 얼굴만 마주한다면 그 뒤로는 멀리서 옷차림만 보아도 그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꼭 차려입은 갖춤새였다. 뒤가 비쳐 보일 것처럼 예리한 색의 눈동자인데도 튠은 눈을 휘며 웃었고, 방어적으로 부채를 펼친 크로잔의 귀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도 정중하고도 거리낌 없이 굴었다. 


  튠은 그 자리가, 로랑 크로잔과 크로잔의 부인들 그리고 멀리서 로랑의 숙부가 다가오고 있는 그 무리가  자신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이 정중하면서도 민감한 소재를 꺼내지 않으면서 대화를 이었다. 회의는 따분하고도 민감한 소재였음으로 그의 대화는 주로 파티나, 귀부인들의 옷차림에 대한 칭찬, 아름다움에 대한 약간은 웃음이 섞인 기분 좋은 농담 같은 것들이었고 로랑은 점차 부채로 붉게 물든 홍조를 가리는 젊은 영애들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지나가는 하인에게서 샴페인 잔을 집어 들어 튠에게 건넸다. 로랑의 흥미는 대개 샴페인의 맛이나 사람들과의 대화에 있었고, 일생에 다시는 없을,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아주 좋은 타이밍으로 황실 연회로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 몇 몇의 젊고 귀여운 영애들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녀들은 대개 방계 귀족의 혈통이었지만 황실 연회와 사교계 데뷔인 만큼 아주 적은 나이였고,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는 아주 들뜬 얼굴로 몇 몇 남자의 손을 거쳐 에스코트를 받으며 춤을 추느라 오늘 하루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수도에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백작이면 아직은 소문에 둔감할 거라고 지레 짐작한 로랑은 그런 몇 가지의 귀엽고도 소소한 이야기를 그에게 건네고는 이따금 부인들에게로 눈을 돌려 그녀들이 데뷔할 즈음의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이제는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된 부인들도 옛일을 떠올리며 수줍게 웃었고 로랑은 다 비운 샴페인 잔을 하인에게 건네며 새로운 잔을 받아 들었다. 밤은 길었고 로랑은 술을 좋아했다. 밤을 지낼 만큼은 충분히.

  한차례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나자 튠은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또 뵙도록 하죠.”


  로랑의 눈은 바르게 마주쳐오는 튠의 눈동자에 한참동안이나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크로잔에게 둘러싸여서는 적당히 빠져나갈 때를 아는 것처럼 가뿐한 인사를 건네고 무리에서 걸어 나갔다. 로랑은 그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또 뵙겠다는 말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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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부인.”


마담 브룩의 살롱은 작고 아담했지만 로랑이 좋아하는 곳 중에 하나였다. 그녀의 요리사가 구워내는 마들렌은 속이 부드럽고 맛이 있었고 그녀는 말 대신 단순한 손짓과 눈빛으로도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고 다루어야하는지 아는 보기 드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녀의 다른 모든 장점을 인간답게 만들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매사 사교계의 뒷소문에 집착이라고 부를 만큼 호기심이 많았다. 마담 브룩은 소곤소곤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에서 문틈 사이로 집사가 건넨 작은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고 버터 나이프로 끝을 톡톡 잘라냈다. 로랑은 몇몇의 부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소파에 등을 깊이 묻은 채로 흘려들으며 브룩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녀는 표정을 유지하려 애써 한 손을 코르셋으로 잔뜩 조여 올린 풍만한 가슴위에 얹은 채 숨을 천천히 내쉬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놀라움과 당황을 로랑은 분명하게 읽어냈다.


“여러분.”


그녀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났고 아주 가늘게 떨렸다.


“메르디가 죽었다는군요.”


찻잔을 기울이던 노신사가 놀라운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는 도중에, 하늘색 공단으로 된 드레스를 입은 열다섯의 영애가 그녀의 어머니의 프릴이 달린 소맷자락을 당겼다. 어머니, 메르디가 누구에요? 사교계 데뷔 전까지는 집안에서 이백캐럿쯤 되는 다이아몬드처럼 곱게 자랐을 영애라면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도 남았다. 로랑도 그가 그렇게 사교계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자신의 말의 목을 잘라낸 소르디에의 기사를 알지 못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이름이었다. 


속된 말로 창부라고 부르겠지만 로랑은 메르디를 만난 뒤에는 적어도 그녀의 소녀다운 매력 속에 은밀하게 발산해내는 가치를 높게 사고 있었다. 속된 말로 그녀를 이르기에 로랑이 만난 그녀는 단순히 예쁘고 좋은 것을 조금 더 잘 분별해내는 정도의 미모가 돋보이는 여자였을 뿐이다. 그녀는 로랑의 살롱 뒷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오래된 목걸이나 귀걸이 따위를 보며 즐거워했고, 무료해하는 메르디를 위해 로랑이 불러준 재단사들 앞에서는 더더욱 세련된 안목으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옷감을 골라냈다. 그녀는 몇 가지의 실크를 로랑에게 추천했고 그녀의 드레스가 가봉되기 훨씬 전에 로랑의 블라우스는 그의 옷장에 걸려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로랑은 그녀가 본래의 직업에서 어땠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좋지 않은 이유로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온 메르디와 꽤 재미있게 지냈다. 그녀의 아들이 우려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안타깝게 됐군.”


노신사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년의 그녀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이 먼 곳을 응시하는 눈길에 로랑은 베어 문 흔적이 남은 마들렌을 찻잔 위에 내려놓고 마담을 보고 가볍게 웃어보였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로랑은 아쉬운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애를 향해서 가뿐히 페도라를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인사하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그 뒤로 적어도 일주일, 이주에 한번은 메르디에게서 편지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유쾌했고 로랑은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 쉽게 흥미를 느끼고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여전히 이상할만큼 아름다운 것을 제외하면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귀족들 사이에 밀봉된 편지로 소문이 돌 정도라면 확실히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찾아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어디에선가 소문이 퍼져야했다. 왕년에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했던 여자라면 언제 신변에 위협이 가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녀는 숨겨진 수많은 귀족 부인들을 연적으로 둔 셈이었고 귀족의 손속이란 본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든지 뻗어나가는 법이어서 부인들이 여태 그녀에게 어떤 음독이나 위협도 가하지 않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선언하고 지금까지도 생활을 유지할 만큼 위협 속에서도 버텨온 여자였다. 확실히 지나치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로랑의 개인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로랑은 버틀러에게서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었다. 마담 브룩이 아닌 크로잔의 방계 귀족이면서 로랑의 먼 고모뻘이 되는 여자로부터의 편지는 마담 브룩이 받은 편지처럼 메르디의 죽음을 시사했다. 로랑은 작은 그의 응접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가려다가 복도 끝에서부터 메이드가 들고 오는 그녀의 몸통만한 박스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가봉된 드레스가 오늘 도착했는데요. 주인님.”

“입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처리하도록 해.”


메르디가 로랑의 저택 게스트룸에서 가봉을 맞춘 드레스는 이제 막 손으로 마감이 된 모양이었다. 베이비 핑크의 보는 것만으로도 달착지근할 것 같은 박스를 바라보다가 로랑은 책상 위에 거칠게 봉인이 뜯긴 편지를 던져두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주인님.”


서재의 책장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집사였다. 로랑은 책상 위에 리본과 밀봉의 형태별로 분류되어 쌓아올려진 초대장과 편지들을 검지 끝으로 헤집다가 모습을 드러낸 그를 바라봤다. 손님이 도착 하셨는데요. 개인적인 일로 저택에 출입하는 이들은 대게 언질이나 약속을 주기 마련이다. 그도 아니면서 로랑의 저택을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약속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데에서 로랑은 어림짐작으로 누구인지 대상을 가늠했다. 


“응접실 말고, 비워둔 게스트룸으로 안내해주겠나.” 


좋은 상태는 아닐 것 같아서 말이야.







“...도와줘.”


로랑은 대뜸 도와달라고 말하는 남자의 어깨를 잡아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도와달라는 말만으로도 로랑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했다. 소르디에의 충성스러운 사냥개. 메르디를 닮은 기사. 먼 고모의 편지는 마담 브룩의 한마디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이를테면 발견된 당시 이미 시신은 차가웠다거나, 매우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어있었던 것 같다는 것. 귀부인들의 사이에 도는 풍문은 대개 지저분한 염문설이 많았지만 정보가 흐려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루머는 그녀들의 개인적인 푸념과 의견만 제외한다면 비교적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독이라고 했나?”


비올은 파리하고 지친 기색이었다. 메르디를 닮은 녹색 눈만이 마치 이승에 미련이 있는 망자처럼 흉흉하게 빛났다. 그는 로랑이 마지막으로 본, 검을 쥐고 그대로 베어들어올 것처럼 힘 있는 모습도 아니었고 분노나 울분에 찬 표정도 아니었다. 지나치게 큰 충격이 그의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간 탓에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질린 듯한 낯빛을 바라보며 로랑은 그가 말하는 독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런 것이 있다고 풍문에 듣기는 했다. 취향이 나쁜 귀족 중에는 독거미나 독이 있는 파충류 따위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제법 되었고 뒤처리를 깔끔히 하기위해 공모자를 죽이기 위한 독도 흔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흔적이 남지 않는 독은 비쌌고, 비싸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주로 쓰였다.


“쉬고있게.”


로랑은 서재 책상 위에 놓여있던 편지들과 메모들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개 중에 그의 질문을 해소시켜줄만한 인물들과, 소문이 돌만한 오찬과 만찬. 화제는 로랑이 언급하지 않아도 메르디가 중심에 있을 테니 몇 군데만 참석해도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을 수 있을 거였다. 로랑은 집사에게 펜과 종이를 받아들어 가끔 포커를 치던 정보상의 아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쪽을 통해 들어두면 될거다. 외투를 든 버틀러에게로 몸을 틀다가 로랑은 뒤를 돌아봤다. 


텅 빈 채로 반짝이는 녹색 눈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손에 눈길을 주었다.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잡아챈 것처럼 소매를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있으면, 안되나. 아직 어린 로랑을 두고 저만치 걸어가던 형들의 소매를 붙잡고 조르던 제 모습이 저렇게 간절했을까 싶어서 로랑은 몸을 돌려 비올을 보고 선채로 달래듯 어깨를 두드렸다. 


“금방 다녀오지. 오래는 걸리지 않을테니 기다리고 있게.”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어린아이처럼 애써 표정을 숨기며 매달리는 시선에 로랑은 오랫동안 몸을 돌려 선 채로 비올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랑은 버틀러가 건네는 외투에 팔을 밀어 넣고 외투의 앞 버튼을 채우고는 낮은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남자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저보다 조금 낮은 붉은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경.”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 뒤로 불안한 표정이 보이는 것은 상황과 그의 파리한 안색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로랑은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고 그를 보며 힘을 풀고 편안하게 웃었다. 


“나는 메르디가 아니야. 금방 다녀오지.”


무사히 돌아와서, 경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해주겠네.

다른 귀족의 타살을 밝혀내는 것이 손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아마 그가 원하는 만큼의 정보는 충분히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버틀러가 비올의 어깨를 잡고 소파에 도로 앉혀두는 것을 보고 로랑은 몸을 돌려 게스트룸을 벗어났다. 그에게 잡혀있던 소매가 여전히 잡혀있는 것처럼 느껴져 시선을 닫힌 문 뒤로 던지다가 로랑은 무릎을 굽혀 로랑을 올려다보며 흐트러진 커프스를 핀으로 정돈하는 버틀러를 내려다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모라벡.”

“예 주인님.”


“...그를 좀 재우게. 식사를 해야 할 것 같더군.”



with 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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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k

메이드는 아이보리색 패브릭으로 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책을 읽는 로랑의 곁을 지나 사람의 키만큼 큰 응접실의 창을 열고 엷은 커튼을 양 옆으로 걷어 리본으로 묶었다. 로랑의 저택에 심어진 이국적인 꽃나무들도 꽃잎을 거의 떨궈 내고는 푸르게 잎을 내고 있었다. 창을 열자 목덜미가 가볍게 서늘해 질만큼 기분 좋게 들어오는 바람에 로랑은 눈을 들어 열린 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책에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머니의 고급스러운 취향대로 아이보리색 패브릭에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면서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엇갈려 꼰 다리 위에 책을 얹은 채로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주인님.”


로랑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의 버틀러를 바라봤다. 모라벡.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고 비켜선 집사의 모습 뒤로 시올은 옆구리에 네권의 책을 힘겹게 든 채로 응접실 문 앞에 서있었다. 그의 행색은 클렘버리 도서관에 다녀오기라도 한 듯 간소했고, 책의 옆면에는 책의 커버를 떼어내 다시 한 번 귀족식으로 양장을 한 듯 붉은 양가죽 위에 음각으로 클렘버리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지치지 않는 취미군 시올.”


로랑은 허벅지 위에 올려 높은 책을 덮고 오래된 친우를 바라보고는 앉으라는 듯 턱으로 반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로랑의 책은 그의 취향대로 녹색 표지를 씌워 양장을 해놓았고, 굳이 그러하지 않더라도 시올은 그가 읽고 있었던 책이 클렘버리 서가에서 찾기보다는 로랑의 서가에서 찾는 쪽이 쉬운 책의 일종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의 책은 대부분 예술과 상업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로랑의 책에는 그 중에도 화가가 세필로 그린 그림들이 삽화되어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로랑이 덮는 책 사이에서 제국의 오래된 보물 중의 하나인 목걸이의 그림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시올은 로랑의 응접실을 한 눈에 담고는 금세 아연해졌다. 그 사이 로랑의 응접실은 가구의 배치가 바뀐 듯 밝은 크림색 풍경 가운데에 값비싼 마호가니로 깎아 만든 넓은 소파가 들어서 있었다. 

로랑의 응접실은 비교적 클래식하고 유행을 타지 않는 제법 유망한 귀족가의 응접실다운 맛이 있었으나 본래 오래된 것들이 늘 그렇듯 로랑이 늘 앉는 넓은 소파를 제외하면 오랫동안 머무르기에 편안한 곳은 아니었다. 로랑의 어머니는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응접실은 격의 있고 무난하되 게스트룸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오래되고 전통있는 가문의 귀부인들에게는 대개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어쨌든 로랑이 크로잔의 저택에서 나와 홀로 저택을 구입했을 때 그의 저택의 대부분의 방들은 그녀의 오래된 지론에 나름의 매력을 느낀 로랑에 의해 그녀의 마음에 들도록 설계되고 지어졌으나, 하나쯤 그녀가 놓친 것이 있다면 대부분의 방에 난 바람이 드는 테라스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들의 정부를 끌어들이는데도 용이했다는 점 정도였을 것이다.


시올은 로랑의 어머니가 보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숨기지 않고 눈살을 좁힐 만한 짙은 색의 소파를 보고 잠시 로랑을 바라보았다. 로랑의 변덕은 시올도 익히 알고 있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오래도록 달라지는 것이라고는 들르는 사람들의 얼굴 정도였던 곳에 새로운 가구가 들어온 것에는 시올 조차 적지 않게 놀랐다. 로랑은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 마호가니 색 소파에 앉으려는 시올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시올.”


시올은 로랑의 목소리에 몸짓을 멈추고는 로랑을 바라봤고 로랑은 다시 책을 펼쳐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 소파는 주인이 있어.”


  그 옆에 앉게. 그의 버틀러가 따듯하게 덥혀진 찻잔에 맑은 차를 우려내는 것을 눈으로 쫓던 로랑의 반대편에서 시올은 크림색 소파 위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로랑은 시올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세층으로 나뉜 디저트 그릇 위에서 마카롱을 들어 베어 물었다. 


“로랑. 설마 그 소문 사실이었나?”

“소문이라니.”


“소르디에 백작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

“내가 언제는 다른 가문의 사람이라고 배척하기라도 했었나.”


로랑은 시올의 어딘가 날이 선 말투에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보이고는 책으로 눈을 돌렸다. 시올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소파에 앉아 몇 번이나 자신이 가져온 책의 표지를 펼쳤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소르디에의 백작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났었나. 확연히 본인의 풍문은 본인의 귀에 들어오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더구나 그리 악질적이거나 호의적이지 않은 어느 쪽도 아닌 소문이란 더더욱 그랬다. 시올이 소르디에 백작이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소르디에에는 몇이나 되는 백작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 있을 터였지만 로랑은 단번에 시올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분명 소문이 난 ‘소르디에 백작’ 본인의 입으로, 염문이 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웃음 섞인 말을 듣기는 했으나 단순히 어울려 다닌다는 종류의 소문이 날 줄은 로랑도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로랑은 턱을 괸 채 가볍게 목청을 울리며 웃었다. 


로랑의 응접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눈에 확연할 만큼 존재감이 남다른 소파였으니 그의 존재도 부각될 법 했다. 로랑은 튠이 응접실에 자신이 사용할 만한 편안한 소파를 놓아달라고 했을 때 흔쾌이 그러겠다고 했다. 로랑 크로잔의 살롱에 모임이 있을 때면 늘 짙은 색의 소파에 앉아있는 소르디에 백작이라면 거기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화젯거리가 되기는 했을 것이다. 로랑이 짐작한대로 호의적이지도 악질적이지도 않은 종류의 단순히 흥미롭거나 재미있는 종류의 이야기였겠으나. 소파만 보고도 그 소파에 앉아 로랑과 어울리는 사람인지 시올이 알아맞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로랑은 소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시올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풍문에 어두웠지만 모쪼록 크로잔과의 연고가 그에게 그런 풍문을 듣게 했으리라.  


“그런 말이 아니잖나.”

“그러면?”


“가문 간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그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크로잔을 욕보인 일이 없어 시올.”


그 정도면 자네가 염려하는 일은 줄어든 셈인데. 로랑은 표정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책에서 시선을 떼어 소파의 끝에 몸을 내밀고 걸터앉은 채로 로랑을 바라보는 시올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고 로랑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는 채로 습관처럼 타인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자.”


로랑은 약간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여는 시올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로 눈을 맞췄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안 좋은 소문이 있어”

“내가 모르는 소문을 네가 알 리가.”

“그래서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잖은가.”


“시올.”


로랑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깔려있었다. 크로잔의 귀족이 왜 별 볼일 없는 말단 귀족과 어울려 다니시나요? 철없는 영애가 시올을 가리키며 로랑에게 비아냥거렸을 때 영애의 이름을 다그치던 목소리와 흡사해서 시올은 손에서 책을 내려놓고 로랑의 표정을 훑었다. 로랑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로랑은 보기 드물게 표정을 지운 채로 시올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백하게 듣고 싶지 않다는 말에 시올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소파에 등을 기대며 혀를 찼다.


“로. 나는 네가 이렇게 무른 걸 본적이 없어.”

“나는 네게도 물러. 오, 시올 정말 드디어 그 머리가 쓸모없게 되었나.”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닐세.”


시올은 로랑이 아마도,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이 로랑을 생각하는 것 보다 두어배는 더 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로랑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를 믿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보는 로랑은 이따금 오만했고 아무리 격식을 차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이를테면 뒷골목의 정보상의 아들이나 졸부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낮추어보지 않는다고 해도 로랑이 뼛속까지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 중의 하나임을 정확하게 알았다. 로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침마다 그의 메이드와 버틀러의 손길에 의해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시올은, 때문에 로랑을 걱정했다. 로랑이 시올이 사랑하는 남작영애가 좋아하는 그림을 시올에게 일러주며 그를 걱정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시올이 로랑과 만나게 된 뒤에도 로랑은 그에게 선 이상으로 무른 적 없었다. 정이 많았으나 줄 수 있는 것을 주고나면 로랑은 되려 당당해졌다.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주인이 있는 소파라니. 


“시올.”


시올은 로랑의 목소리에 결국 입을 닫았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었다.









“도착하셨습니다.”


아마도 로랑이 그에게 지고 만 것은 로랑이 허락하지 않아도 튠은 응접실에 앉아 있다가 기어코 어느 순간 자신의 침실을 찾아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로랑의 버틀러 모라벡은 튠 소르디에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일견 적대적이라고 할만큼 유독 로랑의 많은 손님들 가운데에서도 그에게만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튠의 고집이 더 지독했는지도 몰랐다. 로랑은 집사인 모라벡에게 어머니가 꾸며놓은 응접실에 소파가 들어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한 때 직접적으로 물어보았으나 모라벡은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본래 말 수가 적은 남자였기 때문에 자세한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으나, 시간을 두고 보니 아마 단순히 튠이 지나치게 고집스러웠던 탓일지도 몰랐다. 로랑의 침실에 들어오겠다는 뜻을 드러낸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을 뿐 아마 시올이 그러겠다고 했더라도 로랑은 그만 두는게 좋을 거라고 대답했을지도 몰랐다. 


튠은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로랑은 열에 취해있었고 지난번 타국의 독감이 제국을 휩쓸었을 때에도 건강하게 종종 사냥회에 나가고는 했던 로랑은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독감에 땀으로 젖어 금방이라도 침대 밑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느꼈다. 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푹 젖어 있는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저지한 것은 로랑에게도 달가운 일이었으나 닫힌 문을 뒤로하고 문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버틀러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걱정스러워 로랑은 모라벡의 눈빛에 시올의 눈빛을 겹쳐 보며 힘없이 웃었다. 많이 아프다며.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울 만큼 다정한 음색으로 머리를 짚어오는 손길에 로랑은 말을 내뱉는 대신 눈으로 그의 눈을 좇았다. 차가운 손이 눅눅하게 젖은 몸을 천천히 짚어나가는 것을 내버려 두며 짙은 색 머리칼 아래로 가려진, 늘 그렇듯 눈길을 피하는 눈매를 바라봤다. 그는 습관처럼 늘 눈을 피했고, 로랑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를 충분히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많이 아프면 내가 비방을 알고 있는데.”


튠. 로랑의 낮은 목소리에도 튠은 저지되지 않았다. 독한 감기가 옮을까 그를 만류했지만 아마도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로랑은 이미 그가 그런 부름으로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로. 나는 네가 이렇게 무른 걸 본적이 없어.’


몸을 숙여 입을 맞추는 어깨를 밀어내기에 몸은 물을 먹은 듯 무거웠으나 로랑은 가까워지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대신해 눈을 감으면서 시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마도 로랑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로랑은 사람에게 물렀으나, 적어도 로랑은 시올이 생각하는 로랑 이상으로 그에게 물렀다. 호의와 애정이 뒤섞인 튠의 애정표현은 이따금 아니 그보다 빈번하게 아이 같았다. 

혀가 뒤섞인 입맞춤은 아이라고 보기에는 분명히 자극적인 것이었지만 로랑은 마치 자신의 방인 양 익숙하게 협탁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와 젖은 입술을 닦는 튠의 손길을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지켜봤다. 뒷목을 잡은 손은 그의 다정한 손길과는 반대로 서늘할 만큼 기분 좋게 차가웠고 로랑은 그가 물을 흘려보내는 대로 그를 놔두었다. 열 때문에 머리를 내리치는 것처럼 아득하게 밀려오는 두통 가운데서 로랑은 떠오르는 시올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가 유독 고집이 세거나 혹은 정말로 자신이 지나치게 물렀다. 


“집사는 나가있게 해.”


눕고 싶은데 저 자가 보고 있으면 체면에 흠이 가니까. 뒤이어 들려오는 말은 지나치게 튠 다워서 로랑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힘이 빠진 표정으로 웃었다. 모라벡. 가볍게 이름을 부르는 말에 집사는 내키지 않는 눈으로 로랑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고 튠은 그 사이를 틈타 금세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튠”


비스듬히 뉘인 몸 뒤로 몸이 닿아와 로랑은 조용히 그를 저지했다. 목덜미 이곳저곳에 짐승이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몸을 부대껴오는 몸짓에 로랑은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튠 소르디에가 로랑의 옷자락에 짙은 홍차를 쏟았을 때도 그랬다. 수건으로 로랑의 옷가지를 닦는 모라벡을 바라보던 그는 옷을 갈아입겠다는 로랑을 기어코 침실까지 따라와 제가 옷을 입혀주겠다며 웃었다. 마치 네가 하는 건 나도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아이 같아 실갱이 끝에 그를 그렇게 하도록 두었을 때부터 로랑은 물렀는지도 몰랐다. 시중을 들만한 태생이 아닌 탓에 어설프게 등 뒤에서 로랑의 블라우스를 오랜 시간을 들여 입히는 동안에도 로랑은 슬그머니 장난을 쳐오는 손길에 눈을 감은 채로 나지막히 목소리를 낮추어 그를 저지했다. 그는 곧게 등을 세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자세로 로랑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신발 끈을 매었고 로랑은 그가 답례로 키스를 요구할 때도 결국은 그렇게 해주었다. 


"로랑.“


로랑 크로잔은 다시 손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행동에 몸에 힘을 뺀 채로 그가 다시금 치근거리도록 놓아두다가 뒤이은 말에 느리게 감았던 눈을 떴다. 왼손 약지에 서늘한 금속이 닿아 열이 오른 몸에 등골부터 한기가 흘렀다. 익숙한 손에 쥐인 채로 반지를 끼운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비스듬히 뉘인 몸을 천천히 천장을 향하도록 움직여 눕힌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튠. 친우가 날 보고 자네에게 너무 무르다고 하더군.”


열이 오르고 아파서 지친 사람에게 도망갈 만한 틈도 주지 않은 채로 반지를 준비한 것이 그다웠다. 


확실히 그런 것 같네”


로랑은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받아들이지 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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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답


"주인님."


로랑은 지금 막 메이드가 앳된 손길로 가쁘게 동여맨 머리칼을 확인하다가 집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흰 커프스를 노란 호박이 박힌 버튼으로 목에 고정시키고 애써 정돈한 소매의 커프스 단추를 풀러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집사가 건네는 유리잔을 받아들어 목을 축이면서 로랑은 은쟁반 위에 작게 접힌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표정이 안 좋군."

"좋아하실만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메모를 가지고 온 기사의 표정이 어두워서요. 말을 덧붙이는 집사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로 로랑은 목덜미와 손목에 향수를 뿌렸다. 짙은 냄새가 머물렀다가 코 끝에 스칠만큼 미미한 향만 남도록 천천히 희미해졌다. 


"커튼을 좀 걷어 주겠나."


절제된 구두소리를 듣다가 커튼을 걷자 따듯한 볕에 더불어 안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로랑은 가볍게 웃다가 도로 미간을 지푸렸다. 확실히 웃을만한 일은 아니었다. 메모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담고 있었고 로랑은 종이를 다시 원래대로 접어 쟁반위에 올려놓았다. 뒤에서 메이드의 손길이 멈칫거리는 것을 느끼다가 가볍게 손길을 걷어내고 로랑은 자리를 일어섰다. 


"백작과 약속한 오찬을 취소해야겠군."

"무슨 일이십니까?"


로랑은 말없이 쟁반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는 거울 곁의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집사가 메모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외투를 걸치고 소매 끝을 내렸다. 로랑은 문간에 잠시 서서 지팡이를 가져갈까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떼었다. 아. 등 뒤에서 집사의 탄식이 들렸다. 그는 로랑이 이 일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로랑은 여유가 생기면 곧장 승마나 사냥을 즐겼고 그의 여가는 로랑에게 익숙한 시올 마저 이따금 찾아와 혀를 찰 정도였다. 


지난해 여름에만 해도 지방에 내려간 동안 두 차례나 확인한 말이다. 내년쯤이면 데리고 갈 수 있겠다고 하는 시종의 말에 로랑은 그 때도 말 없이 웃어보이기만 했을 뿐이다. 말을 탐내는 이는 아주 많았지만 수도 안에서 그 말의 몸값을 치룰 만큼 돈이 있는 귀족은 몇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말에게 이렇게나 애착을 가지는 것도 로랑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값을 치루고 나면 큰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덩치는 조금 작지만 혈통이 좋았고, 잘 달리고 잘 먹인 말은 균형 잡힌 근육에 재빠르다고 할 만큼 걸음이 빨랐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고삐를 쥐지 못하도록 제멋대로 구는 점도 구미에 맞았다. 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목을 벤 것이라면 확실하게 악의가 담긴 짓이다. 고작 말을 데리러 간 것뿐인 기사들이 상처를 입고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검술을 갈고 닦는데 게을렀다는 비난보다 앞서 고대하고 있던 사유 재산 뿐만 아니라 가문의 기사까지 죽인 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로랑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이것 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을 만큼.

로랑의 살롱에 모이는 손님의 대부분이 그 말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로랑의 마굿간에 있는 죽은 말의 어미의 얼굴을 한 번 씩은 본적이 있었다. 로랑은 자신 몫의 아침만이 차려진 길고 화려한 테이블 위에 앉아 스튜를 뜨면서 집사에게 몇 군데에 서신을 보내라고 말했다. 그는 만나볼 사람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메르디."


로랑은 마차에서 내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저택을 둘러보는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흰 손을 잡아 가볍게 손등에 입을 맞추고 로랑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반걸음 앞에서 걸었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언질을 해둔 메이드 둘이 나와 여자를 맞았다. 나이를 짐작하기에는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연륜이 묻어나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복도 끝에 서서 방문 하나를 열어 젖혔다. 흔히 살롱에 온 귀부인들의 게스트룸으로 종종 사용되는 방은 볕이 잘 들었고, 밤에는 열린 테라스로 비밀리에 정부를 끌어들이기에 좋았다. 엷은 반투명한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빛으로 환한 방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그녀가 발걸음을 딛기 쉽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벽난로를 쓰기에는 따듯한 계절이어서 벽난로는 잘 손질되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지금 막 메이드 하나가 노란 장미를 담은 꽃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급히 준비한 객실이다 보니 여전히 손이 갈 곳이 두어군데 있기는 하겠지만 그녀가 머무는 동안에 해도 충분한 일이었다.

확실히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크로잔에는 연고가 없는 인물이다. 숙부나 백부쯤에서 한번은 연이 닿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로랑이 알고 있는 한에서는 메르디는 크로잔과 연이 없었다. 단지 귀족들 사이의 풍문으로 들었을 뿐, 로랑이 사교계에 나설 즈음에는 메르디도 은퇴한 뒤였고 그래서 더더욱 그는 메르디와 연이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마차는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을 테고 제대로 그녀에게 뭔가를 설명했을 만한 말재간이 있는 인물도 없어서 로랑은 그녀를 목재로 솜씨 좋게 깎은 의자에 앉히고 의아한 표정을 한 그녀와 눈을 맞췄다.


"가까운 분이 잠시 당신을 데리고 있어달라고 하더군요."


“자세한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불편하게 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멋대로 초대 드린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만.”


귀족의 손속이라는게 까다롭기 보다는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은데다가 로랑은 더욱 그런것을 신경쓰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될 수 있는 만큼 사용한다. 메르디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로랑은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라도 지금 그녀를 저택에 잡아 두어야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하루나 이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뭐든 구해다 드리죠. 따분하면 살롱 안쪽 방을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 경매에 나가기 전인 보석이 제법 되니 심심하진 않으실 겁니다. 아니면 오늘 밤에는 살롱에 모임이 있으니 그쪽도 재미있을 겁니다.”


로랑은 여전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메르디를 바라보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표정을 풀고 웃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한 번 더 속삭이고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메이드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로랑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정확하기만 하다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어있는 옷장을 열고 몇 벌의 드레스와 구두를 채워 넣고,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향수와 보석들을 올려놓는 어린 메이드들에게는 메르디의 시중을 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필요하거나 절 불러야하면 곁에 있는 메이드에게 말하세요.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겐 당신과 있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테니까요."

“그 정도의 경험이라면 얼마든지 시켜줄게요.”


새침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보며 로랑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준 말의 목은 잘 받았네."


저 이가 비올인데요. 면회를 위해 자신의 소속을 확인하던 사람에게 묻자 그는 눈 앞에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자신을 기사들의 연병장으로 안내했다. 크로잔의 기사가 말한 대로 붉은 머리였다. 아무리 잘 위장을 하더라도 머리칼이 조금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찾기 수월할 만큼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은 눈에 띄었다. 돌아보는 잔뜩 지푸려진 얼굴에 메르디를 닮은 곳이 이곳저곳에서 엿보여 로랑은 아직 감정이 끝나지 않은 보석들을 보며 소녀처럼 웃던 여자를 떠올리고 엷게 웃었다. 


"혹시 집에 누가 들렀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나?"

“집?”


로랑은 그가 로랑의 말을 이해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시간은 많았고 괜히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집을 비운 로랑과, 로랑의 집에 갑작스레 자리를 잡은 메르디를 보면 시올에게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듣겠지만 이런 종류의 긴장감을 로랑은 싫어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는 대신 비올을 보고 웃으면서 로랑은 들끓는 불유쾌함과 긴장감을 조용히 갈무리했다. 말이야 다시 얻으면 되지만 제 말의 목을 베고 크로잔의 기사를 상처 입히고도 그냥 지나치리라 생각했으면 아마 잘못된 계획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로랑의 성미를 제대로 몰랐거나.  


"메르디한테 무슨 짓 했어?"


"사람은 빼앗긴 것 보다 더 많이 빼앗아야 만족을 하지. 비올 경."


로랑은 검을 겨누어 든 비올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로랑은 충분히 검을 빼어들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로랑은 그에게 좀 더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해보라는 듯 두 손에 장갑을 낀 채로 두 다리에 부드럽게 힘을 풀고 서있었다. 로랑은 비올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때까지 조급함 없이 기다리며 웃었다. 그는 걸려온 싸움을 봐주는 법이 없었고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최대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방법으로, 가장 거창하지 않으면서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는 법을 좋아했다. 로랑은 그의 실력에 비해 검의 손속이 거친 편이 아니었고, 그의 검은 방어적이지는 않으나 필요하지 않으면 내지르지 않았다. 검을 뽑지 않아도 로랑에게는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로랑이 그들과 어울리는 만큼 그들은 그의 눈과 발이 되었다. 


로랑은 살롱에 앉아 영애들의 결혼식과 아들의 작위를 논하는 것만으로 보이는 귀부인들의 입이 얼마나 가볍고 빠른지 알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는 아니어도 한 때 귀족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메르디의 이야기라면 방계 혈족의 결혼식 얘기보다도 훨씬 얘깃거리가 많았다. 메르디에게는 그녀를 닮은 아들이 있었고, 메르디를 끔찍이 여기는 아들의 인상착의가 로랑이 찾는 이의 인상착의와 흡사하다면 거기서부터 일은 아주 손쉽게 변했다. 로랑은 몇 군데에 더 편지를 돌릴 필요도 없이 마담 브룩의 아주 간소한 오찬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로랑은 남자의 표정이 천천히 궁지에 몰리는 것을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급할 것은 없었다. 메르디는 로랑의 저택에 있었고, 로랑과 마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로랑의 저택에는 수십명의 사병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로랑이 그와 헤어지고 난 뒤에는 더 덧붙일 것도 없었다. 


"경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소르디에의 사주인가. 

로랑이 덧붙이는 말에도 비올은 말없이 서있었다. 기사면서 기사의 신분을 숨기고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그가 다른 곳에서 사주를 받아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소르디에의 사주이지만 주인을 욕보일 수 없을 때 정도다. 자신이 얻지 못한 말을 해쳐 로랑의 체면까지 깎아내리는 방법은 소르디에라면 충분히 꾀하고도 남을만한 설득력이 있는 전술이었다. 불쾌한 낯빛을 역력하게 드러내면서도 절대로 소르디에의 짓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로랑은 도로 검 집에 검을 밀어 넣는 비올의 손에 잠시 시선을 두다가 고개를 들어 녹색 눈을 바라봤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불쾌한 낯빛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웃음을 흘리면서 손가락 끝에 걸쳐져 있던 페도라를 도로 눌러썼다. 

말의 목을 절단면이 깨끗할 정도로 단번에 잘라놓을 만큼의 수완은 있으나 표정을 숨길 재주는 없고, 하물며 어머니가 곤경에 처했는데도 자신의 입으로 소르디에의 사주라고는 대답하지 않는다. 밥을 굶겨도 고삐를 쥔 주인의 손은 물지 않는 점은 사냥개로는 칭찬 받을 만하다. 소르디에의 명령을 받은 기사에게 더이상 개인적인 일로 추긍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채로 로랑은 혀를 찼다.


"충성심은 높이 사지. 그래도 다음부터 그런 명령은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메르디는 조만간 돌려보내지. 말만 남기고 로랑은 검 집을 쥔 채로 자신을 보고 있는 비올에게서 등을 돌렸다. 


with 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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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 중

 "로랑 벌써 돌아가나?"

  "밤이 깊은지 꽤 된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느냐 물었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 로랑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까지 질 좋은 시가를 물고 포커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랫동안 로랑과 알고 지낸 귀족의 아들 외에도 상인의 아들과, 뒷골목에서는 제법 유명한가 싶은 정보상 청년도 끼어있었다. 테이블 저편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다음 패를 돌리는 남자의 거친 갈색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담배를 입에 물며 외투를 걸쳤다. 밤은 여전히 서늘한 계절이었다. 작은 쪽문을 나서자 카운터를 둘러싸고 아무렇게나 앉아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한 눈에 보아도 비싼 코트를 두르고 실크로 된 모자를 쓴 로랑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다시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엉성하게 나무로 짠 실내는 사람 목소리가 울렸고 싸구려 닭고기로 만든 요리의 그윽한 냄새가 밤늦게까지 풍겼다. 로랑은 주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곤 낮은 천장을 지나 거리로 나섰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들 외에는 거리에 없는 시간이었다. 간간히 멀리서 돌길을 채는 말발굽의 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이면 파티를 즐기던 영애들도 혼곤하게 취해 마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뜨끈하게 데워진 싸구려 와인으로 따듯하게 덥혀진 목덜미를 바람이 훑고 지나가 담배를 집어들던 손으로 외투의 깃을 여몄다. 골목 어귀마다 어슴푸레한 등이 세워진 것을 제외하면 빛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적었다. 반정도 땅 아래에 묻힌 듯한 모양새로 빈틈을 메운 작은 술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빛들과, 겨우 등 아래의 원만큼만 비출 수 있을 법한 노랗고 어두운 등. 구두 아래에서 허술하게 닦인 흙길의 흙들이 굽에 패여 조용히 먼지를 일으키다가 가라앉았다. 

  서늘하지만 저택의 정원에 심은 이국의 나무들이 천천히 꽃을 틔우는 계절이었고 외투의 깃을 조금만 추스르면 그렇게 크게 추운 날씨도 아니어서 로랑은 거리로 나가 새벽녘의 귀족들을 기다리는 마차를 잡는 대신 저택까지의 거리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마차가 지날 수 있는, 돌로 닦인 대로로 나가기 전까지 좁고 굽어진 골목을 걷던 중에 로랑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나친 골목 안쪽이 이상스럽게 소란스러웠다. 평민들의 주거지역이고 좁은 땅 위에 여러채의 건물들이 밀집된 탓에 골목은 훨씬 비좁고 어두웠고, 귀족 영애들이 즐겨보는 로맨스 소설에 나올만한 로맨틱함은 사실 찾아 볼 수 없는 곳들 중에 하나기이도 했다. 낮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여럿 골목 안쪽에서 희미하게 울렸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겨우 남자들의 체구가 보일 법한 빛이 눈에 들었을 때 로랑은 그들이 왜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가를 알았다. 사방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골목에서 목소리를 내어 말할 만큼 떳떳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옅은 색의 머리칼. 어두운 빛으로는 색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밝은 곳에서 보아서는 금색이나 밀빛이었을 것이다. 좁은 골목은 적당히 벌어진 어깨와 약간의 취기에서 나오는 용기만 있으면 가볍게 막을 수 있는 너비였다. 거기에 동료도 두셋 쯤 있으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 로랑은 골목의 초입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는 낮은 목소리로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는 지금이라고 잡아먹을 것처럼 킬킬대는 무리를 바라봤다. 언뜻 머리칼과 어깨만 보아서는 여자로 착각할 법도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키라고 해도 여성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정도의 높이인데다가, 이 시간에 하이힐을 신고 이런 좁은 골목을 돌아다닐 여자는 없다. 뒷골목의 창부라면 몰라도 수수한 옷차림에 손에 들고 있는 양장된 책을 보아하면 더욱 그랬다. 

로랑은 천천히 골목 안쪽으로 걸었다. 골목이 좁은 탓에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허리춤에 찬 검집이 벽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평소라면 잘 세공된 검집도 검만큼이나 소중히 여겼겠지만 소리 덕에 취객 셋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뭐야."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개 중에 제일 덩치 큰 놈 하나가 남자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중얼거리면서 다시 남자에게 올리던 취객의 손이 얼굴에 닿는가 싶더니 안경을 벗긴 모양이었다. 여전히 이쪽을 향해서 몸을 틀긴 했지만, 뒤에서 미인이라느니하고 얼굴을 품평하는 소리에 구미가 당겼는지 뒤를 돌아보는 가장 덩치 큰 놈을 바라보다 로랑은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왜 그냥 가려고?"


잘 생각 했어 젊은 양반. 이죽이는 목소리에 로랑은 미간을 좁혔다가 풀면서 숨을 뱉었다. 이렇게 인사불성이 될 때 까지 마실 필요는 없는데, 아마 집에 가면 여우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자식들도 두셋은 딸렸을 법한 나이의 장정들이 뒷골목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을 보는 것도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차라리 좀 더 절은 나이에 멋모르는 청년을 마주하는 쪽이 낫다.


  "설마."


  낮에는 수레에 과일이라도 얹어놓을 것 같은 얼굴로 이죽이는 꼴을 보다가 로랑은 조금 웃었다. 날이 밝았으면 첫째 이런 일 도 없었겠으나, 그들도 로랑의 옷차림만 보고도 길을 텄을 것이다. 


  로랑은 검을 한손에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길이가 긴 장검을 뽑는 데에는 반원만큼 공간이 필요했고, 로랑은 취객을 어떻게 할 심산이 없어도 이런 류의 위협이 잘 먹힌다는 것을 경험상 익히 알고 있었다. 매너를 논하는 입씨름보다 가볍게 검을 한번 뽑는 편이 대개 훨씬 일이 쉽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로랑이 팔을 앞으로 내뻗기 무섭게 길을 막고 있던 몸이 뒤로 쓱 물러났다. 남자가 뒤로 물러나는 만큼 손에 여전히 검을 쥔 채로 발걸음을 내딛다가 개 중의 하나가 멀찌감치 달려나가는 것을 덩치 큰 남자의 어깨너머로 보곤 로랑은 더 볼 것 없다는 것처럼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셋 중 하나가 자취를 감추자 안경을 들고있던 취객도 곧 안경을 내던지고는 뒤로 물러서다가 골목을 벗어났다. 

  제일 무겁고 비든해 보이는 남자가 주춤거리는 사이 로랑은 손을 뻗어 안경을 집어 건네고는 천천히 골목을 나섰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랑은 말 없이 그를 돌아봤다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어귀에서부터 말이 마차를 몰고 지나다닐 수 있는 돌이 다듬어진 대로까지 남자의 발걸음 소리를 확인하며 천천히 걸었다. 단순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로 뒤이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겠습니까?"


  돌이 다듬어진 대로를 밟자 구두 굽 밑에서 가벼운 마찰음이 일었다. 골목길이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대로를 따라 길게 가로등이 늘어서있었고 작은 골목길 보다는 훨씬 밝았다. 이따금 파티에서 돌아가는 귀족들이 탄 마차도 길을 지날테니 괜찮을 터였다. 도망친 취객들이 미인이라고 구미를 당겨한 얼굴이긴 했지만 로랑은 수수하지만 정돈된 옷차림에, 아주 작지는 않은 키, 귀족들이 볼 법한 좋은 책을 한손에 들고있는 남자를 레이디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로랑은 모자를 벗으며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구두 아래에서 작은 마찰음이 이는 돌길을 따라 저택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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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밤


로랑 크로잔은 살롱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오랫동안 한곳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경매는 평소의 배 이상으로 가격이 오르고 있었다. 로랑의 살롱이 늘 그렇듯 살롱은 사람으로 붐볐다. 벽을 등지고 만들어놓은 경매대를 바라보고 놓인 여러 개의 소파와 패브릭 의자 위에 사람들이 몸을 묻고 앉은 채 가격을 불렀다. 적당히 사람들의 그늘에 가려 도드라지지 않는 지점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남자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간간히 입을 열었다. 웃는 얼굴 탓에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정복을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약간의 왜소한 체격이 그를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다. 모노클을 낀 긴 흑발을 가진 사람은 좀처럼 보기 힘든 법이다. 로랑은 남자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는다고 생각하며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로랑이 기억하고 있었을테고 무엇보다도 로랑은 그가 경매가 시작하는 시점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아무것도 낙찰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로랑이 오랜 시간을 걸려 준비해온 만큼 오늘의 경매는 큰 장이었고 사람이 붐볐다. 사람이 붐비는 만큼 경매품이 많았고 개중에는 로랑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충분히 값이 오를 때 까지 소문을 띄우고 값을 올려놓은 조각과 미술품이 많았다. 개 중에서 나서서 낙찰 받으려는 것이 없는 사람은 정말로 예의상 이 자리에 참석했거나, 단순한 흥미로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느긋하게 경매품을 감상하는 귀족들의 경매는 본래 좀 더 소박하고 소인원으로 치러지곤 했다. 

경매는 확실히 평소의 배 이상으로 가격이 오르고 있었고 로랑이 지금껏 들인 공에 비해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한 수익을 올렸다. 남자는 아무 물건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좀체 사람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 앉아 단상 위에 올려진 경매품의 가격을 올리고 있었다. 간간히 입을 열고 값을 올리는 느긋한 목소리는 오히려 경쟁자들의 조바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바람잡이를 보며 로랑은 벽에 기대어 선 채로 팔짱을 꼈다. 마음 같아서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한창 열기가 오른 분위기를 깨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저 저 남자가 언제 다시금 입을 열고 경매에 끼어드는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물건이 고가에 팔리지 않았더라도 저 남자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히 재미있는 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경매가 막바지에 다다를 때 까지도 남자는 낙찰 받은 물건이 없었다. 값을 올리되 적당히 올린 뒤에는 깔끔하게 손을 털고 앉아 경매를 관찰 했다. 


“재밌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로랑을 보며 다가온 집사가 그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타인의 경매에 와서 웃는 얼굴로 바람을 잡는 남자라니. 


“잠깐 쉬고 가지. 긴장감이 필요 할 것 같은데.”


마지막 물건은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물건이 법이었다. 일부러 앞의 자잘한 물건들을 놓치고 느즈막히 살롱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보석이나 작품의 상징성까지 더하면 간혹은 귀족들의 재력싸움으로도 번졌다. 잠시 휴장함으로서 긴장감을 높이는 쪽이 더 초조해진다. 로랑의 말에 하인들이 약간의 디저트와 차를 날라 왔다. 차 한 잔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게 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었다.  




로랑은 서서히 말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로 분주해지는 살롱 틈에서 조용히 자리를 뜨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웃었다. 벽에 기대어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즈음해서 천천히 남자의 뒤를 따라 배웅을 나섰다.


"벌써 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아쉬운데요.“


애교가 언뜻 비치는 순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도 모노클 뒤로 보이는 짙은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에 로랑은 남자를 보고 마주 웃었다. 사람이 많아 사람 틈에 가려 지금까지는 눈에 도드라지지 않았지만 다음에 어디에선가 연이 닿아 마주치게 되면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을 법한 인상이다. 


“아쉽다니 다행이군.”

“덕분에 재미있었습니다.”


  말투는 자연스러웠다. 평소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느껴질 만큼 귀족적인 말투는 그의 신분을 짐작하기에도 충분히 용이했다. 밖은 이제 거의 해가 져 로랑의 저택 정원에 켜놓은 램프의 불빛만이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의 입구까지 아른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웃고 있지만 눈꼬리가 쳐진 순해 보이는 인상이며, 쾌활해 보이는 짙은 눈까지 웃는 것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다. 덕분에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재미있었다. 생각보다 수익이 올랐고, 경매 내내 그를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로웠던 탓에 사람들 틈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처음 눈에 띠었을 때부터 웃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 남자도 경매를 즐겼을 것이다. 로랑은 눈썰미가 좋았다. 그는 가지고 싶은 물건이 없었고 그저 값을 올리는 데에만 흥미를 느낀 듯 보였지만 단순히 그 긴장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어한 얼굴이었다. 로랑은 하인 대신 저택의 문을 열며 문에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틀어 그가 지나가도록 하며 입을 열었다.


“즐거우셨나 봅니다.”


“그랬던 것 같군.”


약간의 침묵 뒤에 돌아오는 대답에 로랑은 웃었다. 더 말을 잇지 않자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천천히 로랑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어둑하게 완전히 가라앉은 정원에 등으로 밝히고 있는 길을 따라가는 동안 짧게 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로랑은 가볍게 몸을 틀어 살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바람에 슬며시 밤바람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랑이 돌아가면 짧은 휴식도 끝나고 마지막 경매가 시작될 터였다. 이 경매만 끝내면 당분간은 로랑도 휴식기였다. 값을 올리기 위해 저택 한 구석에 보관하고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크고 작은 물건들은 오늘 밤을 팔려나가, 내일 아침이면 심부름꾼의 손과 마차에 실려 이 집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로랑은 커프스를 정돈하는 집사의 손길에 목을 내맡겼다가 입에 시가를 물고 살롱에 들어섰다. 아직 가시지 않은 진한 다즐링의 향기와 파이 위에 올려진 설탕에 조린 사과의 향이 아직도 살롱 안을 근근하게 감돌고 있었다. 로랑은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눈을 돌렸다. 운이 좋으면 금방에라도 다시 만나게 될테다. 수도에 모여 있는 귀족들의 소문은 어깨를 나란히 한 관목만큼이나 가깝고, 로랑의 입에서 나간 소문이라도 고작 이틀이면 스무명의 귀부인의 입을 거쳐 다시 로랑에게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방문객 중 누군가의 손님이라면 로랑과 안면이 있는 사이가 될 확률도 높았다. 어쨌든 로랑은 남자가 한껏 고무 시켜놓고 간 경매를 마지막까지 즐기기로 했다. 선선한 밤이었다.


with 주세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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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사냥

“사생활이 엉망이군. 로랑”


로랑 크로잔은 평소 그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 그대로의 차림이었다. 가지런히 올려 높이 묶은 긴 재색머리는 말을 달리는 사이 바람에 날렸는지 단정하기보다는 여기저기 흩어진 채였고, 남성용 블라우스는 단추가 두어 개 풀어져있었다. 로랑의 바지 주머니에 하얀 커프스 자락이 비어져 나온 것으로 보아서는 처음부터 커프스를 두고 갔던 것이 아니라 말을 달리던 도중에 풀어낸 것일 것이다. 말은 쉽게 명마라고 보기엔 어려운 종류의 털색을 한 것이었으나 시올은 로랑이 그 말을 꽤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종마에게서 얻은 말 치고는 잿빛에 가까운 어둑한 흰색 털에 드문드문 작은 검은 점들이 말을 지저분하게 보이게 했다. 게다가 명마도 아닌 주제에 보이는 외모만큼 제법 까탈스럽게 굴었으나, 로랑은 그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을 높이 산 모양이었다. 사냥에 나갈 때는 제대로 말을 듣는 갈색 말을 데리고 나갔지만 단순히 승마를 할 때는 그 제멋대로인 말을 끌고나갔다. 과연 저런 놈은 자기 같은 족속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시올은 로랑을 보고 혀를 찼으나 그의 친구는 예상대로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서 가볍게 웃고 말았다.


“엉망이라고 할 만한 짓을 한건 없는 것 같은데.”

“요즘 계속 사냥에 승마 뿐 이잖아.”

“오늘 밤에 미술품 경매가 있지. 겨우 그 나이에 머리가 쓸모없어졌나 시올?”

“로랑.”


로랑은 저택의 입구에 기대어 있는 시올을 보며 넌지시 웃고 이내 말에서 가뿐히 몸을 내렸다. 저렇게 저택 입구에 기대어 서있었다면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하인들이 대여섯 번은 응접실에 돌아가 기다리지 않으시겠냐고 물었을 것이다. 확실히 언제 밖에서 돌아올지 모르는 자신을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느니 저택 입구에서 로랑을 잡아채는 쪽이 훨씬 현명한 선택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손님은 저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면서까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과연 로랑의 친구답게 고집스럽고 귀엽지 않은 면이 있었다. 로랑이 말을 끌고 오는 것을 보던 하인이 말의 고삐를 건네어 받아갔고 로랑은 승마 모자를 벗으며 시올을 바라봤다.  


“너 요즘 검은 제대로 쥐고 있나?”

“네가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닥치고 사람 말 좀 들어 로랑”


닥치라는 말에 결국 로랑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집만 세고 대범함은 없는 줄 알았는데 자신과 사귄지 오래되더니 사람이 제법이 되었다. 로랑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커프스를 꺼내어 이마를 훔쳐내고 입고 있던 조끼를 벗었다. 로랑을 안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쓸데없이 저택 입구에 서서 볕을 받으며 로랑을 기다렸을 것이다. 로랑은 말을 끌고 나가면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고, 돌아온 뒤에도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는데 시간이 걸렸다. 로랑은 응접실로 들어가자마자 멋대로 시올을 앉게 내버려 두고는 응접실의 창의 커튼을 모두 걷고 창을 열었다.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의 블라우스가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있었다.


“요즘 너희 집안 소문이 흉흉하던데.”

“크로잔이? 왜?”


로랑은 값비싼 패브릭으로 마감을 한 소파 위에 등을 곧게 세운 자세로 앉아있는 시올을 돌아보며 미간을 지푸렸다.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허리께 밖에 오지 않는 창틀이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시올을 바라보는 동안 메이드가 시올 몫의 차만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갔다. 저택의 모든 것들이 로랑의 통제 아래에서 로랑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로랑이 승마를 끝낸 뒤의 저런 차림으로는 차에 입도 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시올 처럼 애써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사람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 직접적으로 자신 몫의 차를 내오지 말라고 지시한 것은 로랑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에 맞추어 고용인들이 로랑의 지시 없이도 로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는 원래부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고, 거리낌 없는 것과 거리끼는 것 사이에도 분명한 선을 두었다. 


“소르디에 가주를 두고 노하임이 한마디 한 모양인데, 네 형님께서 가주를 닮아 그런 것 아니냐고 한마디 하신 것 같더군.”

“아, 그 창녀랑 책벌레 얘기 말인가?”


노하임이 책벌레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고, 소르디에가가 로티아 덕에 승승장구 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귀족들의 뒷소문이라는게 깨끗할리 만무한 일이고 로티아를 보고 더러 창녀라고 하는 소문이야 굳이 로티아가 공신 가문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이를 갈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독사의 황비라고 불리는 만큼 자신의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눈도 꿈쩍안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냥 두고 보기에는 가소로운 일이었다. 황제가 여자에게 넋이나가 멍청해졌다고 해도 그간 가문이 뿌리를 내린 세월만큼 깊이가 다른 법이었다. 로랑은 소매의 커프스 단추를 풀러 소매를 걷으면서 시올을 보고 웃었다. 고집 세고 귀족의 뒷이야기에 관심 없는 시올 라작이 자신에게 와 직접 말을 전할 정도면 자신이 알아두어야 할 이야기인 것은 틀림없다. 


“알고 있었나?”

“거기 까지는. 그래서?”

“틸루드 노하임이 거기에 대고 그건 크로잔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다더군. 그 일 있고 얼마 안되어 소문이 도는 모양이고.”

“뭐라던가?”

“짐승 새끼들이 아랫도리 간수 못하고 여기저기 놀리고 다닌다고 말이야. 사자도 결국 축생이라던가 하는 소문이 들리더군.”

“노하임 짓이군.”

“소르디에 짓일지도 모르지.”


시올은 테이블에 놓인 잔을 비우고 마들렌을 베어 물었다. 말하려고 했던 용건은 끝났다는 의미였다. 마들렌을 다 먹고 나면 자리를 뜰 것 같은 친우를 바라보다가 로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만찬과 그 후에 있을 경매, 그리고 그 뒤까지 이어질 사교 모임을 생각하면 예의상의 옷차림은 갖추어야했다.


“저녁까지 있다가.”

“관심 없는 거 알잖아.”

“만찬 뒤에 경매할거야. 그 뒤에 네가 좋아하는 남작 영애도 올거고.”


로랑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웃다가 응접실에 시올을 남겨두고 문을 열었다. 


“내가 후원하는 작가가 그린 그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잘 봐둬. 저녁까지 있을 공간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지.”


좋은 이야기를 해줬으니 하는 말이야. 문이 닫히기 전에 로랑이 흘린 말에 시올은 이미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그는 이번에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랑 크로잔이 좋은 의미로 즐기고 있는지는 불확실 했으나.






로랑 크로잔의 저택에는 하인들이 많았다. 실제적으로 로랑의 개인 저택에 살고 있는 주인이 로랑 하나인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부엌 메이드와 풋맨의 수 모두 지나치게 많았다. 로랑은 개인적인 식사이외에도 이따금 이와 같은 경매와 사교 모임을 열었고, 만찬을 열 때마다 형제들의 집에서 메이드와 풋맨을 빌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결국 고용인의 숫자 자체를 늘리기로 했다. 대신 그는 큰 사냥과 만찬이 있을 때면 다른 귀족들에게 하인들을 빌려주는 것으로 노는 손들을 밖으로 돌렸다. 해가 지고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하자 옷을 갖추어 입은 풋맨들이 시간에 맞추어 만찬에 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서 저택의 입구에 서있었고 아래층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로랑의 개인실 안쪽까지 소곤소곤 들려왔다. 목재로 된 집안의 소리는 아무리 조심하도록 일러도 벽을 타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법이었다. 만찬에 초대하지 않은 상인과, 여하의 예술가들도 경매에는 초대되었고 초대객의 손님이라면 얼마든지 함께 집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로랑은 여전히 젊은 사람답게 자유로웠고, 제멋대로였으며 그런 점은 그가 변덕스럽게 일을 벌이는 데에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로랑이 잿빛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겨 정돈하고 크로잔을 떠올리게 하는 남색 리본으로 묶고 나타났을 때 시올은 서재 한켠에 앉아 새로 들여온 고미술서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만찬 시간일세 시올. 시올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아쉬운 듯 눈길을 준 뒤에 덮었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책을 구하는 건가 로Lau.”

시올 라작은 아쉬운 것이 있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오래된 로랑의 애칭으로 로랑을 불렀다. 변방 귀족의 아들인 시올과 로랑의 사이에는 접점이랄 것이 없어보였고, 특히나 예술에 대해서는 깊은 조예보다는 흥미와 변덕으로 시장성을 간파하는 로랑은 클렘버리의 열렬한 팬인 시올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둘은 아주 잘 지냈다. 그렇게 말해도 그 책은 내주지 않을 거야. 로랑은 단호하게 말하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이제 곧 만찬이었다.

  

만찬에는 원래 초대된 귀족들의 자리 외에도 로랑이 뒤늦게 이른 시올의 자리가 마련되어있었고 만찬은 야채와 고기를 삶아 걸쭉하게 끓인 퓌레부터 시작해서 그의 집사가 직접 고르고 걸러 내린 와인, 그의 부엌 메이드가 가장 잘 만드는 잉글리시 푸딩과 사과 케이크로 끝을 맺었다. 풋맨들은 저녁식사를 할 틈 없이 만찬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손님을 경매장으로 꾸며낸 살롱으로 안내하는데 바빴고 로랑은 만찬이 끝나자 후희를 즐길 여유 없이 자리를 일어났다. 살롱 뒤편에 마련된 방 안에서 아름답고 독특하고 흥미로운 것들이 붉은 벨벳 아래에 조심스레 감싸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번 째 그림이야 시올. 잘 봐두도록 해.”


로랑은 살롱의 벽에 기대어 섰다. 살롱은 잔잔한 꽃무늬가 새겨진 패브릭으로 벽을 바르고, 밝은 초로 샹들리에를 밝혔다. 간간히 등장하는 보석이나 장신구를 보기 위해 참석한 몇몇의 부인들과 영애들을 빼면 고가의, 그리고 귀족적인 취향의 수집품은 대개 남성들의 몫이었다. 귀족이든, 상인이든, 단순한 졸부임에 상관 없이 또는 단순한 미적 취향이냐 사적인 뽐내기를 위함인가에도 상관없었다. 경매품은 대개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돌아갔고 돈은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여전히 돈이 남아 도시는 모양이군요.”

“안목이 남아 돌아서 말입니다.”


가시가 선 말에도 로랑은 그저 유쾌하게 웃어보였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초대객의 명단에는 없었으니 아마 초대객과 함께 들어온 손님일 것이고,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로랑이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대한 기억이 없는 것 같군요.”

“초대하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는 게 당신 유일한 장점이지 않습니까?”

“아아. 확실히.”


  헐뜯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여유롭게 웃으며 로랑은 네 번째 조각상이 팔려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너스를 닮은 조각 위로 덮어놓은 벨벳을 벗겨내는 순간 몸에 살집이 들어찬 졸부하나가 번쩍 손을 들어 값을 불렀고 몇 번의 값이 오르기도 전에 조각상은 그의 것이 되었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꽤 괜찮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낸 값만큼 값을 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섯 번 째 그림이 벨벳을 벗는 순간 친우의 등이 긴장하는 것을 바라보던 로랑은 고개를 돌렸다. 소르디에 기사단에 적을 둔 말단 귀족이었다. 


“마음에 둔 경매품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요즘 새끼 사자 몰이가 유행한대서 말입니다.”


“저런, 사냥을 하시려면 더 일찍 오셨어야 할텐데요.”


로랑 크로잔을 바라보던 기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노골적인 대화를 돌려 피하면서도 로랑은 기분 나쁜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기사의 사복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 눈에 훑어보곤 그의 재정 상태를 어중간히 파악하곤 입에 담배를 물었다. 영애가 값을 올리는 동안 시올이 지지 않고 물건의 가격을 올리고 있었다.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작 영애는 시올의 등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동행한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고작 그런 그림에 지나친 값을 매기는 것은 아닌지 그녀를 타이르고 있었다. 손 놓고 있어도 시올 라작이 그 그림을 그녀에게 안겨다 줄 것을 모르는 동안은 로랑 과 그림의 작가만이 유일하게 이 경매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자 사냥을 하시려면 사자 굴에 들어가셨어야지요. 아니면 기회를 틈 타 다리 저는 사자라도 있는지 보러오셨습니까.”


사자 사냥을 하고 싶었으면 사자 굴에 들어 갔어야 했다. 아무 맥락 없이 로랑의 개인적인 만찬과 모임을 틈타 단순히 크로잔을 헐뜯고 싶은 것뿐이었다면 지난번 만남에서 로랑이 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를 베풀었거나, 로티아의 힘만 믿고 공신의 위치를 망각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니면 둘 모두 재어볼만한 머리가 없었거나. 로랑의 사교 모임은 기본적으로 로랑이 좋아하는 또는 로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도 아니면 적어도 취향과 이해관계 상에서는 우호적인 사이였다. 아무리 명단에 없는 손님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호의 없이 젊은 사자 굴에 기어들어오는 바보 같은 이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소르디에건 노하임이건 개인적인 사이에서는 딱히 가문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로랑에게는 저런 흉물스런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은 달리 싫어할 것도 없는 대상이었다. 가문끼리의 신경전이야 오래된 일이었고 로랑에게도 별달리 생소한 일도 아니었으나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특히나 로랑처럼 제 가문과 가족에게 끔찍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는 로랑의 손님들 앞에서 흥밋거리라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었으나 로랑의 손님 중 로랑을 눈 앞에 놓고도 악질적인 풍문에 웃어줄 이는 없었다.

말단 귀족으로 귀족의 자부심은 있되 등에 날개를 달았다고 착각했으니 하늘 모르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듯한데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분수를 알아야했다. 작위가 있어도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고, 날개를 달아도 밀랍이 녹는 지점을 모르면 어디서든 추락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저런 듬성듬성 엮인 모조 날개는 하물며 논할 가치도 없었다. 



  “하기야 하이에나처럼 쏘다니는게 창녀보단 낫군요. 안 그렇습니까?”


막 그림을 낙찰 받은 시올이 엷은 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웃고 있는 로랑을 보고 멈추어 섰다. 로랑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로랑 크로잔이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갈등을 즐긴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했다. 확실히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좀 더 건전한 경쟁이었다면 로랑은 평소처럼 호탕한 지방 유지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을 것이다. 낯선 초대객이 로랑의 심기를 건드렸음이 분명했다. 로랑은 곁눈질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매를 훑었다. 살롱의 안쪽에 있는 소파에는 귀부인들이 앉아 보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은 남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이나 문에 등을 기대고 각기 사교 활동으로 이곳에 온 목적을 전환하고 있었다. 방에 있는 사람 중의 절반쯤은 로랑의 사냥 동료이기도 했다.


“들쑤시고 다닐 때에는 당신이 찌르고 있는 것이 지푸라기인지 사자 꼬리인지 정도는 알고 다니시는게 좋을 겁니다.”


로랑은 하인에게 손짓을 하며 자리를 떴다. 사자의 앞마당에 와서 사자에게 겁을 주려고 한 꼴이니 로랑이 저렇게 불유쾌하고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자리를 뜨는 것도 이해는 갔다. 시올은 로랑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긴 소파 곁에 서서 하인에게서 초대객의 명단을 받아드는 로랑을 관찰했다. 그는 소르디에와 안면식이 있을 손님을 셋으로 추리고, 그 중에서도 말단 귀족과 연이 닿았을 만한 성미가 유순하고 호기심 많은 귀부인 하나로 다시 대상을 좁혔다. 금발의 하인의 로랑에게 알았다고 대꾸하고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명단을 다시 덮고 살롱으로 돌아갔다. 아마 지목된 귀부인에게 다시는 저 불쾌한 기사를 데리고 오지 못하도록 언질을 주려고 돌아갔으리라.


“계집 하나 때문에 귀족들 뒷소문이 바닥까지 떨어지는군.”

“누구를 말하는 건가?”

“대사.”


“입조심 하게 로랑.”


로랑은 눈을 감고 웃고 있었다. 살롱의 문간 너머에서 로랑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소파에 길게 몸을 뉘이고 다리를 꼰 채로 누워 있다가 시올의 말에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눈을 떴다. 연신 웃느라 지칠법도 한데도 로랑은 결국 끝까지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그 웃는 얼굴이 정말로 유쾌해졌다가 불쾌한 것의 표현이었다가 다시 편안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올이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겹도록 로랑의 웃는 얼굴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남작 영애가 더 애태우기 전에 가져다주게. 너한테 원망을 품기 전이 나을걸.”


자는 것처럼 한동안 조용히 오르내리던 로랑이 느리게 눈을 뜨며 일어났다. 하인이 그의 흐트러진 커프스를 정돈하는 동안 집사가 다가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풀러 다시금 정갈하게 빗어 남색 리본으로 하나로 묶었다. 오래전 그의 세련될 만큼 심플한 남색 리본이 그의 가문을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을 알았을 때, 시올은 혀를 내둘렀다. 그의 가문에 대한 사랑은 로랑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시올의 눈에도 의외라고 할 만큼 깊었고 그것이 전혀 의외성을 갖추지 않게 된 것은 시올이 그와 충분히 가까워진 이후였다. 로랑 크로잔은 정이 깊었다. 사람을 쉽게 믿는 바보는 아니었으나 사람을 좋아했고 그의 제멋대로인 성미와 이해타산이 분명한 성격 덕에 그것을 내보일 기회가 없는 것뿐이었다. 


“시올. 사람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거야.”


로랑은 그 작은 휴게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매번 경매에 참가하는 귀족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는 로랑이 입에 무는 시가 끝에 친절하게도 불을 붙여주었다. 로랑은 뒤를 돌아보고 시올을 보고는 조금 입매를 끌어올려 웃고는 곧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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