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답
"주인님."
로랑은 지금 막 메이드가 앳된 손길로 가쁘게 동여맨 머리칼을 확인하다가 집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흰 커프스를 노란 호박이 박힌 버튼으로 목에 고정시키고 애써 정돈한 소매의 커프스 단추를 풀러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집사가 건네는 유리잔을 받아들어 목을 축이면서 로랑은 은쟁반 위에 작게 접힌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표정이 안 좋군."
"좋아하실만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메모를 가지고 온 기사의 표정이 어두워서요. 말을 덧붙이는 집사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로 로랑은 목덜미와 손목에 향수를 뿌렸다. 짙은 냄새가 머물렀다가 코 끝에 스칠만큼 미미한 향만 남도록 천천히 희미해졌다.
"커튼을 좀 걷어 주겠나."
절제된 구두소리를 듣다가 커튼을 걷자 따듯한 볕에 더불어 안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로랑은 가볍게 웃다가 도로 미간을 지푸렸다. 확실히 웃을만한 일은 아니었다. 메모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담고 있었고 로랑은 종이를 다시 원래대로 접어 쟁반위에 올려놓았다. 뒤에서 메이드의 손길이 멈칫거리는 것을 느끼다가 가볍게 손길을 걷어내고 로랑은 자리를 일어섰다.
"백작과 약속한 오찬을 취소해야겠군."
"무슨 일이십니까?"
로랑은 말없이 쟁반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는 거울 곁의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집사가 메모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외투를 걸치고 소매 끝을 내렸다. 로랑은 문간에 잠시 서서 지팡이를 가져갈까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떼었다. 아. 등 뒤에서 집사의 탄식이 들렸다. 그는 로랑이 이 일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로랑은 여유가 생기면 곧장 승마나 사냥을 즐겼고 그의 여가는 로랑에게 익숙한 시올 마저 이따금 찾아와 혀를 찰 정도였다.
지난해 여름에만 해도 지방에 내려간 동안 두 차례나 확인한 말이다. 내년쯤이면 데리고 갈 수 있겠다고 하는 시종의 말에 로랑은 그 때도 말 없이 웃어보이기만 했을 뿐이다. 말을 탐내는 이는 아주 많았지만 수도 안에서 그 말의 몸값을 치룰 만큼 돈이 있는 귀족은 몇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말에게 이렇게나 애착을 가지는 것도 로랑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값을 치루고 나면 큰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덩치는 조금 작지만 혈통이 좋았고, 잘 달리고 잘 먹인 말은 균형 잡힌 근육에 재빠르다고 할 만큼 걸음이 빨랐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고삐를 쥐지 못하도록 제멋대로 구는 점도 구미에 맞았다. 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목을 벤 것이라면 확실하게 악의가 담긴 짓이다. 고작 말을 데리러 간 것뿐인 기사들이 상처를 입고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검술을 갈고 닦는데 게을렀다는 비난보다 앞서 고대하고 있던 사유 재산 뿐만 아니라 가문의 기사까지 죽인 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로랑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이것 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을 만큼.
로랑의 살롱에 모이는 손님의 대부분이 그 말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로랑의 마굿간에 있는 죽은 말의 어미의 얼굴을 한 번 씩은 본적이 있었다. 로랑은 자신 몫의 아침만이 차려진 길고 화려한 테이블 위에 앉아 스튜를 뜨면서 집사에게 몇 군데에 서신을 보내라고 말했다. 그는 만나볼 사람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메르디."
로랑은 마차에서 내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저택을 둘러보는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흰 손을 잡아 가볍게 손등에 입을 맞추고 로랑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반걸음 앞에서 걸었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언질을 해둔 메이드 둘이 나와 여자를 맞았다. 나이를 짐작하기에는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연륜이 묻어나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복도 끝에 서서 방문 하나를 열어 젖혔다. 흔히 살롱에 온 귀부인들의 게스트룸으로 종종 사용되는 방은 볕이 잘 들었고, 밤에는 열린 테라스로 비밀리에 정부를 끌어들이기에 좋았다. 엷은 반투명한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빛으로 환한 방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그녀가 발걸음을 딛기 쉽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벽난로를 쓰기에는 따듯한 계절이어서 벽난로는 잘 손질되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지금 막 메이드 하나가 노란 장미를 담은 꽃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급히 준비한 객실이다 보니 여전히 손이 갈 곳이 두어군데 있기는 하겠지만 그녀가 머무는 동안에 해도 충분한 일이었다.
확실히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크로잔에는 연고가 없는 인물이다. 숙부나 백부쯤에서 한번은 연이 닿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로랑이 알고 있는 한에서는 메르디는 크로잔과 연이 없었다. 단지 귀족들 사이의 풍문으로 들었을 뿐, 로랑이 사교계에 나설 즈음에는 메르디도 은퇴한 뒤였고 그래서 더더욱 그는 메르디와 연이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마차는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을 테고 제대로 그녀에게 뭔가를 설명했을 만한 말재간이 있는 인물도 없어서 로랑은 그녀를 목재로 솜씨 좋게 깎은 의자에 앉히고 의아한 표정을 한 그녀와 눈을 맞췄다.
"가까운 분이 잠시 당신을 데리고 있어달라고 하더군요."
“자세한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불편하게 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멋대로 초대 드린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만.”
귀족의 손속이라는게 까다롭기 보다는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은데다가 로랑은 더욱 그런것을 신경쓰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될 수 있는 만큼 사용한다. 메르디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로랑은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라도 지금 그녀를 저택에 잡아 두어야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하루나 이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뭐든 구해다 드리죠. 따분하면 살롱 안쪽 방을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 경매에 나가기 전인 보석이 제법 되니 심심하진 않으실 겁니다. 아니면 오늘 밤에는 살롱에 모임이 있으니 그쪽도 재미있을 겁니다.”
로랑은 여전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메르디를 바라보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표정을 풀고 웃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한 번 더 속삭이고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메이드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로랑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정확하기만 하다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어있는 옷장을 열고 몇 벌의 드레스와 구두를 채워 넣고,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향수와 보석들을 올려놓는 어린 메이드들에게는 메르디의 시중을 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필요하거나 절 불러야하면 곁에 있는 메이드에게 말하세요.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겐 당신과 있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테니까요."
“그 정도의 경험이라면 얼마든지 시켜줄게요.”
새침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보며 로랑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준 말의 목은 잘 받았네."
저 이가 비올인데요. 면회를 위해 자신의 소속을 확인하던 사람에게 묻자 그는 눈 앞에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자신을 기사들의 연병장으로 안내했다. 크로잔의 기사가 말한 대로 붉은 머리였다. 아무리 잘 위장을 하더라도 머리칼이 조금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찾기 수월할 만큼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은 눈에 띄었다. 돌아보는 잔뜩 지푸려진 얼굴에 메르디를 닮은 곳이 이곳저곳에서 엿보여 로랑은 아직 감정이 끝나지 않은 보석들을 보며 소녀처럼 웃던 여자를 떠올리고 엷게 웃었다.
"혹시 집에 누가 들렀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나?"
“집?”
로랑은 그가 로랑의 말을 이해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시간은 많았고 괜히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집을 비운 로랑과, 로랑의 집에 갑작스레 자리를 잡은 메르디를 보면 시올에게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듣겠지만 이런 종류의 긴장감을 로랑은 싫어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는 대신 비올을 보고 웃으면서 로랑은 들끓는 불유쾌함과 긴장감을 조용히 갈무리했다. 말이야 다시 얻으면 되지만 제 말의 목을 베고 크로잔의 기사를 상처 입히고도 그냥 지나치리라 생각했으면 아마 잘못된 계획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로랑의 성미를 제대로 몰랐거나.
"메르디한테 무슨 짓 했어?"
"사람은 빼앗긴 것 보다 더 많이 빼앗아야 만족을 하지. 비올 경."
로랑은 검을 겨누어 든 비올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로랑은 충분히 검을 빼어들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로랑은 그에게 좀 더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해보라는 듯 두 손에 장갑을 낀 채로 두 다리에 부드럽게 힘을 풀고 서있었다. 로랑은 비올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때까지 조급함 없이 기다리며 웃었다. 그는 걸려온 싸움을 봐주는 법이 없었고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최대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방법으로, 가장 거창하지 않으면서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는 법을 좋아했다. 로랑은 그의 실력에 비해 검의 손속이 거친 편이 아니었고, 그의 검은 방어적이지는 않으나 필요하지 않으면 내지르지 않았다. 검을 뽑지 않아도 로랑에게는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로랑이 그들과 어울리는 만큼 그들은 그의 눈과 발이 되었다.
로랑은 살롱에 앉아 영애들의 결혼식과 아들의 작위를 논하는 것만으로 보이는 귀부인들의 입이 얼마나 가볍고 빠른지 알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는 아니어도 한 때 귀족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메르디의 이야기라면 방계 혈족의 결혼식 얘기보다도 훨씬 얘깃거리가 많았다. 메르디에게는 그녀를 닮은 아들이 있었고, 메르디를 끔찍이 여기는 아들의 인상착의가 로랑이 찾는 이의 인상착의와 흡사하다면 거기서부터 일은 아주 손쉽게 변했다. 로랑은 몇 군데에 더 편지를 돌릴 필요도 없이 마담 브룩의 아주 간소한 오찬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로랑은 남자의 표정이 천천히 궁지에 몰리는 것을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급할 것은 없었다. 메르디는 로랑의 저택에 있었고, 로랑과 마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로랑의 저택에는 수십명의 사병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로랑이 그와 헤어지고 난 뒤에는 더 덧붙일 것도 없었다.
"경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소르디에의 사주인가.
로랑이 덧붙이는 말에도 비올은 말없이 서있었다. 기사면서 기사의 신분을 숨기고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그가 다른 곳에서 사주를 받아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소르디에의 사주이지만 주인을 욕보일 수 없을 때 정도다. 자신이 얻지 못한 말을 해쳐 로랑의 체면까지 깎아내리는 방법은 소르디에라면 충분히 꾀하고도 남을만한 설득력이 있는 전술이었다. 불쾌한 낯빛을 역력하게 드러내면서도 절대로 소르디에의 짓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로랑은 도로 검 집에 검을 밀어 넣는 비올의 손에 잠시 시선을 두다가 고개를 들어 녹색 눈을 바라봤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불쾌한 낯빛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웃음을 흘리면서 손가락 끝에 걸쳐져 있던 페도라를 도로 눌러썼다.
말의 목을 절단면이 깨끗할 정도로 단번에 잘라놓을 만큼의 수완은 있으나 표정을 숨길 재주는 없고, 하물며 어머니가 곤경에 처했는데도 자신의 입으로 소르디에의 사주라고는 대답하지 않는다. 밥을 굶겨도 고삐를 쥔 주인의 손은 물지 않는 점은 사냥개로는 칭찬 받을 만하다. 소르디에의 명령을 받은 기사에게 더이상 개인적인 일로 추긍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채로 로랑은 혀를 찼다.
"충성심은 높이 사지. 그래도 다음부터 그런 명령은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메르디는 조만간 돌려보내지. 말만 남기고 로랑은 검 집을 쥔 채로 자신을 보고 있는 비올에게서 등을 돌렸다.
with 비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