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ak

메이드는 아이보리색 패브릭으로 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책을 읽는 로랑의 곁을 지나 사람의 키만큼 큰 응접실의 창을 열고 엷은 커튼을 양 옆으로 걷어 리본으로 묶었다. 로랑의 저택에 심어진 이국적인 꽃나무들도 꽃잎을 거의 떨궈 내고는 푸르게 잎을 내고 있었다. 창을 열자 목덜미가 가볍게 서늘해 질만큼 기분 좋게 들어오는 바람에 로랑은 눈을 들어 열린 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책에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머니의 고급스러운 취향대로 아이보리색 패브릭에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면서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엇갈려 꼰 다리 위에 책을 얹은 채로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주인님.”


로랑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의 버틀러를 바라봤다. 모라벡.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고 비켜선 집사의 모습 뒤로 시올은 옆구리에 네권의 책을 힘겹게 든 채로 응접실 문 앞에 서있었다. 그의 행색은 클렘버리 도서관에 다녀오기라도 한 듯 간소했고, 책의 옆면에는 책의 커버를 떼어내 다시 한 번 귀족식으로 양장을 한 듯 붉은 양가죽 위에 음각으로 클렘버리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지치지 않는 취미군 시올.”


로랑은 허벅지 위에 올려 높은 책을 덮고 오래된 친우를 바라보고는 앉으라는 듯 턱으로 반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로랑의 책은 그의 취향대로 녹색 표지를 씌워 양장을 해놓았고, 굳이 그러하지 않더라도 시올은 그가 읽고 있었던 책이 클렘버리 서가에서 찾기보다는 로랑의 서가에서 찾는 쪽이 쉬운 책의 일종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의 책은 대부분 예술과 상업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로랑의 책에는 그 중에도 화가가 세필로 그린 그림들이 삽화되어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로랑이 덮는 책 사이에서 제국의 오래된 보물 중의 하나인 목걸이의 그림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시올은 로랑의 응접실을 한 눈에 담고는 금세 아연해졌다. 그 사이 로랑의 응접실은 가구의 배치가 바뀐 듯 밝은 크림색 풍경 가운데에 값비싼 마호가니로 깎아 만든 넓은 소파가 들어서 있었다. 

로랑의 응접실은 비교적 클래식하고 유행을 타지 않는 제법 유망한 귀족가의 응접실다운 맛이 있었으나 본래 오래된 것들이 늘 그렇듯 로랑이 늘 앉는 넓은 소파를 제외하면 오랫동안 머무르기에 편안한 곳은 아니었다. 로랑의 어머니는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응접실은 격의 있고 무난하되 게스트룸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오래되고 전통있는 가문의 귀부인들에게는 대개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어쨌든 로랑이 크로잔의 저택에서 나와 홀로 저택을 구입했을 때 그의 저택의 대부분의 방들은 그녀의 오래된 지론에 나름의 매력을 느낀 로랑에 의해 그녀의 마음에 들도록 설계되고 지어졌으나, 하나쯤 그녀가 놓친 것이 있다면 대부분의 방에 난 바람이 드는 테라스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들의 정부를 끌어들이는데도 용이했다는 점 정도였을 것이다.


시올은 로랑의 어머니가 보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숨기지 않고 눈살을 좁힐 만한 짙은 색의 소파를 보고 잠시 로랑을 바라보았다. 로랑의 변덕은 시올도 익히 알고 있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오래도록 달라지는 것이라고는 들르는 사람들의 얼굴 정도였던 곳에 새로운 가구가 들어온 것에는 시올 조차 적지 않게 놀랐다. 로랑은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 마호가니 색 소파에 앉으려는 시올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시올.”


시올은 로랑의 목소리에 몸짓을 멈추고는 로랑을 바라봤고 로랑은 다시 책을 펼쳐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 소파는 주인이 있어.”


  그 옆에 앉게. 그의 버틀러가 따듯하게 덥혀진 찻잔에 맑은 차를 우려내는 것을 눈으로 쫓던 로랑의 반대편에서 시올은 크림색 소파 위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로랑은 시올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세층으로 나뉜 디저트 그릇 위에서 마카롱을 들어 베어 물었다. 


“로랑. 설마 그 소문 사실이었나?”

“소문이라니.”


“소르디에 백작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

“내가 언제는 다른 가문의 사람이라고 배척하기라도 했었나.”


로랑은 시올의 어딘가 날이 선 말투에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보이고는 책으로 눈을 돌렸다. 시올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소파에 앉아 몇 번이나 자신이 가져온 책의 표지를 펼쳤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소르디에의 백작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났었나. 확연히 본인의 풍문은 본인의 귀에 들어오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더구나 그리 악질적이거나 호의적이지 않은 어느 쪽도 아닌 소문이란 더더욱 그랬다. 시올이 소르디에 백작이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소르디에에는 몇이나 되는 백작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 있을 터였지만 로랑은 단번에 시올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분명 소문이 난 ‘소르디에 백작’ 본인의 입으로, 염문이 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웃음 섞인 말을 듣기는 했으나 단순히 어울려 다닌다는 종류의 소문이 날 줄은 로랑도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로랑은 턱을 괸 채 가볍게 목청을 울리며 웃었다. 


로랑의 응접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눈에 확연할 만큼 존재감이 남다른 소파였으니 그의 존재도 부각될 법 했다. 로랑은 튠이 응접실에 자신이 사용할 만한 편안한 소파를 놓아달라고 했을 때 흔쾌이 그러겠다고 했다. 로랑 크로잔의 살롱에 모임이 있을 때면 늘 짙은 색의 소파에 앉아있는 소르디에 백작이라면 거기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화젯거리가 되기는 했을 것이다. 로랑이 짐작한대로 호의적이지도 악질적이지도 않은 종류의 단순히 흥미롭거나 재미있는 종류의 이야기였겠으나. 소파만 보고도 그 소파에 앉아 로랑과 어울리는 사람인지 시올이 알아맞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로랑은 소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시올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풍문에 어두웠지만 모쪼록 크로잔과의 연고가 그에게 그런 풍문을 듣게 했으리라.  


“그런 말이 아니잖나.”

“그러면?”


“가문 간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그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크로잔을 욕보인 일이 없어 시올.”


그 정도면 자네가 염려하는 일은 줄어든 셈인데. 로랑은 표정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책에서 시선을 떼어 소파의 끝에 몸을 내밀고 걸터앉은 채로 로랑을 바라보는 시올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고 로랑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는 채로 습관처럼 타인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자.”


로랑은 약간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여는 시올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로 눈을 맞췄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안 좋은 소문이 있어”

“내가 모르는 소문을 네가 알 리가.”

“그래서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잖은가.”


“시올.”


로랑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깔려있었다. 크로잔의 귀족이 왜 별 볼일 없는 말단 귀족과 어울려 다니시나요? 철없는 영애가 시올을 가리키며 로랑에게 비아냥거렸을 때 영애의 이름을 다그치던 목소리와 흡사해서 시올은 손에서 책을 내려놓고 로랑의 표정을 훑었다. 로랑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로랑은 보기 드물게 표정을 지운 채로 시올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백하게 듣고 싶지 않다는 말에 시올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소파에 등을 기대며 혀를 찼다.


“로. 나는 네가 이렇게 무른 걸 본적이 없어.”

“나는 네게도 물러. 오, 시올 정말 드디어 그 머리가 쓸모없게 되었나.”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닐세.”


시올은 로랑이 아마도,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이 로랑을 생각하는 것 보다 두어배는 더 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로랑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를 믿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보는 로랑은 이따금 오만했고 아무리 격식을 차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이를테면 뒷골목의 정보상의 아들이나 졸부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낮추어보지 않는다고 해도 로랑이 뼛속까지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 중의 하나임을 정확하게 알았다. 로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침마다 그의 메이드와 버틀러의 손길에 의해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시올은, 때문에 로랑을 걱정했다. 로랑이 시올이 사랑하는 남작영애가 좋아하는 그림을 시올에게 일러주며 그를 걱정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시올이 로랑과 만나게 된 뒤에도 로랑은 그에게 선 이상으로 무른 적 없었다. 정이 많았으나 줄 수 있는 것을 주고나면 로랑은 되려 당당해졌다.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주인이 있는 소파라니. 


“시올.”


시올은 로랑의 목소리에 결국 입을 닫았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었다.









“도착하셨습니다.”


아마도 로랑이 그에게 지고 만 것은 로랑이 허락하지 않아도 튠은 응접실에 앉아 있다가 기어코 어느 순간 자신의 침실을 찾아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로랑의 버틀러 모라벡은 튠 소르디에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일견 적대적이라고 할만큼 유독 로랑의 많은 손님들 가운데에서도 그에게만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튠의 고집이 더 지독했는지도 몰랐다. 로랑은 집사인 모라벡에게 어머니가 꾸며놓은 응접실에 소파가 들어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한 때 직접적으로 물어보았으나 모라벡은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본래 말 수가 적은 남자였기 때문에 자세한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으나, 시간을 두고 보니 아마 단순히 튠이 지나치게 고집스러웠던 탓일지도 몰랐다. 로랑의 침실에 들어오겠다는 뜻을 드러낸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을 뿐 아마 시올이 그러겠다고 했더라도 로랑은 그만 두는게 좋을 거라고 대답했을지도 몰랐다. 


튠은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로랑은 열에 취해있었고 지난번 타국의 독감이 제국을 휩쓸었을 때에도 건강하게 종종 사냥회에 나가고는 했던 로랑은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독감에 땀으로 젖어 금방이라도 침대 밑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느꼈다. 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푹 젖어 있는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저지한 것은 로랑에게도 달가운 일이었으나 닫힌 문을 뒤로하고 문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버틀러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걱정스러워 로랑은 모라벡의 눈빛에 시올의 눈빛을 겹쳐 보며 힘없이 웃었다. 많이 아프다며.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울 만큼 다정한 음색으로 머리를 짚어오는 손길에 로랑은 말을 내뱉는 대신 눈으로 그의 눈을 좇았다. 차가운 손이 눅눅하게 젖은 몸을 천천히 짚어나가는 것을 내버려 두며 짙은 색 머리칼 아래로 가려진, 늘 그렇듯 눈길을 피하는 눈매를 바라봤다. 그는 습관처럼 늘 눈을 피했고, 로랑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를 충분히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많이 아프면 내가 비방을 알고 있는데.”


튠. 로랑의 낮은 목소리에도 튠은 저지되지 않았다. 독한 감기가 옮을까 그를 만류했지만 아마도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로랑은 이미 그가 그런 부름으로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로. 나는 네가 이렇게 무른 걸 본적이 없어.’


몸을 숙여 입을 맞추는 어깨를 밀어내기에 몸은 물을 먹은 듯 무거웠으나 로랑은 가까워지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대신해 눈을 감으면서 시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마도 로랑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로랑은 사람에게 물렀으나, 적어도 로랑은 시올이 생각하는 로랑 이상으로 그에게 물렀다. 호의와 애정이 뒤섞인 튠의 애정표현은 이따금 아니 그보다 빈번하게 아이 같았다. 

혀가 뒤섞인 입맞춤은 아이라고 보기에는 분명히 자극적인 것이었지만 로랑은 마치 자신의 방인 양 익숙하게 협탁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와 젖은 입술을 닦는 튠의 손길을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지켜봤다. 뒷목을 잡은 손은 그의 다정한 손길과는 반대로 서늘할 만큼 기분 좋게 차가웠고 로랑은 그가 물을 흘려보내는 대로 그를 놔두었다. 열 때문에 머리를 내리치는 것처럼 아득하게 밀려오는 두통 가운데서 로랑은 떠오르는 시올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가 유독 고집이 세거나 혹은 정말로 자신이 지나치게 물렀다. 


“집사는 나가있게 해.”


눕고 싶은데 저 자가 보고 있으면 체면에 흠이 가니까. 뒤이어 들려오는 말은 지나치게 튠 다워서 로랑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힘이 빠진 표정으로 웃었다. 모라벡. 가볍게 이름을 부르는 말에 집사는 내키지 않는 눈으로 로랑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고 튠은 그 사이를 틈타 금세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튠”


비스듬히 뉘인 몸 뒤로 몸이 닿아와 로랑은 조용히 그를 저지했다. 목덜미 이곳저곳에 짐승이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몸을 부대껴오는 몸짓에 로랑은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튠 소르디에가 로랑의 옷자락에 짙은 홍차를 쏟았을 때도 그랬다. 수건으로 로랑의 옷가지를 닦는 모라벡을 바라보던 그는 옷을 갈아입겠다는 로랑을 기어코 침실까지 따라와 제가 옷을 입혀주겠다며 웃었다. 마치 네가 하는 건 나도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아이 같아 실갱이 끝에 그를 그렇게 하도록 두었을 때부터 로랑은 물렀는지도 몰랐다. 시중을 들만한 태생이 아닌 탓에 어설프게 등 뒤에서 로랑의 블라우스를 오랜 시간을 들여 입히는 동안에도 로랑은 슬그머니 장난을 쳐오는 손길에 눈을 감은 채로 나지막히 목소리를 낮추어 그를 저지했다. 그는 곧게 등을 세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자세로 로랑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신발 끈을 매었고 로랑은 그가 답례로 키스를 요구할 때도 결국은 그렇게 해주었다. 


"로랑.“


로랑 크로잔은 다시 손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행동에 몸에 힘을 뺀 채로 그가 다시금 치근거리도록 놓아두다가 뒤이은 말에 느리게 감았던 눈을 떴다. 왼손 약지에 서늘한 금속이 닿아 열이 오른 몸에 등골부터 한기가 흘렀다. 익숙한 손에 쥐인 채로 반지를 끼운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비스듬히 뉘인 몸을 천천히 천장을 향하도록 움직여 눕힌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튠. 친우가 날 보고 자네에게 너무 무르다고 하더군.”


열이 오르고 아파서 지친 사람에게 도망갈 만한 틈도 주지 않은 채로 반지를 준비한 것이 그다웠다. 


확실히 그런 것 같네”


로랑은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받아들이지 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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