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불쾌감이 감도는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있으면서도 로랑은 별 일 아닌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높은 모자를 쓰고 커프스 핀에 박힌 다이아몬드의 캐럿이나 견제하고 있을 늙은 노신사들이 테이블이 앉아 목소리를 한껏 억누른 채로 지지 않겠다는 듯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장면은, 황실에서 주최한 귀족회의의 내용과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보기에 꽤 즐거운 광경이었다. 서로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노아힘과 크로잔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볼만했다.


  노아힘과 크로잔을 한 자리에 모아놓을 정도면 황실과 소르디에도 꽤나 신경을 써서 마련한 자리일테지만 제국의 시작부터 권력을 잡아온 귀족들을 고작 이런 자리에 모아놓는다고 무르게 넘어갈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 예상했을 것이었다. 그 테이블에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 있는 귀족들 중 이것이 황비와 소르디에가 황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겠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이후를 걱정했다. 이를테면 그렇게 된다는 것조차도 상상해본 적 없는 변방 몰락 귀족이 된다거나, 또는 아예 그런 생각을 할 머리가 목 위에 남아있지 않을 경우의 수 같은 것들이었다.


  로랑은 정치나 외교, 역사 같은 것들을 들춰보는 시간에 차라리 검을 들고 기사들이 훈련하고 있는 연병장을 쏘다니는 쪽을 택하기는 했겠고, 대개 크로잔의 아들이 그런 성향을 띄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어쨌든 그것들은 대게 귀족들에게 필요한 소양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루에 두 시간씩 곁에 앉아 책의 행을 짚어주는 튜터가 있었다. 튜터가 열두살 된 로랑 크로잔에게 가르친 역사 중의 일부에는 어린 황제에게 황권을 쥐어주고 나면 흔히 일어나는 문제점들이 꽤나 자세히 얽혀 있었고 로랑은 열변을 토하는 소르디에의 귀족을 바라보며 늙고 깐깐했던 튜터를 떠올렸다. 카미와일의 손에 강력한 황권을 쥐어준다고 해도 카미와일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아 제법 똑똑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반드시 소르디에 밖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로랑은 오후가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해지는 대화를 바라보다가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회의실의 나무문이 열리자 얼마 안 있어 자리를 일어났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들이 언성을 높이다 말고 헛기침을 하는 모습은 보기에 나쁘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이런 자리는 로랑에게 그리 흥미를 끄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얼굴만 맞대도 으르렁거리던 표정들은 어디에 감췄는지 한껏 유행하는 보석과 장신구로 몸을 꾸민 귀족들을 보며 로랑은 연회장 한쪽 벽면에 몸을 기댄 채로 느긋하게 웃었다. 남자들의 치졸한 경쟁의식이라는 것은 저런 곳에서 흔히 드러난다. 눈썰미가 없는 이라면 발견하기 어려울 테지만, 커프스를 고정시키는 커프스 핀에 박힌 보석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가, 천박해보이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잘 세공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라거나 커프스단추가 정돈 된 모양부터, 들고 있는 지팡이가 얼마나 고가의 나무로 만들어졌는가와 같은 눈에는 띄지 않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될 수 있는 한은 한껏 기교를 부린 차림은 그렇지 않은 차림새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로랑은 저 멀리서 샴페인 잔을 든 채 호두나무를 깎아 만든 케인을 들고 적들의 사이에 섞여있는 숙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버슬을 넣어 한껏 부풀린 치마에 나이가 어린 소녀보다도, 나이가 많은 숙녀들이 곳곳에 잔뜩 리본을 단 모양새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좋은 밤이군요."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은 듯 로랑이 기억할 만큼 가까운 인물의 것은 아니어서 로랑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대신 들고 있던 잔을 눈높이만큼만 올렸다가 내려보였다. 


  "좋은 밤이군요." 


  로랑의 목소리는 간결하고 약간 웃음에 차있었다. 방금 전 까지 언성을 높이던 노신사들이 그 사이 표정을 바꾸고 사이사이로, 버슬로 부풀린 드레스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다른 가문의 뒷이야기를 하거나 또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장면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했고 황실의 연회에서 건네는 최고급 샴페인은 로랑의 입에 아주 잘 맞았다. 로랑은 남자가 그 귀여우리만치 우습고 격정적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었던가 행색과 얼굴을 보고 천천히 가늠했다. 그 테이블의 어디쯤에서 본 얼굴이더라. 로랑은 남자의 짙은 갈색 머리칼에 시선을 두고 머릿속에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자신과 좌우로 앉아있던 크로잔의 귀족들, 그 반대편에 앉은 노아힘과 사이에 앉아있던 소르디에를 훑어보다가 다시 남자의 눈에 시선을 두었다. 


  사교적인 그의 성격만큼 로랑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데도 능숙했다. 마호가니 빛 머리에 새파란 눈동자.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양 옆으로 갈리자 그는 쉽게 로랑에게까지 걸어 들어왔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악에 감싸여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오전과 오후의 회의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근근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내들은 물론 부인들 까지도 가지고 있는 보석 중에 가장 고급의 보석과, 가장 고급스러운 부채,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두르고 머리를 양껏 올려 화려하게 장식하고 자신의 가문을 감싸 돌며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로랑은 크로잔과 크로잔의 방계 귀부인들, 아니면 다른 가문과 결혼은 했으나 여전히 크로잔에 긍지를 가진 귀부인들과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들은 그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최소한의 거부감을 표시하듯 접고있던 부채를 펼쳐들어 뺨을 스치듯 부쳐대거나 입술을 가렸다. 


  로랑은 소르디에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를 떠올리고 천천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살롱에서 소르디에 귀족의 곁에 서 수도에 올라 온지 얼마 안 되었다고 인사를 건네던 소르디에 백작을 떠올렸다. 로랑은 샴페인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가볍게 웃었다. 


  “살롱에서 본 얼굴 같군요.”


  살롱에서 안면식이 있었다고 한들 이름을 나누지도 않을 만큼 잠시동안 조용히 머물다간 손님이었고, 연회장의 분위기가 아무리 활기에 차 유연해 보인다고는 해도 크로잔의 귀족과 귀부인에게 둘러싸인 크로잔의 사남의 앞에 소르디에 백작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었다. 풍성하게 부풀린 수많은 드레스 사이를 걸어 들어와 로랑에게 인사를 건넨 것만으로도 웃고 있는 표정과는 달리 대단한 수완이었다.


  “튠 소르디에입니다. 말씀대로 살롱에서 뵌 적이 있죠.”


  튠은 선하게 웃으며 로랑의 악수에 가볍게 손을 잡아 응답했다. 답답하게 보일 만큼 격식을 차린 옷차림은 커프스단추나 핀, 커프스나 소매 끝, 셔츠의 칼라나 베스트의 단추 개수까지 흠 잡을데 없이 정교했다. 파티에 어울리기에는 화려한 붉은색 커프스로 멋을 낸 로랑에 비해 점잖은 신사다운 맛이 있었으나 어쨌든 그와 두세번 얼굴만 마주한다면 그 뒤로는 멀리서 옷차림만 보아도 그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꼭 차려입은 갖춤새였다. 뒤가 비쳐 보일 것처럼 예리한 색의 눈동자인데도 튠은 눈을 휘며 웃었고, 방어적으로 부채를 펼친 크로잔의 귀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도 정중하고도 거리낌 없이 굴었다. 


  튠은 그 자리가, 로랑 크로잔과 크로잔의 부인들 그리고 멀리서 로랑의 숙부가 다가오고 있는 그 무리가  자신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이 정중하면서도 민감한 소재를 꺼내지 않으면서 대화를 이었다. 회의는 따분하고도 민감한 소재였음으로 그의 대화는 주로 파티나, 귀부인들의 옷차림에 대한 칭찬, 아름다움에 대한 약간은 웃음이 섞인 기분 좋은 농담 같은 것들이었고 로랑은 점차 부채로 붉게 물든 홍조를 가리는 젊은 영애들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지나가는 하인에게서 샴페인 잔을 집어 들어 튠에게 건넸다. 로랑의 흥미는 대개 샴페인의 맛이나 사람들과의 대화에 있었고, 일생에 다시는 없을,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아주 좋은 타이밍으로 황실 연회로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 몇 몇의 젊고 귀여운 영애들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녀들은 대개 방계 귀족의 혈통이었지만 황실 연회와 사교계 데뷔인 만큼 아주 적은 나이였고,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는 아주 들뜬 얼굴로 몇 몇 남자의 손을 거쳐 에스코트를 받으며 춤을 추느라 오늘 하루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수도에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백작이면 아직은 소문에 둔감할 거라고 지레 짐작한 로랑은 그런 몇 가지의 귀엽고도 소소한 이야기를 그에게 건네고는 이따금 부인들에게로 눈을 돌려 그녀들이 데뷔할 즈음의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이제는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된 부인들도 옛일을 떠올리며 수줍게 웃었고 로랑은 다 비운 샴페인 잔을 하인에게 건네며 새로운 잔을 받아 들었다. 밤은 길었고 로랑은 술을 좋아했다. 밤을 지낼 만큼은 충분히.

  한차례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나자 튠은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또 뵙도록 하죠.”


  로랑의 눈은 바르게 마주쳐오는 튠의 눈동자에 한참동안이나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크로잔에게 둘러싸여서는 적당히 빠져나갈 때를 아는 것처럼 가뿐한 인사를 건네고 무리에서 걸어 나갔다. 로랑은 그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또 뵙겠다는 말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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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