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부인.”
마담 브룩의 살롱은 작고 아담했지만 로랑이 좋아하는 곳 중에 하나였다. 그녀의 요리사가 구워내는 마들렌은 속이 부드럽고 맛이 있었고 그녀는 말 대신 단순한 손짓과 눈빛으로도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고 다루어야하는지 아는 보기 드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녀의 다른 모든 장점을 인간답게 만들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매사 사교계의 뒷소문에 집착이라고 부를 만큼 호기심이 많았다. 마담 브룩은 소곤소곤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에서 문틈 사이로 집사가 건넨 작은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고 버터 나이프로 끝을 톡톡 잘라냈다. 로랑은 몇몇의 부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소파에 등을 깊이 묻은 채로 흘려들으며 브룩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녀는 표정을 유지하려 애써 한 손을 코르셋으로 잔뜩 조여 올린 풍만한 가슴위에 얹은 채 숨을 천천히 내쉬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놀라움과 당황을 로랑은 분명하게 읽어냈다.
“여러분.”
그녀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났고 아주 가늘게 떨렸다.
“메르디가 죽었다는군요.”
찻잔을 기울이던 노신사가 놀라운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는 도중에, 하늘색 공단으로 된 드레스를 입은 열다섯의 영애가 그녀의 어머니의 프릴이 달린 소맷자락을 당겼다. 어머니, 메르디가 누구에요? 사교계 데뷔 전까지는 집안에서 이백캐럿쯤 되는 다이아몬드처럼 곱게 자랐을 영애라면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도 남았다. 로랑도 그가 그렇게 사교계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자신의 말의 목을 잘라낸 소르디에의 기사를 알지 못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이름이었다.
속된 말로 창부라고 부르겠지만 로랑은 메르디를 만난 뒤에는 적어도 그녀의 소녀다운 매력 속에 은밀하게 발산해내는 가치를 높게 사고 있었다. 속된 말로 그녀를 이르기에 로랑이 만난 그녀는 단순히 예쁘고 좋은 것을 조금 더 잘 분별해내는 정도의 미모가 돋보이는 여자였을 뿐이다. 그녀는 로랑의 살롱 뒷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오래된 목걸이나 귀걸이 따위를 보며 즐거워했고, 무료해하는 메르디를 위해 로랑이 불러준 재단사들 앞에서는 더더욱 세련된 안목으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옷감을 골라냈다. 그녀는 몇 가지의 실크를 로랑에게 추천했고 그녀의 드레스가 가봉되기 훨씬 전에 로랑의 블라우스는 그의 옷장에 걸려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로랑은 그녀가 본래의 직업에서 어땠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좋지 않은 이유로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온 메르디와 꽤 재미있게 지냈다. 그녀의 아들이 우려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안타깝게 됐군.”
노신사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년의 그녀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이 먼 곳을 응시하는 눈길에 로랑은 베어 문 흔적이 남은 마들렌을 찻잔 위에 내려놓고 마담을 보고 가볍게 웃어보였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로랑은 아쉬운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애를 향해서 가뿐히 페도라를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인사하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그 뒤로 적어도 일주일, 이주에 한번은 메르디에게서 편지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유쾌했고 로랑은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 쉽게 흥미를 느끼고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여전히 이상할만큼 아름다운 것을 제외하면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귀족들 사이에 밀봉된 편지로 소문이 돌 정도라면 확실히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찾아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어디에선가 소문이 퍼져야했다. 왕년에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했던 여자라면 언제 신변에 위협이 가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녀는 숨겨진 수많은 귀족 부인들을 연적으로 둔 셈이었고 귀족의 손속이란 본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든지 뻗어나가는 법이어서 부인들이 여태 그녀에게 어떤 음독이나 위협도 가하지 않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선언하고 지금까지도 생활을 유지할 만큼 위협 속에서도 버텨온 여자였다. 확실히 지나치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로랑의 개인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로랑은 버틀러에게서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었다. 마담 브룩이 아닌 크로잔의 방계 귀족이면서 로랑의 먼 고모뻘이 되는 여자로부터의 편지는 마담 브룩이 받은 편지처럼 메르디의 죽음을 시사했다. 로랑은 작은 그의 응접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가려다가 복도 끝에서부터 메이드가 들고 오는 그녀의 몸통만한 박스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가봉된 드레스가 오늘 도착했는데요. 주인님.”
“입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처리하도록 해.”
메르디가 로랑의 저택 게스트룸에서 가봉을 맞춘 드레스는 이제 막 손으로 마감이 된 모양이었다. 베이비 핑크의 보는 것만으로도 달착지근할 것 같은 박스를 바라보다가 로랑은 책상 위에 거칠게 봉인이 뜯긴 편지를 던져두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주인님.”
서재의 책장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집사였다. 로랑은 책상 위에 리본과 밀봉의 형태별로 분류되어 쌓아올려진 초대장과 편지들을 검지 끝으로 헤집다가 모습을 드러낸 그를 바라봤다. 손님이 도착 하셨는데요. 개인적인 일로 저택에 출입하는 이들은 대게 언질이나 약속을 주기 마련이다. 그도 아니면서 로랑의 저택을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약속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데에서 로랑은 어림짐작으로 누구인지 대상을 가늠했다.
“응접실 말고, 비워둔 게스트룸으로 안내해주겠나.”
좋은 상태는 아닐 것 같아서 말이야.
“...도와줘.”
로랑은 대뜸 도와달라고 말하는 남자의 어깨를 잡아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도와달라는 말만으로도 로랑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했다. 소르디에의 충성스러운 사냥개. 메르디를 닮은 기사. 먼 고모의 편지는 마담 브룩의 한마디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이를테면 발견된 당시 이미 시신은 차가웠다거나, 매우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어있었던 것 같다는 것. 귀부인들의 사이에 도는 풍문은 대개 지저분한 염문설이 많았지만 정보가 흐려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루머는 그녀들의 개인적인 푸념과 의견만 제외한다면 비교적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독이라고 했나?”
비올은 파리하고 지친 기색이었다. 메르디를 닮은 녹색 눈만이 마치 이승에 미련이 있는 망자처럼 흉흉하게 빛났다. 그는 로랑이 마지막으로 본, 검을 쥐고 그대로 베어들어올 것처럼 힘 있는 모습도 아니었고 분노나 울분에 찬 표정도 아니었다. 지나치게 큰 충격이 그의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간 탓에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질린 듯한 낯빛을 바라보며 로랑은 그가 말하는 독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런 것이 있다고 풍문에 듣기는 했다. 취향이 나쁜 귀족 중에는 독거미나 독이 있는 파충류 따위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제법 되었고 뒤처리를 깔끔히 하기위해 공모자를 죽이기 위한 독도 흔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흔적이 남지 않는 독은 비쌌고, 비싸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주로 쓰였다.
“쉬고있게.”
로랑은 서재 책상 위에 놓여있던 편지들과 메모들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개 중에 그의 질문을 해소시켜줄만한 인물들과, 소문이 돌만한 오찬과 만찬. 화제는 로랑이 언급하지 않아도 메르디가 중심에 있을 테니 몇 군데만 참석해도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을 수 있을 거였다. 로랑은 집사에게 펜과 종이를 받아들어 가끔 포커를 치던 정보상의 아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쪽을 통해 들어두면 될거다. 외투를 든 버틀러에게로 몸을 틀다가 로랑은 뒤를 돌아봤다.
텅 빈 채로 반짝이는 녹색 눈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손에 눈길을 주었다.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잡아챈 것처럼 소매를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있으면, 안되나. 아직 어린 로랑을 두고 저만치 걸어가던 형들의 소매를 붙잡고 조르던 제 모습이 저렇게 간절했을까 싶어서 로랑은 몸을 돌려 비올을 보고 선채로 달래듯 어깨를 두드렸다.
“금방 다녀오지. 오래는 걸리지 않을테니 기다리고 있게.”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어린아이처럼 애써 표정을 숨기며 매달리는 시선에 로랑은 오랫동안 몸을 돌려 선 채로 비올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랑은 버틀러가 건네는 외투에 팔을 밀어 넣고 외투의 앞 버튼을 채우고는 낮은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남자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저보다 조금 낮은 붉은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경.”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 뒤로 불안한 표정이 보이는 것은 상황과 그의 파리한 안색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로랑은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고 그를 보며 힘을 풀고 편안하게 웃었다.
“나는 메르디가 아니야. 금방 다녀오지.”
무사히 돌아와서, 경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해주겠네.
다른 귀족의 타살을 밝혀내는 것이 손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아마 그가 원하는 만큼의 정보는 충분히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버틀러가 비올의 어깨를 잡고 소파에 도로 앉혀두는 것을 보고 로랑은 몸을 돌려 게스트룸을 벗어났다. 그에게 잡혀있던 소매가 여전히 잡혀있는 것처럼 느껴져 시선을 닫힌 문 뒤로 던지다가 로랑은 무릎을 굽혀 로랑을 올려다보며 흐트러진 커프스를 핀으로 정돈하는 버틀러를 내려다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모라벡.”
“예 주인님.”
“...그를 좀 재우게. 식사를 해야 할 것 같더군.”
with 비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