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 중

 "로랑 벌써 돌아가나?"

  "밤이 깊은지 꽤 된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느냐 물었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 로랑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까지 질 좋은 시가를 물고 포커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랫동안 로랑과 알고 지낸 귀족의 아들 외에도 상인의 아들과, 뒷골목에서는 제법 유명한가 싶은 정보상 청년도 끼어있었다. 테이블 저편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다음 패를 돌리는 남자의 거친 갈색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담배를 입에 물며 외투를 걸쳤다. 밤은 여전히 서늘한 계절이었다. 작은 쪽문을 나서자 카운터를 둘러싸고 아무렇게나 앉아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한 눈에 보아도 비싼 코트를 두르고 실크로 된 모자를 쓴 로랑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다시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엉성하게 나무로 짠 실내는 사람 목소리가 울렸고 싸구려 닭고기로 만든 요리의 그윽한 냄새가 밤늦게까지 풍겼다. 로랑은 주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곤 낮은 천장을 지나 거리로 나섰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들 외에는 거리에 없는 시간이었다. 간간히 멀리서 돌길을 채는 말발굽의 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이면 파티를 즐기던 영애들도 혼곤하게 취해 마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뜨끈하게 데워진 싸구려 와인으로 따듯하게 덥혀진 목덜미를 바람이 훑고 지나가 담배를 집어들던 손으로 외투의 깃을 여몄다. 골목 어귀마다 어슴푸레한 등이 세워진 것을 제외하면 빛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적었다. 반정도 땅 아래에 묻힌 듯한 모양새로 빈틈을 메운 작은 술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빛들과, 겨우 등 아래의 원만큼만 비출 수 있을 법한 노랗고 어두운 등. 구두 아래에서 허술하게 닦인 흙길의 흙들이 굽에 패여 조용히 먼지를 일으키다가 가라앉았다. 

  서늘하지만 저택의 정원에 심은 이국의 나무들이 천천히 꽃을 틔우는 계절이었고 외투의 깃을 조금만 추스르면 그렇게 크게 추운 날씨도 아니어서 로랑은 거리로 나가 새벽녘의 귀족들을 기다리는 마차를 잡는 대신 저택까지의 거리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마차가 지날 수 있는, 돌로 닦인 대로로 나가기 전까지 좁고 굽어진 골목을 걷던 중에 로랑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나친 골목 안쪽이 이상스럽게 소란스러웠다. 평민들의 주거지역이고 좁은 땅 위에 여러채의 건물들이 밀집된 탓에 골목은 훨씬 비좁고 어두웠고, 귀족 영애들이 즐겨보는 로맨스 소설에 나올만한 로맨틱함은 사실 찾아 볼 수 없는 곳들 중에 하나기이도 했다. 낮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여럿 골목 안쪽에서 희미하게 울렸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겨우 남자들의 체구가 보일 법한 빛이 눈에 들었을 때 로랑은 그들이 왜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가를 알았다. 사방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골목에서 목소리를 내어 말할 만큼 떳떳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옅은 색의 머리칼. 어두운 빛으로는 색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밝은 곳에서 보아서는 금색이나 밀빛이었을 것이다. 좁은 골목은 적당히 벌어진 어깨와 약간의 취기에서 나오는 용기만 있으면 가볍게 막을 수 있는 너비였다. 거기에 동료도 두셋 쯤 있으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 로랑은 골목의 초입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는 낮은 목소리로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는 지금이라고 잡아먹을 것처럼 킬킬대는 무리를 바라봤다. 언뜻 머리칼과 어깨만 보아서는 여자로 착각할 법도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키라고 해도 여성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정도의 높이인데다가, 이 시간에 하이힐을 신고 이런 좁은 골목을 돌아다닐 여자는 없다. 뒷골목의 창부라면 몰라도 수수한 옷차림에 손에 들고 있는 양장된 책을 보아하면 더욱 그랬다. 

로랑은 천천히 골목 안쪽으로 걸었다. 골목이 좁은 탓에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허리춤에 찬 검집이 벽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평소라면 잘 세공된 검집도 검만큼이나 소중히 여겼겠지만 소리 덕에 취객 셋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뭐야."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개 중에 제일 덩치 큰 놈 하나가 남자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중얼거리면서 다시 남자에게 올리던 취객의 손이 얼굴에 닿는가 싶더니 안경을 벗긴 모양이었다. 여전히 이쪽을 향해서 몸을 틀긴 했지만, 뒤에서 미인이라느니하고 얼굴을 품평하는 소리에 구미가 당겼는지 뒤를 돌아보는 가장 덩치 큰 놈을 바라보다 로랑은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왜 그냥 가려고?"


잘 생각 했어 젊은 양반. 이죽이는 목소리에 로랑은 미간을 좁혔다가 풀면서 숨을 뱉었다. 이렇게 인사불성이 될 때 까지 마실 필요는 없는데, 아마 집에 가면 여우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자식들도 두셋은 딸렸을 법한 나이의 장정들이 뒷골목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을 보는 것도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차라리 좀 더 절은 나이에 멋모르는 청년을 마주하는 쪽이 낫다.


  "설마."


  낮에는 수레에 과일이라도 얹어놓을 것 같은 얼굴로 이죽이는 꼴을 보다가 로랑은 조금 웃었다. 날이 밝았으면 첫째 이런 일 도 없었겠으나, 그들도 로랑의 옷차림만 보고도 길을 텄을 것이다. 


  로랑은 검을 한손에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길이가 긴 장검을 뽑는 데에는 반원만큼 공간이 필요했고, 로랑은 취객을 어떻게 할 심산이 없어도 이런 류의 위협이 잘 먹힌다는 것을 경험상 익히 알고 있었다. 매너를 논하는 입씨름보다 가볍게 검을 한번 뽑는 편이 대개 훨씬 일이 쉽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로랑이 팔을 앞으로 내뻗기 무섭게 길을 막고 있던 몸이 뒤로 쓱 물러났다. 남자가 뒤로 물러나는 만큼 손에 여전히 검을 쥔 채로 발걸음을 내딛다가 개 중의 하나가 멀찌감치 달려나가는 것을 덩치 큰 남자의 어깨너머로 보곤 로랑은 더 볼 것 없다는 것처럼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셋 중 하나가 자취를 감추자 안경을 들고있던 취객도 곧 안경을 내던지고는 뒤로 물러서다가 골목을 벗어났다. 

  제일 무겁고 비든해 보이는 남자가 주춤거리는 사이 로랑은 손을 뻗어 안경을 집어 건네고는 천천히 골목을 나섰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랑은 말 없이 그를 돌아봤다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어귀에서부터 말이 마차를 몰고 지나다닐 수 있는 돌이 다듬어진 대로까지 남자의 발걸음 소리를 확인하며 천천히 걸었다. 단순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로 뒤이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겠습니까?"


  돌이 다듬어진 대로를 밟자 구두 굽 밑에서 가벼운 마찰음이 일었다. 골목길이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대로를 따라 길게 가로등이 늘어서있었고 작은 골목길 보다는 훨씬 밝았다. 이따금 파티에서 돌아가는 귀족들이 탄 마차도 길을 지날테니 괜찮을 터였다. 도망친 취객들이 미인이라고 구미를 당겨한 얼굴이긴 했지만 로랑은 수수하지만 정돈된 옷차림에, 아주 작지는 않은 키, 귀족들이 볼 법한 좋은 책을 한손에 들고있는 남자를 레이디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로랑은 모자를 벗으며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구두 아래에서 작은 마찰음이 이는 돌길을 따라 저택으로 걸었다. 


with 아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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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