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밤
로랑 크로잔은 살롱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오랫동안 한곳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경매는 평소의 배 이상으로 가격이 오르고 있었다. 로랑의 살롱이 늘 그렇듯 살롱은 사람으로 붐볐다. 벽을 등지고 만들어놓은 경매대를 바라보고 놓인 여러 개의 소파와 패브릭 의자 위에 사람들이 몸을 묻고 앉은 채 가격을 불렀다. 적당히 사람들의 그늘에 가려 도드라지지 않는 지점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남자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간간히 입을 열었다. 웃는 얼굴 탓에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정복을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약간의 왜소한 체격이 그를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다. 모노클을 낀 긴 흑발을 가진 사람은 좀처럼 보기 힘든 법이다. 로랑은 남자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는다고 생각하며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로랑이 기억하고 있었을테고 무엇보다도 로랑은 그가 경매가 시작하는 시점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아무것도 낙찰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로랑이 오랜 시간을 걸려 준비해온 만큼 오늘의 경매는 큰 장이었고 사람이 붐볐다. 사람이 붐비는 만큼 경매품이 많았고 개중에는 로랑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충분히 값이 오를 때 까지 소문을 띄우고 값을 올려놓은 조각과 미술품이 많았다. 개 중에서 나서서 낙찰 받으려는 것이 없는 사람은 정말로 예의상 이 자리에 참석했거나, 단순한 흥미로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느긋하게 경매품을 감상하는 귀족들의 경매는 본래 좀 더 소박하고 소인원으로 치러지곤 했다.
경매는 확실히 평소의 배 이상으로 가격이 오르고 있었고 로랑이 지금껏 들인 공에 비해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한 수익을 올렸다. 남자는 아무 물건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좀체 사람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 앉아 단상 위에 올려진 경매품의 가격을 올리고 있었다. 간간히 입을 열고 값을 올리는 느긋한 목소리는 오히려 경쟁자들의 조바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바람잡이를 보며 로랑은 벽에 기대어 선 채로 팔짱을 꼈다. 마음 같아서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한창 열기가 오른 분위기를 깨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저 저 남자가 언제 다시금 입을 열고 경매에 끼어드는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물건이 고가에 팔리지 않았더라도 저 남자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히 재미있는 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경매가 막바지에 다다를 때 까지도 남자는 낙찰 받은 물건이 없었다. 값을 올리되 적당히 올린 뒤에는 깔끔하게 손을 털고 앉아 경매를 관찰 했다.
“재밌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로랑을 보며 다가온 집사가 그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타인의 경매에 와서 웃는 얼굴로 바람을 잡는 남자라니.
“잠깐 쉬고 가지. 긴장감이 필요 할 것 같은데.”
마지막 물건은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물건이 법이었다. 일부러 앞의 자잘한 물건들을 놓치고 느즈막히 살롱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보석이나 작품의 상징성까지 더하면 간혹은 귀족들의 재력싸움으로도 번졌다. 잠시 휴장함으로서 긴장감을 높이는 쪽이 더 초조해진다. 로랑의 말에 하인들이 약간의 디저트와 차를 날라 왔다. 차 한 잔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게 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었다.
로랑은 서서히 말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로 분주해지는 살롱 틈에서 조용히 자리를 뜨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웃었다. 벽에 기대어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즈음해서 천천히 남자의 뒤를 따라 배웅을 나섰다.
"벌써 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아쉬운데요.“
애교가 언뜻 비치는 순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도 모노클 뒤로 보이는 짙은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에 로랑은 남자를 보고 마주 웃었다. 사람이 많아 사람 틈에 가려 지금까지는 눈에 도드라지지 않았지만 다음에 어디에선가 연이 닿아 마주치게 되면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을 법한 인상이다.
“아쉽다니 다행이군.”
“덕분에 재미있었습니다.”
말투는 자연스러웠다. 평소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느껴질 만큼 귀족적인 말투는 그의 신분을 짐작하기에도 충분히 용이했다. 밖은 이제 거의 해가 져 로랑의 저택 정원에 켜놓은 램프의 불빛만이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의 입구까지 아른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웃고 있지만 눈꼬리가 쳐진 순해 보이는 인상이며, 쾌활해 보이는 짙은 눈까지 웃는 것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다. 덕분에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재미있었다. 생각보다 수익이 올랐고, 경매 내내 그를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로웠던 탓에 사람들 틈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처음 눈에 띠었을 때부터 웃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 남자도 경매를 즐겼을 것이다. 로랑은 눈썰미가 좋았다. 그는 가지고 싶은 물건이 없었고 그저 값을 올리는 데에만 흥미를 느낀 듯 보였지만 단순히 그 긴장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어한 얼굴이었다. 로랑은 하인 대신 저택의 문을 열며 문에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틀어 그가 지나가도록 하며 입을 열었다.
“즐거우셨나 봅니다.”
“그랬던 것 같군.”
약간의 침묵 뒤에 돌아오는 대답에 로랑은 웃었다. 더 말을 잇지 않자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천천히 로랑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어둑하게 완전히 가라앉은 정원에 등으로 밝히고 있는 길을 따라가는 동안 짧게 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로랑은 가볍게 몸을 틀어 살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바람에 슬며시 밤바람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랑이 돌아가면 짧은 휴식도 끝나고 마지막 경매가 시작될 터였다. 이 경매만 끝내면 당분간은 로랑도 휴식기였다. 값을 올리기 위해 저택 한 구석에 보관하고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크고 작은 물건들은 오늘 밤을 팔려나가, 내일 아침이면 심부름꾼의 손과 마차에 실려 이 집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로랑은 커프스를 정돈하는 집사의 손길에 목을 내맡겼다가 입에 시가를 물고 살롱에 들어섰다. 아직 가시지 않은 진한 다즐링의 향기와 파이 위에 올려진 설탕에 조린 사과의 향이 아직도 살롱 안을 근근하게 감돌고 있었다. 로랑은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눈을 돌렸다. 운이 좋으면 금방에라도 다시 만나게 될테다. 수도에 모여 있는 귀족들의 소문은 어깨를 나란히 한 관목만큼이나 가깝고, 로랑의 입에서 나간 소문이라도 고작 이틀이면 스무명의 귀부인의 입을 거쳐 다시 로랑에게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방문객 중 누군가의 손님이라면 로랑과 안면이 있는 사이가 될 확률도 높았다. 어쨌든 로랑은 남자가 한껏 고무 시켜놓고 간 경매를 마지막까지 즐기기로 했다. 선선한 밤이었다.
with 주세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