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urant



 “랭커스터에는 처음이시라구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마부는 마차에서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의 짐은 큰 트렁크 두 개와 모자가 든 상자 두 개가 전부였다. 런던에서 랭커스터까지의 긴 여정을 마친 말들은 이제 잘 마른 여물을 먹고 충분히 쉬게 될 것이었다. 마부는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랭커스터의 크로잔 저택에서 이틀을 머물러 가기로 되어있었다. 흰 에이프런에 손을 문질러 닦은 메이드가 나와 빗물과 구정물로 더러워진 마부를 뒷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저택은 그가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컸다. 으리으리한 저택을 광활한 평지가 둘러싸고 있었고 평기가 끝나는 곳에 사냥터로 보이는 숲이 맞닿아 있었다. 튠이 그 길을 거꾸로 거슬러 저택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 저택의 숲이 과연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튠에게 저택을 소개한 테오도라 크로잔이 크로잔 저택의 사실상 안주인이었다. 크로잔 후작 내외가 수년 전 빗길의 마차사고로 타계한 사실은 런던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튠이 랭커스터에 머물 곳을 찾을 때, 집에 장성한 어른이 없다는 이유로 크로잔 저택은 제외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조언을 들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미망인이 된 테오도라 크로잔이 본가로 돌아가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한 뒤에는 크로잔 저택에 머물기로 쉽게 결정을 내렸다. 넓은 저택 안에는 열일곱의 소년과 미망인, 그리고 오랫동안 그 집에서 일한 최소한의 고용인뿐이었다. 안색을 살펴야할 주인도, 큰 소란도, 어줍잖고 시시한 시골 귀족의 파티도 없을 것이었다. 지내기에는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소르디에 백작?”


 튠은 테오도라의 목소리에 멈췄던 걸음을 뗐다. 테오도라가 안내한 객실은 집주인 내외가 썼던 침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저택의 앞뜰을 향해 난 창문에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보기 좋게 내리쬐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불어드는 바람에 흰 린넨 커튼이 안으로 휘날렸다.


 “달리 필요하신 건?”


 없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테오?”


 소매를 말아올린 흰 셔츠에, 갈색 승마바지, 손에는 승마모를 든 청년이 문간에 서서 튠을 바라보았으나 곧 시선을 거뒀다. 여기에 있다길래. 그는 처음부터 튠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테오도라를 향해 말했다. 청년이 승마모와 커프스를 손에 쥐자 집사가 자연스럽게 청년의 손에서 그것들을 받아갔다. 청년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색빛 눈은 청년의 얼굴이 움직일 때마다 청색으로도 보였으나 머리칼은 영락없는 옅은 회색이었다.


 “로, 이쪽은 소르디에 백작. 백작 이쪽은 로랑.” 


 

 오늘부터 머문다던 그 사람이네. 로랑의 목소리에서는 아직 가쁨 숨소리가 들렸다. 튠은 그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막 말을 달려 돌아온 듯 옅은 색 머리칼 사이로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들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고작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으나 성년이 되자마자 부모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청년이었다. 로랑은 키가 컸고 골격이 다부졌다. 로랑은 물 흐르는 동작으로 채찍과 재킷을 벗어 고용인에게 건네고 있었다. 한 번도 타인의 아래에 서본 적 없는 익숙한 몸짓들이 고작 열일곱의 청년을 위압적으로 만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로랑의 손 끝에 잠시 머물렀다.


 “반갑습니다 백작.”


 가냘픈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로랑의 말투에서도 그것이 묻어났다. 튠은 일전 런던에서 크로잔 후작 내외를 멀찍이서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타계한 후작 내외의 얼굴을 정확히 반씩 섞어놓는다면 저런 얼굴이 나올 것이다. 어머니 쪽을 완전히 닮은 테오도라와는 생판 달랐다. 아름답다는 표현에 가까우리만큼 우아한 얼굴을 보완하기라도 하듯 뚜렷한 이목구비의 선은 크로잔 핏줄임이 틀림없었다. 로랑은 짐짓 여유롭게 웃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거나 손님을 맞는 긴 말을 늘어놓는 대신, 보일 듯 말듯 아주 적은 각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잠깐 눈을 깜박인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

흰색 승마복인지 테니스복인지를 입은 청년 로랑이랑 마주친 어른 튠을 쓰고싶었는데 뭘 더 이어쓰려고 했는지 까먹어서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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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

THE RED



 "하지만 난 아무래도 현명한 왕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네."


 그 때에 에아르닐은 말을 삼켰다. 그에게는 자신의 젊은 왕에게 건넬 수 있었던 수 가지의 말들과 언어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과연 어떤 짜임새를 가진 문장으로 조합하는가는 언변에 능숙한 그에게 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실리와 이상이 만감과 함께 교차했고 한 편으로 보수적인 귀족의 아들로서 알고 있는 그의 실리와 젊은 사상가가 지녀야하는 이상이 왕의 거침없는 욕망 앞에서 얼마나 솔직해져야 할지 없는 손을 접어 셈하고 있었다.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 

 평화를 위해 봉인되었던 모든 것이 완전하게 파괴된 순간 평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역설적이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의 붉은 망토는 말의 발굽들에 쓸려 날아오른 먼지와 탁한 긴장감에 싸여 혼탁한 자줏빛으로 가라앉았고 보기 드문 레몬색 머리칼은 예장용 검으로 자른 듯 성의 없이 들쑥날쑥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가 보았다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에아르닐에게 한 차례의 지독한 모욕이 따가운 소금처럼 쏟아졌을 것이었으나 그 지지부진하게 방어선을 밀어 붙였던 전투에도 사상자는 있기 마련이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는 쪽빛 망토에 방패 하나를 손에 쥐고 전선의 날개에서 사망 했고, 그가 이끌고 온 순박한 식솔 중에서 오로지 칼을 쓸 줄 아는 자들만이 무디게 벼려진 칼날 같았던 전쟁 끝에 살아남아 모여 있었다. 

 

 왕의 귀환은 조용하고 엄숙했다. 아마도 궁에 몰아친 한 차례의 유례없는 피바람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떠나기를 배웅했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기에 없었고, 귀환을 위한 인사는 마치 평화의 시대를 장례지내는 상주를 맞이하듯 했다. 






 "영주님께서 돌아오십니다!"


 메이로디가 먼지 쌓인 창을 활짝 젖혔을 때, 그녀는 붉은 망토에 검은 여우털을 두른 하라드 이실의 영주를 보았다. 영주는 짧은 레몬 빛 머리칼을 날리며 집에서 떠났던 그 날 올라탔던 검은 점박이 종마의 안장 위에 앉아있었다. 영주는 하라드 이실의 그 어디에도, 짙은 흙 내음이 나는 땅에도, 한 올의 참나무 이파리에도, 넓고 어두운 숲과, 내리쬐는 태양과 그늘 없는 너른 들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젊었다. 하라드 이실의 싱그러움은 어린잎과 움튼 새 순을 위한 것이었다. 도회지의 젊은 사상가를 위한 것도 젊은 영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종마가 편자로 땅을 두드려도 먼지가 나지 않는 습윤하고 질 좋은 땅 위에 도회지에서 온 젊은 영주가 발을 디뎠을 때, 메이로디는 그녀의 속마음처럼 가냘프게 말라버린 몸을 노파처럼 굽혔다. 메이로디는 그녀가 정말 노파처럼 보일 때까지 울었고 청년은 그녀의 등 위에 손조차 닿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평화의 시대를 끝마친 젊은 사상가의 고향이었다.


 "저는 다시 클레릭으로 떠납니다."


 에아르닐이 그렇게 말했을 때, 노파와, 야수와, 늙은 아첨꾼은 식탁머리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식탁에는 검은 빵과 묽은 야채수프와 포도 알갱이가 탁하게 가라앉은 질 낮은 포도주만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하라드 이실은 영주님을 잃었고, 도련님께서 떠나시면 남쪽 땅 끝의 영지가 전부 주인이 비게 됩니다요. 곳간의 양식은 전부 군용으로 내보냈지만 가을이면 다시 걷어야 할 밀이 산더미인데, 포도주도 다 사라졌으니 올 해는 포도를 수확하면 왕성에 보낼 것과 영지민이 먹을 것을 빼면 전부 술을 담궈야 하는데 영주님이 안계시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에아르닐은 흑색 빵 귀퉁이를 뜯어 묽은 야채수프에 담그다가 빵을 그만 수프 접시에 빠트렸다. 그는 늙은 아첨꾼을 바라보다가 흔히 눈 앞에 그의 친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화하게 웃었다.


 "나는 영주의 자리를 포기할 생각입니다. 도니제티."


 "나는 어려서도 지금도 하라드 이실에 그 어떤 애정도, 애착도 갖고 있지 않았고 하라드 이실을 이름자 앞에 짊어져야했던 대가로 받은 것은 내가 수도에서 먹고 잘 곳을 얻는데 쓰는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나이로 흐려진 아첨꾼의 회색 눈은 느리게, 묽은 수프에서 젊은 영주에게로 다시 야수처럼 일그러진 소년에게로 옮겨갔다. 소년의 눈은 에메랄드 같았고, 각섬석 같았고, 페리도트 같았다. 육중한 저택 문 밖의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귀담아 듣지 못하고 자란 푸르스름한 녹색 눈은 도끼로 내리치면 산산 조각 날 결이 가는 그 어떤 보벽의 하나처럼 맑았다. 


 "앙그라드."


 스물두살의 소년은 그의 뭉그러진 몸뚱아리에서 유일하게 빛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눈을 굴렸다.


 "나는 너에게 영주권을 이양한다."

 "도련님!"


 올모스의 충실한 종. 힘없는 늙은 아첨꾼. 흐려진 회색 눈은 그가 저택의 복도를 열 걸음 걷는 동안 한 번은 부딪히게끔 만들었고, 그의 젊은 영주는 그가 스무 마디를 말할 때 마다 한 번은 바닥에 굴러 넘어지도록 만들었다. 올모스의 충실한 아첨꾼은 올모스가 죽은 뒤에도 충실하게 고인의 유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샛노란 머리칼을 가진 첫 아들이 하라드 이실의 이름을 더럽히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큼, 야수처럼 흉측한 얼굴을 가진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영지의 이름 옆에 나란히 서지 못하도록 만드는건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네가 영주이기를 바라."


 채 태어나 열손가락에 들 만큼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피붙이가 말을 걸어준 것은 앙그라드에게 있어 기쁜 일이었음이 틀림없었다. 흉측한 얼굴을 가진 야수는 잠시 떨리는 손으로 셈을 하고는 보기 괴로울 만큼 환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톨의 긍지와 한 줌의 애정도 없는 땅에 그는 영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 아니라 젊은 사상가였고, 사상가이면서 그를 처음으로 발견해낸 귀족 자제들의 친우였으며, 그를 믿어준 젊은 왕의 정치가였다. 그는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이었다.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이름 그 자체의 의미로 불리어 깨어난 곳은 광장의 사과 상자 위였다. 






 숨죽인 발걸음 소리조차 요란할 만큼 비어버린 궁에서 젊은 왕이 그의 정치가를 맞았을 때, 역사는 끝나지도 시작하지도 않는다는 왕 앞에서 젊고 미숙하고 거침없는 정치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미숙하다는 것을, 현명하고 욕망하는 왕 앞에서 여전히 젊은 정치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아르닐은 가르완이 평화의 시대를 욕망처럼 지고 돌아왔을 때 새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역사가 끝났든 그렇지 않았든 평화의 시대의 끄트머리에서 그들은 모두 처음 출발했던 출발선이 지워진 채로 새 출발선을 그리기 위해 걸음을 딛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전하의 말대로 역사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흔히 역사서의 한 해와 그 다음 해의 사이에 한 획을 긋기를 그들의 평생에 걸쳐 고대하는 법입니다. 역사가 인과관계에 묶여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역사에 줄을 긋고 나누어 이전의 시대와 새 시대, 새 시대와 도래하는 또 다른 시대를 구분 짓고 싶어 하고 있고 때문에 만일 이것이 역사의 끝이 아니라면 역사서에 기록될 또 다른 한 획의 시대에 미치기는 할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출발선은 참나무 가지였고, 캘커리의 국경이었고, 라가하트리의 꽃비와 어린아이의 잘린 목이었으나 모든 것은 말발굽으로 부옇게 일어난 흙먼지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에아르닐은 얼마간 전에 그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던 말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과, 실리가 씨실과 날실처럼 가느다랗게 짜여 쉽사리 어느 한 쪽의 대답도 꺼낼 수 없어 망설였던 말은 비교적 단순했다. 정교한 문양이 곧 복잡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이.

 

 "전하께서는 그때 제게 현명한 왕이 될 수는 없을 거라고 하셨지만 저는 캘커리가 잃은 것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잃은 것이 없는 왕은 충분히 현명한 왕입니다. 전하의 욕망이 어떠하든 간에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시작하신 일이었든, 혹은 그렇지 않았든 간에 미숙한 정치가와 대부분의 백성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잃은 것이 없다는 결과만으로 또 다른 시대를 가늠할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것이 없음이 정말로 잃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에아르닐은 알았고 아마 왕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우아한 왕녀는 평화의 시대조차 얻은 유명의 관조차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하라드 이실의 충직한 영주와, 수많은 인사들은 곧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음은 비로드처럼 명백하게 발치에 펼쳐진 일이었다.



"전하."


 에아르닐은 붉은 비로드로 펼쳐진 새 시대로의 길을 눈앞에 두고 잠시 셈했다. 젊은 왕의 미래와 그가 가진 녹지 않을 눈처럼 찬란한 욕망. 라가하트리에 일 년 내 꽃비가 내린다면 캘커리에는 왕의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빛의 후손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고, 젊은 왕이 캘커리의 왕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품으로 인의에 뜻을 두는 왕은 그 대에 태평을 불러오고 후대에는 성군이라고 불리웁니다, 대체로는.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말하고 있고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정하고 있죠. 아마 전하께서는 후대에 루마난 왕을 이어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는 또 다른 캘커리의 왕이 되시리라고 짧은 소견으로 생각합니다만."


"성군에 뒤이어 성군이 나는 것이란 쉽지 않은 법입니다. 인의로 이루어진 뜻은 실리로 무너지고, 왕의 성품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믿음이 무너지면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왕 개인의 성품과 능력은 쉽게 세월의 풍파 앞에서 무너집니다. 전하를 향한 신뢰가 반드시 다음 대에로 계승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못하는 문제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여전히 모든 정치와 사상을 셈하기에 젊고 미숙했다. 그러나 그는 미숙함이 가지는 강함이란 바로 미숙함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미숙함을 인정하는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미숙함은 젊은 왕의 욕망과 지혜로 견고하게 쌓아올려졌고 낮은 지혜와 낮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셈들, 장사치의 셈법과 젊은이들의 목청으로 대담해졌다. 그는 자신이 지금 자신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자칫 위험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마 그의 왕이라면 귀담아 듣지 않을지언정 용서하리라고 믿었다. 그가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을 캘커리의 왕성에 끌어들인 장본인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평화의 시대가 끝났으니 저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겠습니다. 전하의 욕망으로, 전하의 신념과 신뢰로 쌓아올린 견고한 캘커리의 성벽이 무너질 날을 예비하여."


"저희는 다음을 예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의 새 시대와 다가올 그 다음을 위해서." 


 에아르닐이 말하는 '저희'에 가르완은, 그가 섬기는 젊은 왕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 오랜 동료의식의 너머에는, 에아르닐에게 처음으로 이름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 생강 색 머리의 친우가 있었고, 몇몇 귀족의 자제들이 있었으며 골목 어귀의 과일상과 모과를 파는 젊은이, 뒷골목의 고단한 사상가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저희'였고 에아르닐의 동료였으며, 그가 에아르닐이라고 불릴 때 마다 그의 이름 가운데 내포된 많은 의미들 중 가장 순수한 것이었다.







 '잃은 것이 없는 왕은 충분히 현명한 왕입니다.'


 오래전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젊은 왕은 많은 것을 잃어버린 왕성의 왕좌에 앉아 말했다.


 '나는 자네의 아버지를 잃었네.'


 '전하께서는 잃어야 할 것을 잃으신 것 뿐이었습니다. 하라드 이실은 캘커리에게 약속된 제물입니다. 하라드 이실은 늘 본래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쓰여야 할 곳에 쓰이며, 거두어져야 할 때 거두어진다는 것을 아이들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자랍니다. 비록 제게는 그럴 듯한 사탕발림이 되지 못했습니다만.'


 남쪽 담의 올모스. 쪽빛의 올모스. 남쪽 담의 어린양.


 에아르닐이 하라드 이실의 영주의 자리에 앙그라드를 앉힌 것은 단순히 그가 그 비옥한 땅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어나 한 번도 하라드 이실에 속하지 않았던 젊은 영주가 그 땅을 사랑해 마지않았던 아버지에게 준비한 얄팍한 복수였다. 


 


 에아르닐은 하얀 면목의 셔츠와 얇은 갈색 바지, 갈색의 베스트 위로 붉은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에아르닐.' 그에게는 여전히 휘장처럼 붉은 머리를 한 친우가 있었고, 광장의 단상과 엉성하게 짜인 사과 상자가 있었다.  


-

Sopiras EPILOGUE

소피에서 쓴 미션 중에 이렇다 하게 마음에 드는게 없네요. 감정과잉, 묘사과잉의 방황기였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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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堤


 “아버지, 태양이 새겨진 깃이 보여요.”


 식탁 위에는 흰 빵과 생선살이 들어간 스튜와 갓 긁어낸 치즈 조각들과 한 컵의 우유 그리고 두 잔의 와인이 올라와 있었다. 작년에는 모든 농사가 풍년이었다. 하라드 이실의 농민들은 남은 포도들로 다른 해보다 많은 포도주를 담가 다른 해 보다 많은 포도주를 영주에게 바쳤다. 아버지. 아들은 한 번 더 아버지를 불렀다. 식탁 위에서 모든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멈췄다. 여자는 느리게 일어서는 남편을 보았다. 남자는 느리게 식탁 위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태양이 새겨진 왕의 깃을 들고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창을 열었다. 쾅. 두 창문이 바람에 부딪혀 활짝 열렸고 남쪽 땅에는 따듯한 봄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남자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멀고 좁은 참나무 길의 끝에서 깃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의 깃이었다.


 “그래 보이는구나.”


 남자의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의 아내는 그것이 꿈으로 부푼 남자의 떨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창틀을 짚은 못생긴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갈색으로 그을리고 검으로 단단해진 뭉툭한 손끝이 힘을 주어 창틀을 쥐고 손등에서 힘줄들이 불거져 나왔다. 남자는 오랫동안 창 밖을 보고있었다. 왕의 깃발이 너무 가까워져 창으로는 그 깃을 볼 수 없을 때까지. 앙그라드는 남자의 등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 무엇에도 크게 동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다. 남자의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어딘가 모르게 몸이 무거워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남자의 두 발은 언제나 힘있게 땅을 누르며 걸어다녔다. 앙그라드는 아버지의 등이 설렘으로 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년이 넘은 남자는 이제 꿈으로 부풀어있었다. 잠자리에서 남자가 해주던 오래된 이야기들을 기억했다. 캘커리의 루마난과, 우리의 오래된 왕과, 참나무 방패를 든 이실두르와, 하라드 이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 앙그라드는 남자가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어린 용병 소년처럼 가슴벅차하며 그 모든 것들을 용맹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앙그라드는 어린 소년이었고 <남쪽 담>의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그의 아버지도 어린 소년이 되었다. 충실한 하인 도니제티가 숨을 헐떡이며 홀에 들어왔을 때, 올모스는 아무말도 없이 창밖을 향해있던 등을 돌려 재빠르게 걸어 나갔다. 누구도 그 몸에서 나올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날렵함으로 남자는 무겁고 단단한 몸으로 복도와 계단을 달려나가 왕의 사신을 맞았다.

 무거운 갑옷 아래로 땀을 흘리는 기사에게 여자는 차가운 포도주를 건넸다. 하라드 이실의 풍요는 왕의 서신 앞에서 아이처럼 떨고 있는 남자의 등으로 인함이었다. 기사는 가장 호화롭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안한 객실을 제공받았다. 왕의 깃을 등에 단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왕은 5일 이내로 영주들의 회신이 돌아오리라 믿고 계십니다.”

 “약속한 시일 내로 내가 클레릭에 당도할 것이오.”


 기사는 한 병의 포도주를 들이켰다. 하라드 이실은 캘커리의 여러 땅 중에서도 가장 멀고 가장 큰 땅 중의 하나였다.




 “나는 수도로 가오.”


 메이로디는 눈을 감았다. 메이로디에게 수도는 머나먼 환상의 땅 같은 곳이었다. 열여덟이 된 아들이 어느날 훌쩍 마차에 짐을 싣고 떠난 곳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한 표정에 메이로디는 한참을 울었다. 때문에 메이로디는 올모스가 수도로 갈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비록 그곳에 그들의 왕이 있었을 지라도. 수도는 열여덟 된 아들이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날 때 선택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안에서 올모스와 에아르닐은 같은 땅을 밟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올모스는 <남쪽 담>의 사람이었다. 올모스의 옷깃에서는 축축하게 젖은 흙내음이 났고, 씨를 뿌리는 계절이면면 남쪽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내음이 옷깃에서 흘러나왔다. 메이로디는 눈을 감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너무나 경쾌하고 확신에 차있었다. 왕의 서신을 받은 남자는 수도에 자신의 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듯 보였다. 메이로디는 부디 무사하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손에서 떠난 클레릭의 아들이. 그리고 한 평생을 올모스와 에아르닐 사이에서, 사랑과 사랑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무엇 하나도 제대로 사랑하여 완성시키지 못한 그녀의 인생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반목하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못했던 그녀의 사랑이 인생과 함께 볼품없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참나무가 우거진 길 위를 달려 나가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왕의 기사는 호화로운 침대 위에서, 그녀의 아들이 잠들었던 것보다도 훨씬 호화로운 침대 위에서 포도주에 취해 곤히 잠든 밤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가라앉은 바람을 울렸다. 어둠에 가리워 남자의 등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말발굽 소리는 한참이나 더 고요한 마을을 울렸다. 저 멀리서 가난한 영세농민의 집에 잠시 누렇고 고요한 불이 들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불이 사그라들었다. 메이로디는 다시 눈을 감았다. 봄이었으나 밤은 여전히 서늘했다. 남쪽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메이로디는 자리에 서서 얼마간 울었다.





 올모스가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의 충실하고 소박한 하인은 말했다.


 “도련님의 이름이 곧 잘 오르내리던데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 도니제티의 입은 올모스의 눈빛에 곧 웃음기 없이 닫혔다. 수도에 도착한 뒤로 그들의 마차 차창너머로 들을 수 있었던 이름 중에는 에아르닐의 이름이 있었다. 올모스는 여전히 그의 말뼈다귀같은 아들의 이름 앞에 하라드 이실의 이름이 박혀 있음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의 어떤 곳에서도, 그 어떤 기품에서도 하라드 이실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도니제티는 왜 올모스가 클레릭까지 직접 행차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올모스의 충실한 하인이었고, 도니제티의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도니제티는 오래전부터, 올모스의 장남이 태어나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올모스가 에아르닐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야 한복판에서 마치 사냥감의 표적처럼 빛나는 레몬색 머리칼은 에아르닐을 남쪽 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에아르닐의 그 모든 성정들은 남쪽 담의 투박하고 거친 면모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올모스는 수도에 온 뒤로 에아르닐의 이름이 화두에 오를 때 마다 미간을 좁히고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도니제티도 주군의 불편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은 바 아니나, 에아르닐의 이름은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대부분의 변방 영주들이 영지의 관리를 뒤로 하고 직접 클레릭에 오기 보다는 아들을 영주 대리인으로 수도에 보내는 쪽을 택했다. 캘커리 변방의 농경지에서 자란 도니제티는 본래 보는 시야가 작고 소박한 사람이었음으로 올모스의 수도 상경 이면에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수도에 오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왕에게 귀족 회의 참가 의사를 보인영지의 영주 대리인들이 속속 클레릭으로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니제티는 하라드 이실의 저택에서 지친 표정으로 앉아있을 마님을 떠올렸다. 올모스의 클레릭 상경에는 왕을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의미 이면에 에아르닐을 하라드 이실의 정면에 내세울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올모스의 장남을 하라드 이실의 대변인으로도, 차기 영주로도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가 되었으나 도니제티도 올모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올모스가 더욱 에아르닐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그는 에아르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고, 하라드 이실에 걸맞는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올모스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선택해야했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을 싫어했으나 추하고 두려운 앙그라드를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앉힐 사람은 아니었다. 올모스의 앙그라드에 대한 사랑이 자식을 향한 사랑이었다면 앙그라드를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염두에 두지 못함은 <남쪽 담>의 영주로서의 긍지였다. 올모스는 혹여나 <남쪽 담>의 영주가 그 추한 얼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참지 못할 남자였고,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한평생 그의 삶의 부목이 된 영지와 긍지가 더 중요한 남자였다. 도니제티는 소박하고 작은 남자였지만 올모스의 분노가 에아르닐에 대한 부정과 경멸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아르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들 사이에서 점차 부풀어 올랐음을 알고 있었다.

 도니제티는 말없이 주군의 쪽빛 예복을 정돈하고 따듯한 수프와 흰 빵으로 된 식사를 준비했다. 도니제티는 에아르닐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올모스의 낡고 충실한 가신이었지만 올모스의 심기를 건드리기 보다는 제 심신의 편안함을 먼저 생각할 만큼 소탈한 사람이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는 식사를 마치고 쪽빛 예복에 쪽빛 망토를 두르고 원탁 회의에 나섰다. 이실두르가 전쟁의 선봉에 섰을 때 그는 쪽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올모스는 예복에 긴 칼 대신 나무로 만들어 검게 칠을 입힌 방패를 차고 손 끝이 잘린 장갑을 꼈다. 그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왕께서 행차하십니다.”


 올모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들어오는 왕을 보고 있었다. 왕은 젊고 건강해보였다. 왕은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왕의 목소리는 왕의 목소리였다. 올모스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여는 그들의 젊은 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오래된 무훈을 생각했다. 루마난과 이실두르와 캘커리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북쪽 땅의 호수가 말랐다는 사실은 영민들 사이에 천천히 전해졌던 소문이었다. 올모스는 그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는 소박하고 투박한 넓고 광대한 <담>의 영주였다. 그는 디올라의 이름도, 레보르프와, 오나하의 이름도 들어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악의 근원’ 역시도 이실두르의 무훈담에서 그 때문에 싸웠다는 이름을 들어본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정보도, 귀족들의 어떠한 의문들도 올모스가 그 자리에 참석한 이유를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하라드 이실은 언제나 왕의 땅이었다. 왕이 하사한 땅이었기 때문에 왕의 등 뒤에 서있는 땅이었다. 설사 올모스 홀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기 때문에 그의 의지는 하라드 이실의 의지가 되었다. 하라드 이실은 캘커리의 담이었다. <남쪽 담>. 태초에 하나의 방패에서 시작한 것처럼 하라드 이실은 방패와 같이 존재했다. 그는, 하라드 이실은 방패처럼 모든 것을 맞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직 젊고 건강한 캘커리의 왕을 위해서.


 “하라드 이실은 언제나 전하의 등 뒤에 서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혹독한 시대이든 <남쪽 담>은 왕이 거두실 때까지 왕의 땅입니다.”


 영주들이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뜨는 동안 올모스는 왕에게 말했다. 그의 의지를 전달하는데 얼마나 많은 하라드 이실의 역사와 세월이 담겨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세월을 대대로 이어온 <남쪽 담>의 영주들의 긍지가 담겨있는지 왕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하라드 이실은 명망 있는 땅이었지만 캘커리의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맙네. 그렇게 말하는 왕에게 올모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왕은 아직 젊었고 올모스는 왕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의 투박하고 소탈한 정신으로는 일굴 수 없는 것을 왕은 짊어지고 있었다. 확신에 차있는 왕의 목소리에서 올모스는 그가 강직한 왕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확신은 때로 위험했지만, 어떤 일도 확신 없이 치러지는 것은 없었다.





 “에아르닐 안에 있나?”


 마세라는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는 시가지 외곽에 위치한 이 작은 집에서 문을 두드리면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아르닐의 집에는 집사도, 시종도, 하녀도 없었다. 주에 두 번 예전에 어느 귀족 집안에서 오랫동안 하녀로 일했다던 여자가 와 스튜를 끓여놓고 빨랫감을 말리고 집안을 청소하는 것이 전부였다. 집은 좁고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집을 지탱하는 나무들은 손질이 잘 되어 아직 쓸만하게 보였다. 그것만이 다행인 집이었다. 저택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했다. 수도에서 지내는 명망 깊은 귀족 가문 자제의 거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탈했지만 마세라는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렴풋이 에아르닐의 입지가, 명망 깊은 하라드 이실의 영주인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에아르닐이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더라도. 에아르닐은 수도에서 그리 풍족한 편은 못됐고 달에 얼마간 받는 돈과, 그를 지지하는 몇몇의 귀족들이 베푸는 호의의 대부분을 책을 사들이느넫 써버렸기 때문에 시가지 끝에 위치했다고는 하더라도 이만한 조건의 집은 그에게 괜찮은 축에 속했다. 그가 자신의 집에서 머물기를 권유하는 귀족들의 제안의 대부분을 거절했다면 더욱 그랬다. 마세라는 문을 두 번 더 두드렸다.

 문 안쪽에서 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을 때 그의 친구는 흰 목면으로 된 셔츠에 옅은 황갈색의 바지를 입고 서있었다. 옷감 여기저기에 간 주름을 보고 마세라는 웃었다.


 “자다 일어났나?”

 “전혀.”


 마세라는 뜨거운 아침햇살을 피해 에아르닐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에아르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었다 놓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등 뒤에서 문을 닫고 좁은 응접실에 발을 들였을 때, 마세라의 손에는 방금 전 까지 에아르닐이 읽고 있었던 책이 들려있었다. 마세라는 책의 표지와 내용을 훑고는 예의 그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왕들의 역사>라.”


 에아르닐은 대답 대신 응접실의 문간에 머리와 어깨를 기대고 섰다. 아직 책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세라는 책을 덮어 책이 원래 있던 모양대로 소파 위에 고스란히 올려놓고 주머니에서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내어 들었다. 마세라는 그 뒤에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과 종이를 보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께서 네가 여전히 우리 집에 머무는 줄 아는 모양이야.”

 “마지막으로 서신을 한 게 마세라가에서였으니 그렇지.”

 “에아르닐.”


 좀 더 자주 연락을 해 야하지 않겠냐는듯한 질타가 섞인 부름이었다. 에아르닐은 그의 질타에 수긍하기 보다는 책을 집어 들고 소파에 앉으며 마세라를 바라봤다.


 “실상 거처가 자꾸 바뀌어 마땅히 서신 할 곳도 없으셨을 거네.”


 에아르닐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서신을 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수도에 올라와 얼마간 에아르닐은 마세라가 베푸는 호의에 의해 마세라가에서 지냈다. 그의 집안은 하라드 이실만큼 명망 깊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만한 호의를 베풀기에 충분할 만큼 부유했다. 그 뒤에도 에아르닐은 그에게 자신의 집에서 지내기를 요청하는 귀족들의 저택에서 얼마간씩 객실에 머무르며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저택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작은 집을 얻기 전의 일이었다. 에아르닐은 다리 위에 책을 올려놓고 마세라의 손에 들린 쪽지를 받아들었다.


─ 너의 아버지께서 수도로 가신다.


 수도에서는 원탁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것이 비록 온 캘커리의 국민들에게 공표되지는 않았더라도 귀족들의 사회에 몸담고 있는 몸으로서, 그리고 가르완의 곁에서 그의 정책을 지켜보는 입장으로서 에아르닐은 귀족들의 원탁회의에 대해 모르고 있는 바 아니었다. 그리고 왕의 기사들이 태양이 그려진 깃을 등에 매달고 떠났을 때, 그 뒤에도 하라드 이실에서는 에아르닐에게 그 어떤 전령도 보내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어떤 자리에 있어서도 하라드 이실의 이름을 내걸고 에아르닐을 드러내게 놓아둘 사람이 아니었다. 하라드 이실의 이름만이 클레릭에서 조차 에아르닐의 발목을 올가미처럼 잡고 있을 수 있었다. 너의 아버지께서 수도로 가신다. 에아르닐은 표정이 없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메이로디는 한 때 하라드 이실의 미녀라고 불렸던 여자였다. 다른 모든 소작농들이 그렇듯이 하라드 이실은 풍족했으나 그럼에도 몇몇의 농부들은 가난하고는 한 법이었다. 사실 메이로디보다는 그녀의 언니가 훨씬 더 우아하고 화려하게 생긴 미인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아름답고 화려한 미인을 옆 지방 영주의 첩으로 보냈다. 모두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형편은 나아졌고, 언니는 약간의 흰 눈을 제외하면 건강한 갈색 머리칼에 아름다운 비녀를 틀어올리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형편이 나아졌을 무렵에 가장 하라드 이실 다운 여자였던 미녀 메이로디는 올모스에게 청혼받았다. 올모스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고, 그들의 생활은 이전과 비할바 없이 나아졌다. 동네 모든 농부들을 새초롬하고 당찬 한마디로 웃게 만들었던 여자는 그렇게 볼품없이 사라졌다.

 에아르닐은 표정 없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어떠한 심정으로 짧은 전보를 보냈는지 에아르닐은 짐작했다. 그 스러져 가는 인생 가운데에서 그녀는 부자를 지키고 싶어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도, 아내의 사랑도 아니었다. 볼품없이 사라지는 인생과 그 어떤 만족스러운 사랑도 해보지 못한 데에 지친 여자의 조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지치고 싶지 않았고 지치는데에는 신물이 나 있었다.

 에아르닐은 눈을 감았다. 클레릭은 그의 땅이었다. 아버지의 땅이 아니라, 하라드 이실도. <남쪽 담>도 아닌 오롯이 그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작정 클레릭에 도착했을 때의 막연함을 에아르닐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러했다. 열여덟 해 동안 배를 곪아본 기억도, 거처를 찾아야한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청년에게 그 막연함은 흡사 메뚜기떼에 흉작을 본 농민의 마음처럼 막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에아르닐은 그 막연함 속에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는 ‘하라드 이실이 아닌 어떤 것’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다. 클레릭은 에아르닐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는 유령처럼 조모의 방안을 배회하며 먼지 덮힌 팬던트의 뚜껑을 들여다보는 열두살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이었고, 한 무리의 청년들과 에아르닐이었다.


 “에아르닐.”


 오랫동안 여러개의 기억속에서 헤메이던 그는 마세라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짙은 붉은색 머리칼 사이로 푸른색 눈동자가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수도로 오시는 모양이야.”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입에서 그의 아버지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에아르닐은 한번도 남이 묻기 전까지 그의 아버지에 대해 말한 적 없었다. 홀홀단신으로 수도에 올라와 삶을 꾸리는 블론드의 청년은 그의 귀족적인 외모만 아니었다면 흡사 부모 없이 자라온 고달픈 혁명가처럼 보일 지경이었고, 사교계에서 ‘하라드 이실의 영주는 무탈한가?’하는 질문도 그가 수도에 처음 올라온 뒤로는 점점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마세라가 올모스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적어졌다. 에아르닐은 그의 가족에 대해 어떤 말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의 머리칼이 얼굴도 본적 없는 조모를 닮았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너는 내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했지. 마세라.”


 하라드 이실에 대해서도. 마세라는 자신의 대답 없이도 말을 이어가는 에아르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알게 될거다.”


 에아르닐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작은 집 전체가 무거운 침묵으로 소용돌이쳤다. 에아르닐은 어머니에게서 온 종이를 지금은 쓰지 않는 벽난로 위에 잉크병으로 눌러두었다. 그 성의 없는 행동만이 그 종이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보였다.


 사교계는 원탁회의를 앞두고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캘커리에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있더라도 원탁회의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귀족들은 명망 있고 지체 높은 가문의 몇몇 뿐임으로 원탁회의의 개최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회의를 앞두고 곳곳의 영지에서 영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아직 젊고 유망한 젊은이들이 수도의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에 사교계는 한층 시끄러웠다. 어느 영주의 아들, 어느 영지의 대리인들 사이에서 에아르닐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몇가지 질문에 넌지시 대답만을 내려놓으며 살롱의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에아르닐.”


 익숙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것은 여지없이 마세라였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가, 아니 하라드 이실의 영주가 클레릭에 당도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내가 들었으니 자네도 들었으리라 생각했어.”


 너는 내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했지. 에아르닐은 잔에 담긴 술을 입으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마세라는 언제나 한 발 앞서있는 친우의 앞에서 술을 넘기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아르닐의 블론드와 하라드 이실의 이름과 그의 급진적이고 영민한 생각들은 언제나 그를 파티의 한 가운데 서있게 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쓸쓸하게 퇴장하는 오래된 주역처럼 벽에 기대어 한무리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명망 깊은 영지의 대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탁회의에 참가할만큼 중요한 영주들은 대개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섣불리 자리를 비우는 대신 믿음직한 아들들을 클레릭에 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왕의 뜻에 거역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동시에, 영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식이기도 했고, 그들의 대리인이 곧 차기 영주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아들들은, 영지에 대한 긍지와 아버지의 뜻에대한 감사와 수도의 풍경에 대한 감탄으로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 다시 에아르닐에게로 향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는 클레릭에 직접 당도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이 있는 사교계에 그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차기 영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들들을 영지의 대리인으로 수도에 보내는 지경인데, 에아르닐에게는 그 무엇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수도에 머물고 있는 하라드 이실의 장남인데에도. 곧 알게 될거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천천히 이해했다.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은 그의 아버지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이었고, 캘커리 왕의 곁에서 입을 열정도로 수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에아르닐.”

 “곧 알게 될거라고 했잖나.”


 에아르닐은 마세라를 보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는 빈 잔을 내려놓고 목에 두르고 있던 붉은 실크로 된 커프스를 풀어내며 자리를 떴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가 장남과 사이가 좋지않다는게 사실이었군. 남자의 목소리가 돌연 소란스러운 파티장을 가로질렀다. 그저 소문을 이야기 하려던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낮고 중후한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근처에 있던 대다수의 귀에 들리고야 말았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요. 남자의 부인이 뒤늦게 말했을 때에는 에아르닐의 등은 이미 마세라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올모스와 에아르닐에 대한 소문으로, 그리고 하라드 이실의 저택에 숨겨져 있다는 차남에 대한 소문으로 아주 약하게 일렁이는 목소리 사이에서 마세라는 종이를 받아들던 에아르닐의 표정을 떠올렸다. 힘 있는 목소리로 광장의 단상에 올라서는 에아르닐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그의 친우는 깊이 가라앉아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원탁회의가 소집되었던 날 저녁에 에아르닐은 가르완의 서신을 받고 왕성으로 향했다. 붉은 커프스에 붉은 조끼, 예복을 갖춘 차림새는 아니었으나 평소의 흰 목면으로 된 셔츠를 생각하면 충분히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달리 그럴싸한 언질이 없었던 것도 에아르닐이 서둘러 말을 재촉하느라 차림새가 부족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소매를 걸어 잠근 보석이 박힌 단추 때문에 고삐를 쥔 소매 끝이 무거웠다. 가르완은 알현실이 아니라 휴식실로 그를 불렀다. 에아르닐은 왕의 옷차림이 가벼운 것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윽고 그가 내뱉는 말에 표정이 굳었다.


 “오늘 왜 성에 없었나? 중요한 회의에 그대의 도움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르완은 에아르닐에게 있어서 아직은 섬세한 왕이었다. 고작 이러한 일로 자신을 불렀다는 점도, 광장에서 가르완과의 첫 대면 또한 에아르닐에게 그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섬세함은 정교한 것이 아니라 양초에 깃든 불같은 것이었다. 그의 확신과 생각들은 얼기설기 엉켜 곳곳으로 미치고 있었다. 그가 짜놓은 생각과 의지의 실타래는 거미줄처럼 섬세하고 유연했듯 보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제가 그런 자리에 있기에 여전히 모자란 것처럼 보이셨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 에아르닐에게 영주자리를 물려주어야할 때까지 혹은 그 후에도 여전히 에아르닐은 그에게 있어서 팔푼이 같은 내놓은 자식에 불과할 것이었다. 가르완은 짐짓 미소 짓고 있었다.


 “올모스는 여전하더군. 여전히 강직하고 충직한 신하였어. 하라드 이실은 믿을만한 땅이라는 걸 증명해 보였지.”

 “하라드 이실이 아버지의 유일한 자랑이었으니까요. 앞으로도 남쪽 담은 전하의 배후에 서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필요한건 하라드 이실이 아니라 그대이네, 에아르닐.”


 에아르닐은 편안한 복장으로 앉아 미소하는 왕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씀해주십니까.”

 “다른 말이 아니야. 내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나를 가장 도와주었던 것은 그대이고,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한때 그대의 땅이 그대를 수식했을지언정 이제는 그러지 않길 바라네. 나는 그 땅이 그대를 깎아내리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네. 나는 그대를 계속 곁에 둘 생각이니.”


 가르완의 말은 길었다. 그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라드 이실을 거론했다. 하라드 이실은 오랫동안 에아르닐의 이름의 일부였다. 그것은 에아르닐을 수식했고, 동시에 그를 원탁회의에서 끌어내리는 주체가 되었다. 그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었으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에아르닐은 지금 눈앞에 있는 젊고 강인한 왕이 자신을 격려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챘다. 가르완은 섬세한 왕이었다. 적어도 에아르닐이 느끼는 바로는 그랬다. 그는 가르완의 곁에서 그의 정치에 약간의 첨언을 더했으나 이토록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왕만큼이나 그리고 왕보다도 젊었고, 자신이 때로는 실수를 범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왕에게는 믿을 만한 세력들이 부족했다. 가르완에게 좀 더 믿음직한 인재들이 많았더라면 지금의 자리는 에아르닐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제가 미약하게나마 전하께서 필요로 하실 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모든 결정은 왕의 것이지 에아르닐의 것이 아니었다.


 “남쪽 담이 오래도록 저를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고 앞으로도 얼마간 변하지 않겠습니다만, 전하의 뜻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제가 전하께서 뜻을 이루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아르닐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에아르닐은 본래도 표정을 감추는데 재능이 없었다. 그럼에도 곤란을 겪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가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기 때문이고, 표정을 감추어야할만한 말도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도 처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르완의 앞에서도 에아르닐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에아르닐을 격려하고 있는 왕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같았다. 왕의 입에서 왜 ‘땅의 이름’이 나왔는지도, 그리고 그것이 에아르닐을 깎아내리고 있는지도 에아르닐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왕의 말대로 왕은 왜 에아르닐이 원탁회의에 나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다른 영주 대리인들과 에아르닐의 차이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곧 열릴 삼국회의에는 자네도 같이 참석했으면 좋겠군.”


 에아르닐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젊은 정치가의 눈앞에는 캘커리의 왕이 앉아있었다. 그가 정치가가 아니었다고 해도 왕이 그를 정치가로 만들었다면 그는 정치가였다. 에아르닐은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다.



 올모스는 에아르닐과 마주쳤을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에아르닐도 그랬다. 그들은 에아르닐이 집을 떠나던 날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부자의 공통점이었다. 에아르닐은 희고 긴 복도를 등지고 서있었다. 그는 왕을 알현하러 궁에 들른 참이었고 올모스는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라면 행정적인 문제이건 정치적인 문제이건 간에 궁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것 없는 명망의 인사였다. 흰 셔츠 위로 붉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어깨에 금장으로 장식을 단 에아르닐은 올모스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의 단면 같은 것이었다. 그가 지독히도 싫어했던 어머니를 닮은 아들의 금발은 수도에서 되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요체로 보였다. 그 어색한 단면은 오랫동안 올모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외면하려했던 것보다도 훨씬 정교하게 갈고 닦여있었다. 올모스는 그 정교하고 깨끗한 단면에 당황했다. 부자의 얼굴은 타인처럼 판이하게 달랐다. 올모스는 타인을 본 얼굴로 놀라고는 이내 고집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올모스와 에아르닐은 서로를 바라보고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스쳐지나갔다. 가슴 속에서 막연한 분노만이 물처럼 끓어올랐다. 올모스의 외면과 부정은 익히 알고있는 것이었다. 열여덟 해동안 스스로의 머리털처럼 자라온 것들을 이제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에아르닐은 천천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천천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외면과 부정과 경멸에 대해 익숙해졌기 때문에 또 한 번 마주쳤을 때에는 피할 수 없는 불쾌함 외에는 그 외에 덧붙일 감정이 없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어둑어둑한 감정들은 씻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케케묵은 때처럼 감정 위에 마짝 엎드려 달라붙어있는 것이었다. 올모스를 향한 저항은 천천히 에아르닐의 안에서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에아르닐은 젊었고 분노하고 있었다. 에아르닐은 그가 젊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젊고 어리석은 그를 영민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장점이었다. 젊은이들은 늘 성미가 급했고, 급진적이었으며, 쉽게 어리석어졌다. 그는 이제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버지의 흰 눈과 마주쳤을 때 물처럼 끓어오른 것은 피가 아니라 분노였다. 부자를 이어주는 피는 그들 사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감정은 모양을 갖춘 것처럼 그의 안에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가 때가 되면, 미끼가 던져지면 곧잘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올모스는 원탁회의를 통해 자신이 에아르닐을 인정하지 않음을 소리 소문 없이 공공연히 표현한 셈이 되었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이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히는 아들은 그 고요함에도 소문의 주인공임이 들통 났다. 하라드 이실의 이름이 서로를 깎아먹고 있었다. 마치 가르완이 우려했던 그대로였다. 그 땅이 그대를 깎아내리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네. 에아르닐은 왕의 말을 떠올리며 시선을 빗겼다. 해묵은 땅을 벗어났을 때 처음으로 그를 인정한 것은 마세라였다. 그는 올모스처럼 에아르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에아르닐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경멸 대신 의문을 품었다. 마세라는 곧 에아르닐의 동료가 되었다. 발판을 딛고 일어섰을 때 수도는 광활했고 광장은 따듯했다. 에아르닐이 비로소 자신이 하라드 이실을 떨쳐 낼 수 있을거라고 믿었을 때 그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었다. 남쪽 담은 그를 수식했다. 누구도 그의 옷깃에서 축축한 흙내음과 참나무의 향이 나기를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아르닐은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견고한 선조의 발판은 그를 자리 잡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에아르닐이 사랑받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올모스를 떨쳐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의 그늘을 떨쳐냈다고 생각했다. 올모스의 땅을 밟지만 않는다면, 그 족쇄 같은 늪에 발을 빠트리지만 않는다면 에아르닐은 이제 올모스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란 에아르닐이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것보다도 훨씬 크고 강대한 존재였다. 올모스가 서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라드 이실의 풍경이 펼쳐졌다. 올모스의 옷깃에는 잘린 메뚜기의 다리가 붙어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에아르닐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대하고 무거운 존재였다. 올모스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은 아주 안전하고 단단하게 땅을 디디고 서있었고 그의 거칠고 건강한 몸은 그를 육중한 바위처럼 보이게 했다. 올모스의 옷깃이 펄럭일 때마다 그의 경멸과 몰인정이 매서운 바람처럼 살갗을 할퀴고 지나갔다.




 삼국회의는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에아르닐의 입지는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전에 없을 만큼 견고한 것이 되어있었다. 에아르닐의 동료들조차도 그들의 생각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에아르닐의 위치가 얼마나 의외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왕은 그러한 생각조차도 품으려 하는 사람이었다.

 원탁회의가 끝나고 얼마 안있어 수도 관광을 마친 영주 대리인들은 클레릭의 사교계를 떠났다. 파티는 곧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고 젊은이들의 가운데에는 늘 그래왔듯 에아르닐이 있었다. 젊은 차기 영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연줄을 대려던 늙은이들도 이내는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마세라는 원탁회의가 열리는 짧은 기간 동안 에아르닐이 많은 것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에아르닐은 차기 영주로도,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원탁회의가 그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동안 에아르닐이 마세라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음은 그 때문이었다. 마세라가 아는 한 에아르닐은 자신의 자존심과 평판에 주의를 기울이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그가 상처입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이 이따금 습관처럼 입에 담는 말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마세라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비로소 이해했다. 금발의 청년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견고한 사람이었다. 올모스를 뒤따른 소문들은 늘 그랬듯이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 에아르닐은 전에 없을 만큼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입지를 다져나갈 것이었다. 근래에 빈번하게 왕궁에 출입하는 에아르닐의 예복이, 그리고 그의 동료들사이에서도 홀로 점차 한걸음씩 멀어져가는 그의 진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세라는 마세라가로 편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에아르닐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수도의 사교계에 단 한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다시 수도를 떠난 충실한 신하 올모스를 떠올렸다. 그들이 과연 마세라가 알고 있는 만큼이나마 자신들의 아들에 대해 알고있는가에 대해 그는 의심스러웠다.

 삼국회의는 아수라장같았다. 메이사의 언동은 오나하에 대한 에아르닐의 선입견을 깨기에 부족했다. 에아르닐은 원탁회의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그가 라가하트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떠올렸던 말에 집중했다. ‘다음’. 오나하의 왕은 여전히 레보르프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가르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디올라의 왕은 이도저도 아닌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음으로 계속해서 시비가 붙는 것은 가르완과 오나하의 왕이었다. 오나하의 레보르프에 대한 태도는 짐작 이상으로 판에 박힌듯 고정되어있었다. 확실하게 레보르프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약소국이었다. 그러나 약소국이라고 하기엔 그 주민들이 지나치게 영리했고, 지나치게 부유했다. 오나하에 매번 약탈당하는 부를 생각하더라도 지금의 풍요로움이면 본래 레보르프의 수완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계산할 수 있었다. 에아르닐은 평소에도 가르완의 말에 전폭적으로 수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르완과 에아르닐 사이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설전이 존재했다. 언쟁이라고 보기에는 때와 시기를 놓고 벌인 의견의 차이 정도였지만 어쨌든 에아르닐은 가르완이 왕이라고 해서 그의 말에 모든 것을 수긍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에아르닐이 틀렸든 가르완이 틀렸든 간에 서로의 의견은 각자의 것이었고 선택과 결정은 온전히 왕의 것이었다. 그것이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의견은 제시하되 강요하지도 옳다고 우겨대지도 않는 것이 에아르닐이 말하는 방식이었다. 가르완은 이내 개 중에서 그에게 필요한 정보와 필요한 식견만을 뽑아 참고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에아르닐은 지금만큼은 그의 왕의 말에 한 치의 의견의 차이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입은 일자로 다물린 채였지만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 캘커리의 왕의 사리 판단은 정확한 것처럼 보였다. 만에 하나를 생각해서라도 그의 조치는 정당한 것이었다. ‘다음’.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화살이 울었다면 반드시 다음이 있었다. 레보르프도 그것을 모르고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다음’을 벌이기 이전에 오나하가 움직여 레보르프를 치면 끝난다. 그러나 에아르닐은 오나하가 레보르프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나하의 생활과 레보르프의 생활은 질적으로도 양식적으로도 판이하게 달랐다. 오나하의 왕은 레보르프를 손에 넣어도 그것을 정비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오랜시간을 투자해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레보르프를 정비하는 동안 캘커리와 디올라가 그것을 방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지도가 바뀌는 것은 곧 전쟁을 의미했다. 오나하가 레보르프를 삼키면 다른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다른 대비가 필요했다. 오나하가 레보르프에 단순히 치명적인 사상을 일으키고 끝난다는 것이 가장 일어날법한 일이었지만, ‘악의 근원’의 부활이 병력과 군사력과 상관 없이 금기에 매여있는한 하슈크 2세의 계략은 언제든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에아르닐은 말 없이 앉아 메이사와 가르완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나하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나하의 전쟁과 레보르프의 ‘악의 근원’을 얻고자 하는 계획 사이에는 큰 연관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첫 번째 금기는 단순히 소년 하나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도 깰 수 있었다. ‘다음’은. ‘다음’도 그렇다면.


 “디올라 전역에 숯가루가 떨어지고 있어요. 마법도 소용이 없어요.”


 작은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다. 에아르닐은 직감했다. ‘다음’이었다. 첫 번째 금기에 걸린 마법도 캘커리에게서 나고 자란 에아르닐에게 있어 상상이상의 것이었다. 고작 아이의 목 하나를 베었다고 해서 호수가 마르는 것이 마법이라면 더한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에아르닐은 검은 여우털 망토 위로 소복이 쌓이던 라가하트리의 꽃비를 떠올렸다. 백색의 도시에 내리는 검은 눈은 마녀가 나오는 동화의 삽화처럼 섬뜩한 것이었다.


 “왕들이시여, 두 번째 금기가 깨졌어요.”


 소녀는 울고있었다. ‘다음’이 오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들이 목전까지 화살이 다가와 있었다. 에아르닐은 둑이 터진 강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어렵다. 전쟁의 효시를 당기는 손은 확고하지만 어렵게 살을 당긴다. 살은 정확한 곳에 전쟁에 참가하는 모든 이의 눈이 닿는 곳에 꽂혀야한다. 그 다음에는 만인의 대군이 움직이고, 그 다음에는 성벽에 갈고리쇠를 얹어 성을 무너트린다. 전쟁의 둑이 터지고 있었다. 모두의 예상보다도 두 번째 금기는 훨씬 빨리 깨어졌다. 세 번째도 그럴 것이다. 막연한 추측이었지만 점차 회의의 분위기는 가르완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그의 근거가 부족한 확신은 불길한 근거를 더해가며 굳건해져가고 있었다.

 가르완이 에아르닐에게 삼국동맹에 대해 넌지시 물었을 때 에아르닐은 답했다. 삼국의 균형을 유지하며 레보르프를 견제하기에 당장은 필요 불가결해보이나 레보르프를 처단한 뒤에는 동맹의 존재는 회의적이리라고. 목적을 달성한 동맹은 본디 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에아르닐은 그 동맹의 결말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레보르프가 완전히 스러진다면 그 뒤에는 삼국의 이익만이 승냥이처럼 서로를 갉아먹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보르프는 쉽게 스러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에아르닐의 생각은 늘 그렇듯 급진적이었고 멀리에 미쳐있었다. 동맹이 맺어지는 순간부터 동맹이 깨어지는 순간을 대비해야한다는 그의 생각은 저만치 뒷전에 있을 필요가 있었다. 마법의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숯가루를 뒤집어쓰고 우는 소녀 앞에서는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왕들은 혈맹을 맺었다. 에아르닐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또 다시 ‘다음’을 생각했다. 이제 ‘다음’은 끊임없이 밀어닥치기 시작할 것이었다. 동맹은 터진 둑이 밀려오는 것을 막아야했다. 레보르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준비를 시작했다. 숯가루를 뒤집어 쓴 디올라의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오나하의 왕을 보았을 때,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소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Mission 02. 이제까지 쓴 커뮤 미션중에서 가장 긴 미션. 19.877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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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시嚆矢



  마세라는 광장 한 가운데에 볕을 등지고 서있었다. 날씨는 완연한 봄이었다. 그는 깨끗한 흰색 셔츠에 엷은 황토색의 바지를 입고 광장 한 가운데 서있었다. 셔츠는 곳곳이 구겨져있었고 너풀거리는 소매끝은 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탓에 뒤로 접혀있었다. 광장은 한산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가죽신이 땅을 스치는 가벼운 소리, 말발굽이 광장의 돌을 채는 소리나 붉은 천으로 차양을 내린 노점상에서 이따금 과일을 사고파는 소리가 광장을 메우는 소리의 전부였다. 마세라와 에아르닐은 늘 그 광장이 자신들을 둘러싼 한 무리의 사람들도 북적이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광장은 늘 한 무리의 젊은이들과 젊다기에는 조금 나이가 든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마세라는 눈부신 햇살 탓에 눈썹을 좁히고 오랫동안 광장 가운데 서있다가 곧 멀리서 보이는 그림자에 천천히 얼굴에 활기를 띄었다. 짙은 적갈색의 머리칼은 본래 그를 활기찬 사람처럼 보이게 했고,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그의 사상을 이야기할 때면 캘커리의 빛처럼 빛났다.


“에아르닐.”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그가 에아르닐을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히 들떠있었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있었고 마세라의 부름에 에아르닐은 단순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아르닐의 차림새는 보기드문 종류의 것이어서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옷가지를 바라보고는 약간의 놀란 눈길을 보냈다가는 이내 거두어냈다. 에아르닐의 차림새는 대개 수수했으나 옷감만큼은 질 좋은 것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 한 눈에 보이는 검소하고 눈에 띄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그는 희고 잘 정돈된 셔츠 위에 금색단추로 마감한 갈색 베스트, 그리고 봄에 입을 만한 얇은 천으로 된 외투까지 걸쳐 입고 있었다. 소매끝이나 바짓단을 여민 보석이 박힌 단추들은 광장의 단상에 올라서는 에아르닐에게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고 게다가 하인이 매어주어야만 하는 리본으로 매듭을 지어 신는 신발은 누구든 그가 하인을 부릴 만한 계급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왕궁에 가는 모양이지?”


  에아르닐은 말없이 엷은 웃음기만 흘렸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다고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아도 욕심 없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는 애매모호한 웃음의 의미는 긍정과 다름없다는 것을 에아르닐의 오랜 친우는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왕궁 출입이 잦아. 마세라는 걱정하듯 물었으나 에아르닐이 하는 일에 그가 심하게 염려해야할만한 일은 대체로 없었다. 에아르닐은 마세라보다는 조용하고 말 수가 없는 인물이었으나, 마세라는 에아르닐이 늘 반드시 그러한 종류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아르닐은 필요하다면 입을 열었을 것이고 필요하지 않다면 아니라는 말조차 없이 입을 다무는 사람이었다. 염려하듯 왕궁 출입이 빈번하다는 것을 지적했지만 에아르닐은 필요하지 않다면 발걸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세라는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이번 주에 광장에는 나올건가?”


   마세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에아르닐의 표정에 큰 변화가 일었다. 주에 한 번 씩, 사람들이 생계를 내려놓고 쉬는 날 귀족과 평민들이 몰려들어 너나할 것 없이 뒤섞여 이야기를 나누는 광장에서의 모임에 에아르닐은 수도에 올라와 활동을 시작한 뒤로 빠져본 적이 없었다. 때로 단상에 올라가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날도 있기는 했으나 에아르닐은 그 인파의 어딘가에서 마세라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의 하나이고는 했다. 에아르닐은 마세라의 물음에 그때서야 자신이 그 광장에서 한걸음 벗어난 위치에 서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마세라가 이제껏 한 번도 변한 적 없던 사실이 앞으로도 건재할는지 의문을 품을 만큼 요 근래의 에아르닐의 행적은 크게 이전까지의 궤도를 벗어나 있었던 탓이다. 광장에 로브를 걸치고 온 순찰자를 만난 뒤로 부터였다. 


“당연한 일을 구태여 묻는 게 아닌가, 마세라.”


  마세라는 코끝을 찡그리며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고는 에아르닐의 걸음을 따라 왕궁 근처까지 천천히 걸었다. 봄의 햇살은 따듯했다. 왕궁의 기사들이 십자로 겹쳐져있던 창을 들어 에아르닐에게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었을 때, 마세라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러났다. 







  순찰자의 신분으로 만났던 남자는 왕좌에 앉아있었다. 에아르닐이 그를 두 번 째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에아르닐은 가르완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왕좌 위에 앉아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치 마세라가 에아르닐이 광장의 단상에 오르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에아르닐이 젊고 급진적이었으나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왕은 젊었으나 많은 것을 포용할 줄 알았다. 순찰자의 로브를 입고 직접 광장에 나오는 성정을 생각했을 때 어쩌면 그는 왕이라고 칭하기에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았는지도 몰랐으나 옳은 것을 고집하는 것과 많은 것을 포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에아르닐은 그것이 그릇의 차이임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에아르닐은 왕이 말하는 일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언제나 그가 말할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하되 왕의 뜻대로 하라고 일렀다. 에아르닐은 자신이 젊고, 젊기 때문에 급진적이나 젊은이들은 이따금 혹은 빈번한 횟수로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마저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왕에게 그의 생각을 털어놓되 왕이 말하는 바대로 따랐다. 

  왕이 그에게 라가하트리로 떠나라고 했을 때에도 에아르닐은 잠시 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에아르닐은 왕의 의중을 셈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가르완이 에아르닐에게 그러한 일을 맡겼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그만한 가치의 일이 있을 것이었고 에아르닐에게 그만큼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에아르닐은 먼 타국의 땅의 이름에 잠시 골몰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르완은 에아르닐이 떠나기전에 그에게 몇가지 말을 덧붙였다. 



‘고결한 아이가 목을 잃고 호수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호수는 사막이 될 것이다’



“꼭 목을 잃어야합니까? 목숨을 잃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까?”


  에아르닐이 그렇게 물었을 때 왕은 대답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침몰한 땅의 호수 바닥에서 목을 잃은 사내 아이 시체가 발견되었다는군.”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사내아이면 적어도 캘커리의 왕은 아직 아들이 없었다. 남은 것은 디올라와, 오나하, 레보르프였다. 마법에 관한한 디올라가 가장 손에 꼽히는 유력인사임에는 사실이었고, 오나하는 호수의 범인으로 손꼽기에는 마법에 관한 지식이 부족해 보였다. ‘악의 근원’을 손에 넣고 전투력을 강화시키기에 오나하는 이미 강했다. 오나하에 당장 필요한 것은 전투력과 전사들보다는 식이와 물자의 조달에서 오는 생활의 안정일 것이다. 오나하와 디올라에 비해 레보르프는 국력이 약했다. 그만한 대담한 짓을 저지를만한 나라인가 물으면 아니라는 쪽이 옳았을 것이나 에아르닐은 어쩐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부유하고 손익에 밝으나 주변국에 억눌려 국력이 약한 나라.

  왕은 골몰하는 젊은 정치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아르닐이 왕궁에서 나왔을 때 마세라는 여전히 광장 가운데에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날은 덥다기보다는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할 만큼 서늘했고 마세라의 곁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생계를 위한 일감을 손에서 놓은 몇몇의 가장들과 느즈막히 거리로 나선 그의 젊은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열이 띄기에는 자뭇 즐거운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왕을 의미하는 말들도 수차례 오고갔다. 광장에 모여 토론을 하기엔 지치고 고달픈 하루였을 것이나 젊은 혈기는 다른 것들을 뒤덮고도 남았다. 젊은 정치가 지망생들의 대부분은 이름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지만 개 중에는 젊고 명석하나 출신이 평민이어서 늦은 오후까지 마을의 골목 어귀에서 수레에 과일을 싣고 파는 젊은이도 끼어있었다. 그는 출신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발언권을 얻는 대신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다른 귀족들 보다는 훨씬 더 민중들의 삶과 도는 소문에 밝았다. 

  에아르닐은 목을 꽉 졸라매고 있었던 커프스를 벗어 얇은 외투 주머니에 넣고는 멀리서 분수대를 등지고 앉아있는 마세라를 향해 가만히 눈짓해보였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진하고 탁한 녹색눈과 마주치고는 에아르닐이 작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보이자 천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한 무리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마세라는 뒤늦게 무리에 합류했던 과일 장수 젊은이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세라. 내가 이전에 ‘자치’에 대해서 말한 적 있지.”

“분명 그랬네. 그게 문제가 되었단 말인가?”

“아냐. 나는 사실 캘커리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그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어. 캘커리의 부국강병이 좀 더 확실시되기만 한다면 말이야. 그런데 내가 캘커리가 강건해져야한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네.”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은 없잖나.”

“자네에게 말하기에도 너무 섣부른 생각은 아닐까 했기 때문이지.”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말에 잠시 에아르닐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친우가 쉽사리 사람에게 그의 깊은 생각을 내보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만 가정사까지 죄다 에아르닐에게 내보여진 마세라 입장에서 에아르닐의 태도는 이따금 여간 섭섭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었다. 에아르닐은 바람결에 흩어지는 적색 머리칼에 시선을 두었다가 미안하기보다는 때가 아니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마세라를 바라봤다. 


“나는 레보르프가 자꾸만 눈에 밟혔네. 레보르프는 부유한 나라야. 디올라와 캘커리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부유하다고 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돈을 벌어가고 있지. 상인들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부유한 나라인데도 레보르프에서 오는 상인들의 얼굴을 보면 하나같이 밝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네. 레보르프가 위치 상 오나하에게 자주 약탈을 당한다는 사실은 흔히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일이지만 나는 그 문제가 생각보다 큰일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 레보르프의 상인들이 위협을 당하면 디올라와 캘커리에의 무역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고, 위험을 부담하게 되니 중개무역 물품들은 더욱 값이 오를 수 밖에 없지.”


“디올라와는 달리 캘커리는 온화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레보르프의 이익을 캘커리 홀로 충당해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었네. 레보르프의 손익에 귀신같은 상인들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 말야. 내가 캘커리의 부국강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것은 그때문이었지. 캘커리만 레보르프에게 순순히 모든 걸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야.”


  에아르닐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일이 생각보다 심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전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더더욱 그래.” 


  그들이 지금 상황을 타파해야한다면 어떻게 할까? 오나하의 약탈을 종식시키고 디올라와 캘커리 사이에서 얻는 이익을 극대화 하려면? 결론은 간단했다. 일곱 살 먹은 계집아이에게 물어도 손쉽게 대답했을 것이다. 오나하가 없어지면 된다. 더 복잡한 수식도, 정치적 수완도 때에 따라 도움은 될 것이나 오나하의 약탈은 국가가 눈감아주는 국지적인 면모에 더 가까웠다. 레보르프도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닐것이다. 그래서 여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오나하가 없어지면 된다. 다소 과격한 결론이었지만 레보르프가 살기 위해서 그보다 명쾌하고 그보다 무모한 선택은 없었다. 에아르닐은 자신의 비약적인 사고에 눈살을 지푸렸다. 


“이번 주에는 광장에 못 갈 것 같네. 마세라.”

“뭐?”

"라가하트리로 떠나게 됐어.“


“일년 내내 꽃비가 내린다는 디올라의 수도 말인가?”

“그래. 하지만 자네가 있으니 광장은 늘 그랬던 것처럼 활기차겠지.”


  마세라는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긁적이고는 이윽고 밝게 웃었다. 잘 다녀오게 에아르닐. 에아르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놀라는 한편 어디에선가 수긍해주는 그의 오랜 친우를 바라봤다. 에아르닐은 본래 누군가를 곁에 두지 않아도 충분해하는 성정이었으나 라가하트리에 머무는 동안 그의 부재는 에아르닐에게 있어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고 그에 걸맞는 이야기나 토론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이었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이 하라드 이실에서 떠나 처음으로 얻은 지지자였다. 에아르닐은 오랫동안 홀로 자랐으나 클레릭에서의 세월은 에아르닐에게 많은 추종자들과 사랑과 지지대를 내어주었다. 에아르닐은 콧잔등은 긁적이는 마세라에게 대답대신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에아르닐이 라가하트리에 도착했을 때 에아르닐의 어깨에는 검은 여우털로 된 망토가 걸려있었다. 캘커리에서 레보로프를 거쳐 디올라로 향하는 길은 빈번히 갈고 닦이지 않아 말에게도, 마차에 탄 사람에게도 모두 험난했다. 디올라로 접어들수록 캘커리의 사신들은 보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에아르닐은 검은 여우털로 만든 그의 낡았지만 잘 손질된 코트로 그 추위를 버텨냈다. 디올라는 북쪽이었지만 각 영주들의 영지를 지나올 때 마다 마법으로 갈무리된 온화한 날씨들이 디올라의 추위를 한 풀 꺾어주는 노릇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수도는 마치 클레릭의 봄처럼 따스했고 에아르닐이 여우털 망토를 벗기도 전에 검은 여우털 위에 꽃비가 소복히 내려앉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디올라의 연회는 명목상 태어난 공주를 위한 것이었으나, 캘커리와 레보르프 오나하에서 온 사절단과 그들이 가져온 축하 선물만 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목적을 띈 종류의 연회인가를 쉽게 눈치 채고도 남았다. 캘커리는 갖가지의 비단과 보석들을 선물했으나, 그 비단들이 캘커리에서만 나는 직물이며 은실로 수놓은 직물의 무늬들이 얼마나 값비싼지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고 여린 아기 공주는 연회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았고 고작 이 연회의 안주인이라고 불리우는 디올라 왕의 후궁의 얼굴만을 간간히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금기를 깨기 위해서는 고결한 아이의 목이 필요했다. 디올라에서 왕자가 죽었다면 아무리 공주가 태어났다고 한들 이토록 정치적이고 성대한 연회를 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에아르닐의 머리에 왕자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외려 때마침 잘 태어나준 공주의 탄생을 빌미로 다른 것을 덮어둘 만큼 성대한 연회를 열었는지에 대한 의심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연회에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있는 하인들이나 디올라의 귀족들이 흘리는 말에 어디에서도 불미스러운 왕궁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다. 

  북쪽에 위치한 수도를 이토록 따듯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이 있는 디올라가 일부러 악의 근원을 도로 되찾으려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는 것이 에아르닐의 판단이기도 했다. 디올라는 오나하에게 약탈을 당하지도 않았으나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 농경이나 식생에 유리하지 못한 점들까지도 각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능력에 따라 제각각의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았다. 수도인 라가하트리가 이토록 따듯하고 풍요로우니 다른 영지들도 이에 버금가지는 못하더라도 영지민들의 식생활에 최소한의 보장은 할 수 있을 만큼의 기후를 보장하고 있을 터였다. 영주든, 마법이든, 국가에 이르렀든 간에 가장 기본적인 모든 정치의 근간은 백성들이었고 백성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되면 그로도 만족했다. 어느모로 보나 디올라가 지금 당장 곤궁하도록 금기를 어겨야하는 이유는 없는 것으로 비췄다. 

  에아르닐은 시간이 그에게 허락하는 한 연회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디올라의 귀족들과 사절단 사이에 섞여 이야기를 들었으나 뜬소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따금 새로 태어난 공주의 영력을 논할 때마다 그래도 어느 왕자의 영력에는 버금가지 못할 것이라며 정비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러한 왕족이 끊임없이 배출될 경우 왕권이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만이 슬그머니 비어져 나와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 나이 또래의 왕자가 사라진 일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본래 영력이 강한 마법사들과 탤랜타에 의해 좌우되는 국가인 만큼 왕권의 강화에 대한 반발심은 애국심 이전의 다른 문제로 치부되는 것처럼 보였다. 

  에아르닐은 디올라에서는 죽은 왕자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연회에 나온 후궁을 대하는 클레드윈의 모습은 사랑 이전에 배려와 기품이 넘치는 배우자의 것에 다름 없었다. 게다가 왕으로서 자기 자식을 희생하고서라도 국력을 높이고자 하면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일반적인 왕의 모습이었으나, 클레드윈의 모습에서 에아르닐은 아들을 희생하고 난 사람의 그 어떤 위화감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침몰한 땅의 호수에 대해서는 외려 캘커리에 비하여 모두들 관심이 적었다. 새로 태어난 공주의 영향 때문임을 감안하고서라도 소문이 늦다는 것은 전하는 사람이 적으며 관련된 인물이 적다는 뜻이었다. 연회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이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다. 





  전쟁에는 늘 효시가 있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군용 식략으로 쓸 곡물이 차출되고, 그 다음에는 세율이 오른다. 나라의 기사들로 수가 충당되지 않을 때에는 귀족의 사병이나 평민출신의 백성들 까지 징집한다. 전쟁은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더라도 전쟁의 준비는 늘 그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다. ‘악의 근원’의 부활은, 그를 부활시키기 위한 ‘금기’를 깨고자 함은 팔백년 동안 이어져온 평화를 깨트릴 전쟁의 효시일는지도 모른다. 전쟁에는 효시가 있는 법이었다. 이제 막 ‘금기’를 깨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면 분명 다음이 있었다. 라가하트리에서 클레릭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에아르닐은 생각을 접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다음. 그 말만이 머릿속에서 그가 잠들 때까지 그를 좇아왔다. 



Mission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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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TUNE

 

 비오는 밤이었다. 길가의 가로등이 빗물에 번져 부옇게 등을 밝히고 있었다. 로랑 크로잔의 마차는 무도회가 열린 백작의 저택에서 나와 로랑의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부는 거세게 내려치는 빗줄기가 짧은 챙 아래로 흘러내릴 때마다 축축하게 젖은 옷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로랑은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마차의 벨벳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두꺼운 코트로 어깨를 감싼 채 창문에 기대어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계절은 이제 막 봄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밤공기는 차가웠고, 한차례 내리고 있는 봄비가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로랑은 흐려진 창문가를 장갑을 벗은 손으로 스윽 닦아내어 창밖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말아 쥐고 마차 지붕을 두 번 두드렸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새까만 그림자에 로랑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마차 문을 열고 한 쪽 발을 내딛었다. 마차 밖으로 비어져나간 어깨가 내리는 비에 차츰 젖어들었다. 로랑은 비를 쫄딱 얻어맞고도 말쑥한 표정으로 서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빛이 어두워 쉽게 분간할 수 없었으나 아이의 머리는 제법 어두운 축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고, 아이의 눈은 엷은듯했다. 로랑은 두꺼운 코트자락을 들어 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내다가 아이가 자신의 손을 잡자 마차 안으로 끌어들였다. 코트를 벗어 완전히 푹 젖은 옷 위에 덮어씌우고는 단단하게 동여매듯 아이를 옆에 앉혔다. 로랑의 손의 채 반절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손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고작 스물하나의 주인이 자신의 키의 반절 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 로랑의 집사 모라벡의 눈은 크게 뜨였다가 도로 평정을 되찾았다. 모라벡은 약간 젖어 흘러내린 로랑의 머리칼을 바라보고 햇볕에 잘 마른 수건을 말없이 주인의 머리 위에 덮어 씌운 뒤, 메이드에게 일러 아이를 푹 담가 씻기도록 욕조에 물을 받도록 했다. 로랑은 머리칼과, 어깨, 손이 조금 젖었을 뿐이었지만 코트를 벗긴 아이의 몸은 완전히 빗물에 젖어있었고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막내로 자란데다가 아이라고는 키워본 일이 없을 로랑은 몰랐겠지만 저대로 있다가는 보통 감기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폐렴이나 그보다 심한 독감에 걸리면 아이들은 제대로 된 치료도 받기 전에 금방 죽어나가는 시절이었다.


“아이는 어디서 데려오셨습니까?”

“비가 오는데 길에 혼자 서 있길래.”


 로랑이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어내고 커프스와, 커프스 단추들을 하나하나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동안, 메이드가 달려와 아이의 젖은 옷가지를 모두 벗기고 로랑의 코트와 함께 빨래 바구니에 넣어 다른 이에게 들려 보냈다. 하얗게 젖은 몸을 수건으로 물기가 없도록 닦아내고 목욕물이 준비되는 동안 아이는 남색 담요에 꽁꽁 싸매어져 벽난롯가 앞의 소파에 앉혀있었다. 로랑이 겨울이면 허벅다리 위에 책을 올려두고 오랜 시간을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는 소파는 아이에겐 지나치게 커서 마치 커다란 왕좌에 앉은 어린 왕자처럼 보였다.


“눈이 파란색이군.”


 모라벡이 로랑을 바라봤을 때 로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불을 쬐고 있는 아이를 보며 웃었다. 머리칼은 잘 말려 광택을 돌게 한 마호가니같은 색이었고, 눈동자는 새파랬다. 아이는 잠시 손 안에 들려진 따듯한 초콜릿 컵을 바라보다가 로랑에게로 작은 고개를 돌렸다. 로랑은 동그란 눈을 보다가 웃었고, 메이드는 곧 아이의 손에 들린 컵을 빼앗아 테이블에 올려두고 아이를 욕실로 데려갔다. 로랑이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었을 때 즈음에 첨벙하고 아이가 물에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름은?”

“튠.”

“집은?”

“...”


 따듯한 물로 말끔하게 씻긴 아이는 고달팠는지 그날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잠에 빠졌다. 아이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로랑의 질문에 답했다. 튠. 로랑은 대답하지 않는 튠을 바라봤다. 아이의 이름은 제법 아이와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집이 어딘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갗이 뽀얗게 익었으니 어디서 부모가 잡심부름을 시키던 아니는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부모를 찾을 때까지 데리고 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침 로랑의 저택에는 많은 수의 메이드와 풋맨이 있었고, 빈번히 외출하는 주인 대신 하나쯤 더 돌볼 것이 있어도 심심하진 않을 것이었다. 로랑에겐 그 많은 수의 사람을 부릴만한 충분한 돈과 재능이 있었다.


“나이는?”

“열둘.”


 로랑은 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었다. 금세 손을 뻗어서 자신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모습에 로랑은 잠시 기가 찬 듯이 웃었다. 웃으면 퍽 예쁜 얼굴일 것 같았다.


 아버지가 되기엔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로랑은 의외로 튠에게 관심을 가졌다. 로랑은 남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지만 필요하지 않은 일은 대부분 흘려듣기 일수였고 하물며 보란듯이 하루 종일 꾸민 영애들에게도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로랑을 보며 모라벡은 나지막히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집에 머물고 있는 튠은 그런대로 잘 적응한 모양이었다. 메이드들은 상냥했고 하루 종일 집을 비우는 주인보다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훨씬 흥미가 동하는 듯했다. 로랑은 이따금 오찬이 없는 오후에는 테이블 위에 앉아 말없이 스콘을 자르는 튠을 바라보거나, 튠이 낱말 퍼즐을 움직이는 것을 도와주었다. 튠은 로랑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머리가 좋았다. 로랑이 튠의 작은 손을 잡고 잘못된 퍼즐을 함께 옮기던 놀이도 곧 머지않아 로랑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튠은 로랑의 저택에 금방 익숙해진 것처럼 익숙하게 로랑과 가까워졌다. 책을 읽는 로랑 곁에 앉아 있다가 로랑의 가슴에 뺨을 기대고 잠이 들면, 로랑은 책을 덮고 튠의 어깨를 감싸 함께 낮잠을 즐겼다. 모라벡이 얇은 담요를 펼쳐 두 사람 위에 덮어주었다. 만찬 약속의 횟수는 이전과 비슷했으나, 오찬 약속은 현저하게 줄었다. 로랑은 밖에 나가는 대신 따스해지는 바람이 들도록 살롱의 문을 열어놓고 튠과 함께 앉아 책을 읽거나 아이를 곁에 앉혀두고 경매를 위해 모아놓은 오래된 보석들이나, 목걸이들, 풍경화나 조각상들을 보여주며 설명해주곤 했다. 튠이 예술품을 가리키는 로랑의 손가락을 잡거나 따분한 기색을 보이면 로랑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 말에 태웠다. 귀족이 삶이란 대부분 직업을 가질 이유도 없이 아주 느긋하고 여유로웠고 풍족했다. 로랑은 이따금 품 안에서 꼼지락 거리는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찾을 때까지, 아니면 아이가 무엇 하나라도 기억해낼 때까지 느긋하게 낱말놀이를 즐기기로 했다.






 “로!”


 튠이 로랑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모라벡이 눈썹 사이를 좁혔지만 로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로랑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다가, 자신의 침대 위로 달려드는 튠을 보고 웃었다. 풀썩. 소리가 나도록 침대 위로 달겨드는 튠의 위로 이불을 덮어씌우곤 이불 채로 튠을 꽉 끌어 안았다. 이불 틈 사이로 흐트러진 마호가니색 짙은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이마 위를 어지럽히는 머리칼들을 손끝으로 살살 떼어내어 주곤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재밌게 놀았어?”


 로랑은 대답대신 입술에 입을 맞추는 튠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입술을 떼어낼 때 마다 쪽하고 소리가 났다. 작고 마른 입술 위에 로랑은 손가락으로 약을 발라주며 튠의 머리끝까지 덮어씌웠던 이불을 걷어주곤 곁에 앉혔다. 로랑의 가슴 언저리에 닿은 작은 손이 로랑이 숨을 내쉴 때 마다 작게 오르내렸다. 느즈막히 열린 만찬 뒤에 살롱에서 한바탕 모임이 있을 것 같았으나 로랑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집에 돌아왔다.


“같이 잘래.”

“얼마든지.”


 같이 자자고 떼를 쓰는 것도 충분히 기대했던 일이지만, 아침마다 자신보다 일찍 깨어 일어나라고 졸라대는 튠 때문에 일찍 피곤해지는 것도 사실이어서 로랑은 튠을 안고 푹신한 베게 위에 머리를 얹었다. 일찍 자야지. 잘 거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잖아. 심심하니까. 메이드들이 놀아주잖아? 재미없어. 튠. 로랑은 대답 대신 눈만 깜박이는 튠을 보고 손을 뻗어 모라벡에게 등을 가지고 나가도록 했다. 단단하게 둘러싼 커튼 안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아 손을 뻗어 확인하지 않으면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로랑은 따듯한 몸을 가만히 안고 등을 도닥거렸다. 얕은 숨소리가 났다.



 튠의 부모는 결국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뒤늦게라도 찾게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아주 오랫동안, 이제는 찾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튠의 신변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들린 것이 없었다. 모라벡이 아이를 어떻게 할거냐고 묻기 전까지 로랑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를 찾지 못하는 한, 아이가 거기에 있는 동안은 계속 아이가 거기 있는게 당연한 것처럼 모라벡을 보고는 간단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평소처럼.

 로랑은 집으로 배달되어 온 서신 몇 개의 밀봉을 나이프로 뜯어 열어보고는, 얇은 끈을 꼬아 책 서너권을 묶어놓은 묶음을 끌러놓고 있었다. 튠은 좀 더 자연스러운 자세로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는 책에는 흥미가 떨어진 표정으로 로랑이 나이프로 묶음을 잘라내는 것을 지켜봤다. 로랑은 도착한 책들의 앞장을 주의 깊게 펼쳐보곤, 앞부터 뒤까지 파라락 페이지를 넘겼다. 몇가지의 역사서와, 고미술서, 철학서들을 살펴보다가 로랑은 그것들을 양장하도록 모라벡에게 들려보냈다.


“튜터를 붙여줄까?”


 로랑은 어쩐지 심심해보이는 튠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필요 없어.”

“필요할거야.”

“로가 가르쳐주잖아.”

“나보다는 튜터가 나을텐데.”

“필요 없어.”

“거버니스가 가지고 싶어?”

“...아니.”


 꼭 좋아하는 여자애라도 있느냐고 놀리는 듯한 말투에 튠은 입을 다물었다. 로. 불평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로랑은 대답 대신 이리오라는 듯이 팔을 열었다. 지금은 로랑과 함께 있는 걸로 충분하겠지만, 만약 앞으로도 튠이 로랑과 지내게 된다면 기본적인 교육은 필요해질 거였다. 로랑은 튠만 싫어하지 않는다면 튠이 나이가 차면 무도회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고, 충분히 스스로 그의 후견인이 될 생각도 있었다. 손에 들려준 크레용을 뚝,뚝 분지르는 튠의 손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젖은 물수건으로 그의 손가락 마디 사이를 닦았다.






 “로!”


 로랑은 튠을 돌아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혀 웃었다. 열두살의 모습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새파란 눈이나 마호가니색 머리칼은 그대로였다. 재단사가 튠의 몸에 꼭 맞게 맞추어 재봉한 실크 셔츠와 타이, 꼭 갖추어 입은 조끼나 외투 밖으로 손가락 반마디 만큼만 비어져나온 셔츠의 소매까지 어디에 내놓아도 충분히 이목을 끌만한 신사처럼 보였다. 튠은 얌전한 호박으로 된 커프스 단추를 골랐으나 결국 커프스 단추만은 눈 색에 맞추어 파란색으로 하라는 로랑의 성화를 이겨내지 못했다. 눈 색을 닮은 걸로. 개 중에서도 밝은 색 사파이어를 주문하는 로랑은 자신의 커프스 만큼이나 까다롭게 보석을 골랐고 모서리가 잘려나간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세공을 원했다.

 열두살 때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입술을 부딪히는 인사에 로랑은 눈을 감고 웃었다가 천천히 튠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로랑의 목덜미에는 튠의 머리칼이 닿아있었다. 튠은 천천히 자라나는게 아니라, 어린 시절을 그만두고 청년이 되기로 한 것처럼 로랑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몰라보게 커버린 것같이 보였다. 로랑은 튠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손으로 뺨을 쓸었다.


“근사해.”

“정말로?”

“그래.”






 열일곱은 충분히 매력적인 나이다. 로랑이 그랬고 아마 튠도 그렇겠지. 로랑은 벽에 기대어 서서 오랫동안 반절이상 비워지지 않는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로랑의 주변에 크로잔의 귀족들과 몇몇의 친구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져갔고, 곧 시올이 다가와 곁에 섰다. 그는 로랑의 시선이 멀리에 여러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있는 튠을 향해있는 것을 알게 되자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언제부터 부성애가 넘쳤어?”

“아버지가 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너 지금 하는 꼴이 그거 아니고 뭔가.”

“글쎄”


 튠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열일곱은 충분히 매력적인 나이였다. 튠의 짙은 색 머리칼이며, 커프스 단추와 같은 새파란 색의 눈동자, 천진한 표정으로 웃는 얼굴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예쁘다고 표현하기엔 그보다는 좀 더 무언가가 있었고, 멋있다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착한 표정으로 웃고는 했다. 게다가 튠이 이따금 맞춰오는 입맞춤 같은 것들이 그를 나이보다 훨씬 미성숙한 풋풋함으로 위장시키고는 했다. 단순히 곁에서 오년동안이나 지켜보아 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기새 날려 보낸 어미새 같군.”

“닥치게 시올.”


 로랑은 미간을 좁혔다. 잔에 남은 샴페인을 단숨에 삼키고는 찌르르 목이 울리는 감각에 눈썹을 찡그렸다가 뜰 때쯤 튠이 로랑을 돌아보고는 입술을 말아올리며 웃었다. 아. 얼굴만 보아서는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 같았으나 튠은 곧장 고개를 돌려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래도 아니라고 할건가 로랑?”


 로랑은 대답 대신 샴페인 잔을 창틀에 놓아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테라스는 바람이 들었고 연회장 보다는 훨씬 더 숨을 쉴 만 했다. 로랑은 난간에 팔을 걸쳐두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로랑은 춤을 춘 상대도 없었고, 길게 이야기를 나눈 상대도 없었다. 단지 튠이 처음 나서는 자리에서 오래도록 시올과 함께 서 튠을 바라보다가 도망치듯 테라스로 나선 것뿐이었다. 흐트러질 일 없던 머리칼이 바람에 살살 흩어졌다.


“로.”


 로랑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빛을 등지고 선 튠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사람들은?”

“무슨 사람들.”


 고작 나이를 몇 더 먹었을 뿐인데, 뒤를 잘라먹은 짧은 말투가 묘하게 시건방져 보인다. 네 주변에 있던. 로랑은 나지막히 말하면서 튠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테라스로 함게 몰려오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이 절반이었다. 로랑의 말에도 튠은 모른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왔어?”


 로랑은 한쪽 팔을 난간에 걸친 채로 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는 바람에 흩어지는 튠의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비스듬히 내려온 앞머리칼들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었다. 대답이 없는 튠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튠의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행커칩을 끼워 넣은 왼쪽 가슴께의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가 손을 떼어냈다. 재밌어? 로랑이 재차 묻는 말에 튠은 대답 대신 가볍게 입술을 부딪혔다. 로랑은 튠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내다가 튠의 어깨 너머에 시선을 두면서 나지막히 숨을 내쉬었다.


“튠. 밖에서는 이러면 안 돼.”

“왜?”


 서글서글한 눈매가 영문을 모르는 것처럼 처지는 것을 보고 로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렸을 때는 애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튠은 열일곱이었고, 로랑은 스물여섯쯤 되었으며 로랑은 누군가의 후견인이 되기에 지나치게 젊은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의 나이에 일고여덟쯤 된 아이의 후견인이었다면 모를까, 벌써 열일곱이나 된 아이와 청년의 중간쯤에 선 튠의 후견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었다. 열두살짜리 꼬마애의 키스를 받아주는 스무살도 아버지 놀이를 하기엔 우스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열일곱짜리 사내애의 키스를 받는 스물여섯도 이상하기로 따지면 비슷하거나 그보다 위였다.


“밖이니까.”

“왜 안 돼?”


 로? 튠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로랑의 이름을 불렀다. 로? 왜? 몇 번이나. 로랑은 튠의 눈을 바라보다가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는 저도 모르게 밀려오는 당혹스러움에 대해 먼저 생각했다. 로랑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이 튠은 자라있었으나, 튠은 자랐기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것들이나 익숙했더라도 익숙하지 않게 되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부모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벽이나, 내외 같은 것들이 그에게는 제대로 성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로랑과 튠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한 것처럼 느껴졌고, 그랬기 때문에 로랑은 더욱 그 경계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는지 쉽게 생각해내지 못했다.


“저택에서는,”


 우리끼리만 있을 때에는, 그렇게 말하고 로랑은 잠시 말을 멈췄다.


“괜찮지만. 밖에서는 안 돼. 열일곱 된 남자에게 남자가 키스를 받는 건 이상한 일이야.”


 튠은 튜터가 필요 없다고 했지만 로랑은 결국 튠에게 예절이나 역사, 문학등을 가르칠 튜터를 붙였기 때문에 로랑은 튠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데 그리 익숙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로랑은 좋은 지식인은 될 수 있지만 좋은 선생은 되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로랑은 어설픈 단어들을 골라 최대한 튠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려다가는 문득 자신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누가 보아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아니었고, 로랑도 튠을 자식처럼 예뻐하긴 했지만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터울이 나는 형제 사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튠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서있어서 엷은 색의 파란 눈동자의 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로랑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랑은 튠이 왜라고 묻는 만큼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로랑은 그제서야 튠이 남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랐다는 것을 깨달았고, 튠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나서야 그것이 왜 이상해 보이는 광경인지 스스로 납득했다. 안된다고 내뱉기 전까지는 로랑 자신도 튠의 스킨십에 대해 특별한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튠이 로랑을 대하는 행동들은 자연스러웠고 로랑은 튠이 엉겨오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이제 와 그런 것들이 전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이유가 튠이 자라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은 어쩐지 조금 어설픈 이유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로랑은 타인에게 둘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상식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튠의 가슴께를 토닥이는 것으로 나머지 이유를 생각지도 않은 채로 묻어두기로 했다.




“로랑!”


 로랑은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에 책상 위에서 고개를 들어 문간을 걸어 들어오는 튠을 바라봤다. 튠은 이제 집안을 가볍게 뛰어다니지 않았고, 아마 그러고 싶어도 그의 거의 다 자란 몸이나 무게들이 그를 가볍게 뛰어다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튠은 오랫동안 로랑을 로라고 불렀다. 튠이 집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내내 그랬던 일인데 요즘의 튠은 이따금 로랑을 이름으로 불렀다. 로랑. 튠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름은 듣기 어색했고 로랑은 그가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 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 열 걸음은 되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로랑은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잉크에 적셔 두고 테이블을 짚은 튠의 손을 바라보다가 눈으로만 대답했다.


“단테가 한달 쯤 자기네 별장에서 지내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래도 돼?”


 튠은 금세 친구를 만들었다. 로랑의 눈앞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는 일들이었다. 단테는 크로잔계 귀족이었고 딱히 성품에 모난 데가 없어 로랑도 가끔 단테를 바라보며 저 정도 친구면 괜찮지 않느냐고 시올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지방 귀족 출신으로 출신을 따지는 데에는 넌더리가 난 시올이었지만 시올은 유독 튠에게만 엄하게 굴었다. 엄하게 구는 건지 단순히 튠이 마음에 들지 않는건지는 잘 구분이 가지 않았으나 어쨌든 시올은 단테를 보며 웃는 로랑을 보고 튠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겠느냐고 두어마디 건넸다. 튠의 부모는 여전히 찾지 못했고, 귀족 사회란 아무리 융통성있게 굴어도 결국 혈연과 지연으로 얽히는 사회였다. 누구의 양자나 누구의 양녀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만 다른 사생아이거나, 동생의 아들을 형이 데려와 키우는 식이었기 때문에 튠의 경우는 유별났다. 로랑은 자신의 친척중에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라고 얼버무려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튠을 처음 데려왔을 당시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튠의 하얗고 깨끗한 피부나 날 때부터 천상 귀족이었을 것 같은 여유로운 표정, 잘 배운 예절이나 같은 또래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외모 같은 것들이 소문을 조용히 흐르도록 얼추 잠재운 정도였다.

 로랑은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금세 친구가 되긴 했지만, 한달씩이나 단테의 별장에서 지낼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진 줄은 몰랐다. 아기새 날려 보낸 어미새 같군. 시올의 말이 떠올라 로랑은 튠을 바라보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너무 자신과 둘이 지낸 시간이 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로랑은 시올의 말을 떠올리고는, 왜 그러면 안되느냐고 눈을 깜박이며 묻던 튠을 떠올렸다. 튠과 로랑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단테의 이름이 천천히 경계선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로랑은 나지막히 신음했다. 로랑에게도 물러서야 할 때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지금만 해도 고작 한달을 친구의 별장에서 지내겠다는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지 않았던가. 로랑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튠의 짐은 튠이 온 뒤로 튠의 메이드를 자처했던 이제는 조금 나이가 든 메이드들이 쌌다. 튠이 좋아하는 향수들과 상자에 담은 커프스 단추들. 튠의 짐을 결국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모라벡이었지만 이따금 로랑은 짐을 싸는 튠의 방 문틀에 기대어 서서 튠의 짐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고 있기도 했다. 한달이나 지내는 터라 가져갈 옷도 장신구들도 많았다. 귀족의 별장이고 크로잔의 귀족이니, 별장에 내려가면 책이나 읽는 대신 승마나 사냥 같은 것들이 놀잇감의 주를 이루겠지만 로랑은 메이드를 시켜 꾸역꾸역 두어권의 책을 짐에 집어넣도록 했다. 그저 그가 짐을 풀었을 때 로랑의 저택에서 가져간 무엇들이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로랑은 튠에게 잘 다녀오라며 새로 주문한 두 쌍의 커프스 단추와 승마용 옷을 한 벌 사주었고 그것들은 다시 고스란히 튠의 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 튠에게서는 한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 도착한 당일 날 쓴 것으로 보이는 도착했다는 짤막한 서신하나가 전부였다. 로랑은 은쟁반 위에 올려져 모라벡의 손에서 전해지는 서신들 사이에서 늘 튠의 편지를 찾았지만 튠에게서는 한 통의 소식도 없었다. 밀랍으로 밀봉된 서신들은 전부 오찬이나 만찬, 무도회 같은 것들이었고 로랑은 튠이 없는 동안 시간이 겹치지 않는다면 받은 서신 중 대부분의 것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로랑은 바빴으나 즐거움은 살롱에 앉아있는 잠시 동안 뿐이었다. 젊은 애들은 바쁠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모라벡은 로랑을 두어번쯤 달랬으나 어쩐지 서운한 기색을 지울 수 없어 로랑은 집에서 와인을 마시는 대신 밤이면 무도회를 나섰다. 로랑의 열아홉, 스무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시 왕성해진 로랑의 등장을 기꺼이 반겼다. 시올이 거기에 덧붙여 이제야 어미새 노릇을 접고 포기할 줄 알게 되었느냐고 말했지만 로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올을 흘겨보고는 대답을 피했다. 로랑은 여전히 튠의 서신을 기다렸으나 모라벡은 로랑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눈을 마주치면 바로 고개를 저었다.






 로랑이 튠과 마주친 것은 무도회에서였다. 여느날처럼 무도회는 소란스러웠고 무도회의 주인공들은 대개 스물 안팎의, 또는 로랑 또래의 사람들이었다. 로랑은 그날도 시올과 크로잔의 귀부인들 그리고 몇몇의 인파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하며 샴페인으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는데 아직 돌아오겠다고 한 날까지는 이틀 남짓이 남았던 오랜 저택의 식구가 무도회장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랑의 침묵에 시올이 로랑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곧 튠에게로 시선을 두었으나 로랑은 그 짧은 침묵이 잠깐 목이 말랐던 것뿐인 것처럼 샴페인으로 목을 적시고 말을 이었다.

 튠은 그 사이 좀 더 자란 것처럼 보였다. 바르게 마주치지 않았던 눈높이가 이제는 정면을 향하면 바로 눈이 마주칠 것처럼 보였고 색이 짙은 페도라에 손목에서 반짝임이 이는 커프스 단추는 이전에는 로랑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고작 한달 남짓의 시간동안 눈에 띄게 변해버린 튠의 모습에 로랑은 아연해졌다. 막연히 생각해왔던 경계선들이 천천히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한 느낌이 들었다. 튠의 곁에는 연한 노란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있었는데 얼굴로 보아서는 사교계에 데뷔한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나이의 아가씨인 것처럼 보였다. 튠과 또래이거나 그보다 한두살이나 아래일까. 목에 두른 얇지만 반짝이는 목걸이나 질좋은 실크로 뽑은 옅은 색 드레스의 옷감 같은 것들이 제법 좋은 집안의 아가씨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여주었고 로랑은 튠보다 두어걸음 뒤에서 들어오는 단테를 보고는 별장에서 만난 사이는 아닌지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그 나이 또래들이 흔히 거치는 연애사업 때문에 바빳다면 한달 동안 소식이 없었던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정신차리게 로랑. 시올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로랑은 들고 있던 잔을 놓칠 뻔 했다. 로랑은 잔을 놓치는 대신 빈 잔을 들어 지나가는 풋맨의 쟁반 위에 올려두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로랑.”


 시올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멀리서 웃고 있는 튠을 바라보다가 로랑은 이마를 짚었다. 멀리서 로랑과 눈을 마주쳐 입 대신 눈으로 묻는 시올을 보고 로랑은 턱으로 응접실을 가리켰다. 로랑은 문이 없는 무도회장의 회랑을 지나 근처에 있던 풋맨의 도움을 받아 응접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열린 테라스를 넘어 무도회장에서 연주되고 있는 현악 4중주의 왈츠가 들려왔다. 로랑은 눈을 감고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실크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스트 룸으로 향할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벽시계의 초침소리를 천천히 셌다.



“로.”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로랑은 천천히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렸다. 초침 소리를 한 삼백쯤 세다가 놓친 뒤였다.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그 동안 조금 더 낮아지기라도 한 듯 어른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로랑은 팔로 소파를 누르며 상체를 일으켜 튠을 바라보고는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안녕 튠.”


 돌아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너무 구차한 질문인 것 같아 로랑은 말을 묻는 대신 웃는 얼굴로 대신했다. 튠은 천천히 다가와 로랑의 곁에 앉았고, 로랑의 얼굴은 튠을 향하지 않은 채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랑은 답지 않게 오랫동안 말을 아꼈다. 많이 멋있어 졌네. 로랑이 겨우 툭 내뱉은 소리에 튠이 소리내어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로랑은 그제서야 튠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튠의 옆얼굴을 쓸었다. 예뻐졌네. 로랑의 말에 튠이 다시 한 번 웃었다. 로랑은 복잡한 표정으로 튠을 바라보다가 튠의 소매에 눈을 두었다.


“로.”


 로랑은 왜 그렇게 부르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눈만 튠의 눈에 고정시켰다. 로랑의 표정은 피곤하고 복잡해보였다. 아마도 시올이 봤다면 튠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았느냐고 단단히 으르렁댈 만한 얼굴이었다. 튠의 공백은 너무 길었다. 어쩌면 희미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순간부터 지레 무언가가 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 한 쪽은 로랑이었는지도 몰랐다.


“잘 지냈어?”

“그래. 여전했어.”


“내가 없어도?”


 로랑은 어떻게 대답해야하는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다가 희미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을 메웠다. 튠이 한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것은 로랑이었다. 옆에 있던 아가씨 예뻐 보이던 걸. 정말 그렇게 생각해? 로랑은 웃었다. 그래.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좋은 집안 사람처럼 보였지. 네 나이에 나쁘지 않은 경험이네. 로랑이 드문드문 어렵게 말을 골라 잇는 동안 로랑은 튠의 얼굴 대신 튠의 목덜미께를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의 단추들은 단단하게 잠겨있었고 잘 다림질된 실크 커프스는 한쪽 끝이 둥근 금색 핀으로 고정되어있었다. 로랑은 튠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리고 로랑이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튠의 목덜지 언저리를 훑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도 몰랐다.


“로.”

“왜”


 튠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로랑은 불안하게 미간을 좁혔다.


“역시 마음이 없는 연애는 나쁜거야. 그렇지?”


 로는 나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로랑은 잠시 튠의 셔츠에서 고개를 들어 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튠은 해사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튠로랑 패러랠. 12살 튠이를 주워온 로랑 은 역키잡. 하이라이트 부분만 빠져습니다. 곧 업데이트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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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

<Harad Ithil>


 올모스는 <남쪽 담>에서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이실두르의 무훈을 듣고 자랐다. 올모스의 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그랬다. 남쪽 담의 아버지들은 단단하게 단련된 허벅지 위에 아들을 앉히고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했다. 참나무방패의 이실두르. 검이 없는 이실두르. 이실두르가 왕에게서 받은 캘커리 가장 남쪽의 땅에는 그 후로 대대로 이실두르의 후손들이 살았다. 캘커리 가장 남쪽에, 이실두르가 방패를 드는 대신 담을 쌓았다고 해서 하라드 이실은 <남쪽 담>이라고 불렸다. 피의 시대의 막을 내린 이실두르의 이름은 빛의 후손의 이름만큼이나 남쪽 담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의 자랑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고 건장하게 자랐고, 가슴에 두 개의 훈장을 매단 기사처럼 가슴을 펴고 걸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집 앞에 참나무를 심었다. 곧 참나무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에 늘어섰고 밭과 밭 사이에, 과수원과 과수원 사이에서 큰 그늘이 되었다. 아이들의 품을 훌쩍 넘는 참나무에는 모두 죽은 누군가의 조부와, 조모와, 또는 그보다 더 오래된 누군가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하나의 참나무마다 하나의 아이의 이름이 있었다. 아이들은 떨어진 참나무 가지를 엮어 칼 대신 방패를 만들어 놀았다. 남쪽 담의 아이들은 누구도 나뭇가지에 팔을 베여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들이 옆집 사내애 팔에 상처라도 내면 어머니들은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고 이렇게 말했다. 이실두르의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아이들이 곧 새초롬하게 풀이 죽은 채로 아버지의 무릎에 가 앉으면 아버지는 다시 이실두르의 무훈을 이야기했다. 남쪽 담의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는 방법은 대체로 그러했다. 여자애들은 어머니의 앞치마 자락을 붙잡고 어머니가 되는 법을 배웠다. 부끄럽지도 않니? 소꿉놀이에는 꼭 그러한 단어들이 등장해야했다. 

 그래서 남쪽 담의 모든 사내애들이 이실두르의 무훈을 듣고 자라듯이 올모스도 그렇게 자랐다. 그는 참나무방패의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 꼭 같이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고 아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물을 수 있는 여자와 만나 혼인했다. 여자는 올모스와 혼인한 뒤 곧 앞치마를 두를 필요도, 앞치마에 손에 묻은 물기를 훔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올모스는 이실두르가 왕에게서 받은 영지를 이어받은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고, 그녀는 영주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곧 앞치마에 물기를 훔칠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그녀의 아들들에게 곧잘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는 좋은 남쪽 담의 어머니가 되었다. 올모스는 모든 남쪽 담의 어머니들이 그렇듯,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는 그의 아내를 사랑했다. 올모스의 어머니는 남쪽 담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는 이실두르의 무훈을 듣고 자란 올모스에게 한 번도 남쪽 담의 아이처럼, 가슴에 훈장을 매단 것처럼 어깨를 펴고 자라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올모스는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듣는 남쪽 담의 사내아이가 되고 싶었다. 그는 영주의 아들이었고, 곧 영주가 될 것이었으며 자신에게 그렇게 자랄만한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올모스의 어머니는 보기 드문 레몬색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힘없는 방계 왕족의 여식이었으나 혼인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남쪽 담에 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손에 물이 묻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앞치마를 어떻게 둘러야하는 것인지도, 남쪽 담의 사내애를 어떻게 혼내야하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단지 올모스의 어머니였고 때문에 올모스를 안아주는 것으로 그녀가 모르는 모든 것들을 대신하려고 했다. 

 올모스는 그리고 그가 바랐던 것처럼, 당연하듯 자라 하라드 이실의, <남쪽 담>의 영주가 되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실두르의 무훈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남쪽 담의 사내처럼 생각했다. 올모스는 누구보다도 그의 영지에 대해 잘 알았다. 영지의 북쪽 땅이 가물지는 않았는지, 알맞은 비가 적당한 때에 내렸는지, 메뚜기 떼에 농작물이 피해를 보지 않았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올모스는 좋은 영주였고 좋은 남편이었으나 그의 두 아들 모두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가을에 들이닥치는 메뚜기 떼만큼이나 그의 장남 에아르닐을 싫어했다. 올모스의 어머니, 조모의 보기 드문 엷은 금발을 물려받은 아들은 마치 머리칼 외의 모든 것들까지도 조모를 닮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아이는 태어나 탯줄을 끊을 때부터 우렁찬 소리로 우는 대신 조용히 딸꾹질을 했고, 커서는 참나무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방패를 만드는 대신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글씨를 쓰고 놀았다. 어머니가 이실두르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야단을 칠 때면 아버지의 무릎으로 달려 들어와 무훈을 듣는 대신 방문을 소리가 나도록 닫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남쪽 담의 것은 무엇 하나도 제대로 배우려고 들지 않았다. 올모스의 눈에 에아르닐에게는 날 때부터 남쪽의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올모스는 빠르게 둘째를 가졌다. 아들이 태어나면 반드시 남쪽 담은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리라고 다짐했다. 열 달 후에 올모스가 품에 안은 아이는 아버지를 닮아 건강한 사내애였고, 탯줄을 끊어내자 저택이 떠나가도록 우렁차게 울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아이의 얼굴은 물에 분 것처럼 쪼글쪼글하고 발갰다. 올모스는 일주일이 지나면 아이의 머리칼도 맑은 갈색 빛으로 마르고 발갛게 쪼그라든 아이의 얼굴도 희고 건강하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이는 결국 올모스의 뜻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아이는 머리칼은 아버지를 닮은 갈색 빛으로 말랐지만 아이의 얼굴은 한 달이 지나도록 마른 호두 껍데기 같았다. 올모스는 일 년이 지나고 여전히 아이가 호두 껍데기 같은 얼굴로 저택 안을 걸어 다니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겨우 아이가 평생을 그 얼굴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올모스의 차남 앙그라드의 얼굴은 갓 태어난 야수의 새끼 같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여종이 떠먹여주는 건포도와 과일을 갈아 넣은 오트밀을 잘 받아먹었고 아버지를 닮은 남쪽 담의 여느 사내애처럼 건강하게 자랐다. 앙그라드는 올모스의 무릎 위에 앉아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들었다. 앙그라드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저택 안의 여종들이 모두 앙그라드의 얼굴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자 올모스는 앙그라드를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으나 손수 참나무 가지를 주워 방패를 만들어 줄 만큼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올모스는 아이가 호두 껍데기처럼 생긴 얼굴을 했더라도 남쪽 담의 아이처럼 자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금발의 어머니를 가졌을 때 그렇게 생각했듯이. 



 올모스의 장남은 열여덟이 되기 머지않아 하라드 이실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아버지가 앙그라드를 무릎에 앉히고 한 손에 손수 엮은 방패를 쥐어준 채 앙그라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동안 에아르닐은 죽은 조모의 방에서 책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불어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한 손에 앙그라드의 손을 잡은 채 조모의 방 문틈 사이로 에아르닐을 지켜보던 올모스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올모스에게 모든 조모와 닮은 것들, 금발을 한 것들, <남쪽 담>의 것이 아닌 것들은 에아르닐이 부끄러워해야하는 것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에아르닐은 깊은 눈으로 올모스를 바라보다가 다시 먼지를 불기 시작했다. 그 쯤 되면 올모스는 앙그라드의 손을 놓고 아이에게 어머니에게 가 있으라고 이른 뒤에 에아르닐에게 호통을 쳤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에게 화를 낼 때면 하루에 수십번도 더 부끄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에아르닐은 거뭇한 녹색 눈으로 한참이나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곱슬거리는 레몬빛 금발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저었다. 올모스는 해가 지나갈 때 마다 점차 에아르닐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올모스는 일찌감치 에아르닐을 포기할 예정이었으나, 뜻밖에 그의 차남 앙그라드가 지독하게 못생긴 야수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더 이상의 아들을 낳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에아르닐을 재차 포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모스가 에아르닐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이미 너무 많은 수의 질문들이 에아르닐이 어깨를 움츠리도록 만들었다. 에아르닐은 아버지에게 화가 났고 앙그라드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부자의 대화는 결국 에아르닐이 열여덟이 될 때쯤엔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에아르닐이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식탁 앞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뿐이었고, 아버지는 멀리서도 쉬이 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결국에 놓쳤다. 

 올모스의 장남은 열여덟에 되자 곧 하라드 이실을 떠났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처럼 에아르닐의 짐은 단촐했으나 무엇 하나 잊은 것이 없었다. 올모스는 떠나는 에아르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저택의 계단 위에 서서 앙그라드의 손을 잡고 뜨거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에아르닐!" 

 "오랜만이야 마세라."

 "지난 번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나?"


 에아르닐은 클레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레보노프 말야? 그래. 연회장에 들어서면 잘 차려입은 모양새를 한 레몬블론드의 젊은이는 한손에는 케인을 짚고 탁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진전이 없던걸. 말도 안 돼. 정말이야. 친국왕파에 속하는 젊은이에게는 늙은 옹호자가 많았고 그러나 대담성을 들이대는 면모는 비슷한 연배의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기에 좋았다. <남쪽 담>에서 온 에아르닐. 하라드 이실에서 온 에아르닐.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두기 좋은 발판이 되었다. 조모에게서 물려받은 레몬블론드의 머리는 그를 개중에 돋보이게 만들었고 자그맣게 하라드 이실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에아르닐은 일렁임 없는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에아르닐이 클레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가문의 위상과 수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의 오랜 선조는 훗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후손들에게 아주 단단한 발판을 물려주었음이 틀림없었다. 그가 결코 한번도 자랑스러워 해본 적 없는 <남쪽 담>은 그의 발판이 되었고, 그는 어디에 가든 하라드 이실에서 온 에아르닐이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그 어느 연회에도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때문에 에아르닐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고집했던 <남쪽 담>에 대하여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올모스는 그것이 유명하고 거창하기 때문에 아니라 남쪽 담이기 때문에 사랑했을 것이었으나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아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그가 한 번도, 그 후로도 자랑스러워 해 본 적 없는 고향을 언제 말해야하는지 알았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레몬빛 머리칼에 머물 때면 어줍지 않은 조모의 혈통을 떠벌이는 대신 간단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아르닐은 그의 고향에서보다 그의 고향을 떠나왔을 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가 열여덟 해 동안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는 에아르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에아르닐은 왜 올모스가 앙그라드에게 하라드 이실을 내어줄 수 없었는지 이해했다. 아버지는, 아무리 에아르닐을 메뚜기 떼만큼 싫어했더라도, 그의 작은 아들이 <하라드 이실의 괴물>로 불리는 것은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더욱 <남쪽 담>에 사는 괴물이 그의 비옥하고 역사 깊은 영지의 위상을 깎아내리도록 내버려두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에아르닐의 명성에 대한 모든 공로가 에아르닐 자신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쉽게 인정했으나 이미 그에게는 ‘에아르닐과 젊은이들’이라고 불릴 만큼의 많은 동지들이 있었다. 에아르닐은 수도 귀족들 중 대부분의 아들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모두 잘 갖추어 입은 블라우스 차림에 단정한 커프스를 매고 엇나간데 없이 깊은 사색을 즐겼으며 늙은이들이 눈살을 찌푸릴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위험하지 않았으나 대담했고, 이따금 무모하게 들렸으나 그 마저도 젊은이기 때문에 쉽사리 인정되었다. 때로 늙은이들은 그들이 쌓아온 기반을 무너트리지만 않는다면 젊은 사람들이 우스울만큼 쉽게 모든 것을 논하는 자세에 흥미를 느끼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에아르닐의 대담하고 공격적인 언쟁을 좋아했다. 탁 트인 목소리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했고, 대담한 언사는 마치 사람들이 지금 포커라도 한 판 시작한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실상 에아르닐의 대담함 밑에 들끓는 것은 두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젊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분노였다. 에아르닐은 그가 젊다는 것은 오래전에 깨우쳤으나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인생에 어떤 지대한 공헌도 하지 못한 어머니가 수도에 있는 에아르닐에게 잠시만이라도 돌아와달라는 편지를 썼을 때, 에아르닐은 깊이 생각지 않고 몇 년 만에야 <남쪽 담>으로 돌아가는 짐을 꾸렸다. 





 어머니는 돌아온 에아르닐의 코트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올모스가 그랬듯 가장 남쪽 담의 어머니 같은 어머니였지만 상처 받고 떠난 자식에게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어머니들의 수순이었다. 북쪽에서 묻어온 눈들이 따듯한 공기에 녹아 코트 자락과 머리칼 끝에서 톡톡 떨어져 내렸다. 어머니는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기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남쪽 담>에서는 맡을 수 없는 차갑고 추운 냄새가 얇게 곱슬거리는 머리칼 끝에서 떨어졌다. 


 “아버지 이번 달에는 비가 올까요.”


 앙그라드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벌써 수년이나 한 무리의 장정들을 지휘했을 지휘관의 목소리라고 해도 흠 잡을 데 없이 믿음직스러웠으나, 목소리와 달리 앙그라드의 말투에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아이처럼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곧잘 묻고는 했다. 마치 열다섯살 탑에 갇힌 공주처럼 앙그라드는 하라드 이실의 저택과 정원에 갇혀 지냈다. 아버지 올모스가 대대로 이어받아온 영지는 캘커리 남쪽 땅의 대부분을 덮고 남을 만큼 넓고 비옥했으나 스무해를 넘긴 청년은 한 번도 그 드넓고 비옥한 대지를 말 위에 앉아 내려다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앙그라드가 순진한 목소리로 올모스를 부를 때면 그는 높은 곳에서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고 굳은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랜 시간 검을 쥔 채 햇살 아래 검게 그을린 올모스의 손은 굳은살이 배기고 상처가 남아 뼈마디가 두드러져 있었다. 


 “해무리를 보니 곧 오겠구나.”


 에아르닐은 문간에 기대어서서 앙그라드에 답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다가 엷게 웃었다.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를 앙그라드는 스무해 동안 듣고 자랐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앙그라드를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세우지 못하는 이유를, 그리고 차마 영지 밖으로도 내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에아르닐은 알았다. 탑에 갇힌 공주처럼 여리고 풍성한 감정들은 야수같은 얼굴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고 순진하게 반짝이는 낮은 목소리는 떡갈나무의 결처럼 부드러웠다. 아 앙그라드. 방 안에서는 희미하게 장작타는 냄새와 좋은 참나무가 재가 되어 나는 향이 났고, 공기가 따듯하게 덥혀 몸에서는 물기가 흘러내렸다. 에아르닐은 문간에 기대어 서서 그의 아버지와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클레릭을 떠올렸다. 앙그라드가 가지지 못할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케인과 책을 손에 든 한 무리의 동료들은 아마 앙그라드가 평생에 걸쳐도 가지지 못할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에아르닐은 그가 떠날 때 <남쪽 담>에 대해 묻던 그의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입 안에서 굴렸다. 에아르닐은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거기에 서서 앙그라드가 가지지 못할 것들을 셈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시종이 방에 발을 들일 때 몸을 비스듬히 피해준 것만이 에아르닐이 자신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린 것의 전부였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의 얼굴을 보고 에아르닐의 등 뒤로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처럼 눈썹을 모았다. 형. 앙그라드만이 순진한 목소리로 에아르닐을 불러 세웠다.

저녁 식사는 화려하지도 조촐하지도 않았다. 에아르닐이 남쪽 담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가 돌아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잘 지냈니? 예. 수도는 어땠니?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엷게 깔린 침묵을 깼다. 여자의 목소리는 남편의 침묵과 돌아온 아들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가느다란 외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에아르닐에게로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클레릭은”


 에아르닐의 대답에 수저가 수프 보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놀라 어깨를 좁히며 잠시 떨었다가 에아르닐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수프 보울에 수저를 부딪힌 올모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수프를 입에 넣었다. 후루룩하고 교양 없는 소리가 디너 홀을 메웠다. 


 “화려하더군요.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엮어가지고 놀지도 않고요. 또래가 많아 재밌습니다.”


 올모스는 거칠게 식탁에서 일어났다. 에아르닐은 의자가 끌리고 냅킨을 집어 던지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에피타이저를 끝내고 남쪽 땅에서 자란 질 좋은 고기를 칼로 썰어 입에 넣었다. 완전히 마르지 않을 만큼 구워진 고기에서 질척하고 비린 피가 새어나와 혀를 적셨다. 여자는 식기에서 손을 뗀 채로 석상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남은 시야 너머로 앙그라드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앙그라드에게는 그것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어본 경험이었을 것이었다.

 조모의 방은 여전히 먼지로 가득 쌓여있었고 몇몇의 금으로 된 액자들과 촛대들이 사라져있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방이니 여종이 몇몇의 장신구를 팔아버렸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올모스는 그의 어머니의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서슴없이 관대해질 수 있었다. 에아르닐은 소복히 쌓인 먼지를 불었다. 등 뒤에서는 날이 선 시선이 느껴졌고 에아르닐은 돌아서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시선은 마주보지 않아도 살갗을 벨 것처럼 벼려져있어 결국에는 살갗을 뚫고 들어와 생채기를 내는데 성공했다.


 “집을 나가서 한다는게 고작 그런 놈들이랑 어울려다니는 것 뿐이었냐?”


 에아르닐은 손에 들고 있던 조모의 작은 팬던트를 내려놓았다. 


 “전 잘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영지를 욕보이면서 그런 입 놀음에 저며져 살테냐! 수치스럽지도 않으냐!”


 에아르닐의 눈은 어두운 등불에 비춰 거뭇하게 빛났다. 탁하고 깊게 가라앉은 녹색 눈은 좀 더 밝은 빛을 볼 때 만 제 색으로 보였다. 조모를 닮은 얇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주홍색처럼 보였다. 에아르닐은 눈을 내리 깐 채로 얇은 입술을 짓씹었다. 올모스는 너무 오랫동안 하라드 이실에 머물러있었다. 아마 그는 영지 밖으로 나가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이실두르의 아이들은 <남쪽 담>을 지켜야했고 그것을 마치 왕에게서 받은 훈장처럼 여겼다. 그들은 이실두르가 아니었고 하라드 이실의 어디도 전쟁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전 잘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뭘 그렇게 잘했다고 큰소리야!”


 턱이 천천히 아려왔다. 이봐요. 마음만 같으면 에아르닐의 말은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전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수치스러워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남한테 보이는 것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추잡하게 생긴 앙그라드보다 백배는 잘하고 있단 말입니다. 압니까?”

 “네 동생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냐!”

 “저한테 그만큼이라도 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뭐가 모자라 당신한테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하느냔 말입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지쳐 눈을 내리깔기에 에아르닐은 수도에서 사랑받았고 강해져 있었다. 그의 낡은 습관들이 클레릭에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을 깎아내리고 그 자리에 앙그라드의 얼굴보다 더 추잡한 상처를 새겨주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찾지 못했다. 올모스의 혀가 입 안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동안 에아르닐은 방 문 틈 사이로 밝은 초록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빛에 비춘 에메랄드처럼 엷고 순진하게 빛나는 눈은 앙그라드의 추한 얼굴에서 유일하게 봐줄만한 부분이었다. 아이의 심성이 엿보이기라도 하듯 빛나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앙그라드가 사악한 마법에 걸려 짐승보다 못한 얼굴이 되었으나 언젠가는 아름다운 얼굴의 왕자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대륙에 마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앙그라드의 유모가 분별없이 그런 부류의 동화책을 읽기 전에 올모스가 동화란 동화를 죄다 치워버린 것은 앙그라드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에아르닐은 상처조차 받지 않은 것처럼 맑게 빛나는 눈이 두 번 깜빡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에아르닐은 다시 숨을 고르고 있었고 올모스는 이제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문이 닫혔다. 앙그라드는 그 좁은 틈을 닫고 잰 걸음으로 달아났다. 올모스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놀라 문이 열려있었을 작은 틈에 시선을 두었다가 찢어버릴 것처럼 에아르닐을 바라보았다. 에아르닐은 올모스를 향해 웃었다. 젊다는 것은 분노가 들끓기에 충분한 힘을 주었다. 에아르닐은 들끓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올모스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에아르닐의 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린 오랜 모멸과 수치심들이 이제는 에아르닐이 들끓는데 좋은 장작이 되었다. 아들은 아직 자라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늙어가고 있었다. 오래되어 마르고 딱딱해진 분노들이 조모의 팬던트처럼 먼지에 싸여 기다리고 있다가 천천히 불에 익어 장작처럼 타기 시작했다. 타고 남은 매캐한 앙금들이 재처럼 가라앉는 냄새가 났다. 




 에아르닐은 삼일 뒤에 <남쪽 담>을 떠났다. 처음 온 날을 제외하면 그는 세 번이나 차려진 저녁식사에 단 하루도 앉아있지 않았다. 시종들이 가져다주는 하얀 빵 몇 덩어리가 그가 삼일간 식사한 것들의 전부였다. 앙그라드와 채 몇 인치도 차이나지 않는 몸으로 버티기엔 적당한 양의 식사가 아니었겠지만 시종들 중 누구도 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삼일동안 마치 집에 누구도 찾아온 적 없는 것처럼 지냈다. 여자는 남편의 심기가 흐트러진 까닭을 쉽게 알아차렸다. 에아르닐의 목소리는 칼처럼 벼려져 있었고 에아르닐은 눈을 내리깔고 아버지의 말을 흘려듣는 대신에 이를 짓씹어 뭉개며 소리칠 줄 알았다. 여자의 눈에 아들의 녹색 눈이 천천히 일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폭풍이 도착하기 전 남쪽 끝의 짙은 활엽수가, 참나무들이 그 꼭대기부터 천천히 몸을 부대껴 흔드는 모습 같았다. 폭풍이 불어올 것 같았다. 형. 에아르닐은 처음 남쪽 담을 떠날 때와는 달리 어깨를 감싼 검은 여우털 망토에 말 한 필만을 데리고 있었다. 형. 저택의 문간에 서서 앙그라드는 어두운 문의 그림자 안에 얼굴의 반을 숨기고 에아르닐을 불렀다. 엷은 에메랄드 같은 눈이 두 번 깜박거렸다. 앙그라드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문틀을 더듬고 저택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에아르닐의 까맣게 침잠된 눈이 앙그라드를 바라보다가 그는 말 위에 몸을 얹었다. 그는 충분히 젊었으나 지혜롭기에는 부족했다. 에아르닐은 입술을 축이고 가늘게 신음했다. 그는 결국 모든 것에 상처를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 원제는 <남쪽 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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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



 정민회의 손은 물고기처럼 피아노 위를 유영했다. 손을 움직일 때 마다 불거져 나오는 뼈들이 등 위로 불쑥 튀어나온 지느러미 같았다.피아노의 맛. 머릿속에는 그 단어만 맴돌았다. 피아노의 냄새. 피아노의 감촉. 피아노의 소리. 피아노의 느낌. 손 끝과 눈과 귀에 닿는 피아노의 모든 것이 생생했다. 오늘은 비가 왔고 비오는 날에는 피아노에서는 습한 나무의 냄새가 난다. 지금 막 대패질을 끝낸 듯 매끈하게 나무를 다듬는 과정에서 나무에서 배어나오는 내음. 마치 젖은 색연필의 물컹한 내피에서 나는 냄새. 번드르르한 피아노의 감촉은 희고 검고 차갑다. 손이 닿는 자리마다 단지 약간의 온기만이 감돈다. 지문을 찍어내리듯 건반의 가장자리만이 홈이 패이듯 문들거리는 느낌도 기억하고 있다. 하프처럼 현이 조금 울리고 건반의 나무가 딱딱 떡떡 거리며 소리를 낸다. 매끄러운 스케일과 벼락처럼 내리치는 양손의 화음. 리스트의 초절기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땀에 젖은 검은 턱시도가 등줄기를 따라 축축하게 늘어 붙었다. 슈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의 현이 끊어지는 소리는 바이올린의 현이 끊어지는 소리만큼이나 분명하게 들렸다. 축축하게 젖은 실크 셔츠가 목을 감싸 그는 금방이라도 하얀 셔츠에 목을 졸려 죽을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는 셔츠에 목을 졸리지 않아도 금세 죽을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고 늘 걱정이 될 만큼 비쩍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마르고 긴 다리가 땅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해 보일만큼 입술은 푸르죽죽했고 희고 큰 손은 매끄럽게 피아노 위에 얹어있었다. 단순한 그리고 단순한 디자인만큼이나 쌀 것이 분명한 은색 커프스단추가 번들거렸다. 으레 그렇듯 무대 주변의 공기는 차가웠다. 한 층 내려선 객석의 공기도 차가웠고 노교수가 펜을 굴리며 앉아있는 책상 앞의 공기도 차가웠다. 교수는 물을 삼켰다. 그의 손등 위에는 푸르스름한 강줄기가 흘렀다.

 정민회는 현이 끊어진 피아노를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의 시선은 차가웠다. 정민회군 그게 끝인가. 민회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손끝에 아직도 나무의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자네. 베토벤이 어떤 사람이었는 줄 아나”


 정민회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는 다음말을 아꼈고 정민회는 고개를 숙인 채 교수의 말을 받아들였다. 정민회의 피아노는 폭력적이었다. 열아홉의 호로비츠 강이 흐르는 마른 손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쇼팽처럼 비쩍 마른 몸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힘으로 피아노를 때려부쉈다. 베토벤처럼. 귀가 먹어가던 베토벤처럼 그는 피아노를 박살냈다. 피아노의 현이 끊어지고 손가락 끝의 지문이 건반 위에 문대어졌다. 


“나는 자네가 미친 것 같네”


 정민회는 웃었다. 그렇습니까. 그런가요.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은 채 교수를 바라봤을 때 교수는 책상 모서리를 볼펜으로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D교수는 민회를 처음 봤을 때 그를 열아홉의 호로비츠라고 불렀다. 그 다음에는 동기들이 그를 말라깽이 쇼팽이라고 불렀다. 교수는 정확히 이년 뒤에 그를 아무도 없는 작은 콘서트홀에 세워놓고 말했다. 다만. 


 “자네가 치는 피아노도 자네만큼 미쳤는데, 그나마 나은게 있다면 괜찮게 미쳤다는 점이야”


 그래도 기억하게. 그렇게 피아노를 치다가는 자네 손도 박살날걸세. 정민회는 입술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까지 들어차 가슴 언저리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하려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민회는 다시 웃었다. 이미 박살나고 있습니다. 목구멍 끝에 차오르던 말이 다시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먹으면 안되는 말을 집어삼켜 버린 것처럼.




아가미





 “형”


 정민형은 아주 약간 낡은 교복을 입고 컴퓨터가 놓여있는 구석자리로 들어왔다. 민회는 아빠다리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가 의자를 돌려 앉았다. 아주 느린 버퍼링으로 호로비츠의 동영상이 흘러갔다. 단칸방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었다. 미처 꺼놓지 못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정민형은 인상을 지푸렸다. 민형이 민회 앞에 불쑥 하얀 공고문을 건넸다. 싸구려 잉크로 아무렇게나 복사한 것이 눈에 보이는 공고문이었다. 


“이게 뭔데”

“집 밀어버린다고”


 정민회는 하얀 종이를 받아들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희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시험지로나 쓸법한 얇고 거친 갱지였다. 똑똑한 정민형은 어디선가 이 공고문을 주워왔거나, 누가 주고있는 것을 가져왔을 것이다. 아니면 벽에 붙어있는 공고문을 떼어왔을지도 몰랐다. 


 “밀게 어딨다고 밀어”

 “내가 어떻게 알아. 어쩔건데”

 

 민형의 말에 민회가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쌍커풀 없는 큰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 이게 봐주니까.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자 그제서야 민형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오씨.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에 민회가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렇게 꼬우면 나가서 혼자살지 그러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가까스로 내려갔다. 구역질을 참아내는 것처럼 정민회는 잠깐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열렸을때, 그는 다시 차분해졌다. 


 “이번 분기 회비. 급식비. 부교재값.”


 하얀 봉투 두 개와, 교재값의 만원짜리 지폐 몇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민회는 자리를 일어났다. 여전히 낡은 컴퓨터 안에서는 카라얀의 피아노 협주곡이 흘러나오고있었다. 민형은 민회의 등 언저리를 유심히 눈여겨봤다. 앞으로 조금 굽은 등, 비쩍 말랐는데도 근육이 잡힌 목. 칼에 긁힌 것처럼 여기저기 다치고 깨진 팔뚝의 흉터들. 정민회는 좋은 가장은 아니었지만 가장이었다. 


 “엄마 약값”


 하나 더, 하얀 봉투가 책상 위에 놓였다. 턱하고 메마른 소리가 났다. 다른 봉투들에 비해 보기 무서울 정도로 두꺼운 봉투를 내려놓는 정민회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엄마 병원 이제 내가 같이 못가니까 니가 가서 내. 손목 안쪽의 힘줄이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민회는 민형을 지나쳤다. 지나가는 형의 얇은 하얀 티셔츠, 무릎을 덮는 반바지에서 희미한 나무 비린내가 났다. 민형은 방금 전까지 형이 앉아있었던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여기저기 글씨가 벗겨져 나간 키보드 위를 손으로 쓸었다. 카라얀. 클래식은 클래식 기타밖에 모르는 민형도 알 정도로 민회는 카라얀을 좋아했다. 카라얀. 피아노. 컴퓨터는 아주 낡았고, 키보드도 그랬다.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세월만큼 민회가 두드렸던 키보드 위에는, ㅋ, ㄹ, ㅍ, ㅇ, ㅑ, ㅣ. 남들은 흔히 찾지 않는, 치지 않는 글자들이 벗겨져 나갔다. 정민형은 정민회가 얼마나 피아노를 좋아하는지 알았다. 민형은 구깃구깃한 만원짜리 몇장을 지갑 안에 넣고 가방 속에 넣은 뒤 가방 지퍼를 닫았다. 두 개의 하얀 봉투를 앞주머니에 넣고, 하얀 봉투 하나는 옷장 안쪽에 넣었다. 


 민형은 하얀 봉투들을 모조리 숨기고 민회가 켜놓은 사이트를 닫다가 창 밖에서 들어오는 담배연기에 콜록거렸다. 민형은 보란 듯이 콜록거렸지만 담배연기는 창문을 넘어 보란듯이 계속 스며들어왔다. 민형은 바람한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커튼을 닫았다. 커튼의 뒷면에는 늘 담배연기가 배어있었다. 민회는 벽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은 절대 피지 않을 것 같은 제일 값싼 국산 담배. 민형은 그 냄새가 싫었다. 아저씨들이나 피울 법한 담배냄새, 학교 친구들은 그런 담배를 피지 않았다. 친구들 중 반절정도는 담배를 피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형들도, 그런 담배는 피지 않았다. 말만 들어도 멋있어 보이는 그러니까 말보로나, 에쎄 같은 외국 담배를 피웠다. 민형은 낡은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서 무릎 안에 얼굴을 묻었다. 민회에게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민회가 진 몫을 다 지기에 민형은 그 나이 또래 애들만큼 평범하게 어렸다. 



 “집 민대 민회야”


 알아. 민형이 잠든 사이에 엄마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 종일 집안에만 앉아있는 양반이 어디서 그런 말은 주워들어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웃겼다. 민회는 단칸방의 끄트머리, 현관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엄마는 민회가 담배 연기를 내뱉을 때 마다 기침을 하지 않으려는 듯 안으로 기침 삼키는 소리를 냈다. 기침을 하는 것조차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아까 정민형이 말해줬어”

 “민형이는 어떻게 알았대?”

 “어디서 주워들었겠지”


 엄마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칠 때 마다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어떡하지. 그렇게 묻고있는 것 같았지만 민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민형이가 어쩔거냐고 하더라”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아무말도 안했지”


 민회는 현관 바닥에 담배를 비벼끄고 돌아앉아 웃었다. 할 말이 있어야 하지.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다. 할 말이 있어야 하지. 나도 할 말 좀 있어봤으면 좋겠다. 속이 답답하게 미어져왔다. 


 “민회야 우리...”

 “돈 없잖아”


 희미하게 웃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정민형. 엄마 약값 제대로 내고 병원에서 제대로 계산하고 와. 민형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정민형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엄마를 잃을 사람처럼 일그러졌었다. 


 “일단은 좀 버텨봐야지”


 부서질 때 까지. 


 “자 엄마”

 

 “내일 병원 잘 다녀오고”

 기억하게. 자네 손도 박살날걸세. D교수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저 밑바닥을 긁었다. D교수는 더 이상 김민회를 호로비츠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닫게 된 뒤로 민회는 그것보다 더 포악한 피아노를 쳤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니시모를, 아주 약하고 갸녀린 음을 치던 피아니스트. 폭력적이고 강렬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였을 것이다. 교수는 더 이상 민회에게 호로비츠라고 말하지 않았고 민회는 그를 보며 더 포악한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의 현이 뚝뚝 끊겨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김밀러가 말했다. 미친 새끼야. 그만 때려부수라고. 불을 끈 단칸방은 아주 비좁았다. 소싯적에는 이것보다 큰 집에 네 식구가 나란히 누워 여름 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거실에는 오래된 풍금이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주 풍금을 잘 치는 여자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리랑도, 꽃밭도, 야기염소도 칠 줄 알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있는 단칸방을 바라보다가 민회는 집을 나섰다. 비좁은 골목길에는 달리 갈 곳도 없었다. 


 벽에 기대어 돗대를 입에 물었다. 손에는 구겨진 상자 하나와 뜯지 않은 새 담배갑이 같이 들려있었다. 금방이라도 다음 개피를 물 수 있도록. 교수님. 괜찮아요. 이미 다 박살났어요. 이제는 집도 박살날거에요. 하늘과 맞닿을 것처럼 솟아오른 달동네 위로 달빛만 쏟아져 내렸다. 달동네는 달이랑 가까워서 달동네인가봐. 수레에 이삿짐을 싣고 오는 내내 어린 민형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종알거렸다. 그게 듣기 싫어 민형의 손을 뿌리쳤을 때 민형은 언덕빼기에서 굴러 무릎이 깨졌다. 


 정민회는 호로비츠가 되고싶었다. 열아홉의 호로비츠.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시간이 지나는 동안 호로비츠도 사라져 말라깽이 쇼팽과 귀먹은 베토벤이 피아노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민회는 피아노를 부수고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동안 음도, 악보도 천천히 부서졌다. 이제 남은 건 손과, 집 뿐이었는데 아마 그것들 조차 곧 박살나서 없어질 것이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민회는 어두워진 달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위로, 위로 올라가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은 달동네 뿐이었다. 점점 달만 가까워졌다. 이제는 보기힘든 주황색 가로등 불빛 사이를 천천히 걸어올라가는 발걸음 뒤로 그림자처럼 담배연기만 남았다. 박살날걸세. 교수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선생님이 치는 피아노는 무서워요. 입시과외순이도 말했다. 민회는 교수에게도, 과외순이에게도, 민형과 엄마에게도 해줄 말이 없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해줄 말도 없었다. 피아노만 남아서 헛구역질 처럼 식도 아래로 집어삼킨 말들을 대신했다. 정민회는 계단의 녹슨 쇠파이프 난간 위에 두 손을 올리고 피아노를 쳤다.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 소리들이 손 끝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가미를 뻐끔거리면서 허덕이는 물고기처럼,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도 이제 서서히 굳어 가고 있는 참이었다.



community 한새동. 정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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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rent Crojane

VINCENT 


◈ 이름 : 로랑 크로잔 Laurent 

◈ 나이 : 28

◈ 신분 : 귀족 


◈ 키/몸무게 : 186 / 75 

◈ 외모 : 회색머리칼, 옅은 청회색 눈. 허리에 약간 못미치는 길이의 장발을 목덜미 뒤에서 가지런히 묶었다. 전체적으로 머리나 눈의 색깔때문에 색이 옅은 느낌을 주지만 이목구비가 진하고 남성다운 얼굴이기 때문에 생기있고 호쾌해보인다. 표정을 짓지 않아도  웃는 것 처럼 보이는 호상인데다가 늘 기분좋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의뭉스럽게 웃고 있다. 눈동자의 색이 연하기 때문에 눈동자를 보아도 사람의 의중을 알기 어려워 보인다. 검술로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있는 몸이지만 무겁지 않도록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 


◈ 성격 : 유쾌하고 호전적. 일견 속을 알 수 없는 젊은 사자. 사랑받고 자란 듯 특유의 여유로우면서 제멋대로인 성미가 돋보이면서도 세상과 인간관계에 잘 적응한다. 약간의 거만한 성미를 잘 숨기면서도 이따금 권위를 내세워야 할 때에는 드러내기도 한다. 나이에 비해 위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머리를 쓰는 일, 손익의 계산이나 암암리의 음험한 분위기나 견제를 읽어내는데에 탁월하고 말에 능하다. 타인 사이 또는 타인과의 갈등이나 견제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즐기는 편으로 경쟁에 거부감이 없고 호전적이다. 매사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으며 타인과 쉽게 가까이 지내고 인간관계 자체를 즐긴다. 호불호의 감정표현이 확실하고 뚜렷한 편. 주변을 자신에게 맞추어 어울리고 이용할 줄 알면서도 한 번 정이 깊어지면 따듯하고 의리 있는 모습을 보인다.


◈ 기타사항 :

1. 전대 크로잔 가주의 사남. 막내아들. 

2. 사냥과 승마를 즐긴다. 사냥시에는 장발을 높이 올려 묶음. 

3. 예술, 음악 등의 변덕스러운 후원자. 지금까지 후원했던 예술가들과 알고지내고 있으며 대다수의 귀족 남성을 주로 하여 여성들을 포함한 소규모의 사교 모임도 이따금 주최한다. 예술과 관련하여 이따금 미술품을 경매하기도 함. 

4. 술이나 시가 등의 쾌락재를 빈번하게 즐긴다. 성적으로도 오픈마인드.

5. 옷차림에 있어서는 유행을 잘 따라잡는 편이나 이따금 방탕아처럼 입고 돌아다니기도 함. 

6. 크로잔 가의 아들 답게 검술 실력은 보통을 넘는다. 고전적인 교본을 따른 것 같은 검술을 사용함. 힘과 기술의 밸런스가 좋다. 

7. 가족에게 약하다. 

8. 주변에 여러 경로를 통해 얻은 친구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많고, 본인도 대다수의 친구들과 지내는 것을 즐겨함. 


◈스탯 : 힘/순발력/기술/유연성 30/20/35/15

◈ 캐릭터 한마디 : "받은 만큼 돌려드려야지 어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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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iel Garrett

OPERATION DOXA


*이름(영문): 나다니엘 가렛(Nathaniel Garrett) 

*생일/나이: 1981.11.15. / 23

*성별: 남

*구분: 연방요원 


*외모: 신장 6.2피트(약 189센티미터), 잿빛 눈. 앵글로 색슨. 갈색 머리는 군부 시절처럼 짧게 잘랐다가 서서히 길어지고 있는 중. 전체적으로 색과 인상이 뚜렷하지 않음. 골격이 크고 오래 훈련된 몸이라 단단함. 체력이 매우 좋다. 대체로 무표정한 인상이지만 사관생도 시절부터의 습관 때문으로 말을 붙이기 시작하면 곧잘 웃는다. 


*성격: 신중하고 생각이 깊지만 사관학교와 군대를 거치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음. 단순한 명령하달식 관계에 익숙함. 성실하고 책임감 있으며 기본적으로 타인을 대할 때는 더도 덜도 않고 온화하다. 천성이 순함. 상냥하진 않지만 주의 깊게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며 필요한 말은 하고 잘못된 부분은 능동적으로 수정한다. 경험상 장난이나 농담을 뱉고 어울리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 어색해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아님.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 약하다. 잔정이 많으나 행동하는 것이 어설픔. 


*무기: 총(M945). 주로 사용하는 권총이외에도 저격총, 나이프 등 군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무기는 집히는 대로 사용 가능함. 



*기타사항: 

- 공군 출신. 군에서 조종 훈련을 마친 뒤에 비행사단 대신 특무부로 재배치됨. 군부의 엘리트.

- 호칭은 나단. 풀네임은 사관생도 시절에 혼날 때만 들어봤다.

- 직접적인 전투 경험은 아직 없으나 살상 훈련에는 익숙함. 뒤쳐진 동료를 챙기는데 능숙하다. 믿음직한 사냥꾼.  



*공헌도:3

*능력도:3

*계급: 선임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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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en Flaubert

OPERATION DOXA


*이름(영문): 이든 플로베르(Eden.H.Flaubert)

*생일/나이: 1972.09.06 / 32

*성별: 남

*구분: 에스퍼(프로텍터)

*직업: 교수

*외모: 186cm. 76kg. 흔한 더티 블론드에 깊은 녹안. 뺨 위에 약간의 주근깨가 있음. 게르만계 아버지를 둔 강단있는 몸집. 쿼터백은 해본 적 없어도 하키는 해봤을 것 같은 평범한 미국식 남성. 한번 보면 기억이 날 듯 말 듯 순하게 생긴 인상. 


*성격: 낙천적이지는 않으나 적당히 밝고, 시끄럽진 않지만 지나치게 조용하지도 않은 편. 잘 놀고 잘 웃는 애주가, 애연가. 사람 관계가 쉽게 깊어지는 편은 아니지만 적당히 어울리기 좋은 성격. 농담이나 장난도 곧잘 건넨다. 



*능력: 예지. 앞으로 12시간 내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지한다. 많게는 48시간까지 잇달아 사용 가능하다. 뇌내 영상으로 예지가 진행되며 기억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무기: 보조용 권총.


*기타사항: 

- 두 살 연상의 동성 파트너와 동거중. 

- 대침투 당시 도그마의 제거를 선택했던 프로텍터.



*공헌도:3

*능력도:4



*분류: Semi NPC / 시즌 1 캐릭터 (메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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