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태양이 새겨진 깃이 보여요.”
식탁 위에는 흰 빵과 생선살이 들어간 스튜와 갓 긁어낸 치즈 조각들과 한 컵의 우유 그리고 두 잔의 와인이 올라와 있었다. 작년에는 모든 농사가 풍년이었다. 하라드 이실의 농민들은 남은 포도들로 다른 해보다 많은 포도주를 담가 다른 해 보다 많은 포도주를 영주에게 바쳤다. 아버지. 아들은 한 번 더 아버지를 불렀다. 식탁 위에서 모든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멈췄다. 여자는 느리게 일어서는 남편을 보았다. 남자는 느리게 식탁 위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태양이 새겨진 왕의 깃을 들고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창을 열었다. 쾅. 두 창문이 바람에 부딪혀 활짝 열렸고 남쪽 땅에는 따듯한 봄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남자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멀고 좁은 참나무 길의 끝에서 깃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의 깃이었다.
“그래 보이는구나.”
남자의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의 아내는 그것이 꿈으로 부푼 남자의 떨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창틀을 짚은 못생긴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갈색으로 그을리고 검으로 단단해진 뭉툭한 손끝이 힘을 주어 창틀을 쥐고 손등에서 힘줄들이 불거져 나왔다. 남자는 오랫동안 창 밖을 보고있었다. 왕의 깃발이 너무 가까워져 창으로는 그 깃을 볼 수 없을 때까지. 앙그라드는 남자의 등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 무엇에도 크게 동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다. 남자의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어딘가 모르게 몸이 무거워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남자의 두 발은 언제나 힘있게 땅을 누르며 걸어다녔다. 앙그라드는 아버지의 등이 설렘으로 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년이 넘은 남자는 이제 꿈으로 부풀어있었다. 잠자리에서 남자가 해주던 오래된 이야기들을 기억했다. 캘커리의 루마난과, 우리의 오래된 왕과, 참나무 방패를 든 이실두르와, 하라드 이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 앙그라드는 남자가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어린 용병 소년처럼 가슴벅차하며 그 모든 것들을 용맹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앙그라드는 어린 소년이었고 <남쪽 담>의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그의 아버지도 어린 소년이 되었다. 충실한 하인 도니제티가 숨을 헐떡이며 홀에 들어왔을 때, 올모스는 아무말도 없이 창밖을 향해있던 등을 돌려 재빠르게 걸어 나갔다. 누구도 그 몸에서 나올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날렵함으로 남자는 무겁고 단단한 몸으로 복도와 계단을 달려나가 왕의 사신을 맞았다.
무거운 갑옷 아래로 땀을 흘리는 기사에게 여자는 차가운 포도주를 건넸다. 하라드 이실의 풍요는 왕의 서신 앞에서 아이처럼 떨고 있는 남자의 등으로 인함이었다. 기사는 가장 호화롭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안한 객실을 제공받았다. 왕의 깃을 등에 단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왕은 5일 이내로 영주들의 회신이 돌아오리라 믿고 계십니다.”
“약속한 시일 내로 내가 클레릭에 당도할 것이오.”
기사는 한 병의 포도주를 들이켰다. 하라드 이실은 캘커리의 여러 땅 중에서도 가장 멀고 가장 큰 땅 중의 하나였다.
“나는 수도로 가오.”
메이로디는 눈을 감았다. 메이로디에게 수도는 머나먼 환상의 땅 같은 곳이었다. 열여덟이 된 아들이 어느날 훌쩍 마차에 짐을 싣고 떠난 곳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한 표정에 메이로디는 한참을 울었다. 때문에 메이로디는 올모스가 수도로 갈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비록 그곳에 그들의 왕이 있었을 지라도. 수도는 열여덟 된 아들이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날 때 선택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안에서 올모스와 에아르닐은 같은 땅을 밟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올모스는 <남쪽 담>의 사람이었다. 올모스의 옷깃에서는 축축하게 젖은 흙내음이 났고, 씨를 뿌리는 계절이면면 남쪽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내음이 옷깃에서 흘러나왔다. 메이로디는 눈을 감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너무나 경쾌하고 확신에 차있었다. 왕의 서신을 받은 남자는 수도에 자신의 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듯 보였다. 메이로디는 부디 무사하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손에서 떠난 클레릭의 아들이. 그리고 한 평생을 올모스와 에아르닐 사이에서, 사랑과 사랑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무엇 하나도 제대로 사랑하여 완성시키지 못한 그녀의 인생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반목하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못했던 그녀의 사랑이 인생과 함께 볼품없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참나무가 우거진 길 위를 달려 나가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왕의 기사는 호화로운 침대 위에서, 그녀의 아들이 잠들었던 것보다도 훨씬 호화로운 침대 위에서 포도주에 취해 곤히 잠든 밤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가라앉은 바람을 울렸다. 어둠에 가리워 남자의 등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말발굽 소리는 한참이나 더 고요한 마을을 울렸다. 저 멀리서 가난한 영세농민의 집에 잠시 누렇고 고요한 불이 들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불이 사그라들었다. 메이로디는 다시 눈을 감았다. 봄이었으나 밤은 여전히 서늘했다. 남쪽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메이로디는 자리에 서서 얼마간 울었다.
올모스가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의 충실하고 소박한 하인은 말했다.
“도련님의 이름이 곧 잘 오르내리던데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 도니제티의 입은 올모스의 눈빛에 곧 웃음기 없이 닫혔다. 수도에 도착한 뒤로 그들의 마차 차창너머로 들을 수 있었던 이름 중에는 에아르닐의 이름이 있었다. 올모스는 여전히 그의 말뼈다귀같은 아들의 이름 앞에 하라드 이실의 이름이 박혀 있음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의 어떤 곳에서도, 그 어떤 기품에서도 하라드 이실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도니제티는 왜 올모스가 클레릭까지 직접 행차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올모스의 충실한 하인이었고, 도니제티의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도니제티는 오래전부터, 올모스의 장남이 태어나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올모스가 에아르닐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야 한복판에서 마치 사냥감의 표적처럼 빛나는 레몬색 머리칼은 에아르닐을 남쪽 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에아르닐의 그 모든 성정들은 남쪽 담의 투박하고 거친 면모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올모스는 수도에 온 뒤로 에아르닐의 이름이 화두에 오를 때 마다 미간을 좁히고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도니제티도 주군의 불편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은 바 아니나, 에아르닐의 이름은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대부분의 변방 영주들이 영지의 관리를 뒤로 하고 직접 클레릭에 오기 보다는 아들을 영주 대리인으로 수도에 보내는 쪽을 택했다. 캘커리 변방의 농경지에서 자란 도니제티는 본래 보는 시야가 작고 소박한 사람이었음으로 올모스의 수도 상경 이면에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수도에 오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왕에게 귀족 회의 참가 의사를 보인영지의 영주 대리인들이 속속 클레릭으로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니제티는 하라드 이실의 저택에서 지친 표정으로 앉아있을 마님을 떠올렸다. 올모스의 클레릭 상경에는 왕을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의미 이면에 에아르닐을 하라드 이실의 정면에 내세울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올모스의 장남을 하라드 이실의 대변인으로도, 차기 영주로도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가 되었으나 도니제티도 올모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올모스가 더욱 에아르닐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그는 에아르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고, 하라드 이실에 걸맞는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올모스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선택해야했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을 싫어했으나 추하고 두려운 앙그라드를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앉힐 사람은 아니었다. 올모스의 앙그라드에 대한 사랑이 자식을 향한 사랑이었다면 앙그라드를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염두에 두지 못함은 <남쪽 담>의 영주로서의 긍지였다. 올모스는 혹여나 <남쪽 담>의 영주가 그 추한 얼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참지 못할 남자였고,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한평생 그의 삶의 부목이 된 영지와 긍지가 더 중요한 남자였다. 도니제티는 소박하고 작은 남자였지만 올모스의 분노가 에아르닐에 대한 부정과 경멸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아르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들 사이에서 점차 부풀어 올랐음을 알고 있었다.
도니제티는 말없이 주군의 쪽빛 예복을 정돈하고 따듯한 수프와 흰 빵으로 된 식사를 준비했다. 도니제티는 에아르닐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올모스의 낡고 충실한 가신이었지만 올모스의 심기를 건드리기 보다는 제 심신의 편안함을 먼저 생각할 만큼 소탈한 사람이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는 식사를 마치고 쪽빛 예복에 쪽빛 망토를 두르고 원탁 회의에 나섰다. 이실두르가 전쟁의 선봉에 섰을 때 그는 쪽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올모스는 예복에 긴 칼 대신 나무로 만들어 검게 칠을 입힌 방패를 차고 손 끝이 잘린 장갑을 꼈다. 그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왕께서 행차하십니다.”
올모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들어오는 왕을 보고 있었다. 왕은 젊고 건강해보였다. 왕은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왕의 목소리는 왕의 목소리였다. 올모스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여는 그들의 젊은 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오래된 무훈을 생각했다. 루마난과 이실두르와 캘커리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북쪽 땅의 호수가 말랐다는 사실은 영민들 사이에 천천히 전해졌던 소문이었다. 올모스는 그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는 소박하고 투박한 넓고 광대한 <담>의 영주였다. 그는 디올라의 이름도, 레보르프와, 오나하의 이름도 들어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악의 근원’ 역시도 이실두르의 무훈담에서 그 때문에 싸웠다는 이름을 들어본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정보도, 귀족들의 어떠한 의문들도 올모스가 그 자리에 참석한 이유를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하라드 이실은 언제나 왕의 땅이었다. 왕이 하사한 땅이었기 때문에 왕의 등 뒤에 서있는 땅이었다. 설사 올모스 홀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기 때문에 그의 의지는 하라드 이실의 의지가 되었다. 하라드 이실은 캘커리의 담이었다. <남쪽 담>. 태초에 하나의 방패에서 시작한 것처럼 하라드 이실은 방패와 같이 존재했다. 그는, 하라드 이실은 방패처럼 모든 것을 맞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직 젊고 건강한 캘커리의 왕을 위해서.
“하라드 이실은 언제나 전하의 등 뒤에 서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혹독한 시대이든 <남쪽 담>은 왕이 거두실 때까지 왕의 땅입니다.”
영주들이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뜨는 동안 올모스는 왕에게 말했다. 그의 의지를 전달하는데 얼마나 많은 하라드 이실의 역사와 세월이 담겨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세월을 대대로 이어온 <남쪽 담>의 영주들의 긍지가 담겨있는지 왕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하라드 이실은 명망 있는 땅이었지만 캘커리의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맙네. 그렇게 말하는 왕에게 올모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왕은 아직 젊었고 올모스는 왕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의 투박하고 소탈한 정신으로는 일굴 수 없는 것을 왕은 짊어지고 있었다. 확신에 차있는 왕의 목소리에서 올모스는 그가 강직한 왕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확신은 때로 위험했지만, 어떤 일도 확신 없이 치러지는 것은 없었다.
“에아르닐 안에 있나?”
마세라는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는 시가지 외곽에 위치한 이 작은 집에서 문을 두드리면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아르닐의 집에는 집사도, 시종도, 하녀도 없었다. 주에 두 번 예전에 어느 귀족 집안에서 오랫동안 하녀로 일했다던 여자가 와 스튜를 끓여놓고 빨랫감을 말리고 집안을 청소하는 것이 전부였다. 집은 좁고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집을 지탱하는 나무들은 손질이 잘 되어 아직 쓸만하게 보였다. 그것만이 다행인 집이었다. 저택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했다. 수도에서 지내는 명망 깊은 귀족 가문 자제의 거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탈했지만 마세라는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렴풋이 에아르닐의 입지가, 명망 깊은 하라드 이실의 영주인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에아르닐이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더라도. 에아르닐은 수도에서 그리 풍족한 편은 못됐고 달에 얼마간 받는 돈과, 그를 지지하는 몇몇의 귀족들이 베푸는 호의의 대부분을 책을 사들이느넫 써버렸기 때문에 시가지 끝에 위치했다고는 하더라도 이만한 조건의 집은 그에게 괜찮은 축에 속했다. 그가 자신의 집에서 머물기를 권유하는 귀족들의 제안의 대부분을 거절했다면 더욱 그랬다. 마세라는 문을 두 번 더 두드렸다.
문 안쪽에서 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을 때 그의 친구는 흰 목면으로 된 셔츠에 옅은 황갈색의 바지를 입고 서있었다. 옷감 여기저기에 간 주름을 보고 마세라는 웃었다.
“자다 일어났나?”
“전혀.”
마세라는 뜨거운 아침햇살을 피해 에아르닐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에아르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었다 놓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등 뒤에서 문을 닫고 좁은 응접실에 발을 들였을 때, 마세라의 손에는 방금 전 까지 에아르닐이 읽고 있었던 책이 들려있었다. 마세라는 책의 표지와 내용을 훑고는 예의 그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왕들의 역사>라.”
에아르닐은 대답 대신 응접실의 문간에 머리와 어깨를 기대고 섰다. 아직 책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세라는 책을 덮어 책이 원래 있던 모양대로 소파 위에 고스란히 올려놓고 주머니에서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내어 들었다. 마세라는 그 뒤에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과 종이를 보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께서 네가 여전히 우리 집에 머무는 줄 아는 모양이야.”
“마지막으로 서신을 한 게 마세라가에서였으니 그렇지.”
“에아르닐.”
좀 더 자주 연락을 해 야하지 않겠냐는듯한 질타가 섞인 부름이었다. 에아르닐은 그의 질타에 수긍하기 보다는 책을 집어 들고 소파에 앉으며 마세라를 바라봤다.
“실상 거처가 자꾸 바뀌어 마땅히 서신 할 곳도 없으셨을 거네.”
에아르닐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서신을 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수도에 올라와 얼마간 에아르닐은 마세라가 베푸는 호의에 의해 마세라가에서 지냈다. 그의 집안은 하라드 이실만큼 명망 깊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만한 호의를 베풀기에 충분할 만큼 부유했다. 그 뒤에도 에아르닐은 그에게 자신의 집에서 지내기를 요청하는 귀족들의 저택에서 얼마간씩 객실에 머무르며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저택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작은 집을 얻기 전의 일이었다. 에아르닐은 다리 위에 책을 올려놓고 마세라의 손에 들린 쪽지를 받아들었다.
─ 너의 아버지께서 수도로 가신다.
수도에서는 원탁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것이 비록 온 캘커리의 국민들에게 공표되지는 않았더라도 귀족들의 사회에 몸담고 있는 몸으로서, 그리고 가르완의 곁에서 그의 정책을 지켜보는 입장으로서 에아르닐은 귀족들의 원탁회의에 대해 모르고 있는 바 아니었다. 그리고 왕의 기사들이 태양이 그려진 깃을 등에 매달고 떠났을 때, 그 뒤에도 하라드 이실에서는 에아르닐에게 그 어떤 전령도 보내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어떤 자리에 있어서도 하라드 이실의 이름을 내걸고 에아르닐을 드러내게 놓아둘 사람이 아니었다. 하라드 이실의 이름만이 클레릭에서 조차 에아르닐의 발목을 올가미처럼 잡고 있을 수 있었다. 너의 아버지께서 수도로 가신다. 에아르닐은 표정이 없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메이로디는 한 때 하라드 이실의 미녀라고 불렸던 여자였다. 다른 모든 소작농들이 그렇듯이 하라드 이실은 풍족했으나 그럼에도 몇몇의 농부들은 가난하고는 한 법이었다. 사실 메이로디보다는 그녀의 언니가 훨씬 더 우아하고 화려하게 생긴 미인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아름답고 화려한 미인을 옆 지방 영주의 첩으로 보냈다. 모두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형편은 나아졌고, 언니는 약간의 흰 눈을 제외하면 건강한 갈색 머리칼에 아름다운 비녀를 틀어올리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형편이 나아졌을 무렵에 가장 하라드 이실 다운 여자였던 미녀 메이로디는 올모스에게 청혼받았다. 올모스는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고, 그들의 생활은 이전과 비할바 없이 나아졌다. 동네 모든 농부들을 새초롬하고 당찬 한마디로 웃게 만들었던 여자는 그렇게 볼품없이 사라졌다.
에아르닐은 표정 없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어떠한 심정으로 짧은 전보를 보냈는지 에아르닐은 짐작했다. 그 스러져 가는 인생 가운데에서 그녀는 부자를 지키고 싶어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도, 아내의 사랑도 아니었다. 볼품없이 사라지는 인생과 그 어떤 만족스러운 사랑도 해보지 못한 데에 지친 여자의 조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지치고 싶지 않았고 지치는데에는 신물이 나 있었다.
에아르닐은 눈을 감았다. 클레릭은 그의 땅이었다. 아버지의 땅이 아니라, 하라드 이실도. <남쪽 담>도 아닌 오롯이 그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작정 클레릭에 도착했을 때의 막연함을 에아르닐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러했다. 열여덟 해 동안 배를 곪아본 기억도, 거처를 찾아야한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청년에게 그 막연함은 흡사 메뚜기떼에 흉작을 본 농민의 마음처럼 막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에아르닐은 그 막연함 속에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는 ‘하라드 이실이 아닌 어떤 것’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다. 클레릭은 에아르닐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는 유령처럼 조모의 방안을 배회하며 먼지 덮힌 팬던트의 뚜껑을 들여다보는 열두살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이었고, 한 무리의 청년들과 에아르닐이었다.
“에아르닐.”
오랫동안 여러개의 기억속에서 헤메이던 그는 마세라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짙은 붉은색 머리칼 사이로 푸른색 눈동자가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수도로 오시는 모양이야.”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입에서 그의 아버지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에아르닐은 한번도 남이 묻기 전까지 그의 아버지에 대해 말한 적 없었다. 홀홀단신으로 수도에 올라와 삶을 꾸리는 블론드의 청년은 그의 귀족적인 외모만 아니었다면 흡사 부모 없이 자라온 고달픈 혁명가처럼 보일 지경이었고, 사교계에서 ‘하라드 이실의 영주는 무탈한가?’하는 질문도 그가 수도에 처음 올라온 뒤로는 점점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마세라가 올모스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적어졌다. 에아르닐은 그의 가족에 대해 어떤 말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의 머리칼이 얼굴도 본적 없는 조모를 닮았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너는 내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했지. 마세라.”
하라드 이실에 대해서도. 마세라는 자신의 대답 없이도 말을 이어가는 에아르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알게 될거다.”
에아르닐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작은 집 전체가 무거운 침묵으로 소용돌이쳤다. 에아르닐은 어머니에게서 온 종이를 지금은 쓰지 않는 벽난로 위에 잉크병으로 눌러두었다. 그 성의 없는 행동만이 그 종이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보였다.
사교계는 원탁회의를 앞두고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캘커리에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있더라도 원탁회의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귀족들은 명망 있고 지체 높은 가문의 몇몇 뿐임으로 원탁회의의 개최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회의를 앞두고 곳곳의 영지에서 영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아직 젊고 유망한 젊은이들이 수도의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에 사교계는 한층 시끄러웠다. 어느 영주의 아들, 어느 영지의 대리인들 사이에서 에아르닐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몇가지 질문에 넌지시 대답만을 내려놓으며 살롱의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에아르닐.”
익숙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것은 여지없이 마세라였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가, 아니 하라드 이실의 영주가 클레릭에 당도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내가 들었으니 자네도 들었으리라 생각했어.”
너는 내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했지. 에아르닐은 잔에 담긴 술을 입으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마세라는 언제나 한 발 앞서있는 친우의 앞에서 술을 넘기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아르닐의 블론드와 하라드 이실의 이름과 그의 급진적이고 영민한 생각들은 언제나 그를 파티의 한 가운데 서있게 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쓸쓸하게 퇴장하는 오래된 주역처럼 벽에 기대어 한무리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명망 깊은 영지의 대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탁회의에 참가할만큼 중요한 영주들은 대개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섣불리 자리를 비우는 대신 믿음직한 아들들을 클레릭에 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왕의 뜻에 거역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동시에, 영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식이기도 했고, 그들의 대리인이 곧 차기 영주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아들들은, 영지에 대한 긍지와 아버지의 뜻에대한 감사와 수도의 풍경에 대한 감탄으로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 다시 에아르닐에게로 향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는 클레릭에 직접 당도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이 있는 사교계에 그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차기 영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들들을 영지의 대리인으로 수도에 보내는 지경인데, 에아르닐에게는 그 무엇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수도에 머물고 있는 하라드 이실의 장남인데에도. 곧 알게 될거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천천히 이해했다.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은 그의 아버지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이었고, 캘커리 왕의 곁에서 입을 열정도로 수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에아르닐.”
“곧 알게 될거라고 했잖나.”
에아르닐은 마세라를 보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는 빈 잔을 내려놓고 목에 두르고 있던 붉은 실크로 된 커프스를 풀어내며 자리를 떴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가 장남과 사이가 좋지않다는게 사실이었군. 남자의 목소리가 돌연 소란스러운 파티장을 가로질렀다. 그저 소문을 이야기 하려던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낮고 중후한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근처에 있던 대다수의 귀에 들리고야 말았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요. 남자의 부인이 뒤늦게 말했을 때에는 에아르닐의 등은 이미 마세라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올모스와 에아르닐에 대한 소문으로, 그리고 하라드 이실의 저택에 숨겨져 있다는 차남에 대한 소문으로 아주 약하게 일렁이는 목소리 사이에서 마세라는 종이를 받아들던 에아르닐의 표정을 떠올렸다. 힘 있는 목소리로 광장의 단상에 올라서는 에아르닐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그의 친우는 깊이 가라앉아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원탁회의가 소집되었던 날 저녁에 에아르닐은 가르완의 서신을 받고 왕성으로 향했다. 붉은 커프스에 붉은 조끼, 예복을 갖춘 차림새는 아니었으나 평소의 흰 목면으로 된 셔츠를 생각하면 충분히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달리 그럴싸한 언질이 없었던 것도 에아르닐이 서둘러 말을 재촉하느라 차림새가 부족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소매를 걸어 잠근 보석이 박힌 단추 때문에 고삐를 쥔 소매 끝이 무거웠다. 가르완은 알현실이 아니라 휴식실로 그를 불렀다. 에아르닐은 왕의 옷차림이 가벼운 것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윽고 그가 내뱉는 말에 표정이 굳었다.
“오늘 왜 성에 없었나? 중요한 회의에 그대의 도움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르완은 에아르닐에게 있어서 아직은 섬세한 왕이었다. 고작 이러한 일로 자신을 불렀다는 점도, 광장에서 가르완과의 첫 대면 또한 에아르닐에게 그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섬세함은 정교한 것이 아니라 양초에 깃든 불같은 것이었다. 그의 확신과 생각들은 얼기설기 엉켜 곳곳으로 미치고 있었다. 그가 짜놓은 생각과 의지의 실타래는 거미줄처럼 섬세하고 유연했듯 보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제가 그런 자리에 있기에 여전히 모자란 것처럼 보이셨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 에아르닐에게 영주자리를 물려주어야할 때까지 혹은 그 후에도 여전히 에아르닐은 그에게 있어서 팔푼이 같은 내놓은 자식에 불과할 것이었다. 가르완은 짐짓 미소 짓고 있었다.
“올모스는 여전하더군. 여전히 강직하고 충직한 신하였어. 하라드 이실은 믿을만한 땅이라는 걸 증명해 보였지.”
“하라드 이실이 아버지의 유일한 자랑이었으니까요. 앞으로도 남쪽 담은 전하의 배후에 서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필요한건 하라드 이실이 아니라 그대이네, 에아르닐.”
에아르닐은 편안한 복장으로 앉아 미소하는 왕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씀해주십니까.”
“다른 말이 아니야. 내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나를 가장 도와주었던 것은 그대이고,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한때 그대의 땅이 그대를 수식했을지언정 이제는 그러지 않길 바라네. 나는 그 땅이 그대를 깎아내리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네. 나는 그대를 계속 곁에 둘 생각이니.”
가르완의 말은 길었다. 그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라드 이실을 거론했다. 하라드 이실은 오랫동안 에아르닐의 이름의 일부였다. 그것은 에아르닐을 수식했고, 동시에 그를 원탁회의에서 끌어내리는 주체가 되었다. 그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었으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에아르닐은 지금 눈앞에 있는 젊고 강인한 왕이 자신을 격려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챘다. 가르완은 섬세한 왕이었다. 적어도 에아르닐이 느끼는 바로는 그랬다. 그는 가르완의 곁에서 그의 정치에 약간의 첨언을 더했으나 이토록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왕만큼이나 그리고 왕보다도 젊었고, 자신이 때로는 실수를 범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왕에게는 믿을 만한 세력들이 부족했다. 가르완에게 좀 더 믿음직한 인재들이 많았더라면 지금의 자리는 에아르닐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제가 미약하게나마 전하께서 필요로 하실 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모든 결정은 왕의 것이지 에아르닐의 것이 아니었다.
“남쪽 담이 오래도록 저를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고 앞으로도 얼마간 변하지 않겠습니다만, 전하의 뜻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제가 전하께서 뜻을 이루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아르닐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에아르닐은 본래도 표정을 감추는데 재능이 없었다. 그럼에도 곤란을 겪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가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기 때문이고, 표정을 감추어야할만한 말도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도 처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르완의 앞에서도 에아르닐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에아르닐을 격려하고 있는 왕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같았다. 왕의 입에서 왜 ‘땅의 이름’이 나왔는지도, 그리고 그것이 에아르닐을 깎아내리고 있는지도 에아르닐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왕의 말대로 왕은 왜 에아르닐이 원탁회의에 나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다른 영주 대리인들과 에아르닐의 차이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곧 열릴 삼국회의에는 자네도 같이 참석했으면 좋겠군.”
에아르닐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젊은 정치가의 눈앞에는 캘커리의 왕이 앉아있었다. 그가 정치가가 아니었다고 해도 왕이 그를 정치가로 만들었다면 그는 정치가였다. 에아르닐은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다.
올모스는 에아르닐과 마주쳤을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에아르닐도 그랬다. 그들은 에아르닐이 집을 떠나던 날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부자의 공통점이었다. 에아르닐은 희고 긴 복도를 등지고 서있었다. 그는 왕을 알현하러 궁에 들른 참이었고 올모스는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라면 행정적인 문제이건 정치적인 문제이건 간에 궁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것 없는 명망의 인사였다. 흰 셔츠 위로 붉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어깨에 금장으로 장식을 단 에아르닐은 올모스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의 단면 같은 것이었다. 그가 지독히도 싫어했던 어머니를 닮은 아들의 금발은 수도에서 되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요체로 보였다. 그 어색한 단면은 오랫동안 올모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외면하려했던 것보다도 훨씬 정교하게 갈고 닦여있었다. 올모스는 그 정교하고 깨끗한 단면에 당황했다. 부자의 얼굴은 타인처럼 판이하게 달랐다. 올모스는 타인을 본 얼굴로 놀라고는 이내 고집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올모스와 에아르닐은 서로를 바라보고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스쳐지나갔다. 가슴 속에서 막연한 분노만이 물처럼 끓어올랐다. 올모스의 외면과 부정은 익히 알고있는 것이었다. 열여덟 해동안 스스로의 머리털처럼 자라온 것들을 이제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에아르닐은 천천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천천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외면과 부정과 경멸에 대해 익숙해졌기 때문에 또 한 번 마주쳤을 때에는 피할 수 없는 불쾌함 외에는 그 외에 덧붙일 감정이 없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어둑어둑한 감정들은 씻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케케묵은 때처럼 감정 위에 마짝 엎드려 달라붙어있는 것이었다. 올모스를 향한 저항은 천천히 에아르닐의 안에서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에아르닐은 젊었고 분노하고 있었다. 에아르닐은 그가 젊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젊고 어리석은 그를 영민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장점이었다. 젊은이들은 늘 성미가 급했고, 급진적이었으며, 쉽게 어리석어졌다. 그는 이제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버지의 흰 눈과 마주쳤을 때 물처럼 끓어오른 것은 피가 아니라 분노였다. 부자를 이어주는 피는 그들 사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감정은 모양을 갖춘 것처럼 그의 안에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가 때가 되면, 미끼가 던져지면 곧잘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올모스는 원탁회의를 통해 자신이 에아르닐을 인정하지 않음을 소리 소문 없이 공공연히 표현한 셈이 되었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이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히는 아들은 그 고요함에도 소문의 주인공임이 들통 났다. 하라드 이실의 이름이 서로를 깎아먹고 있었다. 마치 가르완이 우려했던 그대로였다. 그 땅이 그대를 깎아내리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네. 에아르닐은 왕의 말을 떠올리며 시선을 빗겼다. 해묵은 땅을 벗어났을 때 처음으로 그를 인정한 것은 마세라였다. 그는 올모스처럼 에아르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에아르닐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경멸 대신 의문을 품었다. 마세라는 곧 에아르닐의 동료가 되었다. 발판을 딛고 일어섰을 때 수도는 광활했고 광장은 따듯했다. 에아르닐이 비로소 자신이 하라드 이실을 떨쳐 낼 수 있을거라고 믿었을 때 그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었다. 남쪽 담은 그를 수식했다. 누구도 그의 옷깃에서 축축한 흙내음과 참나무의 향이 나기를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아르닐은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견고한 선조의 발판은 그를 자리 잡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에아르닐이 사랑받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올모스를 떨쳐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의 그늘을 떨쳐냈다고 생각했다. 올모스의 땅을 밟지만 않는다면, 그 족쇄 같은 늪에 발을 빠트리지만 않는다면 에아르닐은 이제 올모스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란 에아르닐이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것보다도 훨씬 크고 강대한 존재였다. 올모스가 서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라드 이실의 풍경이 펼쳐졌다. 올모스의 옷깃에는 잘린 메뚜기의 다리가 붙어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에아르닐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대하고 무거운 존재였다. 올모스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은 아주 안전하고 단단하게 땅을 디디고 서있었고 그의 거칠고 건강한 몸은 그를 육중한 바위처럼 보이게 했다. 올모스의 옷깃이 펄럭일 때마다 그의 경멸과 몰인정이 매서운 바람처럼 살갗을 할퀴고 지나갔다.
삼국회의는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에아르닐의 입지는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전에 없을 만큼 견고한 것이 되어있었다. 에아르닐의 동료들조차도 그들의 생각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에아르닐의 위치가 얼마나 의외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왕은 그러한 생각조차도 품으려 하는 사람이었다.
원탁회의가 끝나고 얼마 안있어 수도 관광을 마친 영주 대리인들은 클레릭의 사교계를 떠났다. 파티는 곧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고 젊은이들의 가운데에는 늘 그래왔듯 에아르닐이 있었다. 젊은 차기 영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연줄을 대려던 늙은이들도 이내는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마세라는 원탁회의가 열리는 짧은 기간 동안 에아르닐이 많은 것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에아르닐은 차기 영주로도,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원탁회의가 그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동안 에아르닐이 마세라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음은 그 때문이었다. 마세라가 아는 한 에아르닐은 자신의 자존심과 평판에 주의를 기울이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그가 상처입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이 이따금 습관처럼 입에 담는 말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마세라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비로소 이해했다. 금발의 청년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견고한 사람이었다. 올모스를 뒤따른 소문들은 늘 그랬듯이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 에아르닐은 전에 없을 만큼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입지를 다져나갈 것이었다. 근래에 빈번하게 왕궁에 출입하는 에아르닐의 예복이, 그리고 그의 동료들사이에서도 홀로 점차 한걸음씩 멀어져가는 그의 진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세라는 마세라가로 편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에아르닐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수도의 사교계에 단 한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다시 수도를 떠난 충실한 신하 올모스를 떠올렸다. 그들이 과연 마세라가 알고 있는 만큼이나마 자신들의 아들에 대해 알고있는가에 대해 그는 의심스러웠다.
삼국회의는 아수라장같았다. 메이사의 언동은 오나하에 대한 에아르닐의 선입견을 깨기에 부족했다. 에아르닐은 원탁회의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그가 라가하트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떠올렸던 말에 집중했다. ‘다음’. 오나하의 왕은 여전히 레보르프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가르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디올라의 왕은 이도저도 아닌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음으로 계속해서 시비가 붙는 것은 가르완과 오나하의 왕이었다. 오나하의 레보르프에 대한 태도는 짐작 이상으로 판에 박힌듯 고정되어있었다. 확실하게 레보르프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약소국이었다. 그러나 약소국이라고 하기엔 그 주민들이 지나치게 영리했고, 지나치게 부유했다. 오나하에 매번 약탈당하는 부를 생각하더라도 지금의 풍요로움이면 본래 레보르프의 수완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계산할 수 있었다. 에아르닐은 평소에도 가르완의 말에 전폭적으로 수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르완과 에아르닐 사이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설전이 존재했다. 언쟁이라고 보기에는 때와 시기를 놓고 벌인 의견의 차이 정도였지만 어쨌든 에아르닐은 가르완이 왕이라고 해서 그의 말에 모든 것을 수긍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에아르닐이 틀렸든 가르완이 틀렸든 간에 서로의 의견은 각자의 것이었고 선택과 결정은 온전히 왕의 것이었다. 그것이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의견은 제시하되 강요하지도 옳다고 우겨대지도 않는 것이 에아르닐이 말하는 방식이었다. 가르완은 이내 개 중에서 그에게 필요한 정보와 필요한 식견만을 뽑아 참고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에아르닐은 지금만큼은 그의 왕의 말에 한 치의 의견의 차이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입은 일자로 다물린 채였지만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 캘커리의 왕의 사리 판단은 정확한 것처럼 보였다. 만에 하나를 생각해서라도 그의 조치는 정당한 것이었다. ‘다음’.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화살이 울었다면 반드시 다음이 있었다. 레보르프도 그것을 모르고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다음’을 벌이기 이전에 오나하가 움직여 레보르프를 치면 끝난다. 그러나 에아르닐은 오나하가 레보르프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나하의 생활과 레보르프의 생활은 질적으로도 양식적으로도 판이하게 달랐다. 오나하의 왕은 레보르프를 손에 넣어도 그것을 정비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오랜시간을 투자해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레보르프를 정비하는 동안 캘커리와 디올라가 그것을 방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지도가 바뀌는 것은 곧 전쟁을 의미했다. 오나하가 레보르프를 삼키면 다른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다른 대비가 필요했다. 오나하가 레보르프에 단순히 치명적인 사상을 일으키고 끝난다는 것이 가장 일어날법한 일이었지만, ‘악의 근원’의 부활이 병력과 군사력과 상관 없이 금기에 매여있는한 하슈크 2세의 계략은 언제든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에아르닐은 말 없이 앉아 메이사와 가르완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나하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나하의 전쟁과 레보르프의 ‘악의 근원’을 얻고자 하는 계획 사이에는 큰 연관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첫 번째 금기는 단순히 소년 하나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도 깰 수 있었다. ‘다음’은. ‘다음’도 그렇다면.
“디올라 전역에 숯가루가 떨어지고 있어요. 마법도 소용이 없어요.”
작은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다. 에아르닐은 직감했다. ‘다음’이었다. 첫 번째 금기에 걸린 마법도 캘커리에게서 나고 자란 에아르닐에게 있어 상상이상의 것이었다. 고작 아이의 목 하나를 베었다고 해서 호수가 마르는 것이 마법이라면 더한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에아르닐은 검은 여우털 망토 위로 소복이 쌓이던 라가하트리의 꽃비를 떠올렸다. 백색의 도시에 내리는 검은 눈은 마녀가 나오는 동화의 삽화처럼 섬뜩한 것이었다.
“왕들이시여, 두 번째 금기가 깨졌어요.”
소녀는 울고있었다. ‘다음’이 오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들이 목전까지 화살이 다가와 있었다. 에아르닐은 둑이 터진 강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어렵다. 전쟁의 효시를 당기는 손은 확고하지만 어렵게 살을 당긴다. 살은 정확한 곳에 전쟁에 참가하는 모든 이의 눈이 닿는 곳에 꽂혀야한다. 그 다음에는 만인의 대군이 움직이고, 그 다음에는 성벽에 갈고리쇠를 얹어 성을 무너트린다. 전쟁의 둑이 터지고 있었다. 모두의 예상보다도 두 번째 금기는 훨씬 빨리 깨어졌다. 세 번째도 그럴 것이다. 막연한 추측이었지만 점차 회의의 분위기는 가르완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그의 근거가 부족한 확신은 불길한 근거를 더해가며 굳건해져가고 있었다.
가르완이 에아르닐에게 삼국동맹에 대해 넌지시 물었을 때 에아르닐은 답했다. 삼국의 균형을 유지하며 레보르프를 견제하기에 당장은 필요 불가결해보이나 레보르프를 처단한 뒤에는 동맹의 존재는 회의적이리라고. 목적을 달성한 동맹은 본디 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에아르닐은 그 동맹의 결말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레보르프가 완전히 스러진다면 그 뒤에는 삼국의 이익만이 승냥이처럼 서로를 갉아먹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보르프는 쉽게 스러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에아르닐의 생각은 늘 그렇듯 급진적이었고 멀리에 미쳐있었다. 동맹이 맺어지는 순간부터 동맹이 깨어지는 순간을 대비해야한다는 그의 생각은 저만치 뒷전에 있을 필요가 있었다. 마법의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숯가루를 뒤집어쓰고 우는 소녀 앞에서는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왕들은 혈맹을 맺었다. 에아르닐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또 다시 ‘다음’을 생각했다. 이제 ‘다음’은 끊임없이 밀어닥치기 시작할 것이었다. 동맹은 터진 둑이 밀려오는 것을 막아야했다. 레보르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준비를 시작했다. 숯가루를 뒤집어 쓴 디올라의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오나하의 왕을 보았을 때,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소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Mission 02. 이제까지 쓴 커뮤 미션중에서 가장 긴 미션. 19.877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