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ad Ithil>


 올모스는 <남쪽 담>에서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이실두르의 무훈을 듣고 자랐다. 올모스의 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그랬다. 남쪽 담의 아버지들은 단단하게 단련된 허벅지 위에 아들을 앉히고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했다. 참나무방패의 이실두르. 검이 없는 이실두르. 이실두르가 왕에게서 받은 캘커리 가장 남쪽의 땅에는 그 후로 대대로 이실두르의 후손들이 살았다. 캘커리 가장 남쪽에, 이실두르가 방패를 드는 대신 담을 쌓았다고 해서 하라드 이실은 <남쪽 담>이라고 불렸다. 피의 시대의 막을 내린 이실두르의 이름은 빛의 후손의 이름만큼이나 남쪽 담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의 자랑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고 건장하게 자랐고, 가슴에 두 개의 훈장을 매단 기사처럼 가슴을 펴고 걸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집 앞에 참나무를 심었다. 곧 참나무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에 늘어섰고 밭과 밭 사이에, 과수원과 과수원 사이에서 큰 그늘이 되었다. 아이들의 품을 훌쩍 넘는 참나무에는 모두 죽은 누군가의 조부와, 조모와, 또는 그보다 더 오래된 누군가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하나의 참나무마다 하나의 아이의 이름이 있었다. 아이들은 떨어진 참나무 가지를 엮어 칼 대신 방패를 만들어 놀았다. 남쪽 담의 아이들은 누구도 나뭇가지에 팔을 베여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들이 옆집 사내애 팔에 상처라도 내면 어머니들은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고 이렇게 말했다. 이실두르의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아이들이 곧 새초롬하게 풀이 죽은 채로 아버지의 무릎에 가 앉으면 아버지는 다시 이실두르의 무훈을 이야기했다. 남쪽 담의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는 방법은 대체로 그러했다. 여자애들은 어머니의 앞치마 자락을 붙잡고 어머니가 되는 법을 배웠다. 부끄럽지도 않니? 소꿉놀이에는 꼭 그러한 단어들이 등장해야했다. 

 그래서 남쪽 담의 모든 사내애들이 이실두르의 무훈을 듣고 자라듯이 올모스도 그렇게 자랐다. 그는 참나무방패의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 꼭 같이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고 아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물을 수 있는 여자와 만나 혼인했다. 여자는 올모스와 혼인한 뒤 곧 앞치마를 두를 필요도, 앞치마에 손에 묻은 물기를 훔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올모스는 이실두르가 왕에게서 받은 영지를 이어받은 하라드 이실의 영주였고, 그녀는 영주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곧 앞치마에 물기를 훔칠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그녀의 아들들에게 곧잘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는 좋은 남쪽 담의 어머니가 되었다. 올모스는 모든 남쪽 담의 어머니들이 그렇듯,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는 그의 아내를 사랑했다. 올모스의 어머니는 남쪽 담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는 이실두르의 무훈을 듣고 자란 올모스에게 한 번도 남쪽 담의 아이처럼, 가슴에 훈장을 매단 것처럼 어깨를 펴고 자라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올모스는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듣는 남쪽 담의 사내아이가 되고 싶었다. 그는 영주의 아들이었고, 곧 영주가 될 것이었으며 자신에게 그렇게 자랄만한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올모스의 어머니는 보기 드문 레몬색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힘없는 방계 왕족의 여식이었으나 혼인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남쪽 담에 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손에 물이 묻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앞치마를 어떻게 둘러야하는 것인지도, 남쪽 담의 사내애를 어떻게 혼내야하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단지 올모스의 어머니였고 때문에 올모스를 안아주는 것으로 그녀가 모르는 모든 것들을 대신하려고 했다. 

 올모스는 그리고 그가 바랐던 것처럼, 당연하듯 자라 하라드 이실의, <남쪽 담>의 영주가 되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실두르의 무훈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남쪽 담의 사내처럼 생각했다. 올모스는 누구보다도 그의 영지에 대해 잘 알았다. 영지의 북쪽 땅이 가물지는 않았는지, 알맞은 비가 적당한 때에 내렸는지, 메뚜기 떼에 농작물이 피해를 보지 않았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올모스는 좋은 영주였고 좋은 남편이었으나 그의 두 아들 모두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가을에 들이닥치는 메뚜기 떼만큼이나 그의 장남 에아르닐을 싫어했다. 올모스의 어머니, 조모의 보기 드문 엷은 금발을 물려받은 아들은 마치 머리칼 외의 모든 것들까지도 조모를 닮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아이는 태어나 탯줄을 끊을 때부터 우렁찬 소리로 우는 대신 조용히 딸꾹질을 했고, 커서는 참나무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방패를 만드는 대신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글씨를 쓰고 놀았다. 어머니가 이실두르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야단을 칠 때면 아버지의 무릎으로 달려 들어와 무훈을 듣는 대신 방문을 소리가 나도록 닫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남쪽 담의 것은 무엇 하나도 제대로 배우려고 들지 않았다. 올모스의 눈에 에아르닐에게는 날 때부터 남쪽의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올모스는 빠르게 둘째를 가졌다. 아들이 태어나면 반드시 남쪽 담은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리라고 다짐했다. 열 달 후에 올모스가 품에 안은 아이는 아버지를 닮아 건강한 사내애였고, 탯줄을 끊어내자 저택이 떠나가도록 우렁차게 울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아이의 얼굴은 물에 분 것처럼 쪼글쪼글하고 발갰다. 올모스는 일주일이 지나면 아이의 머리칼도 맑은 갈색 빛으로 마르고 발갛게 쪼그라든 아이의 얼굴도 희고 건강하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이는 결국 올모스의 뜻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아이는 머리칼은 아버지를 닮은 갈색 빛으로 말랐지만 아이의 얼굴은 한 달이 지나도록 마른 호두 껍데기 같았다. 올모스는 일 년이 지나고 여전히 아이가 호두 껍데기 같은 얼굴로 저택 안을 걸어 다니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겨우 아이가 평생을 그 얼굴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올모스의 차남 앙그라드의 얼굴은 갓 태어난 야수의 새끼 같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여종이 떠먹여주는 건포도와 과일을 갈아 넣은 오트밀을 잘 받아먹었고 아버지를 닮은 남쪽 담의 여느 사내애처럼 건강하게 자랐다. 앙그라드는 올모스의 무릎 위에 앉아 이실두르의 이야기를 들었다. 앙그라드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저택 안의 여종들이 모두 앙그라드의 얼굴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자 올모스는 앙그라드를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으나 손수 참나무 가지를 주워 방패를 만들어 줄 만큼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올모스는 아이가 호두 껍데기처럼 생긴 얼굴을 했더라도 남쪽 담의 아이처럼 자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금발의 어머니를 가졌을 때 그렇게 생각했듯이. 



 올모스의 장남은 열여덟이 되기 머지않아 하라드 이실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아버지가 앙그라드를 무릎에 앉히고 한 손에 손수 엮은 방패를 쥐어준 채 앙그라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동안 에아르닐은 죽은 조모의 방에서 책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불어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한 손에 앙그라드의 손을 잡은 채 조모의 방 문틈 사이로 에아르닐을 지켜보던 올모스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올모스에게 모든 조모와 닮은 것들, 금발을 한 것들, <남쪽 담>의 것이 아닌 것들은 에아르닐이 부끄러워해야하는 것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에아르닐은 깊은 눈으로 올모스를 바라보다가 다시 먼지를 불기 시작했다. 그 쯤 되면 올모스는 앙그라드의 손을 놓고 아이에게 어머니에게 가 있으라고 이른 뒤에 에아르닐에게 호통을 쳤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에게 화를 낼 때면 하루에 수십번도 더 부끄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에아르닐은 거뭇한 녹색 눈으로 한참이나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곱슬거리는 레몬빛 금발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저었다. 올모스는 해가 지나갈 때 마다 점차 에아르닐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올모스는 일찌감치 에아르닐을 포기할 예정이었으나, 뜻밖에 그의 차남 앙그라드가 지독하게 못생긴 야수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더 이상의 아들을 낳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에아르닐을 재차 포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모스가 에아르닐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이미 너무 많은 수의 질문들이 에아르닐이 어깨를 움츠리도록 만들었다. 에아르닐은 아버지에게 화가 났고 앙그라드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부자의 대화는 결국 에아르닐이 열여덟이 될 때쯤엔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에아르닐이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식탁 앞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뿐이었고, 아버지는 멀리서도 쉬이 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결국에 놓쳤다. 

 올모스의 장남은 열여덟에 되자 곧 하라드 이실을 떠났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처럼 에아르닐의 짐은 단촐했으나 무엇 하나 잊은 것이 없었다. 올모스는 떠나는 에아르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저택의 계단 위에 서서 앙그라드의 손을 잡고 뜨거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에아르닐!" 

 "오랜만이야 마세라."

 "지난 번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나?"


 에아르닐은 클레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레보노프 말야? 그래. 연회장에 들어서면 잘 차려입은 모양새를 한 레몬블론드의 젊은이는 한손에는 케인을 짚고 탁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진전이 없던걸. 말도 안 돼. 정말이야. 친국왕파에 속하는 젊은이에게는 늙은 옹호자가 많았고 그러나 대담성을 들이대는 면모는 비슷한 연배의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기에 좋았다. <남쪽 담>에서 온 에아르닐. 하라드 이실에서 온 에아르닐.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두기 좋은 발판이 되었다. 조모에게서 물려받은 레몬블론드의 머리는 그를 개중에 돋보이게 만들었고 자그맣게 하라드 이실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에아르닐은 일렁임 없는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에아르닐이 클레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가문의 위상과 수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의 오랜 선조는 훗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후손들에게 아주 단단한 발판을 물려주었음이 틀림없었다. 그가 결코 한번도 자랑스러워 해본 적 없는 <남쪽 담>은 그의 발판이 되었고, 그는 어디에 가든 하라드 이실에서 온 에아르닐이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그 어느 연회에도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때문에 에아르닐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고집했던 <남쪽 담>에 대하여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올모스는 그것이 유명하고 거창하기 때문에 아니라 남쪽 담이기 때문에 사랑했을 것이었으나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아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그가 한 번도, 그 후로도 자랑스러워 해 본 적 없는 고향을 언제 말해야하는지 알았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레몬빛 머리칼에 머물 때면 어줍지 않은 조모의 혈통을 떠벌이는 대신 간단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아르닐은 그의 고향에서보다 그의 고향을 떠나왔을 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가 열여덟 해 동안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는 에아르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에아르닐은 왜 올모스가 앙그라드에게 하라드 이실을 내어줄 수 없었는지 이해했다. 아버지는, 아무리 에아르닐을 메뚜기 떼만큼 싫어했더라도, 그의 작은 아들이 <하라드 이실의 괴물>로 불리는 것은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더욱 <남쪽 담>에 사는 괴물이 그의 비옥하고 역사 깊은 영지의 위상을 깎아내리도록 내버려두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에아르닐의 명성에 대한 모든 공로가 에아르닐 자신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쉽게 인정했으나 이미 그에게는 ‘에아르닐과 젊은이들’이라고 불릴 만큼의 많은 동지들이 있었다. 에아르닐은 수도 귀족들 중 대부분의 아들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모두 잘 갖추어 입은 블라우스 차림에 단정한 커프스를 매고 엇나간데 없이 깊은 사색을 즐겼으며 늙은이들이 눈살을 찌푸릴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위험하지 않았으나 대담했고, 이따금 무모하게 들렸으나 그 마저도 젊은이기 때문에 쉽사리 인정되었다. 때로 늙은이들은 그들이 쌓아온 기반을 무너트리지만 않는다면 젊은 사람들이 우스울만큼 쉽게 모든 것을 논하는 자세에 흥미를 느끼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에아르닐의 대담하고 공격적인 언쟁을 좋아했다. 탁 트인 목소리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했고, 대담한 언사는 마치 사람들이 지금 포커라도 한 판 시작한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실상 에아르닐의 대담함 밑에 들끓는 것은 두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젊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분노였다. 에아르닐은 그가 젊다는 것은 오래전에 깨우쳤으나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인생에 어떤 지대한 공헌도 하지 못한 어머니가 수도에 있는 에아르닐에게 잠시만이라도 돌아와달라는 편지를 썼을 때, 에아르닐은 깊이 생각지 않고 몇 년 만에야 <남쪽 담>으로 돌아가는 짐을 꾸렸다. 





 어머니는 돌아온 에아르닐의 코트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올모스가 그랬듯 가장 남쪽 담의 어머니 같은 어머니였지만 상처 받고 떠난 자식에게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어머니들의 수순이었다. 북쪽에서 묻어온 눈들이 따듯한 공기에 녹아 코트 자락과 머리칼 끝에서 톡톡 떨어져 내렸다. 어머니는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기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남쪽 담>에서는 맡을 수 없는 차갑고 추운 냄새가 얇게 곱슬거리는 머리칼 끝에서 떨어졌다. 


 “아버지 이번 달에는 비가 올까요.”


 앙그라드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벌써 수년이나 한 무리의 장정들을 지휘했을 지휘관의 목소리라고 해도 흠 잡을 데 없이 믿음직스러웠으나, 목소리와 달리 앙그라드의 말투에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아이처럼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곧잘 묻고는 했다. 마치 열다섯살 탑에 갇힌 공주처럼 앙그라드는 하라드 이실의 저택과 정원에 갇혀 지냈다. 아버지 올모스가 대대로 이어받아온 영지는 캘커리 남쪽 땅의 대부분을 덮고 남을 만큼 넓고 비옥했으나 스무해를 넘긴 청년은 한 번도 그 드넓고 비옥한 대지를 말 위에 앉아 내려다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앙그라드가 순진한 목소리로 올모스를 부를 때면 그는 높은 곳에서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고 굳은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랜 시간 검을 쥔 채 햇살 아래 검게 그을린 올모스의 손은 굳은살이 배기고 상처가 남아 뼈마디가 두드러져 있었다. 


 “해무리를 보니 곧 오겠구나.”


 에아르닐은 문간에 기대어서서 앙그라드에 답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다가 엷게 웃었다.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를 앙그라드는 스무해 동안 듣고 자랐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앙그라드를 하라드 이실의 영주로 세우지 못하는 이유를, 그리고 차마 영지 밖으로도 내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에아르닐은 알았다. 탑에 갇힌 공주처럼 여리고 풍성한 감정들은 야수같은 얼굴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고 순진하게 반짝이는 낮은 목소리는 떡갈나무의 결처럼 부드러웠다. 아 앙그라드. 방 안에서는 희미하게 장작타는 냄새와 좋은 참나무가 재가 되어 나는 향이 났고, 공기가 따듯하게 덥혀 몸에서는 물기가 흘러내렸다. 에아르닐은 문간에 기대어 서서 그의 아버지와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클레릭을 떠올렸다. 앙그라드가 가지지 못할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케인과 책을 손에 든 한 무리의 동료들은 아마 앙그라드가 평생에 걸쳐도 가지지 못할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에아르닐은 그가 떠날 때 <남쪽 담>에 대해 묻던 그의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입 안에서 굴렸다. 에아르닐은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거기에 서서 앙그라드가 가지지 못할 것들을 셈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시종이 방에 발을 들일 때 몸을 비스듬히 피해준 것만이 에아르닐이 자신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린 것의 전부였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의 얼굴을 보고 에아르닐의 등 뒤로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처럼 눈썹을 모았다. 형. 앙그라드만이 순진한 목소리로 에아르닐을 불러 세웠다.

저녁 식사는 화려하지도 조촐하지도 않았다. 에아르닐이 남쪽 담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가 돌아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잘 지냈니? 예. 수도는 어땠니?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엷게 깔린 침묵을 깼다. 여자의 목소리는 남편의 침묵과 돌아온 아들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가느다란 외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에아르닐에게로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클레릭은”


 에아르닐의 대답에 수저가 수프 보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놀라 어깨를 좁히며 잠시 떨었다가 에아르닐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수프 보울에 수저를 부딪힌 올모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수프를 입에 넣었다. 후루룩하고 교양 없는 소리가 디너 홀을 메웠다. 


 “화려하더군요.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엮어가지고 놀지도 않고요. 또래가 많아 재밌습니다.”


 올모스는 거칠게 식탁에서 일어났다. 에아르닐은 의자가 끌리고 냅킨을 집어 던지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에피타이저를 끝내고 남쪽 땅에서 자란 질 좋은 고기를 칼로 썰어 입에 넣었다. 완전히 마르지 않을 만큼 구워진 고기에서 질척하고 비린 피가 새어나와 혀를 적셨다. 여자는 식기에서 손을 뗀 채로 석상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남은 시야 너머로 앙그라드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앙그라드에게는 그것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어본 경험이었을 것이었다.

 조모의 방은 여전히 먼지로 가득 쌓여있었고 몇몇의 금으로 된 액자들과 촛대들이 사라져있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방이니 여종이 몇몇의 장신구를 팔아버렸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올모스는 그의 어머니의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서슴없이 관대해질 수 있었다. 에아르닐은 소복히 쌓인 먼지를 불었다. 등 뒤에서는 날이 선 시선이 느껴졌고 에아르닐은 돌아서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시선은 마주보지 않아도 살갗을 벨 것처럼 벼려져있어 결국에는 살갗을 뚫고 들어와 생채기를 내는데 성공했다.


 “집을 나가서 한다는게 고작 그런 놈들이랑 어울려다니는 것 뿐이었냐?”


 에아르닐은 손에 들고 있던 조모의 작은 팬던트를 내려놓았다. 


 “전 잘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영지를 욕보이면서 그런 입 놀음에 저며져 살테냐! 수치스럽지도 않으냐!”


 에아르닐의 눈은 어두운 등불에 비춰 거뭇하게 빛났다. 탁하고 깊게 가라앉은 녹색 눈은 좀 더 밝은 빛을 볼 때 만 제 색으로 보였다. 조모를 닮은 얇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주홍색처럼 보였다. 에아르닐은 눈을 내리 깐 채로 얇은 입술을 짓씹었다. 올모스는 너무 오랫동안 하라드 이실에 머물러있었다. 아마 그는 영지 밖으로 나가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이실두르의 아이들은 <남쪽 담>을 지켜야했고 그것을 마치 왕에게서 받은 훈장처럼 여겼다. 그들은 이실두르가 아니었고 하라드 이실의 어디도 전쟁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전 잘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뭘 그렇게 잘했다고 큰소리야!”


 턱이 천천히 아려왔다. 이봐요. 마음만 같으면 에아르닐의 말은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전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수치스러워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남한테 보이는 것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추잡하게 생긴 앙그라드보다 백배는 잘하고 있단 말입니다. 압니까?”

 “네 동생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냐!”

 “저한테 그만큼이라도 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뭐가 모자라 당신한테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하느냔 말입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지쳐 눈을 내리깔기에 에아르닐은 수도에서 사랑받았고 강해져 있었다. 그의 낡은 습관들이 클레릭에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을 깎아내리고 그 자리에 앙그라드의 얼굴보다 더 추잡한 상처를 새겨주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찾지 못했다. 올모스의 혀가 입 안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동안 에아르닐은 방 문 틈 사이로 밝은 초록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빛에 비춘 에메랄드처럼 엷고 순진하게 빛나는 눈은 앙그라드의 추한 얼굴에서 유일하게 봐줄만한 부분이었다. 아이의 심성이 엿보이기라도 하듯 빛나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앙그라드가 사악한 마법에 걸려 짐승보다 못한 얼굴이 되었으나 언젠가는 아름다운 얼굴의 왕자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대륙에 마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앙그라드의 유모가 분별없이 그런 부류의 동화책을 읽기 전에 올모스가 동화란 동화를 죄다 치워버린 것은 앙그라드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에아르닐은 상처조차 받지 않은 것처럼 맑게 빛나는 눈이 두 번 깜빡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에아르닐은 다시 숨을 고르고 있었고 올모스는 이제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문이 닫혔다. 앙그라드는 그 좁은 틈을 닫고 잰 걸음으로 달아났다. 올모스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놀라 문이 열려있었을 작은 틈에 시선을 두었다가 찢어버릴 것처럼 에아르닐을 바라보았다. 에아르닐은 올모스를 향해 웃었다. 젊다는 것은 분노가 들끓기에 충분한 힘을 주었다. 에아르닐은 들끓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올모스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에아르닐의 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린 오랜 모멸과 수치심들이 이제는 에아르닐이 들끓는데 좋은 장작이 되었다. 아들은 아직 자라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늙어가고 있었다. 오래되어 마르고 딱딱해진 분노들이 조모의 팬던트처럼 먼지에 싸여 기다리고 있다가 천천히 불에 익어 장작처럼 타기 시작했다. 타고 남은 매캐한 앙금들이 재처럼 가라앉는 냄새가 났다. 




 에아르닐은 삼일 뒤에 <남쪽 담>을 떠났다. 처음 온 날을 제외하면 그는 세 번이나 차려진 저녁식사에 단 하루도 앉아있지 않았다. 시종들이 가져다주는 하얀 빵 몇 덩어리가 그가 삼일간 식사한 것들의 전부였다. 앙그라드와 채 몇 인치도 차이나지 않는 몸으로 버티기엔 적당한 양의 식사가 아니었겠지만 시종들 중 누구도 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올모스는 에아르닐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삼일동안 마치 집에 누구도 찾아온 적 없는 것처럼 지냈다. 여자는 남편의 심기가 흐트러진 까닭을 쉽게 알아차렸다. 에아르닐의 목소리는 칼처럼 벼려져 있었고 에아르닐은 눈을 내리깔고 아버지의 말을 흘려듣는 대신에 이를 짓씹어 뭉개며 소리칠 줄 알았다. 여자의 눈에 아들의 녹색 눈이 천천히 일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폭풍이 도착하기 전 남쪽 끝의 짙은 활엽수가, 참나무들이 그 꼭대기부터 천천히 몸을 부대껴 흔드는 모습 같았다. 폭풍이 불어올 것 같았다. 형. 에아르닐은 처음 남쪽 담을 떠날 때와는 달리 어깨를 감싼 검은 여우털 망토에 말 한 필만을 데리고 있었다. 형. 저택의 문간에 서서 앙그라드는 어두운 문의 그림자 안에 얼굴의 반을 숨기고 에아르닐을 불렀다. 엷은 에메랄드 같은 눈이 두 번 깜박거렸다. 앙그라드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문틀을 더듬고 저택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에아르닐의 까맣게 침잠된 눈이 앙그라드를 바라보다가 그는 말 위에 몸을 얹었다. 그는 충분히 젊었으나 지혜롭기에는 부족했다. 에아르닐은 입술을 축이고 가늘게 신음했다. 그는 결국 모든 것에 상처를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 원제는 <남쪽 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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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