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D



 "하지만 난 아무래도 현명한 왕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네."


 그 때에 에아르닐은 말을 삼켰다. 그에게는 자신의 젊은 왕에게 건넬 수 있었던 수 가지의 말들과 언어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과연 어떤 짜임새를 가진 문장으로 조합하는가는 언변에 능숙한 그에게 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실리와 이상이 만감과 함께 교차했고 한 편으로 보수적인 귀족의 아들로서 알고 있는 그의 실리와 젊은 사상가가 지녀야하는 이상이 왕의 거침없는 욕망 앞에서 얼마나 솔직해져야 할지 없는 손을 접어 셈하고 있었다.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 

 평화를 위해 봉인되었던 모든 것이 완전하게 파괴된 순간 평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역설적이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의 붉은 망토는 말의 발굽들에 쓸려 날아오른 먼지와 탁한 긴장감에 싸여 혼탁한 자줏빛으로 가라앉았고 보기 드문 레몬색 머리칼은 예장용 검으로 자른 듯 성의 없이 들쑥날쑥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가 보았다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에아르닐에게 한 차례의 지독한 모욕이 따가운 소금처럼 쏟아졌을 것이었으나 그 지지부진하게 방어선을 밀어 붙였던 전투에도 사상자는 있기 마련이었다. 하라드 이실의 올모스는 쪽빛 망토에 방패 하나를 손에 쥐고 전선의 날개에서 사망 했고, 그가 이끌고 온 순박한 식솔 중에서 오로지 칼을 쓸 줄 아는 자들만이 무디게 벼려진 칼날 같았던 전쟁 끝에 살아남아 모여 있었다. 

 

 왕의 귀환은 조용하고 엄숙했다. 아마도 궁에 몰아친 한 차례의 유례없는 피바람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떠나기를 배웅했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기에 없었고, 귀환을 위한 인사는 마치 평화의 시대를 장례지내는 상주를 맞이하듯 했다. 






 "영주님께서 돌아오십니다!"


 메이로디가 먼지 쌓인 창을 활짝 젖혔을 때, 그녀는 붉은 망토에 검은 여우털을 두른 하라드 이실의 영주를 보았다. 영주는 짧은 레몬 빛 머리칼을 날리며 집에서 떠났던 그 날 올라탔던 검은 점박이 종마의 안장 위에 앉아있었다. 영주는 하라드 이실의 그 어디에도, 짙은 흙 내음이 나는 땅에도, 한 올의 참나무 이파리에도, 넓고 어두운 숲과, 내리쬐는 태양과 그늘 없는 너른 들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젊었다. 하라드 이실의 싱그러움은 어린잎과 움튼 새 순을 위한 것이었다. 도회지의 젊은 사상가를 위한 것도 젊은 영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종마가 편자로 땅을 두드려도 먼지가 나지 않는 습윤하고 질 좋은 땅 위에 도회지에서 온 젊은 영주가 발을 디뎠을 때, 메이로디는 그녀의 속마음처럼 가냘프게 말라버린 몸을 노파처럼 굽혔다. 메이로디는 그녀가 정말 노파처럼 보일 때까지 울었고 청년은 그녀의 등 위에 손조차 닿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평화의 시대를 끝마친 젊은 사상가의 고향이었다.


 "저는 다시 클레릭으로 떠납니다."


 에아르닐이 그렇게 말했을 때, 노파와, 야수와, 늙은 아첨꾼은 식탁머리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식탁에는 검은 빵과 묽은 야채수프와 포도 알갱이가 탁하게 가라앉은 질 낮은 포도주만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하라드 이실은 영주님을 잃었고, 도련님께서 떠나시면 남쪽 땅 끝의 영지가 전부 주인이 비게 됩니다요. 곳간의 양식은 전부 군용으로 내보냈지만 가을이면 다시 걷어야 할 밀이 산더미인데, 포도주도 다 사라졌으니 올 해는 포도를 수확하면 왕성에 보낼 것과 영지민이 먹을 것을 빼면 전부 술을 담궈야 하는데 영주님이 안계시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에아르닐은 흑색 빵 귀퉁이를 뜯어 묽은 야채수프에 담그다가 빵을 그만 수프 접시에 빠트렸다. 그는 늙은 아첨꾼을 바라보다가 흔히 눈 앞에 그의 친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화하게 웃었다.


 "나는 영주의 자리를 포기할 생각입니다. 도니제티."


 "나는 어려서도 지금도 하라드 이실에 그 어떤 애정도, 애착도 갖고 있지 않았고 하라드 이실을 이름자 앞에 짊어져야했던 대가로 받은 것은 내가 수도에서 먹고 잘 곳을 얻는데 쓰는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나이로 흐려진 아첨꾼의 회색 눈은 느리게, 묽은 수프에서 젊은 영주에게로 다시 야수처럼 일그러진 소년에게로 옮겨갔다. 소년의 눈은 에메랄드 같았고, 각섬석 같았고, 페리도트 같았다. 육중한 저택 문 밖의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귀담아 듣지 못하고 자란 푸르스름한 녹색 눈은 도끼로 내리치면 산산 조각 날 결이 가는 그 어떤 보벽의 하나처럼 맑았다. 


 "앙그라드."


 스물두살의 소년은 그의 뭉그러진 몸뚱아리에서 유일하게 빛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눈을 굴렸다.


 "나는 너에게 영주권을 이양한다."

 "도련님!"


 올모스의 충실한 종. 힘없는 늙은 아첨꾼. 흐려진 회색 눈은 그가 저택의 복도를 열 걸음 걷는 동안 한 번은 부딪히게끔 만들었고, 그의 젊은 영주는 그가 스무 마디를 말할 때 마다 한 번은 바닥에 굴러 넘어지도록 만들었다. 올모스의 충실한 아첨꾼은 올모스가 죽은 뒤에도 충실하게 고인의 유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샛노란 머리칼을 가진 첫 아들이 하라드 이실의 이름을 더럽히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큼, 야수처럼 흉측한 얼굴을 가진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영지의 이름 옆에 나란히 서지 못하도록 만드는건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네가 영주이기를 바라."


 채 태어나 열손가락에 들 만큼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피붙이가 말을 걸어준 것은 앙그라드에게 있어 기쁜 일이었음이 틀림없었다. 흉측한 얼굴을 가진 야수는 잠시 떨리는 손으로 셈을 하고는 보기 괴로울 만큼 환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톨의 긍지와 한 줌의 애정도 없는 땅에 그는 영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하라드 이실의 에아르닐이 아니라 젊은 사상가였고, 사상가이면서 그를 처음으로 발견해낸 귀족 자제들의 친우였으며, 그를 믿어준 젊은 왕의 정치가였다. 그는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이었다.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이름 그 자체의 의미로 불리어 깨어난 곳은 광장의 사과 상자 위였다. 






 숨죽인 발걸음 소리조차 요란할 만큼 비어버린 궁에서 젊은 왕이 그의 정치가를 맞았을 때, 역사는 끝나지도 시작하지도 않는다는 왕 앞에서 젊고 미숙하고 거침없는 정치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미숙하다는 것을, 현명하고 욕망하는 왕 앞에서 여전히 젊은 정치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아르닐은 가르완이 평화의 시대를 욕망처럼 지고 돌아왔을 때 새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역사가 끝났든 그렇지 않았든 평화의 시대의 끄트머리에서 그들은 모두 처음 출발했던 출발선이 지워진 채로 새 출발선을 그리기 위해 걸음을 딛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전하의 말대로 역사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흔히 역사서의 한 해와 그 다음 해의 사이에 한 획을 긋기를 그들의 평생에 걸쳐 고대하는 법입니다. 역사가 인과관계에 묶여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역사에 줄을 긋고 나누어 이전의 시대와 새 시대, 새 시대와 도래하는 또 다른 시대를 구분 짓고 싶어 하고 있고 때문에 만일 이것이 역사의 끝이 아니라면 역사서에 기록될 또 다른 한 획의 시대에 미치기는 할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출발선은 참나무 가지였고, 캘커리의 국경이었고, 라가하트리의 꽃비와 어린아이의 잘린 목이었으나 모든 것은 말발굽으로 부옇게 일어난 흙먼지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에아르닐은 얼마간 전에 그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던 말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과, 실리가 씨실과 날실처럼 가느다랗게 짜여 쉽사리 어느 한 쪽의 대답도 꺼낼 수 없어 망설였던 말은 비교적 단순했다. 정교한 문양이 곧 복잡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이.

 

 "전하께서는 그때 제게 현명한 왕이 될 수는 없을 거라고 하셨지만 저는 캘커리가 잃은 것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잃은 것이 없는 왕은 충분히 현명한 왕입니다. 전하의 욕망이 어떠하든 간에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시작하신 일이었든, 혹은 그렇지 않았든 간에 미숙한 정치가와 대부분의 백성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잃은 것이 없다는 결과만으로 또 다른 시대를 가늠할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것이 없음이 정말로 잃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에아르닐은 알았고 아마 왕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우아한 왕녀는 평화의 시대조차 얻은 유명의 관조차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하라드 이실의 충직한 영주와, 수많은 인사들은 곧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음은 비로드처럼 명백하게 발치에 펼쳐진 일이었다.



"전하."


 에아르닐은 붉은 비로드로 펼쳐진 새 시대로의 길을 눈앞에 두고 잠시 셈했다. 젊은 왕의 미래와 그가 가진 녹지 않을 눈처럼 찬란한 욕망. 라가하트리에 일 년 내 꽃비가 내린다면 캘커리에는 왕의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빛의 후손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고, 젊은 왕이 캘커리의 왕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품으로 인의에 뜻을 두는 왕은 그 대에 태평을 불러오고 후대에는 성군이라고 불리웁니다, 대체로는.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말하고 있고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정하고 있죠. 아마 전하께서는 후대에 루마난 왕을 이어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는 또 다른 캘커리의 왕이 되시리라고 짧은 소견으로 생각합니다만."


"성군에 뒤이어 성군이 나는 것이란 쉽지 않은 법입니다. 인의로 이루어진 뜻은 실리로 무너지고, 왕의 성품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믿음이 무너지면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왕 개인의 성품과 능력은 쉽게 세월의 풍파 앞에서 무너집니다. 전하를 향한 신뢰가 반드시 다음 대에로 계승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못하는 문제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여전히 모든 정치와 사상을 셈하기에 젊고 미숙했다. 그러나 그는 미숙함이 가지는 강함이란 바로 미숙함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미숙함을 인정하는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미숙함은 젊은 왕의 욕망과 지혜로 견고하게 쌓아올려졌고 낮은 지혜와 낮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셈들, 장사치의 셈법과 젊은이들의 목청으로 대담해졌다. 그는 자신이 지금 자신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자칫 위험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마 그의 왕이라면 귀담아 듣지 않을지언정 용서하리라고 믿었다. 그가 아모프 광장의 에아르닐을 캘커리의 왕성에 끌어들인 장본인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평화의 시대가 끝났으니 저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겠습니다. 전하의 욕망으로, 전하의 신념과 신뢰로 쌓아올린 견고한 캘커리의 성벽이 무너질 날을 예비하여."


"저희는 다음을 예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의 새 시대와 다가올 그 다음을 위해서." 


 에아르닐이 말하는 '저희'에 가르완은, 그가 섬기는 젊은 왕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 오랜 동료의식의 너머에는, 에아르닐에게 처음으로 이름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 생강 색 머리의 친우가 있었고, 몇몇 귀족의 자제들이 있었으며 골목 어귀의 과일상과 모과를 파는 젊은이, 뒷골목의 고단한 사상가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저희'였고 에아르닐의 동료였으며, 그가 에아르닐이라고 불릴 때 마다 그의 이름 가운데 내포된 많은 의미들 중 가장 순수한 것이었다.







 '잃은 것이 없는 왕은 충분히 현명한 왕입니다.'


 오래전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젊은 왕은 많은 것을 잃어버린 왕성의 왕좌에 앉아 말했다.


 '나는 자네의 아버지를 잃었네.'


 '전하께서는 잃어야 할 것을 잃으신 것 뿐이었습니다. 하라드 이실은 캘커리에게 약속된 제물입니다. 하라드 이실은 늘 본래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쓰여야 할 곳에 쓰이며, 거두어져야 할 때 거두어진다는 것을 아이들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자랍니다. 비록 제게는 그럴 듯한 사탕발림이 되지 못했습니다만.'


 남쪽 담의 올모스. 쪽빛의 올모스. 남쪽 담의 어린양.


 에아르닐이 하라드 이실의 영주의 자리에 앙그라드를 앉힌 것은 단순히 그가 그 비옥한 땅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어나 한 번도 하라드 이실에 속하지 않았던 젊은 영주가 그 땅을 사랑해 마지않았던 아버지에게 준비한 얄팍한 복수였다. 


 


 에아르닐은 하얀 면목의 셔츠와 얇은 갈색 바지, 갈색의 베스트 위로 붉은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에아르닐.' 그에게는 여전히 휘장처럼 붉은 머리를 한 친우가 있었고, 광장의 단상과 엉성하게 짜인 사과 상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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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iras EPILOGUE

소피에서 쓴 미션 중에 이렇다 하게 마음에 드는게 없네요. 감정과잉, 묘사과잉의 방황기였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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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