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시嚆矢



  마세라는 광장 한 가운데에 볕을 등지고 서있었다. 날씨는 완연한 봄이었다. 그는 깨끗한 흰색 셔츠에 엷은 황토색의 바지를 입고 광장 한 가운데 서있었다. 셔츠는 곳곳이 구겨져있었고 너풀거리는 소매끝은 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탓에 뒤로 접혀있었다. 광장은 한산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가죽신이 땅을 스치는 가벼운 소리, 말발굽이 광장의 돌을 채는 소리나 붉은 천으로 차양을 내린 노점상에서 이따금 과일을 사고파는 소리가 광장을 메우는 소리의 전부였다. 마세라와 에아르닐은 늘 그 광장이 자신들을 둘러싼 한 무리의 사람들도 북적이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광장은 늘 한 무리의 젊은이들과 젊다기에는 조금 나이가 든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마세라는 눈부신 햇살 탓에 눈썹을 좁히고 오랫동안 광장 가운데 서있다가 곧 멀리서 보이는 그림자에 천천히 얼굴에 활기를 띄었다. 짙은 적갈색의 머리칼은 본래 그를 활기찬 사람처럼 보이게 했고,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그의 사상을 이야기할 때면 캘커리의 빛처럼 빛났다.


“에아르닐.”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그가 에아르닐을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히 들떠있었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있었고 마세라의 부름에 에아르닐은 단순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아르닐의 차림새는 보기드문 종류의 것이어서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옷가지를 바라보고는 약간의 놀란 눈길을 보냈다가는 이내 거두어냈다. 에아르닐의 차림새는 대개 수수했으나 옷감만큼은 질 좋은 것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 한 눈에 보이는 검소하고 눈에 띄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그는 희고 잘 정돈된 셔츠 위에 금색단추로 마감한 갈색 베스트, 그리고 봄에 입을 만한 얇은 천으로 된 외투까지 걸쳐 입고 있었다. 소매끝이나 바짓단을 여민 보석이 박힌 단추들은 광장의 단상에 올라서는 에아르닐에게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고 게다가 하인이 매어주어야만 하는 리본으로 매듭을 지어 신는 신발은 누구든 그가 하인을 부릴 만한 계급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왕궁에 가는 모양이지?”


  에아르닐은 말없이 엷은 웃음기만 흘렸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다고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아도 욕심 없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는 애매모호한 웃음의 의미는 긍정과 다름없다는 것을 에아르닐의 오랜 친우는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왕궁 출입이 잦아. 마세라는 걱정하듯 물었으나 에아르닐이 하는 일에 그가 심하게 염려해야할만한 일은 대체로 없었다. 에아르닐은 마세라보다는 조용하고 말 수가 없는 인물이었으나, 마세라는 에아르닐이 늘 반드시 그러한 종류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아르닐은 필요하다면 입을 열었을 것이고 필요하지 않다면 아니라는 말조차 없이 입을 다무는 사람이었다. 염려하듯 왕궁 출입이 빈번하다는 것을 지적했지만 에아르닐은 필요하지 않다면 발걸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세라는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이번 주에 광장에는 나올건가?”


   마세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에아르닐의 표정에 큰 변화가 일었다. 주에 한 번 씩, 사람들이 생계를 내려놓고 쉬는 날 귀족과 평민들이 몰려들어 너나할 것 없이 뒤섞여 이야기를 나누는 광장에서의 모임에 에아르닐은 수도에 올라와 활동을 시작한 뒤로 빠져본 적이 없었다. 때로 단상에 올라가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날도 있기는 했으나 에아르닐은 그 인파의 어딘가에서 마세라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의 하나이고는 했다. 에아르닐은 마세라의 물음에 그때서야 자신이 그 광장에서 한걸음 벗어난 위치에 서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마세라가 이제껏 한 번도 변한 적 없던 사실이 앞으로도 건재할는지 의문을 품을 만큼 요 근래의 에아르닐의 행적은 크게 이전까지의 궤도를 벗어나 있었던 탓이다. 광장에 로브를 걸치고 온 순찰자를 만난 뒤로 부터였다. 


“당연한 일을 구태여 묻는 게 아닌가, 마세라.”


  마세라는 코끝을 찡그리며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고는 에아르닐의 걸음을 따라 왕궁 근처까지 천천히 걸었다. 봄의 햇살은 따듯했다. 왕궁의 기사들이 십자로 겹쳐져있던 창을 들어 에아르닐에게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었을 때, 마세라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러났다. 







  순찰자의 신분으로 만났던 남자는 왕좌에 앉아있었다. 에아르닐이 그를 두 번 째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에아르닐은 가르완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왕좌 위에 앉아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치 마세라가 에아르닐이 광장의 단상에 오르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에아르닐이 젊고 급진적이었으나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왕은 젊었으나 많은 것을 포용할 줄 알았다. 순찰자의 로브를 입고 직접 광장에 나오는 성정을 생각했을 때 어쩌면 그는 왕이라고 칭하기에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았는지도 몰랐으나 옳은 것을 고집하는 것과 많은 것을 포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에아르닐은 그것이 그릇의 차이임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에아르닐은 왕이 말하는 일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에아르닐은 언제나 그가 말할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하되 왕의 뜻대로 하라고 일렀다. 에아르닐은 자신이 젊고, 젊기 때문에 급진적이나 젊은이들은 이따금 혹은 빈번한 횟수로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마저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왕에게 그의 생각을 털어놓되 왕이 말하는 바대로 따랐다. 

  왕이 그에게 라가하트리로 떠나라고 했을 때에도 에아르닐은 잠시 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에아르닐은 왕의 의중을 셈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가르완이 에아르닐에게 그러한 일을 맡겼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그만한 가치의 일이 있을 것이었고 에아르닐에게 그만큼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에아르닐은 먼 타국의 땅의 이름에 잠시 골몰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르완은 에아르닐이 떠나기전에 그에게 몇가지 말을 덧붙였다. 



‘고결한 아이가 목을 잃고 호수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호수는 사막이 될 것이다’



“꼭 목을 잃어야합니까? 목숨을 잃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까?”


  에아르닐이 그렇게 물었을 때 왕은 대답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침몰한 땅의 호수 바닥에서 목을 잃은 사내 아이 시체가 발견되었다는군.”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사내아이면 적어도 캘커리의 왕은 아직 아들이 없었다. 남은 것은 디올라와, 오나하, 레보르프였다. 마법에 관한한 디올라가 가장 손에 꼽히는 유력인사임에는 사실이었고, 오나하는 호수의 범인으로 손꼽기에는 마법에 관한 지식이 부족해 보였다. ‘악의 근원’을 손에 넣고 전투력을 강화시키기에 오나하는 이미 강했다. 오나하에 당장 필요한 것은 전투력과 전사들보다는 식이와 물자의 조달에서 오는 생활의 안정일 것이다. 오나하와 디올라에 비해 레보르프는 국력이 약했다. 그만한 대담한 짓을 저지를만한 나라인가 물으면 아니라는 쪽이 옳았을 것이나 에아르닐은 어쩐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부유하고 손익에 밝으나 주변국에 억눌려 국력이 약한 나라.

  왕은 골몰하는 젊은 정치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아르닐이 왕궁에서 나왔을 때 마세라는 여전히 광장 가운데에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날은 덥다기보다는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할 만큼 서늘했고 마세라의 곁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생계를 위한 일감을 손에서 놓은 몇몇의 가장들과 느즈막히 거리로 나선 그의 젊은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열이 띄기에는 자뭇 즐거운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왕을 의미하는 말들도 수차례 오고갔다. 광장에 모여 토론을 하기엔 지치고 고달픈 하루였을 것이나 젊은 혈기는 다른 것들을 뒤덮고도 남았다. 젊은 정치가 지망생들의 대부분은 이름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지만 개 중에는 젊고 명석하나 출신이 평민이어서 늦은 오후까지 마을의 골목 어귀에서 수레에 과일을 싣고 파는 젊은이도 끼어있었다. 그는 출신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발언권을 얻는 대신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다른 귀족들 보다는 훨씬 더 민중들의 삶과 도는 소문에 밝았다. 

  에아르닐은 목을 꽉 졸라매고 있었던 커프스를 벗어 얇은 외투 주머니에 넣고는 멀리서 분수대를 등지고 앉아있는 마세라를 향해 가만히 눈짓해보였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진하고 탁한 녹색눈과 마주치고는 에아르닐이 작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보이자 천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한 무리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마세라는 뒤늦게 무리에 합류했던 과일 장수 젊은이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세라. 내가 이전에 ‘자치’에 대해서 말한 적 있지.”

“분명 그랬네. 그게 문제가 되었단 말인가?”

“아냐. 나는 사실 캘커리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그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어. 캘커리의 부국강병이 좀 더 확실시되기만 한다면 말이야. 그런데 내가 캘커리가 강건해져야한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네.”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은 없잖나.”

“자네에게 말하기에도 너무 섣부른 생각은 아닐까 했기 때문이지.”


  마세라는 에아르닐의 말에 잠시 에아르닐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친우가 쉽사리 사람에게 그의 깊은 생각을 내보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만 가정사까지 죄다 에아르닐에게 내보여진 마세라 입장에서 에아르닐의 태도는 이따금 여간 섭섭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었다. 에아르닐은 바람결에 흩어지는 적색 머리칼에 시선을 두었다가 미안하기보다는 때가 아니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마세라를 바라봤다. 


“나는 레보르프가 자꾸만 눈에 밟혔네. 레보르프는 부유한 나라야. 디올라와 캘커리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부유하다고 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돈을 벌어가고 있지. 상인들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부유한 나라인데도 레보르프에서 오는 상인들의 얼굴을 보면 하나같이 밝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네. 레보르프가 위치 상 오나하에게 자주 약탈을 당한다는 사실은 흔히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일이지만 나는 그 문제가 생각보다 큰일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 레보르프의 상인들이 위협을 당하면 디올라와 캘커리에의 무역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고, 위험을 부담하게 되니 중개무역 물품들은 더욱 값이 오를 수 밖에 없지.”


“디올라와는 달리 캘커리는 온화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레보르프의 이익을 캘커리 홀로 충당해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었네. 레보르프의 손익에 귀신같은 상인들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 말야. 내가 캘커리의 부국강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것은 그때문이었지. 캘커리만 레보르프에게 순순히 모든 걸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야.”


  에아르닐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일이 생각보다 심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전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더더욱 그래.” 


  그들이 지금 상황을 타파해야한다면 어떻게 할까? 오나하의 약탈을 종식시키고 디올라와 캘커리 사이에서 얻는 이익을 극대화 하려면? 결론은 간단했다. 일곱 살 먹은 계집아이에게 물어도 손쉽게 대답했을 것이다. 오나하가 없어지면 된다. 더 복잡한 수식도, 정치적 수완도 때에 따라 도움은 될 것이나 오나하의 약탈은 국가가 눈감아주는 국지적인 면모에 더 가까웠다. 레보르프도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닐것이다. 그래서 여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오나하가 없어지면 된다. 다소 과격한 결론이었지만 레보르프가 살기 위해서 그보다 명쾌하고 그보다 무모한 선택은 없었다. 에아르닐은 자신의 비약적인 사고에 눈살을 지푸렸다. 


“이번 주에는 광장에 못 갈 것 같네. 마세라.”

“뭐?”

"라가하트리로 떠나게 됐어.“


“일년 내내 꽃비가 내린다는 디올라의 수도 말인가?”

“그래. 하지만 자네가 있으니 광장은 늘 그랬던 것처럼 활기차겠지.”


  마세라는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긁적이고는 이윽고 밝게 웃었다. 잘 다녀오게 에아르닐. 에아르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놀라는 한편 어디에선가 수긍해주는 그의 오랜 친우를 바라봤다. 에아르닐은 본래 누군가를 곁에 두지 않아도 충분해하는 성정이었으나 라가하트리에 머무는 동안 그의 부재는 에아르닐에게 있어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고 그에 걸맞는 이야기나 토론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이었다. 마세라는 에아르닐이 하라드 이실에서 떠나 처음으로 얻은 지지자였다. 에아르닐은 오랫동안 홀로 자랐으나 클레릭에서의 세월은 에아르닐에게 많은 추종자들과 사랑과 지지대를 내어주었다. 에아르닐은 콧잔등은 긁적이는 마세라에게 대답대신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에아르닐이 라가하트리에 도착했을 때 에아르닐의 어깨에는 검은 여우털로 된 망토가 걸려있었다. 캘커리에서 레보로프를 거쳐 디올라로 향하는 길은 빈번히 갈고 닦이지 않아 말에게도, 마차에 탄 사람에게도 모두 험난했다. 디올라로 접어들수록 캘커리의 사신들은 보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에아르닐은 검은 여우털로 만든 그의 낡았지만 잘 손질된 코트로 그 추위를 버텨냈다. 디올라는 북쪽이었지만 각 영주들의 영지를 지나올 때 마다 마법으로 갈무리된 온화한 날씨들이 디올라의 추위를 한 풀 꺾어주는 노릇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수도는 마치 클레릭의 봄처럼 따스했고 에아르닐이 여우털 망토를 벗기도 전에 검은 여우털 위에 꽃비가 소복히 내려앉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디올라의 연회는 명목상 태어난 공주를 위한 것이었으나, 캘커리와 레보르프 오나하에서 온 사절단과 그들이 가져온 축하 선물만 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목적을 띈 종류의 연회인가를 쉽게 눈치 채고도 남았다. 캘커리는 갖가지의 비단과 보석들을 선물했으나, 그 비단들이 캘커리에서만 나는 직물이며 은실로 수놓은 직물의 무늬들이 얼마나 값비싼지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고 여린 아기 공주는 연회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았고 고작 이 연회의 안주인이라고 불리우는 디올라 왕의 후궁의 얼굴만을 간간히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금기를 깨기 위해서는 고결한 아이의 목이 필요했다. 디올라에서 왕자가 죽었다면 아무리 공주가 태어났다고 한들 이토록 정치적이고 성대한 연회를 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에아르닐의 머리에 왕자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외려 때마침 잘 태어나준 공주의 탄생을 빌미로 다른 것을 덮어둘 만큼 성대한 연회를 열었는지에 대한 의심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연회에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있는 하인들이나 디올라의 귀족들이 흘리는 말에 어디에서도 불미스러운 왕궁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다. 

  북쪽에 위치한 수도를 이토록 따듯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이 있는 디올라가 일부러 악의 근원을 도로 되찾으려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는 것이 에아르닐의 판단이기도 했다. 디올라는 오나하에게 약탈을 당하지도 않았으나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 농경이나 식생에 유리하지 못한 점들까지도 각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능력에 따라 제각각의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았다. 수도인 라가하트리가 이토록 따듯하고 풍요로우니 다른 영지들도 이에 버금가지는 못하더라도 영지민들의 식생활에 최소한의 보장은 할 수 있을 만큼의 기후를 보장하고 있을 터였다. 영주든, 마법이든, 국가에 이르렀든 간에 가장 기본적인 모든 정치의 근간은 백성들이었고 백성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되면 그로도 만족했다. 어느모로 보나 디올라가 지금 당장 곤궁하도록 금기를 어겨야하는 이유는 없는 것으로 비췄다. 

  에아르닐은 시간이 그에게 허락하는 한 연회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디올라의 귀족들과 사절단 사이에 섞여 이야기를 들었으나 뜬소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따금 새로 태어난 공주의 영력을 논할 때마다 그래도 어느 왕자의 영력에는 버금가지 못할 것이라며 정비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러한 왕족이 끊임없이 배출될 경우 왕권이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만이 슬그머니 비어져 나와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 나이 또래의 왕자가 사라진 일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본래 영력이 강한 마법사들과 탤랜타에 의해 좌우되는 국가인 만큼 왕권의 강화에 대한 반발심은 애국심 이전의 다른 문제로 치부되는 것처럼 보였다. 

  에아르닐은 디올라에서는 죽은 왕자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연회에 나온 후궁을 대하는 클레드윈의 모습은 사랑 이전에 배려와 기품이 넘치는 배우자의 것에 다름 없었다. 게다가 왕으로서 자기 자식을 희생하고서라도 국력을 높이고자 하면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일반적인 왕의 모습이었으나, 클레드윈의 모습에서 에아르닐은 아들을 희생하고 난 사람의 그 어떤 위화감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침몰한 땅의 호수에 대해서는 외려 캘커리에 비하여 모두들 관심이 적었다. 새로 태어난 공주의 영향 때문임을 감안하고서라도 소문이 늦다는 것은 전하는 사람이 적으며 관련된 인물이 적다는 뜻이었다. 연회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이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다. 





  전쟁에는 늘 효시가 있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군용 식략으로 쓸 곡물이 차출되고, 그 다음에는 세율이 오른다. 나라의 기사들로 수가 충당되지 않을 때에는 귀족의 사병이나 평민출신의 백성들 까지 징집한다. 전쟁은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더라도 전쟁의 준비는 늘 그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다. ‘악의 근원’의 부활은, 그를 부활시키기 위한 ‘금기’를 깨고자 함은 팔백년 동안 이어져온 평화를 깨트릴 전쟁의 효시일는지도 모른다. 전쟁에는 효시가 있는 법이었다. 이제 막 ‘금기’를 깨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면 분명 다음이 있었다. 라가하트리에서 클레릭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에아르닐은 생각을 접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다음. 그 말만이 머릿속에서 그가 잠들 때까지 그를 좇아왔다. 



Mission 01 

'Sopiras Chronic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RED  (0) 2013.02.03
둑堤  (0) 2012.08.14
<Harad Ithil>  (0) 2012.07.02
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