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ir 4/3
자리나 내주고 그런 소릴 하든가. 실명이 웅크린 등 뒤에 대고 부루퉁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이미 몸을 말고 눈을 감은 채로 잠든 체를 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좁은 침대에 몸을 더 웅크릴데가 어디 있다고. 사람이 적당히 자릴 내줬으면 알아들어야지 한마디가 많았다. 옷이 풀썩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은 채로 약을 생각했다. 망가진 매트리스가 실명이 올라오는 무게에 출렁거렸고 눈이 뜨일만큼 허리 밑이 텅 비었다가 곧 물컹한 매트리스가 다시 제 자리를 꿰어차고 등 뒤를 메꿨다.
잠이 오질 않는 밤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사람이 자는 소리에 익숙하고 민감한 사람이었다. 집 안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야 곰팡내 나는 더럽고 좁은 집의 작은 요 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 새끼가 약에 손을 대기 전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 집이 싫었다. 요는 빨지 않아 냄새가 났고 너무 오래 써서 솜이 다 죽어 푹 잔 다음날이면 어린 내 허리도 쑤셨다. 집은 늘 습기가 제대로 빠지지 않아 여름이면 요까지 축축했다.
나는 오랫동안 실명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가 잠들고 나면 나 편한 대로 몸이라도 뒤척여 보려는 심산이었다. 실명이 느린 목소리로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실명이 졸리거나, 술에 취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리를 놀리는 몸이 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이진 않았지만 실명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 내용이 실명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으로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실명에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겠지. 실명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우스운 일이었다. 왜 새삼스레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에게도 가족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마는지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약하는 개새끼와 개새끼를 돌봐주는 어미개처럼 실명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애들은 모름지기 혼자 자라지는 않는 법이었다. 아마 여전히 그 곰팡내 나는 집에 있는 사람들 보다 실명의 부모는 더 나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애들 마냥 뭐라고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실명에게 부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보스에게 부모가 있을거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 만큼이나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나는 잠든 척 깊은 숨을 내쉬었다.
네 생각이 나더라는 거야.
실명에게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아니면 그 다음으로는 어쩌면 공범이라 그랬을 지도 모르고, 그 말도 아니면 어쩌면 들키고 나면 서로 두 번 돌아볼 것도 없이 망해버리고 말 것이기에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짐짓 자는 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실명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탓이라고 하자면 실명은 얼마든지 내 탓을 할 수 있었고, 실명의 탓이라고 하면 나는 다시 그 탓을 실명에게 얼마든지 돌릴 수 있었다. 우리 사이란 고작 내가 멍청한 계집애들처럼 보스 옆에 있다가 그를 도발했기 때문이라거나 내가 눈꼴시었던 실명이 나를 강간했거나, 둘 중 하나로 시작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생긴 이상하고 께림찍한 유대감을 나는 알아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실명은 얼마든 약을 가져다 주지 않을 수 있었고, 그가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사이의 일을 내가 보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실명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것들을 부탁할 사람이 실명밖에는 없었고 실명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에 뒷일이 무서울 만큼의 대가를 받아가면서 까지 하얀 가루 한봉지를 가져다주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얽매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옹송그린 채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창 밖이 푸르스름하게 변하자실명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쥐새끼처럼 조용히 일어났다. 옷을 입고 실명이 건네준 봉투를 옷주머니에 넣었다. 자물쇠가 걸리지 않아도 들어와도 훔칠 것 없는 집이다. 애초에 빈집털이들은 이런 집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기 때문에 실명이 그대로 집을 나서도 괜찮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의 실명은 일어났을 때 내가 없어도 집을 나설 것이다.
그럼에도 후드를 눌러 쓰고 운동화를 신다가 비좁은 현관에서 몸을 돌려 작은 집을 바라봤을 때, 그에게 쪽지라도 하나 남겨야하지 않느냐는 생각에 잠시 발을 멈췄다. 실명은 영리하고 자신이 없다고 해서 이 집에 오래 머물 사람이 아니다. 분명 보스의 부하가 이 집에 자신을 데리러 오는 시각 전에는 분명히 빠져 나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쪽지 하나쯤은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수퍼 앞에 나갔으니 일어나면 나가라던가, 금방 오지 않을테니 일어나면 가도 된다던가. 무슨 말을 적어도 결론은 가도 된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사람의 모양대로 불룩해진 헤지고 얇은 이불을 쏘아보듯 오랫동안 쳐다봤다.
일어났다고 잘잤느냐 인사하고 웃으면서 헤어질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운동화를 벗지 않은 채로 몸만 숙여 방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손을 대충 뻗어 집에 돌아다니는 전단지를 집었다. 개중에 하얀 걸로 모퉁이를 찢고 까만 볼펜으로 글씨를 썼다.
'나감. 일어나면 가. 문은 신경 쓰지 마.'
나중에 쪽지라도 들키면 큰일이 날까 생각하다 헛웃고 바닥에서 엉금엉금 몸을 일으켰다. 운동화에 실명의 구두가 채이는 소리에 실명이 깨지는 않을까 한참이나 현관문 앞에 서있다가 천천히 문을 열고 나섰다. 매번 나갈 때 마다 다짐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없다.
곰팡내 나는 집은 한참이나 멀었지만 나는 발 끝에 돌부리를 채어가며 걷기로 했다. 한시 바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이 모든 것을 던져놓듯이 끝내고 싶으면서도 최대한 늦게, 영원히 그 집에는 도착하지 않을 것처럼 굴고 싶었다. 묵직하게 안주머니 안에 담긴 물건과 실명의 생각을 했다. 다시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다음에 무엇이 있든 다시 한 번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건 실명일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몸밖에 의지할게 없었고, 값이란 건 돈처럼 충분한 사람에게는 더 치를 필요가 없어지는 물건이었다. 보스에게 나는 이미 치러진 값이었다.
적어도 이제 내가 입이라도 벙긋할 수 있는 사람은 실명 뿐이었다. 몸으로 치루는 값을 전제로 한다고 하더라도. 하필이면 내 생각이 났던 사람에게.
빈집 털이도 꺼려할만한 내 집보다, 내 작은 방보다 곰팡내 나는 집은 훨씬 작고 흉하고 더러웠다. 그 동네 집들에는 가스관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화장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드문드문 언덕 중턱배기에나 하나씩 있었다. 애들 허리 높이만한 수돗가에 깨진 다라이가 굴러다녔고 뚝뚝 물이 떨어지는 수도꼭지에 더러운 들개가 혀로 수도꼭지를 핥고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집 안에서는 여름 내내 곰팡이가 쓸었던지 아직도 가시지 않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이전에 왔을 떄 보다 집은 배로 더러웠고 발치에는 걸레짝만도 못한 옷가지가 치였다. 여자는 집에 없었다. 어디든 반쯤 금단증상으로 몽롱해진 의식으로 개새끼의 약값이나 대려고 나갔을 것이다. 집 한구석에 다리를 씹힌 들개처럼 웅크려 누워 뭐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나는 문밖으로 나와 금간 시멘트벽에 등을 기댔다. 안에서는 계속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멀리서 들리는 불경소리처럼 그 놈의 목소리는 약기운이 떨어져 조용하고 음침했고, 단어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하고 복잡했다. 사람이 아니라 개가 사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미친놈.
담배를 다 태우고 나서는 군데군데 시멘트칠이 제대로 되지 않아 흙이 비어져 나온 경사길에 담배꽁초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해가 이제 막 중천에 뜨려다가 구름에 가려 안그래도 어두침침한 동네만큼 어두침침해졌다. 원래 이 동네는 낮에 사람이 없었다. 학교간 애들이나 돌아와야 좀 활기가 돌았고 아침부터 밤까지는 폐지를 주우러 나간 노인들과, 일 나간 가난한 부모들과, 어디선가 동전을 주우러 다니는 약쟁이들의 부재로 음산할 만큼 조용한 동네였다. 다리 저는 들개 같은 것들이나 여기저기 기어다니다가 오래된 소설처럼 좀약 먹고 거품 물고 죽는 동네였다. 가끔은 개 주제에 좀약은 귀신같이 피해다니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저 아래에서 여자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곱은 등을 하고 언덕배기를 올라왔을 떄 나는 안주머니를 털어 약을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말없이 그 언덕을 내려왔다. 멀리에서 여전히 낮은 불경소리처럼 개새끼가 사람 말을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남은 환청이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언덕 아래 골목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이 동네보다는 그래도 내 방이, 내 집이 나았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주변에 뭐라도 잡히는 게 있었다면 나는 뭐라도 그에게 집어던졌을 것이다. 칼이든, 나무 꼬챙이든 종이 뭉치든간에. 일어나면 가라는 건 절대로 이런 의미가 아니었다. 입술이 일그러질정도로 악물면서 인기척을 바라봤다. 나는 내가 우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