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ights of NewYork 01
01.
루윈 이바노브 1970.10.10. 뉴욕 출생.
신장 5.8피트. 마른 체격. 진한 밤색머리, 밤색 눈. 눈에 잘 띄지 않음. 평범한 인상. 양복 착용.
콘실리에리. 뉴욕 외곽에 출몰.
조직의 경향이 루윈 이바노브의 출현과 함께 변화하였음. 지능적으로 변화. 경영면에서 두드러짐.
조직이 점차 기업 적인 성향을 나타냄. 고학력 또는 고지능의 경제 관련 인물로 추정.
검은 승용차. 적어도 중간 간부 이상의 인물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 간부의 정부라는 후문.
할렘 w136번가와 w148번가 사이에 픽업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임.
02.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날은 비가 왔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비가 한차례 오고 나면 날이 퍽이나 추워질 것 같아 한동안 내려 마실 커피와 상하지 않는 음식을 마트에서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 그를 안아 올리면서 옷에 피가 묻었던 것이 선명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보리색이나 흰색 터틀넥 셔츠에 늘 입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차에 타고 있었지만 그를 차 안에 앉힌 뒤에는 운동화가 빗물에 젖어 질퍽질퍽 거렸고 그 후로 몇 일간은 발이 물렁해져 워커를 신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 비오는 거리에서 그를 픽업한 것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였다.
03.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는 강하지 않았지만 부슬부슬 하루 종일 내린 비는 정비되지 않은 뒷골목들을 온통 진탕으로 만들어 놓았고 십년이 넘은 자동차는 도로를 달릴 때 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 듯 덜컹거렸다. 그 도로를 지나간 것은 순전히 그날 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일터에서 집까지 가는 데에는 늘 꽉 밀린 대로보다는 렌트 값이 싼 아파트 사이를 지나는 쪽이 빨랐는데 비가 오면 도시 외곽의 흙길은 모두 엉망이 되었다. 어설프게 아스팔트로 포장한 뒷골목을 달리던 낡은 차가 잠시 멈추어 섰다. 남자는 핸들에 몸을 기대고 오른쪽 차창 밖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내 좌석 밑에서 물에 축축하게 젖은 검은 우산을 꺼내어 들었다. 너무 낡아서 이제는 사는 사람이 없는, 거의 폐허에 가까운 건물 벽에 그는 기대어 앉아있었다. 기대어 있다기 보다는 거의 쓰러져 있었으나.
“이봐요. 괜찮아요?”
여기저기 얻어맞은 듯 울긋불긋 푸르고 붉게 멍이 든 얼굴. 입술 옆은 터져서 피가 났고 왼쪽 눈은 뜨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로 부어올라있었다. 할렘에 가까운 지역인데다가 주변에 불장난이라도 할 만한 공터가 많은 지역이라 근방의 갱들이 자주 보이는 부근이었다. 그는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듯했을 갈색 수트와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갱에게 돈을 목적으로 시비라도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자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본다. 분명하게 백인에 속하는 피부색과 전체적으로 살집이 없는 몸. 키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거나 그 이상. 남자는 어깨와 뺨 사이에 검은 장우산을 끼우고 양 팔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안아들었다.
“이 앞에 바로 차가 있어요. 거기 까지만 걸어봐요.”
“으...”
그는 그제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얼굴만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걸을 때 마다 신음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부나 가슴에도 멍이 들어있거나 잘못하면 좀 더 심각한 내상이 있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낡은 검은 세단의 조수석 문을 열고 시트 위에 그를 앉혔다. 그는 거의 눕다시피 하는 모양새로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고, 남자는 검은 장우산을 접어 조수석 아래에 밀어 넣은 뒤에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의 젖은 코트와 얼굴의 빗물을 닦아 내고 차 안에 요란하게 울리고 있던 다니엘 포터 노래를 껐다. 차 안에는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낡은 쇳덩이가 비를 맞으며 내는 소리가 차 안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는 고열에 들뜬 느리게 뜬 숨을 몰아 쉬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파트로 향하는 동안, 오른쪽 귓가에서 낯선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파트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아주는 아니지만 조금 낡았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 차 기름값을 대면서도 그럭저럭 지낼 만큼의 렌트 값만을 받았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신에 몇 블록만 더 가면 종합병원이 있었고 방은 그 월세 치고는 약간 넓은 축에 속했다. 수압이 만족스럽지 못하긴 했지만 욕실도 따듯한 물 만큼은 잘 나왔음으로 남자는 직업을 얻은 뒤로는 줄곧 그 아파트에 살고있었다. 남자는 현관에 축축한 장우산을 던지고 그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이리 저리 몸을 가누지 못하고 좁은 아파트 입구에서 벽에 부딪힐 때 마다 그의 코트에 묻어있던 흙이 벽에 묻었고, 베이지색 코트 끝자락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이봐요, 왜 이렇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젖은 옷부터 벗어야 돼요. 당신 지금도 끔찍하게 열이 나고 있다고요.”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곤혹스러웠다. 남자는 젖은 몸으로 휘청거리는 그를 붙잡아 좁은 욕실로 밀어넣고 다 젖어서 못쓰게 된 가죽 구두를 벗겨 욕실 밖으로 던졌다. 물에 젖은 옷들은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남자는 그의 옷을 벗기는데 굉장히 노력했다. 코트는 손쉬웠으나 투버튼 양복 재킷과 아예 몸에 늘어붙은 것처럼 젖어버린 셔츠는 쉽지 않았다. 여자의 브래지어를 벗길 때나 신중할 법한 손이 아주 고심하면서 하나하나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그는 자꾸만 욕실의 차가운 타일벽에 부딪혔다. 갈비 뼈 아래에서 주먹 하나 크기만큼 내려온 옆구리와, 복무. 허벅지 바깥쪽에 보라색에 가까운 멍이 들어있었고 쓰러지면서 접질린 것인지 아니면 발목의 뼈를 밟혔는지 발목이 부어올라 있었다. 총체적으로 잘도 두들겨 놨네. 남자는 뜨거운 물을 양껏 틀어서 물에 흠뻑 옷을 적셔가며 그를 지탱했다. 일단은 차갑게 식은 몸을 덥히는게 중요했다. 보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몸은 마른 축에 속했다. 하얗게 질린 탓에 흰 몸이 더 희어보였다. 남자는 제대로 개어놓지 않은 빨래더미 가운데서 서둘러 큼지막한 바스 타올을 꺼내어 그의 몸의 물기를 닦았다. 그는 고열로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고,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옷을 벗겨져 샤워를 마치고 난 직후임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남자가 이끄는 대로 침실로 끌려갔다.
남자는 자신의 셔츠를 꺼내어 그에게 입히고 침대에 뉘였다. 베개를 목 뒤에 받치고, 목까지 푸근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칼 때문에 베개가 약간 젖었다. 머리는 손으로 털면 금방 마른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집에 드라이어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남자는 젖지 않은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문질렀다. 썩 괜찮을 만큼 물기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베개 위에 마른수건을 깔아주었다. 텅텅빈 주방의 찬장에서 겨우 오래된 감기약을 찾아낸 남자는, 그의 턱이 벌어지도록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그의 양 뺨을 힘주어 눌렀다. 입을 벌리라고 말해봐야 말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는 일단은 감기약을 억지로 그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그는 강제로 들어온 약물에 본능적으로 조금 컥컥거렸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수저로 물을 한 스푼 떠먹인 뒤에야 남자는 등을 곧게 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침대 밑의 공간에 넣어둔 구급상자를 꺼내어 남자는 알콜의 냄새를 맡는다. 그의 몸을 꽁꽁 뒤덮은 이불의 발치를 살짝 들어올려 부어오른 발목에 크림을 바르고 아프게 주무른 다음 붕대를 두바퀴 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발목을 치료한 다음에는 허벅다리와 상체였다. 멍이 든 부분마다 약을 발라주고 다시 이불을 덮었다. 잠결에도 아픈지 잔뜩 찡그린 얼굴에도 그렇게 해 주었다. 터진 입가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뒤에, 입 안쪽에는 면봉으로 약을 묻혀 터진 곳을 닦아내듯 조심스럽게 문질러 주었다. 길에서 다친 사람을 주은 것 치고는 상당히 호사스러운 친절이었다.
그가 의식을 차렸을 때는 작은 방 안으로 고소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남자의 집은 현관에서 두걸음만 걸으면 욕실이 있고, 그 앞으로 두 팔을 펼친 것 만한 주방과 아주 좁은 거실이, 그리고 거기에 작은 침실이 하나 딸려있는 구조였다. 그가 침대를 짚고 상체를 약간 세워 침대 헤드에 기댔을 때에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차 안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기억했지만 정확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낯선 남자의 등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걸으려고 했으나 그의 발목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이불을 약간 들추었을 때에서야 자신이 하의를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는 치킨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미국인의 감기 보양식이었다. 영혼을 위한 치킨수프처럼. 담백하고 따듯한 냄새가 났다. 냄새가 따듯하다는 것은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따듯한 냄새였다. 방 안의 창들은 모두 바깥보다 따듯한 방안의 온도 때문에 부옇게 흐려져 있었고, 제때 세탁은 했는지 의심스러운 회색 커튼이 축 쳐져 걸려있었다. 남자는 덩치 있는 어깨를 약간 들썩거리며 이따금 발로 바닥을 탁탁 쳤다.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에 맞추듯이. 그는 침대 맡에 놓인 나무 의자를 바라보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구닥다리 진부한 묘사에 그칠지도 모르겠으나, 남자는 색이 깊은 블론드에 보기 힘든 녹색 눈을 하고 있었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회색으로 변하는 짙은 색의 눈동자만큼은 그가 미국인이라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길가다가 열에 여섯은 마주칠 것 같은 건장한 체격이었고, 남자는 젖은 옷을 갈아입었는지 편안한 민무늬의 흰셔츠에 회색 저지를 입고 있었다. 팔과 손에는 자잘한 상처가 생겼다가 아문 자국들이 보였다. 손끝은 뭉툭했으나 게을러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남자에게서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치킨 수프와 물 한컵, 스푼을 올린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촌스러운 꽃무늬의 트레이. 남자는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가기라도 했던 것일까 생각되었을 만큼 트레이는 촌스러웠다. 갭에 가서 같은 사이즈의 같은 흰 티셔츠를 다섯장씩 살 것 같은 인상이었으나, 집안일에는 더더욱 무심해 보였다. 가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이상한 거 안넣었어요.”
수프와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는 그에게 남자는 웃음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웃으면 아이같은 얼굴이 되었다. 건장한 체격의 스물 후반대의 남자가 아이처럼 웃는 광경이 생소해서 그는 약간 미간을 지푸렸다. 여기까지 호의를 보이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남자가 자신을 부축했을 때 일단 자신은 주거지를 댈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든 상태가 아니었고, 옷이 젖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상처가 난 상태였던 점 같은 것들 때문에 남자는 그를 이 집으로 데려왔을 지도 몰랐다. 그 뒤는 아주 이상하지만 아주 간단했다. 성인 남자가 성인인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샤워 시켜 병을 간호하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의 관계였다는 것만이 이 이상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는 당장에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수저를 수프에 넣고 휘저은 뒤에 입 안에 머금었다. 썩 맛있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남자는 처음에 그를 지나칠 수도 있었고, 거기에 두고갈 수도, 근처의 응급실에 맡길 수도 있었다. 남자가 그를 해치려고 한다면 해칠 수 있는 여지는 이미 충분히 있었다. 그는 일단 당장에 취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가져온 치킨 수프를 반 정도 먹었다. 그가 수프를 마시는 동안 남자는 그의 열을 쟀다. 열은 위험한 수준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왜 도와줬어요.”
그의 말투는 의문문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는 인사보다는 이유가 우선했다.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웃었다.
“그 지역은 좀 위험하거든요. 출퇴근 길이라 잘 알죠. 게다가 당신 엄청나게 맞지 않았어요? 비에 젖어서 완전히 의식도 없었고요. 그런 사람을 모른 척 하고 지나가기엔 양심에 찔려서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다시 눕히고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덮었다. 그는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여기저기가 아픈 것 처럼 인상을 지푸렸고 남자는 촌스러운 트레이를 주방에 놓고 놀아와 의자에 앉았다.
“다음부턴 그쪽에 그런 옷 입고 다니지 않는게 좋을걸요. 내 돈 훔쳐가라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안그랬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남자는 다시 한 번 그의 혀 아래에 온도계를 넣고 체온을 쟀다. 그가 체온계를 물고 있기 위해 입을 다문동안 남자는 뭐라고 떠들었다.
“일단 응급처치는 했어요. 학부에서 간단한 의료학 비슷한 건 수료했거든요, 완전히 돌팔이는 아니니까 걱정마요. 그래도 일단 내상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까 검사는 받아 봐요. 쇄골은 부러진 것 같고 갈비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으니까.”
“병원은 안돼요.”
남자가 체온계를 혀 밑에서 빼내며 온도를 확인하는 동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
“돈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
불법체류자에요? 아니면 수배중? 남자는 그를 향해서 짓궂게 말하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이제껏 몰랐으나 남자의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었다.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자 주근깨가 있는 뺨이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었다. 저런 표정으로 웃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 시킬 수 도 있겠다고 그는 안이하게도 잠깐 생각했다.
“집에 돌봐줄 사람은 있어요? 쇄골은 캐스트도 안돼요.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어야 붙는 뼈에요.”
그는 다시금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스탠드를 껐다. 방은 완전히 어두워 졌다. 남자의 아파트는 복도 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향해 나있었다. 오전동안 채광이 좋은 집은 아닌 것 같았으나 오후에 해가 지는 동안은 해가 들었고, 스탠드를 끄자 껌벅이는 가로등 불빛이 집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남자는 비가 왔으니 추울거라며 라디에이터를 켜면서 자신의 친절함에 대해 한 번 더 생색을 냈다. 착하긴 하지만 좀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세탁한지 오래된 것 같은 회색 커튼을 완전히 닫자 이제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발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렸다. 아마도 빛이 보이지 않아 벽을 짚으며 방을 걷고있어 발걸음 소리가 방의 모퉁이에서 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돼요. 잘자요.”
04.
그는 천천히 길들여져 나갔다. 사나운 들고양이가 집고양이가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손을 뻗으면 안겨왔다. 뺨을 쓰다듬으면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린 고양이처럼 얌전히 숨을 죽였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은 그럴 때에 쓰는 말이다. 그때 알았다. 사랑스러워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는 농담조차도 당시의 나에게는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점차 나에게 길들여져 갔고, 나는 그의 이성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바라지 않았다. 들고양이 특유의 거만함은 충분히 사랑스러운 것이나 집고양이가 다시 들고양이가 되는 것을 바라는 주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사하면서 고양이를 버리고 가는 놈이면 모를까. 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감긴 눈커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말라갔다. 침대 위의 작은 공간만이 그의 세상이었다. 사랑해요. 귓가에 속삭이면 그는 아주 약하게 몸을 떨었다.
05.
그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남자의 이름조차 모른 다는 것과,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너무 익숙하게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고 그 외에 별다른 호칭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이름이란 것은 관계의 기본이기 마련이었다. 그는 남자의 지나친 편안함이 신경 쓰였다. 관심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신경이 쓰인다고 말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남자는 아침식사로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치킨수프를 가져왔다. 남자는 그를 일으키고 그가 아침을 드는 동안 토스트 두 조각을 먹은 뒤에 검은색 터틀넥셔츠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위에 점퍼를 걸쳤다. 저렇게 입고 출근하는 직장이 있던가. 컴퓨터나 공학과 관련된 직업군의 사람일지도 몰랐다.
“점심엔 다른 걸로 줄게요.”
남자는 옷을 갈아입고 어제처럼 침대 곁에 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약간 웃었다.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약간 이른 출근시간이기는 했지만 오전에 출근해서 점심시간에는 돌아올 수 있는 직업중에 그가 아는 것은 없었다.
“두시나 세시정도면 와요. 좀 배고플 수도 있겠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아요. 티비 리모컨은 왼쪽 협탁에 있고, 책은 첫 번째 서랍 안에 있어요. 당신이 책을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더군다나 당신 취향이 아닐 수도 있고. 좀 자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갈거에요.”
남자는 할 수 있는 한의 설명을 늘어놓은 뒤에 그의 무릎 위에 놓여있던 트레이를 정리했다. 협탁 위에서 차키를 집어 점퍼의 주머니에 넣고 손에 약간의 왁스를 짜 머리를 정돈했다. 분명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보기 힘든 녹색 눈동자에, 선한 눈매. 약간 색이 옅은 입술이 웃을 때면 얼굴 가득 크게 번졌다. 남자는 나가기 전에 그의 동태를 확인하듯 침대 발치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름이?”
그가 물었다. 의외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웃던 표정 그대로 굳은 듯 했다. 당연한 절차였으나 남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고, 그가 속으로 셋을 세고 난 뒤에 대답했다.
“에단. 에단 호크는 아니지만. 당신 좋을 대로 불러요.”
에단 호크? 그는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입모양만으로 되물었다. 남자, 아니 에단은 다시 웃었다. 에단은 점퍼의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두 손을 집어넣고 차키를 짤그락 거렸다. 에단은 그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여전히 에단은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다녀올테니 쉬어요”
에단이 방에서 나가고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잠기고,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 안에서도 열 수 있기는 했으나 그는 지금 침대 위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베개를 베고 편안히 누워 눈을 감았다. 남자의 방은 아침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 따듯한 느낌보다는 말 그대로 밝아져온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들을 들으며 그는 잠을 청했다.
06.
“플로베르 경사님. 어제 부탁하신 프로필 찾아놨어요. 경감님 책상 위에 있던데요?”
“그래? 몰랐네. 저번에 경위님한테 보고 드렸던 것 같은데. 알았어 고마워요.”
이든 플로베르 경사는 책상 위에서 서류철을 보면서 펜의 뒤축을 이로 물었다. 그것이 습관인 듯 그의 펜꽂이에 꼽힌 펜들은 모두 뒤축이 너덜너덜했다.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책상 위를 정리하고 제복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콧 경위님 자리에 계셔?”
“그럴걸요. 미팅 갔다가 아홉시에는 온다고 하셨어요.”
“오셨겠군.”
뉴욕 경찰의 제복은 남색이었다. 약간 촌스러웠지만 정갈한 맛은 있었고, 배불뚝이 아저씨만 아니라면 다들 얼추 위엄은 갖춘 모양새가 되었다. 이든은 쓰고있던 캡을 잠시 벗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돈한 뒤에 다시 캡을 썼다. 녹색 눈매가 잠시 번뜩이는가 싶더니 여자의 어깨를 두 번 손으로 두드리며 고맙다고 말했다. 스콧 경위님.
“뭔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든은 그의 책상 위에 들고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수사 하고 있던 그 조직 말인데요.”
※든윈 패러랠. 콘실리에리 루윈과 복흑얀 이드니가 나옵니다. 허술함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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