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드는 날 1




“선鮮”

선. 그렇게 불린 남자가 뒤를 돌았다. 양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감색 제복을 입은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꽤 큰 키를 한 그는 다홍색 치마폭이 단아한 여인의 곁에서 와인잔을 집어들고 슬며시 웃었다. 단정하다 못해 빈틈없이 기름을 발라 넘겨 올린 머리칼은 그 시대 신사들이 으레 그렇듯 밝은 샹들리에 아래서 반드르르하게 빛났다. 하얀 피부 위로 불거져 보이는 파르라한 혈관들이 그를 어깨에 매달린 반짝이는 견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오랜만이다. 그렇게 말하는 김金을 향해서 걸어오며 선은 돌아보던 표정처럼 작게 웃음지었다. 

“선鮮. 이쪽은 송宋.”
“송준희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이 등을 탁, 치자 준희는 얼덜결에 입을 열었다. 송준희입니다 반갑습니다. 늘 하는 것처럼. 사람이 많은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러한 자리가 거북했을 뿐이다. 정재 계 인사에 대한 안목도 관심도 없는 그에게 웃는 얼굴 뒤로 으르렁거리는 사람들의 모임은 거북했다. 샴페인 하나 하나에 값을 매겨 트집을 잡고 얼핏 그저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대화 뒤에 무슨 뜻이 숨어있나 헤아리면서까지 사람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약은 방법들에 그가 서툰 탓도 있었다. 

선이라고 불린 그는 그렇게 말하는 준희를 향해서 가볍게 목을 숙였다. 반갑습니다 선宣입니다. 그는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선은 고요했다. 선은 장 내의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나 그는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고 직감했다. 선은 고요하다. 아마 그도 자신처럼 이러한 모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거북해하기보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축에 가까웠으나. 

“송, 이쪽은 선. 사관학교 시절 동기인 선. 나는 중간에 뛰쳐나왔지마는. 이번에 승진했다더니 이런데도 얼굴을 들이밀 줄 알게됐는가, 선?”
“우스운 농담 말아 김재경. 언제부터 이런데서 실실 웃는 인간이 됐나?”
“나야 사람 만나는 일이면 어디든 안빠졌잖나. 내 성미엔 이게 딱 맞아.”

수지도 맞고. 덧붙인 말에 선은 목청을 울리면서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쪽은 요즘 한창 유명한 그 스캔들의 주인공일세. 왜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던 박의원댁 셋째 따님의 약혼자말이야.”
“아, 그?”
“그래 그”

선은 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소문의 가운데 선 송가의 외동아들을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괜히 초면에 저를 향한 낯부끄러운 소문을 들은 것 같아 그는 가만 시선을 돌렸으나 선은 그 고요한 얼굴로 흥미라도 동한 것처럼 작고 까만 눈동자를 움직여 물그러미 준희의 옆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소문이 하도 무성하셔서 어떤 분인가 했습니다”
“원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낮고 정중한 말투지만 단호하다. 어딘가 조금 무표정한 그의 말투 치곤 의외였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이 말을 끝맺으며 꾹 닫힌 채 미동하지 않는다. 

“의외입니다”

듣던 소문으론 조용한 분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선은 손에 끼고 있던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흰 장갑 한쪽을 빼곤, 그의 얼굴처럼 파르라한 혈관이 언뜻 비치는 희멀건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선은 습관처럼 손목을 까닥여 초조하게 타들어가는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며 두 개피를 금새 해치웠다. 선은 담배를 태우며 와인을 쓴 커피라도 되는 양 목으로 흘러넘겼다. 

미약한 코롱의 향이 났다. 훅 끼쳐오는 담배연기에 뒤섞여서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부드러워 보이는, 단정한 얼굴이 전부인 선의 옆모습은 묘하게도 수려해보였다. 건조한 눈동자와 웃는 듯 마는 듯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 그의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그 강줄기처럼 불거진 파르스름한 혈관을 내비치는 상아색 피부 때문인지도 몰랐다. 떨어지는 재를 좇던 그의 느린 눈동자가 다시금 준희를 바라본다. 만난 적도 무언가 공유할만한 교차점도 없었다. 선만이 간간히 재경과, 사관학교 시절의 화제로 끊어질 듯 말 듯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김상원 중령님은 ‥”
“그때 그 사고 이후로는 윤정호도” 

선의 휘어진 눈매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목이 타는 듯 무알콜 샴페인이 든 잔을 기울이는 준희를 향했다. 여전히 선의 곁에 서서 한 쪽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재경은, 깨나 과거에 젖어있음이 틀림없다. 

“송군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말 낮추게 선.”

선은 무언가를 재듯 잠시 가늘어졌던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무성한 소문 너머로 들린 그의 나이는 자신과 엇비슷 했으나 그렇게까지 자세한 내막을 소문에 어두운 선이 알리가 없었다. 젊긴 하지만, 앳된 얼굴은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을 포함하여 그래도 깨나 다부진 몸을 한 남자였다. 다만 이런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어수룩함이 그의 풋풋한 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 준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준희군은”
“금융 회사에서 일하고있습니다. 마뜩찮은 일입니다만‥.”

선, 아니 선씨는. 그렇게 묻자 선은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눈이 가늘어졌고 입술이 좀 더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곤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흰 장갑을 도로 손에 끼웠다. 

“선은”

재경이 웃었다. 

“파일럿이네. 안그러신가 공군양반?”

김재경. 선이 그를 다그치듯 이름을 부르자 재경은 슬며시 웃곤 어깨를 으쓱였다.

“파일럿입니다. 김재경과 함께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그 후론 군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회사에선 주로 무슨 일을?”
“보통은 그저 업무처리 정도입니다마는, 아무래도 금융 쪽과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거나 관련 정보를 수집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고”


눈이 마주쳤다.

선은 들었던 와인잔을 들었다 놓으며 준희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관인가. 사람과 이야기 할 때는 사람의 눈을 곧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일까. 준희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와인잔을 가볍게 쓰는 선의 손끝을 본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말끄러미 바라보는 선의 표정없는 눈동자를 보며 준희는 쉽게 알아챘다. 그는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달아오른 재경과의 대화에서 준희가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단순한 대화였을 것이다. 

아. 선이 짧은 목청을 울렸다. 빠르게 다가오는 손길에 준희는 몸을 뒤로 뺄 겨를도 없이 목을 움츠렸다. 

“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 군.”

아직도 얼떨떨하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준희를 두고, 재경은 지금껏 짧은 교제 동안 준희가 본적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만큼 힘차게 웃는 재경을 주변의 시선이 훑었으나 곧 멀어져갔다.

“선선, 아직도 그 버릇은 못고쳤나?”
“입다물게”
“아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웃었잖나. 제발 어디 가서 그러지 말게. 요즘 중년배들은 취향이 이상하단말이야”
“농담하자는거면 접어둬”
“사실이라니까”

요즘 한창 물오른 젊은 파일럿을 노리는 놈들이 꽤 돼. 실실 쪼개며 와인 한잔을 격의 없이 입에 탁, 털어넣은 재경을 보다가 선은 한숨 쉬듯 시선을 내리 깔았다. 미동에 사족을 못쓰던 양반들이 다같이 요즘은 피부가 희여멀건 젊은이들로 취향을 바꾸신 모양이었다. 재경의 말이 아니었어도 박의원의 애첩이나 다름없는 곱게 생긴 청년 이야기는 건너건너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내리깔았던 선의 시선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있는 준희에게 가 닿는다. 시덥잖고 더러운 이야기를 이해할만한 도련님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의외다. 대충 이야기의 흐름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좁혀진 미간을 보자 웃음이 나온다. 어리숙한 풋풋함이다. 반쯤은 진담인 농담을 받아 치는 대신 티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역력한 불쾌한 표정.  

“사실이면 더 좋고. 어디 미인이 한둘 널렸는가. 내 차례는 오지 않을 테니 안심이다 재경”
“하여튼 네놈의 그 묘한 낙천성은 이럴때만 고개를 드는군”

재경의 대답을 흘려들으며 선은 웃었다. 보기드문 풋풋함으로, 선을 걱정이라도 하듯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순한 눈동자가 저를 훑고있었다. 결국 목청을 울리며 나지막히 웃음을 흘렸다. 

“걱정됩니까?”
“예?”

“제가 걱정됩니까?” 
“아니 그것이”

다정하네요 군은. 아. 숨소리와 비슷한 감탄사 같은 것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초면에, 저렇게나 당당하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무표정한 저에게 저런 말을 서슴없이 꺼낼 수 있는 선은 대체 짧은 시간 동안 저의 어디를 보고있었던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김재경. 가봐야 할 것 같다”
“뭐? 휴가 나온거 아니었어?”
“아니다. 야간비행이 있어서 저녁까진 들어가봐야해”
“너 온다고 성하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녀석 조금 있으면 올거다”
“그럴 여유가 안돼. 정말로 이동 중에 잠깐 들린거다. 다음에 보자”

아쉬운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선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재경은 벨보이를 불러 급한 전보라도 치듯 말을 적어내려갔다. 필히 선을 보러 온다던 그 사람에게 보내는 전보일 것이라고 준희는 으레 짐작한다. 그 테이블에서 비우는 두번째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선은 한쪽 팔에 걸려있던 외투를 군복 위로 덧입었다. 어깨를 감싸는 케이프 식의 망토에는 반들거리는 견장과 공군의 문양이 진하지 않은 색으로 박혀있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군”


조만간. 
접점이 없는 선을 다시 볼만한 일이 준희에게는 없었다. 그런데도 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만간 이라고 말했다. 아니 크게 말하면 이 회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작은 접점이 있었다. 엇비슷한 상류계층의 자제들이었고, 또는 그들 자신이었으며 그리고 대개는 이런 파티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고 초대되어 오는 사람들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비슷한 지위의 비슷한 집안의 사람이지만, 대부분 금융계에 종사하거나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던 그의 집안은 선과의 접점이 없었다. 상류층 자제들이 나온다는 문인계 고교를 졸업했고 다들 그러듯 적당히 좋은 대학을 나왔던 그에게 사관학교 생도 출신의 동기는 없었다. 애초에 주변인 대부분이 군과는 관련 없는 업종의 자제들이었다.

선은 건네 받은 모자를 쓰며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선이 돌아보았을 때 선과 같이 있던, 다홍빛 치마폭의 여성이 잠시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선은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악수를 하며 말없이 웃었다. 그 다음엔 준희보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양장을 한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가와 선의 등을 두드리거나 어깨를 치며 인사를 했다. 선은 가볍게 모자를 들썩이며 인사를 해보이며 찬 바람이 소스랍게 불어오는 문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나갔다. 절제된 동작들. 필요이상으로 다리를 굽히거나 팔을 흔들지 않는다. 그의 어깨를 덮은 케이프가 조금씩 걸음마다 흔들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을 보려는 듯 잠시 왼팔을 들었다 내렸을 뿐이었다. 


*낭만 패러랠 



'浪漫'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볕 드는 날 3  (0) 2011.07.27
볕 드는 날 2  (0) 2011.07.27
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