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드는 날 2
조만간.
아무런 접점 없는 선이 그렇게 말할 때 준희는 의아함에 눈을 끔벅였을 뿐이었다. 바람 따라 봄 꽃 휘날리는 정원 모퉁이에서 선은 아무렇게나 시선을 방치한 채로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간간히 포도주를 삼키고 있었다. 그가 앉은 테이블에는 재경과 박의원댁 장남이 앉아 시시콜콜한 농담이라도 주고 받는 듯 했다. 선은 아무렇게나 바람 따라 날리는 봄 꽃을 좇던 시선을 들어 건장한 청년 둘을 바라보며 넌지시 웃다가는 다시 포도주를 삼키고 –마신다기 보다는 삼키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분명히 온갖 기계 장치와 고도계에 익숙해져 있을 비행사의 길고 흰 손으로 툭툭 담뱃재를 털어가며 담배를 피웠다.
“준희씨”
등에 대고 말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두뼘 만치 키가 작은 그녀가 제게 말을 걸어올때면 그녀의 목소리는 저의 귀가 아니라 등에 와 꼽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가끔 그녀가 불쑥 말을 걸면 등이 따가운 사람처럼 깜빡 놀라는 것이다. 등에 와 꼽히는 낭랑한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면 그녀가 작고 통통한 손 끝으로 제 옷에 와 앉은 옅은 빛깔의 꽃잎들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있었다. 손만 보아도 고운 얼굴이 떠오르는, 그런 아담하고 예쁜 손이 촘촘히 짜여진 하얀 레이스 장갑 안에서 꼼질거렸다. 감사합니다. 숫기 없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준희를 보면서 인혜는 소담하게 웃었다. 신여성이라면 신여성다운 잘 교육받은 양갓집 규수 같은 조용하고 당찬 미소가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조용하되 꽤 순종적이지는 않은 듯한 치켜 올라간 눈매에 얇지만 발간 입술이 앙다물려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꽤나 당찬데도 어딘가 밉살맞지 않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구김살 없이 자라온 여자의 매력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어울리지 않게 키에 딸 부잣집 셋째딸의 고운 얼굴이라는 것이 이름만 들어도 뭇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자였던 것도 분명하다. 인혜. 생각해보면 이름도 꽤나 지적으로 보일 법 하다.
“뭘 그렇게 보고계셔요”
인혜는 가만 준희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의외라는 듯 웃었다. 대찬 장난기가 입술에 슬며시 비춘다.
“둘째 오라버니, 선 오라버니에 재경 오라버니도 모여계시네요”
“아는 사이입니까?”
“예에. 오라버니의 사관학교 동기이셔서 방학이면 세분이 별장에 함께 놀러 오시기도 했었지요”
박의원의 둘째 아들이 사관학교 출신이던가. 엇비슷한 나이 때의 얼굴들로 보이기도 했다. 제복을 입은 선의 얼굴이 질린 사람만큼이나 하얀 듯 하여 제가 좀 앳되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초면에 또래이기도 하겠거니 싶었으나 그러고보면 선은 생각보다도 무거운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 인혜를 보며 손을 흔들던 둘째 아들의 곁에서 그와 이야기를 하던 선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친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도 잔을 들고있더니 마침 잔을 쥔 채로 준희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짙은 감색 제복이 아닌 밤색 정장은 또 어딘가 색다르다. 마르고 뼈대가 얇은 몸을 그대로 보여주는 밤색 정장 안으로 그는 같은 색의 베스트를 입고 깃 없는 셔츠를 세우고는 짙은 자주색 타이를 맸다. 반드르르 빛나는 재경의 은색 정장에 비하면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영락없이 꽤나 멋을 부려 갖추어 입은 차림이었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색감에는 걷는 것 하나도 필요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조만간. 그렇게 말하던 그는 ‘조만간’ 이런 자리가 생길 것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마치 소문으로 들은 것럼 예의를 차렸으나, 그의 절친한 동기의 입으로 직접 막내 누이의 약혼식을 전해 듣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선은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며 골똘히 뭔가를 곱씹는 표정의 준희를 바라보더니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기에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는 줄 알았으나 선은 울림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건배.
그렇게 말한 듯 하다. 선은 얼떨떨하게 멈춘 준희를 향해서 손에 쥔 와인 잔을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가 내려보였다. 꽤나 거리가 있어 큰소리로 목청을 내어 말하는 것도 우스울 테니 그렇게라도 말하려는 듯 했다. 강줄기가 뻗은 것처럼 파르스름한 혈관이 맥놀던 눈커풀이 슬며시 감겼다 뜨이면서 웃었다.
“내가…!”
“질척거리는 것은 싫다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분이 되셨습니까”
“선아”
“알아 들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미동으로는 모자라셨던 모양입니다 김형”
“내가 뭐라 했는지 듣지 않았나”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선아”
“선아.”. 목소리에 열이 있었다. 한번도 그런 종류의 열을 앓은 적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엿듣는 이의 귓가가 달아오를 만큼 목소리에는 열이 있었다. 준희는 저택의 모퉁이를 돌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런 성을 한 사람도 저런 이름을 한 사람도 그가 알기에는 한 사람 뿐이었다.
무어라고 손쓸 새도 없이 오도가도 못한 채로 벽돌 건물의 모퉁이에 바싹 붙어있는 준희의 어깨를 치고 남자가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김형. 그렇게 불린 듯 하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충혈된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 양손을 주머니에 불뚝 찔러 넣은 그는 준희가 서있던 모퉁이를 돌아 식이 치뤄진 정원 쪽으로 걸어나갔다. 선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박의원댁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고작 저택의 담을 하나 지난 것 만으로 주위는 조용했다. 멀리 보이는 외벽 앞으로 구색을 갖춘 것 처럼 듬성듬성 뿌리 내린 나무들은 채 스무해가 지나지 못한 듯 젊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선은 말이 없었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답답한듯 손가락을 걸어 타이를 끌어내렸다. 뭐라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을 들킨 사람 같지 않은 태연함이었다. 아니 어쩌면 선에게는 당황해야할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방금 이 자리를 걸어나간 사람과 자신의 어깨가 부딪혔다는 것을 선은 알까. 찰나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로 뵐 줄 몰랐습니다”
고작 꺼내는 말이 그것이어서 준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누구라도 보여주기 곤란할 법한 현장을 엿본 셈 치게 된 사람치고는 좀 뻔뻔한 말이었다.
“그랬습니까”
선은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르며 답한다. 건조한 말투. 조금 웃거나, 미소를 짓거나, 눈을 가늘게 떠 보이거나. 의외로 표정에 작은 변화가 있는 편이었음에도 목소리는 담담하고 건조했다. 기분 좋게 등을 덥히는 햇살이 눈부셔서 선은 조금 눈을 가늘게 떴다. 준희가 말을 꺼내기 전에 뜸을 들이던 것도, 방금 나간 사람을 그가 보았을 것이라는 것도 선에게는 별반 큰 의미를 갖지 못한 듯 했다. 선은 일전 연회에서 제복을 입은 채로 보았을 때 보다도 조금 부드러웠고 어쩐지 그것은 제복을 입은 선과, 그렇지 않은 선의 차이인 듯 했다.
뜻밖에 시작된, 뜻밖에 만난 사람과 시작된 잇기 어려운 대화에 괜히 손이 차가워져서 준희는 예복 주머니에 곱게 개어 꼽힌 손수건을 뽑아 손바닥을 문질렀다. 괜스레 비싼 천에만 얼룩을 묻힌 것 같았다. 선은 그런 준희의 움직임을 조용히 눈으로 좇다가 좀 늦었다는 듯 목례를 한다.
“축하드립니다”
눈이 마주 쳤을 때도 말없이 인사했음에도 선은 분명하게 축하한다는 한마디를 짚고 넘어갔다.
“감사합니다”
박의원의 둘째 아들, 말하자면 처형이 되는 사람의 동기 또는 친우에게 준희는 분명 자신의 약혼에 대해 그렇게 대답했던 듯 하다. ‘원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말실수를 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또 감사하다고 대답한 것이 어쩐지 인사치레 치고는 조금 뻔뻔한 것 같아 준희는 낯을 붉혔다. 고집만큼이나 지나치게 올곧은 점이 고스란히 표정이 인색한 얼굴에 드러난다.
선의 눈이 움직임을 좇았다. 눈앞의 풋풋한 남자는 말보다는 표정이, 표정보다는 작은 움직임이 좀 더 정직한 듯 했다. 말로는 고작 한마디 뱉을 것을 마치 미동도 없을 것 같게만 보이는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눈동자가 움직이거나 크고 흰 손이 손수건을 만지거나 몸에 밴 정갈한 움직임들 사이로 비치는 작은 흐트러짐 같은 것들이 그의 불편한 초조함을 나타낸 듯 했다. 여전히 그는 풋풋하고 어리숙하다. 그런 점이 제 할말은 입밖에 내고 보는 대찬 인혜와는 어쩐지 비교가 되어서 선은 슬그머니 그를 걱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오라버니를 닮지 않아 사람 보는 눈만은 꽤 정확한 인혜가 노골노골해진 것을 보면 그녀도 저 어리숙한 풋풋함에 반했음이 틀림없다. 심사가 뒤틀린 선의 눈에조차 그렇게 비추었다면 그는 정말로 그런 사람인 것일 테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의외였다. 초조한, 아니 그보다는 불편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불편함 같은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히려 담담한 선이 그에게 미안할 정도였던 것이 그는 대뜸 앉겠다고 했다. 딱히 선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처지여서 선은 쉽게 고개를 넙죽 끄덕였다. 곧 제 새신랑 될 사람 곁에 붙어있을 법한 당찬 계집애 인혜는 어디가고 왜 준희가 혼자 거기에 있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치장 좋아하는 스무살 처자가 드레스라도 갈아입으러 갔겠거니 싶었다.
분명 소란스러운 것에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성품은 순하지만 그래도 꼭 다물린 입술을 보면 제 고집은 얼마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난잡한 소문과 집안 얘기가 굴러다니는 이쪽 사회에서 용케도 그 정도 대화에 불편해 할만큼은 곧다. 선이 조용한 만큼 그도 조용했고, 말은 없었으나 말이 많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느낌이나 약간 지체되는 침묵 특유의 편안함 같은 것이 있었다. 말을 하기에 앞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또는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거나, 실제로 말을 할 필요가 없거나 하는 경우가 대개 그러했다. 선은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 외에는 건넬 말이 없었고, 굳이 적당한 얘깃거리가 되지 못할 말을 꺼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담배를 피지 않는 다는 것을 넌지시 알아차리고 있음에도 선은 다시 다음 개피를 입에 물었다. 머리를 울리는 싸한 연기를 깊이 마셨다가 내쉬면서 선은 슬적 바람에 흩어지는 봄 꽃을 본다. 박의원의 정원에는 유난히 봄꽃이 많았다. 봄꽃이 많은 정원에는 가을이면 유독 잎이 일찍 져서 스산한데 그럼에도 박의원의 정원에는 유독 벚이 많았다. 늦게 핀 목련만이 흩는 벚들 사이에서 꼿꼿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여름 한철 반짝 피어나는 장미 덩굴도 좀체 보기 힘든 고집스런 정원이었다.
“…”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문 준희를 보며 선은 쓰게 웃었다. 풋풋함을 넘어서 되려 이쯤되면 신선하기까지하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단어는 그 전에 그를 보았을 때부터 있었던 엇비슷한 것 들이었다. 풋풋하다거나 곧다거나 어리숙 하다거나, 신선하다거나 하는.
“우습네요”
“네?”
저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라도 꺼내려고 했나 싶어 말쑥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준희를 보며 선은 가만 눈을 맞추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준희군이 아니고 제가”.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그 바닥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쓰지 않을 법하지만 꽤나 상투적인, 그러니까 의외로 흔하면서도 곧잘 쓰이지는 않는 그러한 단어들인 것인데, 그것만으로 단정짓기에 선은 유독 저 조용하고 단정한 듯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두어번 만난 사람치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눈치채어 버린 듯 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알기쉬운 사람이라고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곧고, 선의 문제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선은 매사에 무관심 했다. 애초에 그가 더욱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했더라도 선은 그것조차 쉽게 알아차리는 성미가 아니었다.
“뭐가 우스우십니까”
“별 것 아닙니다”
이를 테면.
이를 테면…. 그렇게 시작한 문장으로 무언가를 정리하려고 했으나 선은 실패했다. 갑갑하다.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준희의 얼굴에 몸을 뒤로 뺀 그는 새 담배를 물고 설핏 고개를 들었다. 건물 외벽 모퉁이에서부터 재경이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걸어오고있었다.
“선.”
“영은씨가 찾는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짧은 시간 동안 본 선의 표정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고 불쾌했다. 쌍커풀 없는 눈이 매섭다. 선은 재경을 보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으나 곧, 말없이 다시 입술을 닫았다. 말을 해도 소용 없는 것 처럼. 선은 일어나며 잠깐 곁에 앉아있던 준희를 돌아봤다. 어깨를 두드리는 재경을 뒤로 하고 선은 자리를 벗어났다.
“이영은?”
“아나?”
갑작스레 준희가 꺼낸 화두에 재경은 의외라는 낯빛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대학 시절에 잠깐, 같은 승마구락부에 있었습니다. 나이도 같았고”
“그러고보니 선이랑 하나 차이면, 둘 다 나이가 같군”
“선씨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준희를 보면서 재경은 쓰게 웃었다. 사실이다. 제 속은 기가 막히게 잘 감추던 선이 오늘 따라 준희의 앞에서는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자리를 떴다. 마무리 지으려던 일이 순탄치 못한 것에 꽤 골이 나 있었을 것이다. 정작 일은 갈무리 되었던 것이 영은만이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타일러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은에게 선은 이미 학을 떼었던 듯 하다.
“영은양 파혼한 것은 아나”
“압니다. 소문으로만”
“상대가 선이었던 것은”
“…그랬습니까?”
“소문 좁은 이 바닥에서 그것도 몰라서 어쩌나. 송, 네 처형 남 사람이 아끼는 친우니까 그 정도는 알고있으라고. 파혼도 선 쪽에서 했지만”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집안 배경의 문제 이전에 파혼 당한 여자의 몸값은 꽤나 박하다. 그것을 모를 선도 아니고,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영은의 부모도 아니었다. 집 밖으로 도는 가장들이 무수한 판에 그 정도의 사건은 대개 집안의 선에서 갈무리 되는 편이었다. 하나 뿐인 귀한 딸을 시집 보내면서도 사위의 외도 정도는 적당히 눈감아 줄 수 있다는 흔치 않은 대인배의 소굴이었다. 영은이라면 승마구락부에서 잠깐 보고 만 것이 다지만. 곁에 있는 준희를 당혹스럽게 할만큼 활기찼던 탓에, 그리고 애지중지 곱게 자라오기는 하였으나 성품이 썩 좋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라온 탓에 그녀와 교류를 가질 일도, 가질 기회도 없었다. 방탕하다고 하기엔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고, 순진하다고 하기엔 너무 철이 없는 그런 아가씨였다.
“집안 약속이었습니까?”
“아아. 그랬던 듯 한데 선이 완고하게 거절했던듯 해. 그럴만도했지. 선이라면 절대 참고 넘길 만한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네. 오히려 멀리했으면 멀리했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다고 했거든”
“표정에 인색한 주제에 가끔 지나치게 솔직하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게 단점이지.” 재경은 마지막 말을 그렇게 덧붙였다. 선이 등을 돌려 걸어간 방향을 눈으로 훑으며 말하는 작은 목소리였던 탓에 혼잣말인듯 싶었으나 충분히 곁에 있는 준희가 알아듣고도 남을 목소리였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포기를 모르더군. 오히려 그것에 선이 학을 떼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말야”
준희는 말없이 재경의 곁에 앉아있었다. 저를 돌아보던 고요한 눈동자가 선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담배를 찾아 무는 그 반복적이고 초조한 동작이 절로 그려지는 듯 하다. 그런 선에. 이영은. 말도 안되는 조합에 준희는 조금 놀란다.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였다. 좋게 보면 순진하교 애교라도 많았을 텐데 예쁘장한 얼굴에 꽤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서 제가 가지고 싶은 것에만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알아두는 편이 나을거다. 네 처남 될 사람도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니까. 처음부터 선이 마음을 줄만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재경은 곁에 앉은 준희를 돌아보곤 가무잡잡한 손으로 준희의 머리를 흩었다. 형이 제 동생에게나 해줄 법한 그런 손길이어서 준희는 익숙치 않은 듯 조금 등을 움츠렸다. 재경은 희고 단정한, 약간 고집스러운 듯 평온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오히려 그 애는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데”
“아마 지금도 좀 예뻐할거다.” 재경은 말해놓고도 뭐가 우스운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숨을 흘리며 웃곤,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가는, 참지 못한 듯 다시 숨을 흘리며 웃었다. 기껏 입은 예복 구기지 말고 슬 일어나라. 그렇게 말한 재경은 담배를 입에 물며 일어나 걸었다. 선이 모습을 감춘 그 방향으로.
* 낭만 패러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