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t Cookie in Suit
길이 밀려 이든. 많이? 그래. 아이다는 차 안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 안에서 걸려오는 전화에서는 약한 진동 같은 엔진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있었고, 그녀는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차 안에 초콜릿 같은 거 없어? 젠장 다 녹았네. 맥도날드에 차세우고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 그래. 이든은 자신의 방에 앉아있었다. 다리를 쭉 펴면 아슬아슬하게 비어져나갈 것 같은 침대는 오래되어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하늘색으로 도배된 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든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블라인드 사이를 손가락으로 벌리자 창 밖에서 얀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꾸고 있었다. 나무는 매 해 조금씩 컸고, 이든이 스무살이 넘어가자 나무는 이든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얀은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꿀 때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는 낡은 천사들과 가끔 한 두 개씩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색색의 전구들, 큼직한 별과 산타들, 지팡이와 반짝이는 미러볼들이 가득했다. 얀은 두툼하고 촌스러운 스웨터를 목 끝까지 지퍼를 잠가 올리고 트리를 가꾸고 있었다. 이든? 아이다가 수화기 너머에서 이름을 불렀다. 응. 길 진짜 밀려. 많이? 그래. 세상 사람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든은 블라인드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얀, 얀, 패기가 파이를 구웠는데 이든한테도 좀 줄래요? 집에 와 있다면서요? 창 밖에서 이웃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죠. 고마워요thank you. 얀의 목소리는 늘 다정했다. 그의 발음에는 약간 독일식 억양이 들어있었고, 이든은 ‘당신you’이라고 말할 때 얀처럼 말했다. 마지막 발음이 끊어지는 것처럼 입안으로 숨어들어갔고 좀 더 딱딱하지만 명확하게 들렸다. 이든의 인생에서 얀과 당신은 아마도 절대 변하지 않을 부분이었다. 이든은 아이다의 말을 들으면서 침대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손 안에서 수화기가 뜨끈해졌다. 이든은 눈을 감은 채 스웨터처럼 짜임 있게 멈추어선 꽉 막힌 도로에 갇힌 아이다의 표정을 상상하고, 그 다음엔 집으로 돌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상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전화 하지마 에단. 아이다가 갑작스레 말했을 때 이든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아이다의 말들과, 지금 그녀가 내뱉은 말의 연계성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든이 눈을 떴을 때 얀이 동화책을 읽어주던 자신의 방이 아니라 이타카의 기숙사에 있었다. 낡은 나무로 된 아파트는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침대에서 감았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창 밖에는 얀도, 크리스마스 트리도, 패기의 파이를 들고온 존도 없었다. 창밖에서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보일리 없는 뉴욕의 거리가 보였다. 비스트로가 있는 골목과 이든이 고든의 심부름으로 자주 들락거리던 가게들, 높은 고층 빌딩이 겨울처럼 줄을 잇고 늘어서 일년 내내 그늘 진 어두운 거리들. 이든은 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뉴욕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리의 모퉁이마다 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받들고 서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불안과 공포와 그리움으로 넘실거렸다. 이든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든은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곰팡이가 쓴 치즈 바구니와 수화기를 발견했다. 이제 전화 하지마 에단. 아이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이제 아이다가 전화하지 말래요 얀. 괜찮아 아가. 얀이 대답했다. 얀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가 이든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얀의 목소리는 좀 더 낮았고 얀은 영어를 말할 때 조금 더 끊어지듯 발음했다.
이든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호텔의 방 안이었다. 괜찮아 아가. 루윈 이바노브의 목소리였다. 이든은 무겁게 내려앉는 눈커풀을 아주 느리게 깜박이면서 루윈 이바노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밤새도록 부어넣은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든은 아이다와 얀과 존이 모두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제는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고 말하던 아이다의 갑작스러운 말도, 자신의 아파트 창 밖으로 뉴욕의 거리가 보이던 것도 모두 이해했다. 이든은 몸 위에 덮여있는 담요를 걷어들고 상체를 일으켜 부스스한 표정으로 러그 위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괜찮아 아가, 아빠 말에 대답해. 루윈 이바노브는 전화기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루윈의 등은 왜소해보였고 구겨진 셔츠 때문에 더욱 그랬다. 위스키 두 잔과 보드카 두 잔에 취해서 소파에서 잠들어버리는 루윈 이바노브. 이든은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로 그가 말하는 ‘아빠’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신 애에요?”
루윈 이바노브가 돌아보았을 때 이든은 아직 잠이 조금 덜 깬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꽉 잠겨있었고 이든은 손을 뻗어 얼음 통을 집어 들었다. 얼음이 녹은 물을 잔에 따라 목을 축이는 동안 이든은 잔 너머로 곁눈질 하면서 루윈 이바노브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증권거래소나 행정사무소의 직원처럼 웃고 있지 않았고, 넥타이도 하고 있지 않았다. 루윈 이바노브는 보지 못했겠지만 이든은 그의 셔츠 등판이 구겨져 있다는 것과 그의 바지 밑단이 구겨져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요."
"애도 낳았었어요?"
"제가 애가 있으면 이상합니까?"
"그 정도로 나이 들어 보이진 않는데."
"빨리 결혼하면 있을 수도 있죠."
그래요. 그런 표정으로 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결혼하면 있을 수도 있죠. 이든은 루윈의 말을 곱씹었다. 몇 살이에요? 귀여워요? 이든이 물을 때 마다 루윈은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의 딸은 다섯 살이고, 사진은 없으며,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법원은 그에게 양육비를 지불하라고 말했으나 딸에게 전화를 할 권리는 주지 않았다. 이든은 루윈의 지나치게 친절한 대답을 들을 때 마다 그가 자신이 더 물어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든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지만 루윈은 정말로 그렇게 계산하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이든은 웃고 있지 않은 루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라디오를 툭툭 털면서 서있었고 이든은 여전히 러그 위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든은 그가 특별해보인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아빠였지만 아빠라고 불리는데 어울리지 않았고,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어딘가에 어린아이의 치기 같은 유치함이 으깨어져 있었다.
“플로베르씨”
아빠 말에 대답해. 이든은 루윈의 얼굴을 보며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루윈이 이든을 부를 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티비를 틀면 나올 것 같은 목소리는 약간 날카로웠고 잘 교육받은 듯한 깔끔한 발음은 그의 목소리를 더욱 날카롭게 들리도록 만들었다. 이든은 그가 플로베르‘씨’라고 말할 때 마다 은행의 창구 앞에 앉아있는 것 처럼 느꼈다. 플로베르‘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떤 용건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든은 불쾌함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루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담배를 비벼끄는 손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윈이 담배를 비벼끄는 동안 엄지와 검지가 약간 꺾였고 손등의 뼈가 움틀거렸다. 사무직으로 일하는 남자들이 대개 가졌을 법한 손이었지만 조금 더 깨끗했다. 그는 학창시절동안 그 어떤 운동 클럽에도 들지 않았을 것 같았고 손으로 교과서를 넘기는 일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든은 그의 깨끗하고 단정한 손이 포켓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들어 서류에 싸인하거나 하이라이트를 긋는 대신 딸의 조막만한 손을 잡는 광경을 상상했다. 상상속의 손은 이든이 얀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맞물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고 어색했다. 얀은 이든을 태우고 숲 속의 캠핑장과, 풋볼구장과, 야구경기에 데려갔고 생일이면 이든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갔다. 이든을 잔디 기계 앞에 세우고 정원을 손질했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몄다. 이든은 머릿속에서 루윈의 손 위에 얀의 손을 겹쳐 보았으나 루윈의 손은 얀에 비해 턱없이 작고 깨끗했다. 이든은 다섯 살짜리 아이를 가지기에 너무 젊은 것 같은 남자의 손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약간의 담배연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기에 너무 젊고 깨끗한 남자의 손을 바라본 뒤에 다섯 살짜리 귀여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덩그러니 서있는 루윈을 생각했다. 지금 연구원 직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루윈 이바노브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플로베르씨. 그렇게 말할 때보다도 두어배쯤은 날카롭다고 이든은 생각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기에는 지나치게 젊어보였고 냉정했으며 놀이공원과는 어떤 의미로든 어울릴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든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루윈을 보면서 어쩌면 그의 목소리만큼은 아빠와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아가. 얀이 열에 들떠 앓고 있던 일곱 살의 이든의 머리를 차가운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던 것처럼 루윈도 딸에게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이든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조용히 딸의 이마를 바라보는 루윈을 상상했다. 그 광경은 아주 고요하고 적막했지만 이든은 조금 웃었다. 웃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관찰은 연구실 내에서나 해요."
이든은 녹색 눈을 깜박였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운을 띄우고 그는 잠시 멈추어 루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루윈 이바노브는 화가 난 것 같았으나 이든의 멱살을 잡지도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단지 불쾌함을 전혀 감추지 않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을 뿐이었다. 이든은 느리게 웃었다. 고요하고 적막하게 잠든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루윈을 상상했을 때보다도 좀 더 웃었다.
“미안하지만 연구소였다면 안경부터 썼을 걸요. 나는 내 일처리에 그렇게 미숙하지도 않거든요.”
그렇게 책임감이 없지도 않고요. 이든 플로베르는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루윈은 여전히 미간을 지푸리고있었다. 이든은 루윈의 일그러진 표정이 좋았다. 혼자 식사하고 계셨잖아요. 그런 투로 말을 했을 때의 여지없이 곤란해 하던 얼굴도 좋았다. 수트로 감추어둔 내면의 유치함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루윈은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 보다는 옷에 맞는 사람처럼 자신을 맞춘 사람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든에게는 그랬다. 이든은 그의 몸에 맞춘 듯 잘 짜여진 수트를 보는 것이 그의 예의바른 웃음만큼이나 답답했고 넥타이를 풀고 베스트의 단추를 풀러내고나면 이제껏 잘 만든 마스크로 만들어진 뭔가가 벗겨질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루윈 이바노브는 아마 어제 아침에도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입었을 것이다. 잘 다려진 와이셔츠의 열세개의 버튼을 잠그고, 양쪽의 소매 버튼을 두 개씩 네 개 잠그고, 다시 바지의 버클과, 베스트의 단추와, 재킷을 걸어 잠그고 구두끈이 풀리지 않도록 동여맸을 것이다. 그는 아마 수트를 차려입는 과정처럼 모든 것이 그의 통제 하에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든은 루윈의 구겨진 셔츠를 바라보고 다시 루윈과 눈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불쾌해했다. 이든의 비아냥거리는 대답을 듣고는 더욱 불쾌해했고 이든은 그의 표정이 그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루윈 이바노브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가 여전히 자신을 플로베르‘씨’라고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이든은 그제서야 자신이 은행의 대출상담 창구에서 빠져나와 호텔에 있다고 느꼈다.
“법원이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절대로 일을 멈추는 법 없는 은행도 직원들한테 휴가를 줬죠. 일주일씩이나요”
이든은 손에 들려있는 신문의 1면을 펼쳐들었다. 맨하튼 월스트리트 은행 열여덟의 강도에게 털리다. 1주일간 업무 중지. ‘당신’도 받은 그 휴가요.
“은행도 업무를 중지했는데 법원이요? 국가기관은 이런 때 쓰레기나 다름없어요. 겨우 돌아가고 있는건 군대 정도죠. 나보다 똑똑하고 이성적인 척 하는 당신이 모를리 없을텐데요.”
이든이 알고 있는 한 은행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판에 박힌 곳이었다. 은행은 절대로 자신들이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았고 업무를 중지하는 일도 어지간한 일로는 없었으며 직원들에게 이유 없는 휴가를 주지도 않았다. 설령 직원들이 그 전날 열여덟살짜리 강도에게 털려 지점장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요. 플로베르씨”
이든은 다시금 그가 자신을 플로베르‘씨’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호텔 안에서 만난 어떤 사람 중에도 자신을 플로베르‘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루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루윈의 호칭은 아주 고리타분했고 동시에 그는 이든이 왜 그에게 시종일관 술먹은 개처럼 비아냥거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투로 말했다. 관찰은 연구실 내에서나 해요. 루윈은 그렇게 말했으나 이든은 사실 루윈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사람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든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대하듯 대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이든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이든은 마치 플레이트 위의 미생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과, 호텔의 방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관찰했지만 이든은 자신이 관찰한 것을 기억할 정도로 사람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오히려 이든은 플레이트의 실험 결과를 사람의 일보다도 잘 기억했다. 이든의 관찰력은 아주 사소하고 세심했지만 그는 그것을 많은 곳에 분배할 정도로 용의주도하고 냉정하지 않았다. 이든 플로베르는 아주 이성적이었지만 냉정하진 못했고, 그는 지극히 감성적으로 자신이 가장 흥미로워 하는 것에 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력을 쏟았다. 그리고 적어도 루윈 이바노브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든이 쉽사리 아이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다는 것도, 누구에게도 쉽사리 비아냥거리지 않는 다는 것도, 식사를 제안하거나 식사를 거절했다고 해서 그것을 기억하고 말을 건네지 않는 다는 것도 몰랐다. 심지어는 이든 플로베르가 그의 지푸려진 미간에 키스하고 싶어 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이봐요 루윈 이바노브”
루윈 이바노브는 네모난 틀에 넣어 구운 민트맛 쿠키같았다. 정사각형의 쿠키. 장인이 만든 것처럼 어디 한 구석 틀에 빗나가지도 않고 무게도 다르지 않은 것처럼 원래 만들어져있던 모난 곳이 아니라면 어느 곳도 불필요하게 튀어나온 곳이 없었다. 루윈은 마주쳐 인사할 때면 꽤나 사회생활에 익숙한 우아한 은행원처럼 웃었고 예의바르게 인사했으며 약속을 거절할 때조차도 그랬다. 적어도 쿠키를 반으로 쪼개면 쿠키에서는 따듯한 밀가루 반죽의 맛깔스러운 냄새 대신 톡 쏘는 민트 향이 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민트가 통째로 갈색 쿠키 안에 들어있거나. 적어도 이든이 루윈 이바노브라고 명명한 쿠키는 구워진 것 그대로의 맛이 나지는 않았다. 이든 플로베르가 실험하고 관찰한 결과로는 그랬다.
루윈 이바노브. 루윈은 이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껏 이든은 그의 풀네임을 부른 적이 없었다. 루윈처럼 그를 이바노브‘씨’라고 부르지도, 루윈‘씨’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든은 그를 그냥 루윈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든에게는 루윈 이바노브의 시선을 끌 필요성이 있었다.
“당신은 좀 더 나한테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당신은you. 그 단어는 아마 이든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 중에 하나였다. 이든은 독일에서 온 키가 크고 옷을 아주 못입는 아버지를 두었고, 이든의 ‘당신’은 얀이 발음하는 ‘당신’과 아주 똑같았다. 독일어의 억양이 아직도 묻어나는 영어로 얀은 ‘당신’이라고 발음했다. 미국인들이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든과 얀이 말하는 당신은 아주 짧게 발음됐고, 아주 짧게 끝났다. 거의 마지막 발음이 들리기도 전에 단어가 끝났다. 당신은. 이든은 그렇게 루윈에게 말하고 나서 잠시 침을 삼켰다.
꿈 속에서 아이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이든은 루윈을 보면서 초콜릿 같은 여자를 잠시 떠올렸다. 루윈과 아이다의 사이에는 어떤 접점도 없었고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든은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던 여자를 잠시 떠올리고 그녀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미 오년 전에 더는 전화를 걸 수 없게 된 여자가 꿈속에 나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말했고, 이든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올 해의 뉴욕을 떠올렸다. 어수선하고 불안하고 위험한 뉴욕을.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죽기 위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뉴욕을. 그리고 이든은 세상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때, 집으로 돌아가는 루윈을 상상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집으로 돌아가는 루윈 이바노브. 그의 집에는 그가 괜찮다고 다독일 아이도, 오래전에 떠난 부인도 없을 것이었다. 이든은 루윈의 텅 빈 집과, 그의 잘 넘겨진 단정한 머리와, 구겨진 셔츠와 왜소하고 외로운 등을 생각했다. 이든은 입에 담배를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든 플로베르는 최대한 루윈 이바노브가 서있는 곳에서 먼 곳에 등을 붙이고 섰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루윈은 이든이 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이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든은 담배 연기를 내뱉고 입술을 열었다. 한참동안 입 안에서 맴돌고 있던 단어들이 입안에서 한데 뭉쳐 뭉그러지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던 단어들이 모여 눈덩이처럼 불어나 겨우 하나하나의 단어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왜냐면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이든 플로베르는 뻔뻔했다. 마치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알릴 권리가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이든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방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오랫동안 형체가 되지 못하고 입 안에 소복히 내려쌓이던 눈덩이 대신 깊이 연기를 들이마실 수는 있었다. 이든은 약간 손을 떨었다. 이든은 가끔 긴장할 때면 손을 떨었지만 아마 이것조차도 루윈 이바노브는 모를 것이다. 왜냐면. 내가. 당신을.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이든 플로베르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담배연기가 표정을 가릴 것만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든은 연기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폐 안쪽을 휘갈퀴고 나온 연기들이 흩어졌다. 속이 쓰려왔다. 아마 담배연기가 휩쓸고 지나가서였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폐가 통증을 느낄리 없다는 것은 잠시 잊고 있었던 듯 했다.
“대답하지 말아요. 무서우니까”
이든은 웃었다. 웃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식도 아래에서 담배 연기처럼 들끓고 있는 것들을 표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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