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이타카는 여전했다. 어떤 점이 여전했냐고 물으면 건물이 망가진 곳도, 불에 탄 곳도 없었다. 단지 몇몇의 학생들이 사라져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대학은 여전히 지식의 요람이었고 지식이 빠지더라도 그 자체로 요람이었다. 대학가는 여전했다. 마치 그 약간의 소동들이 오히려 대학생들을 더욱 대학생 답게 만드는 것처럼 세기말의 중심에서 스물몇의 젊은이들은 지식과 과학을 외쳤다. 신과 과학의 사이에서 그들을 단순히 순한 양으로 만들었던 것들은 사랑과 평화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몇몇의 펍들은 문을 닫았지만 여남은 펍들은 이제껏 없었던 호황을 누렸다. 학생들의 절반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펍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절반의 절반은 술을 진탕 마시면서 세기말을 위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열띤 토론을 나누며 세기말에 맞섰다. 이타카는 여전히 요람이었다. 넓은 캠퍼스 여기저기에 술에 취한 학생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잠들어있었다. 이타카는 여전히 요람이었다. 지식을 위한 요람이기보다는 세기말을 위한 지식인들의 마지막 요람 같았다. 

 “따로 준비한 건 없나?”
 “뭐요?”
 “요새 흉흉하잖나”
 “교수님은 뭐 해놓으셨어요?”
 “집에 총하나 장만했지”
 “교수님이 쓰시게요?”
 “그럼 누가 쓰나?”

 고든의 말에 이든은 헛웃음을 지었다. 샌드위치나 드세요. 그렇게 말하자 고든은 다시 이든이 올리브를 빼지 않았다고 투덜거렸다. 고든은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데는 노인의 힘도 그리 부족하지는 않다고 말하곤 냅킨으로 입가를 훔쳤다. 입술에 검은 올리브가 반개쯤 묻어있었다. 미국은 총을 구하기 쉬운 나라였다. 집안의 가장들이라면 권총 하나쯤은 아들의 손이 닿지 않는 서재의 책상 첫 번째 서랍에 넣어두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끔은 어느 날, 누군가의 아들이 아버지의 잠긴 서재의 책상 서랍을 열어 권총을 가지고 등교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아버지들은 쉽사리 그것이 자신의 아들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은 때로 아버지의 책상 밑에서, 학교의 뒤뜰에서,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로 혀를 늘어트리고 발견되었다. 짐이 불행했던 것은 그램블린에는 키팅 선생님이 없었다는 점이었을지도 몰랐다.

 “부인이 그러라고 하셨어요?”
 “뉴스 봤잖아. 씨씨도 그러라고 하더군.”

 고든은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한 입에 집어넣고 늙은 욕심쟁이처럼 온 뺨을 불룩하게 만들며 샌드위치를 씹었다. 부인이 그러셨다면 다행이네요. 늙은 노부부는 야구 배트를 휘두를 힘도 없을 것이다. 가장 손쉽고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이든은 그를 독려해야했을지도 몰랐다. 고든은 샌드위치를 여전히 우물우물 씹다가 목이 막힌 듯 기침을 하고 물을 들이켰다. 노인들이 흔히 그러듯 입가에 자글자글하게 맺힌 주름이 음식을 씹을 때마다 오므라들었다가 펼쳐지기를 반복했다. 고든의 얇고 바싹 마른 입술과 깊게 움푹 패인 눈을 바라보다가 이든은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안경을 썼다. 끼익거리며 기름칠이 잘 되지 않은 티를 내며 돌아가는 의자를 책상 앞으로 돌리고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구겨져있던 가운의 끄트머리를 등 뒤로 펄럭였다.

 “뭐 준비 안할건가? 앨런네 옆 집 펍도 문을 닫았다며”
 “제가 알아서 할게요. 교수님은 연구비나 받아오세요.”

 고든은 올리브 냄새가 배인 엄지손가락을 코 끝에 가져다 대고 약간의 올리브 냄새에 미간을 지푸린 후 엄지손가락을 찝찝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손 씻으세요. 고든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원에 잔디 좀 깎으라고 구박하는 아들에게나 낼 법한 심술궂은 목소리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권총을 추천해 이든. 고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이든은 안경을 쓰고 현미경에 눈을 가져갔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플레이트 위에 잘려 올라간 아주 얇은 뇌의 조각을 들여다보며 오른손으로는 종이 위에 관찰 결과를 적어나갔다. 아 참 다음엔 올리브 꼭 빼게. 세상이 망해도 난 올리브는 안먹을거야. 고든은 이든의 뒷통수에 그렇게 말하고는 이든의 책상 곁을 지나갔다. 갈색 바짓단이 시야 옆을 가로지르는 것을 바라보며 이든은 약간 웃었다. 이미 미각이 둔해져 올리브를 다 씹어 삼켜놓고 고집스레 우기는 점이 옆집 할아버지 같았다. 물론 이든의 옆집에는 지겨운 얼굴의 동료가 칠년 째 살고 있기는 했지만. 권총. 이든은 입속으로 짧은 단어를 곱씹었다. 아주. 아주 괜찮은 선택이었다. 손가락만 까닥할 힘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쉽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고든 같은 노인조차도 안전할 만큼. 만약 공중파에서 권총을 광고할 수 있었다면 광고주들은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범법입니다. 요즘처럼 흉흉한 때 권총 하나 장만하시는 건 어떠세요? 단돈 이십 달러에 총알 다섯 개를 덤으로 드립니다. 같은 개소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요즘은 제철 중의 제철일 것이다. 선거보다도 훨씬 좋은 대목이었다. 

 이든은 결국 고든의 충고를 완전히 져버리지 못했다. 달리 생각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이든도 권총의 장점인 ‘간단하고 손쉽다’는 것에 대해 충분한 동의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고든이 말하기 전부터 그는 권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짐이 손쉽게 죽었던 만큼 도그마도 손쉽게 죽으리라는 생각을 어디선가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든은 말끔히 치워진 작업대 위에 뺨을 누르고 다리로 휴지통을 건드려 덜그럭 거리며 앉아있었다. 뺨에 와닿는 연구소의 쇠로 된 작업책상은 아주 차가웠다. 이든 저 먼저 갈게요. 좀비놀이 하지 말고 제때 들어가세요. 연구소의 안젤리카가 연구실 안쪽의 불을 껐다. 협박조로 들리는 목소리에 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빨아야할 하얀 가운을 벗어 들고 안젤리카의 뒤를 졸졸 쫓아나왔다. 연구소의 불이 꺼지고 등 뒤에서 열쇠의 소리와 함께 연구소의 문이 잠겼다. 등 뒤로 실험용 냉동고들이 돌아가는 소리, 밤새 켜져 있는 기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든은 그 자리를 서둘러 떴다. 달리 짚이는 곳이 있었다. 고든만큼 어렵게 권총을 구하지 않아도 이든에게는 다른 통로가 있었다. 이든은 연구소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구원용 아파트에 들어가 세탁기에 하얀 가운을 집어넣고 버튼을 누른 뒤에 낡은 자동차 키와, 지갑과, 담배, 라이터, 몇 가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챙긴 뒤에 집을 나섰다. 이든은 겨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끄트머리를 잡은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서 자꾸만 담배와 라이터와 낡은 자동차 키와 지갑이 쩔렁거렸다. 서늘한 정취를 뒤로 하고 이든은 벽마다 한기가 드는 호텔의 복도를 걸었다. 호텔에 들어섰던 첫날의 일처럼 어디에선가 잘 마른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이든은 처음 호텔에서 만난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남자보다는, 그라고 말하는 편이 어울렸고, 그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어울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잔뜩 흐려진 눈동자는 그의 얼굴보다 나이들어보였고 이든은 그의 어리숙한 얼굴 어딘가에서 눈에 띄지 않는 흰 주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타카의 여러 학생들처럼 다시는 호텔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연구소의 빈자리들은 늘어갔다. 오랫동안 이든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이어지던 복도가 드디어 끝이 났고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문을 만나 이든은 두 걸음 물러서서 호텔 방 문을 열었다. 잘 마른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 삐딱한 자세로 흐트러진 수트를 입고 소파에 반쯤 누워있다시피 한 남자를 보고 이든은 얇은 입술을 말아올려 웃었다. 헤이 헤이든. 헤이든을 보고 웃으면서 이든은 그것이 독재자를 위한 인사와 흡사하다고 느꼈다. 헤이든 데비아시는 늘 그렇듯 독재자만큼이나 오만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헤이든의 표정은 40년대 서부극만큼이나 오만했고 이든은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는 충분히 영리했다. 그러나 아마 괜찮을 것이다. 먹잇감을 잡아둔 맹수는 보기보다 훨씬 인자하고 훨씬 여유롭다는 것을 이든은 알았다. 휴일 오전이면 하릴 없이 깨어나 잼과 버터를 바른 식빵을 우물거리며 채널을 돌리던 이든에게 디스커버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심어준 쓸데없는 지식이었다. 헤이 헤이든. 이든은 좀 더 정중하고 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헤이든을 불렀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서 눈동자만이 손 안에 들려있던 신문에서 이든에게로 옮겨왔다. 이든은 약간 웃었다. 

 “거기 잔 좀 집어줄래요”

 헤이든은 이든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옮겼다. 자세를 무너트리고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만한 거리였으나 헤이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든은 등 뒤로 문을 닫고 천천히 테이블까지 걸었다. 마치 호텔의 복도에서 바람이 불고있는 것처럼 등 뒤에서 닫힌 문이 두 번 덜컹거렸다. 그의 말투는 부탁과 명령 사이의 미묘한 중간층을 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부탁하듯 이야기했지만 헤이든은 자신이 말하면 이든이 얼마든지 들어줄 것을 이미 확신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이든은 술이 반쯤 차있는 잔을 집어 헤이든에게 건넸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잔을 받아들었고 이든은 헤이든이 기대어 앉은 소파의 반대편 끄트머리에, 팔걸이 위에 걸터앉았다. 얼음이 다 녹아내린 듯이 묽은 노란색 액체 위에 손톱의 반달만큼 얇은 투명한 층이 보였다. 
 
 “총 한자루만 구해줄래요?”
 
 이번에는 좀 더 정중한 물음이었다. 물론 입을 연 것은 헤이든이 아니라 이든이었다. 이든은 무언가를 부탁하는데 능숙이 못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헤이든은 들고있던 신문을 반으로 접어 테이블 위로 던지고 묽어진 술을 다시 반의 반쯤 들이켰다. 그러죠. 간단한 대답을 듣고 이든은 헤이든에게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떤 총이 필요한지, 얼마나 가벼워야하며, 조건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도 헤이든은 묻지 않았다. 이든은 장난감 총을 사달라는 아이처럼 ‘총’을 구해달라고 말했고 헤이든은 거기에서 이든이 총에 대해 어떤 지식도 없을뿐더러 총이라는 것과 친하지 못한 아메리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든은 그가 더 이상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든은 두 손을 깍지 껴 불안한듯 손가락으로 다른 손의 손등을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쪽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면 돼요”

 그래요. 헤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헤이든 데비아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만큼이나 믿음직한 거래처였다. 그럼. 이든은 아직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헤이든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들어왔던 문을 열어젖혔다. 그에게 어떤 사례금을 건네야할지 가늠하면서 이든은 입에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이고 나서야 라이터를 찾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권총을 추천해 이든. 고든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짐이 죽은 날 아버지는 이든에게 약간 크고 낡았지만 입기에는 나쁘지 않은 양복을 한 벌 건넸고, 그리고 그길로 서재로 내려가 첫 번째 서랍을 잠그기 시작했다. 이든은 그때 처음으로 얀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얀은 강도가 들었을 때 좀 더 강도를 빨리 죽이기 보다는 아들이 안전하기를 택했다. 아들은 이제 고작 열여덟살이었고 이든이 아직 미스 샐린저의 상담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얀은 잘 알고 있었다. 얀은 어머니보다도 훨씬 이든에게 신경을 쏟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약간 붉은색이 도는 블론드를 가진 독일남자였고 미국인 어머니가 받아들이는 것보다도 총기사고에 대해 훨씬 상식적으로, 독일식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이든은 호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에서 묽은 담배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약간 겁에 질리는게 나을 것 같았다. 얀은 이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이든을 탓하지 않았겠지만 이든이 소라껍질 같은 옷장을 벗어나는 순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것이었다. 틀림없이.

 이든은 하얀 우유로 뒤덮인 물 속에서 쥐가 헤엄치는 법을 알았다. 겨우 죽지 않을 만큼 발을 디딜 수 있는 디딤대를 물 속에 가라앉히고 고든은 스물둘의 이든의 앞에서 하얀 우윳물 속에 쥐를 집어넣었다. 주변을 살핀 쥐들은 대개 별 탈 없이 우윳물 속을 헤메이다가 가까스로 디딤대를 찾아 목숨을 부지했고 이든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쥐를 보며 쥐를 내려놓던 고든의 손목을 기억했다. 실험용 쥐 들 중 하나는 이든의 눈 앞에서 천천히 하얀 우윳물 속에 가라앉았다. 이든은 쥐가 죽기 전에 물 속에 손을 집어넣고 남자의 손바닥보다 약간 큰 하얀 쥐를 꺼냈다. 하얀 가운의 소매가 하얀 우윳물로 푹 젖어 우유 비린내가 났다. 호텔의 벽에 기대어 앉아 이든은 묽은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하얀 담배연기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것같았다. 쥐가 된 것 같았다. 이든은 천천히 벽에서 등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물이 차들고 있는 보트의 구멍이 아직은 작아보이도록 생각하게 해줄만한 약간의 눈속임을 위한 술도 나쁘지 않았다. 이든은 몸이 완전히 ‘가라앉을’ 것 같은 소파와 몇 병의 술과 담배를 수북히 쌓을 만한 재떨이를 기대하며 문을 열었을때, 루윈 이바노브가 잔과, 얼음과, 술 너머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물 속에서 빛이 흐트러지듯 구부러져 보였고 이든은 잔 위로 시선을 비껴 루윈을 바라봤다. 약간의 실갱이를 벌인 뒤에야 이든은 흔하지 않은 루윈의 핸디가 울리고 있는 것을 알았고, 그가 그것을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끄는 동안 루윈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관찰했다.

 “받기 싫은 전화인가봐요” 

 이든은 약간 웃었다. 루윈 이바노브는 이든이 그에게 ‘싫은 소리’로 들릴 법한 말을 할 때마다 곧잘 눈살을 지푸렸다. 보기 좋은 미소는 사실 이든의 생각보다도 쉽게 흐트러졌다. 루윈은 웃으며 인사했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지만 루윈 이바노브의 셔츠 단추 개수만큼이나 견고해보이는 그의 미소는 사실 아주 손쉽게 흐트러졌다. 다갈색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가늘게 뜨이는 것을 바라볼때마다 이든은 확신에 찼다. 으깬 사과처럼 물렁하게 짓이겨져있던 유치함이 고개를 들었다. 루윈은 집게나 달라고 말했고, 이든이 집게를 건넸을 때 그는 빼앗아가듯 이든의 손에서 집게를 집어들었다. 받기 싫은 전화였나봐요. 아무런 말도 없이 이든은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루윈이 내려놓은 집게를 들어 잔에 얼음을 넣었다. 술은 많았다. 이든이 원하는 만큼 옷장에서는 술이 나올 것이었다. 방에는 냉장고가 있었고, 냉장고에는 이든이 넣어놓은 보드카가 있었겠지만 옷장에서는 다시 술이 나올 것이었다. 자신 몫의 차가운 유리잔과 보드카가 나온 것처럼. 이든은 아마도 두세병의 술이 더 필요하리라고 생각했다. 흐린 날은 대개 비가 오기 마련이었고, 비가 오는 날은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우기 좋았다.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더라도 말할 것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꾸역꾸역 먹었던 음식들을 토해내듯이 위가 울렁거리고 이야기가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비오는 날의 비린 물냄새는 그러기에 충분했다.

 위스키 한병을 다 비울 때 까지 루윈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든은 말없이 일어서 냉장고를 열고 보드카를 꺼냈다. 차가워지다가 만 것처럼 보드카는 미적지근했다. 병의 겉표면에는 약간의 물방울이 묻어있었지만 아마 뚜껑을 열고나면 그리 차갑지 않을 것이다. 이든은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루윈의 빈 잔에 보드카를 따라주고 잔을 들고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옷장을 열자 위스키 한병과 보드카 한병이 놓여있었다. 이든은 옷장을 열어놓은 채로 잔을 내려놓고 위스키와 보드카를 테이블 위로 옮겼다. 잔을 집어들고 옷장 문을 닫자 약간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이 닫히면서 일어난 약간의 바람이었겠지만 마치 옷장 안쪽에서부터 바람이 일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든이 잔을 집어들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잔 안에서 얼음이 쩔렁거렸다. 창에 기대어 섰을 때 창 밖은 라플란드 같았다. 하얀 설원 위에 찍힌 순록의 발자국들과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시키는 침엽수들. 천장이 부서져나간 이글루를 발견한 뒤에야 이든은 그것이 라플란드가 아니라 알래스카였음을 알았다. 멀리서 순록의 무리가 걸어오는 것처럼 여러개의 카우벨이 성당의 종소리처럼 울렸다. 밖은 비가 올 것처럼 흐렸고, 알래스카의 하늘도 그랬다. 곧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든은 잔을 입에 가져가며 약간 웃었지만 이내 알래스카에도 비가 내렸다. 멀리서 순록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온 뒤에 다시 눈이 오고, 또 눈이 쌓여 단단하게 눈으로 덮인 자리들은 비에도 쉽사리 녹지 않았다. 비가 내린 자리가 움푹 파여 순록의 발자국이 조금씩 흐려졌다.

 “루윈”

 루윈은 대답이 없었다. 대답대신 시선만이 이든에게로 옮겨왔다가 다시 테이블 위로 옮겨갔다. 그는 보드카가 든 잔을 반쯤 비웠지만 이든의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무심결에 잔을 움직일 때마다 잔의 벽에 부딪혀 얼음이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쨌든 이든은 말을 했다. 그는 상대방의 반응을 신경쓰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든의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작업 테이블처럼 난잡하고 지저분했다. 그의 테이블이 말끔하게 치워지는 것은 이든이 흰 가운을 입고 현미경에 눈을 가져다 댄 채로 다른 한쪽 눈을 일그러트리며 감고 있을 때 뿐이었는데, 그것 조차도 사실은 치워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든이 거기에 신경쓰지 않는 것 뿐이었다. 제대로 인화된 것 같지 않은 아이다의 사진들과, 깨진 창문과, 이글루, 하얀 설원과, 순록의 무리들, 서브웨이 샌드위치와 올리브, 정돈되지 않은 연구실, 불투명한 샘플들과, 냉장고, 보드카, 위스키와 얼려진 뇌의 조각들, 조 크루거와 텍사스, 뉴욕, 맨하탄, 루윈, 플루오르골드, 교수의 심부름, 연구비.

 “아이다는 피부가 까만 여자였죠. 초콜릿같다고 놀리면 그녀는 그걸 자랑스러워 했어요. 초콜릿만큼 진한 핫초코도 잘 탈 줄 알았죠.”

 루윈은 아직 대답이 없었다. 대답대신 무심한 시선이 이든에게 와 닿았다. 넥타이를 하지 않은 루윈은 이든에게 낯설었다. 그는 덜 어른스러워보였고 이든은 넥타이를 하지 않은 만큼 덜 어른스러운 루윈을 천천히 관찰했다. 

 “펍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이다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의 머리에 맥주를 들이붓고 있었는데 꽤 쿨해보였어요. 남자가 욕을 하면서 펍을 나가고 마스카라가 온통 얼룩진 얼굴로 바에 앉아서 맥주를 달라고 외쳤는데 버팔로가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랑 저스틴은 한참 웃었죠. 보드카나 위스키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맥주 밖에 못마신다는거에요. 우는 것 보단 보드카가 나을거라고 놀렸더니 그 자리에서 개새끼라고 욕을 하더라구요. 진짜 쿨했죠.”

 “그냥 마시라고 내가 산다고 했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Damn it! 우는 여자한테 작업 거는 놈은 빌어먹을 놈이라고 꺼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냥 불쌍해서 그러는 거라고.”

 루윈의 갈색 눈을 바라보면서 이든은 보기 좋게 웃었다. 그는 왜 그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이든은 비오는 날이면 맨몸으로 정원에 뛰쳐나가 온 몸에 풀물을 들이는 애마냥 하릴없는 이야기를 쏟아냈음으로 그의 표정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든은 아이다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아이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이다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놀라 아무말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이든의 등을 두드리거나 뺨을 두드리며 술을 샀다.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톨스토이만큼이나 싫어한 이든이 졸업파티 만큼이나 통과 의례처럼 정형화 된 반응을 겪고 난 뒤에 깨달은 교훈이었다. 이든은 창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로 걸어갔다. 허리를 굽혀 비어있는 잔에 보드카를 채우고 소파에 앉았다. 신문을 들고 실갱이를 하던 날처럼 루윈 이바노브는 긴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아있었다. 루윈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든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루윈이 무언가를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어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루윈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든은 알고있었다. 그는 말하기 좋은 상대였고 이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이든 플로베르가 유일하게 약삭빠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의 일이었다. 

 보드카를 두잔 더 비우자 루윈은 거의 쓰러졌다. 넥타이를 하지 않은 루윈 이바노브 만큼이나 낯설었다. 열세개의 셔츠 단추중에 두어개가 풀려있었다. 고작 위스키 두잔과 보드카 두잔에 취하는 어른이라니. 이든은 그의 손에서 반쯤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거의 다 녹아내린 얼음이 떨어질 것 같은 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루윈이 조금만 덜 취했더라도 이든은 그에게 핫초콜릿을 권했을지도 몰랐다. 술을 진탕 마시고 난 뒤에 마시는 핫초콜릿은 치킨수프만은 못하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이든은 아이다만큼 핫초콜릿을 잘 만들지는 않았지만 물을 끓이고, 끓인 물에 초콜릿 가루를 타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머쉬멜로우를 두세개쯤 띄운다면 루윈 이바노브와는 세상에서 가장 안어울리는 음료를 권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루윈도 세상에서 아이다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었다. 둘은 초콜릿과 민트 같았고, 이든은 민트가 들어간 모히토는 아주 좋아했지만 민트 초콜릿은 아주 싫어했다. 쌉싸름한 치약 맛이 났다. 양치를 할 때처럼 입 안 가득 톡 쏘는 침이 고였다. 힘을 주어 양치를 하고 나면 침대에 누워야했고, 침대에 눕고 나면 곁이 허전했다. 

 루윈 이바노브는 손아귀에서 잔이 사라지자 아주 졸린 눈으로 눈을 반쯤 떴다.

 “자요”

 이든은 등을 돌린 채로 루윈에게 말했다. 옷장의 문을 열자 도톰한 담요가 가지런히 개여 있었다. 이든은 품에 담요 두 개를 안아들고 하나를 러그 위에 놓고 하나를 루윈에게 덮어주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은 뒤에 소파에 등을 기대고 러그 위에 앉았다. 위스키가 한 병 더 남아있었다. 미적지근한 위스키를 따자 쇠로 된 뚜껑이 병과 부대껴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안자요?”

 루윈에게 이든이 시덥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에 처음으로 듣는 질문이었다. 

 “천둥치는 날은 못자요”
 “그래요”

 루윈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왜요? 또는 어째서요?. 그렇게 묻지 않는 점이 루윈다웠다. 잘자요. 루윈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이든은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눈을 뜨고 있었는지 감고 있었는지도, 그 사이 잠에 빠져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간간히 천둥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순록의 카우벨처럼 아주 작은 소리였다가, 바로 귀 옆에서 총을 쏘는 것처럼 크게 들리기를 반복했다. 루윈이 조금 더 깨어있었다면 이든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놨을지도 몰랐다. 루윈 이바노브는 말하기 좋은 상대였다. 이든 플로베르가 더 이상 얼간이처럼 떠들게 두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취해버렸다는 점 까지도 그랬다.

 이든은 입을 다물고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얼음 통 안의 얼음은 죄다 녹아있었다. 냉동고를 열었을 때도 얼음이 있어야할 격자무늬의 칸은 텅텅 비어있었다. 이든은 미지근해진 유리잔에 미지근한 위스키를 따랐다. 미적미근한 알콜이 탄산수처럼 혀끝에서 통증을 내며 굴러다녔다. 방 안은 고요했다.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가끔 잇달아 천둥 소리가 들렸다. 창 밖에서 안으로 물밀듯 가로등의 혼곤한 불빛이 밀려들어왔다. 창밖을 내다보자 익숙한 비스트로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이제 곧 문을 닫을 모양이었다. 이든은 팔을 테이블 위에 괴고 허리를 굽혀 앉은 채로 천천히 위스키를 한잔씩 비워나갔다. 




“이봐 선샤인”

 조 크루거는 이든이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가운데 손가락을 엿바꿔 먹은 이후로도 이든은 선샤인이라고 불렀다. 열 번 까지는 들을 때 마다 돌아버릴 것 같았으나 열다섯 번이 넘어가자 이든은 손으로 선샤인을 세는 것을 관두었다. 스무 번을 넘어가자 오히려 조 크루거가 선샤인이라고 부를 때 마다 ‘너는 내 선샤인 나만의 선샤인’하며 어느 정치인의 선거 홍보 곡을 소리 내서 불렀다. 그쯤 되면 크루거도 흥미를 잃었을 법 한데 문제점은 크루거의 선샤인이 장난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 애칭으로 자리잡았다는데 있었다. 이든은 조 크루거가 아니면 평생 듣지 못할 애칭을 들으면서 노래를 불렀고 크루거는 이든의 등을 두드리고 웃었다. 그는 가끔 이든이 풋볼식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알고서도 그렇게 두드렸을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쪽이 정신건강에 좋았다. 

 “왜요”
 “넘어간다며”
 
 “가기로했죠”

 이든은 루윈과 헤이든이 그랬듯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방문을 열었을 때 헤이든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은색 플라스틱 케이스를 턱으로 가리켰다. 가져가요. 이든은 캐리어를 여는 손으로 익숙하지 않게 케이스를 열었다가 영화 속에 나오는 밀수입자처럼 말없이 다시 케이스를 닫고 헤이든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헤이든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든은 금세 자신이 멀더가 된 것처럼 으쓱한 표정으로 케이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의 멀더보다는 약간 소극적인 자세로 케이스를 손에 들고 방을 나섰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든은 망설이는 척 약간 뜸을 들였다.

 “제이, 스컬리할래요?”

 이든은 크루거의 주변인들이 부르듯이 조 크루거를 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크루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이든은 그것이 상관없거나, 혹은 그렇게 부르라는 크루거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크루거도 이든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할만한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크루거는 이든을 보고 선샤인이라고 불렀고 이든은 이미 거의 포기한 상태였음으로 크루거에게 약간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이든에게 그정도는 양보해야했다. 

 “무슨 스컬리”
 “‘멀더? 스컬리에요.’ 하는 그 스컬리”

 이든은 스컬리 흉내를 내며 목소리를 내리 깔았으나 이미 스컬리보다는 좀 더 다른 인물인 것처럼 느껴져서 크루거는 코웃음쳤다.

 “미쳤군”
 “멀더 흉내 좀 내보겠다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다니”
 “너라면 하고싶겠냐?”
 “그래서 내가 멀더잖아요”
 “왜 총이라고 들고 ‘스컬리? 대답해요 스컬리!’ 하게?”
 “어떻게 알았지?”

 근데요 당신이 하면 토할 것 같으니까 스컬리 흉내 내지마요, 제이. 이든이 말하자마자 크루거는 이든의 등을 격려하듯 툭 쳤다. 속터지니까 그냥 말하지마. 그정도의 보디랭귀지인 것 같아 이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크루거는 가끔 이든이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자신의 풋볼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동시에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잊어버린 척 하거나. 어쨌든 둘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 등을 시퍼렇게 만들만큼 힘주어 격려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든은 말없이 테이블 옆에 내려놓았던 케이스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크루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든은 검고 딱딱한 스펀지 위에 놓여있는 총의 부분들을 들어 조립했다. 이든은 술을 진탕 마신 사람처럼 손을 떨었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이 사인 스무개를 하는 시간만큼 이든은 간단한 총을 조립하는데 오랜 시간을 쏟았다. 진짜 멀더 흉내라도 낼 셈이었군. 이든이 겨우 총을 다 조립해 달칵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서야 크루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든은 말없이 웃었다. 얇은 입술을 끌어올려 웃자 색이 약간 연해졌다.




 “넌 승리의 여신이니까 괜찮을거야 선샤인”
 “텍사스 한정이잖아요”
 “네 입으로 말하니까 좀 안타까운데”

 그리고 여신이라고 하지 말래요? 이든이 크루거에게 으르렁거렸다. 입씨름 할 시간에 훈련이나 잘하지. 세스가 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고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든은 세스를 보고 손짓하면서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은 샌드위치 백을 가리켰다. 세스는 이든과, 이든의 손이 가리키는 샌드위치 백을 한번씩 훑어보고, 그 다음에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는 검은 총을 바라봤다. 세스와 다시금 눈이 마주쳤을 때 이든은 조금 웃었다. 웃지 않은 채로 걸어들어오는 세스를 보며 이든은 플라스틱 백 안에서 검고 반질거리는 올리브가 들어가지 않은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어 세스에게 건넸다. 갈시간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세스는 이든이 반쯤 포장지를 까준 샌드위치를 두어입 배어물었다. 이든은 그 자리에 케이스를 놓아두고 총만 챙겨들면서 일어났다. 이든이 엉거주춤 일어나자 크루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는 세스와, 가르지울로와, 론과 키스와 안젤로와 헤이든이 여기 저기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었다. 크루거가 이든의 등 뒤에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이든은 여섯명의 사이에 아무렇게나 섞여들어 앉으면서 크루거의 옆구리를 찔렀다. 

 “제이, 혹시 아들 하나 낳을 생각 없어요?”
 “왜 낳아주게?”
 “애 이름은 리처드로 지으라고요”

 이든은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더욱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이글루가 무너지거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정도로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이어도 괜찮다면 자신의 짧은 머리를 얼마든지 잘라줄 수도 있었다. 이든은 여전히 이디엇처럼 시덥잖은 말을 내뱉었고 크루거는 평소처럼 이든의 말에 코웃음쳤다. 이든은 키스의 불편한 시선이 자신에게 와닿는 것을 달갑지 않아했다가 헤이든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손가락으로 총의 윗머리를 살짝 쥐었다. 이중에서 이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론이었다 적어도 이든의 눈에는 그랬다. 그리고 이든은 무서울 만큼 고요한 폭풍전야 가운데서 허공을 보고 짖는 개처럼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댔다. 세스가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휴지통에 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보단 나은 훌륭한 쿼터백이 될 걸요”
 “아직 덜 맞았군”
 “이미 맞을 만큼 맞았거든요. 시퍼런 남자 등짝 볼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든은 웃었다. 키스와 시선이 맞닿았다. 키스는 여전히 불쾌해했고 이든은 여전히 불편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쪽과 무슨 상관이지. 무심하고 낮은 목소리가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달리 생각하면 치기였다. 이든 플로베르는 늘 전투의 가장 뒤에 서있었다. 심지어는 비스크 인형 같은 제인과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이든은 사령탑이었지만 사령탑이 할 줄 아는 것은 말하는 것뿐이었다. 키스. 키이스. 이든은 키이스하고 입 속에서 남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권총보다는 훨씬 우유부단한 발음이었으나 그는 자신보다 강했다. 지키려고 한다면 뭐든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했지만 이든은 키스가 그러기 위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쪽과 무슨 상관이지. 이든은 그의 강함이 불편했다. 이든은 손 안에 집히는 단단하고 묵직한 총을 고쳐 쥐었다. 

 “오 선샤인 말은 가려서 하는게 좋을걸. 태교에 안좋다고”
 “닥쳐”

 크루거의 말에 짧은 말로 대답하고 이든은 침을 삼켰다. 세스가 그 틈에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세스와 가르지울로의 뒤를 따라 여섯 명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이든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신이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건지 아니면 단순히 주변이 검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정말로 가라앉고 있었다. 우유를 푼 하얀 물에 빠진 생쥐나 밤바다 가운데서 가라앉는 타이타닉호처럼. 옆에서 크루거의 숨소리가 들렸다. 바다의 끝바닥에 닿은 것처럼 충격을 느꼈을 때 이든은 중심을 잡기 위해 약간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웠다. 지평선에 닿은 곳에 도시가 보였다. 갈까. 세스의 말에 이든은 천천히 걸었다. 이든은 땅을 밟으며 걸었지만 그는 아직도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몸이 무겁게 땅으로, 땅으로 집어삼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 한 방울 없는 땅 위에서 가라앉는 보트라니. 구인류가 신인류가 되어가는 과정처럼, 이든은 굽었던 등을 곧게 세워서 천천히 걸었다. 손 안에 총이 단단히 쥐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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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