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M HOLE
이타카의 크리스마스는 조용했다. 학생들은 모두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고 몇 몇의 커플들만이 기숙사에 남아 조용하고 은밀한 크리스마스파티를 열었다.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늙고 외로운 교수들도 파티를 열었다. 교수들의 파티에는 교수들과, 돈을 벌기 위해 크리스마스에도 연구실에 남아있었던 연구원들만이 자리에 앉아 샴페인 대신 위스키와 보드카를 들이켰다. 젊은 부인들이 만드는 민트색 케이크 대신 노부인들을 닮아 오래되고 못생긴 진저브레드맨이 놓여있었고 화려한 꽃과 촛불 대신 구식의 풍선들과 종이 가루들만이 오래된 나무 바닥 위에 흩어져있었다. 이든과 갈 곳 없는 미혼의 동료들은 크리스마스를 교수들과 보냈다. 교수들은 아주 늙고 지친 오래된 로봇처럼 자꾸만 안경을 고쳐 썼고 동료들은 그것을 보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매해 되풀이되는 그것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는 파티라기보다는 노부인의 만찬 같은 것이었다. 추수감사절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저녁 만찬을 앞에 두고 그들은 푸르딩딩하고 맛없는 크리스마스 푸딩을 떠먹었다. “이든.” 술에 취하면 고든 교수는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이든의 이름을 불렀다. 고든의 목소리는 무거운 쇳소리가 섞여있었고 고든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이든은 연구실의 낡고 오래된 장비들을 떠올렸다.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나사를 죄일 때 마다 쇳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겨우 녹슬지 않고 세월을 빗겨나간 장비들에서 나는 목소리가 고든에게서 났다. 이든은 오래된 부부는 닮아간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든과 장비들도 닮아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든의 눈은 현미경의 렌즈처럼 작았고 목소리는 기름칠 하지 못한 쇠처럼 꺼슬거렸다. 이든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한쪽 팔을 팔걸이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고든의 눈은 위스키로 흐릿하게 번져있었다. 밝은 하늘색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이든”
“사실 우리는 지금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네. 이론상으로는 말이야. 지구에서 알타우로스 별까지 가튼 억 만 광년의 거리를 우리는 만광년대로 줄일 수 있지. 아주 간단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시공간을 접고 터널을 뚫으면 되네. 산 아래에 터널을 뚫는 것처럼 터널을 뚫으면 돼. 에드워드가 색종이를 반으로 접는 것만큼 간단하지. 이든. 나는 험블리 교수의 말을 들었을 때 우주가 궁금해졌어.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들을 보기위해 애쓰고 있는데 우주 물리학자들은 너무나 커서 우리 눈에는 빛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저 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걸세. 우주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말이야. 시간여행이 그렇게 쉬운 것일 줄 누가 알았겠나. 빛들이 산을 넘을 때 산 아래에 터널을 뚫으면 되는 일이라는 걸! 놀랍지 않나? 사실 그 정도의 간단한 일은 인간도 할 줄 알아. 여름휴가만 해도 우리는 수많은 터널을 지나잖나. 사실은 우리 몸처럼 우주도 터널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몰라. 수많은 신호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터널을 지나 온 몸에 퍼지듯이 우주도 터널에서 터널로 가는 여행 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온 몸을 지나는 전기화학적 신호가 자동차가 되고 비행기가 되고 나중에는 타임머신이 되는 거지. 이든. 자네와 내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그 뇌조차도 수많은 터널들의 군집인거야. 터널 하나만, 그것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시간을 여행할 수 있네 이든. 아주,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야. 아주. 아주…”
이든은 고든이 왜 갑자기 우주 물리 같은 골치 아픈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던 고든은 조금 더 어린아이처럼 얇고 마른 입술을 끌어올리더니 이내 위스키에 취해 잠이 들었다. 늙은 고든부인이 문틈 사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가와 희미하게 켜져 있던 스탠드를 끄고 고든 교수의 늙고 왜소한 몸 위에 담요를 덮었다. 시간여행은 단순히 산 아래의 터널을 지나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일이다. 하얗게 새어버린 고든의 머리칼을 바라보던 이든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교수의 서재에서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고든의 책상 위에는 작은 액자가 놓여있었다. 이든은 에드워드가 지난달 막 들어온 연구실의 연구원의 이름이 아니라 수개월 전에 고든이 교통사고로 잃은 손자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에드워드 고든. 이든은 노교수의 서재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오년이 지나면 교수의 기억력은 더 나빠질 것이고 교수의 목소리는 기름칠하지 않은 장비의 소리들처럼 더 갈라질 것이다. 장비들이 늙어가듯 늙은 교수는 더더욱 허름하고 초라하게 늙어갈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매일같이 생각하던 에드워드를 크리스마스에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든은 장담할 수 있었다. 장담하고 싶었다. 아마 고든이 에드워드를 크리스마스에만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이든도 아이다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부인이 건네는 못생기고 맛없는 진저브레드를 삼켰다. 벽난로에서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요 며칠 내린 눈 때문에 잘 마른 장작들이 습기를 머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Mission 1. 벌레 구멍
“안녕하세요 제인”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이든은 노교수의 거실에서 타오르는 벽난로보다 더 따듯한 벽난로 앞에 앉아있었다. 벽난로에서는 아주 잘 마른 장작들이 타고 있었고 장작이 탈 때마다 불에 그슬린 장작의 냄새가 났다. 툭툭 튀어 오르는 불꽃의 소리와 재가 된 나무가 갈라지는 떡떡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벽에는 러시아의 겨울 풍경과 알래스카의 푸르고 울창한 숲, 라플란드를 떠올리게 하는 침엽수림의 그림들이 사진처럼 걸려있었다. 이든은 제인이 방에 들어섰을 때 제인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제인은 이든이 전에 한번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들었는지 혹은 이든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내려 했지만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이든은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웃었다.
“안녕하세요 제인. 제인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이든은 재차 확인하듯 제인에게 말했다. 사실 이든은 그녀를 미즈 그린이라고 불러야할지 제인이라고 불러야할지 조금 고민했으나 결국 제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헤드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좀 더 호텔에 머물러있어야 했고 짧지 않은 시일동안 동료가 되어야했다. 연구소의 동료들은 이든을 이든이라고 불렀음으로 이든은 제인 그린을 제인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쪽에 앉아요.” 그는 아주 선심 쓰는 것처럼 벽난로 앞에서 따듯하게 몸을 쬐일 수 있는 의자를 선뜻 가리켰다. 제인에게는 그 자리가 어울릴 것 같았다. 제인은 영국산 자기 인형처럼 희고 아름다웠고 호텔의 따듯한 공기 탓에 뺨은 붉게 물들어있었고 이든은 그녀가 여동생만큼 어려보인다고 생각했다. 제인이 소파를 향해 걸어올 때 마다 등 뒤에서 굵게 구부러진 머리칼이 느린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든 플로베르” “플로베르씨?” “그냥 이든이라고 불러요” 이든은 짧게 대답하곤 웃었다. 제인의 목소리는 우아하고 정중했다. 금방이라도 들 떠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이든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이든” 제인이 되새기듯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소파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흰 얼굴에 불꽃이 일렁거릴 때마다 이든은 조금 웃었다.
훈련은 지루했다. 제인도 이든도 공격적인 능력을 가진 타입이 아니었고 세스와 제이도 처음에는 어떻게 훈련을 시켜야할지 난감해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은 그다지 넓지 않은 방 안에서 그대로 훈련하기로 했다. 고작 십분 정도 지속되는 능력과 한 시간의 쿨타임. 지루한 쿨타임동안 앉아서 이든은 제이와 훈련하고 있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디즈니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제인은 그녀의 능력 잘 어울렸다. 스카프가 우아한 드레스 자락처럼 방 안을 휩쓸고 다녔고 낮은 의자가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를 빼면 그녀의 이야기가 될 것만 같이 느껴져 이든은 세스와 자리를 잡고 앉아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꽃무늬 커버를 덮어 쓴 강아지는 제인의 말에 따라 곧장 걸어가거나 테이블이며 소파를 피해 움직이거나 제이를 향해 달려 나갔으나 가끔은 그녀가 뜻한대로 움직이지 않고 꼼짝없이 멈춰 서있었다.
“촛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든의 말에 세스가 웃었다. 아마 비슷한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일렁이는 벽난로처럼 두 손에 따듯한 촛불을 밝히고 어리숙한 듯 입을 놀리는 영화 속의 촛대가 툭 튀어나와 방 안을 걸어 다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커튼 뒤에 숨어있는 빗자루 한 자루 정도 있어도 재밌었을 것이다. 짧은 듯 길었던 십분이 지나고 제인이 지친 듯 근처의 소파에 와 앉았다. 도자기 인형 같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보고 무늬가 없는 해바라기색 손수건을 건넸다. 네 발로 방 안을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제인의 발치에 와 무릎을 접고 앉은 채 굳어있었다. 살아있는 채로 화석이 된다면 사람도 저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제인의 발치를 지키는 나이트처럼 굳어버린 의자를 바라보다가 이든이 웃었다. 제인의 능력은 제인과 어울렸다. 하얀 영국 자기 같은 얼굴, 이 호텔의 어딘가에 걸려있는 초상화에 나올 것 같은 둥글고 작은 몸. 옅은 분홍색 린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서있으면 누구라도 르네상스의 한 가운에 와있을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여자애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았을 벌꿀색의 블론드. 발치에서 잠든 의자를 바라보다가 옷을 털며 일어났다. 쿨타임이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만요 제인”
이든은 일어서 제인이 앉아있는 의자를 좀 더 오른쪽으로 밀어 옮기고 방 한 가운데 놓여있던 테이블을 발로 밀어내며 세스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오 분 뒤에 세스가 꽃병을 던졌다. 꽃병은 청색으로 새겨져있던 아라베스크 무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부서져서 포근한 러그 위에 파편이 튀었고 제인의 소파가 있던 자리에 장미꽃 두 송이가 흥건한 물과 함께 떨어졌다.
"좀 할 만해?"
"세스" 이든은 감탄사처럼 이름을 내뱉었다. Anyway. 어깨를 으쓱이며 곁에 앉는 세스를 돌아보았을 때 세스는 아주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제인과 J의 목소리가 들려와 이든은 세스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약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좀 할 만해?"
세스는 다른 말을 찾기 귀찮은 듯 같은 말을 물어왔고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Nope. 이든의 능력이 지속되는 시간은 고작 십 분이었고 십분 간의 짧은 훈련이 끝나면 머리를 강타하는 것 같은 아주 고통스러운 두통과 함께 지루한 쿨타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느낌이 어때?”
이든은 세스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으나 곧 웃었다. 이든은 상식이 아주 부족한 자신의 머릿속 서가에서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서성거렸으나 이내 말을 이었다.
“세스. 시간은 이렇게 가. 내 앞에서 네 앞으로. 이렇게.” 그렇게 말하면서 이든은 검지를 펼쳐 자신의 몸 앞에서 세스의 앞까지 일직선으로 선을 그었다. 아니면 이렇게 갈지도 모르지. 핀셋을 잡는데 능숙한 손끝에 묵직한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이 다시 세스의 앞에서 이든의 몸 앞으로 돌아왔다. 이든은 그렇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세스를 올려다봤다. 세스는 이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 했으나 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이든은 고든 교수가 터널 이야기를 할 때처럼 눈을 반짝였다. 이든은 늙고 병약한 교수를 떠올렸고, 교수의 얼굴에 시름처럼 피어있던 검버섯을 떠올렸다. 죽은 나무가 비에 젖은 것처럼 힘없이 늘어진 흰 피부 위에 울긋불긋 피어난 검버섯 위로 에드워드라고 말하며 순식간에 흐려지던 눈을 기억해냈다가 곧 불타는 비행기를 떠올렸다.
“내 앞에서 네 앞까지 가는 시간을 중간에 반으로 접는 거야. 시간이 색종이라고 생각해봐. 색종이 접기 같은거지. 그리고 시간이 산처럼 접혔을 때 그 밑에 터널을 뚫는 거야. 아주 간단해. 10분이 산이라고 생각해봐. 다른 사람들이 산을 넘을 때 나는 터널을 지나가는거야. 딱 10분만, 딱 10분만 앞서갈 수 있는 곳에 터널을 뚫는 거야.” “그 터널을 벌레 구멍Worm Hole이라고 불러. 시공간을 접은 뒤에 뚫은 구멍을. 적어도 과학자들은 벌레 구멍이라고 부르지. 왜 벌레 구멍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벌레가 파먹은 것처럼 생겨서 그랬나?” 세스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내 터널은 항상 딱 십분 앞에 있어. 십분 만큼만. 세스. 좀 더 훈련하면 내가 보고 싶은 순간을 볼 수 있나? 단 십분이라도 괜찮아. 쿨타임이 길어져도, 그래 그것도 괜찮아. 과거에 터널을 뚫는 건 불가능해?”
“글쎄”
“세스” 이든은 세스를 부르고 잠시 뜸을 들였다. 세스는 귀찮은 표정으로 이든을 바라보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제인의 발치에서 나이트처럼 굳어버렸던 의자가 천천히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고 있었다.
“난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낯선 여자보다는 다른 여자를 구하고 싶었어”
고의적으로 부딪힌 어깨는 무심코 길을 가다 부딪힌 것 보다는 배로 아팠다. 손에 들고있었던 두꺼운 법학서를 우수수 떨어트린 여학생은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깜박거리는 푸른 신호를 보고 이든에게 쏘아붙이기 전에 서둘러 책을 줍기 시작했다. 이든은 느리게 주변에 떨어진 책을 하나 둘 주웠고 여학생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책들을 전부 줍고 나서 아직도 느리게 책을 줍고 있는 이든을 곤란한 듯 바라보았다. 그가 느리게 허리를 펴고 일어났을 때 이든의 등 뒤로 육중한 트럭이 지나갔다. 등 뒤에서 시멘트 냄새가 나는 바람이 일었고 낯선 여자의 부석부석한 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안다쳐서 다행이네요. 이든이 말했을 때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인이나 서포트해. 멍청아”
세스가 등을 두드렸다. 위로라기에는 어설프고 격려라기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든은 조금 웃었다. 제인의 발치에 다시 강아지가 몸을 웅크리고 굳었을 때 이든은 손을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붙이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접어 넣는다. 보이 스카웃에서 배운 경례를 이럴 때 쓸 줄이야.
“라져”
손을 이마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면서 웃었을 때 세스가 인상을 지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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