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fectly Average Man


03.

 이든은 로이처럼 무언가를 파훼하는 법도, 키스처럼 분해하는 법도, 아짐처럼 팔을 쓰는 법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시계를 사러 나갔다. 태어나서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아주 두꺼운 코트와, 모자와, 구두를 사고 그 다음에 시계를 샀다. 백화점의 유리 케이스는 보석상자 같았다. 오십불짜리 시계를 차던 이든에게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와 루비가 박힌 시계들은 시계보다는 드레스나 턱시도처럼 이든이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사치품 같았다. 시계는 시간만 알 수 있으면 충분했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니까. 이든은 점심시간과, 퇴근시간과, 저녁시간을 알 수 있는 손목시계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알래스카의 추위를 몰랐기 때문에 섣불리 자신의 오십불짜리 시계를 가져갈 수 없었다. 이든은 점원에게 알래스카에서도 찰 수 있는 손목시계를 달라고 했다. 알래스카에서도 얼지 않는 시계를 달라고 했을 때 점원은 표정이 이상해졌다. 뉴욕 태생의 점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루이지애나나 캘리포니아나 메릴랜드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원은 한번도 알래스카에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알래스카에서도 얼지 않는 시계를 보여주세요.”

 점원은 고민하더니 금색 뱃지를 단 남자를 데려왔다. 튼튼한 시계를 보여드릴까요, 손님? 남자가 그렇게 물었을 때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얼지 않는 시계면 됩니다.” 남자는 곧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마치 약간 이상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알래스카에 갈거라서요. 이든은 그렇게 덧붙이고 이든은 유리 케이스 안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유리 케이스 안에 남자의 투박한 손이 들어가 안을 뒤적거렸다.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가죽 밴딩 된 시계를 이든에게 내밀었다. 태그는 뒤집혀있었고 이든은 쉽게 시계의 가격을 보았다. 오십불짜리 시계는 아니었지만 유리 케이스 안에 있던 시계 중에 가장 값이 쌌다.

 “정말로 얼지 않나요?”

 이든이 그렇게 물었을 때 점원은 곤란한 얼굴로 선뜻 얼어버리면 무상으로 수리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시계는 얼지만 않으면 되었다. 이든은 이 시계의 값어치는 얼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했음으로 됐다고 말하고는 카드를 꺼냈다. 한 번에 치루는 값치고는 가장 값비싸고 혹독했다. 앞으로 며칠간은 바게트와 식빵으로 저녁을 때워야할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점심 정도는 교수님이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줄 수도 있었다. 시계에는 물기가 없었음으로 이든은 시계가 얼지 않기를 절반정도 확신했고 절반정도 바랐다. 이든은 로이처럼 무언가를 파훼하는 법도, 키스처럼 분해하는 법도, 아짐처럼 팔을 쓰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이든은 시계를 사러 나갔다. 이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자신의 시간을 재는 일 정도였다.
 
 이든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01.

 그램블린 공립 고등학교는 미국 어디를 가도 있을 법한 평범한 고등학교였다. 금발에 파란 눈을 한 여자애들의 반 이상은 뇌가 타조만 했고 금발에 파란 눈을 한 남자애들의 반 이상은 뇌가 근육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국계 깡패들이 코크와 엑스터시를 신발 밑창에 숨겨다녔고 흑인 갱스터들이 학교 뒷담에 걸터앉아 해시시를 피웠다. 아시안 여자애들이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두 손에 잡힐 만큼 작은 어깨를 노파처럼 웅크리고 다닐때면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녀들을 훑어보며 지나갔다. 일주일에 한번쯤은 뉴욕 경찰이 물건을 훔친 학생의 뒷덜미를 잡으러 학교에 들어왔고 그때마다 선생들은 지겨운 표정으로 대충 그 언저리에서 구질구질하게 놀고 있던 학생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모든 백치들과 마초들과 갱스터와 깡패들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학생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애들의 라커룸은 로커들과 얼굴만 번지르르한 멍청한 배우들의 사진으로 도배되어있었고 더러는 누군가가 페인트칠을 했다가 지웠던 흔적이 남아있기도 했다. 담배 정도는 애교였다. 해시시가 아니기만 하면 선생들도 담배정도는 눈 감아줄 수 있다고 여겼다. 축제시즌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시트콤에 나올 법한 일이 넓은 캠퍼스 안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는데 캬라멜 팝콘이 타는 냄새가 났고 비위생적인 핫도그가 여기저기서 팔려나갔다. 미니어처 관람차에는 더러 부모님을 졸라 놀러온 어린 손님들이 타고있었다. 그마저도 아주 드문 손님이었는데 그램블린 고등학교를 아는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어린 자녀를 그램블린 축제에 보내고 싶지 않아했다. 발랑까진 중학생 몇몇이 밤 늦게 집에서 기어나와 캬라멜이 찐득해지도록 탄 팝콘을 훔쳐 먹고 끈적거리는 손을 아무렇게나 바지에 닦으며 캠퍼스 안을 걸어다녔다. 그런 중학생의 대부분은 그램블린 고등학교의 다음 학생들이 되었다. 그들의 막되먹음은 그램블린에 들어오기 충분했음으로 수업료를 낼 다음 학생들을 원하는 그램블린의 선생들은 그들을 놓아두었다. 코튼 캔디라도 손에 들고 앉아서 쉴만한 벤치를 찾고 있다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로맨스를 목격하게 되기 십상이었는데 풀숲에 조금만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등 뒤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 치마가 걸려 올라가는 소리, 나무 등걸에 살결이 퍽퍽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날 밤은 날씨가 좋았다.
 
 번쩍거리는 요란한 불빛을 내는 관람차도 가슴이 울리도록 쿵쾅거리는 스피커도 비에 젖지 않아 모두가 기분이 좋았다. 인상을 지푸린 부모의 손을 잡고 핫도그를 입에 문 아이들이 여자애들의 짧은 치마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날 밤은 날씨가 좋았다. 사격장에서 유난히 인형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으나 그램블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애들 중에서 아직도 테디베어를 좋아하는 여자애는 없었다. 그런 애들은 대개 여자애들 사이에서 발달 장애라도 가진 것처럼 촌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램블린에는 그런 여자애가 없었다. 사격장에서 유난히 인형들이 우수수 떨어졌으나 아무도 떨어진 인형을 가지고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은 유독 날씨가 좋았음으로 이든과 어중이떠중이들은 오늘에야말로 담배로 도넛보양의 연기를 만들 수 있는 날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무덥고 소란스러운 캠퍼스를 지나 건물 입구의 계단에 모여 앉아 입에 담배를 물었다. 별빛은 보이지 않아도 하늘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붉은 신호는 또렷하게 보였다. 짙은 연기가 바람 없이 곧게 올라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할 일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집에 가기로 했다. 학교 뒤편의 농구대에서 농구라도 한판 하고 발 뻗고 잘 계획이었다. 관람차의 티켓을 팔고있는 뇌가 타조처럼 작은 여자애들 중에는 그램블린의 퀸인 킴 맥컬리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들 중에는 킴의 사진을 보고 자위할만한 멍청이는 없었다. 멀리서 계속 총성이 들렸다. 가짜 총에 들어있는 플라스틱 탄 정도는 인형에 맞아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태우고 일어나서 이든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라커의 전 주인은 마이클 잭슨의 광팬이었다. 여기저기 덕지덕지 발려있던 스티커들은 고스란히 흔적이 남아 떨어지지 않았다. 내일 모레 있을 생물학 퀴즈를 위해 두꺼운 교과서를 든 이든의 등 뒤로 담배를 피우던 어중이떠중이들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몰려들었다.

 시발. 개새끼들이 총을 가지고 왔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거의 울먹거리는 짐의 등 뒤에서 저스틴이 건물의 유리문을 잠갔다. 짐이 이든의 손목을 낚아채는 바람에 이든은 한 손으로 들 수 없었던 두꺼운 생물학 책을 떨어트렸다. 짐이 이든의 손목을 잡고 달렸고 이든은 떨어진 생물학 교과서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여전히 인형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지만 이든과 어중이떠중이들이 화학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을 때야 비로소 이든은 그것이 환호가 아니라 비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병신새끼야. 짐이 이든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동안 저스틴이 화학실의 문을 잠갔다. 화학실의 플라스크들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불빛에 빛났다.

 총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인형이 쓰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유리문이 깨지는 소리였다. 밖에서 애가 울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왔던 애들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빽빽거리면서 우는 소리가 창문 너머까지 들려서 이든은 두 손으로 창틀 난간을 짚고 밖을 내다보았다. 짐과 저스틴이 이든의 옷과, 벨트와, 정강이를 붙잡고 이든을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이든은 쉽사리 창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관람차의 불이 깜박거리고 스피커가 망가져 이상한 소리를 냈다. 캬라멜 팝콘을 팔던 테이블 위에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왔다.

  이든. 이든. 개새끼야. 숨으라고.

 짐은 이제 울먹거리다 못해 거의 울고있었다. 총성이 쉴 새 없이 들려와 이든은 그들의 탄창이 비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여분의 총알을 두둑히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관람차의 불빛이 꺼져서 킴 맥컬 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킴보다 작아보였다. 옆구리에 긴 장총을 매고 한참을 사격장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이든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관람차 뒤로 사라진 뒤로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비명소리 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곧 건물 안도 시끄러워졌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발소리와 구두소리와 뛰어다니는 소리들이 들렸다. 총소리가 날 때 마다 구두소리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누군가가 저스틴이 잠가놓은 삼층의 방화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쇠로 만들어진 문고리가 덜컥거릴 때 마다 짐이 울었다. 짐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주먹을 입에 쑤셔넣었다. 소리가 샐까봐 벌벌 떨었다. 이든은 운동화를 벗고 천천히 작은 창문 쪽으로 향했다. 저스틴과 짐이 앉아있는 화학실 구석은 높은 실험용 책상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화학실 안쪽은 어두웠으나 복도에는 불이 있었다. 이든이 문에 난 작은 창문에 한쪽 눈을 대고 밖을 바라보았을 때 늘 이든을 보고 범생이라고 놀렸던 갱이 철문을 두드리며 울고 있었다. 이든은 문을 열어야할까 고민 했으나 뒤를 돌아보았을때 저스틴이 고개를 저었다. 저스틴의 얼굴이 지저분하게 얼룩져있었다. 화학실에서 복도 끝까지의 거리를 셈하고 있다가 이든은 갱의 등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총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구두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원래 멈춰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이 몇 번 더 덜컥 거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화문 유리에 피가 얼룩져 있었다. 이든은 짐이 있는 곳까지 기어갔다. 무릎이 바닥에 닿을 때 마다 소리가 나지 않아야했음으로 이든이 거기까지 기어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짐의 주먹은 잇자국이 나있었다. 주먹위로 짐의 침이 흘렀다. 이든은 짐의 앞에 엎드려서 토했다.


04.

 이든은 알래스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알래스카에 순록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이다는 라플란드로 떠나기 전에 수많은 설원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설원은 눈이 부시다고 했다. 지나치게 하얀 색이어서 가끔 눈이 멀기도 한다고 아이다는 말했다. 툰드라의 대지는 봄이 오면 기적처럼 변했다. 눈에 덮혀 있던 땅은 이끼와 풀로 뒤덮이고 얼어붙어있던 동토가 녹아내려 땅은 마치 파도처럼 물결친다고 말했다. 어떻게 땅이 물결칠 수 있을까. 어떻게 땅이 바다처럼 일렁일 수 있을까. 아이다는 마냥 웃었다. 그게 바로 툰드라가 기적 같은 이유라고 하며 웃었다. 땅이 바다처럼 일렁이고 순록이 끄는 썰매가 지나갈 때 마다 이끼를 가득 피운 푸른 땅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땅이 침엽수림 같은 색으로 변하고 순록의 털이 다시 잿빛으로 변하는 계절. 그래도 지금의 알래스카는 흰 빛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든은 캐리어에 아이다가 선물했던 <눈의 여왕>을 함께 꾸렸다. 설원은 하얗게 빛나고 코티지가 드문드문 자리 잡은 라플란드. 아니 알래스카. 아이다가 말했던 침엽수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든은 고급스러운 케이스를 열어 안에 담겨있는 시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직 태그가 붙어있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값비싼 물건을 산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이든은 태그를 떼어 책장 사이에 꼽아두고 돌아와 시계를 손목에 찼다. 이든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 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무언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02.

 그리고 또 아픈 곳은 없나요, 이든?
 
귀가 아파요
 
 귀요?

 네 귀요. 귀가 아파요. 옆에서 심벌즈를 치는 것처럼 자꾸 귀가아파요. 손으로 귀를 눌렀다 떼었다 해봐도 소용이 없어요. 자꾸 소리가 들려요. 총소리 같은거요. 사이렌소리인지 총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총소리랑 비슷해요. 고막이 떨리다가 터질 것처럼 아파요.

  총소리가 나요?

  아, 아니. 총소리인가요? 총소리 같은데 모르겠어요. 총소리였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가 소방벨이울리는 소리였다가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데 총소리가 제일 아파요. 귀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요.

 귀를 좀 만져봐도 될까요? 어디쯤이에요?

  여기요, 여기쯤.

 이든은 손을 뻗어 귀 안쪽 바퀴를 가리켰다.

  만져봐요.

  손가락이 귀 안쪽의 바퀴를 한바퀴 쓸고 손을 좀 더 넣어 귀 안쪽을 꾹꾹 눌렀다. 연골로 채워진 귀 안쪽의 내벽이 말캉하지도 물컹하지도 않은 접히기 쉬운 플라스틱처럼 손가락이 누르는대로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플라스틱 보틀처럼.

  지금도 아파요?

 아뇨 지금은 안아파요. 아니 네 약간요. 안쪽이 시큰거려요.

 미스 샐린저는 이든의 의자를 돌렸다. 무겁고 오래된 회전의자가 사분의 일만큼 돌아갔다. 이든의 귀에 붉을 밝히고 단정하게 마무리된 둥근 손톱으로 귀 안쪽을 눌렀다.

  아무 이상은 없어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이든. 내일 다시 올 수 있나요?

  내일은 제 상담일이 아닌데요. 미스 샐린저.

 병원에 가야할 것 같네요. 심각해요. 귀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탄피나 어떤 것이 귀에 박혀있지도 않고 안쪽에도 염증이라고 할만 한 어떤 것도 없네요. 이든의 귀는 아주 정상이에요. PTSD라고 알아요. 이든?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화학식을 봤지만 그런 이름의 호로몬은 처음이네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요. 화학식이 아니고요.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미스 샐린저는 파일을 덮었다.

  내일 다시 와요. 가방을 챙겨들고, 외투도 입어요. 평소 오던 시간 말고 좀 더 늦게 수업이 끝난 후에 와요. 내가 동행하겠어요.
 

07.

 “아짐! 나와! 나와 제발!”

 귀가 아팠다. 이든의 등 뒤로 져있던 그림자가 사라져있었다. 이든은 그 도그마를 알고있었다. 시계를 보는 것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는 그림자를 다뤘다. 한번 써버린 그림자는 다시 쓸 수 없었고 그림자는 땅 위를 걸어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짐은 이글루 안에 있었다. 이글루는 그림자였다. 이글루 하나가 거대한 그림자였다. 아짐은 공격당하기 가장 좋은 곳에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초침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짐. 나와요 제발. 이글루 안에 있는 아짐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목이 쉬어있었다. 목에서 낡은 경첩에서 나는 소리가 났다. 아짐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래스카의 백야는 뜨거웠다, 이든의 등 뒤로 길게 져있던 그림자가 사라져있었다. 시계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지독할 정도로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얼지 않는 시계를 달라고 했는데. 초침이 하나 움직일 때 마다 절박해졌다. 이든은 순록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로 눈 위에서 발을 굴렀지만 알래스카의 대지는 단단하게 얼어있었다.

  멀리서 쩔렁거리는 방울소리가 들렸다. 이든은 그 방울소리를 알고있었다. 아이다가 죽은 날 밤 꿈속에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몇 개, 몇백 개의 방울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순록의 무리가 오고 있었다. 귀가 아파왔다. 순록의 방울소리는 총성처럼 들렸다. 순록의 무리가 침엽수림을 지나기 전에, 설원 위로 드러나 수백 개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전에 끝나야했다. 이제 이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05.

  아이다는 부엌에서 낡은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아침에 스프를 마시는 큰 머그잔에 마시멜로우를 띄운 핫초콜릿을 타다 주었다. 에단. 아이다는 이든을 에단이라고 불렀다. 이든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다는 에단이라고 말 할 때 마다 에,라고 말하면서 혀를 입술 밖으로 살짝 빼냈다.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빨간 혀가 쏙 빠졌다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든은 초콜릿 옷을 입힌 딸기같다고 생각했다. 아이다는 스프는 아주 못 만들었지만 핫초콜릿은 아주 잘 탔다. 이든이 그것을 우습게 여기자 아이다는 초콜릿이 자신과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다의 피부는 초콜릿처럼 짙은 색이었고 핫초콜릿처럼 따듯한 윤기가 돌았다. 두 손으로 머그컵을 꽉 쥐고 있으면 따듯한 기운이 온 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아이다가 타주는 핫초코를 마시고 나면 이든은 금방 잠에 들었다. 에단. 괜찮아. 모두 그렇게 실수하는거야. 평범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핫초콜릿 한잔을 다 마시고 나면 약간 매운 맛이 나는 치약으로 거품이 나도록 이를 깨끗이 닦고 자리에 누웠다. 이든의 아파트는 지금의 기숙사보다도 훨씬 작았다. 침대 맡에 바로 책상이 놓여있었고 책상에서 다섯걸음만 가면 물을 끓일 수 있는 부엌이 있었다. 아이다는 그 작은 아파트를 좋아했다. 값이 조금만 더 쌌다면 아이다는 이든의 집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방을 구해 그 아파트에 들어왔을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평범함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이든은 평범한 사람은 히어로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히어로는 아주 의외의 인물이어야 했음으로 배트맨만큼 고독하거나 슈퍼맨만큼 미남이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스파이더맨만큼 괴짜여야 했다. 이든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때만큼 어중이떠중이였고 금요일 밤이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가고 토요일 밤에는 여자친구과 같은 아파트에 머무르며 성적은 중간 쯤 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든은 평범한 사람이 히어로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다. 이든은 평범했지만 아이다가 죽은 뒤로는 핫초코를 마시지 못한 만큼만 덜 평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덜 평범함은 배트맨의 고독만큼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든은 히어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십분 앞을 볼 수 있었지만 히어로는 십분 앞이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있어야했다.
 

06.

  이든은 죽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치 갓난애가 젖달라고 울듯 빽빽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된통 쉬어서 듣기 싫은 목소리로 이든은 키스와 로이의 이름을 불렀다. 한두마디씩 다른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이든이 내뱉는 말의 절반 이상은 키스와 로이의 이름이었다. 나중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하나로 합쳐져 들리는 것처럼 부르기도 했다. 도그마가 나타나자마자 이든은 시계를 보았다. 오십불짜리 시계와 별로 다를 것은 없지만 가격은 훨씬 비싼 시계였다. 두 마리의 도그마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이든은 이로 손톱을 씹었다. 모두 그림에 그리듯이 기억해야했다. 조금이라도 놓치는 순간 피해를 장담할 수 없게 되기 마련이었다. 도그마는 아주 민첩하게 움직였다. 키스의 곁에서 로이의 곁으로, 로이의 곁에서 다시 저 멀리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그것이 과연 물리적인 움직임인지 아니면 텔레포트 같은 것인지 이든은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최대한 그의 동선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십분 안의 일을 머릿속에 구겨 넣어야했기 때문에 이든은 아주 불안해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영상에서 조차 자신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도그마의 움직임은 뚝뚝 끊겨있었다. 이든은 천천히 처음부터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이든은 히어로가 될 수 없었지만 적어도 히어로들을 서포트 할 수는 있었다. 배트맨은 될 수 없었지만 배트맨에게 적의 위치를 알려줄 수는 있었다.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기억을 더듬었다. 키스. 로이. 이든은 쉴새없이 외쳤다. 지나치게 빠른 움직임 탓에 더러는 이든이 어디로 움직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단지 이름을 부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해있기도 했으나 이든은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보기로 했다. 이든은 아주 신중하고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고 이든이 기억하는 한은, 도그마는 이든이 예상한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든은 도그마의 움직임 중 절반가량을 알 수 없었다. 도그마는 아주 빠르게 움직였고, 이든은 본 것은 기억할 수 있었지만 보지 않은 것은 기억할 수 없었다. 도그마의 움직임 중 절반가량은 아주 빨랐고 아주 민첩했기 때문에 이든은 도그마의 움직임 중 절반가량을 알 수 없었다. 이든은 로이와 키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둘에게 아무런 말 도 해줄 수 없었다. 목은 팍 상해서 쉰소리가 났고 그것은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강바닥만큼 메말라있었다.


08.
  
이든은 백불이 넘는 시계 대신 자신의 오십불짜리 시계를 다시 꺼내어 손목에 찼다.이든은 시계를 버릴까 말까 오래도록 망
설였으나 시계는 이때까지 이든이 자신을 위해 산 어떤 것보다도 비싼 물건이었음으로 당분간은 가지고 있기로 했다.


09.


 1999의 해, 일곱 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려고

 그 전후의 기간에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이든은 비슷한 구절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짐은 1999년의 지구 종말론을 믿고있었는데 안타깝게도 1999년이 오기도 전에 학교 뒷뜰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저스틴은 차라리 잘됐다고 말했다. 저스틴은 1999년이 왔는데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면 짐이 미쳐버릴거라고 생각했다. 짐이 죽은 날에도 이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든은 짐의 가족들 대신 땅을 파는 것을 도왔다. 흙으로 더러워진 티셔츠와 바지를 벗어서 버리고 난 뒤에 둘은 말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든은 졸업파티를 마치기도 전에 넥타이 매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에게서 빌린 정장은 소매가 너무 길어서 하얀 장갑의 손등이 반이나 뒤덮였다. 개나주라지. 저스틴이 말했을때 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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