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t Cookie in Suit


 길이 밀려 이든. 많이? 그래. 아이다는 차 안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 안에서 걸려오는 전화에서는 약한 진동 같은 엔진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있었고, 그녀는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차 안에 초콜릿 같은 거 없어? 젠장 다 녹았네. 맥도날드에 차세우고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 그래. 이든은 자신의 방에 앉아있었다. 다리를 쭉 펴면 아슬아슬하게 비어져나갈 것 같은 침대는 오래되어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하늘색으로 도배된 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든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블라인드 사이를 손가락으로 벌리자 창 밖에서 얀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꾸고 있었다. 나무는 매 해 조금씩 컸고, 이든이 스무살이 넘어가자 나무는 이든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얀은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꿀 때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는 낡은 천사들과 가끔 한 두 개씩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색색의 전구들, 큼직한 별과 산타들, 지팡이와 반짝이는 미러볼들이 가득했다. 얀은 두툼하고 촌스러운 스웨터를 목 끝까지 지퍼를 잠가 올리고 트리를 가꾸고 있었다. 이든? 아이다가 수화기 너머에서 이름을 불렀다. 응. 길 진짜 밀려. 많이? 그래. 세상 사람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든은 블라인드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얀, 얀, 패기가 파이를 구웠는데 이든한테도 좀 줄래요? 집에 와 있다면서요? 창 밖에서 이웃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죠. 고마워요thank you. 얀의 목소리는 늘 다정했다. 그의 발음에는 약간 독일식 억양이 들어있었고, 이든은 ‘당신you’이라고 말할 때 얀처럼 말했다. 마지막 발음이 끊어지는 것처럼 입안으로 숨어들어갔고 좀 더 딱딱하지만 명확하게 들렸다. 이든의 인생에서 얀과 당신은 아마도 절대 변하지 않을 부분이었다. 이든은 아이다의 말을 들으면서 침대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손 안에서 수화기가 뜨끈해졌다. 이든은 눈을 감은 채 스웨터처럼 짜임 있게 멈추어선 꽉 막힌 도로에 갇힌 아이다의 표정을 상상하고, 그 다음엔 집으로 돌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상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전화 하지마 에단. 아이다가 갑작스레 말했을 때 이든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아이다의 말들과, 지금 그녀가 내뱉은 말의 연계성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든이 눈을 떴을 때 얀이 동화책을 읽어주던 자신의 방이 아니라 이타카의 기숙사에 있었다. 낡은 나무로 된 아파트는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침대에서 감았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창 밖에는 얀도, 크리스마스 트리도, 패기의 파이를 들고온 존도 없었다. 창밖에서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보일리 없는 뉴욕의 거리가 보였다. 비스트로가 있는 골목과 이든이 고든의 심부름으로 자주 들락거리던 가게들, 높은 고층 빌딩이 겨울처럼 줄을 잇고 늘어서 일년 내내 그늘 진 어두운 거리들. 이든은 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뉴욕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리의 모퉁이마다 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받들고 서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불안과 공포와 그리움으로 넘실거렸다. 이든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든은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곰팡이가 쓴 치즈 바구니와 수화기를 발견했다. 이제 전화 하지마 에단. 아이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이제 아이다가 전화하지 말래요 얀. 괜찮아 아가. 얀이 대답했다. 얀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가 이든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얀의 목소리는 좀 더 낮았고 얀은 영어를 말할 때 조금 더 끊어지듯 발음했다. 
 이든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호텔의 방 안이었다. 괜찮아 아가. 루윈 이바노브의 목소리였다. 이든은 무겁게 내려앉는 눈커풀을 아주 느리게 깜박이면서 루윈 이바노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밤새도록 부어넣은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든은 아이다와 얀과 존이 모두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제는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고 말하던 아이다의 갑작스러운 말도, 자신의 아파트 창 밖으로 뉴욕의 거리가 보이던 것도 모두 이해했다. 이든은 몸 위에 덮여있는 담요를 걷어들고 상체를 일으켜 부스스한 표정으로 러그 위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괜찮아 아가, 아빠 말에 대답해. 루윈 이바노브는 전화기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루윈의 등은 왜소해보였고 구겨진 셔츠 때문에 더욱 그랬다. 위스키 두 잔과 보드카 두 잔에 취해서 소파에서 잠들어버리는 루윈 이바노브. 이든은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로 그가 말하는 ‘아빠’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신 애에요?”

 루윈 이바노브가 돌아보았을 때 이든은 아직 잠이 조금 덜 깬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꽉 잠겨있었고 이든은 손을 뻗어 얼음 통을 집어 들었다. 얼음이 녹은 물을 잔에 따라 목을 축이는 동안 이든은 잔 너머로 곁눈질 하면서 루윈 이바노브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증권거래소나 행정사무소의 직원처럼 웃고 있지 않았고, 넥타이도 하고 있지 않았다. 루윈 이바노브는 보지 못했겠지만 이든은 그의 셔츠 등판이 구겨져 있다는 것과 그의 바지 밑단이 구겨져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요."
 "애도 낳았었어요?"
 "제가 애가 있으면 이상합니까?"
 "그 정도로 나이 들어 보이진 않는데."
 "빨리 결혼하면 있을 수도 있죠."

 그래요. 그런 표정으로 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결혼하면 있을 수도 있죠. 이든은 루윈의 말을 곱씹었다. 몇 살이에요? 귀여워요? 이든이 물을 때 마다 루윈은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의 딸은 다섯 살이고, 사진은 없으며,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법원은 그에게 양육비를 지불하라고 말했으나 딸에게 전화를 할 권리는 주지 않았다. 이든은 루윈의 지나치게 친절한 대답을 들을 때 마다 그가 자신이 더 물어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든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지만 루윈은 정말로 그렇게 계산하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이든은 웃고 있지 않은 루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라디오를 툭툭 털면서 서있었고 이든은 여전히 러그 위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든은 그가 특별해보인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아빠였지만 아빠라고 불리는데 어울리지 않았고,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어딘가에 어린아이의 치기 같은 유치함이 으깨어져 있었다. 

 “플로베르씨”

 아빠 말에 대답해. 이든은 루윈의 얼굴을 보며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루윈이 이든을 부를 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티비를 틀면 나올 것 같은 목소리는 약간 날카로웠고 잘 교육받은 듯한 깔끔한 발음은 그의 목소리를 더욱 날카롭게 들리도록 만들었다. 이든은 그가 플로베르‘씨’라고 말할 때 마다 은행의 창구 앞에 앉아있는 것 처럼 느꼈다. 플로베르‘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떤 용건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든은 불쾌함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루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담배를 비벼끄는 손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윈이 담배를 비벼끄는 동안 엄지와 검지가 약간 꺾였고 손등의 뼈가 움틀거렸다. 사무직으로 일하는 남자들이 대개 가졌을 법한 손이었지만 조금 더 깨끗했다. 그는 학창시절동안 그 어떤 운동 클럽에도 들지 않았을 것 같았고 손으로 교과서를 넘기는 일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든은 그의 깨끗하고 단정한 손이 포켓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들어 서류에 싸인하거나 하이라이트를 긋는 대신 딸의 조막만한 손을 잡는 광경을 상상했다. 상상속의 손은 이든이 얀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맞물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고 어색했다. 얀은 이든을 태우고 숲 속의 캠핑장과, 풋볼구장과, 야구경기에 데려갔고 생일이면 이든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갔다. 이든을 잔디 기계 앞에 세우고 정원을 손질했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몄다. 이든은 머릿속에서 루윈의 손 위에 얀의 손을 겹쳐 보았으나 루윈의 손은 얀에 비해 턱없이 작고 깨끗했다. 이든은 다섯 살짜리 아이를 가지기에 너무 젊은 것 같은 남자의 손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약간의 담배연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기에 너무 젊고 깨끗한 남자의 손을 바라본 뒤에 다섯 살짜리 귀여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덩그러니 서있는 루윈을 생각했다. 지금 연구원 직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루윈 이바노브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플로베르씨. 그렇게 말할 때보다도 두어배쯤은 날카롭다고 이든은 생각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기에는 지나치게 젊어보였고 냉정했으며 놀이공원과는 어떤 의미로든 어울릴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든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루윈을 보면서 어쩌면 그의 목소리만큼은 아빠와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아가. 얀이 열에 들떠 앓고 있던 일곱 살의 이든의 머리를 차가운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던 것처럼 루윈도 딸에게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이든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조용히 딸의 이마를 바라보는 루윈을 상상했다. 그 광경은 아주 고요하고 적막했지만 이든은 조금 웃었다. 웃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관찰은 연구실 내에서나 해요."

 이든은 녹색 눈을 깜박였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운을 띄우고 그는 잠시 멈추어 루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루윈 이바노브는 화가 난 것 같았으나 이든의 멱살을 잡지도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단지 불쾌함을 전혀 감추지 않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을 뿐이었다. 이든은 느리게 웃었다. 고요하고 적막하게 잠든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루윈을 상상했을 때보다도 좀 더 웃었다. 

 “미안하지만 연구소였다면 안경부터 썼을 걸요. 나는 내 일처리에 그렇게 미숙하지도 않거든요.”

 그렇게 책임감이 없지도 않고요. 이든 플로베르는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루윈은 여전히 미간을 지푸리고있었다. 이든은 루윈의 일그러진 표정이 좋았다. 혼자 식사하고 계셨잖아요. 그런 투로 말을 했을 때의 여지없이 곤란해 하던 얼굴도 좋았다. 수트로 감추어둔 내면의 유치함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루윈은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 보다는 옷에 맞는 사람처럼 자신을 맞춘 사람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든에게는 그랬다. 이든은 그의 몸에 맞춘 듯 잘 짜여진 수트를 보는 것이 그의 예의바른 웃음만큼이나 답답했고 넥타이를 풀고 베스트의 단추를 풀러내고나면 이제껏 잘 만든 마스크로 만들어진 뭔가가 벗겨질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루윈 이바노브는 아마 어제 아침에도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입었을 것이다. 잘 다려진 와이셔츠의 열세개의 버튼을 잠그고, 양쪽의 소매 버튼을 두 개씩 네 개 잠그고, 다시 바지의 버클과, 베스트의 단추와, 재킷을 걸어 잠그고 구두끈이 풀리지 않도록 동여맸을 것이다. 그는 아마 수트를 차려입는 과정처럼 모든 것이 그의 통제 하에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든은 루윈의 구겨진 셔츠를 바라보고 다시 루윈과 눈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불쾌해했다. 이든의 비아냥거리는 대답을 듣고는 더욱 불쾌해했고 이든은 그의 표정이 그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루윈 이바노브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가 여전히 자신을 플로베르‘씨’라고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이든은 그제서야 자신이 은행의 대출상담 창구에서 빠져나와 호텔에 있다고 느꼈다. 

 “법원이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절대로 일을 멈추는 법 없는 은행도 직원들한테 휴가를 줬죠. 일주일씩이나요”

 이든은 손에 들려있는 신문의 1면을 펼쳐들었다. 맨하튼 월스트리트 은행 열여덟의 강도에게 털리다. 1주일간 업무 중지. ‘당신’도 받은 그 휴가요. 

 “은행도 업무를 중지했는데 법원이요? 국가기관은 이런 때 쓰레기나 다름없어요. 겨우 돌아가고 있는건 군대 정도죠. 나보다 똑똑하고 이성적인 척 하는 당신이 모를리 없을텐데요.”

 이든이 알고 있는 한 은행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판에 박힌 곳이었다. 은행은 절대로 자신들이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았고 업무를 중지하는 일도 어지간한 일로는 없었으며 직원들에게 이유 없는 휴가를 주지도 않았다. 설령 직원들이 그 전날 열여덟살짜리 강도에게 털려 지점장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요. 플로베르씨”

 이든은 다시금 그가 자신을 플로베르‘씨’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호텔 안에서 만난 어떤 사람 중에도 자신을 플로베르‘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루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루윈의 호칭은 아주 고리타분했고 동시에 그는 이든이 왜 그에게 시종일관 술먹은 개처럼 비아냥거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투로 말했다. 관찰은 연구실 내에서나 해요. 루윈은 그렇게 말했으나 이든은 사실 루윈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사람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든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대하듯 대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이든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이든은 마치 플레이트 위의 미생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과, 호텔의 방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관찰했지만 이든은 자신이 관찰한 것을 기억할 정도로 사람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오히려 이든은 플레이트의 실험 결과를 사람의 일보다도 잘 기억했다. 이든의 관찰력은 아주 사소하고 세심했지만 그는 그것을 많은 곳에 분배할 정도로 용의주도하고 냉정하지 않았다. 이든 플로베르는 아주 이성적이었지만 냉정하진 못했고, 그는 지극히 감성적으로 자신이 가장 흥미로워 하는 것에 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력을 쏟았다. 그리고 적어도 루윈 이바노브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든이 쉽사리 아이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다는 것도, 누구에게도 쉽사리 비아냥거리지 않는 다는 것도, 식사를 제안하거나 식사를 거절했다고 해서 그것을 기억하고 말을 건네지 않는 다는 것도 몰랐다. 심지어는 이든 플로베르가 그의 지푸려진 미간에 키스하고 싶어 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이봐요 루윈 이바노브”

 루윈 이바노브는 네모난 틀에 넣어 구운 민트맛 쿠키같았다. 정사각형의 쿠키. 장인이 만든 것처럼 어디 한 구석 틀에 빗나가지도 않고 무게도 다르지 않은 것처럼 원래 만들어져있던 모난 곳이 아니라면 어느 곳도 불필요하게 튀어나온 곳이 없었다. 루윈은 마주쳐 인사할 때면 꽤나 사회생활에 익숙한 우아한 은행원처럼 웃었고 예의바르게 인사했으며 약속을 거절할 때조차도 그랬다. 적어도 쿠키를 반으로 쪼개면 쿠키에서는 따듯한 밀가루 반죽의 맛깔스러운 냄새 대신 톡 쏘는 민트 향이 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민트가 통째로 갈색 쿠키 안에 들어있거나. 적어도 이든이 루윈 이바노브라고 명명한 쿠키는 구워진 것 그대로의 맛이 나지는 않았다. 이든 플로베르가 실험하고 관찰한 결과로는 그랬다.

 루윈 이바노브. 루윈은 이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껏 이든은 그의 풀네임을 부른 적이 없었다. 루윈처럼 그를 이바노브‘씨’라고 부르지도, 루윈‘씨’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든은 그를 그냥 루윈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든에게는 루윈 이바노브의 시선을 끌 필요성이 있었다. 

 “당신은 좀 더 나한테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당신은you. 그 단어는 아마 이든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 중에 하나였다. 이든은 독일에서 온 키가 크고 옷을 아주 못입는 아버지를 두었고, 이든의 ‘당신’은 얀이 발음하는 ‘당신’과 아주 똑같았다. 독일어의 억양이 아직도 묻어나는 영어로 얀은 ‘당신’이라고 발음했다. 미국인들이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든과 얀이 말하는 당신은 아주 짧게 발음됐고, 아주 짧게 끝났다. 거의 마지막 발음이 들리기도 전에 단어가 끝났다. 당신은. 이든은 그렇게 루윈에게 말하고 나서 잠시 침을 삼켰다. 

 꿈 속에서 아이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이든은 루윈을 보면서 초콜릿 같은 여자를 잠시 떠올렸다. 루윈과 아이다의 사이에는 어떤 접점도 없었고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든은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던 여자를 잠시 떠올리고 그녀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미 오년 전에 더는 전화를 걸 수 없게 된 여자가 꿈속에 나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말했고, 이든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올 해의 뉴욕을 떠올렸다. 어수선하고 불안하고 위험한 뉴욕을.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죽기 위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뉴욕을. 그리고 이든은 세상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때, 집으로 돌아가는 루윈을 상상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집으로 돌아가는 루윈 이바노브. 그의 집에는 그가 괜찮다고 다독일 아이도, 오래전에 떠난 부인도 없을 것이었다. 이든은 루윈의 텅 빈 집과, 그의 잘 넘겨진 단정한 머리와, 구겨진 셔츠와 왜소하고 외로운 등을 생각했다. 이든은 입에 담배를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든 플로베르는 최대한 루윈 이바노브가 서있는 곳에서 먼 곳에 등을 붙이고 섰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루윈은 이든이 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이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든은 담배 연기를 내뱉고 입술을 열었다. 한참동안 입 안에서 맴돌고 있던 단어들이 입안에서 한데 뭉쳐 뭉그러지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던 단어들이 모여 눈덩이처럼 불어나 겨우 하나하나의 단어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왜냐면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이든 플로베르는 뻔뻔했다. 마치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알릴 권리가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이든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방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오랫동안 형체가 되지 못하고 입 안에 소복히 내려쌓이던 눈덩이 대신 깊이 연기를 들이마실 수는 있었다. 이든은 약간 손을 떨었다. 이든은 가끔 긴장할 때면 손을 떨었지만 아마 이것조차도 루윈 이바노브는 모를 것이다. 왜냐면. 내가. 당신을.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이든 플로베르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담배연기가 표정을 가릴 것만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든은 연기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폐 안쪽을 휘갈퀴고 나온 연기들이 흩어졌다. 속이 쓰려왔다. 아마 담배연기가 휩쓸고 지나가서였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폐가 통증을 느낄리 없다는 것은 잠시 잊고 있었던 듯 했다. 

 “대답하지 말아요. 무서우니까”

 이든은 웃었다. 웃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식도 아래에서 담배 연기처럼 들끓고 있는 것들을 표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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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이타카는 여전했다. 어떤 점이 여전했냐고 물으면 건물이 망가진 곳도, 불에 탄 곳도 없었다. 단지 몇몇의 학생들이 사라져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대학은 여전히 지식의 요람이었고 지식이 빠지더라도 그 자체로 요람이었다. 대학가는 여전했다. 마치 그 약간의 소동들이 오히려 대학생들을 더욱 대학생 답게 만드는 것처럼 세기말의 중심에서 스물몇의 젊은이들은 지식과 과학을 외쳤다. 신과 과학의 사이에서 그들을 단순히 순한 양으로 만들었던 것들은 사랑과 평화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몇몇의 펍들은 문을 닫았지만 여남은 펍들은 이제껏 없었던 호황을 누렸다. 학생들의 절반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펍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절반의 절반은 술을 진탕 마시면서 세기말을 위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열띤 토론을 나누며 세기말에 맞섰다. 이타카는 여전히 요람이었다. 넓은 캠퍼스 여기저기에 술에 취한 학생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잠들어있었다. 이타카는 여전히 요람이었다. 지식을 위한 요람이기보다는 세기말을 위한 지식인들의 마지막 요람 같았다. 

 “따로 준비한 건 없나?”
 “뭐요?”
 “요새 흉흉하잖나”
 “교수님은 뭐 해놓으셨어요?”
 “집에 총하나 장만했지”
 “교수님이 쓰시게요?”
 “그럼 누가 쓰나?”

 고든의 말에 이든은 헛웃음을 지었다. 샌드위치나 드세요. 그렇게 말하자 고든은 다시 이든이 올리브를 빼지 않았다고 투덜거렸다. 고든은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데는 노인의 힘도 그리 부족하지는 않다고 말하곤 냅킨으로 입가를 훔쳤다. 입술에 검은 올리브가 반개쯤 묻어있었다. 미국은 총을 구하기 쉬운 나라였다. 집안의 가장들이라면 권총 하나쯤은 아들의 손이 닿지 않는 서재의 책상 첫 번째 서랍에 넣어두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끔은 어느 날, 누군가의 아들이 아버지의 잠긴 서재의 책상 서랍을 열어 권총을 가지고 등교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아버지들은 쉽사리 그것이 자신의 아들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은 때로 아버지의 책상 밑에서, 학교의 뒤뜰에서,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로 혀를 늘어트리고 발견되었다. 짐이 불행했던 것은 그램블린에는 키팅 선생님이 없었다는 점이었을지도 몰랐다.

 “부인이 그러라고 하셨어요?”
 “뉴스 봤잖아. 씨씨도 그러라고 하더군.”

 고든은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한 입에 집어넣고 늙은 욕심쟁이처럼 온 뺨을 불룩하게 만들며 샌드위치를 씹었다. 부인이 그러셨다면 다행이네요. 늙은 노부부는 야구 배트를 휘두를 힘도 없을 것이다. 가장 손쉽고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이든은 그를 독려해야했을지도 몰랐다. 고든은 샌드위치를 여전히 우물우물 씹다가 목이 막힌 듯 기침을 하고 물을 들이켰다. 노인들이 흔히 그러듯 입가에 자글자글하게 맺힌 주름이 음식을 씹을 때마다 오므라들었다가 펼쳐지기를 반복했다. 고든의 얇고 바싹 마른 입술과 깊게 움푹 패인 눈을 바라보다가 이든은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안경을 썼다. 끼익거리며 기름칠이 잘 되지 않은 티를 내며 돌아가는 의자를 책상 앞으로 돌리고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구겨져있던 가운의 끄트머리를 등 뒤로 펄럭였다.

 “뭐 준비 안할건가? 앨런네 옆 집 펍도 문을 닫았다며”
 “제가 알아서 할게요. 교수님은 연구비나 받아오세요.”

 고든은 올리브 냄새가 배인 엄지손가락을 코 끝에 가져다 대고 약간의 올리브 냄새에 미간을 지푸린 후 엄지손가락을 찝찝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손 씻으세요. 고든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원에 잔디 좀 깎으라고 구박하는 아들에게나 낼 법한 심술궂은 목소리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권총을 추천해 이든. 고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이든은 안경을 쓰고 현미경에 눈을 가져갔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플레이트 위에 잘려 올라간 아주 얇은 뇌의 조각을 들여다보며 오른손으로는 종이 위에 관찰 결과를 적어나갔다. 아 참 다음엔 올리브 꼭 빼게. 세상이 망해도 난 올리브는 안먹을거야. 고든은 이든의 뒷통수에 그렇게 말하고는 이든의 책상 곁을 지나갔다. 갈색 바짓단이 시야 옆을 가로지르는 것을 바라보며 이든은 약간 웃었다. 이미 미각이 둔해져 올리브를 다 씹어 삼켜놓고 고집스레 우기는 점이 옆집 할아버지 같았다. 물론 이든의 옆집에는 지겨운 얼굴의 동료가 칠년 째 살고 있기는 했지만. 권총. 이든은 입속으로 짧은 단어를 곱씹었다. 아주. 아주 괜찮은 선택이었다. 손가락만 까닥할 힘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쉽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고든 같은 노인조차도 안전할 만큼. 만약 공중파에서 권총을 광고할 수 있었다면 광고주들은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범법입니다. 요즘처럼 흉흉한 때 권총 하나 장만하시는 건 어떠세요? 단돈 이십 달러에 총알 다섯 개를 덤으로 드립니다. 같은 개소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요즘은 제철 중의 제철일 것이다. 선거보다도 훨씬 좋은 대목이었다. 

 이든은 결국 고든의 충고를 완전히 져버리지 못했다. 달리 생각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이든도 권총의 장점인 ‘간단하고 손쉽다’는 것에 대해 충분한 동의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고든이 말하기 전부터 그는 권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짐이 손쉽게 죽었던 만큼 도그마도 손쉽게 죽으리라는 생각을 어디선가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든은 말끔히 치워진 작업대 위에 뺨을 누르고 다리로 휴지통을 건드려 덜그럭 거리며 앉아있었다. 뺨에 와닿는 연구소의 쇠로 된 작업책상은 아주 차가웠다. 이든 저 먼저 갈게요. 좀비놀이 하지 말고 제때 들어가세요. 연구소의 안젤리카가 연구실 안쪽의 불을 껐다. 협박조로 들리는 목소리에 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빨아야할 하얀 가운을 벗어 들고 안젤리카의 뒤를 졸졸 쫓아나왔다. 연구소의 불이 꺼지고 등 뒤에서 열쇠의 소리와 함께 연구소의 문이 잠겼다. 등 뒤로 실험용 냉동고들이 돌아가는 소리, 밤새 켜져 있는 기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든은 그 자리를 서둘러 떴다. 달리 짚이는 곳이 있었다. 고든만큼 어렵게 권총을 구하지 않아도 이든에게는 다른 통로가 있었다. 이든은 연구소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구원용 아파트에 들어가 세탁기에 하얀 가운을 집어넣고 버튼을 누른 뒤에 낡은 자동차 키와, 지갑과, 담배, 라이터, 몇 가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챙긴 뒤에 집을 나섰다. 이든은 겨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끄트머리를 잡은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서 자꾸만 담배와 라이터와 낡은 자동차 키와 지갑이 쩔렁거렸다. 서늘한 정취를 뒤로 하고 이든은 벽마다 한기가 드는 호텔의 복도를 걸었다. 호텔에 들어섰던 첫날의 일처럼 어디에선가 잘 마른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이든은 처음 호텔에서 만난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남자보다는, 그라고 말하는 편이 어울렸고, 그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어울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잔뜩 흐려진 눈동자는 그의 얼굴보다 나이들어보였고 이든은 그의 어리숙한 얼굴 어딘가에서 눈에 띄지 않는 흰 주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타카의 여러 학생들처럼 다시는 호텔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연구소의 빈자리들은 늘어갔다. 오랫동안 이든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이어지던 복도가 드디어 끝이 났고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문을 만나 이든은 두 걸음 물러서서 호텔 방 문을 열었다. 잘 마른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 삐딱한 자세로 흐트러진 수트를 입고 소파에 반쯤 누워있다시피 한 남자를 보고 이든은 얇은 입술을 말아올려 웃었다. 헤이 헤이든. 헤이든을 보고 웃으면서 이든은 그것이 독재자를 위한 인사와 흡사하다고 느꼈다. 헤이든 데비아시는 늘 그렇듯 독재자만큼이나 오만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헤이든의 표정은 40년대 서부극만큼이나 오만했고 이든은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는 충분히 영리했다. 그러나 아마 괜찮을 것이다. 먹잇감을 잡아둔 맹수는 보기보다 훨씬 인자하고 훨씬 여유롭다는 것을 이든은 알았다. 휴일 오전이면 하릴 없이 깨어나 잼과 버터를 바른 식빵을 우물거리며 채널을 돌리던 이든에게 디스커버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심어준 쓸데없는 지식이었다. 헤이 헤이든. 이든은 좀 더 정중하고 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헤이든을 불렀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서 눈동자만이 손 안에 들려있던 신문에서 이든에게로 옮겨왔다. 이든은 약간 웃었다. 

 “거기 잔 좀 집어줄래요”

 헤이든은 이든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옮겼다. 자세를 무너트리고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만한 거리였으나 헤이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든은 등 뒤로 문을 닫고 천천히 테이블까지 걸었다. 마치 호텔의 복도에서 바람이 불고있는 것처럼 등 뒤에서 닫힌 문이 두 번 덜컹거렸다. 그의 말투는 부탁과 명령 사이의 미묘한 중간층을 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부탁하듯 이야기했지만 헤이든은 자신이 말하면 이든이 얼마든지 들어줄 것을 이미 확신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이든은 술이 반쯤 차있는 잔을 집어 헤이든에게 건넸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잔을 받아들었고 이든은 헤이든이 기대어 앉은 소파의 반대편 끄트머리에, 팔걸이 위에 걸터앉았다. 얼음이 다 녹아내린 듯이 묽은 노란색 액체 위에 손톱의 반달만큼 얇은 투명한 층이 보였다. 
 
 “총 한자루만 구해줄래요?”
 
 이번에는 좀 더 정중한 물음이었다. 물론 입을 연 것은 헤이든이 아니라 이든이었다. 이든은 무언가를 부탁하는데 능숙이 못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헤이든은 들고있던 신문을 반으로 접어 테이블 위로 던지고 묽어진 술을 다시 반의 반쯤 들이켰다. 그러죠. 간단한 대답을 듣고 이든은 헤이든에게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떤 총이 필요한지, 얼마나 가벼워야하며, 조건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도 헤이든은 묻지 않았다. 이든은 장난감 총을 사달라는 아이처럼 ‘총’을 구해달라고 말했고 헤이든은 거기에서 이든이 총에 대해 어떤 지식도 없을뿐더러 총이라는 것과 친하지 못한 아메리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든은 그가 더 이상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든은 두 손을 깍지 껴 불안한듯 손가락으로 다른 손의 손등을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쪽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면 돼요”

 그래요. 헤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헤이든 데비아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만큼이나 믿음직한 거래처였다. 그럼. 이든은 아직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헤이든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들어왔던 문을 열어젖혔다. 그에게 어떤 사례금을 건네야할지 가늠하면서 이든은 입에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이고 나서야 라이터를 찾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권총을 추천해 이든. 고든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짐이 죽은 날 아버지는 이든에게 약간 크고 낡았지만 입기에는 나쁘지 않은 양복을 한 벌 건넸고, 그리고 그길로 서재로 내려가 첫 번째 서랍을 잠그기 시작했다. 이든은 그때 처음으로 얀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얀은 강도가 들었을 때 좀 더 강도를 빨리 죽이기 보다는 아들이 안전하기를 택했다. 아들은 이제 고작 열여덟살이었고 이든이 아직 미스 샐린저의 상담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얀은 잘 알고 있었다. 얀은 어머니보다도 훨씬 이든에게 신경을 쏟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약간 붉은색이 도는 블론드를 가진 독일남자였고 미국인 어머니가 받아들이는 것보다도 총기사고에 대해 훨씬 상식적으로, 독일식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이든은 호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에서 묽은 담배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약간 겁에 질리는게 나을 것 같았다. 얀은 이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이든을 탓하지 않았겠지만 이든이 소라껍질 같은 옷장을 벗어나는 순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것이었다. 틀림없이.

 이든은 하얀 우유로 뒤덮인 물 속에서 쥐가 헤엄치는 법을 알았다. 겨우 죽지 않을 만큼 발을 디딜 수 있는 디딤대를 물 속에 가라앉히고 고든은 스물둘의 이든의 앞에서 하얀 우윳물 속에 쥐를 집어넣었다. 주변을 살핀 쥐들은 대개 별 탈 없이 우윳물 속을 헤메이다가 가까스로 디딤대를 찾아 목숨을 부지했고 이든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쥐를 보며 쥐를 내려놓던 고든의 손목을 기억했다. 실험용 쥐 들 중 하나는 이든의 눈 앞에서 천천히 하얀 우윳물 속에 가라앉았다. 이든은 쥐가 죽기 전에 물 속에 손을 집어넣고 남자의 손바닥보다 약간 큰 하얀 쥐를 꺼냈다. 하얀 가운의 소매가 하얀 우윳물로 푹 젖어 우유 비린내가 났다. 호텔의 벽에 기대어 앉아 이든은 묽은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하얀 담배연기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것같았다. 쥐가 된 것 같았다. 이든은 천천히 벽에서 등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물이 차들고 있는 보트의 구멍이 아직은 작아보이도록 생각하게 해줄만한 약간의 눈속임을 위한 술도 나쁘지 않았다. 이든은 몸이 완전히 ‘가라앉을’ 것 같은 소파와 몇 병의 술과 담배를 수북히 쌓을 만한 재떨이를 기대하며 문을 열었을때, 루윈 이바노브가 잔과, 얼음과, 술 너머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물 속에서 빛이 흐트러지듯 구부러져 보였고 이든은 잔 위로 시선을 비껴 루윈을 바라봤다. 약간의 실갱이를 벌인 뒤에야 이든은 흔하지 않은 루윈의 핸디가 울리고 있는 것을 알았고, 그가 그것을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끄는 동안 루윈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관찰했다.

 “받기 싫은 전화인가봐요” 

 이든은 약간 웃었다. 루윈 이바노브는 이든이 그에게 ‘싫은 소리’로 들릴 법한 말을 할 때마다 곧잘 눈살을 지푸렸다. 보기 좋은 미소는 사실 이든의 생각보다도 쉽게 흐트러졌다. 루윈은 웃으며 인사했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지만 루윈 이바노브의 셔츠 단추 개수만큼이나 견고해보이는 그의 미소는 사실 아주 손쉽게 흐트러졌다. 다갈색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가늘게 뜨이는 것을 바라볼때마다 이든은 확신에 찼다. 으깬 사과처럼 물렁하게 짓이겨져있던 유치함이 고개를 들었다. 루윈은 집게나 달라고 말했고, 이든이 집게를 건넸을 때 그는 빼앗아가듯 이든의 손에서 집게를 집어들었다. 받기 싫은 전화였나봐요. 아무런 말도 없이 이든은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루윈이 내려놓은 집게를 들어 잔에 얼음을 넣었다. 술은 많았다. 이든이 원하는 만큼 옷장에서는 술이 나올 것이었다. 방에는 냉장고가 있었고, 냉장고에는 이든이 넣어놓은 보드카가 있었겠지만 옷장에서는 다시 술이 나올 것이었다. 자신 몫의 차가운 유리잔과 보드카가 나온 것처럼. 이든은 아마도 두세병의 술이 더 필요하리라고 생각했다. 흐린 날은 대개 비가 오기 마련이었고, 비가 오는 날은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우기 좋았다.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더라도 말할 것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꾸역꾸역 먹었던 음식들을 토해내듯이 위가 울렁거리고 이야기가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비오는 날의 비린 물냄새는 그러기에 충분했다.

 위스키 한병을 다 비울 때 까지 루윈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든은 말없이 일어서 냉장고를 열고 보드카를 꺼냈다. 차가워지다가 만 것처럼 보드카는 미적지근했다. 병의 겉표면에는 약간의 물방울이 묻어있었지만 아마 뚜껑을 열고나면 그리 차갑지 않을 것이다. 이든은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루윈의 빈 잔에 보드카를 따라주고 잔을 들고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옷장을 열자 위스키 한병과 보드카 한병이 놓여있었다. 이든은 옷장을 열어놓은 채로 잔을 내려놓고 위스키와 보드카를 테이블 위로 옮겼다. 잔을 집어들고 옷장 문을 닫자 약간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이 닫히면서 일어난 약간의 바람이었겠지만 마치 옷장 안쪽에서부터 바람이 일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든이 잔을 집어들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잔 안에서 얼음이 쩔렁거렸다. 창에 기대어 섰을 때 창 밖은 라플란드 같았다. 하얀 설원 위에 찍힌 순록의 발자국들과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시키는 침엽수들. 천장이 부서져나간 이글루를 발견한 뒤에야 이든은 그것이 라플란드가 아니라 알래스카였음을 알았다. 멀리서 순록의 무리가 걸어오는 것처럼 여러개의 카우벨이 성당의 종소리처럼 울렸다. 밖은 비가 올 것처럼 흐렸고, 알래스카의 하늘도 그랬다. 곧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든은 잔을 입에 가져가며 약간 웃었지만 이내 알래스카에도 비가 내렸다. 멀리서 순록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온 뒤에 다시 눈이 오고, 또 눈이 쌓여 단단하게 눈으로 덮인 자리들은 비에도 쉽사리 녹지 않았다. 비가 내린 자리가 움푹 파여 순록의 발자국이 조금씩 흐려졌다.

 “루윈”

 루윈은 대답이 없었다. 대답대신 시선만이 이든에게로 옮겨왔다가 다시 테이블 위로 옮겨갔다. 그는 보드카가 든 잔을 반쯤 비웠지만 이든의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무심결에 잔을 움직일 때마다 잔의 벽에 부딪혀 얼음이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쨌든 이든은 말을 했다. 그는 상대방의 반응을 신경쓰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든의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작업 테이블처럼 난잡하고 지저분했다. 그의 테이블이 말끔하게 치워지는 것은 이든이 흰 가운을 입고 현미경에 눈을 가져다 댄 채로 다른 한쪽 눈을 일그러트리며 감고 있을 때 뿐이었는데, 그것 조차도 사실은 치워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든이 거기에 신경쓰지 않는 것 뿐이었다. 제대로 인화된 것 같지 않은 아이다의 사진들과, 깨진 창문과, 이글루, 하얀 설원과, 순록의 무리들, 서브웨이 샌드위치와 올리브, 정돈되지 않은 연구실, 불투명한 샘플들과, 냉장고, 보드카, 위스키와 얼려진 뇌의 조각들, 조 크루거와 텍사스, 뉴욕, 맨하탄, 루윈, 플루오르골드, 교수의 심부름, 연구비.

 “아이다는 피부가 까만 여자였죠. 초콜릿같다고 놀리면 그녀는 그걸 자랑스러워 했어요. 초콜릿만큼 진한 핫초코도 잘 탈 줄 알았죠.”

 루윈은 아직 대답이 없었다. 대답대신 무심한 시선이 이든에게 와 닿았다. 넥타이를 하지 않은 루윈은 이든에게 낯설었다. 그는 덜 어른스러워보였고 이든은 넥타이를 하지 않은 만큼 덜 어른스러운 루윈을 천천히 관찰했다. 

 “펍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이다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의 머리에 맥주를 들이붓고 있었는데 꽤 쿨해보였어요. 남자가 욕을 하면서 펍을 나가고 마스카라가 온통 얼룩진 얼굴로 바에 앉아서 맥주를 달라고 외쳤는데 버팔로가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랑 저스틴은 한참 웃었죠. 보드카나 위스키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맥주 밖에 못마신다는거에요. 우는 것 보단 보드카가 나을거라고 놀렸더니 그 자리에서 개새끼라고 욕을 하더라구요. 진짜 쿨했죠.”

 “그냥 마시라고 내가 산다고 했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Damn it! 우는 여자한테 작업 거는 놈은 빌어먹을 놈이라고 꺼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냥 불쌍해서 그러는 거라고.”

 루윈의 갈색 눈을 바라보면서 이든은 보기 좋게 웃었다. 그는 왜 그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이든은 비오는 날이면 맨몸으로 정원에 뛰쳐나가 온 몸에 풀물을 들이는 애마냥 하릴없는 이야기를 쏟아냈음으로 그의 표정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든은 아이다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아이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이다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놀라 아무말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이든의 등을 두드리거나 뺨을 두드리며 술을 샀다.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톨스토이만큼이나 싫어한 이든이 졸업파티 만큼이나 통과 의례처럼 정형화 된 반응을 겪고 난 뒤에 깨달은 교훈이었다. 이든은 창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로 걸어갔다. 허리를 굽혀 비어있는 잔에 보드카를 채우고 소파에 앉았다. 신문을 들고 실갱이를 하던 날처럼 루윈 이바노브는 긴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아있었다. 루윈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든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루윈이 무언가를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어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루윈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든은 알고있었다. 그는 말하기 좋은 상대였고 이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이든 플로베르가 유일하게 약삭빠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의 일이었다. 

 보드카를 두잔 더 비우자 루윈은 거의 쓰러졌다. 넥타이를 하지 않은 루윈 이바노브 만큼이나 낯설었다. 열세개의 셔츠 단추중에 두어개가 풀려있었다. 고작 위스키 두잔과 보드카 두잔에 취하는 어른이라니. 이든은 그의 손에서 반쯤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거의 다 녹아내린 얼음이 떨어질 것 같은 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루윈이 조금만 덜 취했더라도 이든은 그에게 핫초콜릿을 권했을지도 몰랐다. 술을 진탕 마시고 난 뒤에 마시는 핫초콜릿은 치킨수프만은 못하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이든은 아이다만큼 핫초콜릿을 잘 만들지는 않았지만 물을 끓이고, 끓인 물에 초콜릿 가루를 타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머쉬멜로우를 두세개쯤 띄운다면 루윈 이바노브와는 세상에서 가장 안어울리는 음료를 권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루윈도 세상에서 아이다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었다. 둘은 초콜릿과 민트 같았고, 이든은 민트가 들어간 모히토는 아주 좋아했지만 민트 초콜릿은 아주 싫어했다. 쌉싸름한 치약 맛이 났다. 양치를 할 때처럼 입 안 가득 톡 쏘는 침이 고였다. 힘을 주어 양치를 하고 나면 침대에 누워야했고, 침대에 눕고 나면 곁이 허전했다. 

 루윈 이바노브는 손아귀에서 잔이 사라지자 아주 졸린 눈으로 눈을 반쯤 떴다.

 “자요”

 이든은 등을 돌린 채로 루윈에게 말했다. 옷장의 문을 열자 도톰한 담요가 가지런히 개여 있었다. 이든은 품에 담요 두 개를 안아들고 하나를 러그 위에 놓고 하나를 루윈에게 덮어주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은 뒤에 소파에 등을 기대고 러그 위에 앉았다. 위스키가 한 병 더 남아있었다. 미적지근한 위스키를 따자 쇠로 된 뚜껑이 병과 부대껴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안자요?”

 루윈에게 이든이 시덥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에 처음으로 듣는 질문이었다. 

 “천둥치는 날은 못자요”
 “그래요”

 루윈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왜요? 또는 어째서요?. 그렇게 묻지 않는 점이 루윈다웠다. 잘자요. 루윈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이든은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눈을 뜨고 있었는지 감고 있었는지도, 그 사이 잠에 빠져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간간히 천둥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순록의 카우벨처럼 아주 작은 소리였다가, 바로 귀 옆에서 총을 쏘는 것처럼 크게 들리기를 반복했다. 루윈이 조금 더 깨어있었다면 이든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놨을지도 몰랐다. 루윈 이바노브는 말하기 좋은 상대였다. 이든 플로베르가 더 이상 얼간이처럼 떠들게 두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취해버렸다는 점 까지도 그랬다.

 이든은 입을 다물고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얼음 통 안의 얼음은 죄다 녹아있었다. 냉동고를 열었을 때도 얼음이 있어야할 격자무늬의 칸은 텅텅 비어있었다. 이든은 미지근해진 유리잔에 미지근한 위스키를 따랐다. 미적미근한 알콜이 탄산수처럼 혀끝에서 통증을 내며 굴러다녔다. 방 안은 고요했다.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가끔 잇달아 천둥 소리가 들렸다. 창 밖에서 안으로 물밀듯 가로등의 혼곤한 불빛이 밀려들어왔다. 창밖을 내다보자 익숙한 비스트로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이제 곧 문을 닫을 모양이었다. 이든은 팔을 테이블 위에 괴고 허리를 굽혀 앉은 채로 천천히 위스키를 한잔씩 비워나갔다. 




“이봐 선샤인”

 조 크루거는 이든이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가운데 손가락을 엿바꿔 먹은 이후로도 이든은 선샤인이라고 불렀다. 열 번 까지는 들을 때 마다 돌아버릴 것 같았으나 열다섯 번이 넘어가자 이든은 손으로 선샤인을 세는 것을 관두었다. 스무 번을 넘어가자 오히려 조 크루거가 선샤인이라고 부를 때 마다 ‘너는 내 선샤인 나만의 선샤인’하며 어느 정치인의 선거 홍보 곡을 소리 내서 불렀다. 그쯤 되면 크루거도 흥미를 잃었을 법 한데 문제점은 크루거의 선샤인이 장난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 애칭으로 자리잡았다는데 있었다. 이든은 조 크루거가 아니면 평생 듣지 못할 애칭을 들으면서 노래를 불렀고 크루거는 이든의 등을 두드리고 웃었다. 그는 가끔 이든이 풋볼식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알고서도 그렇게 두드렸을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쪽이 정신건강에 좋았다. 

 “왜요”
 “넘어간다며”
 
 “가기로했죠”

 이든은 루윈과 헤이든이 그랬듯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방문을 열었을 때 헤이든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은색 플라스틱 케이스를 턱으로 가리켰다. 가져가요. 이든은 캐리어를 여는 손으로 익숙하지 않게 케이스를 열었다가 영화 속에 나오는 밀수입자처럼 말없이 다시 케이스를 닫고 헤이든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헤이든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든은 금세 자신이 멀더가 된 것처럼 으쓱한 표정으로 케이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의 멀더보다는 약간 소극적인 자세로 케이스를 손에 들고 방을 나섰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든은 망설이는 척 약간 뜸을 들였다.

 “제이, 스컬리할래요?”

 이든은 크루거의 주변인들이 부르듯이 조 크루거를 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크루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이든은 그것이 상관없거나, 혹은 그렇게 부르라는 크루거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크루거도 이든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할만한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크루거는 이든을 보고 선샤인이라고 불렀고 이든은 이미 거의 포기한 상태였음으로 크루거에게 약간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이든에게 그정도는 양보해야했다. 

 “무슨 스컬리”
 “‘멀더? 스컬리에요.’ 하는 그 스컬리”

 이든은 스컬리 흉내를 내며 목소리를 내리 깔았으나 이미 스컬리보다는 좀 더 다른 인물인 것처럼 느껴져서 크루거는 코웃음쳤다.

 “미쳤군”
 “멀더 흉내 좀 내보겠다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다니”
 “너라면 하고싶겠냐?”
 “그래서 내가 멀더잖아요”
 “왜 총이라고 들고 ‘스컬리? 대답해요 스컬리!’ 하게?”
 “어떻게 알았지?”

 근데요 당신이 하면 토할 것 같으니까 스컬리 흉내 내지마요, 제이. 이든이 말하자마자 크루거는 이든의 등을 격려하듯 툭 쳤다. 속터지니까 그냥 말하지마. 그정도의 보디랭귀지인 것 같아 이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크루거는 가끔 이든이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자신의 풋볼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동시에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잊어버린 척 하거나. 어쨌든 둘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 등을 시퍼렇게 만들만큼 힘주어 격려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든은 말없이 테이블 옆에 내려놓았던 케이스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크루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든은 검고 딱딱한 스펀지 위에 놓여있는 총의 부분들을 들어 조립했다. 이든은 술을 진탕 마신 사람처럼 손을 떨었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이 사인 스무개를 하는 시간만큼 이든은 간단한 총을 조립하는데 오랜 시간을 쏟았다. 진짜 멀더 흉내라도 낼 셈이었군. 이든이 겨우 총을 다 조립해 달칵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서야 크루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든은 말없이 웃었다. 얇은 입술을 끌어올려 웃자 색이 약간 연해졌다.




 “넌 승리의 여신이니까 괜찮을거야 선샤인”
 “텍사스 한정이잖아요”
 “네 입으로 말하니까 좀 안타까운데”

 그리고 여신이라고 하지 말래요? 이든이 크루거에게 으르렁거렸다. 입씨름 할 시간에 훈련이나 잘하지. 세스가 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고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든은 세스를 보고 손짓하면서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은 샌드위치 백을 가리켰다. 세스는 이든과, 이든의 손이 가리키는 샌드위치 백을 한번씩 훑어보고, 그 다음에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는 검은 총을 바라봤다. 세스와 다시금 눈이 마주쳤을 때 이든은 조금 웃었다. 웃지 않은 채로 걸어들어오는 세스를 보며 이든은 플라스틱 백 안에서 검고 반질거리는 올리브가 들어가지 않은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어 세스에게 건넸다. 갈시간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세스는 이든이 반쯤 포장지를 까준 샌드위치를 두어입 배어물었다. 이든은 그 자리에 케이스를 놓아두고 총만 챙겨들면서 일어났다. 이든이 엉거주춤 일어나자 크루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는 세스와, 가르지울로와, 론과 키스와 안젤로와 헤이든이 여기 저기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었다. 크루거가 이든의 등 뒤에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이든은 여섯명의 사이에 아무렇게나 섞여들어 앉으면서 크루거의 옆구리를 찔렀다. 

 “제이, 혹시 아들 하나 낳을 생각 없어요?”
 “왜 낳아주게?”
 “애 이름은 리처드로 지으라고요”

 이든은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더욱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이글루가 무너지거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정도로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이어도 괜찮다면 자신의 짧은 머리를 얼마든지 잘라줄 수도 있었다. 이든은 여전히 이디엇처럼 시덥잖은 말을 내뱉었고 크루거는 평소처럼 이든의 말에 코웃음쳤다. 이든은 키스의 불편한 시선이 자신에게 와닿는 것을 달갑지 않아했다가 헤이든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손가락으로 총의 윗머리를 살짝 쥐었다. 이중에서 이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론이었다 적어도 이든의 눈에는 그랬다. 그리고 이든은 무서울 만큼 고요한 폭풍전야 가운데서 허공을 보고 짖는 개처럼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댔다. 세스가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휴지통에 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보단 나은 훌륭한 쿼터백이 될 걸요”
 “아직 덜 맞았군”
 “이미 맞을 만큼 맞았거든요. 시퍼런 남자 등짝 볼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든은 웃었다. 키스와 시선이 맞닿았다. 키스는 여전히 불쾌해했고 이든은 여전히 불편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쪽과 무슨 상관이지. 무심하고 낮은 목소리가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달리 생각하면 치기였다. 이든 플로베르는 늘 전투의 가장 뒤에 서있었다. 심지어는 비스크 인형 같은 제인과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이든은 사령탑이었지만 사령탑이 할 줄 아는 것은 말하는 것뿐이었다. 키스. 키이스. 이든은 키이스하고 입 속에서 남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권총보다는 훨씬 우유부단한 발음이었으나 그는 자신보다 강했다. 지키려고 한다면 뭐든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했지만 이든은 키스가 그러기 위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쪽과 무슨 상관이지. 이든은 그의 강함이 불편했다. 이든은 손 안에 집히는 단단하고 묵직한 총을 고쳐 쥐었다. 

 “오 선샤인 말은 가려서 하는게 좋을걸. 태교에 안좋다고”
 “닥쳐”

 크루거의 말에 짧은 말로 대답하고 이든은 침을 삼켰다. 세스가 그 틈에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세스와 가르지울로의 뒤를 따라 여섯 명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이든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신이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건지 아니면 단순히 주변이 검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정말로 가라앉고 있었다. 우유를 푼 하얀 물에 빠진 생쥐나 밤바다 가운데서 가라앉는 타이타닉호처럼. 옆에서 크루거의 숨소리가 들렸다. 바다의 끝바닥에 닿은 것처럼 충격을 느꼈을 때 이든은 중심을 잡기 위해 약간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웠다. 지평선에 닿은 곳에 도시가 보였다. 갈까. 세스의 말에 이든은 천천히 걸었다. 이든은 땅을 밟으며 걸었지만 그는 아직도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몸이 무겁게 땅으로, 땅으로 집어삼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 한 방울 없는 땅 위에서 가라앉는 보트라니. 구인류가 신인류가 되어가는 과정처럼, 이든은 굽었던 등을 곧게 세워서 천천히 걸었다. 손 안에 총이 단단히 쥐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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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에게 넥타이는 어른의 상징이었다. 
  얀은 짐이 죽었을 떄 벽장에서 아주 낡고 오래된 양복을 꺼내주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도 꽤 비싼 값을 주고 샀을 법한 좋은 옷이었다. 옷은 약간 유행에 뒤떨어졌지만 클래식했고 아주 고급스러웠지만 이든에게는 조금 컸다. 얀 플로베르는 독일남자였고 독일남자들은 미국남자들보다 키가 반 뼘만큼 컸다. 이든에게 상의를 입혀본 얀은 손등을 덮는 소매를 보고 잠시 턱을 쓸다가 이든의 등을 두드렸다. 소매를 수선할 시간은 없을 것 같구나 에단. 양복은 얀에게는 조금 작아보여서 이든은 아마 그것이 얀이 졸업파티에서 입었던 양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얀은 이든의 목에 검은 넥타이를 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풀러냈다. 
  이번에는 네가 하는 거야. 남자가 어른이 될 때는 넥타이를 매는 법 정도는 알아야지.
  얀은 짐이 죽었을 때 드디어 철없는 아들이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든은 그러지 않았다. 비록 이든은 졸업파티를 마치기도 전에 넥타이를 매는 법을 배웠지만 배울 줄 아는 것과 할 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든은 졸업파티에서도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대학에 와서는 더더욱 맬 일이 없었다. 심지어 이든은 직장조차도 넥타이를 맬 일이 없는 곳에 잡았기 때문에 얀은 그의 아들이 두 번 다시 어른처럼 넥타이를 맨 일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버지의 말은 절반정도 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든의 친구들은 대부분 어른이 되어있었다. 넥타이를 맬 줄 알게 된 뒤에 어른이 되었든, 어른이 된 뒤에 넥타이를 맬 줄 알게 되었든, 어쨌거나 이든이 알고 있는 어른의 대부분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하물며 바이크와 사이드 쇼를 전전하던 놈들조차 그랬다. 

  그리고 이든은 루윈을 보면 넥타이를 떠올렸다. 그는 적어도 이든에게 어른의 표본이었고 이든은 그를 보면 목을 죌 것 같은 넥타이와, 걸어 잠근 양복과, 묵직하게 복도를 울리는 남성용 구두를 생각했다. 열세개의 셔츠 버튼과 네 개의 소매 버튼, 두 개의 깃 버튼, 투버튼의 양복 재킷. 루윈 이바노브의 셔츠에는 커프스 버튼이 달려있을지도 몰랐다. 수없이 많이 걸어 잠근 옷을 입은 남자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을 때 이든은 약간 웃었다. 담뱃불이 번지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치즈 1/8개. 플루오르골드 두 병. 보틀리누스 독 한 병. 딸기잼과, 포도잼, 피넛버터 각 한 병. 코카인 칠그램. 이든은 노란 메모지를 접어 흰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뉴욕은 아직도 겨울처럼 보였다. 뉴욕 시내는 아직 겨울인 것처럼 보였다. 사실 뉴욕은 늘 그랬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여름조차도 뉴욕 시내는 이타카에 비하면 겨울처럼 추워보였다. 높은 건물들이 도로와 인도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사람들은 늘 바쁘고 우울한 표정으로 거리를 걸었다. 새처럼 땍땍거리는 하이힐소리와 남자들의 무겁고 힘겨운 구둣굽 소리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마치 메아리처럼 휩쓸고 다녔다. 메인 도로에서 두 블럭쯤 떨어진 골목에서 이든은 가게를 찾았다. 플루오르골드와 보틀리누스 독과 코카인을 살 수 있는 가게. 이든의 가운안 주머니에는 교수의 확인증과, 허가서와, 여러장의 서류가 들어있는 하얀 봉투가 들어있었다. 코카인을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어른이 될수록 그랬다. 그램블린 고등학교에서 코크는 깡패들의 신발 밑창에서 얼마든지 나왔다. 마치 끝이 없는 둑처럼 그들은 그것을 팔았고 하얀 가루약을 든 아이들은 모두 클럽으로 향했다. 약간의 가루와, 약간의 액체가 든 갈색병을 주인은 작은 박스에 담아주었고 이든은 그것을 담배가 들어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낡고 짤랑이는 도어벨이 등 뒤에서 사그라들 때 쯤 이든은 건너편 인도를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다른 뉴요커들만큼 재미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루윈"

  이든이 부르자 루윈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을 찾기라도 하듯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손을 흔들고 있는 이든을 발견했다. 그는 뉴욕 뒷골목의 보석상 앞에서 발을 멈추었는데 사실 그가 이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든은 연구소에서 늘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고,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로 다른 손을 들어 루윈에게 손을 흔들었다. 뉴욕 한 복판에서 의사나, 연구원이 입을 법한 흰 가운은 제법 눈에 띄었다. 
 루윈은 여전히 구속복 만큼이나 복잡한 양복을 입고 있었고 이든은 그게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도 약간은 어른스럽지 못한 점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양복 안에 갇혀있는 동안 그의 '어른스럽지 못함'은 갈아놓은 사과처럼 어딘가에 으깨져있을 것이다. 이든은 모든 심리학자들이 그렇듯이 누구도 완벽하지 않을거라고 믿었다. 잠깐만요. 그렇게 외치고 이든은 가게 앞에 세워져있던 검은 승용차 조수석에 갈색 봉투와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고든이 빌려준 차는 오르막을 오를 때 마다 덜덜거렸지만 아직 쓸만했다. 이든이 차에서 몸을 빼내고 한적한 도로를 서둘러 건넜을 때도 여전히 루윈은 재미없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는 약간 웃고있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이든은 저렇게 웃는 사람을 여럿 알고있었다. 행정실의 사무보조가 그랬고, 증권거래소의 직원이 그랬다. 이든이 고든을 대신해 연구비를 타러 갈 때마다 보는 은행 직원도 그랬다. 그러니까 루윈은 웃고있었지만 이든은 그가 재미없는 표정을 짓고있다고 생각했다. 루윈은 누구에게나 저렇게 웃을 법 했고, 이든은 자신이 은행이나 증권거래소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디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이든이 물었을 때 루윈은 병원이라고 답했다. 이든은 먼저 루윈의 안색을 살폈고 뺨이나 손끝, 이를테면 홍조가 보일 법한 곳이나 손톱 끝의 색을 느리게 훑어 확인했다. 약간 경직된 것처럼 느껴졌으나 아마도 루윈의 표정탓이었을 것이다. 이든은 손목에 찬 시계를 약간 내려다보고 가던 길을 멈춘 루윈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보다 약간 작았고 이든은 루윈을 아주 약간 내려다보았다. 이든이 루윈을 떠올렸을 때 넥타이를 떠올렸던 것처럼 이든이 루윈을 내려다보았을 때 이든은 짙은 갈색 머리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얼굴 선 아래로 루윈이 매고 있는 넥타이를 바라봤다. 
  점심시간이라고 하기에 조금 이르지만 아주 이른 시간은 아니어서 이든은 루윈에게 담뱃불을 붙였을 때처럼 웃었다.

  "점심 같이 할래요?"

  이든은 서브웨이 샌드위치 여섯 개를 더 사야했지만 아직 점심시간까지는 약간 시간이 있었다. 

  "선약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루윈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든은 두 손을 들었다. 

  샌드위치는 일곱 개를 샀다. 고든이 자신의 샌드위치는 올리브를 빼라고 했으나 이든은 별 생각없이 똑같은 내용물이 든 샌드위치 일곱 개를 포장해달라고 점원에게 말했다. 교수님은 알아서 잘 빼먹을 것이다. 미각이 둔해서 사실 올리브가 들어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지도 몰랐다. 교수님이 좀 더 까탈스럽거나 조금만 더 미각이 좋았더라면 고든 부인은 절대로 민트색 케이크 같은걸 굽지 않았을 것이다. 이든은 샌드위치 일곱 개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백을 손에 들고 걸어가다가 늘 그 코너를 돌 때 마다 보았던 비스트로의 창가에 익숙한 남자가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든은 창을 노크하면 루윈이 알아차릴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쳐갔다. 선약이 있다고 말한 사람치고 그의 앞자리는 비어있었다. 








 "점심 잘 드셨어요?"

  이든은 방에 딸린 작은 냉장고에서 미적지근한 물을 꺼내어 컵에 따르면서 웃었다. 미적지근한 물을 목 뒤로 넘기면서 이든은 창가에 기대어 섰다. 창 밖은 설원이었다. 침엽수림이 우거져있었고, 나무의 곧은 가지마다 뽀얗게 내려앉은 눈이 바람이 불 때 마다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이든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루윈은 평소처럼 재미없는 표정으로 아주 약간 웃고있었다. 웃고있다기보다는 미소라고 표현하는게 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저녁 시간인 것 같은데요?"

  루윈의 말에 이든은 오십불 짜리 시계의 유리를 톡톡 손 끝으로 두드렸다. 이든은 사실 이미 저녁을 먹었다. 세스와 가르지울로 몫의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함꼐 사서 호텔에 들어오자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해할 법한 샌드위치 포장지에 세스가 비식거리며 웃었다. 

  "아뇨. 오늘 말고 지난번에요"

  "혼자 드시고 있던 것 같아서요"

 루윈은 약간 미간을 지푸렸다. 짓고있던 미소가 드물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이든은 고개를 들며 들고있던 컵을 비웠다. 미지근한 물이 목 뒤로 넘어갔다. 드물게 어른스럽지 못한 표정에 이든은 재킷을 벗은 루윈 이바노브를 돌아봤다. 투버튼의 재킷을 벗은 만큼 그는 덜 어른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으깨져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약간의 어른스럽지 못함이 그의 다갈색 눈과 눈썹 사이에서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이든은 자신보다 반뼘, 또는 한 뼘만큼 작은 남자의 이마의 둥근 선을 바라보다가 컵을 창틀에 내려놓았다. 창 밖에는 이든이 보틀리누스 독과, 플루오르골드와 코카인을 사서 나섰던 뉴욕의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이든은 루윈의 짙은 갈색 눈을 들여다보다가 금방이라도 그램블린 고등학교의 학생으로 돌아간 것 처럼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얇은 입매가 올라가면서 뺨이 약간 끌려올라갔고 옅은 주근깨가 도드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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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rfectly Average Man


03.

 이든은 로이처럼 무언가를 파훼하는 법도, 키스처럼 분해하는 법도, 아짐처럼 팔을 쓰는 법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시계를 사러 나갔다. 태어나서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아주 두꺼운 코트와, 모자와, 구두를 사고 그 다음에 시계를 샀다. 백화점의 유리 케이스는 보석상자 같았다. 오십불짜리 시계를 차던 이든에게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와 루비가 박힌 시계들은 시계보다는 드레스나 턱시도처럼 이든이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사치품 같았다. 시계는 시간만 알 수 있으면 충분했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니까. 이든은 점심시간과, 퇴근시간과, 저녁시간을 알 수 있는 손목시계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알래스카의 추위를 몰랐기 때문에 섣불리 자신의 오십불짜리 시계를 가져갈 수 없었다. 이든은 점원에게 알래스카에서도 찰 수 있는 손목시계를 달라고 했다. 알래스카에서도 얼지 않는 시계를 달라고 했을 때 점원은 표정이 이상해졌다. 뉴욕 태생의 점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루이지애나나 캘리포니아나 메릴랜드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원은 한번도 알래스카에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알래스카에서도 얼지 않는 시계를 보여주세요.”

 점원은 고민하더니 금색 뱃지를 단 남자를 데려왔다. 튼튼한 시계를 보여드릴까요, 손님? 남자가 그렇게 물었을 때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얼지 않는 시계면 됩니다.” 남자는 곧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마치 약간 이상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알래스카에 갈거라서요. 이든은 그렇게 덧붙이고 이든은 유리 케이스 안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유리 케이스 안에 남자의 투박한 손이 들어가 안을 뒤적거렸다.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가죽 밴딩 된 시계를 이든에게 내밀었다. 태그는 뒤집혀있었고 이든은 쉽게 시계의 가격을 보았다. 오십불짜리 시계는 아니었지만 유리 케이스 안에 있던 시계 중에 가장 값이 쌌다.

 “정말로 얼지 않나요?”

 이든이 그렇게 물었을 때 점원은 곤란한 얼굴로 선뜻 얼어버리면 무상으로 수리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시계는 얼지만 않으면 되었다. 이든은 이 시계의 값어치는 얼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했음으로 됐다고 말하고는 카드를 꺼냈다. 한 번에 치루는 값치고는 가장 값비싸고 혹독했다. 앞으로 며칠간은 바게트와 식빵으로 저녁을 때워야할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점심 정도는 교수님이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줄 수도 있었다. 시계에는 물기가 없었음으로 이든은 시계가 얼지 않기를 절반정도 확신했고 절반정도 바랐다. 이든은 로이처럼 무언가를 파훼하는 법도, 키스처럼 분해하는 법도, 아짐처럼 팔을 쓰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이든은 시계를 사러 나갔다. 이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자신의 시간을 재는 일 정도였다.
 
 이든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01.

 그램블린 공립 고등학교는 미국 어디를 가도 있을 법한 평범한 고등학교였다. 금발에 파란 눈을 한 여자애들의 반 이상은 뇌가 타조만 했고 금발에 파란 눈을 한 남자애들의 반 이상은 뇌가 근육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국계 깡패들이 코크와 엑스터시를 신발 밑창에 숨겨다녔고 흑인 갱스터들이 학교 뒷담에 걸터앉아 해시시를 피웠다. 아시안 여자애들이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두 손에 잡힐 만큼 작은 어깨를 노파처럼 웅크리고 다닐때면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녀들을 훑어보며 지나갔다. 일주일에 한번쯤은 뉴욕 경찰이 물건을 훔친 학생의 뒷덜미를 잡으러 학교에 들어왔고 그때마다 선생들은 지겨운 표정으로 대충 그 언저리에서 구질구질하게 놀고 있던 학생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모든 백치들과 마초들과 갱스터와 깡패들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학생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애들의 라커룸은 로커들과 얼굴만 번지르르한 멍청한 배우들의 사진으로 도배되어있었고 더러는 누군가가 페인트칠을 했다가 지웠던 흔적이 남아있기도 했다. 담배 정도는 애교였다. 해시시가 아니기만 하면 선생들도 담배정도는 눈 감아줄 수 있다고 여겼다. 축제시즌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시트콤에 나올 법한 일이 넓은 캠퍼스 안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는데 캬라멜 팝콘이 타는 냄새가 났고 비위생적인 핫도그가 여기저기서 팔려나갔다. 미니어처 관람차에는 더러 부모님을 졸라 놀러온 어린 손님들이 타고있었다. 그마저도 아주 드문 손님이었는데 그램블린 고등학교를 아는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어린 자녀를 그램블린 축제에 보내고 싶지 않아했다. 발랑까진 중학생 몇몇이 밤 늦게 집에서 기어나와 캬라멜이 찐득해지도록 탄 팝콘을 훔쳐 먹고 끈적거리는 손을 아무렇게나 바지에 닦으며 캠퍼스 안을 걸어다녔다. 그런 중학생의 대부분은 그램블린 고등학교의 다음 학생들이 되었다. 그들의 막되먹음은 그램블린에 들어오기 충분했음으로 수업료를 낼 다음 학생들을 원하는 그램블린의 선생들은 그들을 놓아두었다. 코튼 캔디라도 손에 들고 앉아서 쉴만한 벤치를 찾고 있다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로맨스를 목격하게 되기 십상이었는데 풀숲에 조금만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등 뒤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 치마가 걸려 올라가는 소리, 나무 등걸에 살결이 퍽퍽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날 밤은 날씨가 좋았다.
 
 번쩍거리는 요란한 불빛을 내는 관람차도 가슴이 울리도록 쿵쾅거리는 스피커도 비에 젖지 않아 모두가 기분이 좋았다. 인상을 지푸린 부모의 손을 잡고 핫도그를 입에 문 아이들이 여자애들의 짧은 치마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날 밤은 날씨가 좋았다. 사격장에서 유난히 인형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으나 그램블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애들 중에서 아직도 테디베어를 좋아하는 여자애는 없었다. 그런 애들은 대개 여자애들 사이에서 발달 장애라도 가진 것처럼 촌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램블린에는 그런 여자애가 없었다. 사격장에서 유난히 인형들이 우수수 떨어졌으나 아무도 떨어진 인형을 가지고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은 유독 날씨가 좋았음으로 이든과 어중이떠중이들은 오늘에야말로 담배로 도넛보양의 연기를 만들 수 있는 날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무덥고 소란스러운 캠퍼스를 지나 건물 입구의 계단에 모여 앉아 입에 담배를 물었다. 별빛은 보이지 않아도 하늘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붉은 신호는 또렷하게 보였다. 짙은 연기가 바람 없이 곧게 올라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할 일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집에 가기로 했다. 학교 뒤편의 농구대에서 농구라도 한판 하고 발 뻗고 잘 계획이었다. 관람차의 티켓을 팔고있는 뇌가 타조처럼 작은 여자애들 중에는 그램블린의 퀸인 킴 맥컬리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들 중에는 킴의 사진을 보고 자위할만한 멍청이는 없었다. 멀리서 계속 총성이 들렸다. 가짜 총에 들어있는 플라스틱 탄 정도는 인형에 맞아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태우고 일어나서 이든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라커의 전 주인은 마이클 잭슨의 광팬이었다. 여기저기 덕지덕지 발려있던 스티커들은 고스란히 흔적이 남아 떨어지지 않았다. 내일 모레 있을 생물학 퀴즈를 위해 두꺼운 교과서를 든 이든의 등 뒤로 담배를 피우던 어중이떠중이들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몰려들었다.

 시발. 개새끼들이 총을 가지고 왔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거의 울먹거리는 짐의 등 뒤에서 저스틴이 건물의 유리문을 잠갔다. 짐이 이든의 손목을 낚아채는 바람에 이든은 한 손으로 들 수 없었던 두꺼운 생물학 책을 떨어트렸다. 짐이 이든의 손목을 잡고 달렸고 이든은 떨어진 생물학 교과서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여전히 인형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지만 이든과 어중이떠중이들이 화학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을 때야 비로소 이든은 그것이 환호가 아니라 비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병신새끼야. 짐이 이든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동안 저스틴이 화학실의 문을 잠갔다. 화학실의 플라스크들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불빛에 빛났다.

 총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인형이 쓰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유리문이 깨지는 소리였다. 밖에서 애가 울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왔던 애들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빽빽거리면서 우는 소리가 창문 너머까지 들려서 이든은 두 손으로 창틀 난간을 짚고 밖을 내다보았다. 짐과 저스틴이 이든의 옷과, 벨트와, 정강이를 붙잡고 이든을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이든은 쉽사리 창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관람차의 불이 깜박거리고 스피커가 망가져 이상한 소리를 냈다. 캬라멜 팝콘을 팔던 테이블 위에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왔다.

  이든. 이든. 개새끼야. 숨으라고.

 짐은 이제 울먹거리다 못해 거의 울고있었다. 총성이 쉴 새 없이 들려와 이든은 그들의 탄창이 비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여분의 총알을 두둑히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관람차의 불빛이 꺼져서 킴 맥컬 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킴보다 작아보였다. 옆구리에 긴 장총을 매고 한참을 사격장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이든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관람차 뒤로 사라진 뒤로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비명소리 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곧 건물 안도 시끄러워졌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발소리와 구두소리와 뛰어다니는 소리들이 들렸다. 총소리가 날 때 마다 구두소리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누군가가 저스틴이 잠가놓은 삼층의 방화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쇠로 만들어진 문고리가 덜컥거릴 때 마다 짐이 울었다. 짐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주먹을 입에 쑤셔넣었다. 소리가 샐까봐 벌벌 떨었다. 이든은 운동화를 벗고 천천히 작은 창문 쪽으로 향했다. 저스틴과 짐이 앉아있는 화학실 구석은 높은 실험용 책상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화학실 안쪽은 어두웠으나 복도에는 불이 있었다. 이든이 문에 난 작은 창문에 한쪽 눈을 대고 밖을 바라보았을 때 늘 이든을 보고 범생이라고 놀렸던 갱이 철문을 두드리며 울고 있었다. 이든은 문을 열어야할까 고민 했으나 뒤를 돌아보았을때 저스틴이 고개를 저었다. 저스틴의 얼굴이 지저분하게 얼룩져있었다. 화학실에서 복도 끝까지의 거리를 셈하고 있다가 이든은 갱의 등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총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구두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원래 멈춰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이 몇 번 더 덜컥 거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화문 유리에 피가 얼룩져 있었다. 이든은 짐이 있는 곳까지 기어갔다. 무릎이 바닥에 닿을 때 마다 소리가 나지 않아야했음으로 이든이 거기까지 기어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짐의 주먹은 잇자국이 나있었다. 주먹위로 짐의 침이 흘렀다. 이든은 짐의 앞에 엎드려서 토했다.


04.

 이든은 알래스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알래스카에 순록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이다는 라플란드로 떠나기 전에 수많은 설원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설원은 눈이 부시다고 했다. 지나치게 하얀 색이어서 가끔 눈이 멀기도 한다고 아이다는 말했다. 툰드라의 대지는 봄이 오면 기적처럼 변했다. 눈에 덮혀 있던 땅은 이끼와 풀로 뒤덮이고 얼어붙어있던 동토가 녹아내려 땅은 마치 파도처럼 물결친다고 말했다. 어떻게 땅이 물결칠 수 있을까. 어떻게 땅이 바다처럼 일렁일 수 있을까. 아이다는 마냥 웃었다. 그게 바로 툰드라가 기적 같은 이유라고 하며 웃었다. 땅이 바다처럼 일렁이고 순록이 끄는 썰매가 지나갈 때 마다 이끼를 가득 피운 푸른 땅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땅이 침엽수림 같은 색으로 변하고 순록의 털이 다시 잿빛으로 변하는 계절. 그래도 지금의 알래스카는 흰 빛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든은 캐리어에 아이다가 선물했던 <눈의 여왕>을 함께 꾸렸다. 설원은 하얗게 빛나고 코티지가 드문드문 자리 잡은 라플란드. 아니 알래스카. 아이다가 말했던 침엽수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든은 고급스러운 케이스를 열어 안에 담겨있는 시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직 태그가 붙어있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값비싼 물건을 산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이든은 태그를 떼어 책장 사이에 꼽아두고 돌아와 시계를 손목에 찼다. 이든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 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무언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02.

 그리고 또 아픈 곳은 없나요, 이든?
 
귀가 아파요
 
 귀요?

 네 귀요. 귀가 아파요. 옆에서 심벌즈를 치는 것처럼 자꾸 귀가아파요. 손으로 귀를 눌렀다 떼었다 해봐도 소용이 없어요. 자꾸 소리가 들려요. 총소리 같은거요. 사이렌소리인지 총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총소리랑 비슷해요. 고막이 떨리다가 터질 것처럼 아파요.

  총소리가 나요?

  아, 아니. 총소리인가요? 총소리 같은데 모르겠어요. 총소리였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가 소방벨이울리는 소리였다가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데 총소리가 제일 아파요. 귀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요.

 귀를 좀 만져봐도 될까요? 어디쯤이에요?

  여기요, 여기쯤.

 이든은 손을 뻗어 귀 안쪽 바퀴를 가리켰다.

  만져봐요.

  손가락이 귀 안쪽의 바퀴를 한바퀴 쓸고 손을 좀 더 넣어 귀 안쪽을 꾹꾹 눌렀다. 연골로 채워진 귀 안쪽의 내벽이 말캉하지도 물컹하지도 않은 접히기 쉬운 플라스틱처럼 손가락이 누르는대로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플라스틱 보틀처럼.

  지금도 아파요?

 아뇨 지금은 안아파요. 아니 네 약간요. 안쪽이 시큰거려요.

 미스 샐린저는 이든의 의자를 돌렸다. 무겁고 오래된 회전의자가 사분의 일만큼 돌아갔다. 이든의 귀에 붉을 밝히고 단정하게 마무리된 둥근 손톱으로 귀 안쪽을 눌렀다.

  아무 이상은 없어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이든. 내일 다시 올 수 있나요?

  내일은 제 상담일이 아닌데요. 미스 샐린저.

 병원에 가야할 것 같네요. 심각해요. 귀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탄피나 어떤 것이 귀에 박혀있지도 않고 안쪽에도 염증이라고 할만 한 어떤 것도 없네요. 이든의 귀는 아주 정상이에요. PTSD라고 알아요. 이든?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화학식을 봤지만 그런 이름의 호로몬은 처음이네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요. 화학식이 아니고요.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미스 샐린저는 파일을 덮었다.

  내일 다시 와요. 가방을 챙겨들고, 외투도 입어요. 평소 오던 시간 말고 좀 더 늦게 수업이 끝난 후에 와요. 내가 동행하겠어요.
 

07.

 “아짐! 나와! 나와 제발!”

 귀가 아팠다. 이든의 등 뒤로 져있던 그림자가 사라져있었다. 이든은 그 도그마를 알고있었다. 시계를 보는 것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는 그림자를 다뤘다. 한번 써버린 그림자는 다시 쓸 수 없었고 그림자는 땅 위를 걸어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짐은 이글루 안에 있었다. 이글루는 그림자였다. 이글루 하나가 거대한 그림자였다. 아짐은 공격당하기 가장 좋은 곳에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초침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짐. 나와요 제발. 이글루 안에 있는 아짐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목이 쉬어있었다. 목에서 낡은 경첩에서 나는 소리가 났다. 아짐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래스카의 백야는 뜨거웠다, 이든의 등 뒤로 길게 져있던 그림자가 사라져있었다. 시계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지독할 정도로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얼지 않는 시계를 달라고 했는데. 초침이 하나 움직일 때 마다 절박해졌다. 이든은 순록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로 눈 위에서 발을 굴렀지만 알래스카의 대지는 단단하게 얼어있었다.

  멀리서 쩔렁거리는 방울소리가 들렸다. 이든은 그 방울소리를 알고있었다. 아이다가 죽은 날 밤 꿈속에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몇 개, 몇백 개의 방울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순록의 무리가 오고 있었다. 귀가 아파왔다. 순록의 방울소리는 총성처럼 들렸다. 순록의 무리가 침엽수림을 지나기 전에, 설원 위로 드러나 수백 개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전에 끝나야했다. 이제 이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05.

  아이다는 부엌에서 낡은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아침에 스프를 마시는 큰 머그잔에 마시멜로우를 띄운 핫초콜릿을 타다 주었다. 에단. 아이다는 이든을 에단이라고 불렀다. 이든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다는 에단이라고 말 할 때 마다 에,라고 말하면서 혀를 입술 밖으로 살짝 빼냈다.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빨간 혀가 쏙 빠졌다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든은 초콜릿 옷을 입힌 딸기같다고 생각했다. 아이다는 스프는 아주 못 만들었지만 핫초콜릿은 아주 잘 탔다. 이든이 그것을 우습게 여기자 아이다는 초콜릿이 자신과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다의 피부는 초콜릿처럼 짙은 색이었고 핫초콜릿처럼 따듯한 윤기가 돌았다. 두 손으로 머그컵을 꽉 쥐고 있으면 따듯한 기운이 온 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아이다가 타주는 핫초코를 마시고 나면 이든은 금방 잠에 들었다. 에단. 괜찮아. 모두 그렇게 실수하는거야. 평범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핫초콜릿 한잔을 다 마시고 나면 약간 매운 맛이 나는 치약으로 거품이 나도록 이를 깨끗이 닦고 자리에 누웠다. 이든의 아파트는 지금의 기숙사보다도 훨씬 작았다. 침대 맡에 바로 책상이 놓여있었고 책상에서 다섯걸음만 가면 물을 끓일 수 있는 부엌이 있었다. 아이다는 그 작은 아파트를 좋아했다. 값이 조금만 더 쌌다면 아이다는 이든의 집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방을 구해 그 아파트에 들어왔을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평범함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이든은 평범한 사람은 히어로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히어로는 아주 의외의 인물이어야 했음으로 배트맨만큼 고독하거나 슈퍼맨만큼 미남이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스파이더맨만큼 괴짜여야 했다. 이든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때만큼 어중이떠중이였고 금요일 밤이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가고 토요일 밤에는 여자친구과 같은 아파트에 머무르며 성적은 중간 쯤 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든은 평범한 사람이 히어로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다. 이든은 평범했지만 아이다가 죽은 뒤로는 핫초코를 마시지 못한 만큼만 덜 평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덜 평범함은 배트맨의 고독만큼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든은 히어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십분 앞을 볼 수 있었지만 히어로는 십분 앞이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있어야했다.
 

06.

  이든은 죽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치 갓난애가 젖달라고 울듯 빽빽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된통 쉬어서 듣기 싫은 목소리로 이든은 키스와 로이의 이름을 불렀다. 한두마디씩 다른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이든이 내뱉는 말의 절반 이상은 키스와 로이의 이름이었다. 나중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하나로 합쳐져 들리는 것처럼 부르기도 했다. 도그마가 나타나자마자 이든은 시계를 보았다. 오십불짜리 시계와 별로 다를 것은 없지만 가격은 훨씬 비싼 시계였다. 두 마리의 도그마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이든은 이로 손톱을 씹었다. 모두 그림에 그리듯이 기억해야했다. 조금이라도 놓치는 순간 피해를 장담할 수 없게 되기 마련이었다. 도그마는 아주 민첩하게 움직였다. 키스의 곁에서 로이의 곁으로, 로이의 곁에서 다시 저 멀리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그것이 과연 물리적인 움직임인지 아니면 텔레포트 같은 것인지 이든은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최대한 그의 동선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십분 안의 일을 머릿속에 구겨 넣어야했기 때문에 이든은 아주 불안해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영상에서 조차 자신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도그마의 움직임은 뚝뚝 끊겨있었다. 이든은 천천히 처음부터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이든은 히어로가 될 수 없었지만 적어도 히어로들을 서포트 할 수는 있었다. 배트맨은 될 수 없었지만 배트맨에게 적의 위치를 알려줄 수는 있었다.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기억을 더듬었다. 키스. 로이. 이든은 쉴새없이 외쳤다. 지나치게 빠른 움직임 탓에 더러는 이든이 어디로 움직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단지 이름을 부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해있기도 했으나 이든은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보기로 했다. 이든은 아주 신중하고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고 이든이 기억하는 한은, 도그마는 이든이 예상한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든은 도그마의 움직임 중 절반가량을 알 수 없었다. 도그마는 아주 빠르게 움직였고, 이든은 본 것은 기억할 수 있었지만 보지 않은 것은 기억할 수 없었다. 도그마의 움직임 중 절반가량은 아주 빨랐고 아주 민첩했기 때문에 이든은 도그마의 움직임 중 절반가량을 알 수 없었다. 이든은 로이와 키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둘에게 아무런 말 도 해줄 수 없었다. 목은 팍 상해서 쉰소리가 났고 그것은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강바닥만큼 메말라있었다.


08.
  
이든은 백불이 넘는 시계 대신 자신의 오십불짜리 시계를 다시 꺼내어 손목에 찼다.이든은 시계를 버릴까 말까 오래도록 망
설였으나 시계는 이때까지 이든이 자신을 위해 산 어떤 것보다도 비싼 물건이었음으로 당분간은 가지고 있기로 했다.


09.


 1999의 해, 일곱 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려고

 그 전후의 기간에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이든은 비슷한 구절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짐은 1999년의 지구 종말론을 믿고있었는데 안타깝게도 1999년이 오기도 전에 학교 뒷뜰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저스틴은 차라리 잘됐다고 말했다. 저스틴은 1999년이 왔는데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면 짐이 미쳐버릴거라고 생각했다. 짐이 죽은 날에도 이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든은 짐의 가족들 대신 땅을 파는 것을 도왔다. 흙으로 더러워진 티셔츠와 바지를 벗어서 버리고 난 뒤에 둘은 말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든은 졸업파티를 마치기도 전에 넥타이 매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에게서 빌린 정장은 소매가 너무 길어서 하얀 장갑의 손등이 반이나 뒤덮였다. 개나주라지. 저스틴이 말했을때 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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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드는 날 3




 "이제 도착하셔요?"

 인혜는 늘 그렇듯 생기있는 얼굴로 웃었다. 준희와 만나지 못한 지난 이주동안 그녀는 여름 햇살에 조금 그을려 더욱 건강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시원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운 챙이 큰 밀집 모자 아래로 그녀는 햇살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준희를 맞는다. 여름 휴가철을 계기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조금씩 업무를 분산시키려고 하는 듯 했다. 맡고있던 자료들과 기업체들의 서류를 그에게 내려보내고 적당한 선에서 그에게 처리를 맡긴다. 어느 정도 그 업무가 손에 익고 나서야 책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그는, 인혜의 초대에 뒤늦게 응했다. 박의원의 여름별장은 소박하고 푸릇했던 저택의 정원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름 별장 특유의, 한 껏 들뜨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별장 외관에서부터 물씬 풍겨나왔다. 박의원의 고전적인 취향에는 맞지 않았으나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인혜와 그녀의 친구들의 우아한 허풍에는 잘 어울리는 듯 싶기도 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인혜는 조심스레, 그리고 조금 대담하게 준희의 팔에 제 팔을 팔짱껴 잡았다. 준희는 당황스러움에 꼿꼿하게 세운 등을 조금 더 굳혔으나 인혜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짐짓 모른척 하였다. 손에 낀 하늘거리는 레이스 장갑아래로 그의 옅은 회색 빛 정장이 비쳐보였다. 얇은 여름 용의 옷감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찌는 듯한 무더 아래에서 양장은 숨이 막힐 것 같다. 준희씨. 준희씨? 인혜의 목소리에 준희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멀어졌던 시선을 되찾는다. 지나치게 무더운 날씨에 주위를 둘러보는 것 조차도 버겁다. 

 "많이 더우셔요?"

 인혜는 그렇게 물었다. 챙 넓은 모자 밑으로 그늘 진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준희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녀가 하는 말은 언제나 먼곳에서 들려오는 것 처럼 느껴진다. 인혜는 그보다 두뼘만치 작았고, 그녀가 말할때 준희는 그녀의 말이 등 뒤에서, 또는 자신의 어깨 쯤에 와서 닿는다고 생각했다. 인혜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더워하는 준희의 이마를 조심스레 문지르곤 곧 작게 웃어보였다. 빨갛게 루즈를 칠한 입술이 양옆으로 길게 선을 그리면서 변했다. 인혜는 그를 데리고 우람한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정원 한 구석의 테이블로 가려다가 돌연 발걸음을 돌린다. 실내는 덥지 않으실거에요. 테이블 아래 한갓지게 앉아서 패션지나 동인지 따위를 뒤적이던 인혜의 친구들이 색색의 리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챙 넓은 밀집모자를 손 끝으로 우아하게 밀어올리며 준희와 인혜 쪽을 바라보았다. 무엇인지 호들갑스레 말은 하지 않아도 소곤소곤 거리는 목소리들이 작게나마 들려오는 듯 했다. 여자들 특유의 소소한 잡담거리의 화두가 되고있다는 사실은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눈치챌수 있었다. 깔깔 거리며 웃는 친구들을 흘깃 쏘아본 인혜가 이내 한아름 웃으면서 준희를 별장 안 쪽으로 안내한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부터 바닥의 석재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좀 서늘해 진 듯 싶었다. 별장의 외관은 뙤약볕 아래서 눈이 아프도록 빛을 반사하는 흰색이었으나 내부는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아 색달랐다. 짙은 체리색 가구들과 한 눈에 보아도 좋은 나무를 쓴 것이 눈에 보이는 문양이 아름다운 목재 장식품들. 모던하지 못한 보수적인 우아함이 집안 곳곳에 살아있었다. 박의원의 저택에서 본 숨죽인 무거운 우아함이 별장에도 살아있는 듯 보였다. 인혜가 들어서는 것을 본 고용인이 소리없이 다가와 준희의 짐을 건네 받았다. 사층의 가장 안쪽 방으로 옮겨놓겠습니다. 고용인은 조용히 제 할말을 하고 계단을 올라 사라졌고 인혜는 잠시 짐을 옮기는 고용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삼층은 저와 제 여학교 친구들이 쓰고 있고요. 사층에 올라가시면 계단 오른쪽 복도로 가시면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에요. 이층에는 서재가 있고, 언제든지 들르셔도 되어요. 가장 안쪽에 유리 덧문이 달린 책들은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시는 책이니 그 책들만 손대지 않으시면 되고요"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기차편을 잡느라 차려입고 온 양장을 갈아입고 짐을 푼 뒤에, 서재에 들러본 뒤 해가 지면 밖을 나서는 것도 괜찮을 법했다. 인혜는 그 무더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지치지 않는 듯 하늘색 리본이 나풀거리는 챙 넓은 밀집 모자를 조금 올려 썼다. 서늘한 기운에 조금 기운을 되찾고 나서야 오밀조밀한 하얀 발이 드러나는 하얀 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원피스와 잘 어울리는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인혜는 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라도 하듯 조금 쉬라며 슬며시 인사하고 다시 별장을 나섰다. 



 "여어. 미래의 사위왔나?"

 박의원의 둘째아들. 그러니까 인혜의 손위 형제인 박인혁은 계단에서 내려오며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진지하지 못하고 요리조리 뺀질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어느 유전자의 내력인지 모를 만큼 그는 집안의 탕아 같은 존재였으나 짙고 뚜렷한 잘생긴 눈썹 하나만은 박의원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호탕한 목소리가 목청을 울리며 나와 텅빈 현관을 메꿨다. 곁에 서있던 재경이 슬쩍 손을 들어 말없이 인사를 건네서 준희는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했다. 

 "방금 도착했나?"
 "예. 방금 오후 기차로 왔습니다"
 "더워 죽을 것 같은데 수고했네. 안은 좀 시원할거야. 그래뵈도 우리집 영감이 더운걸 딱 싫어하거든. 얼굴이 벌개진걸 보니 더위라도 집어먹은 모양인데 적당히 방에서 쉬다 내려오게"

 인혜 그 기집애가 워낙 빨빨 거리고 다니길 좋아해서. 인혁은 그렇게 덧붙이고 다시금 웃었다. 

 "기운찬 기집애 맞춰주려면 너도 힘들테지. 쉬다 내려오게 이따 보지"

 소매를 팔꿈치 까지 걷어올린 재경이 픽하고 바람 새듯 웃으며 저녁에 보자하며 말을 덧붙였다. 준희는 뙤약볕 아래로 나가는 둘을 보며 가볍게 인사 한 뒤에, 기차 여행 도중에 등에 구김살이 간 웃옷을 벗으며 계단을 올랐다. 바닥의 석재때문에 집안은 좀 서늘했고 어디선가 모르게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얇은 소재의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소매를 반쯤 걷어부친 준희는 육중한 서재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책의 냄새와 책에 피는 가무잡잡한 곰팡이의 냄새,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새것 같은 목재 책장들의 냄새가 어우러져서 기분 좋은 냄새가 뒤섞여있었다. 책이 바래지 않도록 창에는 커튼이 닫혀있었고 저마다 조금씩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닫힌 커튼이 파도처럼 나부꼈다. 서재는, 서재라고 부르는 것 보다도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성 싶었다. 잘 마른 덕에 좋은 빛깔을 내는 목재 책장들이 아득할 만큼 죽 늘어서있고 그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작은 복도들은 미로처럼 보였다. 잘 구분되어 정리된 서가에서 그는 가장 앞에 있는 철학서부터 찬찬히 책을 훑었다. 방대한 영미문학을 지나, 소장본이 거의 꼽혀있지 않은 한국 문학을 지나 약간의 시집 사이에서 준희는 서정주의 시집을 꺼내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그 서가, 준희가 발걸음을 멈춘 그 서가 끝에 서가용 사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윗쪽 칸의 시집 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다. 누군가 책을 가져간 듯 하다. 준희는 팔을 뻗어 그 언저리를 손으로 훑어 보다가 이내 안쪽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박의원의 정원에서, 자신의 약혼식이 치뤄지던 그 정원에서 준희는 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선은 알고있었다는 듯 표정에 인색한 얼굴을 부드럽게 지푸리며 조금 웃었고 담배를 입에 물었었다. 베이지색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늘이고 자고 있는 것은 선선이다. 고요하고 조금 무관심한 남자. 그는 짙은 갈색의 바지를 차려입고, 흰 와이셔츠를 안에 받혀 입었다. 서늘한 실내임에도 조금은 더운듯 소매를 걷었다. 읽다 잠든 책이 가슴 위에 얹혀서, 그가 숨을 쉴때마다 함께 오르내리고 있었다. 토마스 만. 베니스에서의 죽음. 빛을 등지고 고요한 표정으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만이 서재의 가라앉은 침묵을 깨고, 그 사이로 아주 미약하게,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초조한 듯 담배를 태우던 손이 힘을 뺀 듯 소파 아래로 늘어져있었고, 옅은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의식이 있을때의 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빈틈 없고 고요한. 저택의 모퉁이에서 마주쳤을 때 조차도 껄끄러워 하지 않으며 다음 개피를 입에 물던. 

 책없이 소파 한 구석에 앉은 준희는 가만히 선을 들여다 보았다. 파일럿. 처음 만났을때 선은 파일럿이라고했다. 아니 어디에선가 선을 분명 두어번 마주쳤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비행기에 앉는 모습을 상상한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조금 불손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토마스 만을 읽는 선을 상상했다. 책장을 넘길 때 조차 소리 없이 움직일 것 만 같은 손이 비행기를 움직인다. 그날 보았던, 그러한 감색의 제복을 빈틈 없이 갖추어 입고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채로 거대하고 무거운 기계를 움직인다. 하얗고 생기 없는 얼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 보다는 서재에 앉아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로 하늘을 배회하는 그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웅장한 엔진의 소음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앞을 볼 것 같은 … 아니, 의외로 그의 직업은 그에게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준희는 비행장에서 귀를 가득 메우던 요란한 엔진의 소음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한다.

 "아…"

 툭. 하고 선의 가슴에 올려져 있던 책이 아래로 떨어졌다. 몸을 일으키다가 떨어진 책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바라보는 선을 보며 준희는 팔을 뻗어 책을 집었다. 표지를 덮어 선에게 다시 건네자 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준희가 건네는 두꺼운 책을 받아들었다. 

 "언제부터…"

 선은 목이 잠겼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손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목청을 가다듬은 선을 준희는 가만히 바라본다.

 "계셨습니까"

 조금 되었습니다. 답하는 준희의 말에 선은 당황한듯 보였다. 아직은 잠이 덜 깬듯 간간히 초점이 흔들리는 시선이 준희에게 가 닿았다가 그의 등뒤로 보이는 서가에 머물렀다가 다시 준희에게로 돌아왔다. 아…. 작은 감탄사 비슷한 것을 내뱉는 선의 의도를 짐작할수가 없다. 선은 건네 받은 책을 탁자 위에 대강 올려놓고 아직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울여 있던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그러니까 조금 되었‥"
 "오늘 도착하셨습니까"

 준희는 그제서야 선의 말을 이해하고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오후 기차로 도착했습니다. 준희의 말에 선은 준희를 찬찬히 훑는다. 예복에 감싸여 있던 준희가 조금 답답하고 꽉 매여 보였다면 오늘의 그는 조금 풀려있는 듯 하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느슨하게 풀려있는 것인지, 아니면 휴양지의 공기가 그리고 무거운 집안의 압박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진 거리가 그를 마음 편히 만들어 놓았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선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찾다가 이내 관두었다. 남의 서재에서 혼탁한 연기를 피울만큼 예의 없는 것은 아닌 탓이었다. 인혜의 약혼자라고 생각하면 간단할일이었다. 선은 일단 이 남자가 왜 여기있는지 떠올렸고. 그 후에야 인혜를 떠올렸으며, 그리고 인혜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잘어울리는 한쌍이기는 하였으나 그것 뿐이었다. 


 "슬슬 해가 질 때도 되었습니다. 나가보지 않아도 됩니까 준희군은"
 "짐을 풀고 오는 길입니다. 저녁때 뵙자 하셨으니 시간이 조금 빕니다"

 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습니까. 선은 탁자에 올려두었던 책을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도 불지 않는지 일렁이던 커튼들이 잠잠하다. 

 "그럼 저녁때 뵙겠습니다. 서가에 있는 책은 가져가서 봐도 됩니다. 의원께서는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선은 울창한 서가를 벗어나 모습을 감춘다. 

 여기있었냐. 익숙한 재경의 목소리가 멀직이서 들렸다. 서재로 들어오던 재경이 선을 향해서 그렇게 말한 듯 했다. 선의 대답은 없었다. 조용히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철걱하며 울렸다. 선은 아주 부드럽게 일어나 걸었는데도, 마치 저를 피하는 것 처럼 자리를 뜨는 듯 느껴져 준희는 조금 당황한다. 지나치게 민감하게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깨어나 당혹스러운 눈동자로 눈앞에 앉아있는 준희를 바라보던 선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서 말이지…"

 재경의 말에, 인혁도 인혜와 그녀의 친구들도 모두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사관생도 적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재경의 진중함은 흔히 곁에서 보아왔으나 재경이 저만큼 신나게 떠드는것은 준희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선은 소리내지 않다가도 재경의 말 중간중간에 끼어 그가 잘못 말한 부분을 짚어주고는 하였다. 이상했다. 스멀스멀 확신하지 못할만큼만 불안하다. 박의원의 저택에서도, 그 이전의 연회에서도 선은 말을 할때는 사람의 눈을 무서우리만치 곧게 쳐다보고 말했다. 준희에게도 그는 그러했다. 말을 할때도 들을 때도 선은 오해할만큼 곧게 사람을 쳐다본다. 오히려 미동도 하지 않는 열기 없는 냉정한 눈에 움츠러들 정도였는데 선은 준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식탁의 끝에 앉은 그에게까지 애초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시선을 돌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선이,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반듯하게 얼굴을 보여줄 것 같은 사람의 시선이 벗어나는 것이 못내 불안하다. 신경이 쓰였다. 

 "그때 선도 같이 있지 않았나?"
 "아아. 그랬지"
 "선이 그 때, 평소엔 침착하면서 말야. "

 재경의 말에 인혜의 친구들은 흥미로운듯 귀를 기울인다. 이야기는 어느새 사관생도 시절 인혁과 재경을 지독하게 괴롭혔다던 선배의 이야기에서 선의 이야기로 넘어가있었다. 파일럿 선발 시험을 위해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다던 이야기라던가, 중력 훈련이 있던 날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않았다는 이야기라던가. 무언가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을 것 만 같은 남자의 이야기 치고는 꽤나 생소하다. 말하는 재경은 더할나위 없이 즐거워 보여서 선은 약간 인상을 지푸린 채였음에도 재경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미 동기들 사이에서는 한참이나 의외성을 띈 이야기로 몇번이나 회자된 이야기인듯 하다. 인혁은 이제는 너무 들어서 지겹다는 듯 간간히 선의 지푸린 얼굴을 보고 웃었고 어디가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사관생도들의 이야기에 볼을 붉게 들인 아가씨들만 눈을 빛냈다.  

 "첫 비행을  끝내고 왔는데 …"

 시선을 돌리지 않는 선을 찬찬히 관찰한다. 관찰. 그러한 단어가 가장 적합한 듯 싶었다. 선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식사가 끝날때 까지도 선은 한번도 시선을 돌린 적이없었다. 식사가 치워진 후에 나온 단 와인을 몇모금 입에 머금던 선은 쉬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재경은 여전히 아가씨들의 시선을 잡은채로, 이제는 선의 이야기에서 연회에 있었던 자잘한 사건에 이르는 이야기를 풀고 있었고, 인혜는 준희의 곁에 앉은 채 인혁과 마주보고 문학지에 대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준희씨. 인혜가 부르는 목소리에 준희는 선이 사라진 계단에서 눈을 뗐다. …작가 말이어요. 인혜는 그렇게 말하며 까만 눈을 깜박 거렸다. 짧게 잘라 안으로 구부러지도록 정돈 된 머리에 소매가 부푼 남색 원피스. 인혜의 시선을 따라 인혁의 시선도 움직였다. 인혁은 뭘 그리 넋을 놓고 있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준희는 몇 번이나 서재에서 선을 마주쳤다. 선은 때로 파이프를 물며 재경과 영미문학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꽤나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것 처럼 보였다. 재경이 말하는 헤밍웨이와 선의 헤세 사이에서 둘은 연기가 사그라들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서가 사이에서 준희는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종이를 입에 물고 사다리를 올라 책을 찾는 선을 보기도 했으나 선은 재경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서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찾던 책을 가져가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로, 처음 서재에서 선을 발견했던 말 처럼 선은 소파에 앉아 무방비하게 낮잠을 자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피하는걸까. 선에게 준희를 피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선은 그와 마주치지 않는다. 간단한 목례가 전부였다. 첫날 서재에서 마주친 이후로 식탁에서조차 선은 입을 다물었다. 






 " … 파기라고 하기엔 납득이 안가잖나"
 "선이 단호했잖은가"
 " 약혼을 파…하기에 이변호사의 성정이…"

 "선이 … 에 간다고 했다고 하네"


 짧은 탄식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얕게 깨인 잠결에 재경과 인혁의 목소리가 들린 듯 했다. 맙소사. 인혁의 목소리였다. 재경이 … 무언가 말하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점차 더 작아져 들리지 않았다. 준희는 얕게 깨어 몽롱한 가운데 잠시 몸을 뒤척였다. 재경의 목소리가 멈춘다. 거짓말. 몇번이나 인혁이 말한 듯 하다. 재경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 들리지 않았는데 인혁의 목소리는 뚜렸했다. 오히려 점차 커졌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목소리였으나 이내 인혁도 입을 다물었다. 곧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서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멀어지는 발걸음소리를 듣다가 다시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던 듯 하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며 가슴위에 얹혀져 있던 책이 툭 하고 떨어졌다. 잠결에. 선의 이름이 오간듯 했다. 무릎을 덮고있던 담요가 떨어졌다. 재경이 나가며 제 위에 이런것을 덮어 놓았던가. 제가 끌어 덮은 적 없는 것에 당황한다. 인혜가 왔다 갔으리라는 짐작도 해보았지만 인혜는 서재에 출입하지 않았다. 인혜가 읽는 것은 고작해야 제 오라버니가 가져다주는 소소한 문학에서 여성을 상대로 출간되는 소소한 아녀자들의 낭만 소설이 전부였다.  몸을 굽혀 떨어진 책을 집어 들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습니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선이. 지난 몇일 간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남자가 팔 안 가득히 안았던 책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아직 잠이 덜 깬듯한 준희를 내려다 보았다. 선은 준희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본다. 냉정한, 움직임 없는 눈동자.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선의 눈이 준희가 집어 든 책을 향했다. 선은 잠시 책과 준희를 번갈아 본다.

 "혹시 …"

 예?.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꺼낸 말에 선이 답한다.

 "선씨가 덮어두셨습니까?"

 선은 두어번 눈을 깜박이다가 준희가 손 끝으로 만지작 거리는 담요를 본다. 아아. 예. 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저를 피하시는게 아니었습니까?"

 쌓아둔 책을 집어 훑던 선의 눈이 준희에게 가 멈췄다. 선은 한참이나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의중이 무엇인가 짐작이라도 하려는 것 처럼. 선은 잘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눈살을 지푸렸다. 준희는 꼴각 침을 삼켰다. 선의 표정 없는 눈동자는 지나치게 냉담해서 준희는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는 대신 선의 목에 느슨하게 매여있는 타이에 초점을 맞춘채로 쉽게 나오지 않는 선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은 손끝으로 책의 두터운 표지를 천천히 쓸었다. 고개가 조금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박의원댁 정원에서 본 것 같은 웃음이었다.

 "눈치챘습니까"

 당혹스럽다. 그가 실제로 저를 피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제가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준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 점이 우스워서 선은 조금 웃었다. 픽하고 바람 새듯 입술 새로 숨이 샜다. 선이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재경 정도 뿐이었다. 인혜도, 그녀의 친구들도 하물며 인혁도 선이 준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이 그와 마주치는 일도 없을 뿐더러 식탁에서든 어디에서든 그저 말없이 주변에 녹아드는 선이 누군가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작해야 시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경만이 어렴풋이 선의 시선이 일부러 준희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때로 재경은 조금 묘한 눈으로 준희를 바라보았고 선은 그것이 제가 시선을 주지 않아서임을 알면서도 재경이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모른척 했다. 준희가, 그가 알아챘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선은 서재에서 책을 빌려갔고, 그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 표정이 풍부하지 않은 남자가 선의 시선을 민감하게 눈치 챘을거라고는 생각도 하지못했다. 

 선은 입을 다물었다. 피하는게 아니냐는 질문보다 더 대답하기가 힘든 질문이었다. 선은 셔츠에 손을 걸어 목주변을 느슨하게 헤쳤다.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그럼 왜"

 준희는 그렇게 묻다가 목이 막히는 것 처럼 목울대를 울렸다. 그는 뒷말을 잇지 않았으나 왜 피했느냐고 묻는 말이라는 것을 선이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선은 가만히 그를 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어쩐지 웃음이 샜다. 사실대로 말하면 곧게 자란 착하고 풋풋한 남자가 어떤 표정을 할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선은 꽤 곤혹스러워져서, 그것이 우스웠다. 말해볼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선은 곧 그것도 우스워진다. 
 
 "준희군"
 "예"

 그는 정말로 빤히 선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받아낸다. 곧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 정직함이 믿음직스러운 한편 조금 애처로워서 선의 눈매가 부드럽게 조금 휘었다. 

 "박의원댁 저택 모퉁이에서 김형과 내가 하던 이야기를 군이 엿들은 것을 압니다, 나는"

 그래서 저를 피했나 싶은 생각이 스친다. 찰나 동안 머릿속에서 갖가지 계산이 오고갔다. 아니. 그때 그렇게 마주친 후에도 선은 저를 지나치게 평범하게 대했다. 

 "짐작하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준희는 선이 담담한, 그리고 조금 미소지은 얼굴로 말하는 것에 가만히 귀기울인다. 나는. 선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목을 축이는 듯 싶었다. 껄끄러운 것을 말하듯 선의 미소지은 표정에 잠시 걱정과 비슷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남색가입니다 군. 선은 그렇게 말하곤 가만히 준희의 눈을 들여다본다. 당혹스럽지 않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으나 선의 입으로 직접 들을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선은 그렇게 말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듯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뺐다. 담배를 찾았던 듯 싶다. 선은 놀란 그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에도 준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제가…좋지 않게 말을 하거나 한 일이 있습니까?"

 그. 남색가에 대해서. 준희는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선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선은 오히려 조금 더 웃는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본 선의 표정중에 가장 편안했다. 선은 마지 형이 동생을 보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조금씩 표정을 달리해가며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말을 더듬거리고, 눈을 깜박이고, 선의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기를 반복하며 불안정하게 말을 잇는 준희를 바라보았다. 풋내가 났다. 그의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먼저 떠오른 것도 선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고르는 준희를 바라보며 선은 느긋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왜 저를 피하셨습니까?"
 "말해야합니까?"

 "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있다. 선을 신경쓰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이바닥 인사들의 특성상, 설령 오해인들 누군가 자신을 기피한다고 생각하면 오기로라도 같이 본체만체 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선씨. 잠시 넋을 놓고 제 얼굴을 바라보는 바람에 준희는 선을 불렀다. 흐릿하게 준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선은 그의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자신의 손에 닿아 표지가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읽었던 저 책을 저 남자는 왜 하필 들고있는 것일까. 

 "좋아서 그랬습니다" 

 선은 웃었다. 당황스러워하며 표정을 굳히는 준희보다도 스멀스멀 웃음이 나오는 제가 더 우스웠다.
 

 
*낭만 패러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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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아무런 접점 없는 선이 그렇게 말할 때 준희는 의아함에 눈을 끔벅였을 뿐이었다. 바람 따라 봄 꽃 휘날리는 정원 모퉁이에서 선은 아무렇게나 시선을 방치한 채로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간간히 포도주를 삼키고 있었다. 그가 앉은 테이블에는 재경과 박의원댁 장남이 앉아 시시콜콜한 농담이라도 주고 받는 듯 했다. 선은 아무렇게나 바람 따라 날리는 봄 꽃을 좇던 시선을 들어 건장한 청년 둘을 바라보며 넌지시 웃다가는 다시 포도주를 삼키고 –마신다기 보다는 삼키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분명히 온갖 기계 장치와 고도계에 익숙해져 있을 비행사의 길고 흰 손으로 툭툭 담뱃재를 털어가며 담배를 피웠다. 

“준희씨”

등에 대고 말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두뼘 만치 키가 작은 그녀가 제게 말을 걸어올때면 그녀의 목소리는 저의 귀가 아니라 등에 와 꼽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가끔 그녀가 불쑥 말을 걸면 등이 따가운 사람처럼 깜빡 놀라는 것이다. 등에 와 꼽히는 낭랑한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면 그녀가 작고 통통한 손 끝으로 제 옷에 와 앉은 옅은 빛깔의 꽃잎들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있었다. 손만 보아도 고운 얼굴이 떠오르는, 그런 아담하고 예쁜 손이 촘촘히 짜여진 하얀 레이스 장갑 안에서 꼼질거렸다. 감사합니다. 숫기 없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준희를 보면서 인혜는 소담하게 웃었다. 신여성이라면 신여성다운 잘 교육받은 양갓집 규수 같은 조용하고 당찬 미소가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조용하되 꽤 순종적이지는 않은 듯한 치켜 올라간 눈매에 얇지만 발간 입술이 앙다물려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꽤나 당찬데도 어딘가 밉살맞지 않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구김살 없이 자라온 여자의 매력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어울리지 않게 키에 딸 부잣집 셋째딸의 고운 얼굴이라는 것이 이름만 들어도 뭇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자였던 것도 분명하다. 인혜. 생각해보면 이름도 꽤나 지적으로 보일 법 하다.

“뭘 그렇게 보고계셔요”

인혜는 가만 준희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의외라는 듯 웃었다. 대찬 장난기가 입술에 슬며시 비춘다.

“둘째 오라버니, 선 오라버니에 재경 오라버니도 모여계시네요”
“아는 사이입니까?”
“예에. 오라버니의 사관학교 동기이셔서 방학이면 세분이 별장에 함께 놀러 오시기도 했었지요”

박의원의 둘째 아들이 사관학교 출신이던가. 엇비슷한 나이 때의 얼굴들로 보이기도 했다. 제복을 입은 선의 얼굴이 질린 사람만큼이나 하얀 듯 하여 제가 좀 앳되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초면에 또래이기도 하겠거니 싶었으나 그러고보면 선은 생각보다도 무거운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 인혜를 보며 손을 흔들던 둘째 아들의 곁에서 그와 이야기를 하던 선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친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도 잔을 들고있더니 마침 잔을 쥔 채로 준희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짙은 감색 제복이 아닌 밤색 정장은 또 어딘가 색다르다. 마르고 뼈대가 얇은 몸을 그대로 보여주는 밤색 정장 안으로 그는 같은 색의 베스트를 입고 깃 없는 셔츠를 세우고는 짙은 자주색 타이를 맸다. 반드르르 빛나는 재경의 은색 정장에 비하면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영락없이 꽤나 멋을 부려 갖추어 입은 차림이었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색감에는 걷는 것 하나도 필요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조만간. 그렇게 말하던 그는 ‘조만간’ 이런 자리가 생길 것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마치 소문으로 들은 것럼 예의를 차렸으나, 그의 절친한 동기의 입으로 직접 막내 누이의 약혼식을 전해 듣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선은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며 골똘히 뭔가를 곱씹는 표정의 준희를 바라보더니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기에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는 줄 알았으나 선은 울림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건배.
그렇게 말한 듯 하다. 선은 얼떨떨하게 멈춘 준희를 향해서 손에 쥔 와인 잔을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가 내려보였다. 꽤나 거리가 있어 큰소리로 목청을 내어 말하는 것도 우스울 테니 그렇게라도 말하려는 듯 했다. 강줄기가 뻗은 것처럼 파르스름한 혈관이 맥놀던 눈커풀이 슬며시 감겼다 뜨이면서 웃었다. 






“내가…!”
“질척거리는 것은 싫다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분이 되셨습니까”
“선아”
“알아 들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미동으로는 모자라셨던 모양입니다 김형”
“내가 뭐라 했는지 듣지 않았나”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선아”

“선아.”. 목소리에 열이 있었다. 한번도 그런 종류의 열을 앓은 적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엿듣는 이의 귓가가 달아오를 만큼 목소리에는 열이 있었다. 준희는 저택의 모퉁이를 돌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런 성을 한 사람도 저런 이름을 한 사람도 그가 알기에는 한 사람 뿐이었다. 
무어라고 손쓸 새도 없이 오도가도 못한 채로 벽돌 건물의 모퉁이에 바싹 붙어있는 준희의 어깨를 치고 남자가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김형. 그렇게 불린 듯 하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충혈된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 양손을 주머니에 불뚝 찔러 넣은 그는 준희가 서있던 모퉁이를 돌아 식이 치뤄진 정원 쪽으로 걸어나갔다. 선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박의원댁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고작 저택의 담을 하나 지난 것 만으로 주위는 조용했다. 멀리 보이는 외벽 앞으로 구색을 갖춘 것 처럼 듬성듬성 뿌리 내린 나무들은 채 스무해가 지나지 못한 듯 젊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선은 말이 없었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답답한듯 손가락을 걸어 타이를 끌어내렸다. 뭐라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을 들킨 사람 같지 않은 태연함이었다. 아니 어쩌면 선에게는 당황해야할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방금 이 자리를 걸어나간 사람과 자신의 어깨가 부딪혔다는 것을 선은 알까. 찰나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로 뵐 줄 몰랐습니다”

고작 꺼내는 말이 그것이어서 준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누구라도 보여주기 곤란할 법한 현장을 엿본 셈 치게 된 사람치고는 좀 뻔뻔한 말이었다. 

“그랬습니까”

선은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르며 답한다. 건조한 말투. 조금 웃거나, 미소를 짓거나, 눈을 가늘게 떠 보이거나. 의외로 표정에 작은 변화가 있는 편이었음에도 목소리는 담담하고 건조했다. 기분 좋게 등을 덥히는 햇살이 눈부셔서 선은 조금 눈을 가늘게 떴다. 준희가 말을 꺼내기 전에 뜸을 들이던 것도, 방금 나간 사람을 그가 보았을 것이라는 것도 선에게는 별반 큰 의미를 갖지 못한 듯 했다. 선은 일전 연회에서 제복을 입은 채로 보았을 때 보다도 조금 부드러웠고 어쩐지 그것은 제복을 입은 선과, 그렇지 않은 선의 차이인 듯 했다. 
뜻밖에 시작된, 뜻밖에 만난 사람과 시작된 잇기 어려운 대화에 괜히 손이 차가워져서 준희는 예복 주머니에 곱게 개어 꼽힌 손수건을 뽑아 손바닥을 문질렀다. 괜스레 비싼 천에만 얼룩을 묻힌 것 같았다. 선은 그런 준희의 움직임을 조용히 눈으로 좇다가 좀 늦었다는 듯 목례를 한다.

“축하드립니다”

눈이 마주 쳤을 때도 말없이 인사했음에도 선은 분명하게 축하한다는 한마디를 짚고 넘어갔다. 

“감사합니다”

박의원의 둘째 아들, 말하자면 처형이 되는 사람의 동기 또는 친우에게 준희는 분명 자신의 약혼에 대해 그렇게 대답했던 듯 하다. ‘원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말실수를 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또 감사하다고 대답한 것이 어쩐지 인사치레 치고는 조금 뻔뻔한 것 같아 준희는 낯을 붉혔다. 고집만큼이나 지나치게 올곧은 점이 고스란히 표정이 인색한 얼굴에 드러난다.   
선의 눈이 움직임을 좇았다. 눈앞의 풋풋한 남자는 말보다는 표정이, 표정보다는 작은 움직임이 좀 더 정직한 듯 했다. 말로는 고작 한마디 뱉을 것을 마치 미동도 없을 것 같게만 보이는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눈동자가 움직이거나 크고 흰 손이 손수건을 만지거나 몸에 밴 정갈한 움직임들 사이로 비치는 작은 흐트러짐 같은 것들이 그의 불편한 초조함을 나타낸 듯 했다. 여전히 그는 풋풋하고 어리숙하다. 그런 점이 제 할말은 입밖에 내고 보는 대찬 인혜와는 어쩐지 비교가 되어서 선은 슬그머니 그를 걱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오라버니를 닮지 않아 사람 보는 눈만은 꽤 정확한 인혜가 노골노골해진 것을 보면 그녀도 저 어리숙한 풋풋함에 반했음이 틀림없다. 심사가 뒤틀린 선의 눈에조차 그렇게 비추었다면 그는 정말로 그런 사람인 것일 테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의외였다. 초조한, 아니 그보다는 불편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불편함 같은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히려 담담한 선이 그에게 미안할 정도였던 것이 그는 대뜸 앉겠다고 했다. 딱히 선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처지여서 선은 쉽게 고개를 넙죽 끄덕였다. 곧 제 새신랑 될 사람 곁에 붙어있을 법한 당찬 계집애 인혜는 어디가고 왜 준희가 혼자 거기에 있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치장 좋아하는 스무살 처자가 드레스라도 갈아입으러 갔겠거니 싶었다. 
분명 소란스러운 것에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성품은 순하지만 그래도 꼭 다물린 입술을 보면 제 고집은 얼마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난잡한 소문과 집안 얘기가 굴러다니는 이쪽 사회에서 용케도 그 정도 대화에 불편해 할만큼은 곧다. 선이 조용한 만큼 그도 조용했고, 말은 없었으나 말이 많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느낌이나 약간 지체되는 침묵 특유의 편안함 같은 것이 있었다. 말을 하기에 앞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또는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거나, 실제로 말을 할 필요가 없거나 하는 경우가 대개 그러했다. 선은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 외에는 건넬 말이 없었고, 굳이 적당한 얘깃거리가 되지 못할 말을 꺼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담배를 피지 않는 다는 것을 넌지시 알아차리고 있음에도 선은 다시 다음 개피를 입에 물었다. 머리를 울리는 싸한 연기를 깊이 마셨다가 내쉬면서 선은 슬적 바람에 흩어지는 봄 꽃을 본다. 박의원의 정원에는 유난히 봄꽃이 많았다. 봄꽃이 많은 정원에는 가을이면 유독 잎이 일찍 져서 스산한데 그럼에도 박의원의 정원에는 유독 벚이 많았다. 늦게 핀 목련만이 흩는 벚들 사이에서 꼿꼿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여름 한철 반짝 피어나는 장미 덩굴도 좀체 보기 힘든 고집스런 정원이었다. 

“…”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문 준희를 보며 선은 쓰게 웃었다. 풋풋함을 넘어서 되려 이쯤되면 신선하기까지하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단어는 그 전에 그를 보았을 때부터 있었던 엇비슷한 것 들이었다. 풋풋하다거나 곧다거나 어리숙 하다거나, 신선하다거나 하는.

“우습네요”
“네?”

저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라도 꺼내려고 했나 싶어 말쑥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준희를 보며 선은 가만 눈을 맞추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준희군이 아니고 제가”.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그 바닥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쓰지 않을 법하지만 꽤나 상투적인, 그러니까 의외로 흔하면서도 곧잘 쓰이지는 않는 그러한 단어들인 것인데, 그것만으로 단정짓기에 선은 유독 저 조용하고 단정한 듯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두어번 만난 사람치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눈치채어 버린 듯 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알기쉬운 사람이라고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곧고, 선의 문제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선은 매사에 무관심 했다. 애초에 그가 더욱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했더라도 선은 그것조차 쉽게 알아차리는 성미가 아니었다.  

“뭐가 우스우십니까”
“별 것 아닙니다”

이를 테면. 
이를 테면…. 그렇게 시작한 문장으로 무언가를 정리하려고 했으나 선은 실패했다. 갑갑하다.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준희의 얼굴에 몸을 뒤로 뺀 그는 새 담배를 물고 설핏 고개를 들었다. 건물 외벽 모퉁이에서부터 재경이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걸어오고있었다. 





“선.”

“영은씨가 찾는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짧은 시간 동안 본 선의 표정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고 불쾌했다. 쌍커풀 없는 눈이 매섭다. 선은 재경을 보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으나 곧, 말없이 다시 입술을 닫았다. 말을 해도 소용 없는 것 처럼. 선은 일어나며 잠깐 곁에 앉아있던 준희를 돌아봤다. 어깨를 두드리는 재경을 뒤로 하고 선은 자리를 벗어났다. 

이영은?”
“아나?”  

갑작스레 준희가 꺼낸 화두에 재경은 의외라는 낯빛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대학 시절에 잠깐, 같은 승마구락부에 있었습니다. 나이도 같았고”
“그러고보니 선이랑 하나 차이면, 둘 다 나이가 같군”

“선씨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준희를 보면서 재경은 쓰게 웃었다. 사실이다. 제 속은 기가 막히게 잘 감추던 선이 오늘 따라 준희의 앞에서는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자리를 떴다. 마무리 지으려던 일이 순탄치 못한 것에 꽤 골이 나 있었을 것이다. 정작 일은 갈무리 되었던 것이 영은만이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타일러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은에게 선은 이미 학을 떼었던 듯 하다.

“영은양 파혼한 것은 아나”
“압니다. 소문으로만”
“상대가 선이었던 것은”
“…그랬습니까?”

“소문 좁은 이 바닥에서 그것도 몰라서 어쩌나. 송, 네 처형 남 사람이 아끼는 친우니까 그 정도는 알고있으라고. 파혼도 선 쪽에서 했지만”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집안 배경의 문제 이전에 파혼 당한 여자의 몸값은 꽤나 박하다. 그것을 모를 선도 아니고,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영은의 부모도 아니었다. 집 밖으로 도는 가장들이 무수한 판에 그 정도의 사건은 대개 집안의 선에서 갈무리 되는 편이었다. 하나 뿐인 귀한 딸을 시집 보내면서도 사위의 외도 정도는 적당히 눈감아 줄 수 있다는 흔치 않은 대인배의 소굴이었다. 영은이라면 승마구락부에서 잠깐 보고 만 것이 다지만. 곁에 있는 준희를 당혹스럽게 할만큼 활기찼던 탓에, 그리고 애지중지 곱게 자라오기는 하였으나 성품이 썩 좋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라온 탓에 그녀와 교류를 가질 일도, 가질 기회도 없었다. 방탕하다고 하기엔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고, 순진하다고 하기엔 너무 철이 없는 그런 아가씨였다. 

“집안 약속이었습니까?”
“아아. 그랬던 듯 한데 선이 완고하게 거절했던듯 해. 그럴만도했지. 선이라면 절대 참고 넘길 만한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네. 오히려 멀리했으면 멀리했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다고 했거든”

“표정에 인색한 주제에 가끔 지나치게 솔직하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게 단점이지.” 재경은 마지막 말을 그렇게 덧붙였다. 선이 등을 돌려 걸어간 방향을 눈으로 훑으며 말하는 작은 목소리였던 탓에 혼잣말인듯 싶었으나 충분히 곁에 있는 준희가 알아듣고도 남을 목소리였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포기를 모르더군. 오히려 그것에 선이 학을 떼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말야”

준희는 말없이 재경의 곁에 앉아있었다. 저를 돌아보던 고요한 눈동자가 선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담배를 찾아 무는 그 반복적이고 초조한 동작이 절로 그려지는 듯 하다. 그런 선에. 이영은. 말도 안되는 조합에 준희는 조금 놀란다.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였다. 좋게 보면 순진하교 애교라도 많았을 텐데 예쁘장한 얼굴에 꽤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서 제가 가지고 싶은 것에만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알아두는 편이 나을거다. 네 처남 될 사람도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니까. 처음부터 선이 마음을 줄만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재경은 곁에 앉은 준희를 돌아보곤 가무잡잡한 손으로 준희의 머리를 흩었다. 형이 제 동생에게나 해줄 법한 그런 손길이어서 준희는 익숙치 않은 듯 조금 등을 움츠렸다. 재경은 희고 단정한, 약간 고집스러운 듯 평온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오히려 그 애는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데”

“아마 지금도 좀 예뻐할거다.” 재경은 말해놓고도 뭐가 우스운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숨을 흘리며 웃곤,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가는, 참지 못한 듯 다시 숨을 흘리며 웃었다. 기껏 입은 예복 구기지 말고 슬 일어나라. 그렇게 말한 재경은 담배를 입에 물며 일어나 걸었다. 선이 모습을 감춘 그 방향으로. 
 

 
 * 낭만 패러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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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鮮”

선. 그렇게 불린 남자가 뒤를 돌았다. 양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감색 제복을 입은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꽤 큰 키를 한 그는 다홍색 치마폭이 단아한 여인의 곁에서 와인잔을 집어들고 슬며시 웃었다. 단정하다 못해 빈틈없이 기름을 발라 넘겨 올린 머리칼은 그 시대 신사들이 으레 그렇듯 밝은 샹들리에 아래서 반드르르하게 빛났다. 하얀 피부 위로 불거져 보이는 파르라한 혈관들이 그를 어깨에 매달린 반짝이는 견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오랜만이다. 그렇게 말하는 김金을 향해서 걸어오며 선은 돌아보던 표정처럼 작게 웃음지었다. 

“선鮮. 이쪽은 송宋.”
“송준희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이 등을 탁, 치자 준희는 얼덜결에 입을 열었다. 송준희입니다 반갑습니다. 늘 하는 것처럼. 사람이 많은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러한 자리가 거북했을 뿐이다. 정재 계 인사에 대한 안목도 관심도 없는 그에게 웃는 얼굴 뒤로 으르렁거리는 사람들의 모임은 거북했다. 샴페인 하나 하나에 값을 매겨 트집을 잡고 얼핏 그저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대화 뒤에 무슨 뜻이 숨어있나 헤아리면서까지 사람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약은 방법들에 그가 서툰 탓도 있었다. 

선이라고 불린 그는 그렇게 말하는 준희를 향해서 가볍게 목을 숙였다. 반갑습니다 선宣입니다. 그는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선은 고요했다. 선은 장 내의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나 그는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고 직감했다. 선은 고요하다. 아마 그도 자신처럼 이러한 모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거북해하기보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축에 가까웠으나. 

“송, 이쪽은 선. 사관학교 시절 동기인 선. 나는 중간에 뛰쳐나왔지마는. 이번에 승진했다더니 이런데도 얼굴을 들이밀 줄 알게됐는가, 선?”
“우스운 농담 말아 김재경. 언제부터 이런데서 실실 웃는 인간이 됐나?”
“나야 사람 만나는 일이면 어디든 안빠졌잖나. 내 성미엔 이게 딱 맞아.”

수지도 맞고. 덧붙인 말에 선은 목청을 울리면서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쪽은 요즘 한창 유명한 그 스캔들의 주인공일세. 왜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던 박의원댁 셋째 따님의 약혼자말이야.”
“아, 그?”
“그래 그”

선은 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소문의 가운데 선 송가의 외동아들을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괜히 초면에 저를 향한 낯부끄러운 소문을 들은 것 같아 그는 가만 시선을 돌렸으나 선은 그 고요한 얼굴로 흥미라도 동한 것처럼 작고 까만 눈동자를 움직여 물그러미 준희의 옆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소문이 하도 무성하셔서 어떤 분인가 했습니다”
“원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낮고 정중한 말투지만 단호하다. 어딘가 조금 무표정한 그의 말투 치곤 의외였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이 말을 끝맺으며 꾹 닫힌 채 미동하지 않는다. 

“의외입니다”

듣던 소문으론 조용한 분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선은 손에 끼고 있던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흰 장갑 한쪽을 빼곤, 그의 얼굴처럼 파르라한 혈관이 언뜻 비치는 희멀건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선은 습관처럼 손목을 까닥여 초조하게 타들어가는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며 두 개피를 금새 해치웠다. 선은 담배를 태우며 와인을 쓴 커피라도 되는 양 목으로 흘러넘겼다. 

미약한 코롱의 향이 났다. 훅 끼쳐오는 담배연기에 뒤섞여서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부드러워 보이는, 단정한 얼굴이 전부인 선의 옆모습은 묘하게도 수려해보였다. 건조한 눈동자와 웃는 듯 마는 듯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 그의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그 강줄기처럼 불거진 파르스름한 혈관을 내비치는 상아색 피부 때문인지도 몰랐다. 떨어지는 재를 좇던 그의 느린 눈동자가 다시금 준희를 바라본다. 만난 적도 무언가 공유할만한 교차점도 없었다. 선만이 간간히 재경과, 사관학교 시절의 화제로 끊어질 듯 말 듯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김상원 중령님은 ‥”
“그때 그 사고 이후로는 윤정호도” 

선의 휘어진 눈매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목이 타는 듯 무알콜 샴페인이 든 잔을 기울이는 준희를 향했다. 여전히 선의 곁에 서서 한 쪽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재경은, 깨나 과거에 젖어있음이 틀림없다. 

“송군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말 낮추게 선.”

선은 무언가를 재듯 잠시 가늘어졌던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무성한 소문 너머로 들린 그의 나이는 자신과 엇비슷 했으나 그렇게까지 자세한 내막을 소문에 어두운 선이 알리가 없었다. 젊긴 하지만, 앳된 얼굴은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을 포함하여 그래도 깨나 다부진 몸을 한 남자였다. 다만 이런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어수룩함이 그의 풋풋한 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 준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준희군은”
“금융 회사에서 일하고있습니다. 마뜩찮은 일입니다만‥.”

선, 아니 선씨는. 그렇게 묻자 선은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눈이 가늘어졌고 입술이 좀 더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곤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흰 장갑을 도로 손에 끼웠다. 

“선은”

재경이 웃었다. 

“파일럿이네. 안그러신가 공군양반?”

김재경. 선이 그를 다그치듯 이름을 부르자 재경은 슬며시 웃곤 어깨를 으쓱였다.

“파일럿입니다. 김재경과 함께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그 후론 군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회사에선 주로 무슨 일을?”
“보통은 그저 업무처리 정도입니다마는, 아무래도 금융 쪽과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거나 관련 정보를 수집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고”


눈이 마주쳤다.

선은 들었던 와인잔을 들었다 놓으며 준희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관인가. 사람과 이야기 할 때는 사람의 눈을 곧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일까. 준희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와인잔을 가볍게 쓰는 선의 손끝을 본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말끄러미 바라보는 선의 표정없는 눈동자를 보며 준희는 쉽게 알아챘다. 그는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달아오른 재경과의 대화에서 준희가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단순한 대화였을 것이다. 

아. 선이 짧은 목청을 울렸다. 빠르게 다가오는 손길에 준희는 몸을 뒤로 뺄 겨를도 없이 목을 움츠렸다. 

“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 군.”

아직도 얼떨떨하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준희를 두고, 재경은 지금껏 짧은 교제 동안 준희가 본적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만큼 힘차게 웃는 재경을 주변의 시선이 훑었으나 곧 멀어져갔다.

“선선, 아직도 그 버릇은 못고쳤나?”
“입다물게”
“아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웃었잖나. 제발 어디 가서 그러지 말게. 요즘 중년배들은 취향이 이상하단말이야”
“농담하자는거면 접어둬”
“사실이라니까”

요즘 한창 물오른 젊은 파일럿을 노리는 놈들이 꽤 돼. 실실 쪼개며 와인 한잔을 격의 없이 입에 탁, 털어넣은 재경을 보다가 선은 한숨 쉬듯 시선을 내리 깔았다. 미동에 사족을 못쓰던 양반들이 다같이 요즘은 피부가 희여멀건 젊은이들로 취향을 바꾸신 모양이었다. 재경의 말이 아니었어도 박의원의 애첩이나 다름없는 곱게 생긴 청년 이야기는 건너건너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내리깔았던 선의 시선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있는 준희에게 가 닿는다. 시덥잖고 더러운 이야기를 이해할만한 도련님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의외다. 대충 이야기의 흐름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좁혀진 미간을 보자 웃음이 나온다. 어리숙한 풋풋함이다. 반쯤은 진담인 농담을 받아 치는 대신 티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역력한 불쾌한 표정.  

“사실이면 더 좋고. 어디 미인이 한둘 널렸는가. 내 차례는 오지 않을 테니 안심이다 재경”
“하여튼 네놈의 그 묘한 낙천성은 이럴때만 고개를 드는군”

재경의 대답을 흘려들으며 선은 웃었다. 보기드문 풋풋함으로, 선을 걱정이라도 하듯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순한 눈동자가 저를 훑고있었다. 결국 목청을 울리며 나지막히 웃음을 흘렸다. 

“걱정됩니까?”
“예?”

“제가 걱정됩니까?” 
“아니 그것이”

다정하네요 군은. 아. 숨소리와 비슷한 감탄사 같은 것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초면에, 저렇게나 당당하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무표정한 저에게 저런 말을 서슴없이 꺼낼 수 있는 선은 대체 짧은 시간 동안 저의 어디를 보고있었던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김재경. 가봐야 할 것 같다”
“뭐? 휴가 나온거 아니었어?”
“아니다. 야간비행이 있어서 저녁까진 들어가봐야해”
“너 온다고 성하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녀석 조금 있으면 올거다”
“그럴 여유가 안돼. 정말로 이동 중에 잠깐 들린거다. 다음에 보자”

아쉬운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선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재경은 벨보이를 불러 급한 전보라도 치듯 말을 적어내려갔다. 필히 선을 보러 온다던 그 사람에게 보내는 전보일 것이라고 준희는 으레 짐작한다. 그 테이블에서 비우는 두번째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선은 한쪽 팔에 걸려있던 외투를 군복 위로 덧입었다. 어깨를 감싸는 케이프 식의 망토에는 반들거리는 견장과 공군의 문양이 진하지 않은 색으로 박혀있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군”


조만간. 
접점이 없는 선을 다시 볼만한 일이 준희에게는 없었다. 그런데도 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만간 이라고 말했다. 아니 크게 말하면 이 회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작은 접점이 있었다. 엇비슷한 상류계층의 자제들이었고, 또는 그들 자신이었으며 그리고 대개는 이런 파티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고 초대되어 오는 사람들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비슷한 지위의 비슷한 집안의 사람이지만, 대부분 금융계에 종사하거나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던 그의 집안은 선과의 접점이 없었다. 상류층 자제들이 나온다는 문인계 고교를 졸업했고 다들 그러듯 적당히 좋은 대학을 나왔던 그에게 사관학교 생도 출신의 동기는 없었다. 애초에 주변인 대부분이 군과는 관련 없는 업종의 자제들이었다.

선은 건네 받은 모자를 쓰며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선이 돌아보았을 때 선과 같이 있던, 다홍빛 치마폭의 여성이 잠시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선은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악수를 하며 말없이 웃었다. 그 다음엔 준희보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양장을 한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가와 선의 등을 두드리거나 어깨를 치며 인사를 했다. 선은 가볍게 모자를 들썩이며 인사를 해보이며 찬 바람이 소스랍게 불어오는 문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나갔다. 절제된 동작들. 필요이상으로 다리를 굽히거나 팔을 흔들지 않는다. 그의 어깨를 덮은 케이프가 조금씩 걸음마다 흔들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을 보려는 듯 잠시 왼팔을 들었다 내렸을 뿐이었다. 


*낭만 패러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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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M HOLE



 이타카의 크리스마스는 조용했다. 학생들은 모두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고 몇 몇의 커플들만이 기숙사에 남아 조용하고 은밀한 크리스마스파티를 열었다.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늙고 외로운 교수들도 파티를 열었다. 교수들의 파티에는 교수들과, 돈을 벌기 위해 크리스마스에도 연구실에 남아있었던 연구원들만이 자리에 앉아 샴페인 대신 위스키와 보드카를 들이켰다. 젊은 부인들이 만드는 민트색 케이크 대신 노부인들을 닮아 오래되고 못생긴 진저브레드맨이 놓여있었고 화려한 꽃과 촛불 대신 구식의 풍선들과 종이 가루들만이 오래된 나무 바닥 위에 흩어져있었다. 이든과 갈 곳 없는 미혼의 동료들은 크리스마스를 교수들과 보냈다. 교수들은 아주 늙고 지친 오래된 로봇처럼 자꾸만 안경을 고쳐 썼고 동료들은 그것을 보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매해 되풀이되는 그것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는 파티라기보다는 노부인의 만찬 같은 것이었다. 추수감사절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저녁 만찬을 앞에 두고 그들은 푸르딩딩하고 맛없는 크리스마스 푸딩을 떠먹었다. “이든.” 술에 취하면  고든 교수는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이든의 이름을 불렀다. 고든의 목소리는 무거운 쇳소리가 섞여있었고 고든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이든은 연구실의 낡고 오래된 장비들을 떠올렸다.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나사를 죄일 때 마다 쇳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겨우 녹슬지 않고 세월을 빗겨나간 장비들에서 나는 목소리가 고든에게서 났다. 이든은 오래된 부부는 닮아간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든과 장비들도 닮아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든의 눈은 현미경의 렌즈처럼 작았고 목소리는 기름칠 하지 못한 쇠처럼 꺼슬거렸다. 이든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한쪽 팔을 팔걸이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고든의 눈은 위스키로 흐릿하게 번져있었다. 밝은 하늘색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이든”
  “사실 우리는 지금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네. 이론상으로는 말이야. 지구에서 알타우로스 별까지 가튼 억 만 광년의 거리를 우리는 만광년대로 줄일 수 있지. 아주 간단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시공간을 접고 터널을 뚫으면 되네. 산 아래에 터널을 뚫는 것처럼 터널을 뚫으면 돼. 에드워드가 색종이를 반으로 접는 것만큼 간단하지. 이든. 나는 험블리 교수의 말을 들었을 때 우주가 궁금해졌어.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들을 보기위해 애쓰고 있는데 우주 물리학자들은 너무나 커서 우리 눈에는 빛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저 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걸세. 우주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말이야. 시간여행이 그렇게 쉬운 것일 줄 누가 알았겠나. 빛들이 산을 넘을 때 산 아래에 터널을 뚫으면 되는 일이라는 걸! 놀랍지 않나? 사실 그 정도의 간단한 일은 인간도 할 줄 알아. 여름휴가만 해도 우리는 수많은 터널을 지나잖나. 사실은 우리 몸처럼 우주도 터널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몰라. 수많은 신호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터널을 지나 온 몸에 퍼지듯이 우주도 터널에서 터널로 가는 여행 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온 몸을 지나는 전기화학적 신호가 자동차가 되고 비행기가 되고 나중에는 타임머신이 되는 거지. 이든. 자네와 내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그 뇌조차도 수많은 터널들의 군집인거야. 터널 하나만, 그것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시간을 여행할 수 있네 이든. 아주,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야. 아주. 아주…”

 이든은 고든이 왜 갑자기 우주 물리 같은 골치 아픈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던 고든은 조금 더 어린아이처럼 얇고 마른 입술을 끌어올리더니 이내 위스키에 취해 잠이 들었다. 늙은 고든부인이 문틈 사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가와 희미하게 켜져 있던 스탠드를 끄고 고든 교수의 늙고 왜소한 몸 위에 담요를 덮었다. 시간여행은 단순히 산 아래의 터널을 지나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일이다. 하얗게 새어버린 고든의 머리칼을 바라보던 이든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교수의 서재에서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고든의 책상 위에는 작은 액자가 놓여있었다. 이든은 에드워드가 지난달 막 들어온 연구실의 연구원의 이름이 아니라 수개월 전에 고든이 교통사고로 잃은 손자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에드워드 고든. 이든은 노교수의 서재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오년이 지나면 교수의 기억력은 더 나빠질 것이고 교수의 목소리는 기름칠하지 않은 장비의 소리들처럼 더 갈라질 것이다. 장비들이 늙어가듯 늙은 교수는 더더욱 허름하고 초라하게 늙어갈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매일같이 생각하던 에드워드를 크리스마스에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든은 장담할 수 있었다. 장담하고 싶었다. 아마 고든이 에드워드를 크리스마스에만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이든도 아이다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부인이 건네는 못생기고 맛없는 진저브레드를 삼켰다. 벽난로에서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요 며칠 내린 눈 때문에 잘 마른 장작들이 습기를 머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Mission 1. 벌레 구멍



 “안녕하세요 제인”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이든은 노교수의 거실에서 타오르는 벽난로보다 더 따듯한 벽난로 앞에 앉아있었다. 벽난로에서는 아주 잘 마른 장작들이 타고 있었고 장작이 탈 때마다 불에 그슬린 장작의 냄새가 났다. 툭툭 튀어 오르는 불꽃의 소리와 재가 된 나무가 갈라지는 떡떡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벽에는 러시아의 겨울 풍경과 알래스카의 푸르고 울창한 숲, 라플란드를 떠올리게 하는 침엽수림의 그림들이 사진처럼 걸려있었다. 이든은 제인이 방에 들어섰을 때 제인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제인은 이든이 전에 한번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들었는지 혹은 이든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내려 했지만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이든은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웃었다. 

 “안녕하세요 제인. 제인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이든은 재차 확인하듯 제인에게 말했다. 사실 이든은 그녀를 미즈 그린이라고 불러야할지 제인이라고 불러야할지 조금 고민했으나 결국 제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헤드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좀 더 호텔에 머물러있어야 했고 짧지 않은 시일동안 동료가 되어야했다. 연구소의 동료들은 이든을 이든이라고 불렀음으로 이든은 제인 그린을 제인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쪽에 앉아요.” 그는 아주 선심 쓰는 것처럼 벽난로 앞에서 따듯하게 몸을 쬐일 수 있는 의자를 선뜻 가리켰다. 제인에게는 그 자리가 어울릴 것 같았다. 제인은 영국산 자기 인형처럼 희고 아름다웠고 호텔의 따듯한 공기 탓에 뺨은 붉게 물들어있었고 이든은 그녀가 여동생만큼 어려보인다고 생각했다. 제인이 소파를 향해 걸어올 때 마다 등 뒤에서 굵게 구부러진 머리칼이 느린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든 플로베르” “플로베르씨?” “그냥 이든이라고 불러요” 이든은 짧게 대답하곤 웃었다. 제인의 목소리는 우아하고 정중했다. 금방이라도 들 떠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이든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이든” 제인이 되새기듯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소파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흰 얼굴에 불꽃이 일렁거릴 때마다 이든은 조금 웃었다. 


 훈련은 지루했다. 제인도 이든도 공격적인 능력을 가진 타입이 아니었고 세스와 제이도 처음에는 어떻게 훈련을 시켜야할지 난감해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은 그다지 넓지 않은 방 안에서 그대로 훈련하기로 했다. 고작 십분 정도 지속되는 능력과 한 시간의 쿨타임. 지루한 쿨타임동안 앉아서 이든은 제이와 훈련하고 있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디즈니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제인은 그녀의 능력 잘 어울렸다. 스카프가 우아한 드레스 자락처럼 방 안을 휩쓸고 다녔고 낮은 의자가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를 빼면 그녀의 이야기가 될 것만 같이 느껴져 이든은 세스와 자리를 잡고 앉아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꽃무늬 커버를 덮어 쓴 강아지는 제인의 말에 따라 곧장 걸어가거나 테이블이며 소파를 피해 움직이거나 제이를 향해 달려 나갔으나 가끔은 그녀가 뜻한대로 움직이지 않고 꼼짝없이 멈춰 서있었다. 

 “촛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든의 말에 세스가 웃었다. 아마 비슷한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일렁이는 벽난로처럼 두 손에 따듯한 촛불을 밝히고 어리숙한 듯 입을 놀리는 영화 속의 촛대가 툭 튀어나와 방 안을 걸어 다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커튼 뒤에 숨어있는 빗자루 한 자루 정도 있어도 재밌었을 것이다. 짧은 듯 길었던 십분이 지나고 제인이 지친 듯 근처의 소파에 와 앉았다. 도자기 인형 같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보고 무늬가 없는 해바라기색 손수건을 건넸다. 네 발로 방 안을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제인의 발치에 와 무릎을 접고 앉은 채 굳어있었다. 살아있는 채로 화석이 된다면 사람도 저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제인의 발치를 지키는 나이트처럼 굳어버린 의자를 바라보다가 이든이 웃었다. 제인의 능력은 제인과 어울렸다. 하얀 영국 자기 같은 얼굴, 이 호텔의 어딘가에 걸려있는 초상화에 나올 것 같은 둥글고 작은 몸. 옅은 분홍색 린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서있으면 누구라도 르네상스의 한 가운에 와있을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여자애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았을 벌꿀색의 블론드. 발치에서 잠든 의자를 바라보다가 옷을 털며 일어났다. 쿨타임이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만요 제인”

 이든은 일어서 제인이 앉아있는 의자를 좀 더 오른쪽으로 밀어 옮기고 방 한 가운데 놓여있던 테이블을 발로 밀어내며 세스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오 분 뒤에 세스가 꽃병을 던졌다. 꽃병은 청색으로 새겨져있던 아라베스크 무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부서져서 포근한 러그 위에 파편이 튀었고 제인의 소파가 있던 자리에 장미꽃 두 송이가 흥건한 물과 함께 떨어졌다.





 "좀 할 만해?"
 "세스" 이든은 감탄사처럼 이름을 내뱉었다. Anyway. 어깨를 으쓱이며 곁에 앉는 세스를 돌아보았을 때 세스는 아주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제인과 J의 목소리가 들려와 이든은 세스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약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좀 할 만해?"
 세스는 다른 말을 찾기 귀찮은 듯 같은 말을 물어왔고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Nope. 이든의 능력이 지속되는 시간은 고작 십 분이었고 십분 간의 짧은 훈련이 끝나면 머리를 강타하는 것 같은 아주 고통스러운 두통과 함께 지루한 쿨타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느낌이 어때?”
 이든은 세스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으나 곧 웃었다. 이든은 상식이 아주 부족한 자신의 머릿속 서가에서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서성거렸으나 이내 말을 이었다.

 “세스. 시간은 이렇게 가. 내 앞에서 네 앞으로. 이렇게.” 그렇게 말하면서 이든은 검지를 펼쳐 자신의 몸 앞에서 세스의 앞까지 일직선으로 선을 그었다. 아니면 이렇게 갈지도 모르지. 핀셋을 잡는데 능숙한 손끝에 묵직한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이 다시 세스의 앞에서 이든의 몸 앞으로 돌아왔다. 이든은 그렇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세스를 올려다봤다. 세스는 이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 했으나 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이든은 고든 교수가 터널 이야기를 할 때처럼 눈을 반짝였다. 이든은 늙고 병약한 교수를 떠올렸고, 교수의 얼굴에 시름처럼 피어있던 검버섯을 떠올렸다. 죽은 나무가 비에 젖은 것처럼 힘없이 늘어진 흰 피부 위에 울긋불긋 피어난 검버섯 위로 에드워드라고 말하며 순식간에 흐려지던 눈을 기억해냈다가 곧 불타는 비행기를 떠올렸다.  

 “내 앞에서 네 앞까지 가는 시간을 중간에 반으로 접는 거야. 시간이 색종이라고 생각해봐. 색종이 접기 같은거지. 그리고 시간이 산처럼 접혔을 때 그 밑에 터널을 뚫는 거야. 아주 간단해. 10분이 산이라고 생각해봐. 다른 사람들이 산을 넘을 때 나는 터널을 지나가는거야. 딱 10분만, 딱 10분만 앞서갈 수 있는 곳에 터널을 뚫는 거야.” “그 터널을 벌레 구멍Worm Hole이라고 불러. 시공간을 접은 뒤에 뚫은 구멍을. 적어도 과학자들은 벌레 구멍이라고 부르지. 왜 벌레 구멍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벌레가 파먹은 것처럼 생겨서 그랬나?” 세스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내 터널은 항상 딱 십분 앞에 있어. 십분 만큼만. 세스. 좀 더 훈련하면 내가 보고 싶은 순간을 볼 수 있나? 단 십분이라도 괜찮아. 쿨타임이 길어져도, 그래 그것도 괜찮아. 과거에 터널을 뚫는 건 불가능해?”
 “글쎄”

 “세스” 이든은 세스를 부르고 잠시 뜸을 들였다. 세스는 귀찮은 표정으로 이든을 바라보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제인의 발치에서 나이트처럼 굳어버렸던 의자가 천천히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고 있었다. 

 “난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낯선 여자보다는 다른 여자를 구하고 싶었어” 

 고의적으로 부딪힌 어깨는 무심코 길을 가다 부딪힌 것 보다는 배로 아팠다. 손에 들고있었던 두꺼운 법학서를 우수수 떨어트린 여학생은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깜박거리는 푸른 신호를 보고 이든에게 쏘아붙이기 전에 서둘러 책을 줍기 시작했다. 이든은 느리게 주변에 떨어진 책을 하나 둘 주웠고 여학생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책들을 전부 줍고 나서 아직도 느리게 책을 줍고 있는 이든을 곤란한 듯 바라보았다. 그가 느리게 허리를 펴고 일어났을 때 이든의 등 뒤로 육중한 트럭이 지나갔다. 등 뒤에서 시멘트 냄새가 나는 바람이 일었고 낯선 여자의 부석부석한 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안다쳐서 다행이네요. 이든이 말했을 때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인이나 서포트해. 멍청아”

 세스가 등을 두드렸다. 위로라기에는 어설프고 격려라기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든은 조금 웃었다. 제인의 발치에 다시 강아지가 몸을 웅크리고 굳었을 때 이든은 손을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붙이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접어 넣는다. 보이 스카웃에서 배운 경례를 이럴 때 쓸 줄이야. 

 “라져”

 손을 이마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면서 웃었을 때 세스가 인상을 지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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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Murphy Met Sally , 1995



 

 라플란드를 본 적 있어 이든? 
 라플란드에서는 네 눈처럼 푸른 나무들이 주변을 에워싸. 크리스마스마다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책에 나오던 루돌프들이 줄을 지어 설원 위를 걸어가. 이든. 순록이 걸어가는 발자국들이 겹치고 겹치면 새하얗게 내려앉은 눈 위에 움푹 패인 길이 생기고 우리는 그걸 따라가는거야. 사람의 발자국 같은건 눈에도 띄지 않아. 순록이 닦아놓은 길은 폭신하고 크리스마스 같아서 나는 숲을 지날 때 마다 네 생각을 했어. 이든. 듣고있어? 너는 꼭 이렇게 묻지 않으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 이든. 나는 늘 너에게 둘러싸여있어. 여기는 온 계절이 크리스마스 같아. 그래서 난 마치 네가 내 곁에 있어야할 것만 같은 생각에 시달려. 너는 왜냐고 묻지도 않을테지만 나는 대답할래.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날이니까. 오, 이든 알아. 여기서 아기 예수의 탄생일이라고 말하면 너는 웃을거야. 내 신은 신GOD이지만 네 신은 과학이니까. 

 여기에서의 생활은 아마 당분간 계속될거야.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잠시나마 귀국하려고 해. 뉴욕의 겨울은 라플란드의 계절보다 따듯하겠지. 그래도 산타 인형이 앉아있고 열배는 부풀려서 포장된 선물들이 놓인 크리스마스의 쇼윈도를 같이 구경하자.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날이니까. 이타카는 그제야 한 학기를 마친 풋내기들로 가득하겠지. 뉴욕에서는 한시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테니까 내 크리스마스 선물은 미리 사두는게 좋을 거야. 

 네가 보고싶어 에단. 



When Murphy Met Sally , 1995




 오늘 새벽 핀란드 헬싱키에서 출발한 핀에어Finnair 여객기 AY  041 편이 뉴욕 스튜어트 공항 착륙을 앞두고 실종되었으며… 비행기는 현재 뉴욕주 외곽에서 추락한 잔해가 발견되어 … 탑승객 263명 전원 사망한것으로 추정되며 다음은 탑승객 명단 입니다 … 아이다 코스트너 (21) … 현재 목격자는 없습니다 ….  


 아이다. 
 너는 여왕같았다. 마지막까지 하늘 속에서 떠나간 너에게 나는 진심으로 경외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다운 마지막이었다. 적어도 나만큼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화염에 휩싸인 비행기를 나는 한참 올려다보고 있었다. 산짐승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몇 개씩 내걸린 교외의 도로 위에 나는 차를 세웠다. 너를 맞으러 공항에 가는 길이었다. 머리 위에서는 비행기가 불타고 있었다. 작은 불꽃놀이처럼 시작된 불길이 번져서 큰 여객기를 전부 덮치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하늘 높은 곳에서 멀리서 빛나는 별빛 처럼 보였다. 아마 네가 밤에 도착했다면 나는 그 불길이 비행기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멀리서 별 하나가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네 말 처럼 내 신은 과학이었으니까. 

그래도 그 순간 나는 네 신GOD에게 빌었다. 네가 오늘 새벽 비행기를 놓쳤기를. 아침잠이 많은 네가 뉴욕행 새벽 비행기를 놓쳐 헬싱키 공항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겨우 다음 비행기를 구해 탔고, 나에게 메일을 보냈기를. 이대로 집으로 차를 몰아 돌아가 컴퓨터를 켜면 네가 보낸 짧은 이메일이 도착해있기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직감이었다. 나는 지금껏 뒤돌아본 적 없었던 너의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줄리 없음을 직감했다. 내 신은 누구의 소원도 들어주는 신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걸 쪼개고 분석하고 파헤친다. 누구보다도 나는 내 신을 잘 알았다. 나는 기댈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천천히 비행기가 두동강 났다. 별빛처럼 하늘 위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둘로 나뉘어 혜성처럼 고꾸라졌다. 들릴 리 없는 비명이 들렸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을 떄 데자뷰처럼 비행기는 두동강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저 하늘 높이에서. 별이 죽은 것 처럼 불길이 진다. 

 '안녕 아이다'

 나도 모르게 툭 내뱉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 때 왜 네가 죽었을거라고 생각했을까. 그 시간에 뉴욕 공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는 무수히도 많았을텐데 나는 왜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을까. 안녕Good Bye 아이다. 그 길로 나는 차를 몰아 이타카 내의 연구원 기숙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식빵과 바게트를 넉넉하게 샀다. 아마도 당분간은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았음으로. 주방 한켠에 내어놓은 딸기잼이 추운 날씨 탓에 설어있었다. 약간 굳은 딸기잼을 식빵 위에 지저분하게 발라 입으로 가져가면서 뉴스를 봤다. 오랫동안 탑승자 명단이 흘러간 화면 뒤에 서둘러 뉴스를 끝내야 하는 웨더맨Weatherman이 속사포처럼 내일의 날씨를 내뱉고 사라졌다. 내일 뉴욕에는 눈이 온다. 꺼지지 않을 것 처럼 불타오르던 비행기도 하얀 눈 아래에 폭 잠겨 평온해 질 것이다. 

 손에 묻은 딸기잼을 핥고 나는 그대로 소파에서 잠들었다. 꿈 속에서 눈을 뜨자 그곳은 새하얗게 눈이 내린 숲 속이었다. 저 멀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데 내 주변에는 라플란드의 침엽수가 울창하게 솟아올라있었다. 내일에야 온다던 눈은 성미 급하게도 간밤부터 내렸던 모양이다. 샌드위치처럼 두동강난 비행기 위를 하얗게 눈이 덮었다. 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얗게 옷을 입은 비행기만 숲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길을 따라 순록이 발자국을 남겼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숲 한가운데 순록의 무리가 하얀 눈을 밟고 길을 만들었다. 멀리서 순록의 목에 매어둔 종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나는 지저분한 기숙사에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 오후 늦게 연구소에 연락해 크리스마스 휴가를 조금 앞당겨 받았고, 넉넉히 준비한 식빵과 바게트가 동나기 전까지 그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돌아온 날 부터 마지막 날 까지 나는 한번도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다가 보고싶었다. 




 긴 크리스마스 휴가를 끝마치고 교수의 지시에 따라 캐리어에 짐을 챙겼다. 그는 아마 어디에선가 아이다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교수는 나를 랩에서 쫓아냈다. 밤새워 지원서를 써가며 겨우 견습으로 들어간 랩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열차 출발 시간은 14 시 20 분. 늦잠을 잔 탓에 기숙사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안에는 따듯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회색 코트를 걸치고 장갑을 찾아 끼웠다. 라플란드에서 아이다가 보내준 순록 가죽으로 만든 장갑은 멋드러지지 않아도 따듯한 맛이 있었다. 캐리어를 옆구리에끼고 기차역으로 달려갔을때 시계는 벌써 14시 19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기차는 정확히 20분이 되면 출발한다. 아이다가 죽은 날 처럼 흐릿한 영상이 천천히 머리 속을 헤치고 지나간다. 열차는 검은 외관에 붉은 색으로 라인을 그렸고 창마다 짙은 카키색 커튼을 달아놓았다. 겨울을 위한 배려였을까. 혹시나 연착되진 않을까. 저 기차를 놓치면 목적지까지 가는 열차는 꼬박 반나절을 더 기다려야한다. 연착되지는 않을까. 역에 들어서 눈이 묻은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플랫홈을 기웃거렸다. 

 검은 외관에 붉은 라인을 아래에 덧칠한 기차가 플랫홈에 정차해있었다. 창마다 짙은 녹색 커튼이 달려있었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나를 어린 아이가 내려다보았다.

 '기차 아직 출발 안했습니까?'
 '이십분 연착합니다. 아직 못하셨으면 서둘러 타십쇼'

 …빌어먹을 눈 오는날 선로에는 왜 뛰어들어 뛰어들길. 젊은 역무원은 감색 제복 위에 회색 코트를 덧입고 있었다. 눈처럼 빛이 반사되는 플라티나 블론드에 얼어버릴 것 같은 옅은 하늘색의 눈동자를 하고 기차를 향해 턱짓을 했다. 상스러운 말 한마디 나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며 제법 신참 티가 흐른다고 넘겨짚었다.  플랫홈에 나와있는 탓에 그의 흰 얼굴이 파르스름하게 얼어있었고 얇은 장갑을 끼고 깃을 든 두 손을 자꾸 부대껴 녹였다. 다음 역에서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어 기차가 연착되는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사람이 죽어서 기차가 연착 된 것을 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 티켓을 건네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식당칸으로 가 맥주를 들고 온 뒤에 책을 펼쳐들었다. 이어폰을 푹 눌러 꼽은 귓가에서 리사 오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창밖을 내다본다. 묘한 기시감. 데자뷰. 나는 흘러 넘겼다. 적어도 데자뷰는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이었음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기계 고장으로 멈추어섰다. 역은 아주 작았고 시골 마을에 드문드문 있을 법한 간이역이었다. 여기서 도착지까지 단숨에 가는 기차가 있을리도 없었다. 가까운 역으로 가 서너번은 더 기차를 갈아타야 했고 손에 받아든 열차 시간표는 하나같이 어긋나 있었다. 도착지에 도착하기 십분, 이십분 전에 다음 도착지로 가는 기차는 이미 출발하고 만다. 머리를 짚고 허리춤에 낀 캐리어를 고쳐 들었다. 운이 좋으면 기차가 다시 연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운은 운이다. 하루에 네댓번이나 그런 일이 일어날리가 없어서 벗었던 모자를 쓰며 몸을 일으켰다. 우선은 다음 정착지에 도착하는 기차라도 타야했다. 

 묘한 기시감. 검은색 외관에 짙은 녹색으로 라인을 덧칠한 기차가 플랫홈에 정차한다. 머릿속에서 짧게 흘러가는 영상에 고개를 돌린 순간 플랫홈에 방금 본 듯한 기차가 들어와 정차했다. 개방된 플랫홈의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앞으로 십오분은 더 기다려야했던 열차가 일찍 도착했다. 오늘은 머피의 법칙이 빗겨나가고 있었다. 두려운건 이제껏 한번도 나는 머피의 법칙의 예외라고 할만한 인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기차는 머잖아 다음 정거장에 도착했고 그 때 마다 나는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플랫홈에 서성이는 동안 뇌 속을 스쳐지나가는 짧은 이미지들. 영상이라고 부르는게 더 적합할 듯하지만 어쨌거나 그 이미지들은 중간중간이 끊긴 필름처럼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분명 조금 전 출발했어야 할 기차는 버젓이 연착되어있었고 나는 운좋게 다음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향에 도착 할 때까지 열차는  플랫홈에 멈춰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 처럼. 이어지는 기시감에 나는 놀라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고 데자뷰의 신경학적 정의를 되뇌였다. 

 '연착입니까?'
 '예 뭐. 선로에 사람이 뛰어든 것 같습니다. 아직 탑승 가능하니까 탈거면 타십쇼. 아마 이삼십분은 더 있어야 출발할겁니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알고있었다. 데자뷰는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 정착지로 향하는 열차의 침대칸에서 몸을 뒤척이며 밤을 지새웠다. 때탄 아이보리색 커튼 너머로 밤이 지고 해가 떠오른다. 열차는 네번 연착되었고 사람이 네명 죽었다. 이르게 도착한 기차는 눈보라가 발생한 지역을 피해 선로를 변경했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눈보라가 일었다. 

 사람이 죽고 열차가 연착되었는지 열차가 연착되기 위해 사람이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된 난방이 되지 않는 열차 칸 안은 추웠다. 창가에는 하얗게 서리가 얼고 라디에이터는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있었다. 밤 새 뒤척이기만 하던 몸을 일으켜 차창 밖을 내다본다. 겨울처럼 시퍼런 동이 멀리서 터오고 열차는 아직도 눈 쌓인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동안 한 해가 지났다. 그리고 기차와 함께 해를 지나오며 터무니 없는 것이 뒤를 따라붙은 느낌이 들었다. 직감은 강력한 기시감이었고 데자뷰로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새 해 첫날을 열차에서 보내며 나는 맥주 대신 위스키를 선택했다. 몸은 술기운으로 달아올랐으나 추위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것, 이를테면 열차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하는 것들로 인해 벌벌 떨었다. 아이다의 신이 나를 배신 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으나 나는 내 신Science에게마저 배신 당했다. 나는 더 이상 이것을 머피의 법칙으로만 설명할 수 없었다. 





  "너랑 다니면 운이 좋다니까"
 "좋은게 아니라 내가 좋게 만들고 있는거지 멍청아"

 "저 새끼는 미치기도 유쾌하게 미쳤네"

 투박한 손이 뒷통수를 두드렸다. 뻐근하게 밀려오는 아픔에 뒷목을 잡으며 맥주를 들이킨다. 보는 것 만으로도 살이 찔 것 같은 감자튀김 무더기와 소세지들을 앞에두고 저스틴이 담배연기를 훅 끼쳐뱉었다. 너 그거 아냐? 난데없이 던져진 질문에 뭐냐고 대답하기도 전에 눈썹이 으쓱한다. 

 "샐리의 법칙Sally's Law"
 "샐리의 법칙Sally's Law?"

 "너한테는 아무래도 머피의 법칙이라는게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거든. 이새끼는 잼바른 빵을 떨어트려도 안바른 쪽이 바닥에 떨어질 놈이야"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단지 운이 좋은 것 뿐이라고 저스틴은 거기에 샐리의 법칙까지 거들먹 거렸다. 법칙은 법칙일 뿐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나는 아직까지  '샐리의 법칙'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분명히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아이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건 우리 사이의 불문율같은 것이었다. 무수한 애인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단 한번도 아이다처럼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여자와 사귄 적 없었다. 그 때의 그 비행기 사고는 해결되지 못한채 수사 종결되었다. 블랙박스에는 화재에 의한 추락이라고 기록되어있었지만 비행기의 기계 어디에도 화재가 난 곳은 없었다. 단지 화재였다. 방화범의 소행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난 이만 가본다"
 "농담하지마,  아직 시작도 안했어"

 "미안하지만 난 내일도 몰모트의 뇌를 저며야하는 놈이라…."
 "미친놈. 그래서 내가 학부때 전공 선택 그쪽으로 하지말라고 했잖아"

 간다. 웃으면서 어꺠를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겨울에는 고향 내려가냐?"

 고개를 저었다. 그 이후 나는 두번다시 기차를 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이는 지하철 조차도  가끔은 두려웠다. 연착되기를 바라는 순간 누군가가 선로에 몸을 던지고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먼저 엄습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가죽점퍼의 옷깃을 여미면서 주머니에 굳게 쥔 주먹을 움푹 질러넣었다. 명함 모서리가 주먹 위를 따갑게 긁어왔으나 찬 바람에 손을 뺄 엄두는 나지 않았다. PROJECT DOGMA. 브레그마도 아니고. 술기운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날 처럼. 익숙한 도어와 열자 호텔의 입구처럼 고급스러운 복도가 이어져있었다. 낯익은 기시감.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가는 아주 짧은 데자뷰에 기숙사 문 앞에 멈추어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은 고요했고 나는 뒷걸음질쳤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호텔 입구에 서있었다. 안녕Good Bye 아이다. 그 때 분명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안녕 아이다. 혜성처럼 붉은 꼬리를 이으며 떨어지던 너와 붉은 카펫이 깔린 호텔의 복도 사이에 내가 있었다. 순록의 목에 메어둔 종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로 눈이 나리는 소리가 들렸다. 뉴욕은 아직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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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텍사스



 뉴욕과 텍사스의 경기는 뉴욕 전체를 흥분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이타카만 해도 그랬다. 당장의 시험과 과제 속끓는 문제들을 속시원하게 털어버리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묻어버린 젊은 대학생들이 몰려나와 지붕을 맞대고선 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펍은 웅성거리고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다. 그나이 또래 사내애들의 음탕한 농담들 사이에 말없이 교수들이 자리를 비집고 앉아있었다. 어깨에 묵직하게 근육이 불거져나온 사내애들 팔을 하나씩 두르고 헤프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애들도 더러는 보였다. 대학가의 펍은 더럽고 값이 쌌다. 버거운 학비를 대는 대학생들은 돈이 없었고 펍도 값을 낮추지 않으면 해먹고 살기 어려웠다. 대학가에서 좀 더 벗어나 시가지로 들어서면 그 때 부터는 젊은애들이 중년배들과 뒤엉켜 큰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텍사스 촌놈들! 술배가 두툼하게 살이 오른 중년들은 자리에 앉아 텍사스 욕을 하면 젊은 애들이 뒤에서 웅성거렸다. 뉴욕은 대부분 이겼으나 텍사스와 미시시피를 두고는 더러 지기도했다. 뉴욕이 텍사스에게 기분 좋게 이기는 날이면 중년배들은 돈 없는 젊은 놈들의 술값을 얇은 지갑을 탈탈 털어 내고 자리를 떴고 집에 가서는 나잇살이 두둑하게 오른, 왕년에는 젊고 예뻤을 아내에게 가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든의 뉴욕은, 뉴욕 뉴욕이 아니라, 뉴욕이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맨하탄이 있는 뉴욕이 아니라 이타카의 대학가, 밤이면 어깨에 어깨를 나란히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년들이 어두운 시가지를 비틀거리며 걷는 거리가 그의 뉴욕이었다. 텍사스 촌놈들을 외치면서 거리를 비틀거리는 젊은 애들과 대학가. 비틀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젊은 애들 사이를 두 손을 허름한 양복 주머니에 움푹질러넣고 선선히 걸어나가는 교수의 뒷모습과 헤픈 웃음에 헤픈 화장을 하고 술에 취해 남자의 품에 안겨 거리를 나서는 여자애들이 있는 뉴욕이 그의 뉴욕이었다.

 펍의 조명은 누렇고 어두웠다. 등 뒤에서는 뉴욕과 텍사스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지만 펍 안은 조용했다. 이든과 그리고 헤드의 방에서 얼굴을 보았던 남자. 둘 뿐이 앉아 마스터가 없는 바 위에 앉아있었다. 이든은 녹색 눈을 가늘게 떴다. 서른 초반에서 중반. 그 사이를 오갈 것 같은 젊고 노련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드문드문 난 흰머리가 어두운 조명을 받아 진저색으로 보였다. 짙은 회색, 또는 검은 색의. 어느 색인지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이든은 고개를 돌렸다. 해설자는 흥분해있었고 관중들도 흥분해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타카의 펍도 흥분으로 들썩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잔 두어개가 깨져 발치를 굴러다니고 퍽퍽한 닭가슴살을 안주삼아 이로 질겅이며 씹는 펍의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손목을 이용해 둥글게 잔을 돌리자 마치 파도가 치는 것처럼 차박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잔 안에서 한참을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바라보다가 이든은 뻐근하게 죄어오는 어깨를 뒤로 젖혀 돌렸다. 헤드의 방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시간에 아메리칸 풋볼을 관람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꼽아보다가 이내 관두었다. 쉽사리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를 제외하면.

 
  펍의 티비는 TV라기보다는 텔레비전이라고 발음하는게 더 그럴싸해보일 정도로 낡고 육중했다. 모니터에서 관중들이 소리지르고 야유할 때마다 티비를 받치고있던 녹슨 철제선반이 덜컹거렸고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불룩한 모니터는 가끔 초록색 잔디 대신 눈 아픈 붉은 선을 죽죽 그어댔다. 그래도 이든은 알아보았다. 오늘도 쿼터백은 리차드 포드다. 뉴욕 자이언츠의 사랑받는 쿼터백. 사실이 그랬다. 리차드는 미국 영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전형적인 쿼터백이었다. 그는 백인이었고, 뉴욕 센트럴 하이스쿨을 졸업했고, 뉴욕 주립대를 다녔으며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멍청하고 아름다운 치어리더같은 여자와 연애를 했다. 뉴욕 대학들 사이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무시할 것이 못됐다. 가끔 교수들은 몇 십년전 가르쳤던 제자의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으며 개중에는 뉴욕 애들이 개처럼 달려들어 숭배하는 리차드의 이야기도 포함되어있었다. 텍사스의 공격수가 공을 옆구리에 낀 채로 필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시골 촌뜨기들! 관중들의 목소리는 악에 받쳐있었다. 고함을 지르고 발을 구르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아메리칸 풋볼의 관중들은 선수들만큼이나 흥분하는데 도가 튼 놈들이었다. 

 
  이든은 술잔을 비우고 위스키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 넣었다. 남자의 눈이 화면에 머물러 있다가 방금 채워넣은 술잔으로 옮겨갔다. 관중들은 여전히 야유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비명처럼 내지르고 있었고 귀가 따가웠다.

 
   “풋볼 좋아합니까?”
 
    “좋아하지”
 
    “뉴욕? 텍사스? 그래도 역시 풋볼은 뉴욕 자이언츠죠”
 
    “안그래요?” 동의를 구하듯 묻고 이든은 잔을 들이켰다. 남자가 설핏 웃었다.

 
 “뉴욕엔 리차드가 있다고요. 리차드 포드. 뉴욕의 영웅! 영웅이라고 하면 수퍼맨이나 배트맨같겠지만 오, 아니지. 뉴욕에서 리차드는 그 정도는 하죠. 배트맨은 고담을 지키지만 리차드는 뉴욕을 지키니까.”  
 
 
 
 이든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눈앞의 술잔이 금방 비워졌고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침엽수처럼 짙은 색의 녹색 눈이 남자의 녹안을 바라보다가 가늘게 휘었다. 누런 조명이 비칠 때 마다 조금씩 머리에서 빛이 반사 된다. 저런 머리는 검은 머리칼이 아니다. 검은 머리는, 아이다처럼 검은 머리를 한 사람은 저런 조명 아래에서 빛이 반사되지 않는다. 아주 짙은 색으로 빛이 가라앉고 머리칼이 음영처럼 보인다. 이든은 남자의 머리가 검은 색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짙은 눈썹 아래에서 눈이 웃고있었으나 왜 웃고있는지를 따질만큼 제정신은 아니었다. 이미 위스키 한병이 위 안에서 출렁거렸고 식도가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 텍사스는 여전히 공을 쥐고 달리고 있었다. 텍사스의 터치다운. 해설자가 말하는 순간 이든은 다시 채운 잔을 끝까지 들이켰다. 뉴욕의 성격 나쁘고 우아한 관중들이 일어서 야유를 쏟아냈다.

 
  “텍사스가 좀 하는 것 같이 보이긴 하지만 리차드가 나오면 끝난다고요. 리차드! 배트맨 리차드! 솔직히 텍사스 조무래기들 하는 전술이 다 거기서 거기지 안그래요? 리차드만 나오면 끝난다고요.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놈들!”

 
    팬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오버액션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내뱉었기 때문에 팬이었다. 팬들이 구단을 좋아하는데는 정상적인 논리보다는 감정이 앞섰고 그건 제아무리 똑똑한 놈들이라도 변함없었다. 오히려 똑똑한 놈들이 더 멍청해지기도 했다. 랩이나 연구실에서는 천재며 인재같은 소리를 듣던 놈들이 아메리칸 풋볼 앞에서는 이성을 잃은 고릴라처럼 흥분해서 날뛰었다. 가끔은 대학가에 폭력을 몰고다니는 놈들도 있었고 그런 놈들의 주먹질은 대체로 음주로 인한 쌍방과실로 알음알음 조용히 처리되었다. 텍사스는 뉴욕 놈들을 기집애들이라고 놀렸지만 사실 놈들도 치고박고하는 싸움은 더러 했다. 특히나 풋볼에 대해서는. 텍사스는 터치다운에 기분좋게 엑스트라 포인트를 더했다. 뉴욕 관중들의 야유가 커졌으나 텍사스 관중들의 환호성에 묻혀 잡음처럼 들렸다. 공격권은 뉴욕에 넘어왔으나 오늘 키커는 영 미덥지 못했다. 리차드는 뒤에서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으나 도통 먹혀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젠장. 시골 뜨내기들이. 키커가 오늘 따라 컨디션이 안좋은 모양인데. 솔직히 리차드 하나면 텍사스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리차드 같은 쿼터백 하나면 다른건 남 부럽지 않지만 오늘은 좀”  

 
  독한 보드카를 작은 잔에 따라넣고 이든은 미간을 지푸렸다. 짙은 녹색 눈이 반쯤 찡그려진 눈커풀에 가려졌다가 드러나기를 서너차례 반복하는 동안 남자가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남자의 짙은 눈썹 아래에서 서글서글한 눈이 웃는 듯 보였다. 

 
  “이봐”

 
  “거기 술병 좀 집어주지”남자는 텍사스 억양을 썼다. 빌어먹을 텍사스. 짙은 눈썹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던 눈이 단순한 흥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는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남자도 이든도 취해있었으나 인사불성이 되어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등줄기에 오한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방금 쥐었던 병을 가리키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그 보드카. 술기운이 도는 손이 더듬더듬 바를 더듬어 방금 따라 넣은 술병을 건네주자 남자는 잔에 보드카를 채운 뒤에 한 번에 들이켰다. 깨나 목이 아플터였으나 그는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서 남자가 일어났다. 육피트가 훌쩍 넘을 것 같은 큰 키. 일어선다면 시선이 마주칠 만큼은 큰 것 같았다. 이든은 남자가 방으로 돌아갈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몸을 돌려 이든에게 걸어왔다.   
 
 
  “이봐”

 
  남자가 한 번 더 불러세우듯 말하는 찰나에 이든은 눈을 껌벅거렸고 곧 머리가 아파왔다. 퍽퍽한 주먹이 오른쪽 뺨을 강타했고 남자가 일어섰을 때 난 것보다도 훨씬 큰, 마치 텍사스 관중의 우아하지 못한 야유소리 같은 큰 소리를 내면서 이든이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고 이든은 머리를 감싸 쥐며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다가 다음 주먹에 한번 더 뒤로 넘어졌다. 무릎이 꺽이면서 넘어졌으나 이면에는 팔꿈치에서부터 팔목을 바닥에 댄 채로 몸을 지탱했다. 남자는 여전히 웃고있었다. 빌어먹을 텍사스. 입안이 비렸다. 고작 두 번 주먹을 맞은 것으로 입안이 터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실상 터져있었다. 낡은 목재바닥이 몸 아래에서 삐걱거렸다. 피 섞인 침을 탁 뱉어내고 일어나다가 다시 남자의 주먹에 맞고 넘어져 이번에는 일어서는 것을 포기하고 주먹을 날렸다. 남자의 머리끝을 스치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왼뺨에 독한 펀치를 맞고 다시 손을 뻗어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손 끝에 머리가 스친 감각은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남자는 충격을 받지 않은 듯 했다. 그의 주먹은 단단했고 단련된 사람처럼 퍽퍽했다. 맞은 곳들이 하나하나 시큰하게 아파왔다. 제대로 아프다고 느끼기도 전에 다음 주먹이 꽂혔고 그 때마다 이든도 손을 내질러 남자를 쳤으나 명중률은 다른 듯 했다. 이든은 누워있었다. 머릿속에서. 뒤돌아 나가는 크루거의 주먹에 입술에서 터진 피가 묻어 흥건하게 젖어있는 것을 크루거의 얼굴 위에 겹쳐서 바라보면서 애써 짐작하는 방향대로 얼굴을 피하기는 했지만 결국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한 대라도 더 때리는 놈이 이긴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가 폭력을 멈추기 전까지 성질 나쁜 우아한 뉴욕 놈답게 팔을 뻗었다.

 
  텍사스의 승리를 알리는 해설자의 흥분 섞인 목소리가 가시기 무섭게 남자는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내리치던 주먹을 거뒀다. 얼굴에 묘한 흥분이 어려있었다. 리차드 포드는 헬맷을 집어던지면서 뭐라고 욕을 하고 있었으나 카메라는 리차드를 짧게 비추고는 다시 승리로 흥분한 텍사스의 관중들을 비췄다. 빌어먹을 텍사스 놈들. 남자는 한참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몸무게에 짓눌려있던 이든도 곧 주변의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 소매로 입술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몸을 고스란히 감싸고있던 흰 터틀넥 티셔츠의 소매에 짓무른 입술에서 흐른 검붉은 피가 지저분하게 묻었다. 이든은 바를 짚고 기대어 서서 컵 안에 남은 보드카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동안 목 안쪽이 쓰리게 아파와 이든은 미간을 잔뜩 지푸린 채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컵을 내려놓았다. 턱. 마르고 건조한 소리가 펍 안에 울렸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빌어먹을 텍사스!”

 
   악에 받친 관중처럼 시야에서 사라진 남자의 뒷통수에 내지르고는 오늘의 스코어가 지나가는 화면을 짙은 색 눈을 홉뜨며 지켜보았다. 이든은 주머니를 뒤져 꾸깃꾸깃하게 구겨진 담배곽을 찾아내 서둘러 입에 물었다. 손은 술이 아니라 마약을 한 사람처럼 덜덜 떨리면서 담배를 꺼냈고, 그 때 마다 몇번이나 얇은 개비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겨우 입에 담배를 물고 한모금 빨아들인 뒤에야 이든은 안도한 사람처럼 숨을 내뱉었다. 담배연기가 터진 입안을 쓸어내고 지나갔다.

 
 젠장할 뉴욕. 텍사스 정도는 이겨줘도 좋았다. 특히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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